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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13편 (13/45)

2026-09-24 08:59:34 조회 16
"내가 지옥(地獄)엘 가지 않으면 누가 가리오. 아미타불… 소뇌음사의 마승들과 어울리는 것으로도 성분을 짐작할 수 있지만, 여시주의 행색을 보건대 과히 좋은 신분은 아닌 듯하오. 본파의 뇌옥에서 십 년간 참회한다면 용서해 주겠지만,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인다면 노납의 손이 무정하다고 원망하게 될 것이오." 그것은 최후의 통첩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요화란은 안색이 파래지며 공포에 떨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요화란은 태연자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법존, 제가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여기 왔으리라고 생각하시나요?" 천뢰대법존 역시 안색을 바꾸지 않은 채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짐작하고 있는 바이오. 하지만 여시주에게 구원의 손길이 오기 전에 노납의 살수(殺手)가 먼저 여시주의 심장에 닿을 것이란 생각은 해 보셨는지 모르겠구료." "나를 건드리면 대뢰음사가 멸망당할지도 모르는데도요?" "불의(不義)를 보고서도 위협에 굴복해 지나치는 비겁자가 되느니, 정의(正義)를 위해 이 한 목숨 던져 버리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 노납의 생각이오만……." "……!" 요화란은 입을 다문 채 경이감이 담긴 눈길로 천뢰대법존을 바라보았다. '진정한 대인(大人)이다. 지옥존자 같은 치졸한 소인배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 천축무림의 하늘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요화란은 진정으로 탄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작금의 상황이었다. 천뢰대법존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대뢰음사의 승려들이 전의(戰意)를 불태우며 사방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그림자가 조용히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듯 솟구쳐 오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혈궁삼살천에 속하는 천인살수(千人殺手)들이 대뢰음사 승려들의 외곽을 봉쇄하며 나타난 것이다. 무덤에서 피어 오른 유령(幽靈)과도 같이 혈궁삼살천의 살수들이 나타나자, 장내의 공기는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천뢰대법존의 안목은 확실히 비범했다. 그는 눈앞에 나타난 혈궁삼살천의 살수들을 보면서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혈궁삼살천에 속한 무리들이 한꺼번에 중원을 떠나 천축무림에 들어와 있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요화란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둠의 장막에 숨어 천 년의 무적신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신비의 살수집단인 혈궁삼살천. 이들이 바로 백팔요화를 소리 없이 몰살시킨 장본인들이구나.' 혈궁삼살천! 그 이름은 요화란도 모를 리 없었다. 아울러, 그들이 지닌 전율적인 살수행(殺手行)도 귀가 따갑게 들어 왔던 터였다. 그녀의 수하들인 백팔요화가 죽은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마음 속에선 원망 같은 것이 일지 않고 있었다. '천후의 배후에서 느꼈던 무한한 살기의 정체가 혈궁삼살천이었다면 누구도 천후를 건드리지 못한다.' 요화란의 입가로 잔잔한 미소가 번져 갔다. 여천후를 알기 이전이었다면 당연히 그녀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혈궁삼살천은 그녀를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닌가? 그와는 대조적으로 천뢰대법존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혈궁삼살천과 우리 대리음사와는 아무런 은원관계가 없을 텐데, 가로막고 나서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는 경직된 음성으로 물음을 던졌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 왔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법존. 그 여자는 나, 여천후의 첩(妾)이기 때문이지요." 폐부를 시원하게 해 줄 정도로 청량한 소년의 음성이 들려 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혈궁삼살천의 살수들이 좌우로 갈리지며 길이 나타났다. 그 사이로 거대한 흰색의 사슴(白鹿)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광백록(天光白鹿)의 위에 올라탄 채 다가오는 여천후의 해맑은 모습은 그야말로 먹장구름을 헤치고 비쳐지는 한 줄기 햇살과도 같은 신선함을 던져 주었다. 더욱이 햇살의 역광(逆光)을 받아 온통 황금의 물결 속에 빛나며 다가오는 여천후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이기조차 했다. "오!" 천뢰대법존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황금의 동공은 더더욱 신비롭게 빛나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올리는 손의 끝에 반짝이는 황금의 손톱에서 흐르는 금광(金光)은 또 어떤가? 그런 여천후의 입가에 서린 잔잔한 미소는 천뢰대법존으로 하여금 숙연함마저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미타불… 소시주께선……?" 그의 물음에 여천후는 해맑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여천후라 불러 주십시오, 법존." "그럼 본파로 소뢰음사의 동정을 알려 주시고 막대한 금액을 시주해 주신?" 여천후는 그의 말을 자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얼마 되지 않지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천뢰대법존은 요화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무거운 어조로 물음을 던졌다. "이 여시주와는 어떤 사이시길래, 본파와 대립하고자 하시는 것이오?" "내 쉰한 번째 첩이지요. 볼기를 때려도 지아비인 내가 칠 일이니, 법존께서는 눈감아 주실 수 없으신지……." "오십하고도… 한 번째 첩이라고요?" 천뢰대법존의 눈썹이 치켜올라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성년(成年)이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노납을 놀리시는 게요?" 일순, 그의 음성은 엄해지고 말았다. 천뢰대법존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대뢰음사의 승려들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정작 여천후는 아미를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노친네들은 눈으로 봐야만 믿으니, 원. 평생 속고만 살았나? 이봐, 모두 나와 봐." 그의 말에 우르르 몰려 나오는 여인들 오십 명(名)이 있었다. "세상에… 아미타불……." 천뢰대법존은 기가 막히다 못해 입을 쩍 벌린 채 불호를 되뇌일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오십 명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라, 십만 명에 한 명이 있을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인(美人)들 일색이 아닌가? "모두 내 첩들이외다, 법존. " "믿겠소이다, 소시주." 천뢰대법존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냥 넘겨 드릴 수는 없는 일이외다. 본파를 능멸하고 소뢰음사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여시주를 혈궁삼살천의 위협에 눌려 그냥 풀어 준다는 것은 대뢰음사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니, 오히려 소시주께서 양보해 주셨으면 하외다." 어조는 정중했으나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엿보이는 말이었다. "아저씨들, 누나들을 데리고 할아버지한테 가 있어요." 여천후는 혈궁삼살천의 살수들에게 명령했다. 썰물이 빠지듯 혈궁삼살천의 살수들은 오십 명의 여인들을 에워싸고 사라져 갔다. 물론, 여천후의 안위를 걱정한 여인들이 순순히 말을 듣지는 않았으나 무형(無形)의 강기로 에워싸는 바람에 별반 저항도 하지 못했다. 나나만은 예외였다. "날 건드리면 백령(白靈)이 가만 있지 않을 거야!" 백령구아사는 여주인의 말에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 살기를 뿌렸다. "나나는 놔 둬요." 여천후는 한숨을 쉬며 손을 쓰려는 혈궁삼살천의 살수들을 제지했다. 그러자, 막 물러 나려던 여인들의 사이에서 한 명의 여인이 비쾌하게 솟구쳐 올라 나나의 뒤로 내려섰다. "나도 가지 않겠어요." "려화누님." 철려화의 행동에 여천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철려화는 일류고수를 능가하는 무공을 지닌 무림여인이었기에, 자신만이라도 여천후의 곁에 있으려 하는 것이었다. 장내엔 여천후와 두 명의 여인만이 남았다. "이제 협상을 해 보십시다, 법존." 여천후는 천뢰대법존에게 조용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천뢰대법존은 칼로 자르듯 차가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무인(武人)에게 있어 악과 불의에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그거야 법존의 생각이시고, 인간끼리의 관계에서 거래가 되지 않을 협상이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오만……." 여천후는 잠시 말을 끌면서 천뢰대법존을 직시하다가 이내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한 가지 물어 보겠소이다. 저 가슴 크고 요염한 여자가 대뢰음사의 고승들에게 살수를 휘둘렀소이까?" "그건 아니오." "소뢰음사의 마승들과 놀아나는 것을 보신 적은?" "그건……." "옷을 홀딱 벗은 채 대뢰음사의 고승들을 유혹이라도 했소?" "그렇지는……." "천축무림의 활불(活佛)로 추앙받는 법존께 반말, 혹은 욕설이라도 했소이까?" "아니……." 여천후는 천뢰대법존의 답변을 끝까지 들어 보지도 않고 연이어 물음을 쏟아 부었다. 그러다가 그는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혹시 저 가슴 큰 요염한 여자가 법존을 유혹이라도 했소이까?" "아미타불… 노납을 어찌 보고 그런 말을 하시오?" 천뢰대법존의 눈가로 노기가 피어 올랐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여천후는 장난기를 지우고 차분한 신색으로 천뢰대법존을 바라보았다. "저 여자의 몸과 같은 부피의 황금으로 황금여인상(黃金女人像)을 만들어 보석금(保釋金)으로 지불하겠습니다. 그만한 금액이라면 소뢰음사의 만행으로 피폐해진 천축무림의 재생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파사국으로 갈 것이고, 저 여자는 다시는 천축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노납이 끝까지 저 여시주를 응징하려 한다면?" "아마도… 대뢰음사는 조만간 문을 닫게 되겠지요." 여천후는 아주 간단하게 대답했다. "천축무림 전체와 싸울 작정을 하겠단 말이신가? 고작 여자 한 명 때문에?" "내 별호가 뭔지 아십니까, 법존?" 여천후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황금의 벌레(黃金蟲)외다." 그의 어조는 서서히 극존칭(極尊稱)에서 반존대(反尊待)로 내려오고 있었다. "법존께서는 부처님의 현신(現身)과도 같으신 분이니 황금 보기를 잡석(雜石)으로 여기시겠지만, 사실 황금을 인생의 마지막 목표로 삼는 인간이 참으로 많소. 그 중엔 혈궁삼살천 같은 곳도 있다는 것을 염두해 두시오." 여천후의 말투는 차츰 싸늘하게 변해 가며 한기(寒氣)가 뿜어지고 있었다. "나, 여천후는 천하(天下)를 사고자 세상에 나온 사람이오. 내가 원하는 것은 사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며, 내가 팔고 싶지 않은 것은 절대로 내놓지 않을 것이오. 차라리 죽을지언정!" 고오오오오! 피어 오른다. 지금 여천후의 황금의 동공에서 뿜어지는 가공할 기세는 무공을 익힌 무인(武人)이 보이는 위세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절대제왕(絶代帝王)의 힘! 바로 그것이었다. '용(龍)이로고… 힘이 있으면서도 일단 숙이고, 상대가 완강하면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도다. 어떤 상대의 앞에서도 꺽이지 않는 불굴의 정신력과 자신의 힘을 마지막에야 보이는 저 아이의 마음은 무궁(無窮)한 창천(蒼天)이요, 가없는 대해(大海)로다.' 천뢰대법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그의 굳어진 얼굴 근육이 풀어지며 자애로운 미소가 피어 올랐다. "아미타불… 소시주의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토록이나 지극하다니, 소시주의 뜻대로 여시주를 방면하겠소이다. 하지만 저 여시주와 같은 모습의 황금여인상은 조금 곤란하겠소이다." 천뢰대법존은 요화란을 힐끗 바라보더니,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인께서 아름답긴 하오만… 가슴만큼은 보통 여자와 같이해 주셨으면 하외다." 여천후도 싱긋 웃으며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그럼 법존께서 손해가 막심하실 텐데요?" 여천후는 요화란의 탐스런 젖가슴을 흘깃 보며 말을 이었다. "아마 황금 이십 근은 족히 더 나갈 텐데… 뭐, 나야 좋은 일이오만……." 타협은 싱겁게 이루어졌다. "요염한 누나, 앞으로 가슴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그런 야한 옷을 입으면 안 돼. 알았지? 그건 이제부턴 나만의 것이라구." 천광백록의 등에 요화란을 태우고 오면서 여천후는 그렇게 다짐을 받았다. 요화란은 여천후를 앞으로 안으며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이에요. 앞으로 소첩의 가슴은 당신 것이죠, 어린 낭군님." 그러면서 그녀는 지옥존자의 시체에서 빼낸 흑석천뢰경을 여천후에게 내밀었다. "받아요. 이것만 극성으로 연성할 수 있다면 천하십강(天下十强)에 들 만한 고수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여천후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 사이에 머리를 기대며 비스듬히 누워 책자를 펼쳤다. <악(惡)은 부숴야 한다! 우주(宇宙)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벽력뇌기(霹靂雷氣)이니, 능히 천하대악(天下大惡)이라 해도 박살낼 수 있으리라.> 흑석천뢰경의 시작은 그렇게 단호한 의지로 시작되고 있었다. "암흑마뢰인(暗黑魔雷印)이라… 오로지 부수는 것으로는 최고이겠는걸? 하지만 이걸 완벽하게 펼쳐 낼 수 있는 사람은 없겠어. 십 갑자(甲子)에 이르는 내공이 있어야만 하늘의 벽력뇌기를 직격으로 맞고도 그 힘을 축적시킬 수 있는데, 세상에 벼락을 맞고 살아날 사람이 있을까?" 다 읽어 본 여천후는 흑석천뢰경을 덮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옥황노야 사파륭 일행이 천축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의 일이었다. 요화란과 똑같은 크기의 황금미인상(黃金美人像)이 제련되어 대뢰음사에 도착한 것도 그 날이었다. 안치된 황금미인상의 가슴을 보면서 일부의 대뢰음사 승려들이 아쉬운 한숨을 흘린 것은 그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황금미인상의 가슴은 평범한 여인의 가슴이었기에……. 제6장 육합수호천황가(六合守護天皇家)의 비사(秘事) 파사국(波斯國). 서천축(西天竺)과 접경해 있는 신비의 대지였다. 대부분이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는 열사의 황지인 곳이다. 낮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광이 작렬하고, 야시(夜時)엔 에일 듯한 한풍이 대지를 얼려 버린다. 노을이 번져 갔다. 핏빛 홍예(紅霓)가 안개처럼 대지를 뒤덮어 갔다. 핏빛 석양을 주시하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칠십 세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어느덧 노인의 백의도 핏빛으로 물들며 혈의(血衣)로 변신하고 있었다. 구름같이 뭉실한 탐스런 은염, 가지런히 묶어 내린 백발의 노인은 무언중에 대기를 압도하며 태산의 위용을 내뿜는다. 파사국 상인들의 대부(代父)로 군림하고 있는 옥황노야 사파륭이었다. 거친 죽음의 사막에서 한 마리 금룡(金龍)을 거머쥔 행운아이기도 한 그였다. 한데, 그가 왜 이런 오지에 홀로 서 있는가? 문득, 옥황노야 사파륭의 노안(老眼)에 짙은 감회가 어렸다. "천육백 년! 너무도 긴 세월이었다." 짙은 회의가 감도는 음성으로 독백을 흘리고 있었다. 옥황노야의 시선이 불타는 노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우리 육합수호천황가(六合守護天皇家)가 진시황을 도와 칠웅난세(七雄亂世)를 평정하고, 천년영화(千年榮華)를 약속받은 것이 엊그제거늘……." 그의 입가로 씁쓸한 고소가 흘렀다. "그 대가로 육합수호천황가는 중토를 지키기로 약조를 맺었지. 본 구주종횡가(九州縱橫家)는 변방을 분열시켜 중원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옥황노야는 시선을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오백 년 전, 본가는 씻지 못할 죄를 지었다. 가문의 분열과 그로 인하여 북방대초원이 결속되고 결국은 송(宋)이 멸망, 북방의 오랑캐가 중토를 유린하고 말았다." 육합수호천황가(六合守護天皇家). 여불위가 꿈꾸던 황금제국(黃金帝國)의 꿈을 와해시켜 버린 신비의 이름이었다. 전국시대의 난세 속에서 진왕실을 도와 독자적으로 최강의 전력을 구축하여, 절대자의 권력을 휘두르던 육합수호천황가는 진시황의 천하통일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 않았던가? 진시황에게 천년영화의 약속을 받고 각기 천하에 웅거한 육합수호천황가였다.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병행하듯, 육합수호천황가는 중원을 위하여 한 가지씩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 중 구주종횡가는 정보망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신비세가였다. 그들이 할일은 새외변방에 침투하여 변황을 분열시켜 서로 대치하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일컬어 이이제이(夷以制夷)의 전법이었다. 그리하여 천 년간 중원대륙은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오백 년 전 북방대초원에 성길사한(成吉思汗:징기스칸) 철목진(鐵木眞:테무진)이 나타나 몽고대제국을 건설하여 중원대륙마저도 그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구주종횡가의 분열이 숨겨져 있었다. 권력투쟁! 바로 그것이었다. 옥황노야 사파륭은 바로 그 구주종횡가의 이십팔대 가주(家主)였던 것이다. 옥황노야 사파륭은 결코 평범한 상인의 신분만은 아니었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사파륭의 시선으로 거대한 산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산의 이름은 천뢰대산(天雷大山)이었는데, 파사국에서 가장 높고 가장 거친 산이었다. 사시사철 끊임없이 벽력과 뇌성이 울고 천하의 독물들이 모여 사는 최악의 절지로, 이제껏 들어가서 살아나온 사람이 없다는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다. "천후, 그 아이를 저곳으로 보낸 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 천뢰대산을 주시하며 옥황노야 사파륭은 염려스런 눈빛을 던졌다. 설마, 여천후가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는 저 천험의 악지(惡地)로 들어갔단 말인가? "실수는 한 번으로 족하다. 몽고의 세력이 본가와 천병신기가의 힘으로 물러갔으나, 천년제국으로 다시금 부활을 획책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천년군림(千年君臨)을 꿈꾸는 그들의 정체를 아무도 모르나 본좌는 안다. 몽고제국의 후예들이 다시금 중원을 노리는 비밀결사집단임을!" 옥황노야는 확신하듯 침중하게 굳어진 노안을 파르르 떨었다. 천년제국. 전일, 북방대초원의 패자인 모란왕부를 수중에 넣고 여천후를 죽이려던 신비의 세력이었다. 아울러, 천축무림의 패권을 잡고자 소뇌음사를 충동질시켰지만 여천후로 인해 천년제국의 수호구룡왕 중 요룡후(妖龍后) 번뇌혈봉황(煩惱血鳳凰) 요화란이 야망지로(野望之路)를 벗어나 여인의 길(女人之路)로 들어서게 만들면서 그들의 야욕에 제동을 걸기는 했었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천년제국의 수호구룡왕 중 미룡왕(美龍王) 음세흔과 어울렸던 철려화도 음세흔 휘하의 직속부하들만 알고 있을 뿐 나머지 팔룡왕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고, 더욱이 천년제국의 본거지나 우두머리가 누군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번뇌혈봉황 요화란조차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비밀리에 천년제국에서 파견되는 밀사(密使)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하달받았을 뿐, 제국 내의 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천년제국이라는 이름은 변황무림에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허상만 알 뿐이었고 그 진정한 실체는 아무도 몰랐다. 단지, 어둠 속에 숨은 공포와 전율로 점철된 신비세력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다만 철려화와 요화란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정체였다. 은연중에 변황의 패자로 군림하는 천년제국은 바로 몽고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고부족의 후예였던 것이다. "천년제국의 힘은 막강하다. 천병신기가(天兵神奇家)가 막지 못할 정도로!" 옥황노야는 노구를 부르르 떨었다. 천병신기가는 육합수호천황가 중 최강의 군벌(軍閥)이었다. 총인원 일천 명(名)으로 구성되었고, 개개인의 최저내공이 삼 갑자에 이르는 막강한 무인집단이었다. 더욱이 그들에겐 또 다른 힘이 있었다. 간장(干臟), 막사(莫邪), 담로(曇露), 거궐(巨闕), 어장검(漁腸劒)과 같은 금옥(金玉)을 무 베듯 하고 어떤 호신강기라도 뚫어 버리는 신병이기(神兵異器)들로 무장(武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들의 힘으로도 천년제국을 막을 수 없다니……. 옥황노야 사파륭의 시선이 천뢰대산에 닿자, 어느덧 그의 노안에 회색이 감돌았다. "그렇지만 천후가 돌아오는 날, 천년제국은 무너지리라. 육합수호천황가에 강한 자는 많되 최강이 없어서 고심했으나, 지옥의 수련을 거치고 천후가 천병전사(天兵戰士)가 되어 돌아온다면 천년제국을 척멸할 수 있다!" 천병신기가도 못하는 일을 여천후가 나온다면 척멸할 수 있다니? 게다가 지옥의 수련을 거치고 온다면 초인전사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뜻은 도대체 짐작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 * * * 꽈르르르릉-! 천지를 강타하는 광란의 대폭풍이 휘몰아친다. 만년한철도 녹여 버릴 듯한 가공할 지옥마화(地獄魔火)의 불꽃이 이글거린다. 이곳은 파사국인들이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워하는 대절지 천륭대황곡(天隆大荒谷). 달리 지옥(地獄)의 계곡(溪谷)이라 불리우는 곳이었다. 천험의 오지인 천뢰대산에서도 가장 극악한 절곡으로, 호리병 모양으로 되어 있어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었다. 이곳에는 항시 가공할 화기(火氣)가 뒤덮고 있었으며, 강력한 벼락(霹靂)이 쉴새없이 작렬하는 곳이기도 했다. 고오오오……! 휘몰아치는 불바람(火風)과 벽력뇌성(霹靂雷聲)을 쓰러뜨리고 찬연히 뻗어 오르는 칠 색(色)의 강기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 빛의 진원지는 인간이었다. 금(金), 백(白), 청(靑), 홍(紅), 흑(黑), 자(紫), 황색(黃色)의 칠채강기에 휩싸여 서 있는 인간이 있었다. 그리고 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사자후(獅子吼)는 대기를 뒤흔들어 버렸다. "드디어 이루었다. 칠채천강공(七彩天 功)을!" 칠채강막은 사람의 모공(毛孔)을 통해 몸 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