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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7편 (7/45)

2026-09-24 08:59:34 조회 16
"이, 이건!" 여천후는 질겁을 하고 말았다. 급기야 수십 송이의 꽃 속에 파묻혀 비명(?)을 지르던 그는 재빨리 빠져 나와 옥황노야 사파륭의 등 뒤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후아, 할아버지! 이건 정말 개꿈(犬夢)이 아닐까? 저 누나들이 몽땅 나한데 시집오겠다니 말이야." 그의 어안이 벙벙한 듯한 중얼거림에 사파륭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놈아. 그건 네가 너무 뛰어나서 그런 것이니, 할 수 없지 않으냐?" 울지광은 여천후를 주시하는 주위의 거상들을 바라보며 파안대소를 발했다. "하하핫! 저 늙은이들이 몽땅 요 귀여운 놈한테 반했구먼. 이렇게 된 바에야 할 수 없지." 그는 즐거운 미소를 머금으며 여천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흠! 내게도 손녀딸이 있는데, 대식국에 도착하는 대로 네게 보내 주마." "예? 또!" 여천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허허, 저 늙은이도 후아에게 단단히 반했군.' 사파륭이 내심으로 혀를 차는데, 손녀인 나나가 쪼르르 여천후에게 달려왔다. "흥! 아무리 그래도 누구에게든 천후를 빼앗기지 않을 거야!" 두 손을 허리에 척 얹고 아미를 모으는 그녀의 행동에 여천후는 진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으휴.' 행복한 고민을 하는 여천후였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를 정점으로 짙은 암흑의 그물이 겹겹이 드리워질 줄을 어찌 알겠는가? 북방제일미(北方第一美) 흑진주(黑珍珠) 호려화. 북방대초원 최고의 미인이라 일컬어지는 여인이면서, 숙명적으로 여천후를 신랑으로 택하고 사십팔화(四十八花)를 끌어들여 여천후에게 안겨 준 여인. 장차 그녀의 진정한 신분이 밝혀질 때, 천하는 또 한 번 경동하고 말 것이다. "이상하단 말이야." 여천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여자란 사랑을 얻기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금황칠대국로 중의 금뇌노야(金腦老爺)가 그랬는데, 려화누님은 오히려 나머지 누나들과 나에게 같이 시집오겠다니……." 보통 남자라면 그저 꽃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하겠지만 여천후는 의문을 품었다. "뭔가 이상해……." 여천후가 내린 결론… 이상한 일이었다. 앞으로 그의 앞에서 이런 이상한 일이 연이어 일어날 줄은 여천후도 지금으로선 알지 못했다. 그것은 운명이었다. * * * * 휘이이- 잉-! 매서운 사풍이 황진을 일으키며 한치 앞의 시야도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래의 물결. 딸랑- 딸랑-! 사풍(砂風)에 묻혀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방울 소리가 있었다. 아울러 누런 황무(黃霧) 속에 희미한 영상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수백 마리에 달하는 낙타의 행렬이었다. 눈에 익은 금령비천타의 거대한 동체가 선두에 드러났다. 새하얀 양털 가죽의 백포로 드리운 금빛 교자의 옆엔 천광백록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바로 파사국 상인의 대부, 옥황노야 사파륭 일행이었다. 십 년 후에 다시 모일 사해상진를 뒤로 하고 다시금 파사국으로 귀가하는 중이리라. "아함." 여천후는 무료한 듯 기지개를 펴며, 하얀 백곰 모피에 신형을 파묻었다. 황금누란국에서 나온 후 지난 한 달 동안 그야말로 수많은 인간들을 본 그였다. 그야말로 천태만상의 인물들에 둘러싸여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수많은 기담(奇談)과 생활을 겪은 여천후는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나나와 호려화 등 수십 명의 여인들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식사를 마쳤으니, 어쩌면 가장 행복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리라. 문득, 그는 일어나 앉으며 지니고 있던 물건을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백금강궁(白金强弓)과 열두 개의 화살, 하나의 황금관음불상과 그의 손가락에 끼어 있는 한 쌍의 흑백반지(黑白環)였다. 부모가 준 유일한 체취 속에 여천후는 흑백반지를 손가락에 끼우며 눈시울을 붉혔다. "엄마……." 여천후는 붉어지는 눈을 문지르며 씩, 웃었다. "지금은 엄마가 보고 싶지만 갈 수도 없으니… 흥! 아버지는 엄마 혼자지만, 난 마흔아홉 명이나 된다구!" 여천후는 콧방귀를 날리며 반지를 매만졌다. 섬뜩할 정도의 마광을 뿜어 내는 흑환과 요요로운 서기를 흩날리며 부드럽게 사위를 비추는 백환은, 훗날 여천후가 고금절대초인(古今絶代超人)으로 탄생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황금관음불상은 백사노타 타파람이 주고 간 불상(佛像)이었다. 그는 떠나기 전 한 마디의 말을 남겼다. - 이 황금관음불상의 비밀을 풀면 서장(西藏)의 백사림(白蛇林)으로 오너라. 백사림, 기억해 두어야 할 이름이었다. 황금관음불상은 여타의 불상과는 달랐다. 부처와도 같은 깊은 성기(聖氣)가 흐르는가 하면, 아수라(阿修羅)의 마기류(魔氣流)가 심혼(心魂)을 떨어 울리고 있었다. 또한 요사스러움마저 곁들어 있으니……. 천지에 이런 불상은 단연코 없었다. 한데, 불상의 머리에는 실낱 같은 계인(契印)이 찍혀 있었다. <원불(元佛)> "원불?" 여천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는 황금관음불상에서 아무런 이상도 찾을 수 없었다. 여천후의 손에서 금불상이 한옆으로 치워지고, 그의 눈가에 이채가 반짝였다. 백금강궁과 그에 걸맞는 새하얀 백금의 화살 열두 개였다. 백금강궁을 집어 들고 요리조리 살피던 여천후의 눈가로 일순 기광이 스쳐갔다. "응? 웬 글이?" 그랬다. 백금강궁의 몸체 가운데에 두 개의 문자가 음각(陰刻)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후예(后霓)> "후예? 후예라면 신화 속에 나오는 궁신(弓神)이잖아? 아홉 개의 태양을 활로 쏴 떨어뜨리고, 인간을 위해 하늘의 형벌을 대신 받았다는 그 후예가 사용한 활이란 말인가? 에이, 설마?" 여천후는 피식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신화와 전설이 전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간과하고 있었다. 여천후 자신이 전설의 왕국에서 왔음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여천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히야! 이제 보니 조그만 백룡이 수천 마리가 있잖아!" 수백, 수천에 달하는 양각(陽刻)된 백룡들의 문양이 백금궁신(白金弓身)에 새겨져 있음을 여천후의 혜지에 찬 눈이 발견한 것이었다. "음? 제멋대로인 듯하면서도 뭔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는걸?" 여천후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번개같이 스쳐가는 영감 하나가 있었기에……. '이것은 용형문자(龍形文字)가 아닌가?' 그것은 역시 수천 년 전의 전설이 재현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천 년 전의 신화였다. 설천용형문자(雪天龍形文字). 지금은 절멸되었다고 알려진 한 작은 소부족이 있었으니, 희마랍아대산의 눈세계(雪界)를 지배하던 설신족(雪神族)이었다. 선천적으로 추운 곳에 살기 적합하도록 태어나, 희마랍아산의 황제로 군림했던 설인(雪人)들이 남긴 원시문자가 다름아닌 설천용형문이었다. 도검수화불침인 설인이 사라진 것은 신비였다. 그런데 그들이 남긴 문자가 이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재현되다니……. <본좌는 설인(雪人)의 마지막 후예로…….> 아득한 원세(元世)의 비밀이 다시금 광명을 찾아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설천용형문의 내용을 해석하면 이런 뜻이었다. 설신족의 설인은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신체와 천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화기(火氣)! 불(火)에만은 조금도 견디질 못했다. 이천 년 전, 설인들에게 최후의 날이 도래할 줄이야……. 얼음과 눈이 있는 곳에서 감히 천하에 적수가 없노라고 호언하던 설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눈사태 속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한낱 미물이 어찌 대자연의 위대함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후로 천하에 설신족의 설인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노부는 그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러나 회생불능의 상처를 입었는데, 한 노선인이 나타나시어 본좌를 구해 주셨다. 학발동안(鶴髮童顔)의 신선 같은 그분은 노부에게 전보다 더한 힘을 주셨으며, 아울러 기명제자로 삼으셨으니… 천궁왕(天弓王)이라 하신 사부께서 후예파천궁(后霓破天弓)을 내리셨도다. 사부께서 유언하시길 못난 제자를 거두어 혈란을 일으키셨으나 천기(天機)라 하시며, 선인지로(仙人之路)에 드셨도다. 이에 본좌가 사부님의 유명을 받아 후예파천궁을 남기니, 본좌의 이름 모를 사형이 일으킬 혈란을 방지하라. 후예파천궁은 금강천궁(金剛天弓)과 암흑천궁(暗黑天弓)이 있느니라. 설룡궁신(雪龍弓神)이 남기노라.> "천궁왕이라는 분은 대단하셨구나. 희마랍아대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나면 아무도 살아나올 수 없다고 하던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니……." 여천후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눈과 얼음의 제황이라는 설신족의 설인들조차 몰살당하는 눈사태 속에서 다른 사람을 구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으로서는 가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천궁왕, 생전 듣지도 못했던 기인(奇人)이었다. "유성천멸파(流星天滅破)?" 여천후는 후예파천궁의 금강천궁의 끝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성천멸파라는 궁식(弓式)의 요결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환우최강의 궁식이었다. 제일식(第一式)은 파황십이천궁식(破荒十二天弓式)으로, 내공이 없는 상태라도 궁결(弓訣)을 이해만 하면 펼칠 수 있는 기이한 궁술법이었다. 열두 개의 화살을 연속으로 발출하면 사방 십 장 이내의 모든 것을 관통한다. 강력한 호신강기라도 뚫는 금강천시(金剛天矢)에 의해. 제이식(第二式)은 천뢰파황폭(天雷破荒爆)이었는데, 내공이 최소 삼 갑자(甲子) 이상은 되어야 펼칠 수 있었다. 고막을 찢어 버리는 뇌전과 아울러 백 장 이내에 있는 모든 것이 초토화되는 가공할 파천궁식(破天弓式)이 그것이었다. 제삼식(第三式)은 의형탄궁결(意形彈弓訣)이란 것으로, 내공이 조화지경(造化之境)에 이르고 또 다른 후예파천궁인 암흑천궁과 합일되었을 때라야만 펼칠 수 있었다. 그것을 시전하는 데는 화살 같은 것은 필요도 없었다. 마음만으로도 십 리 밖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의형탄궁결은 가히 무도(武道)의 끝이었다. "후와! 이렇게 패도적이라니?" 여천후는 넋을 잃었다. 한 가지 일에 호기심을 품으면 그것을 풀어 보고야 마는 직성 때문에 우연히 황금누란국에서 본 용형문자는 이렇게 빛을 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차후 고금제일궁신(古今第一弓神)의 탄생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 * * * 요요로운 편월(片月)이 잘디잔 은하(銀河)의 물결을 흩뿌리는 밤이었다. 사막엔 수십 개의 빠오들이 군열(群列)을 이루며 서 있었다. 사위는 침잠한 어둠 속에 만물을 삼키며 그 사이로 악마의 숨결 같은 삭풍이 매섭게 대지를 잡아뜯는다. 길이 이 장여쯤 되는 빠오 하나,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는 듯한 삼 인의 고른 숨소리만이 들린다.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이었다. "음냐… 쿨!" 여천후는 잠꼬대를 하며 호려화의 풍염한 가슴으로 손을 디민다. 나나는 한옆에서 이불을 뒤척이며 아름답지 못한 자세로 잔잔한 코를 골고 있었다. 평화로운 정경이었다. 호려화가 흑진주 같은 눈망울을 살짝 뜬 것은 삼경(三庚) 무렵이었다. "오늘인데?" 낮게 중얼거리며 여천후의 손길을 쓰다듬는 그녀의 옥용에는 갈등의 빛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드디어 사형이!" 북방제일미인이라 호칭되는 호려화의 아름다운 옥용에 언뜻 고통의 찌푸림이 떠오르고 있었다. 쉬잇… 쉿……! 싸늘한 한풍 속에 바람결을 헤치며 들려 오는 섬뜩한 사음(蛇音)이 있었다. 생물이라고는 살 수 없는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서 웬 뱀의 울음 소리란 말인가? 잠시 귀를 쫑긋거리던 호려화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떠오르더니, 이윽고 그녀가 신형을 일으켜 세웠다. 희미한 잔광 속에 보일 듯 말 듯 나삼을 걸친 여인의 자태는 한 폭의 미인도였다. 백삼을 집어 입은 호려화의 시선은 무심히 새근거리며 잠을 자는 여천후의 얼굴에 떨어졌다. 무수한 내심의 갈등 속에 그녀의 눈가로 굳은 의지의 빛이 떠올랐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분만은……." 호려화는 낮게 뇌까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깊고 서늘한 애정이 넘쳐흘렀다. 그것은 어머니의 눈길이요, 자상한 누님의 눈이었다. "천후, 당신만은 절대 악마의 도구로 만들지 않겠어요. 첩신의 목숨을 버린다 하여도!" 호려화는 비장한 신색으로 조용히 신형을 돌렸다. 스… 스… 스… 슷……! 일진의 미풍이 일어난 듯 빠오의 가죽이 약간 흔들릴 뿐, 호려화의 신형은 이미 장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경혼동백(驚魂凍魄)할 경세신법이었다. 잠종미리섬전보(潛踪迷籬閃電步)라는 것으로, 흔적도 남기지 않으며 최소 이 갑자의 내공이 있어야만 펼칠 수 있는 신법이었다. 북방제일미 호려화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호려화가 조용히 자리를 빠져 나갔을 때였다. "화누님이 무림인이라니,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하겠는걸." 여천후는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울러 그는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반짝이며 살짝 빠오를 벗어났다. 멀리 밤의 품으로 녹아 들어가는 호려화의 모습이 보였다. "이 밤에 어디로 가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여천후는 삭풍을 가르며 호려화를 뒤쫓았다. 휘- 이- 이- 잉-! 어둠 속에서 미친 듯한 광풍의 호곡성이 일고, 사위는 어둠과 아울러 모래의 안개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섭게 대기를 후려친다. 뼛속마저 시릴 듯한 한풍 속에 어둠인 양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검은 흑의에 묻혀 있는 흑영은 석상(石像)과도 같이 미동도 않고 있었다. 편월이 검은 구름을 헤치고 나왔다. 그와 아울러 흑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십오륙 세쯤 됐을까? 흑영은 의외로 젊은 미청년이었다. 어딘가 음산한 듯한 분위기와 아울러, 간간이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안광은 그가 절정(絶頂)의 무림고수라는 사실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문득, 흑영의 눈에 반짝 이채가 스쳤다. "오는군." 무심스러울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와 아울러 그의 신형이 돌아섰다. 그의 전면, 하나의 백영이 빛살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호려화였다. 어느덧 흑의미청년 앞으로 날아내린 호려화는 침묵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흑의미청년은 싱긋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사매." "……!" "보고를 받았다.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서 사부님께서도 매우 흡족해 하신다." 그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호려화는 간절한 표정으로 입술을 떼었다. "꼭 음정염시(陰精艶屍)를 만들어야 하나요?" 흑의미청년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해상진에서 황금미인대회에 나온 사십구 명의 계집들은 절색인데다가, 자질 또한 상품(上品)이지. 거기다가 그 애송이 또한 음정염시를 다룰 수 있는 천년화시(千年火屍)가 되기에는 적합한 놈이다." "……!" 호려화의 교구는 태풍에 강타된 부초(浮草)같이 흔들렸다. 북방제일미인 호려화는 불순한 목적을 품고 여천후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음정염시와 천년화시. 천고의 자질과 순음지기를 지닌 이십 세 미만의 여인들을 급격히 냉동시켜 빙인(氷人)을 만든 후, 차후 삼 년간 사백육십 종의 독(毒)과 만 가지 꽃가루(花粉) 속에 담그고 일천 구의 시체들과 교미하여 한음지기를 흡취한 뒤 탄생되는 절대의 요물(妖物)이 바로 음정염시였다. 도검수화불침에 주위 백 장 이내를 일 장 두께의 얼음으로 만드는 영혼 잃은 마녀들. 천년화시는 음정염시 위에서 군림하는 막강한 강시(疆屍)였다. 백 장 두께의 절벽이라도 뚫을 수 있는 초거력을 지니고, 천 장 밑의 바다 속에서도 살 수 있는 미증유의 힘을 자랑한다. 초절정의 고수 일백 인과 맞먹을 수 있는 막강한 철인강시(鐵人疆屍)는… 그러나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 우주의 별을 헤아리는 것보다 힘들었다. 만고기재라는 총명함을 지니고 있어야 함과 아울러, 천골(天骨)을 타고난 인재 중의 용(龍)이 필요한 것이다. 감히 천륜을 거역하고 이 천고의 마물을 탄생시키려 하는 자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건 안 돼요!" "안 돼?" 호려화의 절규와 같은 부르짖음에 흑의미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호려화의 표정에는 굳은 결의마저 어려 있었다. "그래요! 천후, 그 아이는 때묻지 않은 보옥이에요. 그런 아이를 어떻게 악마로? 안 돼요!" "……!" 흑의미청년은 새파란 안광을 번뜩이며 그녀를 주시했다. "그 어린 놈에게 반했나?" 그의 안광은 더욱더 타올랐다. "그래서 본국을 배반하겠다고?" 질투심마저 어린 흑의미청년의 얼굴에 음침한 사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모란왕부(牡蘭王府) 삼천 명의 목숨이 네 말 한 마디에 달려 있거늘!" 부르르! 호려화의 교구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마냥 흔들거렸다. "당신은 악마야!" "내가 악마라고? 크하하핫!" 미칠 듯한 광소가 사위를 떨어 울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광음은 십 장 내에서만 요동치고 있었다.. 쿠르르르-! 음파의 여력 때문인가? 주위 오십 장 이내는 대지진이 일어난 듯 진동하며 갈라졌다. 일순, 흑의미청년은 광소를 뚝 그치더니 강렬한 안광으로 호려화를 주시하며 앞으로 걸어왔다. "본좌가 악마라고? 네 정혼자인 내가… 악마라고?" 그의 두 눈에는 잔인한 살광이 일렁였다. 호려화는 악귀같이 일변한 그의 신형이 다가서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래요. 만일 당신이 소녀의 부모님을 미끼로 협박하지 않았다면 당신 같은 사람과는 상대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교성을 질렀다. 그런 호려화의 흑진주 같은 맑은 눈망울에는 어느덧 이슬 방울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모란왕부. 열사의 북방대초원 위에 군림하는 세력이었다. 철혈(鐵血)의 패기(覇氣)를 일으켜 이백여 년 동안 대중원을 지배했던 강대한 북방대초원의 힘은 몽고대제국(蒙古大帝國)을 건설했다. 그러나 향락에 젖어 진정한 잡초의 힘을 상실한 채 중토에서 쫓겨 났던 북방대초원의 후예들이 새로이 잡초처럼 일어났다. 삼리오출(三離五出:영락제가 다섯 번 고비사막을 넘어 몽고의 본거지를 세 번 분쇄함)! 영락제(永樂帝)의 친정(親征)에도 꼿꼿이 힘을 유지시켜 다시금 중원회복을 꾀하고 있는 북방대초원의 용자들이었다. 영락제 시절에는 오리아트(瓦瓷)족과 타타르(達歎)족으로 나뉘어 싸웠던 이들은 점차 하나의 세력으로 뭉쳐졌다. 일통된 북방대초원의 힘은 바로 모란왕부로 집결되었던 것이다. 다시금 중토 위에 군림할 때까지 잡초의 힘으로 뭉친 모란왕부는 북방대초원의 폭풍의 핵이었다. 초원제왕(草原帝王) 철군악(鐵君嶽)은 태양신의 아들이라 자칭하는 북방대초원 제일의 용사(勇士)였다. 아울러 모란왕부의 지존이기도 한 인물이었다. 태양천뢰공(太陽天雷功)이라는 초극의 극양무공(極陽武功)은 활화산(活火山)의 대폭발 속에 백 장 내의 모든 것을 녹여 버리고 마는 대화공(大火功)이었다. 그런 초원제왕이 남의 협박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에겐 하나의 장중보옥(掌中寶玉)이 있다고 했다. 모란공주(牡蘭公主) 철려화(鐵麗花)라고 했는데……. 호려화는 부르르 교구를 떨었다. 흑의미청년의 두 눈에 어린 지독한 살광은 섬뜩한 마기마저 담고 있었다. "본국을 배신하면 그 결과가 어떤지 잘 알 텐데?" 사뭇 협박조의 말투를 던지는 흑의미청년의 안색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여인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가 감히 본인의 아내를 희롱하는가? 낭랑한 목소리에 두 사람은 흠칫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떤 자식이 감히!" 그렇잖아도 심상이 좋지 못한데, 불청객이 끼여들자 흑의미청년의 눈가로 곤혹스러움과 살광(殺光)이 일었다. "나? 난 화누나의 남편되는 사람일세." 점잖게 허리에 손을 두르고 여유 있게 답하는 인물은 다름아닌 여천후였다. 그러나 그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호려화의 안색은 창백하게 일변했다. "천후! 어떻게?" 어떻게 알고 따라왔느냐는 뜻이리라. 그녀의 다급한 음성에는 짙은 염려의 빛이 깔려 있었다. 뜻밖의 인물에 흠칫하던 흑의미청년은 상대가 불과 십여 세 정도의 소년임을 알자, 어이가 없었다. 그와 아울러 호려화의 다급한 목소리에 소년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저 기생 오라비같이 잘생긴 애송이에게 반했단 말이지? 크하하핫!" 미친 듯한 광소였다. "으윽!" 광소에는 막대한 공력이 실린 듯, 호려화는 귀를 틀어 막으며 신음을 발했다. 그런데 여천후는 태연자약하게 오히려 같잖다는 듯, 혀를 차는 것이 아닌가. "쯧쯧, 호랑이 간을 ㅅ아 먹었나? 미친 놈같이 웃긴……." "미친 놈?" 흑의미청년은 광소를 그치며 기가 막힌 듯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 모습을 본 호려화는 가슴을 졸이며 여천후에게 전음을 날렸다. "천후, 어서 도망가요. 어서!" 그러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내가 왜 도망가?" 싱긋 웃으며 반문하는 여천후의 행동에 호려화는 아예 가슴이 타 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의 사형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 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녀였다. "빨리." 호려화가 다시금 재촉할 때였다. "천년화시로 만들기에 제격인 놈이군." 흑의미청년도 사람 볼 줄 아는 눈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