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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태극문 - 87편 (87/87)

2026-09-23 17:59:50 조회 14
한동안 소리없이 웃고 난 그들은 천천히 웃음을 거둔 채 서 로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단 일초다!) 조자건은 단 일초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의 겨룸은 없을 것이다. 그는 이 단 일초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것이며 화군악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는 오직 이 일초를 펼치기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 다. 만약 자신이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그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품었던 천하제일고수의 소망을 십육 년만에 이루 게 될 것이다. 만약 일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된다면...? 그의 전신은 무형검기에 의해 갈가리 찢겨지게 되겠지. 그 순간 조자건은 출수를 했다. (이 자의 자세는 참으로 완벽하군.) 화군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군악은 아직 조자건처럼 한 치의 헛점도 없는 무공을 펼치 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무형검을 완성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의 공세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화군악은 몸을 쭈욱 폈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고오오.... 갑자기 그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솟구쳐나와 어두운 밤하 늘을 궤뚫고 저 먼곳까지 뻗어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그 기운은 너무도 강력하고 세찬 것이어서 마치 거대한 바닷 물이 하늘로 솟아올라가는 것처럼 장엄한 광경이었다. 화군악의 전신은 그 기운에 감겨 제대로 보이지조차 않았다. 그 기운은 마치 하나의 칼날처럼 조자건을 향해 쏘아져가고 있었다. 한 순간 조자건은 아찔했다. 그 엄청난 광경을 보고 압도당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 일 것이다. 하나 그 순간 조자건의 입가에는 빙그레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그는 무형검이란 어떤 형태를 띠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한 그에게는 베어야 할 목표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이 엄청난 검기는 비록 어떤 뚜렷한 형태를 지닌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 론 무형검기를 화군악이 자신의 기세로서 유형화(유형화)시켰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단 무형검기가 자신의 눈에 나타난 이상 그에게는 베어야 할 어떤 목표가 분명하게 정해졌다. 그 목표가 제아무리 거대하고 가공할 것일지라도 그는 그것 을 베고야 말 것이다. 조자건이 내뻗었던 나무막대에서 별과 같은 섬광이 피어올랐 다. 그 섬광은 마치 밤하늘을 밝히는 수많은 별들처럼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섬광은 어두운 밤공간을 꿰뚫고, 무형의 검기를 꿰뚫고, 초인(초인)의 몸마저 꿰뚫어 버렸다. ........... 화군악은 우두커니 조자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 초식은 무어라고 하나?" 조자건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소." 화군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내가 지어도 되겠나?" "마땅한 이름이 생각난다면 그렇게 하시오." 화군악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이 그의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화군악은 문득 조자건을 바라보며 웃었다. "생각이 났네." "어떤 것이오?" "천지사방에 별이 가득하니 능히 천하를 비출 것이다..." 조자건은 눈을 반짝 빛냈다. "육합성만조천하(육합성만조천하)라..." "어떤가?" "정말 멋진 이름이오." 화군악의 눈에도 번쩍하고 빛이 흘러나왔다. "그럼 그 초식의 이름을 그것으로 하겠나?" 조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화군악은 다시 미소지었다. "천하제일의 무공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니 이것도 행운이겠 군...." 그의 음성이 점차 미약해졌다. 그는 여전히 웃은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킁! 바닥에 쓰러졌을 때 그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 다. 조자건은 그의 시신을 내려다 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우두커니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 하나 하나가 그리운 얼굴들로 보였다. 조립산...냉북두...악교...사공척...보고 싶은 진표... 그들은 그를 보고 웃고 있었다. 조자건은 그들을 올려다 본 채 언제까지고 우두커니 서 있었 다. 무덤에는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그 푸릇한 풀들을 보자 번우량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벌초를 해야겠군. 일 년전에 하고는 그만 잊어 버렸네." 조자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가지고 온 꽃송이를 무덤 앞에 내려 놓았다. 그 꽃송이는 섭보옥이 정성들여 만든 것이었다. 그때 위지혼이 천천히 걸어올라왔다. 그는 몸이 불편해서 일행중 가장 늦게 올라온 것이다. 하나 그의 손에는 몇 개의 낫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보자 번우량은 씨익 웃었다. "진짜 똑똑한 사람은 따로 있었군." 위지혼은 말없이 다가와서 낫을 내밀었다. 조자건과 번우량은 낫을 잡은 채 무덤을 뒤덮은 무성한 풀들 을 자르기 시작했다. 위지혼도 그들을 거들었다. 섭보옥은 한쪽에 선 채 그들이 벌초하는 광경을 조용히 지켜 보고 있었다. 벌초가 끝나자 그들은 다시 무덤앞에 나란히 모여섰다. 무덤은 작고 초라했다. 무덤앞에는 낡고 이끼가 선 석비 하 나가 있었다. 석비는 비바람에 심하게 훼손되어 그 위에 적힌 글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번우량은 소매로 석비를 쓱쓱 문질렀다. 비바람에 훼손된 글자 중 몇 개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태극(태극).....문주(문주).....북두(북두).... ...자건(자건) 읍(읍)... 번우량은 한동안 그 석비를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내년에는 석비를 좀더 큰 것으로 만들어야 할까보네." 조자건은 빙긋 웃었다. "나는 이것이 더 좋은데..." 위지혼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더 좋아..." 그의 음성은 자세히 듣지 않으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만 큼 미약하고 갈라터진 것이었으나 번우량은 히죽 웃었다. "섭보옥도 물론 이것이 더 좋을테고....아무래도 그냥 이대 로 두는 것이 더 낫겠군." 섭보옥이 조용하게 웃었다. "왜 거기에 나를 끌고 들어가요?" "그럼 당신은 이게 싫소?" "그건 아니지만...." 번우량은 그것보라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하하...자건이 만든 것인데 싫을리가 없겠지. 나도 사실은 이게 마음에 드오." 한동안 네 사람은 석비를 바라본 채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번우량이 조그만 음성으로 물었다. "그도 여기 온 적이 있을까?" 그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다. 다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번우량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마음이 놓일텐데..." 모두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꽃송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조자건이었다. 그 꽃송이는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돌틈에 놓여 있었다. 그 래서 유심히 보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칠 뻔 했었다. 조자건은 묵묵히 허리를 굽혀 그 꽃송이를 집어 들었다. 몇 가지 들꽃을 꺾어 만든 그 꽃송이는 몹시 어색한 솜씨로 만들어져 있었다. 조자건은 그 꽃송이를 얼굴에 갖다댄채 잠시 내음을 맡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꽃송이를 보았다. 조자건은 꽃송이의 내음을 맡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산을 내려오자 여기저기에서 등에 나무를 한 짐씩 짊어진 젊 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남들보다 먼저 나무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번우량은 잠시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 다. "아직도 태극문의 무공을 익히게 해달라고 찾아오는 놈들이 많나?" 조자건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삼 년동안 어떤 일만 해야하는지 상세하게 밝혔더니 지금은 별로 없군. 남은 것은 저들 뿐이라네." 번우량의 입가에도 돌연 미소가 떠올랐다. "두악(두악)은 어떤가? 그 녀석은 잘 해내고 있는가?" "그 아이는 참을성이 많지. 하지만 조금 자만하는 경향이 있 네." 번우량은 우거지상을 지었다. "그 녀석이 아비 망신을 시키는군." 조자건은 피식 웃었다. "자네를 닮은거겠지." "무슨 소리...나는 자만하고는 담을 쌓은 사람일세."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그때 청년 중 하나가 꾀죄죄한 소년의 목덜미를 붙잡고 그들 에게로 왔다. 청년은 조자건을 보자 고개를 수그렸다. "무슨 일이냐?" "이 녀석이 우리가 수행하는걸 몰래 숨어서 보고 있었습니 다." "알았다. 그를 놔두고 물러가라." 조자건이 고개를 끄덕이자 청년은 소년을 남겨놓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조자건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열 세 살쯤먹은 나이어린 소년이었는데 옷이 남루하고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져 있어 초라한 행색이었다. 구걸을 하 며 지내온 듯 손과 얼굴에는 지저분한 것이 덕지덕지 붙어 있 었다. 소년은 눈을 빛낸 채 조자건을 바라보고 있다가 조자건과 시 선이 마주치자 잽싸게 고개를 떨구었다. 조자건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리 오너라." 소년은 몸을 엄찔하다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태극문의 제자가 되려고 왔느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자건은 물끄러미 소년의 손을 바라보았다. 더럽고 때검정이 묻은 소년의 고사리같은 손에는 들꽃더미가 들려 있었다. 소년은 조자건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자 화들짝 놀라며 그 들꽃을 바닥에 버렸다. 조자건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이름이 무엇이냐?" 소년은 망설이다가 조그만 음성으로 말했다. "모용도(모용도)입니다." "모용(모용)이라...." 조자건은 한동안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쳐들어 하 늘을 올려다 보았다. 가을하늘은 유달리 청명했다. 그는 그 하늘을 올려다 본 채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하늘이 정말 푸르군...." 번우량과 위지혼, 섭보옥도 모용도를 바라보다 그를 따라 하 늘을 올려다 보았다. 푸른 하늘 저 멀리에서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르는 것 같았 다. 그들은 푸른 하늘(청천)을 올려다 본 채 언제까지고 서 있었 다. <대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