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5편 (5/45)
은염노인은 손녀인 듯한 미소녀의 부은 볼을 두드리며 자상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나나가 사막 여행에 싫증이 난 모양이로구나. 조금만 참아라!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사해상진(砂海商鎭)이 나올 터이니……." "흥! 가면 뭘 해요. 거기도 보나마나 모래밖에 없을 텐데." 미소녀는 앵돌아져 콧방귀만 흥흥거렸다. "허허, 그녀석 참." 은염노인은 그런 소녀를 자못 귀엽다는 듯 안아 들며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은염노인은 의혹의 빛을 떠올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음?" 어떤 일인지 금령비천타가 정면을 노려보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놈이 뭘 보고?" 은염노인은 무심코 사막의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오백여 장 밖, 구름이라도 피어 오르는 듯 뿌연 황진(黃塵)이 일고 있었다. 뒤에서 따라오던 무리 행렬 속에서 은빛 털을 지닌 낙타 한 마리가 앞으로 달려나왔다. 은타 위에 있던 백포인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면사를 벗으며 큰소리로 말했다. "옥황노야(玉皇老爺)! 무슨 일이십니까?" 위맹하게 생긴 구릿빛의 장한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를 발하며 앞을 가로막으며 장도(長刀)를 빼들었다. "누군가 오고 있는 것 같은데?" 옥황노야라 불린 은염노인은 전면을 응시하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낙타의 제왕이라는 금령비천타도 사막에서 저런 정도의 속도로 달릴 수는 없다. 모래의 먼지가 저토록이나 광범위하게 일어난 것으로 보아 장시간 동안 사막을 달렸다는 말인데…….' 그의 안목은 정확했다. 그랬기에 그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사막에서 상식을 벗어난 일은 일단 위험신호라고 단정해도 무방한 것이었다. 옥황노야 또한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충분히 그런 사실을 숙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두- 두- 두! 거침없이 질풍처럼 내달아오는 것은 다름아닌 한 마리의 하얗고 거대한 사슴이었다. 사막에 사슴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상식의 궤를 철저히 짓밟으며 천광백록(天光白鹿)는 어떤 낙타보다도 능숙하고 빠르게 사막의 모래를 질주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에구, 목이 마르다 못해 식도가 눌어붙을 지경이야. 백섬, 넌 괜찮냐?" 백섬이 치달리느라 일어나는 모래먼지에 갇혀 사방을 볼 수 없는 여천후는 넓은 백섬의 등에 아예 힘없이 엎드려 있었다. 벌써 황금누란국을 나선 지 칠 주야(晝夜)가 지난 후였다. 그 동안 여천후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한 일이었지만, 더욱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작렬하는 태양이었다. 도대체가 떠오르는 일륜(日輪)이 이토록이나 저주스러울 줄은 여천후로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빌어먹을이다!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내쫓은 아버지도 그렇고, 지글거리는 태양도 물론이고, 모래밖엔 구경할 수 없는 이 사막도 빌어먹을이다! 가장 빌어 처먹을 일은 앞으로 사흘만 이대로 지나면 죽어야 한다는 것이지!" 입으로 연신 투덜거리는 여천후의 얼굴은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미려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에 사신(死神)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푸르륵-! 백섬(白閃)이 콧등을 굴리며 기성을 내지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뭐? 물이 있다고?" 지금 이 순간 여천후에겐 일억 냥의 황금보다도,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보다도 한 모금의 물이 더욱 간절했다. 희뿌연 모래 먼지 사이로 다가드는 일인일타(一人一駝)가 보였다. 구릿빛의 강인한 상체를 벗어붙인 채, 칠 척(尺)에 달하는 거대한 철도(鐵刀)를 꼬나쥐고 긴 낙타행렬의 선두를 막아서고 있는 거한. 중원과 서역을 오가며 무역을 하는 낙타대상들은 마적(馬賊)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먹이감이었다. 풍부한 식량과 수많은 기진보화(奇珍寶貨)의 노다지가 아닌가? 그랬기에 낙타대상엔 반드시 호위무사들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철도를 비껴 쥐고 있는 거한은 바로 호위무장단(護衛武將團)의 수장(首將)인 철가륵(鐵迦勒)이었다. 티벳의 라마고승과 천축공주(天竺公主)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타고난 신력(神力)을 바탕으로, 라마교의 외가기공(外家奇功)인 청동철포삼(靑銅鐵袍衫)을 연성하여 도검(刀劍)을 튕겨 내는 강인한 몸을 지니게 되었고, 천축왕실의 비전절예인 무적선풍도결(無敵旋風刀訣)을 연성한 최강의 전사(戰士)이기도 했다. 별호는 청동일도룡(靑銅一刀龍)이라고 불렀다. "더 이상 무단 접근한다면 무적선풍도의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철도를 비껴 쥔 그의 팔뚝엔 뱀 같은 근육이 꿈틀거렸다. 뭉게구름은 그의 이십 장 앞에서 멈췄다. 모래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사막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광경이 드러났다. "사슴?" 청동일도룡 철가륵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흡떴다. 사막 한복판에 눈처럼 흰, 그것도 낙타의 제왕이라는 금령비천타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높은 거대무비한 사슴이 우뚝 버티고 선 모습은 어떤 경외감마저 들 정도였다. "천광백록이 실제로 존재했단 말인가?" 옥황노야라 불리는 은염노인도 입을 벌린 채 경악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놀라는 이유는 천광백록이라는 사슴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금은 사라진 전설의 왕국인 누란왕국의 수호영물(守護靈物)이라는 천광백록을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그랬다. 그는 천광백록의 배후(背後)를 잘 알고 있는 몇 사람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누란왕국… 서역과 중원의 사이에서 돌연히 생성된 황금의 제국이 한과 흉노의 쟁패 사이에서 전설로 사라진 지 어언 일천오백 년. 사람들은 누란인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지만 노부는 느낄 수 있다. 그들의 숨결이 상계(商界)를 휘어감고 있음을… 이 사막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황금제국의 신화는 신화가 아니었는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누란왕국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대상(隊商)은 없었다. 사막을 매개체로 하여 황금의 부를 쌓아올리려는 상인들에게 있어 누란왕국의 전설은 꿈이었으며, 인생의 목표였다. '일국(一國)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금력(金力)을 모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노부는 알게 되었다. 천하(天下)를 움직이는 황금의 힘이 있음을… 그것이 전설의 왕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 보았지만 역시 나의 추측이 사실이었군.' 옥황노야는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였다. "와아! 정말 큰 사슴이네!" 교자에 타고 있던 미소녀는 탄성을 지르며 쪼르르 천광백록에게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웬일인지 은염노인은 손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천광백록은 선악(善惡)을 구별할 수 있는 영물. 자신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해(害)하지 않는다. 특히 어린아이들을 좋아한다지?' 그렇지만 철가륵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집채만한 천광백록의 가벼운 발길질에도 나나 정도의 소녀는 즉사(卽死)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철가륵은 수중의 철도를 쥔 손에 내공을 주입시키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너, 참 무지하게 크구나. 근데, 이뻐." 소녀 나나는 뽀송한 백섬의 다리털을 매만지며 활짝 웃었다. 백섬의 등 어림에서 머리 하나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이봐, 아가씨. 물 좀 주면 백섬을 태워 주지." 여천후의 힘없는 말이었다. "어머!" 놀라는 나나의 몸이 허공으로 들려졌다. 백섬이 입으로 그녀의 옷깃을 물어 자신의 등 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어머! 주인도 참 예쁘네. 특히 눈이." 나나는 여천후를 보자, 감탄사를 발했다. 비록 의복에는 모래가 앉아 금의(錦衣)가 회색이 되다시피 했지만 그 아름다움은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눈부셔……." 나나는 황금의 동공으로 반사되는 태양빛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하지만 여천후는 그녀의 옆구리에 차고 있는 수정(水晶)의 물통(水桶)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거 먹어." 나나는 얼른 낌새를 눈치채고는 수통을 내밀었고, 여천후는 얼른 낚아채 단숨에 입을 대고는 마셔 버렸다. "크아! 시원하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수통을 비운 여천후는 가슴을 쓸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넌 누구지?" 그제서야 정신을 추스린 여천후는 또래의 소녀가 드물게 아름다운 미녀라는 것을 깨달으며 물음을 던졌다. 여천후를 요기조기 뜯어보고 있던 나나는 수통을 주는 여천후의 손끝에서도 반짝이는 것이 있음을 감지하며 탄성을 발했다. "나는 나나야. 손톱에 금칠을 했네? 정말 이쁜데? 나도 해 봐야지." 나나는 연신 종알거리며 여천후의 손을 잡은 채 놓을 줄 몰랐다. 그런 나나의 모습에 여천후는 멍해지고 말았다. '이 말은 못 듣던… 그렇군! 파사어(波斯語)로구나.' 그렇다. 이 이국의 미소녀가 하는 말은 중원의 말이 아닌 수만 리나 떨어져 있는 파사국의 말이었다. 파사국(波斯國). 고대엔 배화교(拜火敎)가 창시된 곳이고, 지금은 대식국에 복속되어 있는 나라였다. 낙타를 즐겨 타고, 멀리 타국과 교역하는 부국(富國)이기도 했다. 지금 오 리(里)에 걸쳐 낙타대상을 이루고 있는 이들은 다름아닌 파사국의 상인이었던 것이다. 놀라던 여천후는 빙긋 웃었다. 그는 천황칠대국로에게 천하의 언어를 몽땅 습득하다시피 했다. 그러니 여천후에게 파사국어는 일상용어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한편 은염노인은 천광백록을 타고 있는 사람이 있자, 놀라고 말았다. 그 다음엔 여천후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서 더욱 경악하고 말았다. '황금의 눈과 황금의 손! 진정, 황금신(黃金神)의 신화(神話)가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는 심정이 파열될 듯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황금의 눈에 대한 전설(傳說). - 상계(商界)에 존재하는 황금안(黃金眼)의 전설이 있으니… 황금의 눈을 지닌 자, 황금신으로 추앙받을지니… 상계의 삼도(三道)를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게 된다. 그는 전능인(全能人)이니, 지상 최강의 무인(武人)일지라도 그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고… 천하대석학(天下大碩學)일지라도 머리를 조아리리라. 중원대륙의 지배자인 황제(皇帝)조차도 눈 아래 둘지니, 그는 천하에 유일(唯一)한 존재로 군림(君臨)하리라! 상계의 마지막 신화를 떠올리는 은염노인의 눈가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는 여천후의 신체가 범상치 않음을 한눈에 파악했던 것이다. 아울러, 여천후에게 황홀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손녀의 행동에 야릇한 미소를 떠올렸다. '허허, 잘하면 손녀 덕에 용(龍)을 손녀사위로 얻겠는걸.' 인재(人才)… 그것도 보통의 인재가 아니라, 천고에 드문 금룡(金龍)을 놓아 줄 리는 만무하고……. 여천후는 문득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황금의 동공을 반짝이며 나나를 바라보았다. "나나라고 했지? 정말 예쁘구나. 나는 서월누나만큼 예쁜 여자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내가 그렇게 예뻐?" 여인(女人)이란 족속은 노소를 불문하고 아름답다는 말에는 사족을 못 쓴다. 나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사르륵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저 이쁘다고만 하면.' 여천후는 속으로 혀를 찼다. "네 이름은 뭐지?" 나나가 수줍은 듯 물었다. "나는 천후. 하늘의 제후가 될 사람이지." 말을 하는 여천후의 눈가로 그리움이 진하게 흘러나왔다. 이제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그리운 황금누란국이었다. 자애스런 어머니와 아버지, 금황칠대국로와 정혼녀(定婚女)로 묵인받고 있는 예서월과 그의 앞에선 아예 옷 입기를 거부할 정도로 노골적인 홍요(紅妖)의 탐스런 엉덩이. 보고 싶어도 만나지 못할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과 같이 피어 올랐다. 사막을 헤매고 있을 때엔 오로지 물을 구하거나,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一念)밖엔 없었으나 지금 여천후는 솟구쳐 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웃음을 지었다. 열세 살의 소년답지 않은 풍모를 그는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낙타대상을 이끌고 나타나 뜻하지 않게 여천후를 구해 준 은염노인은 옥황노야(玉皇老爺) 사파륭(斯坡隆)이었다. 파사국 제일의 대거상(大巨商)인 그가 주로 취급하는 물품은 옥(玉)이었다. 중원에서 나는 백옥(白玉), 천축특산(天竺特産)의 황옥(黃玉), 대식국의 벽옥(碧玉), 북해산(北海産)의 빙옥(氷玉) 등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옥의 거래 중 절반 이상은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각각의 나라와 지방에서 나는 옥은 산지(産地)에선 그리 값이 나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타지방에선 거의 황금의 무게와 똑같이 취급받는다. 오죽했으면 사파륭의 별호 앞에 옥황(玉皇)이라는 지고한 이름이 붙었겠는가? 이미 나이 백이십 세가 넘은 그에게 사실상 더 이상의 재력(財力)은 무의미했다. 하나뿐인 혈육인 손녀 나나만을 낙으로 살아가는 그였는데……. 마지막 여행이라 생각하고 손녀를 대동하여 떠난 그에게 어린 금룡(金龍)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그에게 많은 시련이 보장된 끔찍한 일이었다. 운명의 여신은 새로운 운명을 여천후와 옥황노야 사파륭에게 안겨 주었다. 사해상진(砂海商鎭). 사막에도 강(江)은 흐른다. 그렇지만 그것을 평범한 내륙(內陸)의 강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오산이었다. 사막에서 흐르는 강은 바로 유사(流砂였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것으로, 용권풍과 아울러 유사지대(流砂地帶)인 모래의 강은 공포의 상징이었다. 사해상진은 바로 유사지대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그 생로(生路)는 사실상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찾아들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특이한 낙타(駱駝) 때문이었다. 사막의 배(船)라고 불리우는 낙타에게는 다른 어떤 동물도 지니지 못한 특수한 능력이 있었다. 물 한 방울 없으면서 작렬하는 태양에 의해 체내(體內)의 수분마저 증발시키는 초열지옥이나 다름없는 열사(熱砂)의 대사막에서 보름 정도는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살아갈 수 있는 불가사의한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낙타라 할지라도 사막에서 출산(出産)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혹 새끼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놈은 어미 낙타와 함께 삼 각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 버린다. 사막이라는 곳은 본질적으로 어린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생존조건(生存條件)이 안 되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아주 희미한 확률이긴 하지만 살 수도 있었다. 물(水). 사막에서 가장 필요한 생존의 조건은 오직 그 한 가지였다. 물이 있다면 새끼와 어미 모두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막에서 태어나 물을 먹으며 살아난 낙타 새끼는 본능적으로 물의 흐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낙타의 길 안내를 받을 수만 있다면 유사지대(流砂地帶)를 무사히 지나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사막에서 물을 찾는다는 것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그런 낙타 새끼를 구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빠져 나가는 것과 다름없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낙타대상(駱駝隊商)들은 그 불가능에 도전했다. 임신한 어미 낙타를 사막 한복판에 실어 와 새끼를 분만케 한 다음, 그 새끼를 한 달간 양육하여 스스로 사막을 횡단할 지구력을 키운 다음이라면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심각한 문제는 있었다. 바로 황금(黃金)이었다. 사막에서 물의 분량은 황금의 질량(質量)과 비례할 정도로 높은 값어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한 달간 낙타 새끼가 마시는 물의 양과 동일한 무게의 황금을 소모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 금액은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였던 것이다. 어지간한 대상(大商)일지라도 그런 사치를 부린다면 당장 가세(家勢)가 기울 정도이지만, 사해상진에 참여할 정도의 상인(商人)이라면 그런 정도의 황금은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했다. 일국(一國)을 쥐고 흔드는 대상인(大商人)들은 그런 특별한 능력을 지닌 낙타를 만들어 죽음의 유사지대에 자신들만의 성역(聖域)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사해상진(砂海商鎭)이었다. 소위, 선택된 대상인들만 출입할 수 있는 사해상진을 은연중 노리는 녹림도배(綠林道輩)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사해상진으로 출입하는 길을 모르니, 그저 침만 줄줄 흘리며 멍청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유사지대엔 특별한 길(路)이 없었다. 어제 무사히 지니온 길이라고 그것이 오늘 생로(生路)라고 볼 수는 없었다. 모래 밑을 흐르는 강은 매일매일 수로(水路)가 변하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거상들은 사해상진에 십 년마다 한 번씩 모여 대규모적인 교역을 행한다. 그곳이 바로 사해상진이었다. 한 달간에 걸쳐 천하상권의 판도는 이곳으로 집중된다. 각기 일국을 대표할 수 있는 상인들만이 참가할 자격이 있는 괴이한 규율을 지닌 시장엔 그만큼 온갖 괴이한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지난 세월 동안 이들에겐 이곳에서 지켜야 할 불문율이 생겨났다. 一. 자산이 천만금(千萬金) 이하인 사람은 들어올 수 없다. 二. 각 수행인원은 백 명(名) 이내로 한다. 三. 천하의 특산품(特産品)이나 천고의 기물(奇物)이 아닌 평범한 것은 가지고 들어오지 못한다. 四. 절세의 미녀(美女) 하나씩을 대동해야 한다. 한마디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규칙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오는 거상(巨商)치고 이 규칙을 어기려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야말로 천하의 잡다한 사람들과 인세에 보기 힘든 천고기물(千古奇物)이 산재해 있었다. 또한 일반의 사람들은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철저한 비밀의 장막 속에 가려져 천하의 거상들만이 알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황금과 기진보화(奇珍寶貨)와 여자. 인간의 생명을 죽이더라도 취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이런 사실이 무림이나 일반에 새어 나간다면 아마도 전무림이 들끓기에 충분한 것이리라. 이곳은 열사의 대분지(大盆地) 사이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도 용권사풍해역과 더불어 이대사역(二大死域)으로 꼽히는 유사하(流砂河)의 대절지였다. 그 가운데에 형성되는 사해상진은 지난 수백 년간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곳으로 한 마리 금룡이 들어오면서 풍운(風雲)은 일어난다. 여천후라 지칭되는 신비의 미소년에 의해……. * * * * "와아! 정말 굉장해! 안 그래?" 나나는 사해상진에 다다른 순간부터 연신 감탄사를 발하며 종알거렸다. 하지만 천광백록 백섬(白閃)을 탄 채 주위를 둘러보던 여천후는 그저 고개만을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에게서 놀람의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온갖 보석과 진귀한 기물들도 그의 눈에는 한낱 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에겐 천하의 반을 살 수 있는 황금이 기다리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던 것들이 이곳에 산재해 있는 보물보다 더 귀한 것들이 부지기수였다. 진주(珍珠)로 모래성 쌓기 놀음을 즐겨 하고 황금으로 백섬의 집을 지어 주기까지 한 여천후였으니, 이곳에 널려 있는 보물들이야 그에겐 흥미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취하고자 한다면 황금누란국의 금황칠대국로에게서 익힌 상술(商術)과 천부적인 재능에 의해 형성된 상도(商道)로 모조리 끌어모을 수도 있었다. 천광백록 백섬은 여천후 이외의 어느 누구도 근접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황금누란국에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그런 백섬이지만 나나만큼은 매달리건 등에 타고 뿔을 잡아당기건 개의치 않았다. 지금 여천후와 함께 나나는 백섬을 탄 채 금령비천타와 나란히 사해상진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구경한다고는 했지만 군중들은 낙타의 제왕이라는 금령비천타와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은 백섬을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막에서 사슴을 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기사(奇事)였기 때문이리라. 문득, 나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며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아! 저렇게 큰 뱀(蛇)이 있다니!" 아예 놀라 까무러칠 정도로 경탄하는 나나의 행동에 여천후는 무심코 시선을 옮겼다. "……!" 여천후는 흠칫했다. 보라! 아마도 천하에 이렇듯 거대한 뱀이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눈(雪)이 뒤덮힌 작은 산맥(山脈) 하나를 옮겨 놓은 듯했다. 거대하고 긴 백옥(白玉)을 통채로 다듬어 놓은 듯한 흰 뱀(白蛇)이었다. 백사의 몸통 둘레만도 장정 세 명의 허리를 합친 것과 같고, 부리부리하게 치켜뜬 흰 동공은 어린아이의 머리만 했다. 더욱이, 백사의 머리 주위로는 거대한 방패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다. 그것은 천축에서만 산다는 구아사(溝牙蛇:코브라)였다. 보통의 구아사보다는 백 배나 더 큰 백사(白蛇)는 무료한 듯 큰 방패 같은 깃(羽)을 펄럭이며 바람을 일으키며 고개를 뻣뻣이 치켜든 채 똬리를 틀고 있었다. 놈은 전설의 괴수(怪獸)만을 기술해 놓은 만수괴이지(萬獸怪異志)라는 기서(奇書)에 백령구아사(白靈溝牙蛇)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영물이었다. 보통의 구아사가 인형설삼(人形雪蔘)을 복용하고 알을 낳아, 한천백령지(寒泉白靈池)에 담그어 놓으면 천 일 후 부화한다. 그 놈이 바로 백령구아사인데, 일 년에 한 번씩 만년빙담(萬年氷潭)에 서식하는 백린빙어(白鱗氷漁)만을 잡아먹으며 어김없이 일 년에 한 치씩만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