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명]풍운무림 제1권 (전3권) - 2편 (2/45)
만상비천가(萬象秘天家)의 가주(家主) 만상신유(萬象神儒) 백리문(白里文), 천병신기가(天兵神奇家)의 가주 무적전신(無敵戰神) 백일강(伯一强), 무영천살가(無影天殺家)의 가주 무영종(無影宗) 영무흔(影無痕), 수룡천수가(水龍天水家)의 가주 해룡왕(海龍王) 해천인(海天人), 장미화가(薔薇花家)의 가주 장미부인(薔薇婦人) 초려군(草麗君). 한마디로 말해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남일녀(四男一女)였다. 무림천하(武林天下)에서 가장 신비로운 가문의 주인들이자, 그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특출한 능력의 소유자들이기도 했다. 그들 다섯 가문에 대한 명칭과 가주의 이름을 대신 말해 준 백의노인은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삼가 구주종횡가(九州縱橫家)의 가주인 구주상야 미파람이 황제폐하(皇帝陛下)를 뵈옵니다." "황제폐하? 그건 또 무슨 말이오?" "복희(伏羲), 신농(神農), 수인씨(燧人氏)을 삼황(三皇)이라 하고… 황제(黃帝)를 비롯하여 전욱( 頊), 제곡(帝 ), 요(堯)와 순(舜)을 합하여 오제(五帝)라 칭하며 가장 성스런 군주(君主)로 칭송합니다. 삼황과 오제를 합하여 황제(皇帝)라 하노니, 이는 만천하의 인간 중 가장 존귀한 존재를 일컬음입니다. 왕(王)은 이제껏 수없이 많았으니, 이제 중원대륙(中原大陸)을 초유(初有)로 통일하시어 중원제국(中原帝國)을 건설하실 분에게 가장 어울리는 명칭이 아닌가 합니다." 구주종횡가의 가주인 구주상야 미파람은 더욱 열기 어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다른 이가 부를 땐 폐하(陛下)라 부름이 당연하옵고, 만조백관과 백성을 향해 폐하를 자칭하실 땐 짐(朕)이라 하소서." "좋소!" 청년왕은 혼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의 보좌를 받아 중원대륙을 통일한다면 그 때부터 나는 황제(皇帝)의 보위에 오를 것이오. 짐(朕)은 시황제(始皇帝)라 칭할 것이고, 짐의 다음 대는 이세황제(二世皇帝)! 그 다음은 삼세황제(三世皇帝)가 될 것이니, 천세(千世)토록 이어질 것이오!" 청년왕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육합천가(六合天家)가 바라는 소원은 지금 이 자리에서 들어 주리다. 앞으로 영원히 황실(皇室)은 무림의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오." 그러자 이제껏 가만히 있던 수룡천수가의 가주인 수룡왕 해천인이 품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붉은 기운이 감도는 적령수정(赤靈水晶)이었다. 적령수정은 금강석(金剛石)에 비견되는 보물이 아니던가? 만장해저(萬丈海底)의 수압(水壓)과, 해저화산(海底火山)의 무엇이라도 녹여 버릴 듯한 화염(火焰) 속에서 일만 년의 세월이 지나야만 만들어진다는 가장 강한 물체 중의 하나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파가가각-! 천병신기가의 가주인 무적전신 백일강이 적령수정을 받아 들더니, 소맷자락에서 한 자루 거무튀튀한 비수를 꺼내 들어 마치 사과 껍질을 까듯 가볍게 손을 놀리는 것이 아닌가? 그의 손 위엔 삽시간에 한 마리 용(龍)이 조각되어 나타났다. 둥실-! 떠오른 적룡수정상(赤龍水晶像)은 표표히 허공을 날아 청년왕의 눈앞에 멈추어졌다. 길이 다섯 치 정도에 달하는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감도는 적룡의 등은 작은 비늘(鱗)로 덮혀 있었으나, 배(腹) 부위는 미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로 그 때였다. "육(六)!" "합(合)!" "수(守)!" "호(護)!" "천(天)!" "황(皇)!" 육합천가의 가주 여섯 명이 일시에 웅혼한 목소리를 토하며, 동시에 손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파- 파- 팟-! 그들의 손 끝에서 뻗어 나온 여섯 줄기의 경기는 적룡수정의 배에 여섯 개의 글자를 새겨 놓았다. <육합수호천황(六合守護天皇)> 뱀이 날고 용이 춤추는(龍蛇飛騰) 듯한 웅혼하기 이를 데 없는 필체로 새겨진 여섯 개의 문자였다. 적룡수정상은 조용히 청년왕의 수중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육합천가의 가주들은 일시에 깊숙이 대례(大禮)를 올리며 합창했다. "육합수호천황룡패(六合守護天皇龍牌)! 그 앞에 육합천가는 그 어떤 명령이라도 받들 것이오이다! 천년충성(千年忠誠)을 받아 주십시오!" 청년왕은 고개를 힘있게 끄덕여 보였다. "좋소! 이후로 무림은 황실과 별개의 세상이오. 그 어떤 일이 있다 해도 황실은 결코 무림의 일에 관여치 않을 것을 서약(誓約)하오!" 그렇게 이루어졌다. 천년계약(千年契約)! 육합수호천황가(六合守護天皇家)라 명명되는 여섯 개의 가문은 중원대륙 최초의 황제가 되는 인물과 계약(契約)을 체결한 것이다. 序幕(三) 제국(帝國)의 종말(終末) 한바탕의 꿈이었다. 정(政)이라는 이름을 지닌 소년왕(少年王)은 장성하면서 천하대기(天下大器)로 탈바꿈되었다. 그는 대붕(大鵬)이로되, 아직은 날개가 채 자라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노애라는 파계승(破戒僧)에다, 거세하지 않은 환관(宦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태후(太后) 조희의 몸과 마음까지 완전히 굴복시킨 노애는 자신이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함양성(咸陽城)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압되고 말았다. 그의 좌절은 여불위의 발목까지 함께 틀어쥐고 늪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제껏 태후인 조희와 상국인 여불위, 조희의 정부(情夫)인 장신후(長信候) 노애가 국정(國政)을 좌지우지해 왔었으나 여불위와 조희, 노애 등 누구도 알지 못했던 신비의 수호황권세력(守護皇權勢力)이 일어나 진왕(秦王) 정(政)을 철통같이 에워싸며 왕권수호(王權守護)의 기치가 오르자, 난(亂)을 일으켰던 노애는 참수(斬首)당하고 조희는 폐위되어 유배되었고, 여불위 또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至上)인 상국의 자리에서 면직(免職)되고 말았다. 그 이 년 후. "나는 꿈을 꾸었는가?" 여불위는 망연한 신색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때 식객(食客)만 삼천 명이 넘었던 그의 장원에는 을씨년스런 삭풍이 휘몰아치고 있을 뿐이었다. 중원천하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을 이루었던 그의 장원엔 고적함만이 감돌았다. "그 아이는 나의 죽음을 원하고 있다." 독백(獨白)을 흘리는 그의 눈가엔 씁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문득, 여불위는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엔 휘황한 광채를 발하는 황금의 잔(盞)이 들려 있었다. 핏빛보다 진한 혈액(血液)이 찰랑거린다. 그 수면 위로 피로한 여불위의 얼굴이 흔들리며 투영(透影)되었다. "내가 죽음을 지체한다면 평생을 이룩한 황금의 신화는 그 아이에게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리라." 깊은 회한이 담긴 그의 두툼한 눈자위엔 주름이 패여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정(政)… 너는 알리라. 네 몸 속에서 흐르는 혈통(血統)의 본질이 여씨(呂氏)임을… 그렇기에 날 용납할 수 없는 것이겠지." 그는 금잔(金盞)을 눈앞에까지 들어올렸다. "나도 헛된 꿈을 꾸었지만, 네가 이루려는 것도 사상누각(砂上樓閣)일 뿐임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문득, 그의 눈가로 의혹의 그림자가 한 줄기 피어 올랐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진(秦)의 국권(國權)과 병권(兵權)은 나와 노애가 장악하고 있었거늘… 정(政), 그 아이를 떠받들며 일시에 왕권(王權)을 복원시킨 신비의 세력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그랬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신비(神秘)였다. "내가 알아낸 것은 그들의 명칭뿐… 육합수호천황가(六合守護天皇家)라는 이름 아래 구주종횡가(九州縱橫家), 만상비천가(萬象秘天家), 장미화가(薔薇花家), 수룡천수가(水龍天水水), 천병신기가(天兵神奇家), 무영천살가(無影天殺家)가 있다고 했지. 그들은 구름에 숨은 운룡(雲龍)처럼 신비의 장막 뒤에 숨어 왕권을 수호하고 있다. 내가 먼저 그들을 알았다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을… 하지만 지금 와서 그런 생각조차 부질없는 짓이지." 여불위는 독백을 그치고 단숨에 금잔의 혈액을 들이켰다. "크, 화끈하군! 역시 삼목섬여(三目蟾 )의 독액(毒液)이야." 여불위는 신음을 토하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삼목섬여라는 놈은 묘강(猫疆) 일원에만 서식한다는 독두꺼비였다. 그 놈의 입김만 쐬어도 피부가 녹아 내리거늘, 여불위는 그런 삼목섬여의 독액을 통채로 삼켜 버린 것이다. "힘이 갖춰지지 않은 황금은 단순한 돌덩어리에 불과한 것인데, 그걸 이제야 깨달았으니 누굴 탓하겠는가?" 여불위의 흔들리는 몸이 힘없이 의자 위로 무너졌다. "황금의 성(黃金城)! 후일 보게 되리라. 중원이 통일되어 하나의 제국(帝國)이 완성되더라도 그 힘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지상최강(地上最强)의 무력(武力)을 갖춘 황금의 손이 출현하리니, 그 앞에 만상(萬象)이 굴복하리라!" 여불위는 예언(豫言) 같은 일갈을 토했다. 그의 동공에 서린 생기(生氣)는 급격히 소멸되어 갔다. 힘없이 늘어지는 몸과 뒤로 젖혀지는 얼굴로 검붉은 반점이 버섯처럼 피어 올랐다. 입가로 흐르는 핏줄기. "그래, 한단(邯鄲)이었어. 희(姬)를 만나고 자초(子楚)라는 보물을 건진 곳. 하지만… 꿈(夢)이었어. 한단에서 꾼 헛된 망상. 나, 여불위는 노생(盧生) 같은 멍청이였지만 앞으로 올 황금수의 주인은 신(神)이 되리라!" 여불위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제1장 전설(傳說)의 왕국(王國) 중원대륙에 초유의 통일제국(統一帝國)이 탄생된 지 어언 일천오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이전의 모든 것들은 신화(神話)와 전설(傳說)로 포장되어 할아버지가 어린 손주를 무릎에 앉혀 놓고 들려 주는 옛날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진 모래의 바다가 있다. 사람들은 그곳을 타클라마칸(塔克拉牙汗) 사막砂漠)이라 부른다. 그곳을 지나며 역사에 글을 남긴 최초의 사람은 불도(佛道)를 구하기 위해 천축(天竺:인도)으로 가던 법현(法顯)이란 고승이었다. 그가 남긴 불국기(佛國記)에 의하면……. <옥문관(玉門關)을 나와 사하(砂河)를 건너 가는데… 사하 부근 일대엔 악마(惡魔)가 살고 있었다. 게다가 열풍(熱風)이 일어나 일단 나그네가 이것을 만나면 단 한 사람도 살아남는 자가 없었다.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없고, 건너 갈 길을 찾으려 해도 어느 쪽으로 발길을 내딛어야 할지 몰라 나그네는 다만 모래 위에 널린 사람 뼈(人骨)와 짐승 뼈(獸骨)로써 행로의 길잡이로 삼을 뿐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설명한 가장 확실한 역사였다. 그곳은 악마의 땅이었고, 죽음의 대지였으며, 저주의 역사만이 산재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횡단해 오는 대상의 무리들은 오늘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황금은 어떤 종류의 인간들에겐 목숨 이상의 의미가 부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진 낙타대상(駱駝隊商)은 꼬리와 머리가 서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선두에 선 낙타는 희귀하게도 황금의 털(金毛)을 지니고 있는, 보통의 낙타보다 두 배는 큰 거대한 황금낙타(黃金駱駝)였다. 황금낙타 위엔 두터운 차양이 드리워진 교자(橋子)가 낙타의 발걸음에 맞추어 흔들리고 있는데,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청량한 계집아이의 음성은 맑은 계류의 흐름과 같이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할아버지, 그럼 여불위라는 사람이 모았던 황금은 어디로 갔어요?" 손가락을 입에 물고 흥미진진한 옛이야기에 몰입해 있던 어린 소녀(少女)는 눈빛을 반짝이며 물음을 던졌다. "글쎄다… 그것에 관해서는 사막(砂漠)의 전설이 연루되어 있다고도 하는데……." "사막의 전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손녀의 통통한 볼을 매만지며 파아란 벽안(碧眼)의 색목노인(色目老人)은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그렇단다. 지금은 사막의 모래 속에 사라진 전설의 왕국(王國)이지." 서역(西域)이라는 이름이 중원에 알려진 것은 한무제(漢武帝) 때의 박망후(博望候) 장건(張蹇)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중원의 서북단(西北端)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대사막이었고, 삼두육비(三頭六臂)의 흉악한 오랑캐가 사는 이방지대(異邦地帶)였다. 사막에 있는 흔한 녹원(綠源:오아시스)조차 없는 죽음의 모래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 당(唐)의 고승(高僧) 현장법사(玄藏法師)는 천축(天竺)으로의 구도수행(救道修行)을 나서면서 그 죽음의 모래사막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 하거니와……. <사막을 건너매 천 리(里) 길에 한 방울의 물도 얻을 수 없으니 죽음의 대지요, 신기루(蜃氣樓) 같은 황금의 성곽을 발견했으나 인적이 끊긴 유령(幽靈)의 호곡성만 들리니, 지옥(地獄)이 예 아닌가 싶도다. 황망히 빠져 나오니 다시 찾을 수 없어, 꿈을 꾼 것이 아닌가?>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이르길……. <서역에 삼십육 국(國)이 있으니, 남북으로 천산(天山)과 곤륜(崑崙)이 가로막혀 육천 리(里)에 달하고, 옥문관(玉門關)으로 중원에 접해 있으며, 서(西)로는 총령(悤嶺:파미르고원)으로 차단되어 있다. 그 가운데 대사막이 펼쳐져 있으니, 한 방울의 물도 없으나 그 너머에 하나의 호수(湖水)가 자리잡고 있으니, 포창해(浦昌海)라 일컫거니와 따로이 염택(鹽澤)이라 하노라.> "포창해? 염택?" 소녀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모르겠다는 듯 벽안노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곳이 사막에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 걸요?" "그냥 전설에 나오는 호수일 뿐이란다. 천오백 년 전까지 이곳 타클라마칸 사막의 어딘가에 소금기를 머금은 바다처럼 넓은 호수가 있고, 그 호변(湖邊)에 황금의 신화를 간직한 왕국(王國)이 있었다지?" "어떤 왕국인데?" "누란(樓蘭)이라고 한단다." "누란왕국(樓蘭王國)……." 소녀는 그 이름을 입 속으로 되뇌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신비(神秘)하게 느껴지는 이름인데?" "신비로움으로 점철된 신비의 전설이지. 어디선가 막대한 황금이 사막으로 유입되어 포창해에 황금의 성을 세우고 흉노(凶奴)와 한(漢)나라가 서역 삼십육 국의 패권을 다투자, 누란왕국의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고 누란왕국은 모래바람(砂風)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단다." "흔적도 없이?" "아무런 자취도 없이 신화 속으로 사라진 거지. 신비의 호수와 함께 황금의 성도……." "전설의 왕국, 누란……." 소녀는 몽롱하게 풀어진 동공으로 아득한 옛날의 신비 속을 상상해 보았다. "사해상진(砂海商鎭)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열흘은 더 가야 하는군." 벽안노인의 말도 소녀의 귀에는 들어 오지 않았다. * * * * 죽음의 지옥사해(地獄紗海)인 타클라마칸 사막에도 절대금역(絶代禁域)이 있었다. 용권사풍해(龍拳砂風海)라 불리우는 그곳은 한마디로 바람의 지옥이었다. 사막을 다니는 대상(隊商)들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 마적(馬賊)? 아니었다. 작렬하는 태양(太陽)? 그도 아니었다. 목줄기가 타는 갈증(渴症)? 당연히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이 열사(熱砂)의 대사막을 대변하는 고통이긴 했지만, 낙타대상들에겐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예견된 불행은 이미 고통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었다. 용권풍(龍拳風)! 끝없이 펼쳐진 사구(砂丘)를 단숨에 허물어뜨려 평지로 만들어 버리고, 움푹 패인 분지를 삽시간에 드높은 모래산으로 치솟게 만드는 대사막 최강의 힘이 그것이었다. 용권풍은 그 위력도 위력이지만 돌발적(突發的)이라는 면에 있어서 대상들로 하여금 공포(恐怖)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 어떤 장애물이라도 예측 가능하다면 미리 준비를 갖출 수 있지만, 용권풍만은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용권풍이 동시(同時)에 다발적(多發的)으로 항시 일어나는 곳이 있었다. 용권사풍해역(龍拳死風海域)! 방원 일백 리에 걸쳐서 타클라마칸 사막의 가장 중앙에 위치한 사막을 그렇게 부른다. 지도(地圖)에 나와 있지는 않았지만 사막을 오래 다닌 대상들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바람의 대지는 일명 불귀지옥(不歸地獄)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엄청난 바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宏音)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희뿌연 모래의 장벽이 첩첩이 내부를 감싸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조차 않는 작은 모래 알갱이었지만 용권풍의 선풍력(旋風力)에 휩쓸린 그것의 힘은 가히 집채만한 바위에 구멍을 뚫어 버릴 정도였다. 용권사풍해역의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지난 일천오백 년의 모든 역사책을 들추어 보아도 어떤 기록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나왔다는 사람에 대한 기록은 전무(全無)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리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게 맑아, 손을 뻗어 손톱을 댄다면 쨍 하고 유리처럼 깨어져 버릴 지경이었다. 드넓은 호수(湖水)는 그런 하늘의 빛을 고스란히 담은 채 찰랑거린다. 호수의 주변을 싸고 퍼져 가는 짙푸른 초원(草原)과 한가로이 풀을 뜯는 사슴(鹿)의 정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를 보는 듯도 했다. 저 멀리 숲이 우거져 있는 것이 보였다. 온갖 과실수(果實樹)엔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각종의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려 청량한 향기가 은은하게 퍼져 가는데……. 황금의 누각(樓閣)이었다. 숲의 중앙에 자리한 거대무비한 누각은 그야말로 전체가 황금의 벽돌로 축조된 황금누각이었던 것이다. 구층(九層)에 달하는 황금누각은 전체적으로 한 그루 난초(蘭草)를 보는 듯했다. 대사막에서 난초를 가장 사랑했던 나라는 이미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던 누란인(樓蘭人)뿐이었다. 이미 아득한 신화계(神話界)로 증발해 버린 전설의 왕국… 누란! 일천오백 년 전, 진(秦)의 멸망 후 타클라마칸 사막에 돌연 황금의 제국으로 등장한 누란왕국(樓蘭王國)은 한(漢)과 흉노(凶奴)라는 거대한 양대제국 사이에서 돌연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져 버렸었다. 한데, 죽음과 저주의 대지라는 용권사풍해역 안에 그 존재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두- 두- 두-! 돌연, 요란한 발굽 소리와 함께 한 줄기 백광(白光)이 숲 속에서 뻗어 나왔다. "백섬(白閃)! 더 빨리 달려 봐!" 듣는 것만으로도 폐부가 시원해지는 듯한 청량한 소년의 음성이 아울러 터져 올랐다. 하얀 섬광은 다름아닌 흰 사슴(白鹿)이었다. 왕관(王冠)처럼 뻗어 올라간 뿔과 조밀하게 나 있는 가지런한 털빛까지 하이얀 백록은 보통 사슴보다 세 배는 더 컸다. 검은 자위가 보이지 않는 흰 눈(白眼)은 하얀 진주(珍珠)를 박아 넣은 듯 부드러운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지상(地上)에 이런 형상을 지닌 사슴은 오직 한 종류, 천광백록(天光白鹿)뿐이었다. 사슴의 제왕이라는 천왕화록(天王花鹿)과 대식국(大寔國:현재의 아라비아 지역) 최고의 명마(名馬)인 한혈설총마(汗血雪 馬) 사이에서 새끼가 태어날 확율은 천만분의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서 태어난 천광백록은 천 년을 장수하며 하루에 천 리를 주파하는 빠르기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영험함을 지닌 영물(靈物)이었다. 천광백록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들판은 물론이고 산이나 강, 호수까지 거침없이 내달리고 헤엄쳐 건널 수 있는 수륙양용(水陸兩用)을 겸하고 있기까지 했다. 한번 주인을 섬기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치는 일편단심의 충정심은 천광백록을 값을 치룰 수 없는 절대의 보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 천광백록을 타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십삼 세 정도의 소년이었다. 황금을 녹여 길게 실(金絲)로 뽑아 짠 황금의(黃金衣)를 걸친데다가, 금덩이로 바닥을 깔고 황금의 편자를 박은데다, 황금실로 짠 당혜(唐鞋)를 신은 소년의 자태는 눈부시기 이를 데 없었다. 하이얀 피부는 뽀얗기 이를 데 없었고, 긴 머리결은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데, 인록(人鹿)이 하나가 되어 초지를 질주하는 모습은 가히 환상이라는 말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여인의 입술보다 붉은 소년의 입술이 열리자, 예의 청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백섬! 오늘은 한 바퀴 도는 데 한 식경 이상 걸리면 안 돼! 엄마가 특별식을 해 준다고 했으니, 늦으면 네 밥은 없어!" 소년의 협박에 천광백록은 섬전처럼 치달려 갔다. 삽시간에 초원을 가로지르고, 호수 속으로 뛰어든 천광백록은 조금도 속력을 줄이지 않은 채 재빠르게 헤엄쳐 갔다. 콰우우우웅-! 엄청난 용권풍의 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치고 있는 앞. "죽음의 바람… 언제까지 여기에 갇혀 지내야 하지?" 소년은 침울한 신색으로 낮은 독백(獨白)을 흘렸다. 문득, 소년의 눈빛이 강렬하게 불타 올랐다. 착각을 한 것일까? 소년의 두 눈에서 두 개의 태양(太陽)이 폭발하고 있는 듯한 광휘(光輝)가 뻗어 나왔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황금의 눈(黃金眼)! 특이하게도 소년의 눈동자는 황금알을 박아 넣은 듯한 금안(金眼)이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저 멀리 광활한 천하(天下)가 기다리고 있거늘… 여천후(呂天侯) 너는 고작 바람에 갇혀 공씨(孔氏) 노친네가 말했던 십오 세 입지(立志)의 웅대한 포부를 열어 보지도 못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