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신객 - 25편 (25/36)

2026-09-22 08:27:13 조회 28
붉은 옷은 빨간 색을 뜻하고……." "그대들의 용건은 무엇이오?" "그렇지요……. 빨간 색은 즉 붉은 색인데……." 거한이 혼미지경을 헤매자, 문득 그의 뒤에서 청초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이유는 소매(少妹)가 말씀드려도 될까요?" 백의소녀, 뒤에 있을 땐 모르겠더니 앞으로 나서자 돌연 주위가 다 환해졌다. 성결하기 이를 데 없는…… 아무리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이 소녀와 마주서는 순간, 그 악심을 잊어버리고 말듯했다. 백의소녀와 백유군, 마주서니 마치 해와 달이 겨루는 것 같다. 한쪽은 얼음처럼 투명하고 요염하며, 한쪽은 유리알처럼 맑고 순수하니……. 그렇다. 이것이 바로 미래의 사가(史家)들이 말하는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와 천하제일의(天下第一醫)의 첫 만남이었다. "요요……?" "그래요. 바로 그녀지요." 좌중, 최초의 살벌한 분위기는 간 곳이 없고 화기애애하기 이를 데 없다. 백유군이 이들을 정중히 맞아들여 허심탄회한 얘기를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거한 탕우(塔雨)는 상에 그득 쌓인 음식들을 입 속으로 들여넣기에 정신이 없고, 미녀 야래향(夜來香)은 사대전주의 한 사람인 빙어랑(氷御랑)과 죽이 맞아 무엇인가 얘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백의소녀 근지(勤芝)는 백유군과 가장 상석에 앉아 다정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탑우, 야래향, 근지의 삼 인, 언제던가……. 무류흔이 집을 처음 떠났을 때 산 속에서 마주쳤던 괴이한 세 오누이……. 인재가 인재를 알아봄인가……, 손을 마주잡고 얘기를 나누는 근지와 백유군의 태도는 자매처럼 다정해 보였다. "우리는 길을 오다 하나의 괴이한 일을 만났지요." 근지가 말했다. "화장(花粧)을 한 인두(人頭)를 자꾸 보게 된 거예요. 귀역 오가의 색해(色海)가 그런 수법을 쓴다고는 들었지만 원인을 추적해보니 바로 그 요요였던 거지요." 백유군은 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무서운 아이가 살인에까지 맛을 들였으니 이 일을 도대체……." "제 생각으로는 요요가 바로 요즘 항간에 이름이 자자한 천하사기(天下四奇)중 설요(雪妖)인 것 같아요." 백유군은 가볍게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심산에 파묻혀 있는 그녀가 무림의 정세를 알 리가 없다. "천하사기(天下四奇)?" 근지는 배시시 웃더니 이어, 취국(翠菊), 묵도(墨刀), 설요(雪妖), 야화(夜花)에 대한 얘기를 해 주었다. "우리는 그 동안 보타암(普陀菴)에서 한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한데 불사취국의 소문을 듣고 짚히는 바가 있어 중원으로 가고 있던 중이었어요." 백유군은 취국에 대한 얘기를 듣는 순간, 돌연 가슴이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웬일일까? 모르는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녀는 근지가 취국의 얘기를 할 때 두 눈에 떠도는 아련한 그리움을 읽었다. 백유군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혹시 그대는 취국일지도 모를 그 사람을 사모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순간 근지는 가볍게 얼굴을 붉혔으나 이내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백유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움…… 그 속에 담긴 번뇌와 고통을 그녀가 어찌 모르랴. 하나 그녀는 문득 근지가 무서워졌다. 그녀는 놀랍도록 솔직했으므로……. 근지가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밖에도 그 취국이란 사람은 매우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 저희들도 취국이 누구든 그를 돕고 싶어서 나선 것이니까요." "그건 왜 그렇죠?" "어력멸사도(御力滅邪道)." "어력…… 멸사도……? 힘으로 사를 멸한다……?" "그래요. 그는 선이 강해진 힘으로 악을 눌러야 함을 외치고 있어요. 이 도리는 지금 중원천하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지요." 백유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또한 이 도리에 호감을 느꼈다. 아울러 이토록 호쾌한 남아가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호기심도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매우 특이하군요……." "어때요, 언니도 이 기회에 중원구경을 해 보지 않겠어요?" "중원?" 백유군은 가볍게 놀란 빛으로 되물었다. 중원(中原)…… 아아…… 바로 그가 숨쉬고 있을 것이다. 백유군은 돌연 거대한 마음의 광휘가 가슴을 뒤흔드는 것을 느꼈다. 그래…… 가자……. 궁주와 연약의 껍질을 벗고, 자존(自尊)과 허위의 가명을 벗고…… 그래! 중원으로 가자! 그에게로 가자! 백유군의 시선이 힐끗 자태랑을 향했다. 자태랑은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막을 수 없지요…… 일 년 전에 벌써 가셨어야 할 길…… 다행이군요……. 궁주는 이제야 동기를 찾으셨소……그려…….' 쩝쩝……. 돌연, 들려온 이 소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사람들은 다급히 시선을 돌려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탐탑우, 그 거인은 아이 머리통만한 만두를 열 개나 한꺼번에 삼키고 있었다. * * * 근지와 백유군, 두 천하기녀(天下奇女)가 최초의 상봉을 한 바로 그 시각. 중원으로는 하나의 기이한 행렬이 들어서고 있었다. 행렬이라기에는 너무 거창한…… 그러나 실로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의 행렬……. 그들은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사남일녀(四男一女), 최초의 남자는 일신에 홍색가사(紅色袈裟)를 걸친 노승, 그는 눈처럼 희디 흰 소를 타고 있었는데 일견해 보기에도 결코 범상한 용모가 아니었다. 가슴 밑까지 늘어진 긴 백미(白眉)에다 갈대꽃처럼 흰 수염은 타고 있는 소의 발 밑까지 내려와 있었고…… 어린 아이처럼 붉은 홍안이며 가지런하고 흰 치아, 그야말로 신선을 방불케하는 용모였다. 하나 거의 눈썹에 파묻히다시피 한 두 눈은 결코 떠지는 적이 없었고, 어쩌다 실눈을 뜰 때마다 그곳에선 칼날 같은 안광이 폭사되곤 했다.그것은 능히 사람까지 죽일 수 있는 살인적인 폭광(暴光)이었다. 여자, 그녀는 이제 갓 나이 십오 세나 넘긴 나이. 그녀가 타고 있는 것은 한 마리의 흰 코끼리, 백상(白象)이었다. 얼음처럼 매끄러운 표피에 황금안장을 얹은 이 코끼리는 어느 모로 보나 희대의 영물처럼 보였다. 거기다가 또 사람은 어떤가? 코끼리도 좋지만 사람은 더 좋다. 일신에는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백색 곰가죽을 걸쳤다. 그래서 더 검어 보이는 흑발(黑髮)은 허리 아래까지 치렁치렁하고, 속이 다 들여다 보일 정도로 투명한? 의 물처럼 고요하고 둥근 혜안(慧眼), 코끼리 안장에 올라앉은 몸매는 어둠을 타고 오른 은어(銀漁) 비늘처럼 심연하고 매끄러우니…… 이 하늘 아래, 이토록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히는 미녀도 있었던가? 마지막으로 삼 인, 그들은 언뜻 보아 백우노승, 백상미녀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떨어진 거리는 무려 백여 장이나 되었으므로……. 그러나 자세히 보자면 이내 이들 오 인 사이에 얽혀 있는 기이한 함수관계를 읽어낼 수 있으리라! 삼 인은 하나같이 백색 승포를 걸치고 있었다. 나이는 이십대 초반, 외모로 보기에도 무척 강건해 보이는 이들은 각기 산(山), 봉(棒) , 도(刀)의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또한 그 걷는 보폭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일정했다. 앞서 가는 노승이 탄 소가 한 발을 딛으면 이들도 똑같이 한 발을 딛는다. 소가 물러나면 이들도 물러나고 다시 걸으면 이들도 걸으니, 마치 보이지 않는 하나의 끈이 소와 이들의 발을 묶고 있는 듯한 형상. 기이한 행렬…… 누굴까? 오 인, 이들은 어디로 보나 중원인(中原人)이 아니었다. 백우(白牛)와 백상(白象)이 그렇고, 혈의가사(血衣袈裟)와 황금장식이 그렇다. 하나, 이들은 모두 유창한 한어(漢語)를 쓰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중원이라……." 봄을 예고하는 늦겨울의 햇살은 따사로왔다. 양지쪽엔 눈이 녹고 있었다. 백우와 백상은 눈이 녹는 진흙길을 조용히 밟아 나가고…… 이따금씩, 지나가는 행인들의 야릇한 시선이 이들을 훑고 지나곤 했다. 흰 코끼리 위의 미소녀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기분 나빠. 사부님, 이곳 사람들은 눈초리가 몹시 음흉하군요." "헛허……." 노승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낯선 탓이다. 네 기분 탓이지……. 이 중원은 참으로 좋은 곳…… 산은 적당히 높고 물은 적당히 많으며 온갖 식물이 마음껏 자랄 수 있는 적당한 기후가 있으니…… 이 땅에서 기인고사(奇人高士)가 그토록 속출하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닐진저……." 미소녀는 삐죽 붉은 입술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깨물고 싶으리만큼 육감적이었다. 이때 돌연, 그녀의 커다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곳 좀 보세요." 시선이 가 닿는 곳은 방(幇), 그것은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하나의 방이었다. 관도를 끼고 선 그것은 일견해 보기에도 십만여 평은 족히 되어 보일 듯. 한데, 그 엄청난 집들이 송두리째 타고 있었다. 그 검은 연기는 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미소녀는 호기심을 못 이기겠다는 듯 급히 코끼리를 재촉했다. "가자!" 두두두……. 쿵! 쿵! 코끼리는 한 번 뛰기 시작하자 놀랍도록 빨랐다. 지축이 꺼질 듯 회오리를 일으키며 그것은 회오리처럼 달려나갔다. 노승은 끌끌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 다 큰 계집애가 말처럼 엉덩이를 휘돌리다니……. 아미타불…… 이곳은 진정 풍운의 땅일지니……." 가까이서 보자 연기는 더욱 엄청났다. 사람들은 멀찌막이 그것을 구경만 할 뿐 감히 불길을 잡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백여 채의 거대한 건물들은 일제히 타오르고 있었다. 또한 방의 안팎엔 수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으며, 담은 허물어지고 기와는 멋대로 깨어진 것이 마치 치열한 전쟁이 한차례 휩쓸고 지난 곳 같았다. 노승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만 명의 군대가 짓밟고 지난 것일꼬……?" 순간 노승의 옆에 서 있던 장한 하나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스님. 이것은 단 한 사람의 짓이지요." 노승의 가늘게 뜬 두 눈에서 불현듯 섬광(閃光)이 번쩍 일었다. 순간 장한도 두 눈을 부릅떴다. 섬광이 번뜩이는 찰나, 노승의 등뒤 장엄한 부처의 환영이 언뜻 보였던 것이다. 하나 그것은 눈깜짝할 새에 사라졌는지라 장한은 자신이 허상을 본 줄 알고 하던 말을 이었다. "취국이지요. 불사취국, 이곳은 혈선공(血扇公)의 냉자기(冷子奇)의 혈선방(血扇幇)인데, 혈선공은 일전에 취국을 한 번 곤경으로 몰아넣었던 적이 있읍죠. 지금 이 모습은 취국의 복수전입니다요." "……!" "한 송이 취국을 들고 다니는 사나이는 이곳을 불과 일 각 안에 이 꼴로 만드어 놓았습죠. 혈선공과 그의 수하 오백이 몰살했어요. 이것은 약과지요. 그는 악이라면 도무지 용서하질 않아요. 불사조처럼 그는 이 시대의 최고 악인들을 하나씩 무너뜨려나가고 있읍죠. 그는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요." 노승은 눈을 다 떴다. 다 뜨고 나니 그 눈은 오히려 명경처럼 맑고 깨끗했다. 이어 그는 사람들 시야를 꿰뚫고 한 사람의 시체 옆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미소녀는 몹시 의아해졌다. 그녀의 사부는 천축 에서 이곳까지의 만 리 길을 오는 동안 한 번도 저렇게 눈을 다 뜬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사부가 눈을 다 뜬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일을 만났을 때에 한하는 것이었다. '이 불바다가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노승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그는 심각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미소녀는 감히 노승에게 말을 걸어볼 엄두도 못 냈다. 그곳으로부터 십 리쯤 지난 후에야 노승의 안색은 비로소 조금 밝아졌다. 미소녀가 물었다. "사부님은 아까 무엇이 그렇게도 심각하셨지요?" 노승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나타(娥那陀), 내가 너에게 이 중원 땅에서 눈여겨 보라고 한 사람이 있다. 그게 누구냐?" 미소녀는 맑은 눈망울을 또르르 굴리더니 이내 짤랑짤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묵도(墨刀)와 철제(鐵帝)지요." "왜 그들을 눈여겨 보라고 했느냐?" "묵도는 사부님이 폐관하고 계실 때 천축 땅을 마구 헤집어 놓은 불한당이에요. 그리고 철제는 지사에서 가장 빠른 검을 쓰는 사람이지요." "이제 그곳에 한 사람을 더 추가해라." "그게 누구지요?" "취국!" 노승의 뇌리에 홀연 아까 본 장면이 떠올랐다. 시체, 그 시체의 가슴 부위를 비스듬히 가르고 지난 하나의 검흔(劍痕). 그 검흔은 최초의 검날이 닿은 곳과 그 검날이 스쳐 지난 곳과 검날을 마무리한 곳의 깊이는 한치의 어김도 없이 똑같았다. '오백을 베었을 텐데도……, 깨끗하고 정확했다……. 검을 아는 사람이었지……. 아미타불…… 이 땅에는 정말 무서운 승부사들이 많구나…….' 그는 길의 한쪽에서 무심히 죽어가는 어린 아우를 보살피고 있었다. 흑의인(黑衣人), 나뭇가지를 다듬어 나가는 손이 눈처럼 희고 섬세하다. 먼발치에서 한 번 보았을 뿐인데도……. 순간, 백우노승(白牛老僧)은 크게 놀란 안색으로 소고삐를 황급히 당겼다. 흑의인 또한 무엇을 느낀 듯 등을 보이고 있던 자세에서 앞을 향하는 자세로 돌아서 있었다. 결국, 노승은 길의 가장자리로 빙 돌아 나가고, 흑의인은 노승을 해바라기 쫓듯 맴돌더니 이내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흑의인의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노승은 이내 아득히 사라졌고 나무를 다 다듬고 난 흑의인은 자신의 갈길을 향해 몸을 돌렸다. * * * 평온한 날들이었다. 이것은 무류흔이 섬에서 나온 뒤로 최초로 갖는 휴식이었다. 귀역오가에선 전혀 살수 들을 보내오지 않았고, 혈선공 냉자기의 최후를 본 삼십삼겁은 어느 누구 하나 섣불리 취국을 든 사나이 앞에 나타나려 하지 않았다. 폭풍전야(暴風前夜)라고나 할까? 무류흔도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그 동안의 자신의 계획이 무모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했다. 잠륜신도 목풍부터 이번의 혈신공 냉자기까지 사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그 원칙대로 행했다고 볼 순 없었다. 약간의 계획에다 즉흥적인 임기응변이 짜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르다. 무류흔이 상대해야 할 적들은 그 무공부터가 신비의 막에 가려진 희대의 초강자들인 것이다. 무류흔은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대부분은 남은 십육 인을 어떻게 상대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결론은 간단하게 나왔다. 그에겐 이목(耳目)을 대신해 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곡운의 말이 옳았다. 독불장군은 없는 것이다. 무류흔은 우선 약간의 동지들을 모아 들이기로 결심했다. 싸움은 그가 하고 나머지 싸움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고 후송해 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존재는 앞으로의 대결들을 좀더 활기차고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호북 (湖北)의 관도에서 기이한 천축 의 노승을 만난 외에는 이곳 낙양 까지 오는 동안 무류흔에게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낙양 성(洛陽城)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곳에 이르자 무류흔은 잠시 색다른 감회에 사로 잡혔다. 이곳은 그의 제이의 고향이었다. 저 위 숭산 에서 그의 운명은 바뀌고, 아래 길가에서 추상을 만났다. 추상(秋霜), 슬픈 사랑의 탑은 아직도 있을까? 천연탑(天緣塔)은 여전히 낙하 (洛河)가에 의연히 서 있었다. 무류흔은 느릿하게 그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탑은 옛날 그대로였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무류흔은 탑의 창가에 선 채 밑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추상의 얼굴이 떠올랐다. 목욕을 하다 탑 위의 무류흔과 운명적으로 마주친 그녀……, 무류흔은 씩 웃었다. "오늘밤은…… 이곳에서 묵기로 하자……." 故人西辭黃鶴樓, 相花三月下楊州, 孤帆遠影碧空盡, 唯見長空天際流, 옛친구는 이 누각에 이별 고하고, 꽃피는 삼월에 배타고 양주 로 내려갔다. 누각에서 보니 돛을 단 저 배 그림자 푸른 하늘에 빨려 사라지고, 뒤에는 그저 잔랑의 흐름이 하늘 끝으로 흘러갈 따름이다. 취국만향편(翠菊滿香篇) ====================== 제 21 장 만남의 장(章) ---------------------- 추억에 잠겨…… 깜박 잠이 들었던 걸 게다. 밤, 깊은 심야(深夜). 바로 그때였다. 휙---! 팍---! 한 줄기의 미세한 파공음과 접촉음이 무류흔의 잠을 깨웠다. 번쩍 뜬 그의 시선 속으로 어둠을 가르고 창밖에서 날아 들어온 하나의 은사슬, 은사(銀絲)가 보였다. 그 은사는 정확하게 맞은편 벽에 꽂혀 있었다. 무류흔의 몸이 번쩍 허공을 갈랐다. 그는 단숨에 대들보 위로 올라선 후, 흔적없는 귀영(鬼影)처럼 호흡과 동작을 멈추고 정좌했다. 휘이익! 한 순간, 한 사람이 은사슬을 타고 환영처럼 탑 앞으로 날아들었다. 흑의(黑衣),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검은빛 일색. 옷도 검고, 피풍(被風)도 검고, 허리띠, 신발까지 모조리 검고 검은 위인. 이 검은 빛은 주위의 어둠까지 흡수하는 듯하였으며, 그렇지 않는 부분이라곤 검은 복면 속에서 귀화(鬼火)처럼 반짝이는 두 눈 뿐이었다. 그는 탑을 내려선 후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더니 은사들을 거두고 그 자리에 묵묵히 정좌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돌연, 휙! 휙! 옷자락이 공간을 스치는 파공음을 휘몰고 이번에는 다섯 사람이 다시 탑 안으로 내려섰다. 먼저 본 흑의인과 비슷한 차림새였으나,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흑건의 가운데서 새겨진 은성(銀星)이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 보였다. 먼저 와 있던 흑의인이 두 눈을 번쩍 떴다. "빠진 사람은 없느냐?" 다섯 복면인은 부복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수뇌흑의인이 말을 이었다. "성과를 얘기해 보라." 말을 할 때마다 전신에서 자국이 번지는 위엄, 아마도 그는 수하를 많이 다루어 보았거나 늘 그런 위치에 있어 온 사람인 듯 했다. 가장 좌측에 있던 흑의무객이 입을 열었다. "야화(夜花)님께 아뢰오……." 순간, 대들보 위의 무류흔은 이 말에 여간해선 변치 않던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야화(夜花), 은사슬의 저 흑의인이 바로 천하사기(天下四奇) 중의 대도(大盜) 야화(夜花)란 말인가? 도계삼칙(盜界三則)을 만들어 천하를 종횡무진으로 누벼 온 그, 훔치지 못할 물건이라곤 자신의 마음밖에 없다는 이 거물이 이런 한적한 땅에 모습을 나타낼 줄이야! 무류흔의 입가로 쓴웃음이 스쳐 지났다. '곤란하게 되었군.' 그것이 정파(正派)건, 사파(邪派)건 상대의 문파집회를 훔쳐 본다는 것은 무림의 금율이엇다. 무류흔은 꼼짝없이 이들의 집회가 끝날 때까지 먼지 쌓인 대들보 위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첫 번째 흑의인이 말을 잇고 있었다. " 개봉 (開封)의 대부호 천관인(天官人)으로부터 습득한 오보상(五寶像)은 무사히 처리되었습니다. 처리대금은 금대야(金大爺)의 천운전장(天雲錢莊)에 입금시켰습니다." "흐음…… 육천(陸天)은?" 두 번째 흑의인이 공손히 입을 열었다. "내일 모래 낙양 관부(洛陽官府)로는 금릉 황궁(金陵皇宮)에서 보낸 오십만 냥 의 금괴가 도착합니다. 낙양 대인(洛陽大人)의 개인 사처를 짓기 위해 들어오는 돈입니다." " 낙양 대인은 황부의 인척이니 능히 그럴 만도 하군. 좋아, 습격하자. 장소는?" " 백마사 (白馬寺)로부터 오 리 정도 떨어진 와호산령이 적당합니다." "좋아. 인원을 점검하고 일꾼들을 미리 대기시켜라. 공격시간은……." 황궁에서 인척에게 주는 나라의 공금이다. 이 엄청난 모의는 거의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시각부터 약 두 시진 가량이 지난 후, 오 인의 흑의인들은 소리없이 사라져갔다. 야화는 텅 빈 탑내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로 보이는 것은 호수와 호수 옆으로 난 길 하나, 그리고 낙양 의 불야성(不夜城)……. 창가에 기대어 오랫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야화, 그 뒷모습으로 피어오르는 것은 기이할 정도로 강렬한 고독이다. 이 고독은 아마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 보여 주었던 위엄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이니……. 무슨 일일까? 이 천하의 대도에게도 어쩐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이란 말인가? 대들보에 기대어 있던 무류흔은 툴툴 웃으며 탑 천정을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가슴을 앓는 사람도 많구나……. 대도 야화의 저러한 뒷모습을 누가 믿으랴…….' 이윽고 야화는 한 줄기 탄식을 터뜨리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세상은 은빛으로 뒤덮이니…… 이로써 이 년의 세월이 지났어……. 사람은 가도 무심한 것은 변함없는데……." 무슨 말일까? 슬픈 중얼거림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야화의 우수가 쭉 창밖의 어둠을 향해 뻗었다. 슈슉! 가는 빗줄기 은사슬, 그것은 무려 백 장 밖의 숲을 향해서 날아 갔으며…… 다음 순간, 야화의 몸도 빨리듯 그 빛줄기를 따라 날았다. 그의 모습은 이내 어둠 속으로 아득히 사라져갔다. 무류흔은 대들보 위에서 뛰어내린 후 툭툭 몸의 먼지를 털었다. 오늘 문득, 야화에 대해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야화가 사라져간 어둠 속을 힐끗 보고 난 그는 이내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 * * 휘익! 그것은 하나의 죽림(竹林)이었다. 무류흔은 유령처럼 그 앞으로 스르르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