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태극문 - 26편 (26/87)
그런 다음 소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동생을 죽인 자의 이름이 무어냐?" 소소는 급히 대답했다. "자건. 조자건이라고 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빨간 혈첩(혈첩)에 글을 써내려 갔 다. 남자는 글을 모두 쓴 후 소소에게 그것을 건네 주었다. "자. 이제 되었느냐?" 소소는 혈첩에 적힌 글을 읽고 만족한 표정이 되었다. "예. 이제 되었어요." 남자는 나직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 다. "하하...네 소원을 들어 주었으니 이제 너도 내 부탁을 들어 야지." 막소소(막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품속으로 파고 들 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접힌 혈첩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그 위에 적힌 글이 드러났다. 추살령(추살령) 제 이십구호(제이십구호) 낙양(낙양) 조자건(조자건). 위 자를 반드시 척살하라. 집마제이부주(집마제이부주). 삼, 암 운 "더 누워 있으시오." 조자건이 말리는데도 진표는 기를 쓰고 침상에서 일어나려 했다. "난 괜찮아. 정말이라구." 그는 전신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는데 억지로 몸을 일으키 는 바람에 피가 새어 나와 붕대의 한쪽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 데도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조자건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그 고집은 여전하군. 나이를 먹어도 당신은 조금도 변 하지 않았군." 진표는 파리한 얼굴에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천하의 고집불통인 자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나? 몇 년 전에도 자넨 누워있으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붕대를 칭칭 맨 채로 나무를 하러 갔었지. 그걸 벌써 잊었나?" 조자건의 얼굴에도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잊을리가 없었다. 사년전, 조자건은 아픈 진표대신 섬전도 서귀와 결투를 하다 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진표는 한사코 말 렸으나 조자건은 환원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한 짐 잔뜩 해서 내려온 적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자 조자건은 문득 그 시절이 아련히 그리워졌 다. 허나 그는 곧 진표를 돌아보며 쾌활하게 웃었다. "잊을 리가 있소. 하지만 우선 당신은 좀더 쉬어야 하오. 내 고집이 어떤줄 안다면 내 말을 듣지 않고 못배긴다는 것도 알 텐데." 그는 간신히 바둥거리며 일어난 진표를 다시 침상위에 반강 제적으로 눕혔다. 진표는 몇 번 더 일어나려고 용을 쓰다가 그 때마다 조자건에게 제지당하자 투덜거렸다. "이런 제길. 천하의 진표가 계집애처럼 누워있어야 하다 니...이거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군." "하하...체면 좀 차리려고 무리했다가는 당신은 아마 일년 내내 누워있어야 할지도 모르오." 그때 방문이 열리며 한 인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 람은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한창 물이 오른 농염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린 듯 고운 아미에 별처럼 초롱한 눈빛, 깨물어 주 고 싶을 정도로 도톰한 입술 등 모든 것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진표의 바로 밑에 동생인 진결이었다. 조자건은 사년 전에 이미 진결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그녀 는 귀엽고 예쁘기는 했지만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헌데 지난 몇 년동안에 이토록 아름답고 성숙한 여인으로 변 할 줄이야 조자건으로서도 미처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조자건 은 그녀가 하남성 제일의 미녀로 불리운다는 말에 긴가민가 했 었는데 이제 보니 과연 그녀의 미모는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 다. 그녀는 조자건을 보자 긴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며 고개를 숙 였다. 간단한 동작이었는데도 그 속에는 남자라면 가슴을 울렁 거릴만한 미태(미태)가 담겨져 있었다. 허나 조자건은 담담한 마음 뿐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아름다워졌다 해도 그에게 있어 그녀는 자신 의 절친한 친구인 진표의 여동생일 뿐이었다. 비단 진표의 여 동생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여동생처럼 귀여운 존재일 뿐이 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진결은 조자건에게 간단하게 눈인사를 하고는 침상으로 다가 갔다. 그녀의 손에는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연자탕(연자탕)이 들려 있었다. 진표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그녀의 손에서 연자탕을 건네 들었다. 그녀가 수저로 연자탕을 먹여 주려하자 진표는 우악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수저를 뺐었다. "놔둬라. 이 오빠가 아직 수저질도 못할 정도로 약골은 아니 다." 진결은 말없이 빙긋 웃더니 다시 몸을 돌려 방을 벗어났다. 진표는 연자탕을 몇 숟갈 떠먹다 말고 조자건을 돌아보며 웃 었다. "어때. 많이 컸지?" 조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몰라보게 예뻐졌소. 막비의 심정도 이해가 가는구료." 진표의 인상이 우거지상으로 변했다. "제길...그 놈 얘기는 꺼내지도 말게. 비교할 데가 없어서 하필이면 그 놈하고..." "하하...아뭏든 놀랐소. 진결도 그렇고 승남도 그렇고...몇 년사이에 정말 많이들 성장했구료. 그런데 봉아(봉아)는?" 봉아란 진표의 막내동생인 진봉(진봉)을 말한다. 진봉은 진표의 일가중에서 나이도 가장 어렸지만 귀엽고 깜 찍해서 조자건을 제일 따랐었다. 진결이 이미 어느 정도 성장한 소녀라서 조자건을 몹시 어려 워 한 반면 진봉은 아직 철부지 소녀라서 오빠 오빠하고 조자 건을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조자건은 아직도 귓전으로 그녀의 짤랑짤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조자건은 진표의 집에 와서 줄곧 그녀의 모습을 찾았지만 그 녀를 발견할 수 없었다. 진표는 연자탕을 먹다 말고 쓴웃음을 날렸다. "그녀는 요새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주 바쁘다네. 줄곧 밖 으로만 나돌아 다니고 어떤 날은...집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네." 조자건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걸 보고만 있었소?" 진표의 음성은 왠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몇 번 충고를 하고 나무라기도 했지. 하지만 그럴수록 더 삐딱하게 나가는 것 같아 포기했네. 그녀도 이제 열 여덟 살이 되었으니 자기의 앞가림을 스스로 하겠지." 조자건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진표의 얼굴에 한 줄기 고통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간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진표는 옛날부터 막내동생인 진봉을 끔찍 하게 아꼈다. 그는 비록 무뚝뚝하고 과묵한 사나이였으나 자신의 동생들에 게는 더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오빠이자 형이었다. 그들의 아버 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 그는 혼자서 세 동생의 뒷바라지를 도 맡아 왔다. 특히 막내인 진봉에게는 오빠가 아닌 아버지같은 심정으로 그녀를 대해주었다. 그런 진표이니만큼 조자건이 생각한 것 이 상으로 진봉을 위해 걱정하고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 진봉을 다스리지 못했다니 조자건으로선 당혹 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불과 몇년 사이에 그토록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진봉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리기라도 했단 말 인가? 아니면 그들 남매에게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일이 벌어진 것일 까? 조자건은 이런 저런 것을 묻고 싶었으나 결국 한 마듸도 묻 지 않았다. 이 일은 전적으로 진표의 가족에 관한 일이다. 진표는 자신 의 가족일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조자건이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결국은 외인(외인)이었 다. 진표가 먼저 입을 열지 않는 한 조자건은 그들의 일에 끼 어들 수도 없고 끼어들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허나 나중에 조자건은 이때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는 평생 후회할만한 일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이때 진표에게 보다 자세한 내막을 물어보지 않은 것을 천추(천추) 의 한(한)으로 생각했다. 그때 그가 진표에게 물어보았더라도 어쩌면 진표는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을지 모른다. 허나 그랬어도 조자건은 물어보 았어야 했다. 그랫다면 어쩌면 그후에 진표일가(진표일가)에게 닥친 무서 운 비극(비극)을 막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것은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숙명(숙명)이었을까? 그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계획되었으며 이미 이때 는 돌이킬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을만큼 결정적인 상태로 진 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삼일 후, 조자건은 사마결과 함께 다시 길을 떠났다. 진표는 몸이 회복되는 데로 그들을 찾아가기로 약조하고 아 쉬운 작별을 고해야 했다. 그리고 그동안에도 진봉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조자건은 웃는 낯으로 진표와 헤어졌으나 그의 마음은 왠지 무거운 추를 달아 놓은 듯 굳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15장 수 상 풍 운 일, 범 선 회하(회하)의 물살은 유난히 푸르렀다. 회하는 하남성 동백산(동백산)의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안 휘성과 강소성을 흘러 홍택호(홍택호)를 거쳐 황하로 들어가는 큰 강이다. 회하를 건너는 방부(방부)의 나루터는 강을 건너려 는 사람들과 이들을 태우려는 나룻배로 이른 아침부터 북적대 고 있었다. 조자건은 나루터가 빤히 바라보이는 방부의 높은 고갯마루에 우뚝 서서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덕에 서자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회하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청명한 하늘....새하얀 솜털 구름....끝없이 흘러가는 푸른 물결... 조자건과 사마결은 한동안 묵묵히 회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덧 날이 저물어 강에는 노을이 비꼈다. 드넓은 회하에 붉은 노을이 물들자 강은 어느 새 시뻘건 불의 바다로 변해 버 린 듯 했다. 게다가 저 멀리서 범선 한 척이 구성진 뱃노래를 부르며 돌 아오고 있지 않은가? 조자건은 문득 하나의 싯귀가 떠올랐다. -저녁 해는 수면에 반짝이면서 강물은 흘러가고, 저녁놀이 강에 비치며 구름은 하늘을 날아간다.... 수광부일거, 하채영홍비.... 장균(장균)의 악양만경(악양만경)중의 한 구절이었다. 이곳 은 비록 악양도 아니고 지금은 가을도 아니었지만, 노을에 물 든 하늘을 지고 선 나루터는 떠도는 나그네들의 마음을 여지없 이 흔들어 놓는 것이었다. 강가로 내려가자 주위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와글와글....북적북적....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배를 타고 수많은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제길...이건 완전히 시장바닥이로군. 배를 잡기가 쉽지 않 겠는데..." 사마결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쌀을 찌푸렸다. 그의 말마따나 그들은 좀처럼 마땅히 타고 갈 배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이 타고 갈만한 적당한 크기의 배는 이미 손님 들로 꽉 들어차 있었고, 빈 자리가 있는 배들은 이미 예약이 되었거나 돈많은 상인들이 물건을 옮기기 위해서 통째로 빌린 것들이었다. 한동안 그들은 늘어선 배들을 둘러보며 강가를 따라 쭉 걸어 갔다. 그때 문득 커다란 두 개의 배 사이에 하나의 작은 돛단배가 끼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돛단배는 그리 크지 않았다. 두 세 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협소한 크기였다. 게다가 다른 배들처럼 차일이 쳐져 있거나 바람막이도 되어 있지 않았다. 돛단배의 앞자리에는 뱃사공 하나가 방립을 깊게 눌러쓴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사마결은 급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강을 건너지 않소?" 그의 음성에 잠이 깼는지 뱃사공은 화들짝 일어나 고개를 쳐 들었다. 방갓 사이로 검게 그을린 순박한 얼굴이 나타났다. "물론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그들은 돛단배로 올라탔다. 올라서보니 제법 앉을만 했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자 뱃 사공은 묶어 놓았던 노를 풀고 강을 향해 저어나가기 시작했 다. "어허어...어허어..."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뱃사공은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열 심히 노를 저었다. 사마결은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다 가 문득 고개를 돌려 조자건을 쳐다보며 불쑥 입을 열었다.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 위에 벗과 함께 앉아 노을진 하늘과 황혼에 젖어가는 강물을 바라본다...나는 평소에 이런 광경을 상상하면서 이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운치(운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었소." 사마결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그렇게 운치있는 일 만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소." 그의 얼굴은 비록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 었다. 사마결의 눈은 노를 젓는 뱃사공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뱃사공의 손은 얼굴과는 달리 검게 그을리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울퉁불퉁하고 투박하기는 했지만 일을 많이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사마결의 날카로운 눈은 마디가 굵고 손가락끝에 굳은 살이 박혀 있는 그 손이 철사장(철사장)종류의 외문무공을 수련한 것임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평범한 뱃사공이 어떻게 그런 외문 무공을 수련할 수 있겠는가? 조자건은 뱃사공은 쳐다보지도 않고 흘러가는 강물을 응시하 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원래 현실은 상상하고는 약간 다른 법이오." 사마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배는 이미 강의 한 가운데로 미끄러져 가고 있 었다. 사마결은 조자건에게 슬쩍 눈짓을 하고는 뱃사공을 돌아 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순간, 풍덩! 뱃사공이 재빠르게 강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사마결은 엉거 주춤한 자세로 흔들리는 작은 돛단배 위에 서 있었다. 강물속으로 뛰어들었던 뱃사공의 머리가 배에서 오 장여쯤 떨어진 물위로 솟아 올랐다. 뱃사공의 검은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흐흐...과연 두 분의 눈치는 몹시도 비상하구료. 하지만 한 발 늦었소." 사마결은 그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당신도 제법 눈치가 빠르군. 그런데 우리를 기껏 이곳으로 유인하고서는 도망쳐 버리면 너무 싱겁지 않소?" 뱃사공은 물위로 얼굴을 내놓은 채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도망가다니 ...일은 이제부터요. 두 분은 단단이 각 오하시는게 좋을거요." 그의 웃음소리가 강물위로 울려퍼짐과 동시에 서쪽에서 하나 의 범선(범선)이 불쑥 나타났다. 그 범선의 크기는 상당했고 얼핏 보기에 유람선같아 보였으 나 조금도 사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어 신비한 느낌을 주었 다. 다만 돛대위에 하나의 깃발이 무슨 신호인 양 펄럭이고 있 었다. 깃발은 크기가 석 자 정도 되었는데 노란 바탕에 붉은 색으 로 오직 한 글자 밖에는 씌어 있지 않았다. 마(마). 노란 깃발위에 씌어 있는 피처럼 붉은 글씨 하나. 그것은 왠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찝하면서도 강렬한 인 상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사마결은 그 깃발을 보자 안색이 약간 변하며 낮게 소근거렸 다. "저것은 집마부(집마부)의 독문표식인 집마혈기(집마혈기) 요." 집마부는 당금 무림의 사대세력중 하나였다. 소림사가 정파(정파)를 대표하고, 오행신궁과 구호당이 정사 (정사)중간인데 비해 그들은 마도(마도)를 완전석권한 명실상 부한 마도제일문파였다. 그들의 세력은 중원은 물론이고 북으 로는 옥문관(옥문관)너머, 남으로는 멀리 운남(운남)지방까지 퍼져 있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때문에 조자건과 사마결의 앞에 나타난 것일까? 그들이 보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범선 안에서 세 명의 인물 이 나타났다. 그들은 뱃전에 우뚝 선 채 돛단배에 타고 있는 두 사람을 내려보았다. 우측에 있는 사람은 키가 거의 칠척에 육박했는데 얼마나 말 랐는지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는 헐렁한 회의장포를 걸치고 있 었는데 두 눈가에 입고 있는 옷처럼 회색 광망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좌측의 인물은 회포인과는 반대로 체구가 건장하고 우람한 홍의중년인이었다. 홍의중년인은 특이하게도 커다란 막대같은 것을 등뒤에 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막대가 아니라 붉은 깃발을 둘둘 말은 것이었다. 홍의중년인에게서는 패도무쌍(패도무쌍)한 기운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중앙에 있는 사람은 칙칙한 흑포를 걸친 인물이었는데 얼굴 이 유난히 창백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이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더욱 기이한 것은 그의 동공(동공)으로, 다른 사람과는 달리 검은 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고 흰자위만이 가득 해서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이 오싹해지는 것 같았다. 사마결은 그들을 둘러보다가 안색이 조금 변했다. "저들은 모두 집마부에서도 일급의 고수들이오. 오른쪽의 회 의인이 십대고수중의 팔조앙신(팔조앙신) 저연(저연)이고 왼쪽 의 홍포인이 역시 같은 십대고수중의 혈수마번(혈수마번) 좌상 (좌상)이오. 그리고..." 사마결의 시선은 줄곧 중앙의 백면인(백면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가운데의 인물은 집마부의 세 총관(총관)중의 하나인 백면 령관(백면령관) 백운교(백운교)요. 저 자는 좀처럼 무림에 나 타난 적이 없었는데...." 백면인을 바라보는 사마결의 눈빛에는 불안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팔조앙신 저연과 혈수마번 좌상은 집마부에서도 열 손가락안 에 드는 절세고수들로 이미 천하무림에 혁혁한 명성을 구축하 고 있었다. 허나 그들보다 더욱 무서운 인물은 바로 중앙에 서 있는 백 면령관 백운교였다. 백운교는 집마부를 사실상 관장하는 세 명 의 총관중 제일 말석(말석)이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백운교의 무공은 십대고수의 두 사람을 합친 것보다 고강하고 손속은 지옥의 염라대왕보다도 무섭다고 했 다. 특히 그는 심계(심계)가 깊고 잔인해서 집마부에서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는 집마부내에만 기거하고 있기 때문에 무림에 모습을 드 러낸 적이 극히 드물었는데 오늘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니 무 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게 분명했다. 사마결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중앙에 서 있는 백운교가 앞으 로 나서며 무색투명한 눈으로 조자건을 바라보았다. "네가 조자건이냐?" 이상하게도 음성은 들리는데 백운교의 입은 다물어져 있었 다. 사마결은 안력을 돋구어서야 백운교의 백지장처럼 얇팍한 입술이 아주 살짝 열려 지는 것을 발견했다. 조자건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백운교는 뒷짐을 진 채 냉혹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게는 이미 본 부의 추살령이 내려졌다. 그러니 이 곳을 살아서 벗어날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게 좋을 것이다." 사마결은 깜짝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집마부의 추살령에 대해서는 그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일단 집마부에서 반드시 죽여야 할 인물이라고 점찍어서 추 살령을 발동하기만 하면 그 자는 이미 염라대왕의 최명부(최명 부)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곧 집마부의 모든 힘을 다해 상대를 반드시 척살한다 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추살령은 지금까지 스물 여덟 번 내려졌는데 상대는 하나같 이 강호무림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절정고수들이었다. 허나 그들중 누구 하나 집마부의 살수(살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게중에는 동도(동도)들을 규합해 조직적으로 대항한 인물도 있었고, 아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종적을 감춰 버린 자들 도 있었다. 허나 어떤 방법을 썼던 그들은 십일도 채 되지 않 아 모두 싸늘한 시신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만큼 추살령이 발동된 집마부의 추적과 살수는 끈질기고 악독했다. 사마결은 도데체 집마부가 무엇때문에 조자건에게 추살령을 발동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가 알기로는 추살령을 발 동할 수 있는 사람은 집마부주(집마부주)와 수석총관(수석총 관), 그리고 집마부의 태상호법(태상호법)등 불과 서 너 사람 뿐으로 그것도 대상이 모두 강호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인물에 한해서 였다. 헌데 조자건은 출도한지 얼마 되지도 않고 무림에 거의 명성 이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대체 무엇때문에 그에게 추살령이 내 려졌단 말인가? 그의 무엇이 집마부의 수뇌인물들의 비위를 건 드렸단 말인가? 조자건을 바라보는 백운교의 눈빛은 마치 죽은 시체를 배회 하는 독수리의 그것 같았다. "어떠냐? 올라와서 배 위에서 죽을테냐, 아니면 물속에서 고 기밥이 될테냐?" 사마결은 범선위로 올라가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있어야할지 일시지간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자건을 돌아보며 물었다. "조형의 생각은 어떻소?" 조자건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이 먼저 도전을 해왔는데 응하지 않는다면 무인(무인) 의 도리가 아니지 않소?" 말과 함께 그의 몸은 어느 새 허공을 날아 범선위로 올라가 고 있었다. 사마결은 조자건이 돛단배를 박차고 십 여장이나 떨어진 범선위로 날아갔는데도 돛단배가 조금도 요동치지 않자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정말 보면 볼수록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군. 무공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조자건의 뒤를 따라 범선으로 몸을 날렸다. 이, 복 마 그들이 범선위에 내려서자마자 거짓말처럼 홀연히 범선의 여 기저기에 등불이 내걸렸다. 그와 함께 전신을 흑의로 칭칭 감 싼 팔 구명의 무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에워쌌다. 흑의무사들의 수는 모두 아홉이었는데 하나같이 손에 강도 (강도)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강도를 들고 있는 자세와 신광 (신광)이 잘 갈무리된 눈빛을 보아 무서운 실력을 지닌 고수들 임을 알 수 있었다. 사마결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 자들은 집마부내에서도 위명이 자자한 무정구도수(무정 구도수)요. 무정구도수까지 나타나다니 오늘 일이 아무래도 순 탄치 않겠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