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태극문 - 24편 (24/87)
막비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피바다속에 누워 있는 진표를 내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삼 일내로 네 동생을 내게 보내지 않는다면 다시 너를 찾아 오겠다. 그때 내 손이 오늘처럼 자비로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 는게 좋을거다." 막비는 떠나갔다. 진표에게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치욕과 상처를 남겨준 채로. 조자건은 묵묵히 쓰러져 있는 진표를 바라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동작대의 허물어진 폐허 한 구석에서 진표와 막비의 대결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표가 처참한 모습으 로 바닥에 쓰러졌을 때도 그는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막비를 막으려거나 앞으로 나서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사마결은 그 점이 못내 아쉽고 궁금했다. 그는 비록 조자건을 알게된 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가 알 고 있는 조자건이란 인간은 절대로 친구가 위기에 처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진표는 조자건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런데도 그는 진표가 남에게 모욕을 당하고 무참한 꼴이 되는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 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사마결은 조자건을 향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막비를 막지 않았소?" 그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사실 그는 진표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단지 그는 까 닭없이 화가 났을 뿐이다. 조자건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진표를 끌어안은 채 눈물을 떨구고 있는 진승남 을 쳐다보다가 오히려 반문했다. "당신은 진표란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사마결은 눈쌀을 살짝 찌푸렸다가 즉시 대답했다. "자세히는 모르오. 하지만 소문으로 듣기에는 신의가 대단하 고 아주 의지견정(의지견정)한 사람이라고 하오." 그는 조자건의 눈치를 슬쩍 살피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특히 남에게 모욕을 당하면 참지 못한다고 하더군." 조자건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한 말은 모두 옳지만 한 가지는 약간 틀렸소." 사마결은 즉시 물었다. "그게 뭐요?" "진표는 남에게 당한 모욕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소. 그가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것은 친구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이오. 친 구에게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그는 죽는 길을 택할거요." 사마결은 머리가 비상한 인물답게 조자건의 말속에 숨은 뜻 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를 돕는게 그를 모욕하는 일이란 말이오?" "진표는 항상 자신의 가족은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고 믿어 왔소. 자신의 동생이 남에게 수모를 당했다면 당연히 자 신의 힘으로 설욕을 해야 하오. 설혹 죽는 한이 있어도 그는 그 일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걸 용납하지 않을거요. 더구나 친구의 도움 따위는 절대로 받으려 하지 않을거요." 조자건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전에 내가 만약 나서서 그를 구해주었다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거요. 그에겐 그보다 더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일이 없을테니까." 조자건은 진표의 오랜 친구이니만큼 그에 대해서는 다른 누 구보다도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사마결은 조자건이 이 런 말을 한 이상 절대로 틀림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성격이 정말 그렇게 과격하오?" "과격한게 아니라 그만큼 순수한거요. 그에게 있어 친구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이니까." 사마결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친구를 귀중하게 생각한다는건 알겠는데 친구에게서 도움을 받는건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니...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구료."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오." 사마결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슬쩍 조자건을 돌아보았 다. "그럼 당신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작정이오?" 조자건은 한동안 진승남의 품에 안겨 있는 진표를 바라보았 다. 그의 얼굴은 비록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빛은 침울하게 가 라앉아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를 도와주는건 그를 모욕하는 일이오. 하지만 그를 위해 복수하는 일은 친구라면 의당해야 하는 일이오. 진표도 그건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거요." 이, 음 모 막비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최소한 금화루(금화루)의 이층에 특별히 마련된 그만의 전용 좌석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는 그랬었다. 금화루는 낙양의 동문대로(동문대로)끝에 위치한 크고 아름 다운 삼층루각이었다. 이곳은 비단 낙양일대에서 제일가는 주 루일 뿐 아니라 기루(기루)이기도 했다. 이 금화루에 자신의 전용좌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낙양에 서 겨우 다섯 명 뿐이었고, 막비는 당연히 그 중에 속해 있었 다. 그의 전용좌석은 금화루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이층의 창 가에 인접해 있었다. 특별히 마련된 푹신푹신한 호피(호피)의자에 앉아 창문을 내 다보노라면 비단 낙양의 번창한 거리뿐만 아니라 산자수려(산 자수려)한 낙양 일대의 풍광(풍광)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동쪽으로 멀리 백마사(백마사)가 보이고 남쪽으로 시선을 돌 리면 도도히 흐르는 낙수(낙수)의 물결과 그 유명한 이궐용문 (이궐용문)도 볼 수 있었다. 막비는 호피의자에 편히 앉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금존청 (금존청)을 기울이며 입가에 느긋한 미소를 매어 달았다. 그는 지금 더할 나위없이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와 싸움을 하고 나 면 그의 마음은 항상 상쾌했고 몸도 개운해지곤 했다. 더구나 덤으로 절세미녀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으니 더욱 기분이 흡족한 것이다. 그는 일전에 우연히 보았던 미녀의 초롱한 눈과 야들야들한 피부의 감촉을 떠올리고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흐흐...진결(진결)이라고 했던가? 진표같은 놈에게 그런 동 생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군.)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오늘이나 내일중으로 진표의 여동생은 그에게 올 것이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게 되면 먼저번의 일까지 보태서 끔찍하 게 사랑해 줄 작정이었다. 먼저번에는 방심하다가 거의 품속으 로 들어온 고기를 놓쳤으나 이제는 그 고기가 스스로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올 것이고 그도 결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녀가 오지 않는다면.... 막비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는 진표뿐만 아니라 그놈의 일가(일가)를 모두 없애 버 리겠다!) 허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무림에 자자하게 퍼져 있는 자신의 악명(악명)을 생각 해 냈다. 혈륜 막비는 지독한 호색한(호색한)으로 소문이 났 고,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무자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악명은 비록 그리 기분좋은 것은 아니지만 대신 에 편리한 점도 있었다.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그의 말에 고분고분 복종하기 때문 에 번거롭게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다시 앞에 놓인 금존청이 가득 담긴 술잔을 쭈욱 들이 켰다. 그가 술잔을 탁자위에 막 내려 놓았을 때 누군가가 이층으로 올라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막비는 힐끗 고개를 돌려 보았다. 허름한 백의를 입고 머리가 부시시한 사나이 한 명이 주루위 로 올라오고 있었다. 백의사내는 한 손에 목검같이 생긴 나무 막대를 들고 있었는데 술이 몹시 취했는지 걸음걸이가 부안정 해서 위태위태해 보였다. 막비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술잔을 기울이는데 주력 했다. 헌데 그가 막 술잔을 입에 대려는 순간 그의 곁을 지나가던 백의사내가 휘청거리며 엉겁결에 그의 팔을 건드렸다. 그 바람 에 술잔속의 술이 고스란히 막비의 옷위로 쏟아지고 말았다. 막비의 짙은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이 옷은 평소에 그가 무척 아끼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불 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더욱 그를 본노하게 한 것은 그 빌어먹을 녀석이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고개만 까닥거린 채 다시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는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그 백의사내를 불러 세 웠다. "이 놈!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의 호통소리를 들었을텐데도 백의사내는 걸음을 멈출 생각 도 하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막비의 눈꼬리가 쭉 찢어지며 두 눈에서 싸늘한 살기가 뿜어 나왔다. (이 놈이?) 막비는 불같이 노해서 그 건방진 작자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 으려 했다. 그의 갈쿠리같이 변한 손가락에는 무서운 공력이 깃들어 있 어 붙잡히기만 하면 뼈가 으스러지고 힘줄이 끊어질게 뻔했다. 헌데 그가 막 백의사내의 어깨뼈를 으스러 뜨려 놓을 순간, 휘청! 백의사내의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그 시기가 공교롭게도 막비의 손이 막 그의 어깨에 닿기 직 전이었기 때문에 막비의 손은 어이없게도 헛되이 허공을 가르 고 말았다. 막비는 움찔 놀랐다. 강호를 울리는 절정고수답게 그는 백의 사내의 행동이 절대 무의식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두 눈을 번뜩이며 백의사내의 뒷등을 노려보고 있다가 다시 번개같이 쌍수를 내밀었다. 이번에 그는 한결 신중해 졌 기 때문에 손속 또한 먼저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악독했다. 쓰악! 마치 바람이 가르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백의사내의 양 어깨는 그대로 막비의 독수리발톱같은 손아귀에 붙잡히고 말았 다. (그러면 그렇지! 흐흐...이 놈! 어디 맛 좀 봐라!) 막비는 악독한 미소를 띄우며 양 손에 바짝 공력을 돋구었 다. 우드득! 손마디뼈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 다. "크윽!"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난 사람은 뜻밖에도 막비였다. 공력을 돋구어 백의사내의 어깨뼈를 산산히 박살내려 했는데 놀랍게도 백의사내의 몸이 얼마나 단단한지 오히려 그의 손가 락이 부러질 듯 아팠던 것이다. 막비는 손가락의 아픔도 아픔 이지만 눈앞에 벌어진 일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두눈을 부릅떴다. 그의 손가락에 실린 공력으로 말하자면 황소의 뼈라 해도 박 살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고통을 느끼다 니... 인간의 몸이 어찌 이토록 단단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철벽무적(철벽무적) 악교(악교)가 창안해낸 고금최강 의 불괴연혼강기(불괴연혼 기)때문임을 그가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막비가 경악과 불신으로 우두커니 서 있을 때 백의사내가 천 천히 몸을 돌렸다. 백의사내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티 없이 맑았다. 그의 눈빛과 시선이 마주치자 막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런 맑고 차가운 눈빛의 소유자는 절대로 평 범한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는 누구냐?" 자신도 모르게 그는 불쑥 물었다. 백의사내는 아무 말 없이 씨익 웃기만 했다. 그 미소를 보자 막비는 다시 불같은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 미소는 마치 그를 조롱하는 비웃음처럼 보였던 것이다. 막 비는 아직 누구에게서도 이런 모욕적인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 었다. 그의 두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피어 올랐다. "건방진 놈! 한 가닥 재주가 있다고 함부로 까불다니...나를 화나게 한 댓가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주겠다!" 막비는 사납게 외치며 번개같이 백의사내를 향해 달려들었 다. 어느 새 뽑아들었는지 그의 오른 손에는 섬찝한 혈륜이 들려 있었다. 그의 혈륜을 뽑아드는 솜씨는 그야말로 무림일절(무림 일절)이라 할 만 했다. 평상시 그는 혈륜을 왼쪽 어깨뒤에 메고 있었는데 일단 손을 움직이기만 하면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찰나의 순간에 혈륜은 이미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파팟!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싸늘한 한광이 백의사 내의 미간(미간)을 노리고 짓쳐 들었다. 그 속도의 가공함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허나 백의사내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장난처럼 가벼운 동작이었는데도 그 시기가 실로 적절하여 막비의 혈륜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막비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는 아직 자신의 혈륜을 이처럼 간단하게 피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이것 하나 만 보아도 백의사내가 그가 일찌기 만난 일이 없는 무서운 고 수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막비는 백의사내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 에 더 이상 상대방을 경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일단 들끓던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의 마음속에는 필승의 자 신감과 함께 불같은 살심이 피어 올랐다. (이 놈!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의 대혈륜이 얼마나 무서운 것 인지 똑똑히 알게 해 주겠다!) 막비는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백의사내를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서서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휘리리릭! 그의 손에 있는 혈륜이 기이한 광망을 뿜으면서 회전하기 시 작했다. 혈륜이 회전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서 나중에는 붉으 스름한 빛만 어른거릴 뿐 혈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우웅! 그의 오른손은 기이한 파공음과 함께 번쩍이는 붉은 광망만 이 이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백의사내는 우두커니 선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 몸 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혈륜이 뿜어내는 광망 에 압도된 듯한 모습이었다. 붉은 광망이 점점 짙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 광망이 폭발하듯 확산되어 백의사내의 전신을 송두리째 뒤덮어 버렸다. 파파파파파.... 주위사방이 온통 광풍을 만난 듯 요동을 치고 탁자와 의자들 이 박살난 채 사방으로 비산되었다. 이것은 대혈칠륜중의 혈륜 단혼(혈륜단혼)이라는 초식이었다. 이 초식에 걸리게 되면 누구도 무슨 영문인지 모른채 목이 떨어져 나가고 마는 무시무시한 수법이었다. 과연, 백의사내는 어떻게 피할지를 모르는지 엉거주춤한 상 태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몸이 붉은 광망이 의해 갈가리 찢겨질 순간, 스윽! 그는 휘청거리며 옆으로 두걸음, 그리고 빠르게 앞으로 세 걸음을 내딛었다. 어찌보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대단치 않은 동작이었다. 허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토록 엄밀하던 혈륜 단혼의 공세속에서 백의사내의 신형이 너무도 수월하게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막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백의사내가 펼친 신 법은 얼핏 보기에 단순하기 그지없는 용협십이로(용협십이로)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림의 하류무사들이나 펼치는 시시한 용협십이로 따위로 어찌 자신의 무시무시한 혈륜단혼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더 생각을 굴릴 여유도 없이 막비는 다시 오른손을 세차게 앞으로 휘둘렀다. 쾌애액!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십 여줄기의 시뻘건 혈광(혈광)이 앞으로 다가오는 백의사내의 전신을 향해 쏘아져 갔다. 바로 대혈칠륜중의 절초인 혈광참망(혈광참망)이라는 수법이었다. 얼마나 많은 강호의 고수들이 이 빠르고 악독한 초식에 목숨 을 잃었는지 모른다. 백의사내의 몸이 허공에서 크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믿을 수 없게도 혈광참망의 열 두개 혈광은 모두 허공을 가르고 말 았다. 막비의 얼굴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자신의 혈 광참망 초식을 이토록 수월하게 벗어나는 사람이 있을줄은 정 녕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막비는 이를 악문 채 질풍처럼 혈륜을 휘둘렀다. 쐐쐐쐐쐐.... 삽십 여장이 넘는 드넓은 금화루의 주루안이 온통 혈광에 휘 감긴 것 같았다. 그 요동치는 광풍속에서는 천하의 어느 것도 살아날 수가 없을 듯 했다. 이것이 바로 대혈칠륜중에서 삼대 절초(삼대절초)의 하나인 혈영변색(혈영변색)이었다. 백의사내의 훤칠한 신형은 혈영변색의 무시무시한 공세속에 서 끊임없이 요동을 쳤다. 그것은 마치 폭풍속에 휩쓸린 하나 의 가랑잎같은 위태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용케도 백의사내 는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고 있었다. 무려 서른 여섯 가지의 변화가 숨어 있는 혈영변색의 공세가 절반이 넘게 펼쳐졌는데도 백의사내의 흔들거리는 몸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눈깜박할 사이에 혈영변색의 삼십육변(삼십육변)은 모두 끝 나버렸다. 공세가 끝난 자리에는 폐허만이 존재했다. 그토록 아름답고 호화스러웠던 금화루의 이층루각은 부서진 탁자와 의자들로 인 해 거의 제모습을 잃어 버렸다. 허나 백의사내는 아직도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어찌보면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단지 바람만이 그를 스치 고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막비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혈영변색속에서도 몸을 피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하리라고는 결단코 믿어본 적이 없는 막비였다. 게다가 상대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그는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백의사내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지쳤소, 막비? 혈륜 막비는 대단한 고수라고 해서 잔 뜩 기대를 했는데 정말 실망이군." 막비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백의사내가 한 말은 얼마전에 자신의 입으로 누군가에게 직접 했던 말이었다. 허나 막비는 전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미처 그 점을 깨달 을 겨를이 없었다. 이제보니 상대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자는 계획적으로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온 것이 분명했다. "네 놈은 누구냐?" 백의사내는 여전히 입가에 기이한 미소만을 머금은 채 막비 의 물음에는 일언반구 대답이 없었다. 허나 그의 냉혹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보자 막비는 난생 처음 으로 마음 한 구석에 어떤 불안감이 떠오름을 느꼈다. 막비는 이내 그 불안감의 정체를 깨닫고는 흠칫 놀랐다. 그 불안감은 다름아닌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리라고는 이제까지 결단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막비였기에 그의 놀라움은 더 욱 클 수 밖에 없었다. 단순히 이 자의 무공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 만은 아니었다. 이 백의사내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사람을 위압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신비한 기운이 있었다. 누구라도 이런 사람을 적으로 삼게 된다면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허나 이 자가 언제 자신의 적(적)이 되었단 말인가? 자신은 아직 이 자를 만난 적도 없지 않은가? 막비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눈앞의 백의사내가 무 엇때문에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막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에게 일단 시비를 건 이상 결말을 보아야 한다. 상대에 게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있는다면 그건 이미 혈륜 막비가 아니 다. 그동안 쌓아올린 혈륜의 찬란한 명성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 해서라도 이 자를 절대로 살려둘 수는 없다! 막비의 눈에서 기이한 광망이 번뜩였다. 그와 함께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부르르... 그의 오른손에 있던 혈륜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 했다. 아니, 팔딱팔딱 뛰놀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손은 혈륜처럼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 는 어디까지가 손이고 어디까지가 륜인지를 도데체 분간할 수 가 업었다. 짐작컨데 막비는 자신의 최대최고의 절학을 전개하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건곤일척(건곤일척)의 무서운 일격이 될 것이고 둘중의 하나는 죽거나 회복불가능의 치명적 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백의사내도 그것을 알았는지 눈빛이 혜성처럼 반짝거렸다. 파르르... 막비의 손위에서 마치 생명이 있는 듯 뛰놀고 있는 혈륜은 점점 그 속도가 빨라지더니 종내에는 그 형체조차 제대로 보이 지 않게 되었다. 백의사내는 태연한 자세로 우뚝 선 채 반짝이는 눈으로 막비 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찰나, "이야아압!" 막비의 입에서 엄청난 호통소리가 터져나오며 그의 손에서 회전하고 있던 혈륜이 빛살처럼 허공으로 폭사해 나갔다. 파파파... 주위 사방이 온통 시뻘건 혈광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무 것 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대혈칠륜의 최고절예인 혈무천 리(혈무천리)인 것이다. 그 패도무쌍한 위력앞에는 금강동인(금강동인)이라도 갈가리 찢겨지고 말 것 같았다. 순간 백의사내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수중에 들 고 있던 나무막대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는 데 기경스럽게도 순식간에 나무막대가 여덟 개로 불어났다. 아니 불어난 것 처럼 보였다. 나무막대가 여덟 개의 그림자를 그리며 다가들자 폭발치듯 거세게 밀려오던 혈광의 한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렸 다. 그 구멍 사이로 경악에 가득 찬 막비의 얼굴이 언뜻 내보 였다. 순간, "크악!" 혈광이 사라지며 막비의 입에서 커다란 비명소리가 터져 나 왔다. 막비는 입가로 시뻘건 선혈을 내뿜으면서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고 있었다. 창졸지간에 여덟 개의 그림자중 여섯 개를 막아냈으나 나머 지 두 개를 막지 못하고 옆구리와 허벅지를 강타당했던 것이 다. 그 타격이 어찌나 강했던지 갈비뼈가 두 개나 부러지고 허 벅지도 금새 퉁퉁 부어올랐다. 막비는 너무도 고통스러워 금시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듯 했 다. 허나 그 와중에도 그는 고통보다 오히려 경악을 느꼈다. 그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조금전 백의사내가 펼쳐 자신의 혈무천리를 격파한 초식은 분명 복마검법중의 팔방풍우(팔방풍우)라는 초식이었던 것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