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3편 (3/45)
참으로 한심하구나." 저 멀리 창천을 바라보며 탄식을 토하는 소년의 손(手)은 일반 범인(凡人)과는 다른 또 다른 광채를 띠고 있었다. 손톱(爪)이 살색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금칠이라도 한 듯한 찬란한 금조(金爪)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금의 눈과 황금의 손톱을 지닌 신비의 미소년. 그는 자신을 여천후(呂天侯)라 자칭했다. "빌어먹을! 하늘의 제후(帝侯)가 된다는 거창한 이름만 있으면 뭘 하냐? 고작 바람에 갇혀 지내고 있는 한심한 꼴이라니……." 문득 그는 천광백록의 머리를 툭 치며 말을 던졌다. "백섬! 네 힘으로 어떻게 저 바람의 장벽을 뚫을 수 없겠냐?" 천광백록은 즉각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백섬의 모피(毛皮)가 제아무리 질기다 한들 바위에 구멍을 뚫어 버리는 용권풍의 비사(飛砂)를 피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의 발굽이 아무리 단단하다고 한들 천 장(丈)을 치솟는 용권풍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에이! 그럼 집에나 가자. 밥이나 먹고, 보드랍고 탱탱한 엄마 젖이나 만지며 잠이나 자야겠다." 늘상 해 온 대로 소년 여천후는 체념을 한 채, 백섬의 발길을 돌렸다. 방원 일백 리(里)에 걸쳐 펼쳐진 호수와 초원과 숲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채 평화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드넓은 초원의 중앙엔 대로(大路)가 펼쳐져 있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대로를 만드느라 깔아 놓은 길은 흔한 벽돌이나 진흙 점토가 아니었다. 칠흑 같은 그믐밤에도 빛을 발한다는 백옥(白玉)으로 벽돌을 만들어 그것으로 길을 깔고 있는 것이다. 드문드문 호수를 주변으로 그림 같은 장원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중원의 부호(富豪)들이 본다면 당장 자신의 집을 때려 부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백 리 이내에 있는 모든 집들이 다 그렇다는 말이다. 더욱이 장원들의 지붕은 황금으로 주조된 기와가 얹혀 있어, 찬연한 금광(金光)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황금의 제국이라 불리울 만한 곳이었다. 백섬은 백옥대로(白玉大路)를 따라 바람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그 발굽 소리가 들리자, 장원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왕야(少王爺)! 안녕하십니까?" "갈수록 기도가 헌앙해지십니다그려." 노소를 불문하고 백섬을 탄 여천후를 본 사람들은 만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를 보냈다. 그들의 얼굴엔 여천후에 대한 사랑과 자랑스러움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한데, 기막힌 일은 그들의 행동이었다. 몸놀림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원에서 꽃을 가꾸던 칠순 가량의 화옹(花翁)이 정문(正門)으로 나와 예를 취한 것은 불과 촌각의 시각이었는데, 화원과 정문 사이의 거리는 어림잡아도 백 장(丈)이 넘어 보였다. 그 거리를 눈 깜박할 사이에 전정(剪定)을 든 채 나온 화옹의 경신술은 가히 섬전을 방불케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높이가 삼십 장에 달하는 높은 누대(樓臺) 위에서 바람을 쐬고 있던 십오 세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소녀가 치마를 펄럭거리며 날아 내리는데, 흡사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듯하지 않은가? 보법(步法)의 최고경지인 천층답공술(千層踏空術)의 기초를 능숙하게 익힌 솜씨임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런 초보적인 경지를 보이기 위해서는 내공력(內功力)이 최소한 삼 갑자(甲子)는 되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어머, 소왕야! 요즘은 어이하여 소녀의 목욕탕엘 안 오시죠? 소야께서 훔쳐보지 않으시니, 영 목욕하는 재미가 없단 말이에요." 붉은 혈능비단(血綾緋緞)을 펄럭이며 소녀는 허공 오 장쯤에서 교구를 멈추며 교태를 부렸다. "응, 홍요(紅姚)보다 서월(瑞月) 누나의 가슴이 더 커져서 요즘엔 월랑누나를 훔쳐보느라 바빠." 여천후는 손을 흔들어 보인 후 천천히 지나쳐 갔다. 기괴한 사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이가 채 일곱 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 소동(少童)들 십수 명이 놀고 있었는데, 제각기 목검(木劒) 하나씩을 들고 휘두르며 펼치는 초식(招式) 하나하나가 이미 무림에서 수백 년 전에 실전(失傳)된 상고절학(上古絶學)들이었다. "받아라! 달마혜검(達摩慧劒) 전삼식(前三式) 중 제일초식 항마천룡검(降魔天龍劒)이다!" "헹! 나는 오행검법(五行劒法)의 세 번째 초식, 화룡승폭류(火龍昇爆流)다!" "검(劒)이라면 역시 태을검법(太乙劒法)이 최고지! 복호참마(伏虎斬魔)!" 어린아이들이 펼치는 검법은 소림(少林)과 무당(武當), 화산파(華山派)의 장문인들도 모르는 진산절예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여천후를 보자 떼거지로 달려들고 있었는데, 질풍처럼 달려오는 어린아이들이 펼치는 신법은 다름아닌 곤륜파(崑崙派)의 최고절학인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 중 세 번째인 노룡질풍섬(怒龍疾風閃)이었다. "와아, 소왕야!" "오랜만이에요, 소왕야!" 물론, 제대로 내공이 뒷받침되지 못했기에 절대적인 위력은 엿보이지 않았으나 초식의 운용은 일류고수 못지않게 정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크! 백섬, 저 말썽꾸러기들에게 잡히면 오늘 저녁은 굶고 만다. 빨리 도망가자구." 여천후는 질겁하며 백섬의 뿔을 잡아당겼다. 백섬은 몰려드는 어린아이들을 가볍게 뛰어넘은 후, 비쾌하게 달려갔다. 구층을 치솟은 황금누각이 칠성(七星)의 방위(方位)를 점하며 세워져 있는 황금의 장원(莊園) 일곱 채가 있었다. 금황칠성장(金皇七星莊)이라 불리는 그곳엔 일곱의 가문이 거처를 정하고 있었다. 황금누란국(黃金樓蘭國)의 칠대가신(七大家臣)인 금황칠대국로(金皇七大國老)는 황금누란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인물들이었다. 그 중 최연소자인 검천성로(劒天聖老) 단우경(端宇慶)이 백삼십이 세(歲)였다. 그런 금황칠대국로 중 최연장자인 금왕성수옹(金王聖手翁) 예성원(芮星苑)의 장원인 성령천수장(聖靈天手莊)의 앞을 지나던 여천후가 백섬을 멈춰세웠다. "잠깐, 서월누님이나 보고 갈까?" 생각은 즉시 행동으로 옮겨졌다. 막 대청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맞이한 것은 열 살 정도 됐을까 한 어린 소동(少童)이었다. "소왕야, 할아버님께선 아직 귀가(歸家)하지 않으셨는데요." 소동은 예성원의 고손자(高孫子)인 예휘빈(芮輝彬)이었다. 다음 대의 성령천수장을 이끌어 갈 후계자로, 그 영특함은 황금누란국에 자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 안 계시다니 할 수 없군. 그럼 서월누님은?" "누님은 지금 목욕중이십니다." 예휘빈은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순간, 여천후의 눈가로 빠르게 광채가 스쳐갔다. '목욕? 그럼 옷을 벗고…….' 그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렇지만 내심과는 달리 그의 행동은 그지없이 점잖았다. "그래? 그럼 화원(花園)이나 구경하며 기다리지." 여천후는 태연자약하게 뒷짐을 진 채, 형형색색(形形色色)의 꽃이 만발한 화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원의 뒤쪽엔 하나의 전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봉황원(鳳凰院)이라 이름 붙여진 단아한 전각에는 성령천수장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 기거하고 있었으니, 예서월(芮瑞月)이라는 이름을 지닌 아름답기 그지없는 처녀(處女)였다. 나이는 스물한 살. 그녀의 미색도 미색이라지만 은은하게 풍기는 고아(高雅)함은 그대로 한 떨기 청란화(靑蘭花)를 보는 듯했다. 황금누란국의 청년들이 제일신부(第一新婦)로 누구나가 점찍어 놓은 여인이었는데……. 봉황원의 후미진 벽쪽엔 작은 창문(窓門)이 나 있었다. 그곳으로 발소리를 죽인 채 살그머니 다가가는 불청객(不請客)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여천후였다. "헤헷, 일전엔 급히 보느라 제대로 감상할 여유가 없었단 말씀이야. 고 기막힌 가슴이라니……." 창문은 마침 안쪽을 넉넉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빼꼼히 열려 있었다. 한쪽 눈을 들이대고 안쪽을 들여다보는 여천후의 황금빛 동공이 점점 커져 갔다.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따사로운 수증기 사이로 희멀건 살덩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름아닌 여인의 목욕탕이었는데, 풍성한 비누거품 속에 담겨 있는 여인의 알몸이 백사(白蛇)처럼 꿈틀거린다. 사슴(鹿)의 그것처럼 길고 우아한 목덜미를 문지르고, 유려한 호선(弧線)을 긋는 어깨죽지의 피부는 눈부시게 반짝인다. 한쪽 팔을 들어 겨드랑이를 닦는데, 보송한 액모(腋毛)는 보드랍기 이를 데 없었다. 일순, 여인은 한 손으로 오른쪽 가슴을 들어올렸다. 탐스럽다 못해 터질 듯이 부풀어올라 있는 젖가슴은 그야말로 꿀물이 가득 찬 수밀도(水蜜桃)였다. 길고 갸름한 여인의 한 손으로는 도저히 다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탱탱한 탄력이 넘쳐 흐르는 환상적인 두 개의 설봉(雪峰). 여인은 터질 듯이 부풀어 있는 자신의 젖가슴을 하나씩 잡은 채 부드럽게 비누칠을 하고 있었다. '저… 저… 우와!' 지켜보고 있던 여천후의 내심은 그야말로 환성과 찬탄을 아울러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보려는 욕심에 그만 모둠발을 세워 창문 위로 머리를 디밀었다. 일순, 여인의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누가… 엿보고 있어!' 그녀는 창문에서 들어오던 햇빛이 차단되며 욕탕의 물 위로 사람의 머리 그림자가 비춰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의 두 손이 본능적으로 가슴을 감싸안으며 시선은 창문을 곁눈질했다. '소왕야께옵서……?' 그녀는 관음증(觀淫症) 환자의 정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황금의 눈을 지닌 사람은 오직 한 명밖에 없었기에 여천후를 알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데, 자신의 알몸을 훔쳐보는 음흉한 눈길을 감지한 그녀의 행동이 오히려 대담하게 변하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가슴을 가린 손을 떼고는 두 팔로 팔짱을 끼는 여인의 젖가슴은 자연스럽게 더욱 위로 치켜져 올라오고 있었다. 그 팔을 이번엔 안쪽으로 모으니, 여인의 젖가슴은 두 개가 서로 부딪치며 도발적으로 앞으로 튀어 나왔다. '우아……!' 여천후의 눈이 더욱 휘둥그래 치떠졌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문득 여인은 몸을 일으켰다. 촤아아……! 물살이 여인의 알몸에서 흘러내렸다. 안타깝게도 욕탕의 물은 허벅지 위에서 찰랑거렸다. 만월(滿月)처럼 부푼 여인의 둔부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아랫배의 끝에서 물살이 일렁이니, 아쉽지만 그 아래는 불청객의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조, 조금만 더…….' 호기심이 가득 찬 악동(惡童)의 눈에 괜한 힘만 들어갔을 뿐이었으니… 여인은 그런 황금의 눈길을 온몸으로 받으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차피 천녀의 몸은 소왕야의 것. 지금 보셔도 무방하지만, 그래도 이곳만은 아니 되어요. 소왕야께서 장성하신 후, 초야(初夜)의 신비감을 위해서라도…….' 여인은 허벅지 사이의 안쪽을 손바닥으로 가리운 채 욕탕에서 나와 얼른 수건으로 알몸을 휘감았다. '에이, 조금 일찍 올걸.' 수욕(水浴)이 끝났음을 깨닫자, 여천후는 아쉬움을 삼킨 채 창문에서 떨어져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소왕야(少王爺). 어인 일로 누추한 노신의 장원엘 다 오셨습니까?" 금황칠대국로 중 최연장자이자 성령천수장(聖靈天手莊)의 장주인 금왕성수옹(金王聖手翁) 예성원(芮星苑)은 여천후에게 깎듯이 예의를 표했다. 세수(歲壽) 백구십칠 세(歲)를 헤아리는, 살아 있는 전설과도 같은 존재였다. 빛나는 백발(白髮)을 가지런히 뒤로 넘기고, 탐스런 은염(銀髥)을 가슴까지 드리운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푸근하게 마음이 풀어질 정도였다. 황금누란국의 모든 백성들에게서 가장 존경을 받는 그는 국왕(國王)조차 정중한 예의를 다하는 원로 중의 최연장자이기도 했다. 그의 의술은 전설적인 의성(醫聖)인 신농씨(神農氏)의 진전을 적통(適統)으로 이어, 뛰어나기 이를 데 없었다. 쉽게 말해 숨이 끊어지지만 않았다면 그의 손을 거쳐 죽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천수(天壽)를 다하여 죽어 가는 사람은 제외하고서 말이다. "성로(聖老) 할아범!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어서 왔는데 말이야." 여천후는 화원을 빠져 나오다 만난 예성원에게 대청으로 안내를 받으며 짐짓 시침을 떼고는 천연덕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헛허, 어떤 의문이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좌정하시지요." 막 여천후가 자리에 앉고 예성원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한 명의 여인이 조심스럽게 황금쟁반을 받쳐 든 채 들어섰다. 이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하얀 백라비단(白羅緋緞)으로 만든 옷은 그야말로 다소곳하고 조용한 여인의 품성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했다. 아무런 화장기도 없고 꾸밈도 없는 여인이긴 했으나 한 눈에 들어오는 부위가 있었다. "헤헷, 서월누님의 가슴은 옷을 입어도 정말 돋보이는걸?" 여천후는 풍성하게 튀어 오른 백의여인의 가슴 부위를 보며 싱글거렸다. 예성원이 그의 말꼬리를 붙잡으며 반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소왕야, 그럼 월아가 옷을 안 입고 있을 때도 보았단 말씀입니까?" "일전에 왔을 때 서월누나가 목욕한다고 해서 몰래… 이크, 내가 무슨 말을……." 신나게 대답하던 여천후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호오, 그런 일이?" 일순, 예성원의 노안(老眼)으로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증손녀인 예서월(芮瑞月)을 돌아보며 넌즈시 물어 보았다. "월아야, 넌 알고 있었느냐? 소왕야께서 네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셨다는데……." "예……." 예서월은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욕실의 창문을 조금 열어 놓았는데, 그 틈새로 소왕야께서 벌써……." 예성원의 눈길이 여천후에게로 향했다. "소왕야, 본국을 이끌어 나가실 왕재(王才)께서 비겁하게 창 틈으로 아녀자의 목욕 장면을 엿보시다니요?" 그의 말소리는 엄했다. 부왕(父王)조차 국로(國老)의 예우로서 대하는 예성원이었다. 그런 그가 근엄한 표정을 짓자, 여천후로서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험, 이번 일은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인 듯 싶은데……." 여천후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건 성로할아범이 잘못 알고 있는 거라구요. 내가 엿보긴 했지만, 여자가 목욕을 하면서 창문을 열어 놓은 것은 봐달라고 하는 뜻인데… 열려진 창문을 엿본 것이 죄를 지은 것은 아닐 것이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알면 몸을 감춰야 하는데 오히려 다 보여 줬단 말이에요." "모두 다……?" "아니, 그곳은 가리고……." 여천후는 얼른 정정했다. "할아버님!" 예서월은 급기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며 얼른 대청에서 도망치듯 빠져 나가고 말았다. "헛헛, 녀석. 네가 아무리 몸이 달아도 오 년은 더 있어야 할 게다." 예성원은 예서월의 등 뒤로 자애로운 웃음을 실어 보냈다. "그래, 이 늙은이에게 물어 보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성원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여천후를 바라보았다. "응.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어서요." "바깥 세상으로 나가고 싶으십니까?" "응, 내가 생각해 봤는데 칠국로(七國老) 할아범들은 밖을 출입하는 것 같아. 일전에도 성로할아범은 한 달간 여기 없었지요? 내가 백섬을 타고 샅샅이 찾아 봤지만 국내(國內)엔 없었어." 여천후는 뜨거운 눈길로 예성원을 직시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예성원은 복잡한 눈길로 여천후를 바라보았다. '황금의 핏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인가? 만상(萬象)의 도리를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천하를 종횡(縱橫)하는 운명… 이제 때가 되었음인가? 황금누란국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수업(受業)을 쌓을 때가 되었단 말인가?' "알아? 몰라?" 예성원의 상념은 여천후의 재촉으로 끊기고 말았다. "노신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국왕(國王)께옵서만 길을 알고 계십니다. 노신을 비롯한 칠국로가 바깥 세상을 나갈 때도 국왕께옵서 길을 인도하십니다. 황금누란국에서 나가는 유일한 길을 아시는 분은 오직 국왕 한 분뿐이시지요. 그것은 천오백 년 동안 내려온 누란의 제일율법(第一律法)입니다." "아바마마만 알고 있단 말이지?" 문득 여천후의 눈가로 반짝 이채가 스쳐갔다. '그러리라고 생각해서 미리 계획을 세워 두었었지. 좋아, 오늘 밤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지. 아바마마의 몸이 오늘쯤은 불덩어리처럼 달아올라 있을걸?' 의미 있는 미소가 여천후의 입가로 번져 갔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오늘 밤,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다는 사실은……. 제2장 엄마와 하룻밤에 황금 이만 냥(兩)? "여보, 아라화(娥羅花)… 제발, 오늘은 천후 놈을 차 버리고 나와 함께 자도록 합시다." 화려한 금포를 걸친 사십대 중반의 중후한 인상을 지닌 중년인은 여인의 앞에 거의 무릎을 꿇은 채로 애원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여운상(呂雲翔)이었고, 사라졌다고 알려진 전설의 왕국인 누란왕국의 지배자라는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정확히 일만오천칠백육십이 명(名)에 달하는 황금누란(黃金樓蘭)의 제왕인 황금왕(黃金王), 여운상. 그의 애원을 받고 있는 여인은 여운상의 부인인 황금여왕(黃金女王) 아라화(娥羅花)였다. 당금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 그녀는 여운상이 젊은 시절, 서방(西方)의 대불림국(大拂臨國:현재의 터어키 지역)에 갔다가 한눈에 반해 대불림국 호족인 사아라의 부친에게 황금 일천만 냥에 달하는 엄청난 선물을 떠안기고 결혼을 허락받은 여인이었다. 타오를 듯 붉은 노을 같은 적발(赤髮)을 길게 드리운 채, 파아란 벽안(碧眼)에 창궁(蒼穹) 같은 청정함과 대해(大海)와도 같은 표용력을 지닌 이 여인은 일국의 왕후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황금누란의 신민(臣民)들은 황금왕 여운상보다도 오히려 황금여왕 아라화를 더욱 사랑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녀가 황금누란의 후계자를 낳고부터는 가히 전폭적인 사랑을 보내 왔다. 황금왕 여운상조차 공공연히 그녀를 황금누란의 제일보물(第一寶物)로서 치부하고 있던 터였다. 무르익을 대로 농익은, 만지면 터져 버릴 듯이 풍만한 몸매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난 하얀 백라비단(白羅緋緞)을 두르고 있는 그녀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아(侯兒)가 소첩과 자겠다는 것을 어찌 말릴 수가 있사옵니까?" "벌써 한 달이나 그 놈과 자지 않았소?" 약간 노기를 띤 채 여운상은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라면… 아들과 남편의 요구 중, 어느 쪽을 들어 주겠어요?" "나라면 당연히 남편의 요구가 우선이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여운상은 얼른 대답했다. 하지만 아라화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소첩의 생각은 달라요. 후아가 엄마 품을 찾을 날이 얼마나 남았겠어요? 아마도 올해가 마지막일 거예요. 소첩의 몸은 앞으로도 일평생 당신의 것이지만, 그 아이는 얼마 안 있으면 어미 품을 떠날 아이. 어느 쪽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할지는 자명한 일이 아닌가요?" 논리정연한 아라화의 말에 여운상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럼… 그 놈이 없을 때 한 번……." 급기야 여운상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그의 의도는 거기서 무산되고 말았다. "엄마!" 문을 왈칵 열고 들어오는 여천후를 보는 여운상의 얼굴은 휴지조각처럼 일그러지고 말았다. "으… 자식이 아니라, 원수로고!" 부친의 원독에 찬 눈길을 받으면서도 여천후는 태연히 아라화의 품을 파고들었다. "헤헷, 엄마! 후아는 배가 고프다구." "우리 아가, 오늘은 무얼 하고 놀았을까?" 아라화는 열세 살이지만 몸집이 자신만큼 커진 아들을 보듬어 안으며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백섬을 타고 왕국의 끝까지 가 보았어." "저런? 앞으론 위험하니, 거기까지 가면 안 된다." "응." 여천후는 매우 순종적인 표정을 지으며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 흉칙한 놈! 내 앞에선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모조리 피우는 놈이 에미 앞에선 그지없이 순진한 척하니…….' 여운상은 내심으로 가슴을 칠 뿐이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비단(非但) 여운상만이 아니라, 황금누란국의 모든 백성들은 여천후의 장난에 골머리를 싸맬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아라화 앞에서 여천후를 공개 비난할 수 없었다. 아라화에게 있어 여천후는 매우 말을 잘 듣고 예의가 바른, 귀엽기 한량없는 아기였기 때문이었다. 여천후는 거리낌없이 아라화의 앞섶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엄마의 젖가슴은 정말 크고 따뜻해. 안 그래요, 아버님?" 짐짓 여천후는 여운상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싱글거렸다. "또 엄마 속살은 부드러우면서 탄력이 넘쳐 흐른단 말씀이야." 여천후는 아라화의 품에 안겨 그녀의 몸을 마음껏 주무르는데, 그의 손짓이 여운상의 눈에 확연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엄마, 후아는 졸려. 목욕시켜 주고 재워 줘요." "목, 목욕까지?" 여운상은 인상을 긁으며 여천후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여천후는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헤헷! 어머님의 알몸은 정말 기가 막히지요? 물론, 아버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누가 엄마보고 나이가 서른이 넘고, 아이를 낳은 유부녀라고 하겠어요? 이십대 초반의 싱싱한 처녀보다 더 황홀한 몸이란 말씀이야." 여운상은 자신이 미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