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객 - 19편 (19/36)
흑의인은 조용히 가리키는 자리로 가 앉았다. 한데, 그는 놀랍게도 목풍이 보란 듯이 태연히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이 아닌가? 목풍은 이런 거만한 태도를 신으로 추앙받던 반 년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괘씸한 놈이로군…….' 목풍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날 보자고 한 용건은?" 흑의인은 실내에서도 여전히 쓰고 있는 삿갓 새로 나직한 웃음을 흘려 냈다. "한 마리 개가 제 분수를 모르고 호화로운 집과 옷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목풍은 무심히 말을 받았다. "당연히 쫓아내야 하오." "그렇소, 나는 바로 그 일을 하러 온 사람이오." 순간, 목풍의 안색이 홱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싸늘한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는 나에게 시비를 걸고 있나?" "목풍!" 돌연 흑의인의 말투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싸늘해졌다. "나는 너의 친구가 아니다." 목풍은 흑의인이 선물했다는 도를 만지작거리며, 이야기했다. "친구는 무엇인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 도대체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하는 것인가?" "내가 너라면 이름을 감추고 심산으로 숨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란 듯이 지저분한 이름을 세상에 내발리진 않아." 번쩍! 순간이었다. 한 줄기 섬광이 허공을 가르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목풍은 도를 흑의인의 얼굴 곁에다 겨누고 있었다. 그는 냉소를 터뜨리면서 이야기했다. "흥! 나는 살인을 한 지는 오래 됐지만 아직 어떻게 살인하는 것인지 잊어버리지는 않았다. 너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말과 함께 그는 도로 삿갓을 젖혔다. 순간, 드러나는 얼굴. 그 얼굴은 무섭도록 창백했다. 하지만 그 창백함 속에 깃든 것은 가슴이 섬뜩할 정도의 아름다움……. 그 얼굴에 시선이 닿는 순간, 목풍은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지더니 자신도 모르게 쿵쿵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났다. "너…… 너는…… 무류흔……?" 얼음으로 빚어 놓은 듯한 얼굴에 흑의인의 싸늘한 웃음이 번졌다. "기억하고 있었나?" "너는 죽었다고……."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개를 잡지 않고서야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겠느냐?" 목풍의 얼굴은 순식간에 여러 차례 변해 갔다. 그것은 놀람에서 회의……, 회의에서 다시 놀람, 그리고 웃음……. "어리석군, 류흔!" "왜?" "천 가지 살 길을 마다하고 한 가지 죽음의 길로 들어왔으니 말이야." "어떤 것이 그 죽음의 길인가?" "바로 이것이다!" 순간, 목풍은 한 줄기 환상처럼 도를 쭉 뻗어왔다. 우르르……. 하늘이 내려앉는 듯한 벽력음이 휘몰고 번갯불처럼 작렬하는 도광(刀光)! 빨랐다. 그러나 무류흔은 더 빨랐다. 그는 발로 탁자를 차내며 주르르 뒤로 물러나 가볍게 목풍의 일 초를 피해냈다. "혈전유혼(血電遊魂)이로군." 목풍의 안색이 또다시 대변했다.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됐느냐고? 개를 잡으려는 백정은 그 개의 머리를 깨기 위한 도구를 준비하기 마련이지?" 목풍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순간, 미친 듯이 무류흔을 향해 덮쳐 왔다. "죽어라!" 하나, 무류흔은 태연자약했다. 그는 아예 손까지 뒷짐진 채 작렬하는 도광 속을 이리저리 주유하고 있었다. 우르릉……. "그 풍뢰소천(風雷燒天)은 진기 가 좀 부족하군." 꽈르릉! "허어, 그런 칼질로 어디 닭이나 잡겠나?" 파파팟! "무당춤도 이것보다 낫겠다, 목풍!" 목풍은 거듭되는 희롱에 눈이 뒤집혔다. 그는 순간 풍차처럼 몸을 회전시키며 그의 최후비장초식을 펼쳐냈다. "광혈조화(狂血造化)!" 콰콰콰! 엄청난 도광이었다. 만약, 무류흔이 강기 로써 방 주위에 하나의 막을 대고 있지 않았다면 이 방까지 송두리째 날아갔을 것이다. 무류흔의 몸이 돌연 뚝 멈춰 섰다. 그의 동공에서 어두운 인광이 섬뜩하게 피어 올랐다. "그만 끝내자, 목풍!" 다음 순간, 목풍은 한 줄기 환상을 보았다. 희디흰 손 하나, 그 손의 식지, 중지가 마치 가위 같은 형상으로 작렬하고 도광 속을 스며들더니 그의 도를 뚝 부러뜨리는 것을……. '이건…… 악몽이다! 맨손으로 나의 도법을……?" 무류흔은 여유를 두지 않고 유령처럼 붙어서며 강철 같은 주먹을 목풍의 복부에 깊숙이 넣었다. "헉!" 목풍의 눈에서 검은 동자가 사라졌다. 그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며 그 자리에 스르르 무너지더니, 돌연 창자에 든 것을 마구 토해 내기 시작했다. 웩! 웩! "나는 오늘 지나치게 많은 일을 했다……. 그것은 너희들…… 선량하지 못한 자들이 어떤 식으로 자신을 연명할 것인가가 듣고 싶어서였지……." 무류흔은 오연히 의자에 몸을 묻고 있었다. 목풍은 그 아래에서 여전히 몸을 구부린 채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어." 무류흔은 목풍의 머리카락을 위로 채어올렸다. 이어, 또다시 일권(一拳)을 목풍의 안면에 작렬시켰다. 퍽--! 순간, 목풍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비명을 토해 냈다. "으아악!" 수십 개의 바늘이 안면을 찌르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의 입술은 순식간에 뭉개져 버렸으며 그곳으로 끈적한 핏물이 흘러 나왔다. "아무리 크게 비명을 질러도 밖으로 들리지 않아, 알겠나? 목풍, 나는 이제부터 말을 별로 하지 않겠다. 내가 한마디를 할 때 너는 열마디를 하고 있어야 해." 말을 끝내고 난 무류흔은 입을 주욱 다물더니 또다시 목풍의 안면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같은 장소, 그러나 더 강해지는 주먹의 강도……. 퍽! 퍽! 목풍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인간의 주먹이 이토록 아플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네 번째의 주먹이 자신의 얼굴에 작렬했을 때 그는 사력을 다해 애원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무류흔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고련도에서 무엇을 제일 흥미롭게 배웠는지 모르겠군?" "그야 무공……?" "흐응, 무공?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고문(拷問) 방법이 가장 흥미로웠지. 무공은 배우지도 않았어. 지옥관 제육단계 고문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단 말이다." 목풍의 두 눈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지금부터 묻겠다." 연, 무류흔의 두 눈에서 새파란 인광(燐光)이 폭사되어 나왔다. "너는 천외성전에 간 적이 있지?" 소년은 주춤주춤 무사에게 다가섰다. 무사는 그를 보자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이곳엔 너 같은 꼬마가 오는 곳이 아니다! 어서 나가!" "저……."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전해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말이라고?" 소년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한 송이 취국을 앞으로 내밀면서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도신님을 마구 희롱했어요! 정말이에요. 신이 아니라고 했어요." 무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그 사람이라니? 너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이 꽃의 임자가 그랬단 말이에요. 그는 도신님을 마구 비방한 나쁜 사람이에요." "취국……?" 순간 무사의 얼굴이 홱 돌변했다. "그자는 불사취국(不死翠菊)이라고 했다!" 방(房), 무사와 소년은 방으로 뛰어들다 말고 주춤 얼어붙듯 몸을 세웠다. 그들의 두 눈은 극도의 경악으로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게…… 도대체……?" 방의 한곳, 잔뜩 어지러진 탁자. 거기에 잠류신도 목풍이 있었다. 그는 웃통을 벌거벗은 채 탁자 밑으로 머리를 대롱거리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소도(小刀), 쇠줄, 가위 등이 흩어져 있었는데 모두 피가 엉겨붙은 채였다. 무사는 소름이 끼쳐 왔다. 그는 솟구쳐 오르는 구역질을 간신히 참으며 목풍의 조각난 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무사는 자신이 일생 동안 도산검림(刀山劍林)을 누비며 세상의 잔악무도한 것은 이미 다 보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참혹스러운 광경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목풍의 가슴과 유두는 제멋대로 뜯겨 나가 있었다.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몸뚱이 전체가 산산조각난 고깃덩이의 파편에 불과했다. 보라! 살점이 뜯겨져 나가 시커멓게 드러난 구멍 사이로 갈비뼈가 보였다. 목풍의 오른쪽 손가락은 뼈가 드러난 채 잘려 있었다. 양쪽 귓불은 모두 잘려 나가고 없었다. 콧구멍은 찢겨져 나가 콧잔등 위로 너풀거리는 살점이 올려 붙여져 있었고, 양쪽 눈썹은 깊이 홈이 파여져 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든 것들보다도 더욱 고약한 것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갈가리 찢긴 이 도신은 그래도 살아 있었으며 의식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호흡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흘러 나왔다. 처참한 콧구멍으로부터는 피거품이 솟아 올랐으며 그의 그치지 않는 신음 소리는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케 했다. 가까운 선반 위에 진열된 술병들은 피를 뒤집어쓴 채 주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풍은 두 사람이 들어서자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그 말은 간신히 조립해 보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주…… 죽여줘……. 제발……!" 무사가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동안, 소년은 들고 있던 취국을 힐끗 바라보더니 그것을 바닥에다 툭 내던졌다. 이어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 얼굴엔 방금까지도 떠돌던 신에 대한 흠모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소년에게 있어서 이미 목풍은 신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짓이겨진 채 죽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인간에 불과했다. * * * 살인이 취미인 사람이 있을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피를 두려워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한 사람, 그는 정말 피를 좋아했다. 남의 살에서 피가 나올 때 그는 박수를 쳤으며, 남이 그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할 때 그는 전율적인 쾌락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를 죽이길 좋아했다. 서른두 명의 친구들과 천하를 횡행할 때도 가장 앞장서서 사람을 죽였던 그다. 누가 그에게 즐기는 취미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서슴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살인이오." 피와 살인, 그리고 취미……, 이 사람의 이름은 사인부(死引斧) 반귀(半貴)였다. 깊은 산, 우거진 송림. 송림은 생사림(生死林)이라고도 불렸다. 그것은 바로 송림의 안에 있는 하나의 산채(山寨) 때문이었다. "아악!" "으아악!"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연무장이었다. 지금 그곳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결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주위로는 짐승가죽을 두른 거한들이 섬뜩한 살기를 뿌리며 서 있었다. 한데, 사람들의 앞에는 실로 목불인견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나의 거대한 가마솥, 그 안에는 끓는 기름이 가득 부어져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끔찍하게도 거한들은 결박된 사람들을 하나씩 그 가마솥 속으로 던져 넣는 것이 아닌가? "으아악!" "아악!" 놀라운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작두, 가마솥 옆에는 길이 삼 척에 달하는 거대한 작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결박된 사람들은 그 앞으로 끌려가 작두의 예리한 날을 시험해 보는 도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니……. "끄윽!" "악!" 손가락, 발가락은 말할 것도 없고, 온몸을 팔등급으로 구분하여 차례대로 잘려지고 있는 그 모습은 도대체 무슨 말로 형용하랴? 서걱…… 서걱……. 이미, 잘려진 사지와 몸뚱이 사이로 이리저리 발에 채이는 것은 수급과 핏물이요, 그 아래로는 또 내장과 허연 뇌수가 쓰레기처럼 짓밟히고 있었다. 뿐인가? 가마솥과 작두의 옆에는 또 하나의 구덩이가 있었다. 구덩이 안에 꽂힌 것은 서슬이 시퍼런 칼날……. 결박된 사람들은 거한들에 의해 그 위로 던져지고 있었다. "억!" "아악!" 던져진 사람들은 죽었거나 아니거나를 불문하고 무자비하고 잔인한 철허대례를 받고 떡반죽이 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솟구치는 피! 난무하는 비명! 설마하니 지옥의 형벌을 관장하는 곳이 땅 위로 이주해 온 것도 아닐 텐데, 저 맑은 햇살 아래 이토록 잔인한 짓이란?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연무장이 내려다보이는 하나의 높은 대(垈) 위에 도도히 서 있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사인부 반귀, 그는 지금 대 아래의 참상을 바라보며 연신 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핫하하……!" 그러면서도 그는 술항아리를 아예 끼고 입 속으로 퍼 넣으며, 한 손으로는 살아 퍼덕이는 닭을 송두리째 입안으로 넣고 있었다. "크핫하하…… 좋다!" 수십 명의 사람이 개죽음을 당한 시간은 꼭 한 시진이었다. 이윽고 사인부 반귀는 살인의 축제가 끝나자 흐뭇한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내일은…… 계집들을 좀 찾아봐야겠군……. 석현촌(石顯村)에는 싱싱한 계집들이 많다더라……, 흐흐……." 사인부 반귀가 살인 외에 즐기는 것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타기였다. 그는 승마를 밥먹는 것보다도 더 좋아했다. 오전에 살인의 피맛으로 세운 기분을 사인부 반귀는 승마로 계속 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을 탈 땐 아무도 수행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보통 말보다 갑절은 빠른 서역 의 설리총 (雪離總)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부아(斧兒)라고 이름붙인 이 명마를 목숨보다도 아꼈다. 우두두……. 말을 탄다는 것은 과연 상쾌하고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사인부 반귀는 흥이 났다. 그는 인적없는 산길을 평지처럼 치달아갔다. "이랴!" 두두두……. 하나의 산굽이를 막 돌았을 때였다. 돌연 설리총 이 긴 울음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한참 흥이 나던 사인부 반귀는 혈광이 이글거리는 시선을 앞쪽으로 던졌다. "어떤 놈이냐?" 흑의인, 그는 산길의 가운데에 묵묵히 정좌하고 있었다. 깊이 눌러쓴 삿갓 아래 희고 고운 손가락 사이에 낀 한 송이의 취국……. 흑의인은 취국을 어루만지며 나직하게 웃었다. "나를 모르는 것을 보니 그대는 전위대(前衛隊)였군." 순간, 사인부 반귀의 거구가 한차례 진동했다. 전위대, 고련도에는 모두 구십구 명의 소년들이 있었다. 그 중 앞서 와 있던 오십 명을 편의상 전위대라 하고, 뒤에 온 사십구 명을 후위대라 하였던 것…….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하늘 하애 삼십육 명뿐이다. 그러나 눈앞의 이 흑의인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네 놈은 도대체 누구냐?" 흑의인은 손가락 새에 낀 취국을 가볍게 들며 몸을 일으켰다. "반귀, 나는 그대 같은 벌레와 오래 얘기한다는 사실도 구역질이 나고 있다. 어서 그 알량한 밑천을 꺼내 보게. 사인부 말이야." 갈수록…… 사인부 반귀는 얼굴이 불그락푸르락 변하며 말등에서 쓰윽 하나의 거부(巨斧)를 뽑아들었다. 그것은 손잡이가 황금으로 만들어진 훌륭한 도끼였다. 흑의인은 툴툴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하나 충고해 주지. 그대는 시작하자마자 제일 자신있는 초식으로 펼치는 것이 좋을 것이야. 도끼는 딱 한 번 휘둘러지고 말 테니 말이야."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이다. "어흠!" 한 소리 폭갈과 더불어 사인부 반귀의 몸이 폭풍처럼 흑의인을 향해 덮쳐왔다. 파르릉!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나무가 허공을 쩍 쪼개어 냈다. 빠빠빳! 순간, 온 하늘이 동시에 황금빛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그 빛은 너무 강렬하여 보는 이의 눈이 떨릴 정도였다. 사인부의 무서움은 여기에 있었다. 처절하도록 현란한 광채에 상대가 눈을 감는 순간, 눈 깜짝하는 시각에 도끼로 상대의 목을 날리고 마는 것이니……. 사인(死引)! 죽음을 인도하는 마의 도끼……. 그러나 흑의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사인부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훤히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반귀의 몸이 떠오르는 순간 같이 떠올랐다. 이어 가볍게 일지(一指)를 튕기어 도끼를 멈칫하게 하는가 싶더니, 아아…… 다음 순간 내리치듯 솟아오른 한 줄기 검광에 반귀는 두 다리가 허벅지부터 잘려나가고 있었다. 짙푸른 하늘에 무지개처럼 이는 피보라! 그러나 사인부 반귀는 그 사실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일 초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섬뜩하여 황급히 땅에 내려선 후 다시 공격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한데 서지지가 않았다. 잘린 허벅지의 면이 먼저 땅에 닿았다. 순간 그는 비로소 느낀 격렬한 고통과 함께 사납게 땅을 구르고 말았다. "으아아악--!" 다가닥…… 다가닥……. 우르르……. 한 필의 말이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이 말은 명마 설리총 이었다. 한데 말안장에 올라타 있는 사람은 반귀가 아니라 무류흔이었다. 말주인 반귀는 두 손을 묶인 채 강변의 자갈밭을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자갈, 심각할 정도로 뾰족하다. 그 예리한 날은 반귀의 살을 걸레조각처럼 찢어발기고 있었다. 두두두……. "아아악! 제발 죽여…… 죽여줘……!" 밤새도록 빙글빙글 맴돈 자갈밭이었다. 동녘으로 뿌연 여명이 떠오고 있었다. 무류흔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 여명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없는 얼굴에도 햇살은 부드럽게 어루만져 왔다. "삼십육 인…… 그 중에서 추상, 검우, 금적해의 삼 인은 제외된다. 나머지 삼십삼 인 중 대외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자는 스물셋…… 이들 중 신성천불 계열의 십육 인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아악--! 제발……!" "이제 둘, 나머지 스물셋도 시간문제다. 하지만 종적을 알 수 없는 열 명은 어디 가서 찾아야 하나?" "쿨럭…… 쿨럭……." 돌연, 무류흔의 입 밖으로 고질병인 기침이 터져 나왔다. 밤새도록 찬바람을 쐰 탓일 게다. 무류흔은 다급히 다정환 한 알을 삼켰다. 그는 요즘 와서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침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심해졌다. '이 쓸모없는 생명은 도대체 얼마나 남은 걸까?" 무류흔은 씁쓸하게 웃으며 환히 밝아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뜻이 있고, 눈이 있다면……, 나에게 내 할 일만은 다 마칠 수 있도록……." 들려 오던 비명은 점차 꺼져 가고 있었다. 말이 빠를수록 고통도 심하다. 반귀는 아마도 자신이 빠른 말을 사랑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두두두……. 돌연 무류흔은 힘차게 말고삐를 잡아챘다. 이히히잉……. 설리총 이 멈춰 서자 무류흔은 힐끗 뒤로 시선을 던졌다. 끈, 이 끈에 묶여 있는 것은 놀랍게도 끊어진 두 팔목뿐이었다. "왜 그랬는지 아나? 내 셋째 이모님은 양팔이 잘린 채 돌아가셨네……. 그것은 바로 사인부의 흔적이었지……." 무류흔은 생살부를 꺼내 사인부 반귀의 이름을 뜯어냈다. 팔랑팔랑……. 펼쳐진 종이가 끊어진 팔뚝으로 내려앉고 그 위로 다시 물체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물체, 그것은 바로 아침 햇살 아래 유난히 더 요염해 보이는 한 송이의 취국(翠菊)이었다. 제 16 장 막아라! ---------------- 취국의 향기는 잔인하고, 묵도(墨刀)의 검기 는 냉혹하다. 설요(雪妖)의 웃음은 가까이 말라. 야화(夜花)는 너의 마음까지 훔쳐갈진저……. 네 줄의 시구, 이것은 소문! 홀연 무림을 진동시키기 시작한 소문의 발원지였다. 그 첫번째는…… 취국(翠菊)! 그것은 바로 한 송이 꽃, 그러나 이 꽃의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듣는 순간부터 사흘 정도는 놀란 가슴을 부여안고 있어야만 했다. 전율! 충격! 오오…… 하늘이여……. 이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잠륜신도(潛輪神刀) 목풍(木風), 사인부(死引斧) 반귀(半貴),혈적선(血赤仙) 형조, 구천독룡(九天毒龍) 번웅(煩雄), 환영무랑군(幻影舞狼君) 경면(景勉)……. 삼십삼겁(三十三劫)! 이 공포의 이름들이 이 시내의 가장 강력한 초강자(超强者)인 이들이…… 진정, 한 송이 취국 아래 고혼(孤魂)이 되었단 말입니까……? 이것은 실로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무림정예 이천을 때려잡고, 것도 모자라 봉문 한 문파를 부수고 들어가 두들겨대고, 산야에 은거한 고수들까지 일일이 찾아내 난도질하여 무림의 공포스런 하늘로 단숨에 군림했던 그들이 아닌가? 그 신화가 정녕 깨어지고 있단 말인가? 한편 일막에선 또 다른 반론도 일고 있었다. 취국(翠菊)! 그는 오히려 삼십삼겁보다 더 잔악한 자일지도 모른다. 죽은 자들은 하나같이 극한의 잔인함으로 죽지 않았던가? 취국, 그를 믿어선 안 된다. 무엇이 어찌됐건……. --불사취국(不死翠菊) 이 이름은 온통 무림을 뒤흔들어놓고 말았다. 하나, 아무도 이것을 입 밖에 내어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검은 하늘은 스물여덟 개나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의 둘째, --묵도(墨刀)! 그는 고독한 방랑수업자였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출신 내력이 어찌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 자루 거무튀튀한 목묵도(木墨刀)를 가슴에 품고 구름처럼 초지일관 무도수업을 행하는 무도인(武道人)……. 그의 묵도가 명성을 떨치게 된 곳은 중원이 아니었다. 그곳은 바로 천축 (天竺), 서장 (西藏)의 이국이었다. 일 년의 세월 동안 그는 백 번을 싸웠다. 그 속에는 천축 제이(天竺第二)의 고수라는 대뢰음사 (大雷音寺)의 수석공봉(首席供奉) 아라천승(我羅天僧)을 비롯하여, 천축 속가제일인(天竺俗家第一人)이라는 뇌신(雷神) 부타(佛陀)와 서장 제일고수(西藏第一高手) 포달람궁의 법황대존자(法皇大尊者)도 있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