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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15편 (15/45)

2026-09-24 08:59:34 조회 9
우뚝 솟은 코는 태산같이 장중하고, 굳게 다물린 입에서는 대해(大海)와도 같은 웅장한 기상이 엿보이고 있었다. 십칠 세 가량의 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미청년은 도대체 누구일까? 여천후가 아니고서야 이런 인물이 또 있을 수는 없으리라. 삼 년여의 시공은 그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다. 오 척 오 촌밖에 안 되던 그의 키를 어느덧 칠 척(尺)의 건장한 장부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귀여움을 받던 상황에서 이제는 파사국 제일의 명사가 된 지 오래였다. 지난 삼 년 육 개월에 걸쳐 파사국의 황금들은 수난을 겪었다. 유감없이 발휘되는 천부적인 상술과, 옥황노야 사파륭의 지원으로 이제 그는 파사국의 대부 사파륭보다도 더한 부호가 되었다. 가히 하늘에 천계(天界)가 있고 신(神)이 존재한다면 신과도 장사를 하여 하늘마저 팔아먹을 위인으로, 그는 경외감의 대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라대성람은 서역바라문계의 총본산이었다. 본래 바라문은 천축에서 발원하고 발전되어 왔었다. 그렇지만 바라문은 천축에서 영광을 상실하고 말았다. 천축 중부에 위치한 소왕국(少王國)인 향지국(香志國)의 왕자(王子)였던 석가모니(釋迦牟尼)가 불교(佛敎)을 일으키면서 천축의 모든 나라들이 불교를 장려했다. 결국 바라문은 설 땅을 잃었고, 바라문의 성역은 파사국에 만들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물론, 천축의 모든 사람들이 불교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 왕족이나 귀족들이 불교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반면, 일반의 백성들은 수천 년을 믿어 온 민간신앙인 바라문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어쩌면 백성들의 절대다수는 바라문을 믿고 있는지도 몰랐다. 단지 천축의 왕실에서 바라문을 인정하지 않고 불교를 장려하고 있는 실정 때문에 바라문의 교세는 위축되어 있었고, 불교사원(佛敎寺院)과 승려(僧侶)의 수효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일 뿐이었다. 용(龍)과 봉황(鳳凰)을 비롯한 붉은 기린(赤麒麟)과 흰 코끼리(白象)와 검은 소(黑牛), 은색의 양(銀羊) 등 평범하지 않은 무수한 동물들의 군상(群像)이 바라대성람을 둘러싸고 있는 벽면에 가득 그려져 있었다. 또한, 전각들의 아름드리 기둥엔 터질 듯한 젖가슴과 거대한 상징물을 지닌 남녀(男女)가 야릇하게 어우러져 환희의 군무(群舞)을 추고 있는 조각이 곳곳에 새겨져 있기도 했다. 불가(佛家)에선 그런 것으로 인해 바라문을 인간성을 파괴하는 사이비종교로 인정하고 있지만, 여천후가 보는 관점은 달랐다. "수천 년의 장구한 세월을 백성들이 믿어 온 것만으로도 바라문은 종교의 자격이 충분히 있다. 동물을 우상숭배한다는 나쁜 관점도 있지만, 자연(自然)과의 동화는 오히려 인간을 순화시키기도 하지." 여천후는 대리석 기둥에 새겨진 적나라한 음화(淫畵)와도 같은 남녀교접도(男女交接圖)를 보며 싱긋 웃었다.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은 남녀의 성욕(性慾)이지. 그것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추구하자는 것이 결코 나쁜일은 아니 테지. 오히려 그것을 수치스러워하고, 은밀한 곳에서 변태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이 외면을 받아야 한다. 힘없는 아녀자를 힘으로 강제로 겁탈한다거나, 황금과 권력을 빙자하여 여인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며 옷을 벗게 만드는 것이 저주받아야 할 행위이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원하여 애욕(愛慾) 을 느낄 때 자연스럽게 정사(情事)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解脫)의 경지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는가?" 어쩌면 궤변 같은 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천후의 어조엔 가식 같은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천후는 바라대성람의 산문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또 다른 운명의 길이 그 안에 열려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이곳은 삼 년 전이나 변함없이 웅대하군." 여천후는 좌우를 살피며 느긋하게 바라성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성존께서 왕림하시다니… 어서 오십시오." 바라성전의 심처에서 창노한 음성과 아울러 적의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피처럼 붉은 적의(赤衣)를 걸친 칠순 가량의 노인이었는데, 그의 가슴엔 붉은 혈기린(血麒麟)이 수놓여져 있었다. 여천후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문을 열었다. "기린혈성존(麒麟血聖尊)께서는 여전하시구료." "소성존님의 덕분에 이렇듯……." 기린혈성존이라 불리운 그는 바로 바라대성람의 당대문주인 기린혈성존이었다. 바라문을 이끌어가고 있는 장문지존인 그가 여천후를 깍듯이 존중하고 있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바라문의 장문지존이라면 파사국의 왕일지라도 고개를 숙여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든가. 더욱이 바라문에서 숭앙하는 열두 종류의 영물신상(靈物神象) 중 혈기린(血麒麟)은 가장 존경을 받는 것이었고, 기린혈성존의 가슴에 수놓여진 혈기린은 그가 바라문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라는 것을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린혈성존은 여천후에게 깍듯이 존장에 대한 예우를 다하고 있었다. "사조님께 기별을 드렸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음." 여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성전의 휘황한 회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런 여천후의 행동도 이치에 맞지 않는 안하무인 격인 모습이었다. 기린혈성존의 깍듯한 우대에도 불구하고 여천후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린혈성존에겐 사조(師祖)가 되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라대성존(波羅大聖尊)이었다. 신기루와도 같이 형체가 없는 인물. 살아 있다면 이백 세가 넘는 전전대의 바라대성람 대람주(大覽主)였다. 한데, 그가 아직도 살아 있었단 말인가? 더구나 여천후는 그와 거리감이 없는 듯해 보였다. 창룡선실(蒼龍禪室)이라는 하나의 별실이 바라대성람의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창룡(大蒼龍)은 바라문의 성수(聖靈獸) 중 가장 성스러운 동물이었다. 십이성수(十二聖獸)로서 바라문도들의 서열을 가리고는 있지만, 대창룡은 인간의 몸으로 대신할 수 없는 숭배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불문율(不文律)은 깨어지고 말았다. 바라문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신(神)으로 추앙받는 한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창룡선실은 바라대성람 최대의 성지이자 금역(禁域)이기도 한 곳이었다. 기린혈성존과 십이성수원(十二聖獸院)의 원주 이외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못한다. 기린혈성존은 지극히 공경스런 자세로 조용히 선방 안으로 기별을 보냈다. "대성존님, 소성존님을 모셔 왔습니다." "음, 그만 물러가시게. 아우는 들어오고." 창노하면서도 청량감마저 일으키는 음성이 은은히 울렸다. "예. 그럼……." 기린혈성존은 조용히 일 배를 올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미끄러지듯 선방의 문이 열렸다. "핫핫!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형님!" 여천후는 제집 드나들 듯 대소를 터뜨리며 선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창룡선실의 안은 다섯 평 정도의 아담한 내실(內室)이었다. 그곳은 지극히 소탈하고도 고아했다. "허허, 천룡(天龍)이 되셨구먼." 창노한 음성과 함께 나이를 알 수 없는 노인의 모습이 여천후의 눈에 들어왔다. 능라비단으로 만든 포대 위에 앉아 있는 그의 용모는 가히 신선의 풍모가 아닐 수 없었다. 족히 사 갑자(甲子)는 살았음직한 주름 잡힌 이마의 내 천(川)자만이 유일하게 그가 늙었음을 나타내고 있을 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적발과 그에 걸맞게 구름처럼 뭉실한 적염(赤髥)은 어떤 신비로움과 함께 누구라도 무릎을 꿇고 싶을 경외감(敬畏感)을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바라대성존! 파사국에서 살아 있는 신으로 모시는 인물이었다. 한데, 고손자도 더 될 법한 노릇이거늘 바라대성존과 여천후가 서로 호형호제(呼兄呼弟)하고 있다는 것은 뭔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유는 간단했다. 일 년 전, 여천후는 우연히 오래된 골동품류를 일괄 구입했다. 한데, 골동품을 분류하던 중 한 도자기 안에서 자옥패(紫玉貝) 하나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오백 년 전 바라대성람의 십구대람주(十九代覽主)인 자령천상황(紫靈天象皇)의 유품임과 아울러 바라대성람에서 실전된 자령벽력뢰(紫靈霹靂雷)라는 기공이 적혀 있음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여천후가 바라대성람을 찾게 된 동기였다. 바라대성존은 자령천상황의 직계후손이었고, 그로 인해 여천후의 배분은 턱없이 높아지고 말았다. 까마득한 선조의 신물과 실전된 바라문의 진산절예를 가지고 나타난 여천후를 선조와 동격으로 대우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라대성존이 대례를 올리는 촌극이 벌어질 찰나, 여천후는 극력 만류하며 적당한 타협선을 제시했다. 서로 호형호제하자고……. 바라대성존이 두말 없이 수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여천후는 바라소성존(波羅少聖尊)으로 우대받는 신분이 되었다. 바라대성존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은 아우에게 특별한 것을 보여 주려 하네." "특별한 것이라니요?" "허허, 조금 컸다고 존장의 말에 대꾸하는 것만 배웠나?" 바라대성존의 가벼운 질책에 여천후는 씩,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노형님은 나이가 드시더니, 점점 어린애가 돼 가는 것 같습니다요." "예끼! 이젠 애늙은이 취급을 하다니." "핫하! 그것 보십시오. 그렇게 수양이 부족하시지 않습니까?" "헛허……." 꼬박꼬박 대꾸하는 여천후에게 바라대성존은 실소를 머금으며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가세." "……?" 여천후는 의혹을 머금으며 따라 일어섰다. 바라대성존이 여천후를 이끌고 들어간 곳은 지하(地下)였다. 창룡선실의 후원에 있는 지하의 아흔아홉 계단을 내려가자, 하나의 거대한 청동문(靑銅門)이 앞을 가로막았다. 여천후는 발길을 멈춘 채 멍하니 청동문을 바라보았다. 청동문에는 새(鳥) 한 마리가 곧이라도 튀어 나올 듯 생생하게 양각(陽刻)되어 있었는데, 그 새는 이제껏 여천후가 보지도 들어 보지도 못했던 새였기 때문이었다. 봉황(鳳凰)의 웅휘로움과 독수리(鷹)의 패도적인 날카로움, 백학(白鶴)의 우아함과 제비(燕)의 날렵함 등 하늘을 나는 모든 조류(鳥類)의 장점을 모조리 혼합한 듯한 거대한 새의 문양은 여천후의 가슴에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바라대성존는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동물 중 용(龍)과 봉황(鳳凰)이 최고라 알고 있지만 바라문에선 다르네. 용을 잡아먹고 사는 새가 있음을 아는가?"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금시조(金翅祖)라는 이름을." 여천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우리는 이 새를 가루라라고 한다네. 금시조와 같은 뜻이겠지. 알려지지 않은 바라문 최고의 성수(聖獸)는 바로 용을 잡아먹고 살며, 영원히 죽지 않는 가루라라는 불사영조(不死靈鳥)일세." 바라대성존은 청동문을 열었다. "이런 곳이 바라대성람에 있었다니!" 여천후는 두 눈에 감탄지색을 띤 채 연신 좌우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황홀함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었다. 이곳은 방원 십여 장에 달하는 대전이었다. 한데, 바닥에서부터 천장에 이르기까지 온통 반투명의 보석들이 빽빽하게 덮여 있는 것이 아닌가? 청(靑), 홍(紅), 황(黃), 흑(黑), 백(白)의 존재하는 모든 색(色)이 어디선가 흘러 들어오는 빛무리에 영롱한 광채를 흩뿌리고 있는 빛(光)의 대전이었다. 그 가운데 선 여천후는 마치 천상선계(天上仙界)에 온 착각에 빠져들 정도였다. '황금누란국에서도 이렇게까지는 못했는데…….' 천하 황금의 절반을 가지고 있다는 황금누란국에서 누구보다도 호화로운 생활을 했던 여천후였다. 그렇지만 그런 그조차도 이곳에서는 넋을 잃고 말았다. "저것은……!" 일순간 여천후의 두 눈에 이채가 발해졌다. 사방에서 기이한 각도로 흘러 들어오는 빛무리에 의해 허공에는 수많은 환영이 연출되고 있었다. 따갑게 눈을 어지럽히는 빛무리……. 그런데 여천후의 눈앞에서 아롱거리는 보광은 삼각형으로 어우러져 기이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삼각형은 쐐기(楔形)의 형상으로 되어 있었다. '쐐기 모양의 삼각형이라면?' 여천후의 뇌리로 황금누란국의 서가(書架)에서 보았던 수많은 고서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만어독해진경(萬語讀解眞經)이라는 것이 있었다. 총십팔편으로 이루어진 천하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대경전이었다. 중원의 초서(草書), 행서(行書)를 비롯하여, 진대(秦代)의 전서(篆書)와 그 이전의 갑골문자(甲骨文字) 등을 거리낌없이 읽을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새외삼십육국(塞外三十六國)의 모든 언어(言語)와 문자(文字), 천축의 범어(梵語)와 고대(古代)의 상형문자(象形文字)에 대식국과 파사국의 기원문자인 설형문자(楔形文字)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천하만어통(天下萬語通)이 될 수 있는 천고의 기서(奇書)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연히 여천후는 만어독해진경 십팔편을 일곱 살에 뗀 몸이다. "무려 삼천 년 전의 설형문자가 나타나다니……."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리는 여천후의 목소리에는 경악지색이 역력했다. 은(殷)나라 시대의 갑골문자보다 무려 오백여 년이나 앞선 고문(古文)은 형상화된 문자라기보다는, 그림이나 도형(圖形)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설형문자가 수천 년의 시공을 격(隔)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바라문의 총본산인 바라대성람의 절대금지(絶代禁地)에서……. '허허, 과연 노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도다. 바라대성람 최대의 신비를 한눈에 알아보다니… 노부는 이백 년 동안이나 풀지 못했거늘.' 바라대성존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신형을 일으켰다. 허공에 얽힌 기이한 모형, 설형문자에 정신이 팔려 있는 여천후를 뒤로 하고 그는 조용히 장내를 빠져 나갔다. 여천후는 기억을 짜내며 태고의 문자를 해독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 뜻은 대충 이러한 것이었다. <인연자(因緣者)여, 이 글을 보는 그대는 필히 바라문의 후인일 터! 들어오라! 그대에게 하늘의 뜻을 전할지니…….> 어느덧 여천후의 시선은 이지를 망각한 듯 몽롱해져 있었다. 아울러 그의 신형이 뒤로 돌려지며, 보광 속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온갖 보석으로 휩싸인 벽(壁)이 일순간 쩍 갈라졌다. 이어 빨려들듯 여천후의 신형이 사라지자, 벽은 다시금 정상으로 되돌아갔다. 이 신비에 가득 찬 가루라의 성전(聖殿)에서 운명은 여천후에게 어떤 안배를 베풀어 놓고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신비였다. 걷는다. 여천후의 신형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사위는 칠채보광에 휘황하게 싸여 있고, 대기의 청량한 기운이 폐부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바닥에는 흰 대리석이 끝도 없이 깔려 있다. 여천후는 그 위를 몽유병 환자와도 같이 거닐고 있었다. 얼마의 시각이 흘렀을까? 사라라랑-! 시선을 혼란하게 만들던 칠채무지개가 돌연 쫙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아울러 새파란 벽력광(霹靂光)이 터져 나오며, 여천후의 전신을 강타했다. "으음!" 여천후는 신음성을 흘리며 사르르 두 눈을 떴다. "아니?" 정신을 차린 여천후는 일순, 흠칫하며 경악성을 발했다. '분명 노형님과 같이 그 이상한 방에 있었거늘!' 그가 이렇듯 내심 의아해 하고 있을 때였다. 여천후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천천히 신형을 돌렸다. "……!" 그의 전면에 위치한 포단 위에 한 노인의 신형이 정좌해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몇 살인지 모를 정도로 깊은 주름이 가득 찬 노안(老顔)이었다. 그러나 시신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금라법의(金羅法衣)에 휘감겨 있는 그의 신형에서는 말할 수 없는 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은연중에 사람의 심혼을 누르는 장중한 기도는 가히 신기(神氣)의 풍모였다. "저분이 누구시기에 이런 곳에?" 여천후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걸음을 옮겼다. 능라포단 위에 좌정해 있는 노인의 앞에는 진흙으로 구운 듯한 점토판이 수십 개 놓여져 있었다. 또한 금으로 만든 조그마한 금갑이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선인(仙人)의 유품에 손을 대서." 여천후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점토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유리처럼 매끄러운 한 자 두께의 점토판 위에는 깨알 같은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자화(字畵)의 한 끝이 삼각형을 이루고, 마치 쐐기와도 같이 날카롭게 올려진 기이한 문양이었다. "역시 이것도 설형문자로군." 점토판에 새겨져 있는 문양은 설형문자였다. 역사시대가 도래한 후의 태고의 문자. <후인이여, 노부는 가루라성존(金翅鳥聖尊)이라 한다.> "가루라성존? 이분이?" 여천후는 서두를 해독하자마자 경악성을 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루라성존! 파사국의 인물치고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가루라성존은 바로 천 년 전의 사람이었다. 당시 파사국에는 공포의 대명사인 혈십자교(血十字敎)가 성행하고 있었다. 십오 세 미만의 소년소녀들을 희생의 제물로 바쳐 아수라(阿修羅) 악마의 신을 모시는 극악한 사교(邪敎)가 혈십자교였다. 천 년 전, 핏물에 담그었다 꺼낸 듯한 혈의(血衣)를 걸친 채 거대한 황금(黃金)의 십자가(十字架)를 거꾸로 지고 출현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저 멀리 서천(西天)의 끝에서 가장 위대한 신(神)을 만났고, 그에게서 성령(聖靈)을 부여받아 이 세상을 구할 임무를 받았노라고 했다. 처음엔 모든 사람들이 그를 금령십자신(金靈十字神)이라 칭송하며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따랐다. 거꾸로 지고 온 황금십자가를 금령십자신이라 불리운 신비인은 못사는 사람에게 한 줌씩 떼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자신을 따른다는 증표로 십오 세 미만의 어린 소년소녀들을 교화(敎化)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당연히 모든 추종자들이 그의 말에 따랐다. 그리하여 하나의 거대한 사원(寺院)이 파사국의 성산(聖山)인 아률라봉(亞栗羅峰)에 자리하며, 만민(萬民)의 평등과 원수(怨讐)에의 사랑을 교리로 삼는 신흥종파가 생겨났다. 정문의 앞에 피칠을 한 듯한 핏빛의 십자가(血十字架)가 거꾸로 박혀 있는 것이 꺼림칙하긴 했지만 크게 우려하지는 않았다. 황금에 눈이 어두워 자식을 내팽겨치긴 했지만, 부모(父母)의 마음이 어디 물질과 자식을 저울질할 수 있는가? 몇몇의 부모가 황금 대신에 자식의 반환을 요구했다. 한데, 돌아온 자식들은 모두 자신의 부모형제를 죽이고는 십자가(十字架)를 만들어 거꾸로 세운 다음에, 부모의 시체를 역시 거꾸로 매달아 놓는 패륜을 저지르고는 금령십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혈십자교(血十字敎)의 공포는 삽시간에 파사국 전역을 휩쓸었다. 십오 세 정도의 어린 소년소녀들이 아예 소리소문도 없이 실종되었다가 나타나면 최면(催眠)에라도 걸린 듯 부모를 거꾸로 박힌 혈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때, 한 명의 금라법의를 걸친 중년인이 파사국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로 인하여 혈십자교는 무너져 내렸고, 그는 바라문을 파사국에 전파했다. 그리하여 생겨난 것이 바라대성람이었다. 바라대성람의 시조이자 파사국에 최초로 바라문을 심은 선각자인 가루라성존은 이렇듯 천 년의 안배 속에 잠들고 있었다. 천 년의 시공을 격하고 닿은 천년제일기인(千年第一奇人)과 황금의 용(黃金龍), 여천후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노부 나이 사십에 이르러 바라(波羅)의 천도(天道)를 깨달아 이 땅에 바라의 법을 구했도다. 만백성이 사교 혈십자교의 마수에 신음하여 바라천도에 따라 척멸하노라. 한데, 노부 세수 이백오십에 이르러 임종을 맞을 즈음, 천기를 짚게 되었다. 오호라! 그것은 천년혈란의 도래가 닥쳐 올 징조였다. 천 년 후 혈십자교의 뿌리가 살아남아 파사국에 혈수를 드리우고 천하에 아수라의 추종자들이 창궐하여 만상이 핏물에 잠길지니, 대정혼(大正魂)을 지닌 후인에게 아수라의 마력(魔力)을 계도(啓導)함에 조금의 힘이라도 주고자 하니, 받기 바란다. 가루라성존 유필.> "으음, 천 년 전에 사라졌던 혈십자교가 다시 부활한단 말인가?" 여천후는 안색을 침중하게 굳히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혈십자교! 인간 유사 이래 이보다 더 잔혹한 교법을 가진 사교는 없었다. 인간의 이지를 망각시키고 타협치 않는 무리는 무차별 화형(火刑)시킨다. 겁화(劫火)의 지옥신을 모시며 산 인간의 생혈을 흡취하며, 부모도 죽여 혈십자가에 매다는 피에 미친 혈마귀(血魔鬼)를 만들어 내는 사교집단이 다름아닌 혈십자교였다. 한데, 그들이 다시 천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나 부활한단 말이 아닌가? 여천후는 문득 시선을 돌렸다. "그런 거야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무엇이 있는지 볼까?" 가지런히 쌓여 있는 한 자 두께의 점토판들 중 여천후는 위의 것을 하나 집어 들었다. <본존은 천하를 유람하며 많은 식견을 넓혔다. 가까운 천축은 유가술(瑜迦術)에 능통했고, 서장(西藏)은 양생술(養生術)과 음양지도(陰陽之道), 북방대초원은 불(火)로써 천하제일이요, 북해는 얼음(氷)이라, 섬나라 동영(東瀛)은 인자술(忍者術)과 은신술(隱身術), 무학의 본산이라 자부하는 중원은 역시 모든 것에서 으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