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객 - 27편 (27/36)
생사를 알 수 없는 정인은 너무 멀고, 최고의 예우를 다해 자신을 찾는 완벽한 사내에게 가까움을 느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순간의 착각으로 돌려온 그녀, 영원과 삶을 모두 걸었던 고귀한 사랑을 어찌 그런 착각과 바꾸랴. 추상의 복면이 축축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바로 그ㄸ다.한 소리 컬컬한 음성이 바람결에 실려온 것은……. 인생은 수이 가는 것, 오늘도 또 어디 가서 술벌레를 달랠 텐가……? 순간 추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사람이다!' 알 수 없는 반가움이 온몸 혈관을 치달려 갔다. 호수를 낀 관도 저 너머로, 희미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멀리서 보기에도 흠뻑 취할 대로 취한 그, 금방이라도 호수 속으로 빠질 듯 휘청대는 걸음걸이……. 그는 순식간에 탑의 아래까지 걸어왔다. "허어…… 취하는군, 취해……. 역시 술이란 먹을수록 취하느니……." 추상은 웃으며 낭랑한 음성을 토해냈다. "선배께선 안녕하시오?" 주정뱅이의 시선이 언뜻 위를 향했다. 게슴츠레 뜬 눈으로 추상을 이리저리 뜯어보고 난 그는 한참 만에야 껄껄 대소를 터뜨렸다. "피가 그리운 혈인에게 피 한 방울 내주기를 인색히 여기던 처녀로군. 그래." 웃으며 말을 받으려던 추상의 얼굴이 돌연 밀랍처럼 굳어 들었다. 처녀……. '이 사람은……?' 추상의 목소리가 일시에 싸늘해졌다. "귀공은 도대체 누구시오?" "나? 헛허……." 주정뱅이는 비틀비틀 간신히 몸을 가누며 호숫가로 털썩 주저앉았다. "보는 사람마다 그렇게 물으니 나는 또 누구에게 묻는다?" "귀공!" "아아……. 처녀로서 수십 년 동안 이도 안 닦은 괴물에게 목을 내맡기고 싶지 않았던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아까의 인생이란 말은 취소하겠소. 그러니 그렇게 고운 눈 치켜뜨지 말구려." 추상의 손이 은사슬을 휘어감았다. 그녀는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한데 이때, 그녀의 두 눈에 언뜻 기광 한 줄기가 스쳐 지났다. 괴인은 지금 추상을 등지고 호수를 향해 앉아 있었다. 그 뒷모습, 오오…… 어디서 보았던가? 저 뒷모습은 왜이리 낯익은가? 추상이 어찌 알랴? 등을 지고 앉은 괴인의 눈가에 흐른 듯 고인 눈물을…… 천하에서 가장 냉혹한 사나이의 가슴속을 가득 채운 격정의 의미를……. 괴인은 아련히 젖어오는 눈길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그날도 오늘처럼 저렇게 별이 많았지……." 추상은 공력을 이미 팽배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라도 출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 "소년은 탑 위에서 하룻밤을 지내야겠다고 생각했지. 별빛이 탑의 안을 소담스럽게 물들이던 그 시각……, 소년은 문득 찰랑이는 물소리를 들었지……." 돌연 추상의 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감아 쥔 은사슬이 손바닥을 파고 드는데도 그녀는 느끼지 못했다. "무심히 내다본 밖이었지. 탑 아래선 꽃의 요정 같은 소녀 하나가 목욕을 하고 있다가 소년과 시선이 마주쳤지……." 오오…… 추상의 두 눈에 그득 눈물이 차올랐다. 손에 쥔 은사슬이 스르르 풀려 나가고 몸의 힘이 빠지고 있었다. "……." "바로 그대처럼 소년은 탑 위에서 소녀는 탑 아래서……. 오늘은 참으로 이상한 날……, 저토록 하늘이 아름다울 줄이야. 추상, 그 동안 잘 지냈소?" 추상, 그 동안 잘 지냈소? 끝내, 추상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르 쏟아지고 말았다. 그녀는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색의 꽃구름이 그녀를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꽃불이 그녀의 주위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추상은 웃었다. 웃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류흔……! 오오……! 무류흔……. * * * 추상은 눈을 떴다. 별빛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늘도, 공기도, 대지도…….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한데, 오오…… 끝인가? 너무도 선명히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정인의 모습이라니……. 추상은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면, 이 환상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무수히 깨어났던 지난날의 꿈처럼, 그러나 추상은 들었다. "그 성격은 똑같군. 탑에서 뛰어내리다니." 순간, 추상의 얼굴에 위대한 감정의 광휘가 빛처럼 치달려 왔다. 꿈이…… 아니야……. 이것은 꿈이 아니야……. 다음 순간 그녀는 미친 듯이 뛰어 일어났다. 일어나며 그녀는 무류흔의 가슴을 사정없이 떠밀었으며……. "왜……?" 풍덩! 호수 속으로 빠진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덮쳐 들었다. "왜……?"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된 그의 가슴을 무수히 두들겼다. "왜 진작 말을 안했어? 이 나쁜 자식아!" 서늘한 감촉이 온 몸으로 구석구석 섬뜩하게 스며들었다. 겨울의 물이 온몸을 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가? 설사 이 자리에서 하나의 얼음덩이가 되어 버린들 무슨 상관인가? 오오…… 하늘이여……. 그가 왔어요----! 추상과 무류흔은 한데 뒤엉킨 채 겨울의 호수 속을 미친 듯이 헤맸다. 서로에게 물을 퍼붓고, 머리채를 잡아 물 속에 처박고, 울고 웃으며 서로에게 미친 듯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헛허……." "호호……." 춥다. 무류흔과 추상은 갈대 속에 나란히 손을 잡고 누워 있었다. "헉헉……." "허억……." 숨이 가쁘다. 힘들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것도 춥지 않고 아무것도 힘들지 않았다. 무류흔의 손이 추상의 복면을 벗겨왔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얼굴이 드러나자 그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어 왔다. 그녀의 입술은 꿀처럼 달았다. 그리고 부드러웠다. 모든 영혼이 그녀의 입술을 통해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의 손이 스르르 추상의 옷깃 속으로 스며 들었다. 차가운 손은 그녀의 더운 육체를 일시에 일깨워냈다. 옷, 포의와 유의, 그리고 치마가 스르르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는 감촉을 느끼며 추상은 사르르 두 눈을 감았다. '다시는…… 아무 데도…… 어디든 보내지 않을 테야…….' 눈부신 나신이 겨울바람 속에 드러났다. 갈대잎이 그 풍요로운 하얀 육체를 부드럽게 간지럽혀 왔다.서로의 열정을 깊이깊이 감추어 둔 채, 한많은 세월을 기다림으로 몸부림쳐온 두 영혼……. 휘이잉……. 삭풍은 대지를 휘몰아가는데, 두 더운 육체는 하나가 되기 위해 뒤엉켰다. 사내의 혀가 여인이 턱을, 목을, 귀를, 가슴을 핥아가고, 여인의 손이 사내의 머리를 등을 얼굴을 감싸안았다. 축복! 하얀 별빛이 축복처럼 두 사람의 몸 위로 부서져 왔다. 화옥(華玉), 겨울바람이 그의 옷을 부대끼고 있었다. 하나 그는 석상으로 변한 듯 미동도 않은 채 둔덕 위에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은 병자처럼 창백했고……. 그러나 한 쌍의 호안(虎眼)은 무심한 불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여인, 사랑하는 여인, 목숨을 바쳐 사랑하는 여인이 남의 품에 안긴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녀가 남의 입술에 몸을 내맡기고, 그리하여 황홀한 신음을 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화옥은 보았다. 그녀가…… 다른 자를 안고 갈대밭 속으로 쓰러졌을 때 그의 가슴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었다. 화옥은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져보지 못한 적이 없는 자(者), 그래서 마침내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을 잃어버린 걸레같은 가슴은 이토록 아픈 것인가? 그의 두 눈에 언뜻 이슬이 맺혔다. 이것은 그 생애에 최초로 흘리는 눈물…… 그의 몸 위로……. 네 명이 금의인이 조용히 나타나 무릎을 꿇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지존(至尊)." 여인의 벗은 등으로 갈대와 나뭇가지가 박혀들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사내의 등을 으스러져라 껴안고, 예쁜 발은 흙을 파헤치며 오무라져 있었다. 준다. 다 준다. 무엇을 아까와 할 손가? 당신은 나의 님, 못내 사랑하는 나의 님……. 정사는 격렬했다. 죽음처럼 격렬했다. 화옥은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 일천은 족히 되어 보인다. 저들은 화옥의 정예였다. 그 하나가 백 인은 능히 감당해 낼 일당백의 고수자들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갈대밭을 거대한 원을 그리며 압축해 오고 있었다. 화옥의 뒤에 있던 금의인 중 하나가 말했다. "화공(火功)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명하시길……." 화옥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손을 허공으로 쳐들었다. 그리고 말……. "아이들은 철수시켜!" 순간 금의인의 얼굴엔 의혹에 찬 빛이 스쳐지났다. "지존……." "멀리." 금의인은 깊숙이 머리를 숙여 보이더니 즉시 일어나 수중의 금기(金旗)를 크게 흔들었다. 다음 순간 거대한 원을 그리며 압축해 오던 고수들의 몸이 멈칫하더니 오던 길로 몸을 돌렸다. 그들의 모습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불을 붙여라." 두 번째 금의인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번에는 홍기(紅旗)를 크게 흔들었다. 순간, 갈대밭의 아득한 끝쪽부터 팍 한 점의 불꽃이 스며들었다. 그 불꽃은 이내 요원한 불길로 변해 온천지를 활활 태우기 시작했다. 그 높이가 십 장도 넘는 거대한 불길이엇다. 화옥의 무표정한 얼굴에 한 줄기 허탈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한 친구를 잃고 한 친구를 얻었다. 잃은 친구는 연인이요, 얻은 친구는 적수……. 이것은 내가 인간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정(情)이다……." 그의 몸이 느릿하게 돌려졌다. "무류흔…… 추상, 살아나거든 다시 만나자." 불, 이 불은 사흘 동안 탔다. 내내 십 장, 이십 장의 엄청난 기세로 탄 이 불은 낙하 (洛河) 동변의 십만 평야를 모조리 태우고 말았다. 당시, 그 안에 있던 모든 생물들은 모조리 타 죽어 버렸고……, 이 불은 관부(官府)에서도 친히 나와 조사했으나 끝내 그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말았다. * * * 집, 하나의 거대한 집. 세상에 이토록 큰 집도 있을까? 보라! 정문에 서니 보이는 것은 빽빽한 전각과 누각 뿐이요, 그 끝은 아득하여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어린 아이 하나가 있었다. 소년은 몹시 호기심이 많았다. 그는 늘 이 집의 담 길이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를 궁금히 여겼다. 아무도 그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소년은 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담은 산으로도 강으로도 뻗어 있었다. 소년은 종내 돌아오지 않았다. 소년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소년을 찾아 두 명의 어른이 나섰다. 그들 역시 담을 따라 걸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두 사람은 해골이 되다시피 한 몰골의 소년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걸었으며 근 삼십 일이 걸려서야 이 집의 담을 다 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 거대한 집을 일컬어 삼십일후장(三十日後莊)이라고 불렀다. 이곳이 왜 이렇게 큰지 커야만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이 집의 주인은 그럼 누구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얼굴도 몰랐다. 그는 그저 금대야(金大爺)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늦겨울, ㄸ는 이월 하순. 성급한 개구리는 밖으로 뛰어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돌연, 삼십일후장의 담을 넘었다. 담이라곤 하나…… 담 안에 특별히 무엇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앞에 펼쳐진 것은 넓다란 평원이었다. 평원엔 산도 있고 강도 있었으며, 그 평원의 중간중간에 집이라고 여겨지는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뭔가?" "하나의 마을이고 집이에요." "왜 이 따위 집을 지었지? 저곳까지 가려면 못 걸려도 사흘은 걸리겠는데?" 두 사람, 꾀죄죄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이다. 둘 다 머리는 잔뜩 헝클어진 데다 옷은 이리저리 그을리고. 찢어지고 뜯어졌다. 한 마디로 거지도 상거지의 몰골이었다. 다만 그들의 눈만은 별처럼 빛나고 있었으며, 좌측의 사람은 가슴이 불룩한 것으로 보아 여자인 것 같았다. 여자거지는 흰 치아를 드러내고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금대야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괴상한 집을 짓겠어요? 후훗…… 가다 보면 금대야의 뜻을 알게 될 거예요." 두 사람은 터덜터덜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는 도중 기이한 것을 많이 보았다. 그것은 수십 개의 마을이었다. 어떤 마을로 들어서니 온통 불구자 투성이었다. 눈이 멀거나 귀가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들, 다리가 없거나, 팔이 없고, 사지가 없는 사람들……. 그밖에 인간사회에선 병신이라고 부르는 인체의 한 군데가 고장난 사람들이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한 마을 전체가 불구자들인 이곳, 이들은 모두 독톡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즉, 다리가 없는 사람은 앉아서 하는 일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팔이 없는 사람은 걸어서 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눈이 멀었거나 귀가 멀었거나 모두 자신의 신체적 특성에 맞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한 마을 내에서 완벽히 자급자족하고 있었다. 농사를 짓고, 길쌈을 짜고, 집을 지어서 균형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도저히 인간 세상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아무 부러움없이 떳떳이 생을 살아가는 이 불구자촌의 끝에는 한 맹인소녀와 두 다리가 없는 소년이 놀고 있었다. 맹인소녀는 다리가 없는 소년을 업고 다리가 없는 소년은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 그쪽으로 가면 돼, 네가 잡은 것은 꽃이야." "이 꽃은 예쁜 걸까?" "매화야, 그 색은 네 얼굴하고 똑같아." 어떤 마을엔 아이들이 가득했다. 십여 명의 아름다운 소녀들이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고, 이 아이들은 갓난 아기부터 십여 세까지 매우 다양했다. 어떤 마을엔 홀아비, 과부들이 살고 있었다. 당시의 윤리규범으론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이곳에선 남자가 하는 일과 여자가 하는 일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고…… 그들도 살아가다가 자연스럽게 홀아비 과부가 아닌 부부로 결합되곤 했다. 이러한 마을들은 수십 개나 있었다. 마을마다 특색이 있었으나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 첫째는 어떤 마을이든 모두 모두 인간 사회에선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 그 둘째는, 그러나 이들 모두는 행복해 보인다는 것. 그렇다. 불구자든 버림받은 아이든, 홀아비든, 과부든, 그들 모두는 행복해 보였다. 풍요롭고 건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남자거지가 말했다. "이곳은 왕국(王國)이로군." "그래요, 아름다운 왕국이죠." "바깥 세상이 아무리 추워도 이곳만은 봄이다." "춘토(春土)의 왕국(王國)……? 후훗……." "그놈은 어디 있지?" "누구?" "이 집을 만든 놈." "저기……." 여자거지의 손끝이 가리킨 곳, 그곳엔 하나의 집이 있었다. 한데, 이 집 또한 몹시 괴이했다. 그것은 집이 아니라 두 개의 크고 작은 방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이다. * * * 한 사람이 장부의 돈을 계산하고 있었다. "하나…… 둘……." 그가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황금 만 냥 이엇다.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천구백이십오까지 숫자를 헤아렸다. 그가 있는 곳은 하나의 방이었다. 한데, 이 방은 몹시 괴이했다. 그것은 그대로 하나의 집이었던 것이다. 보라, 대청이라는 푯말 아랜 두 개의 의자와 탁자가 놓여 있고, 침실이라는 표말 아래에는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정원이라는 표말 옆에는 한 송이의 꽃이 꽂힌 화병이 덩그러니 있는 것이니…… 세상에 이토록 기이한 집도 있단 말인가? 이때다. 돌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바로 담을 넘은 후 꼬박 사흘 만에 이곳까지 온 남자거지와 여자거지. 주인은 돈을 세느라고 이들이 들어서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정확히 삼천까지 헤아린 후에 장부를 탁 덮었다. 그리고 끌글 혀를 찼다. "어제 번 돈은 너무 조금이로군." 그의 시선이 힐끗 문쪽을 향했다. 순간, 그의 뚱뚱한 얼굴이 못나게 일그러지더니 돌연 폭소를 터뜨렸다. "왔다……." 그는 우수워 죽겠다는 듯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추상……, 핫하…… 네 그 몰골이 뭐지?" 추상? 오오……, 이 여자거지가 바로 추상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 옆의 남자거지는 무류흔인 것이리라. 무류흔은 기이한 시선으로 눈앞에서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 사내는 몹시 우스꽝스럽게 생겼다. 그 얼굴은 돼지의 형상을 그대로 갖다 박았으며, 그의 손이나 발은 다섯 개의 작은 공을 매단 큰 공 같았다. 뚱보사내는 미친 듯 구르며 웃어대다 말고 돌연 뚝 웃음을 그쳤다. 그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너무 구르다간 애써 먹은 점심을 소용없게 만든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군." 추상은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요즘도 그렇게 많이 먹나요?" "많이라니? 나는 요즘 속이 안 좋아. 조금씩 밖에 안 먹고 있다." "……." "오늘 점심도 닭고기 다섯 마리와 배추 열 통, 소고기 아홉 근을 먹었을 뿐이지, 그래도 배가 고팠지만 입가심으로 수박 한 통을 더 먹고 그만 두었다." 맙소사! 닭고기, 다섯 마리와 소고기 아홉 근 배추 열 통에 수박 한 통의 입가심이라니? 그것이 조금이라니? 무류흔은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크게 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핫하……." 뚱보사내의 시선이 처음으로 그를 향했다. 그는 처음으로 무류흔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는 퉁명스런 어조로 추상에게 물었다. "아까운 웃음을 저토록 낭비하는 저 친구는 누구지?" 추상은 그윽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무류흔이에요." 뚱보사내는 말을 하고 난 후, 책상 위의 장부로 손을 가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장부를 집지 못했다. 와르르……. 그는 책상을 온통 헛집고 나서 회의에 찬 시선으로 다시 물었다. "누구…… 라고……?" 무류흔이 씩 웃으며 나섰다. "이 뚱보야. 멋진 왕국의 제왕이 되더니 이젠 친구도 모르는가? 나는 무류흔이다." 뚱보, 금적해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몸을 일으켜선 무류흔을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다음 순간, "핫하……, 너는 정말 무류흔이구나!" "금적해!" 두 사람의 몸은 서로를 격렬하게 얼싸안았다. 친구여! 몇 년 만인가! 추상, 그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의 두 눈엔 그윽한 눈물이 떠돌고 있었다. 그렇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는 것이다. 희대의 살수 무류흔,최고의 거부 금적해, 의도(義盜) 추상. 이들은 마침내 함께 만나고 말았다. 무림의 일은 이로써 중대한 국면으로 뒤바뀌게 된다. * * * "그것은 화옥의 짓일 게다." 금적해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들이 그곳에서 살아 나온 것은 그의 한 가닥 자비라고 밖엔 볼 수 없어. 그놈은 한번 잡은 먹이를 절대로 놓치는 놈이 아니야. 운이 좋았다." 추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우리는 그동안 화옥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어요. 그러나 그는 온통 신비에 가려 있어요. 삼십삼겁의 오인이 그에게 혈사충성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엔……." "그 오 인이 누구 누구지?" "본초(本草), 유혜(劉惠), 무비(無臂), 공족(空足), 천맹(天盲)이에요." 무류흔은 신음을 터뜨렸다. "노른자위는 다 모여 있군." 금적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놈들은 그 동안 나머지 이십팔겁(二十八劫)이 무림을 헤집는 동안 어딘가에 숨어서 방대한 세력을 구축했어. 화옥이 자주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 세력이 이제 정비를 끝냈다는 얘기야." "그들은 누구를 노릴까?" "바로 너지, 너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지만 냉혹한 취국의 사나이, 불사취국이 첫번째 목표일 거야. 그 다음이 귀역오가, 묵도, 야화의 순서일 게다. 이들이 무너진다는 건 바로 무림을 통일한다는 얘기거든." 추상이 의문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게 가능할까? 나머지는 그만 두더라도 귀역오가의 철제만 해도 가히 가공할 인물이 아닌가요?" "가공하지. 그는 중원제일의 쾌검 이자 오대살인가문을 오십 년 동안 다스려 온 인물이야." "……." "하나, 이 점을 무시하면 안돼. 화옥은 바로 그의 문화였다. 화옥만은 철제의 약점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렇군요……." 금적해는 껄껄 웃으며 무류흔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건 그렇고 취국이 바로 너라니. 이는 나의 자랑이요, 중원의 자랑이다. 그렇잖아도 나는 취국이란 사내를 한 번 만나 보려던 참이야." "왜?" "그는 너무 외로워, 또 무모하다. 힘이 돼줄 생각이었지." 추상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핏! 장사를 할 생각이었으면서……." "핫하……." 금적해는 자신의 튀어나온 배를 두드렸다. "내 배의 예쁜 회충아,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삼십삼겁의 생존자들, 화옥의 육 인을 제외한 십이 인은 이 나라의 무(武), 정(政), 상(商)을 주로잡고 있어요. 금대야가 취국을 돕는다는 건 즉, 그들을 함께 무너뜨리고 이 나라의 상권을 주름잡겠다는 심보가 아니고 뭐예요?" "그건 옳군, 그러나 나도 사람이야. 이 금씨가문도 후세사람들이 정의의 사도라고 말해줄 만한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핫하……." "호호……."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러다 말고 문득, 금적해가 정색을 하고 무류흔을 바라보았다. "이 다음 목표는 어디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