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태극문 - 52편 (52/87)
그녀가 다가올 때 마다 그녀 특유의 향기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건 사실이었다. 조자건은 아직 섭보옥 외에 이토록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엄연히 다른 사람의 부인이었다. 그것도 지체높고 강호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파금궁의 안주인 이었다. 황금왕후(황금왕후) 두응향(두응향)! 야심한 시각에 그를 불쑥 찾아온 사람은 다름아닌 황금왕후 였던 것이다. 두응향은 그의 코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코에 거의 자신의 코가 닿을 정도가 되어서야 걸음을 멈추고 그윽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소근거렸다. "당신의 솜씨가 뛰어나다고 들었어요. 나는 그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누구라도 이런 여인에게서 이와같은 유혹을 받는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말을 멈추며 그녀는 그의 얼굴을 향해 뜨거운 숨결을 후욱 불었다. 그녀의 달콤하면서도 뜨거운 입냄새가 그의 얼굴에 닿 아 미묘한 쾌감을 불러 일으켰다. 조자건은 그만 풋나기처럼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녀의 눈이 기이한 열정으로 이글거리며 앵두처럼 붉고 도 톰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벌어진 입술사이로 새하얀 치아가 탐욕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거의 조자건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당신 솜씨를 보여줘요. 호기심많은 양반." 그녀가 속삭였다. 조자건은 힘차게 그녀를 끌어안고 입술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은 꿀처럼 달콤했다. 조자건은 결코 그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맛본 어 떤 금단(금단)의 열매보다도 그윽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속에 숨어 있는 말랑말랑한 혀에서는 끊임없이 꿀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가슴에 살짝살짝 와 닿는 그녀의 풍만한 젖가슴의 감촉 또한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하나 그 뿐이었다. 조자건은 입맞춤을 멈추고 그녀의 몸을 떼어 놓았다. "내 솜씨는 여기 까지요. 나머지는 아마 당신 남편이 훨씬 더 탁월할거요." 그녀는 몽롱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반쯤 풀린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은 자신이 무척 이상한 사람이라는걸 알고 있어요?" 조자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말이오?" "그래요. 내 눈에는 당신이 몹시 이상한 사람으로 보여요. 당신은 노련한 인물인 것 같으면서도 순진하고, 어설픈 것 같 으면서도 용의주도한 데가 있어요. 순진과 노회(노회)가 뒤섞 였다고나 할까..." 그녀는 피처럼 붉은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축였다. 그 모습은 더 이상 유혹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마음을 속일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나는 당신과 자고 싶어요." 몹시 자극적인 말이었으나 그녀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단지 반쯤 감은 눈자위에 붉은 빛이 감돌 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나는 몹시 흥분되었어요. 당신이 이대로 물러나 버린 다면 내 몸은 그대로 터져 버리고 말거에요." 그녀는 절대로 먼저 그의 품속으로 안겨오지 않았다. 분명히 성적(성적)으로 몹시 달구어져 있으면서도 흐릿한 시 선으로 그를 쳐다본 채 가만히 서있었다. 그도 또한 그녀를 마 주보며 우두커니 선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그와는 반대로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는 욕정에 가득찬 눈빛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용 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도 당신과 자고 싶소. 당신같은 여자가 몸이 터져버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녀는 그를 빤히 응시한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조자건의 음성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나는 당신과 자지 않겠소."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하나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 았다. 그녀는 단지 나직하게 물었을 뿐이다. "이유가 뭔가요?" 조자건은 천천히 그녀의 귓가로 입을 가져갔다. 그녀의 귀는 가느다란 솜털로 뒤덮혀 있어서 더한층 사랑스 럽고 매혹적이었다. 조자건은 그녀의 귓볼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의 몸이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떨렸다. 조자건은 그녀의 귀에 대고 나직히 소근거렸다. 순간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조자건은 천천히 그녀의 귀에서 입술을 떼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조금전 처럼 무표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얼굴에는 기이한 미소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그 미소는 무척 야릇했다. 어찌보면 몹시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어찌보면 어처구니 없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어찌보면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망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나 마침내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당신은 과연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호호..." 그녀는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눈가에 떠올라 있던 요 염한 색기(색기)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의미있는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나는 가겠어요." 조자건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아직도 조자건의 입술에 그녀의 입술촉감이 생생히 남아 있 는데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방안에 은은 히 남아 있는 그녀의 독특한 향기마저 없었다면 그녀는 애초에 이곳에 나타나지도 않은 환상(환상)속의 여인(여인)이라는 착 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제서야 조자건은 나직한 한숨을 불어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들어와도 되오." 방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어둠속에서 그의 눈빛이 화광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바로 파금공자 정각이었다. 이, 호 자 정각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예리한 안광으로 조자건을 응시 하다가 불쑥 물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언제 알아차렸소?" 조자건은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와 달콤한 입맞춤을 나눈 바로 뒤였소." 정각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녀와 잤겠구료?" "그랬을지도 모르지." 정각의 눈가에 한 줄기 살기(살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조자건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한 신색으로 다시 말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자지 않았소. 중요한건 그거 아니오?" 정각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한동안 눈가를 실룩거리고 있다가 돌연 나직한 탄식을 토해냈다. "그렇지. 당신은 그녀와 자지 않았지. 그건 분명 사실이오." 정각은 말을 멈추고 조자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지금의 정각은 여태까지의 흐리멍텅하고 겁많던 모습이 아니었다. 어딘지 모르게 당당하면서도 총명한 빛을 띄 고 있었다. 조자건은 그의 유성처럼 번쩍이는 눈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호부(호부)밑에 견자(견자)는 없는 법이지..." 정각은 그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당신은 왜 그녀와 자지 않았소?" 조자건은 빙긋 웃었다. "당신 말은 마치 내가 그녀와 자지 않아서 몹시 억울하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료." 정각은 냉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이 그녀와 잤다면 나는 떳떳하게 당신을 없앨 수 있었을테니까." 조자건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되물었다. "나를 없애고 싶소?" "그렇소." "이유가 뭐요?" 정각의 눈에는 번쩍하는 빛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와 접촉한 사람은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소." 조자건은 피식 웃었다. "접촉이란 어디까지 해당되는거요? 단순히 그녀를 쳐다보기 만 하거나 피부만 스치며 지나간 사람도 모두 없앨 작정이오?" 정각은 아무런 대꾸없이 싸늘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조 자건은 별로 꺼리끼는 기색도 없이 말을 계속했다. "아니면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는걸 말하는거요? 어느 정도 까지가 당신이 말한 접촉에 해당되는거요?" 정각은 냉랭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하는걸 말하는거요." "그렇다면 나는 그녀와 자지 않았으니 해당되지 않겠구료?" 정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조자건은 문득 빙그레 미소지었다. "당신을 보고 있으니 마치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누가 빼앗 아갈까봐 두려워하는 어린 아이같군. 당신도 그녀의 유혹을 받 은 적이 있지 않소?" 정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살기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조자건을 노려보며 금시라도 달려들 듯 했다. 하나 이내 그는 나직한 한숨을 토해냈다. "어떻게 알았소?" "그녀가 당신같은 남자를 그냥 놔두었을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소." 정각은 잠시 우두커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다가 나직 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그녀를 만난 것은 오 년전이오. 재혼(재혼)한 아 버님은 몹시 행복해 하셨지. 나도 그 분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게 좋았소.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십 년이 넘게 아버님은 홀로 고독해 하셨으니까. 하지만 육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녀 가 내 방에 몰래 들어왔소." 조자건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정각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떠올랐다. "난 처음에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어쩔줄을 몰랐소. 그녀는 안아달라고 하더군. 나는 그냥 밖으로 뛰쳐 나왔소. 그리고는 미친 듯이 궁밖으로 달려갔지. 그 뒤로 나는 결코 파금궁으로 돌아간 적이 없소." "그래서 그 뒤로 바보행세를 하며 다녔던거요?" 정각의 얼굴에 씁쓸한 고소가 떠올랐다. "바보행세는 아니오. 난 그저 모든걸 잊고 싶었을 뿐이오. 내가 백치(백치)가 되어 아버님이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난 그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소." 조자건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남자들에게도 손을 뻗었겠군?" "그렇소. 이 년후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몰래 궁으로 되돌아갔소. 그때 우연히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밀회하는 장면을 목격했소. 나는 멍하니 그들이 정사를 벌이는 광경을 보고 있 었지. 그녀가 사라지자 나는 그녀와 함께 뒹굴었던 사내를 두 손으로 목졸라 죽였소." 그의 음성은 비록 나직했으나 조자건은 그 음성 밑에 깔려있 는 고통과 슬픔, 그리고 분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조용하게 물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소?" 정각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알아서도 안되지. 그 분은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고 계시오. 만약 아시게 된다면 그분은...몹시 슬퍼할거요." 정각은 홀연 조자건을 쳐다보며 웃었다. "당신은 알고 있소? 자신의 아버님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 인이 다른 남자와 뒹굴면서 신음하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목격 했을 때 내 심정이 어떠 했는지를? 하하...난 정말 ...내 눈을 뽑아 버리고 싶었소."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웃음은 피눈물보다도 더욱 처절한 것이었다. 조자건은 그에게 무슨 말인가 해주고 싶었다. 하나 그는 아 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달리 무슨 말을 해 줄수 있단 말인가? 그는 속으로 무거운 탄식을 토해낼 뿐이었다. 정각은 한참을 소리없이 웃다가 중얼거렸다. "그 후로 나는 한동안 몰래 그녀의 뒤를 쫑기 시작했지. 그 녀는 꼭 두 달에 한 번 정도 그런 짓을 하더군. 나는 그때마다 그녀와 정사를 벌인 놈들을 죽이곤 했소."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들어보였다. "이 손으로 지금까지 열 한 명을 목졸라 죽였소. 보시오.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소?" 그의 음성에는 심한 자괴감(자괴감)과 허탈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사실 그 자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소. 그녀같은 여인에게 서 유혹을 받는다면 세상의 어떤 남자라도 견디지 못할거요. 죽여야 할 사람은 바로 그 여자요. 내가 진정으로 죽이고 싶은 사람은 그녀와 땀냄새를 맡으며 함께 뒹군 남자들이 아니라 바 로 그 여자요." 정각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난 그녀를 죽일 수 없소. 아버님이 그녀를 사랑하시 는 한 나는 그녀를 해칠 수 없소. 그러니 나는 아무 것도 못 듣고 아무 것도 못 보는 바보행세를 할 수 밖에 없소. 때로는 진짜로 내가 백치가 되었으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 오." 정각은 말을 마친 후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조자건 또한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동안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문득 정각은 조자건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너무 우습지 않소? 한심한 놈 같지 않느냔 말이오." 조자건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정형은 내가 본 사람중에서 가장 남자다운 사 람이오." 정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소? 내가 보기엔 당신이 더 그런 것 같은데..."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본 채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가 정각은 돌연 퉁명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까는 정말 기분이 언짢았소." 조자건은 담담하게 웃었다. "내가 그녀와 입을 맞추었을때 말이오?" "그렇소. 나는 그때 하마터면 뛰어들어와 당신에게 덤벼들 뻔 했소.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그보다 더한 장면도 많이 보았는데..." 정각은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아마 내가 당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 지. 아뭏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만큼은 그녀에게 손을 대 지 않았으면 했었소." 조자건은 말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정각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그녀에게 입을 맞출 수 밖에 없었소?" 의외로 조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정각이 무어라고 말하려 하자 조자건은 피식 웃으며 말을 계 속했다. "그녀는 내게 어떤 기대를 하고 찾아 왔었소. 그런데 입맞춤 조차 해 주지 않고 그녀를 그냥 보냈다면 그녀는 아마 나를 멋대가리없는 놈이라고 두고두고 욕했을 거요." 정각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래서 그녀와 그런 짓을 했단 말이오?" "너무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마시오. 아뭏든 나로서도 좋은 경험을 한 셈이니까." "뭐라고? 당신 정말..." 정각은 금시라도 버럭 호통을 칠 듯 하다가 돌연 껄껄 웃음 을 터뜨렸다. "하하...과연 당신다운 발상이로군. 그런 상황에서 그녀를 뿌리치기는 쉽지 않았을텐데..."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조자건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확실히 쉬운 일은 아니었소. 나는 하마터면 그 품속으로 뛰 어들어 그대로 녹아 버리고 싶었으니까." 정각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심정은 나도 이해가 가오." "그렇지. 당신도 나와 같은 경험이 있었지. 그러니 내가 얼 마나 힘들었는지 충분히 알거 아니오?" 조자건이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정각의 얼굴에 고소가 떠올랐 다. 그러다 그는 조자건을 돌아보며 정색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말해 보시오." "조금전 그녀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소근거렸소?" 조자건은 입가에 미소를 매어 달았다. "당신도 내가 그녀와 자지 않은 이유를 알고 싶소?" "나는 아까부터 그게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소." "별거 아니오. 한 마디만 했을 뿐이오." "그게 뭐요?" 조자건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정각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소근거렸다. "나는 파금왕같은 정력(정력)이 없기 때문에 당신을 만족시 켜 줄 수 없다고 말했소." 정각은 그 말을 듣고 한참동안이나 정신없이 웃어댔다. 제33장 월 하 풍 정 일, 화 방 연롱한수월롱사(연롱한수월롱사), 야박진회근주가(야박진회근주가). 상녀부지망국한(상녀부지망국한), 격강유창후정화(격강유창후정화). 밤안개는 찬 물에 드리우고 달빛은 하얗게 모래를 비춘다, 이 밤 진회하에서 자는데 강건너는 온통 주막집이다. 기녀들은 망국의 한이 담긴 줄도 모르고, 강건너에서 옥수후정화:망국의 노래를 불러대고 있다... 진회하(진회하). 진회하는 금릉의 남쪽에 있는 운하(운하)이다. 통제문(통제 문)근처를 동서로 흐르는 진회하는 진(진)의 시황제(시황제)에 의해 개통되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이 연안에 유객(유객)들이 몰 려 들었고, 그들을 태운 화방(화방)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화방이란 유객들을 맞이하여 연회를 마련한 지붕있는 배를 가리키는데 사방을 아름답게 채색하여 그 명성이 높았다. 진회하의 양안(양안)에는 유곽들이 즐비했고, 크고 작은 화 방에서는 여러가지 홍등(홍등)을 내걸고 녹주(녹주)를 들며 유 흥이 성대했다. 조각달이 떠오른 진회하의 밤에 유유히 흔들리는 화방에 비 스듬히 누워 나이어린 기녀의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술잔을 기 울이는 것은 상상만 해도 운치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옆에 절세가인(절세가인)이라도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사공척은 분명 행운아였다. 그는 지금 누워 있지도 않았고, 어린 기녀의 노랫소리로 울 려퍼지지 않았다. 하나 그는 진회하의 등불 찬란한 화방에 앉 은 채 절세가인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더구나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의 절세가인과 함께 하고 있었 다. 탁! 사공척이 단숨에 한 잔을 마시고 술잔을 탁자위에 내려놓자 세 명의 미녀중 가장 나이어린 여자가 방긋이 웃으면서 술을 따랐다. "한 잔 더 드세요, 오빠." 짙은 녹색을 곱게 차려 입은 발랄한 용모의 미소녀는 그의 여동생인 사공릉이었다. 그 옆에는 화사한 미모를 자랑하는 궁 아영과 나른한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조추음이 앉아 있었 다. 세 여인의 용모는 제각기 특색이 있어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 들 정도였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내비치는 그녀들의 모습은 각기 다른 세 송이의 기화(기화)들이 활짝 피어 아름다움을 자 랑하고 있는 듯 했다. 문득 사공릉은 휘장너머로 내다보이는 진회하의 물살을 바라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화방이 많은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아영언니?" 궁아영은 그녀를 돌아보며 그윽하게 웃었다. "오늘이 음력 유월 십일일이기 때문이야." 사공릉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화방이 많은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릉매는 이곳에서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는군. 오 늘이 바로 노야회(노야회)의 날이야. 그래서 화방이 많지." "노야회의 날?" 사공릉이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사공척이 천천 히 입을 열었다. "노야회의 날이란 이곳 예기(예기)들의 조상신을 제사지내는 날이다. 그래서 이 날은 항상 이렇게 화방이 많고 가장 성대하 지." 사공릉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그렇군요. 오빠도 그런걸 다 알고 있었군요." "그게 무슨 말이냐?" 사공릉은 귀여운 코를 쫑긋거리며 짤랑짤랑한 목소리로 말했 다. "난 오빠가 평생 아영언니외에 다른 여자들은 쳐다보지도 않 는 목석(목석)인줄로만 알았는데 이제보니 그게 아니잖아요. 기생들의 조상신을 모시는 날도 알고 있으니 말이에요. 아무래 도 오빠는 기생들에게 관심이 많은가봐." 말을 마치자 그녀는 깔깔거렸다. 궁아영과 조추음도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그제서야 사공척은 그녀가 자신을 놀린 것을 알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한데 그때 교소(교소)를 터뜨리던 사공릉의 웃음소리가 딱 그치며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 몰랐다. 중인들은 의아함을 느끼고 그녀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지 않은 강물위에서 붉은 등을 내건 조그만 화방이 강물에 흔들린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화방위에는 두 명의 인 물이 마주앉은 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붉은 등불 아래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얼굴은 몹시 눈 에 익은 것이었다. 그들을 본 사공척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침 화방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두 사람도 그들을 발견 했는지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들중 하얀 백의를 입은 사람은 사공척과 눈이 마주치자 빙 그레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사공형(사공형)이었구료. 그동안 잘 지냈소?" 사공척의 싸늘한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잠깐 스치고 지나 갔다. "이런 곳에서 당신을 보게 될 줄은 몰랐소." 백의사내는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활짝 웃었다. "하하...그거야 내가 할 소리요. 나는 사공형의 풍취가 이렇 게 대단한 줄 몰랐소. 월하(월하)에 세 분의 미녀를 끼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다니 나로서는 그저 부럽기 그지 없구료." 사공척은 평상시에는 아주 싸늘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좀처럼 웃는 적이 없고 농담이나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을 경멸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된 일인지 입가에 빙긋 미소마저 머금은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신 날카로운 음성으로 쏘아붙인 사람은 그의 앞에 앉아 있 던 사공릉이었다. "흥!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떠드는군. 당신같이 비겁한 졸장 부가 풍취운운하다니 스스로 너무 뻔뻔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나 요?" 백의사내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내가 비겁한 졸장부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사공릉은 경멸어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당신은 오빠가 두려워서 무림대회에서 기권하지 않았나요? 적어도 무림의 고수라는 자가 상대가 무서워서 꼬리를 빼다니 세상에 당신같이 비겁한 졸장부는 없을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