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객 - 22편 (22/36)
무류흔의 몸은 글자가 다 새겨졌을 때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저벅저벅……. 숲의 정적을 발자국 소리가 깨뜨리고 있었다. 오두막으로부터 백 장 밖을 날고 있던 무류흔은 멈칫했다. 그는 즉시 하나의 높은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 야밤에 어둠 속에서 숲을 유령처럼 포위하며 좁혀들고 있는 인영들……. 그들이 하나같이 반의담의 복장을 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순간, 무류흔은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적에게 자비를 베풀다니…… 나는 바보다……." 그렇다. 그는 순순히 자백한 인검주를 살려 주었다. 물론 혈도 를 짚긴 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무예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고수들은 쉽게 그 혈도 를 풀 수 있다. 그 한차례의 자비가 근 이백에 달하는 살수 들이 그를 포위해 오는 결과를 자아낸 것이다. 무류흔은 한 가지의 좋은 교훈을 배웠다. --싸움에 도덕은 통하지 않는다! 적을 죽이려 했을 때 바로 죽여야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삼십살겁과 귀역오가를 적으로 한다는 것은 즉 전무림을 상대로 싸우는 것과 같았다. 그 일에는 한 치의 자비도, 용서도 있을 수 없었다. 자비는 곧 자신의 죽음과 같았다. 무류흔은 길게 심호흡을 들이킨 후. "하앗!" 용의 울음과도 같은 긴 장소(長嘯)를 터뜨리며 일월쌍륜(日月雙輪)을 하늘 높이 솟구쳐 올렸다. 위이잉! 두 줄기 금선이 북쪽의 흑의인들을 향해 쏘아가는 것을 보며 그는 남쪽의 흑의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여기다!" "아니, 여기다!" 이백의 살수 대 하나! 혹자는 이 싸움을 미친 짓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나, 그 하나는 바로 무류흔이었다. 이 이름은 정사(正邪)의 무예를 한 몸에 지니고, 고도의 살수 훈련을 쌓았으며, 남들보다 세 배는 빠른 무예 이해도를 지닌 사람을 뜻하는 이름이었다. 혈투(血鬪)! 숲속의 암천은 피의 소용돌이였다. 이 싸움에서 무류흔은 자신이 익힌 한 가지 교훈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 * * 무류흔은 흐르는 개울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다. 머리는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고, 걸친 흑의는 너덜너덜 찢겨 나갔으며, 그 사이로는 수많은 혈흔들이 비치고 있었다. 어깨, 그의 어깨에는 하나의 부러진 화살촉이 꽂혀 있었다. 이미 출혈은 멈추고 피는 굳어 있었지만 그러나 상처는 불붙은 듯이 쑤셔 왔고 두통도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독이 묻어 있었어……." 하지만 무류흔의 기이한 신체에는 어떤 독도 치명적일 수는 없었다. 그는 어깨의 화살촉을 뽑기 위해 그 자리에 정좌하고 앉았다.이 때 무류흔은 하나의 인기척을 느꼈다. 무류흔이 검자루의 단추를 푼 것과 인영이 나타난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인영, 비단 녹의(綠衣)에 어깨에는 한 자루 장검 을 두르고 있는 여인, 그리고 슬픈 눈빛…… 무류흔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당신이었나……?" 여인도 마주 웃었다. "보기 좋은 모양이군요." 그녀는 바로 무류흔에게 최초의 살수를 펼치려 했던 색해의 여 살수 였다. "그렇게 차림을 해서 못 알아볼 뻔 했소. 마치 대가집의 귀공녀 같군. 그건 그렇고 그곳의 물을 좀 떠다 주겠소? 나는 이 화살을 뽑아야겠으니……."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커다란 나뭇잎에다 물을 담아 개울을 건너왔다. 무류흔은 그녀의 얼굴을 처음으로 밝은 데서 보게 되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그는 생각했다. 작고 섬세한 몸매, 아름답게 빛나는 슬픈 눈을 가진 그녀는 퍽 지적으로 보였다. "출혈이 심해요. 제가 뽑아드릴까요?" "고맙소. 그러나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소." 여인은 무류흔의 몸을 바로 앉혔다. "이것을 당신 혼자 힘으로 한다는 건 무리예요." 그녀는 단호히 말하고는 화살촉을 쥐었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그녀가 말했다. 제 18 장 사랑의 길 ------------------ "이백열여섯 명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낚시, 완강하고 거대한 뒷모습의 사나이. 햇빛을 가리기 위해 하나의 죽립(竹笠)을 쓰고 낚싯대를 인공 호수에 담그고 있는 한 사람, 그는 철제(鐵帝)였다. 공포의 살인가문 귀역오가를 거느리고 있는 그의 옆에는 한 사람이 조용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나이 삼십 정도의 중년인이었다. 밀랍처럼 창백한 안색, 무표정한 얼굴이며 굳게 다문 입술의 선이 유난히 섬세하다. 언뜻 보아 연약한 인상을 주기도 하는데,정말 이 사람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무서운 오산이요, 착오였다. 그의 무서움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상대로 하여 안심을 시키는 연약한 기질 속에 숨은 무서운 칼날……. 귀역오가의 제이인자, 표향귀혼(飄香鬼魂) 구양인(歐陽仁),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공식적인 집계만으로도 근 오백이십 명, 사람을 완벽하게 죽여 낸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는 귀역오가의 제이인자가 되었다. "취국……, 그자를 너무 약하게 보았다. 실수다." 순간, 구양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이 냉혹한 철인에게서 실수란 말을 처음으로 듣는 것이다. "네 생각을 말해 보라." 구양인은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에게는 삼십삼겁과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잔인함은 삼십삼겁에만 한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 "패착은 그를 마음껏 풀어준 데 있습니다. 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얼마나……?" "한 달, 그가 지니고 있는 복수의 근원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좋아!" 철제의 낚싯대에 고기가 걸렸다. 하나, 그는 그것을 건져 올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 년 전 본가를 배신한 화옥(華玉) 등의 오 인은 어떻게 되었나?" "이미 새외 (塞外)로 도주한 것 같습니다. 본가의 오백 살수 가 그 뒤를 쫓고 있습니다." "위험한 짓이다. 화옥 그놈은 야심이 큰 놈이야……." "……!" "어쨌든 가라. 취국과는 한 달 동안 상대하지 않겠다." "존명(尊命)!" 스스슷……. 부복하고 있던 구양인의 몸이 연기처럼 꺼졌다. 철제는 느릿하게 낚싯대를 건져올렸다. 바늘에는 두 마리의 잉어가 걸려 있었다. 땅바닥에 놓이자 그것들은 미친 듯이 팔딱팔딱 뛰었다. 철제의 냉혹한 시선에 한 줄기 기광이 띄었다. "두 놈……, 무류흔이 늑대라면 화옥은 승냥이다……. 이 사냥은 몹시 힘겨운 것이 되리라……." * * * "당신은 미친 사람이에요, 취국……." 심산유곡(深山幽谷)……. 하늘엔 흰 구름이 떠가고, 무류흔은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가 물었다. "왜?" "어젯밤 일……, 다 봤어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그대의 무예……. 무림은 경악할 것이고……, 저는 그 순간 탄식을 터뜨렸어요……." "탄식이란 말인가?" "미ㅊ어요……. 삼십삼겁에다 귀역오가라니……, 그것은 무림 전체예요. 당해 볼 수 있을 것 같은가요?" 무류흔은 담담하게 웃었다. "글쎄……." "생각해 보세요. 삼십삼겁에 속한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인원은 수만이 넘어요. 귀역오가도 오천에 이르는 숫자예요. 거기다가 이 악의 신들을 추종하는 무리들까지 포함한다면…… 맙소사! 당신은 그들을 죽이다 백발이 되고 말 거예요." "……!" "도대체 그렇게 싸우는 이유가 뭐죠? 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을 싸움의 상대로 택한 거죠? 복수인가요?" "글쎄……." 무류흔은 어깨에 감은 흰 천을 어루만지며 베면 피라도 벨 듯 짙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복수라고……? 그렇다. 애초의 동기는 그것이었다. 한데 그는 요즘 색다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잠륜신도…… 사인부…… 환영무랑군……, 이들 모두를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던가? 그러나 그 잔인으로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거의 고기반죽이 된 그들의 몸에서 인간의 비릿한 파멸을 보았을 뿐이다. 무류흔은 자신이 요즘 와서 느끼는 색다른 기분이 바로 진실이라고 생각해 본다. 바로 그 순간, 그는 그 모호하던 진실을 마주볼 수가 있었다. 바람부는 산정에서 학을 키우며 되고 싶었던 한 그루의 푸른 나무……. 그렇다. 억제하기 싫은 분노와 증오가 그를 복수라는 막다른 길로 몰아세우고 있었지만 복수는 더 이상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기방어도 아니다. 무류흔은 더 이상 어느 누구도 미워하고 있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다. 화옥이나 유혜를 그는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에 따라서 그들에 대한 증오도 달라졌다. 지금의 그는 다만 싸울 상대로서 그들을 상대하려는 것이다. 인생은 다만 항우 와 유방의 싸움의 유물인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놈도 있으며 나쁜 놈은 결국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무류흔은 자신이 성스러운 싸움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선은 악을 이겨야 한다. 이것이 그가 알아야 할 숙명적인 과제이고 또한 이것이 동기인 것이다. 무류흔은 그것 이상으로 의지해야 할 더 좋은 동기를 찾지 못했다. 동기란 의지하는 바탕이 되어야 하며 그것 때문에 죽어서는 안 된다. 죽음으로써 승리를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승리는 악의 멸망에 의해서만 얻어져야 한다. 무류흔은 문득 아무 감정도 없이 그 싸움에 몸을 던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삼십삼겁과 귀역오가는 악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어야만 한다. 이것이 동기였다. 돌연,무류흔이 싱긋 웃으며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왜 나를 죽이지 않았지? 아마 그 화살촉을 조금만 더 찔렀다면 당신은 취국의 심장을 찌른 사람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여인은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가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모르겠어요……. 지금의 나도 나를 몰라요. 당신을 처음 보던 때부터 그랬어요." "훌륭한 살수 란 감정에 동요되지 않고 자신의 의지력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어야 해. 살수란 단순한 칼싸움과는 틀리기 때문이지." "당신은 그런 것에 대해서 잘 아는군요?" "사실은 잘 모른다. 요 며칠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깨달은 거지……." 이때 돌연, 무류흔의 입술 새로 격렬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쿨룩…… 쿨룩……." 순간 여인의 안색이 싹 변했다. "당신은 왜……?" 무류흔은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벗어 놓은 상의를 가리켰다. "저것…… 그 속에 약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무류흔은 이 고통이 도저히 참아낼 수 없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저빙궁주의 다정환은 그의 그런 고통을 씻은 듯이 없애 주었다. 무류흔은 긴 한숨을 내쉰 후 여인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런 눈길로 나를 보지 마. 아직 몇 백 알쯤은 남아 있을 테니까……." 여인의 맑은 두 눈에 의혹의 빛이 서렸다. "몇 백 알이라고요?" "그것이…… 나의 남은 생명이지……." 순간 여인의 몸이 휘청 뒤로 물러났다. "시한부 생명……?" "누구나 너처럼 놀라지. 그러나 곧 익숙해지게 돼." 무류흔은 짐짓 밝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넌 이제 어디로 가나?" 그러나 그의 말은 그만 뚝 그쳐져야만 했다. 여인의 얼굴은 흰 눈으로 빚은 듯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희다 못해 푸르게 보였다. 쏟아져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려는 듯 순식간에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눈자위가 눈에 띌 정도로 경련하고 있었다. "정말…… 이에요……? 그 말……?" "핫하……. 생명을 가지고 장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여인은 느릿하게 바위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긴 머리카락으로 가린 그녀의 두 뺨에서는 참다 터진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류흔은 적지않이 당황했다. 무예와 복수에 몸을 바쳐온 그가 소녀의 미묘한 심리를 알 수 있겠는가? 소녀는 울었다. 이 사람…… 그 몸으로 가질 수있는 투혼과 집념이 그녀를 울리는 것이다. 그녀는 과연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다. 취국은 냉혹한 살인자만은 결코 아니었다. 문파의 보복도 두려워하지 않고 찾아 나선 보람이 있었다. 돌연 그녀는 눈물을 옷자락으로 찍어내며 맑게 웃었다. 웃으며 그녀는 말했다. "나 집 하나 사 줄 수 있어요?" * * * 찰랑찰랑……. 배가 흔들리니 유등도 따라 흔들린다. 배, 곡운(谷雲)은 콧노래를 부르며 선창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무류흔은 뱃전에 누워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배는 그의 돈으로 산 것이다. 그리고 곡운에게 주었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문파를 배반하고 나를 찾아나선 여인에게 동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땅…… 땅……. 남비를 두드리며 곡운이 옆에 서 있었다. "배가 고플 때는 언제고…… 상을 코앞에 바쳐야 식사를 하나요. 당신은?" 무류흔은 오랜만에 따뜻한 밥을 먹었다. 그러나 어색한 일이었다. 침상의 모포는 하나뿐이었고, 두 사람의 몸은 좁은 침상의 탓으로 꼭 붙어 있어야만 했다. 창으론 달빛…… 호수는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을 게다. 문득 곡운이 천장을 바라본 채 말했다.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있나요?" 무류흔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사치라고 생각하지. 넌?" "후훗…… 있어요. 늘 짝사랑이었지만." "……!" "지금도 그런 것 같아요……." 순간, 무류흔은 흠칫했다. 그는 옆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내일은…… 계획을 실행하는 날이다. 엉뚱한 곳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좋지 않다. "이 나이까지 남자와 이렇게 누워 있긴 처음이에요…… 그런데 몹시 편안해요. 마치 오래 전부터 이런 시간들이 우리에게 있어왔던 것처럼……." 하얀 팔목이 무류흔의 가슴에 둘려져 왔다. 여체의 고동소리가 등으로 닿고 있었다. 그 고동소리는 이로웠다. 문득 무류흔의 목덜미에 따뜻한 액체가 한 방울 뚝 떨어져 내렸다. '울고 있는 것인가…….' 무류흔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마치 외로운 별처럼…… 하늘 한구석을 헤매다 의지의 끈을 붙잡고 내 어두운 팔 그림자 사이로 떨어져 내린 빛나는 영혼……. 그렇지……, 나는 많은 것을 거부해 왔고 모른 체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조차 모른체 해야 하는 자격이 나에게 있을까…….?' 마주친 첫 번째 눈빛이 그토록 슬퍼 보였던 것처럼 무류흔은 가슴 한구석이 축축히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라면…… 악마들의 추적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히 한 사람을 쫓아 나설 수 있었을까……? 곡운의 손은 풀리고 있었다. 힘없는 목소리가 어둠을 울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방해하고 싶진 않았어요. 괜찮아요……, 늘 그랬는 걸요……? 짝사랑이란 달콤하긴 해도…… 역시 힘든 것 같아요……." 이때 돌연, 그녀의 손목이 한 완강한 힘에 의해 꽉 잡혔다. 동시에, 그녀의 몸은 홱 돌려지더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내, 건장한 품속으로 숨막힐 듯 안겨들었다. 곡운은 얼떨떨했다. 만약, 하나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지 않았다면 그녀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여자와 누워보긴 처음이지만 안겨오는 여자를 ……뿌리치지 않는 것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격렬한 광휘! 거대한 한 줄기 빛이 곡운의 가슴을 휩쓸고 치달려 갔다. 순간 그녀는 웃으며……. "그래요! 열일곱 살이 되도록…… 당신 이외에는 남자를 침대에 들어오게 한 적이 없단 말이에요……." 웃는 얼굴로 눈물을 흩뿌리며……. "제가 그렇게 쉽게…… 당신을 보낼 것 같아요?"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강렬하게 끌어안았다. 무류흔은 떨고 있는 곡운의 입술에 자신의 젖은 입술을 갖다 댔다. 그녀의 입술은 격렬하게 그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운명처럼 서로가 걸치고 있던 옷들이 떨어져 나가고……. 무류흔이 곡운의 조그만 어깨에 입술을 갖다대자 머리카락을 감싸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입술이 벗겨진 그녀의 상체를 따라 목을 타고 내려와 유두를 더듬자 그녀의 입에서 불확실한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녀의 육체가 조금씩 뜨거워져 갔다. 그녀의 육체가 꿈틀거리며 그를 기다렸다. 사내의 달구어진 육체를 두 손으로 끌어안고 여인은 자신의 몸을 침상에 바짝 붙였다. 무언가 한없이 빠져드는 것 같은 추력이 있었다. 무류흔은 매끄럽고 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구멍 속으로 자신의 육체가 쏟아져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그것뿐이었다. 여인은 순결의 파괴에 고통의 신음을 터뜨렸고, 사내는 동정의 첫 분출에 순간의 청춘을 모두 던졌다. * * * 바스락---! 무류흔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곡운의 가볍게 놀란 시선이 그를 향했다. "어디를 가지요?" "미안, 그러고 보니 할 일이 생각났어." 무류흔은 겉옷을 집어들고 단숨에 밖으로 걸어나왔다. 이어, 안개가 깔린 호수로 홱 몸을 날렸다. 곡운은 황급히 뒤따라 나와 뱃전을 잡고 외쳤다. "언제 오실 거죠? 이곳은 당신 집이에요." 무류흔은 깊이 잠수했다가 불쑥 위로 얼굴을 내밀었다.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별빛 아래 소녀는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그는 씩 웃었다. "추적자들이 오거든 배를 힘껏 호심으로 저으라구!" 곡운도 따라 외쳤다. "그럼 당신이 못 찾을 것 아니에요?" "나는 그 집에 은자 백 냥 을 투자했어. 백 냥 을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구……." 곡운은 웃었다. 웃으며 그녀는 또 외쳤다. "오늘 저녁식사는 어땠어요?" "아주 좋았어." 무류흔의 몸이 스르르 호수가로 헤엄쳐 나가기 시작했다. 곡운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엔 눈물이 흐르고 있엇다. "저 사람은 또 싸우러 가고 있는 거야……." 그의 상대는 강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날려왔다. 그것은 가슴팍을 헤집는 아련한 통증이었다. 무류흔은 호숫가를 향하다 방향을 선회했다. 그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더 깊은 호수를 향해 헤엄쳐갔다. 어디든 가자……, 답답한 가슴아……. 호수의 중간까지 왔을 때 그는 뒤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배 위로 아직도 서 있는 곡운의 모습이 보였다. 무류흔은 툴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사랑이라니……. 너무 사치다……. 인생은 투쟁이며 나는 투사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다. 피를 흘리고…… 그 피가 내 몸을 붉게 물들일 때까지 한 점의 두려움도 없이 맞설 것이다. 싸우다 지쳐 패배하면 나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슬픈 눈빛의 여인아…… 그때…… 내 한줌 육신을 향해 눈물을 흘려 주려는가……? 찰랑찰랑……. 달빛은 맑고…… 그렇다. 우울한 밤이었다. * * * 쿵----! 한 척의 화려한 범선이 동정호 군산 의 호변가에 와닿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배 위에선 아홉 필의 말을 탄 사람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두둑……. 하나같이 호화로운 복장이며 장신구를 등에 제각기 다른 무기를 꽂은 이 구인은 바로 삼십삼겁이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들은 단숨에 선의 뒤편까지 달려나갔다. 그리고 용의 모양을 한 바위 하나가 우뚝 솟은 곳까지 이르자 선두의 기사가 가볍게 손을 저어 멈추었다. "정지!" 비화도 팽천기가 가볍게 말을 달려 일성검왕 단목천궁의 옆으로 다가섰다. "이곳이오. 단목방주!" 단목천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용암(龍岩)을 가리켰다. "이 지도가 틀림없다면 저 아래이오." 구 인은 날렵하게 몸을 날려 땅으로 내려섰다. 밑은 아득한 절벽이었다. 용암은 이 절벽과 마주본 채 우뚝 서 있었고, 그 사이에는 시퍼런 물결이 넘실대고 있었다. 단목 천궁이 주위를 돌아보더니 용암의 가운데에 뚫린 동혈을 가리켜 보였다. "저곳인 것 같소." 아찔한 곳이었다. 절벽에서 그곳까지는 삼십여 장 정도. 그 안에 발을 디딜 곳이라고는 전무했으며 오직 경공 의 힘을 빌리는 수밖엔 없었다. 단목천궁이 먼저 몸을 날렸다. "타앗!" 열학충천(一鶴沖天)에 이어 대붕전시(大鵬展翅)의 멋들어진 수법. 몸이 가라앉을 즈음 해서 그는 맹렬히 몸을 회전시키더니, 해연약파(海燕掠波)를 마지막으로 가볍게 동혈의 안에 안착했다. 싱긋 웃고 난 비화도가 뒤를 잇고……, 마지막으로 경공 이 가장 떨어지는 금마혈수 용운이 구르다시피 동혈의 안으로 들어섰다. 일행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혈, 높이는 이 장쯤 되리라. 그 안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동굴의 초입부터 기이한 종유석이 난립하고 있었다. 휘이잉……. 동혈의 안으로부터 한 줄기 음풍이 불어왔다. 구 인은 기이한 예감에 몸을 떨고는 그 예감을 떨치기라도 하겠다는 듯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금마혈수가 맨 마지막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쾅---! 느닷없이 거대한 철문이 동혈의 입구를 막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헉!" 구 인은 크게 놀라 철문을 향해 맹렬한 일장을 쳐냈다. 슈슉! 파파팟! 으아악! 쿠쿠쿵! 한차례 가벼운 진동이 일었을 뿐, 철문은 조금의 손상도 없이 그 웅장한 자태를 자랑했다. 적면수 냉구가 크게 놀란 음성으로 외쳤다. "이것은 극천한철(極天寒鐵)이오!" 극천한철! 만년한철 을 다시 백 번을 달구어 낸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물체. 구 인의 얼굴에 절망의 빛이 떠올랐다. 이때 다시, 혈응공자가 씁쓸한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