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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16편 (16/45)

2026-09-24 08:59:34 조회 14
그렇지만 애석하도다. 모두가 후천무공(後天武功)에 전력하여 살인(殺人)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니, 무(武)의 본체를 떨어뜨림이라. 무릇, 후천무공을 익히면 그 진도에 한계가 있다. 또한 주화입마에 걸리면 평생을 폐인이 되어 지내야 하고, 무공이 폐쇄되면 다시는 쓸 수 없는 평범한 인간이 되고 만다. 본존은 이런 취약점에 착안, 일백 년의 참수 끝에 조그마한 깨달음을 얻었도다. 이를 기환대환상술(奇幻大幻像術)이라 명명하노라.> "이, 이런 것이 존재한단 말인가?" 여천후의 눈에는 더할 수 없는 경악지색이 완연했다. "인간의 모든 것을 대자연과 합일시켜 초인지경에 이를 수 있다니!" 여천후는 연신 경악성을 발하며 점토판을 읽어 내려갔다. 기환대환상술(奇幻大幻像術)! 그것은 통천가공할 기환술(奇幻術)의 극치였다. 기존의 무학체제를 완전히 뒤집어엎는… 아니, 무학이기에 앞서 심(心)이었으며, 술(術)이고, 대자연(大自然)이었다. 분심이체환(分心移體幻)은 기환대환상술의 제일결(第一訣)이었다. 마음을 만 갈래로 나누며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킨다. 몸은 한 곳에 있되, 영혼은 만 리에 있을 수 있는 괴이한 기환술이 바로 분심이체환이었다. 잠종무영천환류(潛踪無影千幻流)는 빛보다 더 빠르고, 바람보다 더 부드러우며, 구름보다도 더 멀리 지상이나 허공이나 지하, 심지어는 물 속에서조차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대자연과 동화되는 경공과 신법이 하나로 뭉쳐진 술법(術法)이었다. 그야말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최강의 기환술이 점토판 하나하나마다 기술되어 있었다. 더구나 이것들은 내공과는 상관없이 대자연의 운행기운을 이용하여 펼칠 수 있었다. 그 일례(一例)로 벽력천뢰안(霹靂天雷眼)이라는 것은 벽력과 뇌전의 힘을 눈으로 집약, 그 위력을 배가시켜 되살아나는 것이다. 연약한 인간의 신체가 어찌 뇌전(雷電)의 힘을 감당하랴만은 가루라성존은 인간의 몸은 곧 우주와도 같다는 정의하에 출발하였던 것이다. 음양이기류(陰陽二氣流)와 오행천기(五行天氣)가 인간의 몸에 있고, 만상을 포용할 수 있음을 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신인(神人)이었던 것이다. 급기야 마지막 점토판을 집어 들어 바라보던 여천후는 넋을 잃고 말았다. "세상에!"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가루라성령무(金翅鳥聖靈舞)! 인간의 체내에 잠재되어 있는 선천지기(先天之氣)를 극도로 끌어올려 펼칠 수 있는 힘이었다. 그 힘은 묘하게도 입(口)으로만 펼칠 수 있었다. 내공의 고하를 불문하고 내적심력이 굴강한 인물만이 시전할 수 있는 기괴한 능력인 바, 여기서의 내적심력이란 극고의 지적능력(知的能力)을 말한다. 출산 직후(出産直後), 탈태환골(脫胎換骨)되고 임독이맥이 막히지 않아 천혜를 지닌 자만이 익힐 수 있는 전대미문의 선천기공이 그것이었다. 입에서 내뿜어지는 굉렬한 가루라의 춤은 상대의 영혼을 바스러뜨린다. "으음, 고금십대무황(古今十大武皇)에 고금제일환(古今第一幻)을 집어넣어야 하겠군. 이 선천기공(先天氣功)에다 후천살공(後天殺功)을 가미시킨다면 가히 고금무적(古今無敵)이겠는걸?" 무심히 중얼거린 여천후의 한 마디 말에는 엄청난 의미가 실려 있었다. 대자연의 힘인 기환대환상술과 후천살공을 합일시킨다면 그 위력은 상상도 불허할 지경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 여천후의 입에서는 잊혀진 신화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고금의 무림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무신(武神)들인 십 인의 절대자를 일컬어 고금십대무황이라 부른다. 고금제일(古今第一)! 이 얼마나 광오하고 가슴 설레는 말인가? 고금제일이라 함은 곧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무적의 경지임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 자리는 군림(君臨)의 자리요, 지배자(支配者)의 자리였으며, 명예(名譽)의 상징이었다. 인간(人間), 특히 무인(武人)된 자라면 몽매에도 오르고 싶어하는 최고봉의 자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삼백여 년 전, 고금제일의 위에 우뚝 솟은 열 개의 거봉(巨峰)들이 출현했다. 그 앞에서 무공의 강함을 논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되, 인간으로 머물 수 없는 인간들이었기에……. 고금제일뢰(古今第一雷) 천뢰도황(天雷刀皇) 뇌강(雷剛)! 그는 음양오행천기(陰陽五行天氣) 중 가장 극강한 힘인 천뢰기(天雷氣)를 한몸에 간직하고 있는 초인(超人)이었다. 하늘에서 작렬하는 벽력뢰기(霹靂雷氣)를 몸 안으로 받아들여 폭발시키는 천뢰파천도결(天雷破天刀訣)은 빠름과 강력함을 겸비한 최강의 도법이었다. 고금제일해(古今第一海) 대해왕(大海王) 종리후(鍾里厚)! 그를 일컬어 사람들은 바다의 제왕(帝王)이라 불렀다. 대해(大海)에서 그는 무적이었다. 고금제일화(古今第一火) 태양천신(太陽天神) 천륭극(天隆克)! 지상최강의 화인(火人)! 그렇게 불리는 그가 다니는 일 리(里) 이내는 항시 불(火)의 지옥이 펼쳐진다.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천년마야(千年魔爺) 단우천(端羽天)! 천마대종사(天魔大宗師)로 군림하던 대마인! 그의 전설은 마도인들에겐 뿌듯한 쾌감을 남겨 주고 있었다. 천하마도인의 대부(代父)로 총칭되는 인물이 그였다. 고금제일력(古今第一力) 철혈패황(鐵血覇皇) 나웅천(羅雄天)! 그는 나이 다섯 살 때, 황소를 때려 죽인 천력(天力)의 소유자였다. 만 근에 달하는 철혈쌍천부(鐵血雙天斧)를 어깨에 메고 천하를 주유하는 인간산맥(人間山脈)의 앞을 가로막을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고금제일지(古今第一智)에 올라 있는 인물은 뜻밖에도 천혜성후(天慧聖后) 위지문혜(慰芝文慧)라는 여인이었다. 이미 나이 열 살에 천하의 석학(碩學)들에게 강론을 폈을 정도로 천혜를 지닌 여인으로, 그녀의 삼촌설(三寸舌)에 천하가 경동하고 그녀의 한 마디에 천하가 안정을 되찾는다. 아울러 그녀는 당시 무림에서 가장 성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미인(美人)이기도 했다. 고금제일수(古今第一手)는 당연한 말이지만 천수나한(千手羅漢) 당천화(唐天華)의 몫이었다. 고금역사상 최고의 장인(匠人)이었으며, 최강의 암기술을 보유했던 인물이 그였다. 천 개의 손에 의해 못 만들 것이 없고, 태양마저도 구멍을 낼 정도로 가공할 암기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또 하나의 재주를 겸하고 있었으니, 의술(醫術)과 독술(毒術)에서도 일가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십일대 문주였던 그로 인해 사천당문은 중원사대세가(中原四大世家) 중 으뜸의 위치를 굳혔다. 고금제일요(古今第一妖)라는 자리에 비구니(比丘尼)가 올라 있는 것은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렇지만 혈염요니(血艶妖尼) 화요(花妖)가 아닌 어떤 여인도 그녀를 대신할 순 없었다. 환희밀공(歡喜蜜功)과 색무(色舞), 요혼술(妖魂術)의 천국이라는 서장무림(西藏武林)에서 여인의 몸으로는 최초로 대라마후(大喇摩后)로 봉해진 여인이 그녀였다. 고금제일살(古今第一殺)이라는 끔찍한 이름을 지닌 인물은 살인지존(殺人至尊) 고독혼(孤獨魂)이었다. 무림사 이래 최강의 살수로 꼽히며, 전무림에 산재되어 있는 살수(殺手)들과 유랑낭인(流浪浪人)들의 신으로 군림한다.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전무했다. 단지 한 가지가 있다면 암흑(暗黑)과 어둠 속에서 그는 황제였다. 그가 펼치는 완벽한 살인술(殺人術)은 그야말로 예술(藝術)의 극치였다. 고금제일빙(古今第一氷)이라는 달갑지 않은 자리엔 북천제후(北天帝侯) 냉천(冷天)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얀 눈과 함께 그는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무적이 되었다. 얼음과 눈을 유달리 사랑했던 사람. 그들 열 명을 일컬어 고금십대무황이라 명명했다. 각 방면에서 고금최강을 구사하던 절대자들은 백 년의 시간을 두고 동시대(同時代)에 출현했으나, 한 날 한 시에 사라져 간 불세출의 기인들이기도 했다. 무림십류파(武林十類派) 무인들에게 무신(武神)으로 신봉되던 고금십대무황이었다. 물론, 한 가지의 의문은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진정한 고금무적제일인(古今無敵第一人)의 자리에 누가 올랐느냐의 당연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최후의 결정은 보류되어야만 했다. 고금십대무황은 한 날 한 시에 동시에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고금십대무황의 진전을 이었다는 후계자도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결국 역사는 열 명의 각 분야에서 최강의 고수자가 있었다는 것만 증명했을 뿐, 진정한 고금제일에 대한 평가는 미지의 백지(白紙)로 남았다. 여하튼 여천후는 가루라성존의 기환술을 고금십대무황과 동석인 고금제일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기환대환상술! 그것은 최고의 기환술이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제 고금제일인이 되기 위한 초석은 마련했구나." 여천후의 말을 가루라성존이 지하에서 듣는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것이다. 어떻게 만들어진 기환대환상술인데, 여천후는 그것을 단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인가 말이다. 여천후는 신형을 돌리다가 문득 가루라성존의 양 손에 쥐여져 있는 것에 눈길을 멈췄다. "……?" 죽은 자가 쓸데없는 물건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는 터.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던 여천후는 그만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훗! 취미가 고상하시군. 벌거벗은 남녀상을 죽어서도 가지고 있다니… 어디?" 여천후는 짓궂은 표정으로 슬쩍 가루라성존의 두 손을 벌렸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목각인형(木刻人形)이었다. 백옥향목(白玉香木)과 흑철강목(黑鐵剛木)이라는 희귀한 나무로 깎아 만든 벌거벗은 남녀 목각인형. "헉!" 일순, 무심히 목각인형을 양 손에 나뉘어 쥐고 있던 여천후가 헛바람을 삼키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휘리리리링-! 어느 사이엔가 하얀 안개(白霧)와 먹물이 풀어지는 듯한 흑무(黑霧)가 여천후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천후는 기이한 힘에 의해 어둠의 일각으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바로 그 때였다. "후인(後人)이여, 놀라지 말라. 본존은 분심이체결(分心移體訣)로서 그대를 만나는 것이니." 어디선가 아스라이 들려 오는 성령음(聖靈音)에 여천후는 경악하고 말았다. '천 년의 세월을 지나고서도 음성을 전하다니!' "그대에게 가루라성령광(金翅鳥天聖靈光)을 전하노니, 이 빛이 퍼질 때 백만 바라문도가 앙복하고, 아수라의 혈귀(血鬼)가 된 혈십자교의 무리들을 일깨우리라." 음성은 사라지고 여천후는 몰아의 지경으로 접어 들어갔다. 가루라성존이 마지막 정령(精靈)을 쏟아 부어 완성시킨 가루라성령광은 지상에서 가장 무서운 파마정기(破魔精氣)였다. 혈십자교가 만들어 내는 아수라혈왕인(阿修羅血王人)들의 극성(剋性)이었으며, 백만의 바라문도들이 무릎을 꿇는 지존의 후광(後光)이기도 했다.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흑무(黑霧)와 백광(白光)은 점점 여천후의 체내로 흡수되어 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기인(奇人)의 탄생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못 가는 곳이 없고, 못하는 것이 없으며, 모르는 것 또한 없는 고금십전초인(古今十全超人)에의 길로 첫발을 내딛은 여천후였다. "오오, 그… 그런 일이?" 바라대성존의 노구는 태풍을 만난 가랑잎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노안(老眼)에는 격동의 빛이 역력했다. 무엇이 사 갑자를 산 이 노인을 이렇게 만드는가? 그것은 바라대성존의 안전에 앉아 소담스레 웃고 있는 미소년 탓이었다. 여천후가 그에게 가루라성존의 이야기를 꺼내고 그 경과를 설명했고, 그에 따라 바라대성존의 안색은 여러 차례 변색되고 있었다. "자, 받으세요. 이것이 기환대환상술입니다." 여천후가 십여 개의 점토판을 넘겨 주자, 바라대성존은 감격 어린 표정으로 한 장 한 장 집어 들었다. 바라문의 역사요, 바라대성람의 뿌리가 아닌가? "이것이 기환대환상술!" 떨린다. 격동과 희열이 노법사의 전신을 강풍에 휩싸인 버들잎처럼 떨리게 만든다. 뿌리 없는 후손이 어디 있는가? 고아인 줄만 알았던 사람이 부모를 상봉하고 뿌리를 찾을 때의 전율을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하물며 영장인 인간임에랴. '노형님이 완전히 넋을 잃었군.' 내심 고소를 머금으면서도 여천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대성존은 서서히 격동을 가라앉혔다. 문득, 그의 눈가로 흐뭇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천후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우,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아우는 우리 바라대성람 최대의 은인일세." "원, 노형님두." 여천후는 멋적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얼마간의 시각이 흘렀을까? 어느덧 검은 땅거미가 사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훈훈하게 정담을 나누던 여천후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어 그는 짐짓 무섭다는 듯 몸을 떨며 익살스레 말했다. "여우 같은 마누라가 무려 오십이나 되는데, 늦게 들어오면 어찌나 등살을 부리는지… 조금 더 늦으면 제가 초주검이 되고 말아요. 빨리 가 봐야겠습니다." 그의 익살에 바라대성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행복에 겨운 소리 말게나. 이 늙은이가 울화통이 치밀어 죽는 걸 보려나?" "쯧쯧, 아… 그래, 그 나이까지 뭘 하셨습니까? 장가나 가실 일이지. 도를 닦는다고 총각으로 늙어요?" 여천후는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득, 바라대성존은 미소를 거두며 정색을 했다. "아우가 천뢰대산의 천륭대황곡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여천후는 그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거늘, 어찌 노형님이?" "혈십자교를 잘 알겠지?" 동문서답을 하는 바라대성존의 말에 머리를 갸웃하던 여천후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루라성존께서 천 년 전에 멸문시킨 사이비교가 아닙니까?" "그들은 멸망하지 않았네." 단정하듯 힘있게 말하는 바라대성존의 노구는 은은한 분노의 떨림마저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지하에 숨어 다시금 부활을 꿈꾸고 있네." "……!" "혈십자교가 다시 부활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네." "두 가지?" "한 사람과, 하나의 물건일세." 바라대성존의 말은 이러했다. 천 년 전, 파사국에는 혈십자교가 성행했다. 피와 죽음을 불(火)로 승화시키며, 피에 젖은 십자가를 거꾸로 세워 사람을 제물로 삼아 불살라 버린다는 아수라를 섬기는 악마의 종교집단 혈십자교는 두 가지로 파사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다름아닌 십자화령인(十字火靈人)과 수라혈수갑(修羅血手匣)이었다. 만장지저(萬丈地底)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옥화정(地獄火精)을 흡취하여 만들어지는 공포의 화인(火人)인 십자화령인은 인성(人性)을 찾아볼 수도 없는 잔인독랄한 화강시(火疆屍)였다. 혈십자교에 거역한 자를 찾아다니며 지옥의 화형식을 집행하는 아수라의 괴뢰(傀儡) 앞엔 그 무엇도 견딜 수 없었다. 일 장 두께의 강철벽이라도 눈 녹듯 녹아 버린다. 도검수화불침(刀劒水火不侵)을 이룬, 인력으로 도저히 깰 수 없는 공포의 마물인 십자화령인은 지옥의 사형집행인이었다. 수라혈수갑은 아수라의 손(手)이었다. 십자화령인을 부릴 수 있는 마력이 있고, 아울러 혈십자교의 지존령부이기도 하다. 가공할 화기를 품고 있어, 화공을 익힌 자가 수라혈수갑을 착용하고 화공을 펼친다면 방원 백 장 이내를 지옥마화의 겁화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마병기(魔兵器)였다. 그것이 혈십자교의 전부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중 십자화령인은 바라대성람의 조사 가루라성존의 손에 박살나 버렸고, 아울러 수라혈수갑도 그 통에 사라지고 말았다. 혈십자교가 부활하기 위해선 십자화령인과 수라혈수갑, 이 두 가지가 필히 갖추어져야만 했다. "십자화령인이 될 수 있는 요건은 꽤 어렵네. 아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지." 바라대성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십자화령인이 탄생하는 데 필요한 여건은 바라대성존의 말대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선 이십 세 이전의 남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내공이 최소 오 갑자가 되어야 하며, 인간으로선 견딜 수 없는 최악절지에서 지옥의 수련을 거친 사람이어야 했다. 나이 이십 세 이전에 오 갑자의 내공을 갖추고, 인간 최후의 인내를 이겨내는 지옥수련을 거친 사람이 있을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고난 오성(悟性)과 지혜(智慧)를 지니고 있어야 하면서, 아울러 무공을 익히는데 최적의 무골(武骨)을 갖추어야만 했다. 바라대성존의 시선이 여천후의 눈을 직시했다. "그들은 아우를 주시하고 있었네. 십자화령인을 만들 수 있는 인물은 세상에 자네밖엔 없을 걸세." "나를 강시로?" 여천후의 입꼬리가 묘하게 치켜 올라갔다, 바라대성존은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헛허, 하지만 걱정 말게나. 본문의 제자가 그것을 미리 알아서 노부에게 알려 주었으니 말이네. 사실은……." 잠시 숨을 돌린 후 바라대성존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바라대성람의 바라성령법력(波羅聖靈法力)을 자네에게 주려 했네. 한데, 노부는 전설을 실험해 보고 싶어서 별실로 자넬 데려간 걸세. 기대대로 자네는 조사이신 가루라성존의 가루라성령광을 얻었잖나? 그것은 혈십자교의 모든 힘을 무력화시키는 효험이 있지." 그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일순 여천후의 가슴 밑바닥에서 뭉클함이 솟구쳐 올랐다.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시다니…….' 잠시 뜨거운 눈길로 바라대성존을 주시하던 여천후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혈십자교에서 나를 노린다면 그것을 역이용하는 것도 괜찮겠지요? 아주 이 기회에 혈십자교를 영원히 멸문시켜야 합니다." "흐음, 자네의 의중(意中)을 듣고 싶군." 바라대성존은 눈빛을 빛내며 여천후를 직시했다. * * * * 황촉불이 환하게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옥황노야 사파륭과 여천후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대좌해 있었다. 깊은 침묵이 앙금처럼 무겁게 깔린다. 문득, 옥황노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 알겠다. 이 기회에 파사국의 안녕을 가져오는 것도 좋겠지. 네 말대로 하자." 옥황노야는 말을 하면서도 못내 염려스런 빛을 없애지 못하고 있었다. 타지에 어린 손자를 홀로 보내는 조부의 시선이랄까? "이미 천 명이 넘는 소년소녀들이 사라졌다. 파사국의 제일미녀라는 벽라공주(碧羅公主)마저도." 그는 말끝을 흐렸다. 여천후는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벽라공주가 그렇게 예쁜가요?" 엉뚱한 질문에 옥황노야는 일순 멍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그는 나직한 어조로 호통을 쳤다. "이놈아! 그래, 오십 명이나 처첩을 두고도 모자란단 말이냐?" "에이, 할아버진… 꽃이야 다다익선(多多益善) 아닙니까?" 여천후는 능청스레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그 녀석, 참!" 옥황노야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 다 좋은데, 장난이 너무 심하단 말이야.' 그런 옥황노야의 내심을 짐작이라도 하듯, 여천후는 신형을 일으켜 세우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후훗, 잘하면 할아버진 파사국의 국왕과 사돈이 될 거예요." "국왕과 사돈?" "하하하! 소자는 이만 그녀에게 가 보겠습니다." 여천후는 대소를 터뜨리며 실내를 빠져 나갔다. 혼자 남은 옥황노야 사파륭의 입가로 씁쓸한 고소가 흘렀다. "녀석!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뒤는 이 할아비가 밀어 줄 테니까." 구주종횡가의 가주이자 천병신기가의 삼분지일을 휘하에 두고 있는 옥황노야 사파륭. 몽고제국의 잔재세력이 이룩한 천년제국을 궤멸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여천후를 초극강고수로 키운 그였다. 미인의 눈썹같이 곱게 휘어진 편월이 잔광을 흩뿌리는데, 어둠 속에 묻혀 있는 희끄무레한 성곽이 보였다. 여천후가 거처하는 천상옥궐이었다. 천상옥궐을 향해 야음을 틈타 날아드는 파공음이 있었다. 열두 명의 섬뜩한 마기가 스물스물 피어 나오는 복면인들이었다. "본교의 천년부활에 꼭 필요한 십자화령인이 될 놈이 이곳에 있다. 반드시 잡아가야 한다!" "걱정마시오, 일령(一靈)." "가자, 위대한 아수라마신(阿修羅魔神)의 종복이 될 놈을 구하러!" 나직이 괴소를 흘리며 십이 인의 흑포복면인들이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천상옥궐의 성벽을 넘어 사라지고 있었다. '오늘이 나를 납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말씀이야.' 여천후는 나나의 탐스런 가슴을 쓸어 내리며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납치를 당하려고 기회를 만들어 주고,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여천후였다. 그런 그의 가슴엔 나나가 안겨 있었다. 처음 보았을땐 십이 세 정도의 어린 소녀였지만, 지금은 완연한 여인의 몸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얼굴엔 아직도 귀여운 소녀의 기색이 남아 있긴 했다. 그렇지만 서역 여인 특유의 풍성한 몸은 가히 터질 듯한 농밀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미 나나는 여천후와 격렬한 밤일을 치룬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직이 숨을 몰아쉬는 가슴의 융기는 탐스럽게 솟아올라 있었는데, 여천후는 지금 그녀의 작은 유실(乳實)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창문의 틈 사이로 들어오는 은은한 월광 속에 상반신을 드러내 놓고 잠에 취해 있는 이국의 여인. 그 희디흰 속살 위로 부어지는 월광(月光)은 자잘이 부서져 나나의 젖가슴을 거대한 황금의 덩어리로 변화시켰다. "쬐끄만게 가슴은 정말 크단 말야." 나나의 도발적으로 솟구친 젖가슴을 손 안 가득히 쥐며 쓰다듬던 여천후는 일순 기광을 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