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4편 (4/45)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아라화의 몸매나 그 화끈한 밤의 열정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낮엔 국모(國母)로서의 고아한 품위를 지키는 요조숙녀의 표본이요, 밤엔 사내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절륜한 염태를 부리는 절세의 요녀(妖女)로 탈바꿈하는 여인이 바로 아라화였다. 그런 아라화와 무려 한 달간이나 떨어져 독수공방(獨守空房)을 보내야만 했던 여운상이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는데……. "끙……!" 오늘 밤도 하릴없이 그냥 보내야만 하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에 여운상은 앓는 듯한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밤(夜)의 정취는 고요하면서 아늑했다. 모자(母子)가 잠들어 있는 침실의 분위기 역시 그런 밤의 정취가 물씬 배여 있었다. 아라화의 팔을 베개삼아 벤 채, 따사로운 모친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여천후의 얼굴은 그지없이 순진무구하고 깨끗했다. '잠든 모습은 천사(天使)가 따로 없는데, 눈만 뜨면 말썽을 부리는 악동이 되는 괘씸한 놈!' 어느 틈엔가 여운상이 침실로 숨어들어와 잠들어 있는 모자를 자애로운 눈으로 내려보고 있었다. 일순, 그의 손이 기쾌하게 움직여 잠들어 있는 여천후의 마혈(摩穴)과 아혈(啞穴), 혼혈(昏穴)을 동시에 짚어 버렸다. 아들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그것도 모자라 더욱 깊이 잠들게 하는 세 가지 요혈을 제압해 버린 비정(非情)한 아버지의 입가로 흐뭇하기 이를 데 없는 만족의 미소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부부(夫婦) 사이를 생이별시키는 못된 놈 같으니라구. 내일 낮까지만 자고 있거라." 여운상은 여천후를 침대의 구석에 밀어 놓고는 아라화를 내려다보았다. 잠자리 날개와도 같이 투명한 나삼을 입은 채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특히, 앞섶이 벌어져 탐스런 유방이 절반쯤 드러나 있는 그 고혹스런 자태는 여운상의 하체를 뻐근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는 아라화가 깰 세라 조심스레 그녀의 나삼자락을 풀어헤쳤다. 나삼의 안엔 아무 것도 걸쳐져 있지 않았다.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아내의 가슴을 보드랍게 쓰다듬으며 본격적인 행동을 취할 찰나였다. "아버님, 뭐 하시는 겁니까?" 근엄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가 여운상의 뒤에서 들려 오는 것이 아닌가? 심장이 그대로 경색(梗塞)돼 버릴 정도로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 분명 요혈을 제압했는데……?" 말조차 더듬으며 경악한 눈길로 여천후를 돌아보는 여운상이었다. 여천후는 침대의 모서리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싱글거리고 있었다. "일전(日前), 성령천수장엘 놀러 갔다가 성로(聖老) 할아범에게 이혈환위신맥술(移穴換位神脈術)이란 것을 배웠었지요. 오늘쯤 아버님께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런 만행을 자행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여 잠들기 전에 혈도(穴道)를 바꾸어 놓은 것을 모르신 것은 순전히 아버님의 불찰이시지요." "그런……." 여운상은 낭패한 얼굴로 쓴 입맛을 다셨다. 이혈환위신맥술은 의도(醫道)에서 큰 부상을 당해 혈맥(穴脈)이 끊어지거나, 아예 없어진 중환자에게 혈도를 다른 곳으로 옮겨 치료해 주는 고도의 의술(醫術)이었다. 인간 체내의 모든 혈관(血管)과 혈도(穴道)와 혈맥을 파악하고, 그 하나하나의 효용까지도 상세히 알아야만 했기에 어지간한 의원(醫院)들은 알고 있다 해도 감히 시술할 수 없는 최고경지의 의술이 바로 이혈환위신맥술이다. 그런 것을 여천후는 자신의 몸에 있는 혈맥과 혈도를 옮겨 놓은 것이었으니, 그 천재적인 발상에는 여운상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감탄만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엄마에게 일러야지. 일국의 국왕이신 아버님께서 엄마와 하고 싶어서 하나뿐인 아들의 혈도를 제압해 발로 차 버렸다고 말이야." 짐짓 여천후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하며 아라화에게 다가갔다. "후, 후아야! 잠깐!" 여운상이 질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네 엄마는 아마 평생토록 이 애비를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 줄 테니, 제발 그 말만은 말아 다오." 여운상은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놈아, 너는 아직 어려서 결혼한 유부남(有婦男)이 독수공방(獨守空房)한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 줄 모르는 것이다! 더구나 네 엄마처럼 미인에다가 몸매 근사한 여자를 두고 말이다." '헤헷, 슬슬 미끼를 던져야겠는데?' 자신이 짠 각본(脚本)대로 상황이 돌아가자, 내심으로 흡족했지만 여천후는 시침을 떼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그렇게 참기 힘든 거예요?" "그럼, 너도 나중에 장가 가 보면 알게 된다." "음, 좋아요. 그럼 용서해 드리죠."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여천후는 혼쾌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 고맙다. 역시 내 아들이 최고구나." 여운상이 기꺼워하는 것도 찰나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일 주일만 더 참으세요. 난 엄마하고 자는 걸 다섯 달은 더 하는 게 좋지만 일 주일만 잘께요." "오, 오늘만이라도 애비에게 엄마를 양보해 줄 순 없겠냐?" 여운상은 탐스럽게 솟아 있는 아라화의 젖가슴을 훔쳐보며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음… 그럼 이렇게 해요." "어떻게?" 서광이 비치는 것을 느끼며 여운상은 얼른 아들을 재촉했다. "소자도 그냥 나가면 손해보는 것 같으니까, 아버님이 엄마하고 잠자는데 일 각(一刻:십오 분)마다 황금 일만 냥(兩)씩을 주세요." "엄마를… 돈 주고 사란 말이냐?" "싫으면 관두시고요. 소자는 엄마하고 잠잘 테니, 그만 나가 보세요." 아쉬울 것 없다는 듯, 여천후는 하품을 하며 아라화의 곁에 드러누웠다. 여운상이 헤쳐 놓은 나삼 사이로 드러난 탐스런 젖가슴을 살짝 만지며 여천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엄마 가슴은 정말 이쁘단 말야……." "좋, 좋다." 여운상은 견물생심(見物生心)이 동하여, 백기(白旗)를 들고 말았다. "시각을 얼마나 드릴까요? 삼 각(刻)? 짧으면 오 각(刻)으로 할까요?" '오각이면 오만 냥? 너무 비싸! 일 각이면 충분하지. 암, 그 동안 참았으니 금방 폭발할 테지.' 잠시 주판알을 튕기던 여운상은 얼른 계산서를 뽑았다. "일 각이면 충분하다." "좋아요. 그럼 일만 냥을 소자에게 주는 것으로 하고, 일 각 후에 오도록 할께요." 여천후는 싱글거리면서 침실에서 빠져 나갔다. 지난 한 달간은 여운상에게 일 각(刻)이 여삼추(如三秋)였다. 느닷없이 내밀한 곳을 침입한 불청객에 놀란 것보다, 아들과 자고 있는 중에 무작정 옷을 벗고 달려드는 남편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후아는 제 방에서 자고 있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니……." 아들이 없다는 말에 아라화는 안도하면서 긴장감을 풀었다. 부드럽게 남편의 허리를 부여안으며 그녀는 여운상을 받아들였다. "아라화… 얼마나 당신을 원했는지……." 여운상은 광폭하게 아라화를 찍어 누르며 끌어안았다. 실내는 삽시간에 후끈한 열기로 달아올랐다. "헹! 일 각이면 끝낼 수 있다구?" 침전 밖에선 여천후가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식수(食水) 대신 공청석유를 마시고, 간식(間食)으론 천령영과(天靈靈果)를 드시는데다가, 술안주로는 항상 천년화리(千年火鯉)의 회(膾)를 드시는 분이, 한 달간이나 참은 양기(陽氣)를 일 각 안에 푼다는 것은 처녀가 애를 낳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란 걸 왜 모르실까?" 여천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여튼 황금 일만 냥 정도면, 밖에 나가서 먹고 살 정도는 되겠지." 힐끗 침실의 문을 바라보며 여천후는 싱글거렸다. "헤헷, 볼 만할 게야. 아마… 배가 고파 허겁지겁 식사를 하다가 목이 메여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그런 표정이겠지?" 그는 슬금슬금 문 앞으로 다가갔다. "거의 일 각이 다 됐지?" 여운상은 그야말로 허리를 폭풍처럼 들썩이며 욕화(慾火)를 쏟아 부었다. 너무도 강력한 남편의 공세에 아라화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그녀의 두 다리는 허공으로 떠올라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다가 이내 여운상의 허리를 휘감아 조인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애욕의 신음 소리는 차라리 울부짖음이었다. 남편의 등을 끌어안다 못해 등판을 손톱으로 긁어 버려 혈흔(血痕)이 번져 가고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침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런 아들이 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당연한 얘기지만 폭발 직전의 남자는 하늘이 무너지고, 대지가 찢어진들(天崩地裂) 하던 행위를 멈출 수 없다. 그렇지만 여자는 달랐다. 특히나 자식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라는 성스런 이름을 지니고 있는 여인은 능히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였다. 그러니 아들이 보는 앞에서 정사(情事)를 지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후아……?" 아라화는 당황하여 남편을 그대로 떠밀어 버리고는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알몸을 가렸다. "너… 너……." 여운상은 바지를 얼추 걸치고는 여천후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측간에 간 사이에 들어오시다니, 아버님도 어지간히 급하셨나 봅니다." 여천후는 능청을 떨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그는 소리는 내지 않은 채 입을 벙긋거렸다. 여운상은 입 모양을 보며 여천후가 하는 말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 각이 다 지났다구요. 빨리 가서 주무세요." "일 각만 더!" "안 됩니다, 아버님. 남아일언(男兒一言)은 중천금(重千金)이라고 소자에게 누누이 강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더욱이 신용(信用)이라는 것은 상인(商人)에게 있어 목숨보다 중한 것이라고도 하셨지요?" "악마 같은 놈!" "자꾸 그렇게 인신공격을 하신다면 엄마에게 아버님이 돈을 주고 엄마를 샀다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님은 궁하면 돈만 주면 아무에게나 치마를 벗고 다리를 벌리는 창녀(娼女)처럼 엄마를 취급했다고요." "아, 알았다. 그만 나가마."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침실을 빠져 나갈 수밖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들이 파 놓은 함정에 완벽하게 걸려들고 말았다. 지금에야 그 사실을 감지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아내를 돈 주고 한 사실은 사실이었으니……. 그저 아라화만 아무 것도 모른 채 부자(父子)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휴! 자식이 아니라, 애물단지로구만." 대청으로 나와 의자에 힘없이 앉은 여운상은 넋두리를 흘렸다. 그런 그의 뒤로 하나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여천후는 싱글거리며 여운상의 맞은편에 앉았다. "장사란 어디까지나 매물(賣物)이 있는 이상, 고객을 놓치면 안 된다지요?" "징그러운 놈, 이젠 안 속는다! 이젠 일 각에 동전 한 푼이라도 네놈 에미를 안는데 투자하지는 않겠다!" 여운상은 이를 갈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흥정은 붙이라고 했으니, 거절하는 것은 흥정의 시작이나 다름없다고 하셨지요? 소자의 청을 들어 주신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엄마를 아버님께 양도하겠습니다. 앞으로 영원히 엄마와 같은 침대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서약(誓約)도 함께 하고요." 눈이 번쩍 뜨이는 조건이었다. "뭐, 뭐냐? 그 조건이라는 게?" 여운상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황급히 반문했다. "소자를 바깥 세상으로 내보내 주십시오. 이곳은 좋지만 너무 갑갑해요. 백섬을 타고 마음껏 달려보고 싶습니다. 천하(天下)라는 곳을……." 여천후의 어조는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여운상은 잠시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아들을 바라보았다. '벌써 때가 되었는가? 여씨일족(呂氏一族)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방랑(放浪)의 세월을 시작할 때가…….'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 한편으로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선 아들에 대한 신뢰감이 무궁하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황금은 인간이 추구하는 최후의 목적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본국의 시조(始祖)이신 여불위조사(祖師)를 제외한 어떤 사람도…….' 문득, 그의 뇌리로 일천칠백 년 전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 * * * 여운상은 의미 있는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유일한 혈육을 바라보았다. '여불위 선조님께선 황금은 인간이 추구하는 최후의 목적이라 하시며, 심지어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조차 이용하셨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여씨의 후예들 중 그분만큼 그렇게 투철한 황금(黃金)의 정의(定義)를 지니고 있던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두 눈에 서린 기운은 따사롭기 이를 데 없었다. "천후 그놈은 능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황금의 신(黃金神)이 될 수 있으리라." 창 밖의 어두운 밤하늘에 깔린 별무리를 보는 그의 시선엔 어떤 확신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 어떤 인간의 힘도 이 용권사풍해역의 용권풍을 뚫을 수는 없다." 엄청난 용권풍의 바람이 압도적으로 휘몰아치는 앞에 선 여운상은 신중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그의 옆엔 여천후와 칠대가신인 금황칠대국로가 서 있었다. "우리 여씨일족의 시조(始祖)이신 황금천수(黃金天手) 여불위(呂不韋) 어르신께서는 황금으로 성곽을 쌓을 정도로 금력(金力)을 모으셨으나, 진시황을 추종하는 무장세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무력을 지닌 절대권력 앞에선 황금은 오히려 불나방을 끌어들이는 기름일 뿐……." 여운상은 담담한 어조로 황금누란국의 탄생비화(誕生秘話)를 설명해 주었다. "아들아, 이곳엔 천하의 황금 중 오 할이 있으며 천하에 산재한 무공비급 중 지금은 잊혀진 절학이 사서삼경(四書三經)과 함께 널려 있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왕국을 핍박할 수 없다." 여운상은 여천후를 직시하며 힘있게 말했다. "여씨혈족의 사대시조이신 여천군 어른께서는 한 가지 율법을 남기셨다. 황금누란국의 국왕이 될 후계자를 반드시 십오 세 이전에 무일푼으로 바깥 세상으로 내보내야 하고, 그 후예는 황금 일억 냥(兩)을 만들어야만 돌아올 수 있다. 이 애비도 열네 살에 출국(出國)하여 스물다섯에 일억천만 냥을 모아 돌아와 국왕의 자리를 승계했다." "그럼 난 구천구백구십구만 냥(兩)만 모아 오면 되네요. 아버님께 만 냥을 맡겨 놓았으니 말이에요." 여천후는 별반 심각한 기색도 없이 대꾸했다. "알았다. 요 괘씸한 놈!" 짐짓 고리눈을 흡뜨며 여운상은 여천후에게 한 쌍의 반지(環)를 건네주었다. 검고 흰 흑백쌍옥환(黑白雙玉環)은 보기에도 범상한 물건은 아닌 듯 싶었다. "옛다. 이건 네 에미가 아비와 만났을 때 정표로 나누어 가졌던 것인데, 네놈에게 물려주마." "아버님, 어젯밤처럼 매일같이 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어요. 알았죠?" 여천후는 가락지를 손가락에 아무렇게나 끼우며 다짐을 받았다. "징그러운 놈, 빨리 가거라!" 여운상이 손짓하자, 금황칠대국로 중 두 번째인 대력천금로(大力天金老) 초패강(楚覇剛)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이끌고 있는 금황천력장(金黃天力莊)은 각종의 기관토목공사(機關土木工事)를 전담하고 있었다. 순수한 힘만으로는 황금누란국의 제일역사(第一力士)가 바로 대력천금로 초패강이었다. 모래 속에서 팔뚝만한 굵기의 황금사슬(黃金索)을 찾아낸 초패강은 힘껏 잡아당겼다. 그- 그- 긍! 귓청을 찢는 쇳소리와 함께 하나의 거대한 황금문(黃金門)이 일어서고 있었다. 두께 오 척에 달하고, 길이만도 일 장에 육박하는 거대무비한 황금의 덩어리였다. 얼추 무게만도 능히 십만 근은 됨 직한 황금문이 열리자, 지하로 황금의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내려가면 구백구십구 개(個)의 동굴이 있다. 그 중 하나만이 용권사풍해역을 벗어날 수 있는 생로(生路)다. 생로는 수시로 변화하기 때문에 오직 만상천로기상도(萬象千路氣象圖)를 풀어 보지 않는 이상, 들어오고 나갈 수가 없는 것이지." "그럼 나가고 나서, 들어올 땐 어떻게 하죠?" 당연한 의문이었다. "밖에서 기다려야지. 이 애비가 심심해서 놀러 나갈 때까지 말이다." 심드렁하게 말하는 여운상의 안색은 태연자약했다. "백섬만 타고 가면 어떡해요? 나가면 물 한 모금 없는 사막이라면서……." 여천후는 늠름하게 서 있는 천광백록을 힐끗 바라본 여천후는 또다시 투덜거렸다. 그러자 이번엔 금왕성수옹 예성원이 나섰다. "대저 인간의 몸엔 헤아릴 수 없는 혈맥(穴脈)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임독이맥(任督二脈)인데, 태어날 때는 열려 있는 것이 자라면서 세상의 혼탁한 기운이 쌓여 막히면서, 다른 대소혈맥들도 막혀 버립니다." "그건 나도 알아." 여천후의 참견에도 불구하고 예성원은 설명을 이어 갔다. "만일 임독이맥이 뚫리면 마르지 않는 내공의 샘을 지니게 되는 것이고, 그 총기(聰氣)는 능히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치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의 경지에 다다릅니다. 소왕야께선 태어나면서 벌모세수대법으로 정화되시었고, 각종의 영약을 복용하셨기에 음맥(陰脈)의 시작인 임맥(任脈)과 양맥(陽脈)의 출발인 독맥(督脈) 모두 막히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똑똑한 것이었군?" "임독이맥이 뚫려 있으면 음양(陰陽)의 조화가 순조로워 보통 사람보다 강인한 체력을 지니게 됩니다." 예성원의 말을 여운상이 낚아챈다. "그러니까 네놈은 열흘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는 말이다. 백섬도 역시 그 정도는 버틸 터이니, 그 동안 알아서 사막을 벗어나면 살 수 있다." "못 벗어나면 죽는 거네요?" "걱정 마라. 네 에미는 아직 젊고 이 애비 역시 건강한데다가, 훼방꾼이 없으니 아들 둘에 딸 하나만 더 낳아 잘 키울 테니까 말이다." "아, 알았다구요. 그럼 잘 먹고 잘 사세요." 여천후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이어 그는 백섬의 등에 훌쩍 올라탔다. 제3장 사해상진(砂海商鎭) 타클라마칸 사막(塔克拉牙汗砂漠). 신강(新疆)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의 저지(底地)를 차지하여 동서의 길이 삼천여 리, 남북으로 이천 리에 걸쳐 뻗어 있는 열사의 대황지가 그곳이었다. 혹서(酷署)와 혹한(酷寒), 낮에는 찌는 듯한 더위로 이글거리고 밤에는 살을 에일 듯한 한풍에 도무지 생물(生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절지였다. 위로는 천산산맥(天山山脈)이 있어 한대(漢代)부터 동서무역로(東西貿易路)가 되어 비단(緋緞)이 천하로 팔려나가는 요충지이기도 하다. 한데, 인적이 드문 이 죽음의 대사막에 난데없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천하경동의 대풍운의 주역이 탄생하니……. 휘- 이- 잉! 대사막은 강렬한 돌개바람에 황사(黃砂)가 수천 장 허공 위로 날려 올라간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끝없이 펼쳐진 모래의 바다(砂海). 딸랑- 딸랑-! 어디선가 방울음이 들리는 것이 아닌가? 무려 수백 마리에 달하는 낙타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단봉낙타(短峯駱駝)들의 등에는 튼튼하게 졸라맨 짐들이 양 옆으로 늘어져 있고, 쌍봉낙타(雙峯駱駝)의 쌍봉 사이에는 작렬하는 태양열광(太陽熱光)을 방지하는 듯 흰 두건을 두른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대략 오십여 명쯤 됐다. 그들은 바람에 실려 오는 모래를 막으려는 듯 눈만을 내놓은 채, 얼굴 전체를 흰 천으로 감고 있었다. 한데, 이들의 눈은 모두가 파란색이 아닌가? 이들은 바로 색목인(色目人)이었다. 수만 리나 떨어져 있는 이국인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아마도 상인들이 교역을 위하여 오는 것이리라. 낙타대상(駱駝隊商)의 선두엔 보통의 낙타보다는 배가 더 큰 거대한 금빛낙타가 휘몰아치는 대강풍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힘차게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 놈은 낙타의 왕이라 일컬어지는 금령비천타였다. 금령비천타의 쌍봉 위에는 하나의 금빛 교자가 얹혀 있었다. 두꺼운 백포(白袍)로 사방을 가리운 교자였다. 한데, 어느 한순간 백포 사이로 하나의 손이 불쑥 튀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귀엽고 자그마한 교수였다. 우유빛처럼 희고 윤기가 흐르는 갸름한 여자아이의 손. 이윽고 손은 백포를 좌우로 가르며 불쑥 사람의 머리가 드러난다. 대략 십이 세쯤 되어 보이는 아름답고 풋풋하고 싱그러운 어린 소녀였다. 푸른 청보석을 박아 넣은 듯 투명하게 비치는 벽안의 소녀는 치렁한 금발이 제멋대로 휘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기심이 잔뜩 어린 눈으로 사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정말 바람이 굉장한데?" 사막의 여행은 처음인 듯, 소녀의 짤랑한 옥음에는 감탄의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허헛, 녀석. 바람이 드세니, 그만 두고 이리 오너라." 늙수그레하면서도 위엄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벽안의 미소녀는 입술을 샐쭉이며 투정을 부렸다. "흥! 할아버진 나나(那那)에게 재미있는 것을 구경시켜 준다고 하고선 매일같이 사막만 돌아다니고……." 미소녀는 퉁퉁 볼을 불리며 교자 안으로 머리를 감추었다. 칠순 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 역시 벽안인 색목을 지니고 있었다. 나이답지 않게 붉은 홍안(紅顔)과 만인을 억누를 것만 같은 태산(泰山) 같은 기도, 거기에 가슴께까지 늘어뜨린 은염은 그의 위엄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