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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17편 (17/45)

2026-09-24 08:59:34 조회 12
'후후, 왔군.' 내심 쾌재를 부르며 여천후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나나의 아름다운 자태를 놈들에게 보여 줄 수야 없지.' 여천후가 숨을 죽이고 잠든 체하는 찰나였다. 소리도 없이 창문이 반쯤 열려지더니 핏빛 안개 같은 것이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미혼혈초연(迷魂血草煙)이로군. 사람의 이지를 망각시키고, 혈십자교의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악랄한 미혼혈초에 미혼분(迷魂粉)을 섞은 최음연기지만, 나에게는 별무소용이지.' 실눈을 뜨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던 여천후는 가소로운 듯 중얼거리며 손을 움직였다. 자신은 괜찮으나 나나는 그렇지 못하기에 여천후는 기환대환상술을 끌어올렸다. "놈의 무공이 아무리 높아도 미혼혈초연을 한 모금만 마시면 끝장이지." "자, 빨리 끌고 갑시다." "이제 본교의 천년부활은 이루어진다." 득의에 찬 괴소를 흘리며 창문을 넘어 온 흑포인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여천후를 재빨리 들쳐 업었다. "가자!" 신호와 함께 흑포인들은 실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여천후는 납치(?)를 당한 것이다. "천후, 흐응……." 나나는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척였다. 만일 이 광경을 흑포인들이 보았다면 기절초풍하고 말았을 것이다. 미혼혈초연이란 최음연기의 일종으로, 혈십자교에서 조성한 독지(毒池)에서 자생하는 미혼혈초라는 독초(毒草)에 미혼분을 섞어 만든 비전지약(秘傳之藥)이었다. 일단 이것을 쐬기만 하면 실혼인(失魂人)과도 같이 이지를 상실하고 만다. 독자적인 행동은커녕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잠꼬대를 했다. 그것은 미혼혈초연이 효력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싸늘한 강풍이 매섭게 대지를 잡아뜯고, 사방은 강풍에 휘말린 먼지로 뒤덮였다. 이윽고 강풍이 잦아들며 경관이 드러났다. 폐허(廢墟)였다. 서까래와 석상(石像), 돌기둥(石柱), 기와 조각들이 산산이 부수어진 채 수만 평의 대지를 덮고 있었다. 융성기에는 엄청난 영화를 누린 듯한 성터였다. 그러나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 주듯, 지금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수백 년간 인간의 손길을 거부한 듯 황량하기만 했다. 편월의 잔광이 폐허가 된 신전터를 비추는 사이로 조각조각난 편액이 드러났다. 빛 바랜 핏빛의 글자도 띄엄띄엄 눈에 보였다. <혈(血)… 십(十)… 자(字)… 교(敎).> 조각조각 부숴졌지만 분명히 그 네 글자가 보이고 있었다. 이곳은 바로 천 년 전에 멸망된 것으로 알려진 혈십자교의 신전이었다. 버려진 땅이 되어 귀기스러움만이 팽배해 있는 저주(詛呪)의 대지로 바뀐 지 어언 천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동안 인적이 끊겨 죽음의 유계(幽界)로 바뀌면서 더욱 사람들의 발걸음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일진의 파공음과 아울러 열두 개의 흑영이 장내에 나타나고 있었다. 바로 여천후를 납치한 흑의복면인들이었다. 그 중 일령(一靈)이라 칭한 인물은 지체 없이 신전 중앙으로 걸어갔다. 허물어진 본전 건물의 중앙엔 목이 날아간 나녀상(裸女像)이 요사스런 자태로 서 있었다. 진짜 여인과 흡사한 크기에, 섬뜩한 피칠을 한 듯 붉은 몸을 지닌 머리 없는 혈나녀상은 두 팔을 활짝 펼친 채 다리는 하나로 모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것은 얼핏 본다면 피의 십자가(血十字架)가 서 있는 형상이었다. 일령은 주저 없이 나녀상의 가슴에 두 손을 얹었다. 한 손에 꽉 차오르는 유방을 터뜨려 버릴 듯이 동시에 움켜쥔 것이다. 그렇게 일 다경 정도의 시각이 흐르자, 혈나녀상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펼쳐져 있던 양팔이 머리 없는 허공으로 올라가 모아지고 있지 않은가. 끼이익-! 뒤이어 오므라져 있던 두 다리가 쫙 펴지며 거의 일자(一字)가 되었다. 일령이란 인물은 손에 대고 있던 혈나녀상의 유방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혈나녀상의 위치가 완전히 거꾸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사타구니를 쫙 벌린 것이 위로, 두 팔을 모은 것은 아래로 가면서 십자가가 거꾸로 뒤집힌 모습이 되었다. 혈십자가(血十字架)였던 것이다. 그러자 폐허의 신전 일각에서 둔중한 쇳소리가 나면서 검은 암동(暗洞)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사람 두 명이 나란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암동은 구천지옥(九天地獄)의 아수라계(阿修羅界)의 입구처럼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그 사이로 일령을 비롯한 열두 명의 복면인들이 빨려들듯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실눈을 뜬 여천후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음을……. 이윽고 흑의복면인들이 암동으로 사라지자, 언제 통로가 있었냐 싶게 신전은 다시금 원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정적과 고요가 사위를 암울하게 감쌌다. 혈십자교의 부활은 이미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암흑 속에 닫혀 있는 기나긴 암동이었다. 이윽고 십이 인의 흑포목면인들과 여천후는 암동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한데, 이곳이 진정 인간이 살아 숨을 쉬는 세계란 말인가? 끔찍했다. 십팔층 아수라지옥계(阿修羅地獄界)도 이보다 끔찍하지는 못하리라. 수천 장(丈)에 달하는 지하 광장… 아니, 동굴(洞窟)이었다. 거대한 동굴 속에 개미 떼같이 얽혀 있는 인간군(人間群)들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을 그려 내고 있었다.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뼈에 가죽만 입혀 놓은 듯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흙더미를 나르는 그들의 표정에는 공포의 기색이 역력했다. "아악!" "자, 잘못했어요. 열심히 팔께요." "이놈들이 꾀를 부려?" 촤아악-! 오들오들 떨며 애원함에도 불구하고 시뻘건 채찍이 날아 살가죽을 휘어감았다. 원래 채찍은 쇠줄을 꼬아 만든 것이었으나, 피에 절어 혈편(血鞭)으로 변해 있을 지경이었다. 이미 죽은 듯 사방에 널부러져 있는 시신들에게서는 코를 찌르는 악취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우욱, 저럴 수가!' 일령의 어깨에 들쳐진 여천후는 내심 경악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아울러, 그것은 곧 화염 같은 분노로 뒤바뀌었다. '이놈들을 모조리 죽이리라!' 최초로 여천후는 엄청난 살심(殺心)을 품었다. 오백여 명에 달하는 혈의인들의 손에는 이 장에 달하는 핏빛 채찍이 쥐어져 있었고, 그것들은 독사(毒蛇)같이 날아가 여리디여린 소년소녀들의 몸을 휘감고 피를 빨아 마셨다. "빨리 파라! 아수라성전(阿修羅聖殿)을 복구해야 본교의 천년부활이 이루어진다!" 악귀같이 몰아붙이는 혈의인들의 앞에서 피골이 상접한 소년소녀들은 개미 떼처럼 꾸물거리며 땅 속을 파고 날랐다. 여천후는 그 악랄함에 치를 떨며 핏발을 세웠으나, 곧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아직은 안 된다. 참자! 참아라!' 피가 배이도록 입술을 악물었다. '혈십자교! 지상에서 씨를 말리리라!' 혈십자교에 대해 세상의 온갖 저주를 퍼붓고 있는 여천후의 내심도 모른 채 흑의인들은 묵묵히 광장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파묻혔다. 음산한 귀기스러움이 물씬 배여 나오는 귀옥(鬼屋)이었다. 흡사 거대한 피를 흘리는 해골(骸骨)을 세워 놓은 듯한 형상을 보이고 있는 섬뜩한 곳이었는데, 퀭하니 창문처럼 뚫린 사이로 <해골혈옥(骸骨血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 앞으로 다가서는 일단의 흑의인들이 있었다. 그들이 해골혈옥이라 이름 붙인 귀옥 앞으로 다가서자, 동부 안에서 쇠를 갉는 듯한 탁음이 흘러나왔다. "멈춰라! 무슨 일이냐?" 일령이라 불리던 흑포인이 앞으로 나서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수라흑마전(修羅黑魔殿) 휘하 흑천십이령(黑天十二靈)이 십자화령인이 될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십자화령인이 될 아이라고? 들어오라." 격동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형중의 압력이 사라지자, 일령은 여천후를 안고 천천히 해골혈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꺼질 듯이 흔들리는 유등(油燈)은 흡사 나찰(羅刹)의 귀기스런 춤사위를 보는 듯했다. 귀등(鬼燈)이 흔들거리는 사이로 장발괴인(長髮怪人)의 모습이 보였다. 시뻘건 혈포에 싸여 바닥까지 길게 핏빛의 머리카락(血髮)을 늘어뜨린 혈포괴인이 자리해 있었다. 마주보는 사람의 영혼을 아수라지옥으로 떨어뜨릴 듯한 혈광(血光)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흑천십이령 중 일령은 두 눈에 가득 공포와 전율을 담고 주춤주춤 다가섰다. 지극히 장발괴인을 두려워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삼가 혈나찰(血羅刹)께 인사드립니다." 일령의 목소리는 인간이 공포에 질렸을 때의 상황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혈나찰이라는 이 혈포괴인은 무형중에도 사람의 영혼을 잡아 흔드는 기묘한 귀기(鬼氣)를 뿜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놈이란 말이지?" 그의 쇠 갉는 탁음과 함께 머리카락이 좌우로 갈라져 얼굴이 드러났다. 의복과 머리카락과는 지극히 대조적인, 하얗다 못해 밀납인형처럼 창백하게 탈색된 하얀 얼굴이 드러나고 있었다. 나이가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인(女人)이었다. 치켜뜬 눈에는 흰자위만 있을 뿐, 검은 동공이 보이지 않는 백안(白眼)이 희번뜩이자 기묘하게도 혈광(血光)이 일렁였다. 피를 빠는 나찰(羅刹)을 보는 듯, 섬뜩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의 이름은 혈나찰이었다. 혈나찰의 머리카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흡사 수천, 수만 마리의 실뱀(絲蛇)들이 한꺼번에 기어오르는 듯 혈나찰의 핏빛 머리카락이 급속도로 바닥을 따라 퍼져 가며 일령에게로 뻗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으, 혈라흡혈수발공(血羅吸血首髮功)! 저것에 휘말리면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빠져 나가 죽는다!' 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일령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스물스물 기어오는 핏빛의 실뱀들은 실상 생명을 지닌 것과도 같았다. 움직이는 물체가 십 장 안에 있으면 빛살처럼 날아와 온몸을 휘어감는다. 그 결과는 체내의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린 후, 썩은 고목(枯木)처럼 말라 비틀어져 죽는 것뿐이었다. 일명(一名) 악마의 머리카락이라 불리는 혈기공(血奇功)의 결정체. 일령의 몸 주위를 감싸던 혈발(血髮)은 피의 파도처럼 밀려와 일령의 가슴에 안겨 있던 여천후의 신형을 휘감아 올렸다. 그리고는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이제 네 임무는 끝났다. 그만 가 보거라." 일령은 지옥에서 풀려 나온 사람처럼 희색을 발하며 황급히 신형을 날렸다. "그럼 소인은 이만……." 인사말은 이미 십 장 밖에서 들려 오고 있었다. '저 여자는 뭐야? 나찰같이 생겨 가지고는…….' 일령의 뜻하지 않은 행동에 여천후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다가 여천후는 흠칫했다. 온기라곤 조금도 없는 차디찬 냉혈인간의 손길이 자신의 온몸을 더듬고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혈나찰은 여천후의 전신을 주무르다가 점점 경악감에 빠져 들었다. "천골(天骨)이야. 게다가 인간한계를 넘는 지옥의 수련을 거쳐 철인금강신(鐵人金剛身)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벌써 오 갑자에 달하는 내공을 지니고 있다니! 이것은……?" 연신 탄성을 발하던 혈나찰은 혈광을 일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 수 없는 거대한 초강의 잠재력이 여천후의 체내에 잠복해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것은 여천후조차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 그의 부친과 금황칠대국로가 자신들의 내공 중 일 할씩을 소모시키고, 수백 종의 각종 영약(靈藥)을 배합시켜 정령(精靈)만을 모아 복용시켜 벌모세수대법을 시전하여 얻어진 신비의 힘이었으니, 그것은 여천후로서도 알 수 없는 천력(天力)이었다. 그 말은 가루라성존의 항마성령광(降魔聖靈光)이 없었다 해도 혈십자교는 여천후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할 수 없었으리라는 뜻이었다. 대지(大地)와 대해(大海)가 불순물을 정화하듯, 인간의 체내에도 정화(淨化)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정화능력의 한도를 넘으면 인간의 몸(人體)은 망가지고 만다. 그렇지만 여천후의 몸은 신비하게도 체내로 무슨 이물질이든 들어와도 전혀 해를 끼치지 못했다. 여천후 자신도 모르는 이 신비의 잠재력이 폭발하는 날, 천하에 다시 없을 절대무신(絶代武神)이 탄생할 것이다. "신비한 놈이로군." 의문을 풀지 못한 혈나찰은 낯빛을 일그러뜨렸으나, 곧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대의 십자화령인 중 최강이 될 놈이다. 그와 아울러 본교는 더욱더 강해질 것이고." '원, 귀신 나부랑이같이 생긴 할멈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고 있네. 그래 망상은 자유니까.' 여천후는 내심 실소를 터뜨렸다. 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혈나찰은 여천후를 질질 끌며 신형을 옮겼다. "십자화령인만 완성되면 천년제국놈들도 두렵지 않다. 놈들이 십자화령인을 만들어 바꾸자고 수라혈수갑을 미끼로 쓰고 있지만, 수라혈수갑마저도 취하리라." 혈나찰은 머리카락으로 여천후의 몸을 누에고치처럼 말아 질질 끌며 걸어갔다. 그 순간 여천후는 형언할 수 없는 경악 속에 빠져 있었다. '천년제국? 그렇군, 수라혈수갑이 없으면 혈십자교는 유명무실해진다. 그것을 천년제국이 이용하고 있군. 이 나찰녀도 딴 꿍꿍이속이 있나 본데?' 여천후는 내심으로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천년제국! 구주종횡가와 천병신기가 등 육합수호천황가의 분열을 틈타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대제국의 마지막 후예들이 결성한 신비세력이 바로 천년제국이었다. 그들의 힘이 변황(邊荒)을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 제목: 풍운무림 제2권 (전3권) 지은이: 사후명 - 차례 - 제8장 혈십자교(血十字敎)의 공포(恐怖) 제9장 지옥(地獄)의 축제(祝祭) 제10장 중원무림(中原武林)의 신화(神話) 취옥성(翠玉城) 제11장 사상천비계(四象天秘界)의 설화(說話) 제12장 천고비급(千古秘及)이 황금(黃金) 일 냥(兩)? 제13장 원세무림(元世武林)의 상고기인(上古奇人) 제14장 백학청송림(白鶴靑松林) 제15장 만상비천가(萬象秘天家) 제16장 죽음의 관문(關門) 제17장 공포(恐怖)의 염시(艶屍) 제8장 혈십자교(血十字敎)의 공포(恐怖) 끼이익-! 검은 묵빛의 철문이 둔중한 굉음을 발하며 열렸다. 석실의 내부에는 아무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으며, 우중충한 흙바닥 위로 유리 같은 금강석이 사방을 차단하고 있었다. "천 년 전에 파묻혔던 아수라십자혈성전(阿修羅十字血聖殿)이 복구되면 너는 위대한 혈십자교의 수호마령(守護魔靈)이 되리라. 얌전히 있거라." 여천후의 신형은 짐짝처럼 흙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우욱!' 여천후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입 안으로 신음을 삼켰다. 가벼운 손동작에 불과했으나, 기실 혈나찰이 대단찮게 던진 일 수에는 여천후의 내장이 뒤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힘이 내재되어 있었다. 묵빛 철문이 다시금 내려오고, 이내 석실에는 짙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갔군." 나무같이 뻣뻣하게 쓰러져 있던 여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천년제국이 수라혈수갑을 미끼로 십자화령인을 원한단 말이지? 연전에 나와 려화누님과 나나 등을 납치하여 강시로 만들려던 것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혈십자교를 움직였군." 여천후는 쓰디쓴 고소를 머금었다. "그 놈들은 어찌 나를 강시로 만들지 못해서 안달이지?"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리던 여천후의 눈가로 문득 의혹의 빛이 어렸다. 이어 그는 재빨리 신형을 날려 좌측의 벽으로 다가갔다. "……?" 여천후는 잠시 귀를 기울이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벽 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웬 여자가?" 그렇다. 벽의 저편에서 들려 오는 것은 바로 여인이 흐느끼며 우는 소리였다. "부황께선 벽라(碧羅)가 악마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아실까?" "벽라?" 조용히 여인의 흐느낌을 경청하던 여천후의 두 눈에 기광이 스쳤다. "할아버지의 손자며느리가 여기 있었군." 여천후의 할아버지라면 옥황노야 사파륭일 테고, 사파륭에게 손자라면 여천후밖엔 없다. 결국 여천후 자신의 아내를 일컫는 말인데……. 벽라공주(碧羅公主). 푸르름의 요정(妖精)이라 불리우는 파사국 제일의 미녀가 바로 그녀였다. 파아란 창궁(蒼穹) 같은 푸른 벽발(碧髮)에, 창해(蒼海)의 푸르름을 두 눈에 담고 있는 벽안(碧眼)은 그대로 신비의 요정을 보는 듯했다. 아울러, 그녀의 신분은 파사국에서 가장 위대한 혈통을 잇고 있었다. 파사국왕의 장중보옥인 벽라공주를 여천후는 아예 자신의 것인 양 거리낌없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여천후의 뜻대로 될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여천후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었다. "자, 그럼 천후의 아내를 보러 갈까?" 장난스레 미소를 머금으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고금최강의 기환술인 기환대환상술의 분심이체술 중 후반부 환상투명술(幻想透明術)이라면 이까짓 벽쯤이야.' 이럴 수가 있을까? 가부좌를 틀고 있는 여천후의 신형이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똑같은 두 명의 여천후가 생겨난 것이다. 좌측의 여천후가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내가 봐도 정말 신기한데? 나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니!" 자신도 감탄하고 있었다. 환상투명술! 기환술의 극치라 말할 수 있는 환영술(幻影術)이었다. 기(氣)로써 자신과 똑같은 환영을 만들고, 시술자는 천하의 무엇이라도 마음대로 통과할 수 있는 기환술의 극치가 바로 환상투명술이었다. 환영(幻影)은 시술자와 조금도 다름없다. 피부색은 물론, 몸에서 풍기는 기도, 심장 박동수와 체온마저도 똑같이 갖추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만 않으면 전혀 발각될 염려가 없는 신비의 환술을 여천후는 펼친 것이었다. 여천후의 신형은 그대로 벽 속으로 파고들었다. 기가 막힐 일이건만 정작 여천후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어맛! 귀, 귀신!" 혼단백절(魂斷魄絶)! 여인은 까무라칠 듯이 놀라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 달간을 긴장해 있어 기(氣)가 허(虛)해질 대로 허해 있는데, 느닷없이 벽(壁) 속에서 인간이 튀어 나오니 놀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한창 아내(?)를 보러 기꺼운 마음으로 들어오던 여천후의 얼굴이 묘하게 이지러졌다. "귀신?" 여천후는 느닷없이 호통을 쳤다. "우라질! 아니, 나처럼 잘생긴 귀신이 어디 있냐?" 여인은 넋을 잃고 말았다. "……!" 십오륙 세쯤 됐을까? 일신에는 은은한 푸르름이 감도는 벽라금의(碧羅錦衣)를 걸친 채, 두 개의 벽안에서 흘러나오는 고아한 느낌이 가히 한 마리 벽봉황(碧鳳凰) 같은 소녀였다. 백설같이 희디흰 피부에, 약간은 겁먹은 듯한 동공에는 신비로운 파랑(波浪)이 일고 있었다. 그녀의 눈썹은 여타의 사람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녀는 푸른빛이 감도는 기이한 눈썹(碧眉)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그녀의 전신에서 흐르는 고결함은 가히 마주보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이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던지는 푸르름의 요정은 바로 파사국의 제일미녀라 일컬어지는 벽라공주였다. 멍하니 여천후를 주시하고 있는 그녀의 자태에서는 말할 수 없는 염태가 엿보였다. 여천후는 빙긋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손자며느리감으로 그만인데.' 몽상도 이만하면 수준급이라 할 수 있다. "쯧! 천후의 내자될 여자가 저리 겁이 많아서야 어떡한다?" 여천후는 자못 심각하게 혀를 찼다. 급기야 벽라공주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킥!" '이제야 긴장이 풀린 모양이군, 몸이 굳었을 땐 웃음이 명약이지.' 여천후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쩜, 사내가 저리도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벽라공주는 뜻하지 않은 아름다운 불청객에 넋을 잃고 말았다. '어머, 내가 무슨 생각을!' 황급히 실태를 깨닫고 벽라공주는 정신을 추스렸다. 이어, 벽라공주는 푸른 청보석 같은 벽안을 굴리며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혈십자교의 제자는 아닌 것 같고." "나는 천후라고 해." 공주고 뭐고 간에 거침없이 반말을 했다. "천후! 당신이 황금충 여천후?" 벽라공주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황금충 여천후라는 이름을 모르는 파사국인은 단연코 한 사람도 없었다. "당신이 어떻게?" "납치당했지." 남의 얘기를 하듯, 여천후는 싱긋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벽라공주는 어이가 없었다. '납치당한 사람이 저리 태평하다니.' 그녀의 내심이야 어떻든 여천후는 털썩 주저앉으며 자못 진지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공주, 나와 거래(去來)를 하지 않겠소?" 이번에는 반존대였다. "거래라뇨?" "음, 공주를 구해 주는 대가 말이오. 아시다시피 나는 장사꾼이니, 거저 구해 주는 것은 손해가 아니오?" 여천후의 심각한 말에 벽라공주는 기가 막힐 뿐이었다. '납치당한 사람이 나를 구해 준다고?' 마음 속으로는 실로 어이가 없었지만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대가는 얼마나 드리면 되죠?" 약간은 쌀쌀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백마(白馬)를 탄 기사(騎士)가 등장했다고 황홀해 있었을 텐데…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으리라. 다음의 여천후의 말에 벽라공주는 아예 기가 꽉 막혀 버리고 말았다. "흠, 공주의 고귀한 몸을 하찮은 황금으로 계산할 수는 없고… 아예 그 탱탱한 몸을 내게 주시오." 그 다음 말은 벼락이 되어 벽라공주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어디 나 같은 신랑감 구하기가 쉽겠소?" 여천후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이 사람은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