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14편 (14/45)
드러나는 사람의 모습은 바로 여천후가 아닌가? 달라져 있었다. 치기 어린 소년의 동안(童顔)은 사라져 있고, 그 대신 제왕의 압도적인 풍모가 엿보이고 있었다. 더 이상 그는 어린 사자(獅子)가 아니었다. 칠 척에 달하는 당당한 체구에, 잔잔하기만 했던 그의 눈엔 어느덧 벽력과 같은 안광이 작렬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치기와 고집 어린 인상은 지울 수 없는 듯 태양처럼 해맑게 웃는 모습이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삼 년의 세월이 지난 것이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는가?" 조용히 뇌까리며 여천후는 신형을 돌렸다. 장중한 발 소리가 울리며 그의 신형이 계곡의 안쪽에 자리한 동굴(洞窟) 안으로 사라져 갔다. 오백여 평(坪)에 달하는 지하대전(地下大殿)이었다. 편액엔 <천병밀전(天兵密殿)>이라는 패도가 흐르는 웅휘한 필체로 네 글자가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새겨져 있었다. 여천후는 천병밀전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천병대(天兵臺)라 지칭된 삼 장 높이의 철대(鐵臺)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위엔 열다섯 명의 고풍스런 복장을 걸친 사람들이 좌정하고 있었다. 극강의 패도(覇道)가 무형중에 폭출되어 나오는 그들은 산사람이 아니라, 오래 전에 죽어 좌화(座化)해 있는 시신들이었다. 죽은 지 최소한 오백 년은 됐음직한 사자(死者)들은 도대체 생전 어떤 인물이었기에 죽어서도 이런 기운를 내뿜을 수 있단 말인가? "……." 여천후는 철대 위로 올라서서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조용히 여천후의 입술이 열려졌다. "천후는 열다섯 분을 존경하오. 천병삼천종(天兵三天宗)과 십이대신기천왕(十二大神奇天王)." 사자(死者)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천병신기가가 어르신들의 분열로 인해 셋으로 나뉘고 대원제국(大元帝國)이 중원을 휩쓸자, 죄책감으로 변황의 오지에 시신을 묻었으나 그대들의 비원(悲願)은 내가 이어갈 것이오." 여천후의 눈가로 가공할 섬광이 작렬했다. "셋으로 분열된 천병신기가를 천후는 하나로 다시금 통합하겠소. 편히들 영면하시길……." 그의 앞엔 십여 권의 책자가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절대의 무공구결이 담겨 있는 무공비급이었다. 검왕경(劒王經), 천도보(天刀譜), 유성추혼결(流星鎚魂訣), 분수천자해(分水千刺解), 제왕극품예(帝王戟品藝), 창왕무(槍王舞), 혈겸록(血鉗錄) 등등……. 도(刀), 검(劒), 창(槍), 극(戟), 분수자(分水子), 추(鎚), 겸( ), 봉(棒)의 각종 십팔반병기 중 하나의 병기를 잡아 각기 한 방면에서 극치의 병기무도(兵器武道)를 이룬 천병신기가였다. 천 명의 천병무적고수 중 대표적인 무인들은 열다섯 명이었다. 천병삼천종과 십이대신기천왕. 지닌 병기는 최강이고, 그들이 지닌 내공은 오 갑자(甲子)를 상회한다. 그런 그들이 이런 변방의 오지에 시신을 묻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여천후는 쌓여 있는 책자 중 마지막의 두텁기 이를 데 없는 열여섯 권째를 집어 들었다. 혈루참회록(血淚懺悔錄)이란, 혈서(血書)로 쓴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쯧쯧, 명예가 무엇이기에 그리 큰 죄를 지었소?" 여천후는 안됐다는 듯 혀를 차며 책장을 넘겼다. <철혈검종(鐵血劒宗)이 참회하며 적는다.> 철혈검종은 오백 년 전 천병삼천종 중 최강자였던 인물이었다. 검에 관해선 천하제일을 자칭하던 검도(劍道)의 초극고수가 바로 그였다. <우리 천병삼천종의 분열로 십이대신기천왕이 셋으로 갈라지고, 천병신기가도 삼 개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천병신기가의 임무는 구주종횡가를 도와 변황의 세력이 크기 전에 척멸하는 것이었으나, 우리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말아 천죄(天罪)를 지었도다. 본가의 분열이 일어난 틈에 북방대초원이 통일되고, 중원이 유린되고 말았다. 땅을 치며 통곡했으나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인연자(因緣者)에게 죄인들의 무학을 물려 주나니, 노부들의 죄를 조금이라도 씻어 주길 바라노라.> 그 다음부턴 무공구결이 적혀 있었다, 백 년간 천병삼천종과 십이대신기천왕이 고심해서 탄생시킨 패도의 극치를 이룬 패도무공(覇道武功)이었다. <천병신기가의 일천 천병무도자(天兵武道者)들은 천 가지 병기(千兵)에 능통하였다. 우리 십오 인은 그것을 하나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백 년이란 긴 시간이 소모되었으나 우리는 만들었다. 그렇지만 창조한 우리들도 경악하고 말았다. 인간으로선 백 년을 수련해도 익힐 수 없는 초인무학(超人武學)이 탄생된 것이다. 총 삼 단계의 구절을 남기니, 인연자가 알아서 하길 바란다. 죄인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남긴다.> 삼 단계의 초인무학 중 제일단계는 칠채천강공이었다. 일곱 가지의 색(七彩)은 검, 도, 창, 겸, 봉, 척(尺), 비(匕), 의 칠병천공(七兵天功)이 합일된 것이다. 극성으로 펼쳐진다면 방원 오십 장 이내의 그 어떤 것도 박살내어 초토화(焦土化)시킬 수 있다. 제이단계는 천뢰검기(天雷劒氣)였다. 기(氣)로써 검을 만들며, 그 검망(劒網)이 방원 일백 장을 뒤덮으며 폭발한다. 육 갑자(甲子)의 내공과 초기재만이 연마할 수 있는 초극무예이다. 제삼단계는 무형천섬뢰(無形天閃雷)라는 것이다. 빛보다 빠르며 소리도 없었다. 십 리 밖이라 하여도 무형살기(無形殺氣)가 뻗어 나가 죽이고야 마는 의형심극살(意形心極殺)의 경지를 일컫는다. 팔 갑자(甲子)에 달하는 내공력이 있어야만 펼칠 수 있는 초인(超人)의 무학이 바로 그것이었다. "제일단계 칠채천강공은 대성했다. 그러나 나머지는 지금의 내 능력으로 도저히 익힐 수 없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연구해 보자." 임독이맥이 원초적으로 막히지 않아 천 인(人)의 지혜를 지니고, 황금누란국에서 어렸을 때 벌모세수되면서 얻은 막강한 공력을 천륭대황곡의 악천후에 고련시킨 여천후도 일 단계의 성취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초인의 무공을 남긴 천병신기가의 무장(武將)들은 대체 어느 정도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르신네들, 천후는 떠나겠소. 그럼……." 여천후는 한 차례 대례를 올리고 신형을 돌렸다. "우……!" 천륭대황곡이 부르르 몸을 떨 만큼 굉렬한 사자후를 터뜨리며 여천후는 신형을 날렸다. 빛살과도 같이 수직으로 뻗어 오르는 신형에서 펼쳐지는 경공술은 천룡등천비(天龍騰天飛)라는 것으로, 능공허도(凌空虛道)의 경지를 뛰어넘어 단숨에 허공으로 백 장을 치솟을 수 있는 절대경공이었다. 그것은 천오백 년의 긴 동면에 빠져들었던 육합수호천황가가 다시금 날아오르는 등룡(騰龍)의 서곡이었다. 여천후는 알지 못했지만 역사(歷史)의 심술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의 시조(始祖)인 여불위는 진시황과 천년계약(千年契約)을 체결한 육합수호천황가로 인해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뒤에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자신의 황금을 옮겨 누란왕국을 건설했으며, 그 후예들은 아예 전설 속에 자신들의 왕국을 묻어 버려야 했다. 지금 황금누란국의 후예인 여천후가 진시황을 도와 전국칠웅의 전란을 평정시키며 용맹을 떨쳤던 천병신기가의 진전을 이어받았으니, 저 세상의 여불위가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었다. 쿠쿠쿠쿠-! 천뢰대산 전체가 대지진을 만난 듯 굉렬하게 뒤흔들렸다. "우우우!" 칠채강기에 휩싸여 떠오르는 인영 하나가 있었다. 여천후는 결코 인간이 전개할 수 없는 쾌속(快速)으로 순식간에 하나의 점으로 화하고 말았다. 한데, 여천후가 천뢰대산을 벗어난 지 채 일 각이 되기도 전이었다. 일진의 파공음과 아울러 사방(四方)이 핏빛 혈광(血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와 아울러 지극히 음산하고 사이로운 괴소가 흘러나왔다. "삼 년 동안 기다린 보람이 있었군." 혈영괴인(血影怪人) 하나가 핏빛 혈무 속에 신형을 감추고 허공을 아지랑이처럼 부유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십자혈교황(十字血敎皇)께서 말씀하신 십자화령인(十字火靈人)에 적합한 초기재를 발견했다. 이제 천 년의 긴 잠에서 본교가 부활할 때가 되었다. 기다려라, 바라문(波羅門)의 세력을 일시에 척멸하리라!" 부유하는 혈무 속에서 한 쌍의 혈안(血眼)이 피어 올랐다. "십자화령인의 탄생과 아울러 혈십자교(血十字敎)의 천년부활은 이루어진다. 바라대성람(波羅大聖覽)의 땡초들에게 지옥겁화(地獄血火)가 어떠한지를 맛보여 주리라." 혈영괴인은 분노와 회한이 범벅이 된 광소를 터뜨리며 사라져 갔다. 바람에 밀려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 혈영괴인이 자취를 감춘 지 일수유(一須由)가 흐르기도 전에 또다시 괴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돌(石)은 일 장 크기의 지극히 평범한 암석이었다. 그 돌에서 고금에 드문 괴사가 연출되기 시작했다. 사방에는 분명 인기척 하나도 없건만, 수백 근 정도는 됨직한 바윗덩어리가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휘류류류-! 뒤이어 바위에서 새하얀 기류가 구름처럼 뿜어져 나온다. "대성존(大聖尊)의 혜안(慧眼)에는 그저 감복할 뿐이로다." 말소리는 분명 인간의 성대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임에 분명했다. 바위에서 어찌 인간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는 둘째 문제였다. 어느덧 조금 전에는 분명히 존재했던 암석은 사라져 있었고, 그 자리에는 칠순 가량의 노인이 좌정해 있었다. 머리에는 은빛 모자를 눌러 쓰고 백색법의(白色法衣)를 걸친 중후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경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혈십자교가 부활하고 그 시발점은 소성존(少聖尊)에게서 비롯된다 하시더니……." 혈영괴인이 사라져 간 방향을 주시하며 중얼거리던 백의노인은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어쨌든 대성존께 이 사실을 여쭈어야겠군." 흡사 아지랑이가 흩어지듯 몸 전체를 기화(氣化)시키는 환상적인 기환술(奇幻術)을 펼치며 백의노인도 사라져 갔다. 여천후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 혈영괴인은 누구고, 백의노인의 정체는 무엇인가? 또한, 혈십자교의 천년부활이란 의미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여천후의 주위로 심상치 않은 암기류가 흐른다는 사실만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 * * * 사해상진에서 사십팔 명의 미인과, 황금제일화 철려화를 몽땅 쓸어 가지고 온 여천후는 이미 파사국에서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 올 때는 불과 십삼 세의 소년이었건만 이제는 달랐다. 파사국을 비롯하여 서(西)쪽으로는 대식국(大寔國:아라비아), 대불림국(大拂臨國:터어키), 소불림국(少拂臨國:시리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상권(商權)을 모조리 포용해 버렸다. 동(東)쪽으론 천축(天竺)을 비롯하여 토화라국(吐火羅國), 안국(安國), 범인국(汎引國), 신두고라국(新頭敲羅國) 등, 파사국에 인접한 서역의 모든 상권이 당년 십육 세의 미청년에게 귀속되어 버렸던 것이다. 황금충(黃金蟲)! 그야말로 황금의 벌레라는 소리를 능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여천후의 말 한 마디면 서역 전체의 상계(商界)가 뒤흔들릴 정도였다. 삼 년 전부터 세상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던 여천후였다. 그런 중에도 그의 재산은 늘어만 갔다. 천상옥궐(天上玉闕). 백옥(白玉)으로 기둥을 세우고, 벽옥(碧玉)으로 벽돌을 만들어 담을 쌓았다. 취옥(翠玉)으로 기와를 얹었으며, 빙옥(氷玉)으로 바닥을 깔았다. 홍옥(紅玉)으로는 내부를 덮었으며, 황옥(黃玉)은 고작 화장실의 변기를 만드는 데 쓰여졌다. 온통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옥(玉)으로 지어진 궁궐(宮闕)이었다. 천상옥궐은 바로 여천후의 거처였다. 서역상권의 최대 중심지이자, 십만 평에 달하는 대지 위에 수백 개의 고루거각들이 웅장한 위용으로 서 있는 가장 중심부에 세워져 있는 옥(玉)의 궁궐. 축시(丑時)의 사방은 어둠의 장막 속에 갇혀 있었다. 돌연, 한 줄기 파공음과 아울러 야조(夜鳥)처럼 성벽을 타고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뛰어넘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철옹성 같은 경계망 속의 천상옥궐을 귀신 같은 신법으로 유린하는 괴인영은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듯,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황금성전(黃金聖殿)이라는 이름이 붙은 황옥(黃玉)으로 지어진 전각은 천상옥궐 내의 최대심처였다. 철려화를 비롯한 여인들이 기거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출입할 수 있는 남자는 오직 한 명, 여천후뿐이었다. 만일 다른 사내가 잠입하려 한다면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시체가 될 것이다. 혈궁삼살천이라는 지상최강의 살수집단이 철통 같은 방호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편월(片月)의 잔광(殘光)이 비추는 속에 어둠에 싸인 화원이 드러난다. 아름다운 인공호수와 주위에 산발한 기화요초들은 그대로 한 폭의 야경산수화(夜景山水畵)를 그려내고 있었다. 달은 현공에도 떠 있고 호수의 수면에도 비춘다. 또 하나의 달이 있다. 밤하늘의 달보다도, 호수 속에 잠든 월광보다도 더욱 아름다게 떠 있는 달이 있었다. 검은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는 미인의 긴 속눈썹 속에 감춰진 월영(月影)은 그 무엇과도 비견될 수 없으리만큼 아름다웠다. 부서져 버리는 은하의 폭포수 속에 서 있는 월하미인(月下美人)의 앞에선 만화(萬花)가 고개를 숙이고, 대자연도 숨을 멈춘다. 뒤늦게 개화하는 국화(菊花)마냥 이십오 세쯤 되어 보이는 여인의 옥용은 완숙한 미와 아울러 정결스러움이 배여 있었다. 여인은 그대로 한 송이 국화와도 같이 청초하다. 모란왕부의 소공주이자, 북방제일화로 알려진 비운의 여인 철려화였다. 문득, 그녀의 맑은 눈망울에 그리움의 추억이 그려지고 있었다. "천후." 한 줄기 옥음이 새어 나온다. 달은 어느덧 한 인간의 영상을 담고 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사내였다. 약간은 짓궂고 고집스러우며, 그러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여천후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철려화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어린다. 그런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며 한 줄기 시구가 흘러나왔다. 一絃一柱思華年 莊生堯夢迷蝴蝶 望帝春心托杜鵑 滄海月明珠有淚 藍田日瑗玉生姻 此情可待成追憶 只是當時巳茫然 금슬(琴瑟)줄 부질없이 오십 현(絃)이나, 한 줄 한 줄에 지난날이 얽혔습니다. 장주(莊周)는 나비 되어 꿈에 떠돌고, 망제(望帝)의 그리움인 듯 두견새 울음 소리. 달 밝은 창해(滄海)에 빛나는 구슬, 그 구슬이 이 내 눈물입니다. 남전(藍田) 따뜻한 날, 그 눈물 구슬이 한 줄기 연기되어 사라집니다. 님 그리운 이 마음, 지난날 돌아다볼 겨를도 없이, 지난날 그 날 그 날도 그랬습니다. "사랑해요, 천후." 사랑에 빠진 여인의 이름은 철려화였다. 한데, 어둠 일각에서 그녀를 주시하는 한 쌍의 별빛 같은 눈이 있음을 그녀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려화누님, 그대가 나를 그토록 생각해 주다니…….'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환희의 몸서리를 치는 그림자는 처마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장승처럼 서 있는 여천후였다. '나의 여인.' 여천후는 물씬 사랑의 불길이 치솟음을 느끼며 신형을 움직였다. 雲想衣裳花想容 春風拂欖露華濃 若非群玉山頭見 會向瑤臺月下逢 구름은 그대 치마, 모란(牧蘭)은 그대의 얼굴인 듯. 그대 소매, 봄바람 난간을 스치고. 머금은 이슬, 오오, 양귀비(楊貴妃)여! 선녀(仙女) 서왕모(西王母)의 군옥산(群玉山)에나 가야 만나랴? 달밤의 요대(瑤臺)에나 가야 만나랴? 순간, 상념에 젖어 있던 철려화는 화들짝 놀라며 교구를 돌렸다. "누구?" 그녀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치기 어린 미소와 아울러 장부의 강인함을 물씬 풍기는 미청년의 모습이 눈으로 흡입되고 있었다. "천후?" 철려화는 교구를 파르르 떨었다. 여천후는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섰다. "……!" "……!" 격동과 사랑의 전류가 두 사람 사이를 흐른다. 삼 년 전이었다. 초설이 내릴 즈음, 짓궂고 귀여운 미소년은 천상옥궐을 뒤로 하고 사라져 갔다. 이제 삼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미소년은 장부의 기개가 물씬 풍기는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 돌아온 것이다. "려화누님." "천후." 누가 뭐라지도 않았건만 두 사람은 서로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상공… 흡!" 여인은 말을 하지 못했다. 입술이 막혀 있는데, 어찌 말을 할 수 있으랴? '아아, 내 사랑.' 남자의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여린 꽃잎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첫 입맞춤이었다. 철려화는 정신이 아득해져 옴을 느꼈다. 영겁을 떨어지지 않을 듯하던 두 연인(戀人)이었으나, 여천후가 먼저 그녀의 교구를 살짝 밀어 냈다. "……?" 한참 황홀지경을 헤매던 철려화의 시선에 의혹이 어린다. "려화누님의 알몸을 보고 싶은데." 여천후의 투정 어린 말에 철려화의 옥용은 노을처럼 물들어 갔다. "이곳에서 어떻게?" 월하(月下)의 나녀도(裸女圖)를 그리라는 말이었다. "어서! 천후는 보고 싶은데." 여천후의 채근에 철려화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하늘 같은 부군의 명을 어찌 거역하랴. '저분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내가 보여 달라는데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철려화는 천천히 옷고름으로 교수를 가져 갔다. 사르르르……. 매미가 허물을 벗듯, 철려화의 백옥빛 살결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인의 몸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여천후는 넋을 잃고 말았다. 쏟아져 내리는 은빛 폭포수 사이로 마음껏 개화(開花)해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한 떨기 백국화(白菊花)였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여천후였건만 그의 손을 떨게 만들 만큼 철려화의 나신은 폭발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빙기옥골의 피부에 팽팽하게 부풀어오는 가슴의 융기와, 그 위에 수줍게 떨고 있는 붉은 앵두와 끊어질 듯 가는 세류요, 그 아래 풍요롭게 벌어진 둔부가 절로 숨을 죽이게 만든다. 팽팽하게 탄력성이 흐르는 우유빛의 하복부와 그 하복부의 끝에서 시작되는 미끈하게 뻗어 내린 허벅지 사이의 신비림(神秘林)은 부드럽고 소담스레 덮여 있다. 형언할 수 없는 유혹을 담고 있는 여인의 신비는 쏟아지는 황금의 월광(月光) 아래 환상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으음……." 여천후는 절로 침음성을 삼켰다. 혈기왕성한 젊은 사자(獅子)의 아랫배에서 불끈 화염이 치솟는다. "려화누님의 몸은 정말 아름다워." 싱긋 미소를 지으며 여천후는 철려화를 덥석 안았다. "아!" 철려화는 낮게 비음을 토하며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이십오 년간을 굳게 지켜 왔던 여인의 성(城)이 활짝 열어젖혀졌다. 광폭한 해일이 사정없이 처녀림을 헤집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솟아 있는 둔덕이 힘겹게 눌려졌다. "흑! 아파……." 최초로 맞이하는 파과(破果)의 아픔은 이내 사랑에 겨운 희열로 뒤바뀐다. 처음엔 불협화음(不協和音)을 내던 악기(樂器)는 예인(藝人)의 손가락에 다듬어지자, 점점 천상선음(天上仙音)으로 변모한다. 사랑의 소야곡(小夜曲)은 밤하늘을 수놓고, 얼굴을 내밀던 편월은 부끄러운 듯 구름 속으로 머리를 감춘다. 이 밤은 매우 좋은 밤이었다. 제7장 바라문(波羅門)의 신비(神秘) 바라대성람(波羅大聖覽). 파사국 제일의 바라문(波羅門) 총본산(總本山)이었다. 십만 평에 달하는 대지 위에 우뚝 선 대사원엔 웅장하고도 거대한 수백 개의 둥근 지붕을 얹은 전각들이 즐비했다. 그런 수많은 전각들을 한눈 아래 굽어보는, 흰 대리석의 대전각(大殿閣)이 서 있다. 바라성전(波羅聖殿)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 전각은 금박을 입혀 황홀한 금광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위는 쥐죽은 듯이 적막한데… 문득, 미끄러지듯 들어서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금빛 교자를 맨 벽안(碧眼)의 거한 네 명이었다. 웃통을 벗어붙여 울퉁불퉁하고 우람한 근육질을 드러내고 있는 교자꾼들은 조금도 무거워하는 기색도 없이 교자를 사뿐히 바닥에 착지시켰다. "소성존, 다 왔습니다." 지극히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는 사 인(人)이었다. 촤르르르……! 주렴이 거두어진다. 그리고 드러나는 백옥수(白玉手) 하나가 있었다. 인간의 손 하나에서 이렇게 신비감이 흐를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핏줄마저 보일 듯한 희고 맑은 피부에, 한번 보면 영원히 잊지 못할 옥수(玉手)였다. 그 길고 갸름한 손가락의 끝에 달린 다섯 개의 손톱(爪)에는 금칠이라도 한 듯, 황금조(黃金爪)가 반짝이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여인의 손은 아니었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여인의 손도 이보단 못하리라.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떠나 어떤 신비로움마저 일으키고 있는 손이었다. 또한 그 손가락엔 대조적인 검고 흰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백진주(白珍珠)로 엮은 주렴이 완전히 젖혀지고, 금포에 싸인 인영이 내려섰다. 금빛 천룡(金龍)이 등천하는 황금금룡보의(黃金金龍寶衣)는 태양의 빛을 받아 눈이 부실 듯 빛난다. 허리를 조인 요대는 그야말로 온갖 보석으로 치장되어, 뿜어지는 보광(寶光)으로 인해 본체(本體)마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얼굴은 이런 미남자(美男子)가 있을 수 없었다. 쉽게 말해 전설 속에 전해지는 미남들인 송옥(宋玉)이건, 반안(盤顔)이란 위인이건 간에 얼굴을 내밀지 못할 지경일 것이다. 맑은 밤하늘의 은하수(銀河水)가 한 곳에 모인 듯, 광채를 발하고 있는 황금의 눈은 감히 직시하지 못할 정도로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