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객 - 18편 (18/36)
"불문칠신의…… 무예로 죽여…… 다오……. 비급 은 포단 아래에 있다……." 무류흔은 황망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말고요, 사부님." "핫하…… 고맙…… 구나……." 신성천불의 가슴이 돌연 크게 부풀어 올랐다. 다음 순간, 그는 부르르 몸을 떨더니 두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만고의 죄인!" 신성천불은 죽었다. 자신이 만고의 죄인임을 부르짖으며 고독스럽게 죽어 갔다. 무류흔은 그의 시신을 정리한 후 포단 아래에서 파해도와 비급 을 꺼냈다. 비급 의 안에는 불문칠신의 무예가 수록되어 있었다. 그 중엔, 주육대사의 천류뇌전 신법 도 있었다. 무류흔은 조용히 그 자리에 앉아 깊은 묵상에 잠겨들었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그는 이미 십육동인을 통해 세상으로 나간 삼십육 인의 무예가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인지를 경험했다. 첫째 일은 자신의 실력배양이었다. 사실, 그의 무예는 너무 잡다했다. 천외성전에다 환우오천마, 천연탑, 거기다가 또 불문칠신의 것까지……. 무류흔은 우선 그 모든 무예를 모아 정리하기로 했다. 연후, 십육 동인의 무예를 연구한 후 삼십육 인에 대한 대비책을 만들기로 했다. 무류흔은 문득 어두운 석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할 일은 많고도 많은데…… 하늘은 이 생명을 그ㄸ까지…… 주시려나……?" 그는 피식 웃으며 앉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자! 최선을 다한 자만이 최후에 웃을 수 있다! 무류흔, 소림 밀교 의 대법사. 그에게 내려진 소명은 세상으로 흩어진 삼십육 인의 초강자들을 소림 밀교 의 이름으로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삼십육 인…… 이들의 운명은 어찌되려나?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라면 세월은 인간사야 어떻든 말든 그 흐름을 멈출 줄 모른다는 것……. 온요로운 봄날이 오더니 폭양의 여름, 그리고, 황토빛 가을 뒤로 또다시 한 해의 마지막 계절이 시작됐다. 일 년…… 유수 같은 일 년 세월이 지난 것이다. 사천 천불사당의 팻말은 삼백삼십 일 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 * * 戊鼓斷人行 邊秋一雁聲 露從今夜白 月是故鄕明 有弟皆分散 無家問死生 奇書長不達 況乃未體兵 변방 초소의 북소리에 사람 다니는 것 끊어지더니, 변방 가을에 외기러기 소리뿐이로다. 이슬은 오늘 밤부터 희어져 백로가 되었으니, 달은 역시 고향에도 이처럼 밝으리라. 형제들 있으나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집안 식구들 살았는지 죽었는지 물을 곳조차 없다. 편지를 붙여도 오랫동안 전달되지 못하고, 더군다나 이 전쟁은 그칠 줄을 모르는구나……. 바람, 휘이잉……. 사풍(砂風), 끈적한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다. 덜커덩……. 하나의 마을, 을씨년스럽다. 바람이 불 때마다 회벽이 제멋대로 벗겨진 거리 양쪽의 집 문들은 제멋대로 덜컹거리고 있었다. 휘이익……. 텅 빈 거리의 한쪽으로 휴지조각이 덧없이 날려갔다. 사람이 살지 않는 폐촌인가? 인적이라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때다. 돌연, 어두운 하늘을 머리에 이고 큰 죽립인(竹笠人)이 마을의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섰다. 일신에 아무것도 든 것이 없으나, 몸에서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기이한 기질이 풍겨 나오고 있는 그…… 죽립인은 마을 입구에 선 채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더니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목이 말랐던 것일까? 그의 걸음은 우물을 향하고 있었다. 우물은 바싹 말라 있었다. 밑바닥엔 모래가 쌓여 있었다. 죽립인은 무심히 발길을 돌려 이번에는 다 낡아빠진 주(酒) 자가 쓰인 하나의 주루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주루가 아니었다. 먼지 쌓인 선반 위에서 꼼지락거리던 들쥐 한 마리가 비명을 터뜨리며 또르르 도망갔을 뿐……. 이때다. 죽립인은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는 눈치를 보였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발을 땅에 대지도 않은 채 스르르 주루의 이층으로 올라갔다. 구석진 곳의 한 방, 다락방. 벌컥 문이 열리자 침대 위에 쭈그리고 있던 노파 하나는 화들짝 놀라 공포의 시선으로 이 낯선 침입자를 바라보았다. 죽립인의 시선 속으로, 노파의 앞에 놓인 한 구의 작은 백골이 쏘아져 들어왔다. "이곳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소?" 노파는 그가 살의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이내 무표정한 표정으로 돌아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곳에는 본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노파의 바싹 마른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죽거나…… 다 도망갔지……." "왜?" "ㅋㅋ……." 노파는 창밖을 가리켰다. 그녀의 앙상한 손끝은 창밖의 거대한 산봉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옥 같은 날…… 저 산속에 있는 신녀들의 궁이 불길에 휩싸여 아수라처럼 타던 날…… 이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순간, 죽립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붙잡고 있는 문짝이 와삭 부서져 나갔다. 노파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핏빛 옷을 입은 자들……, 그들은 잔인했지. 내 아들은 세 토막으로 잘리고, 내 손자는 그때 발목을 잘려 결국…… 아무데도 못 가고 이렇게 죽었지……." 노파는 툴툴 웃으며 눈앞의 작은 해골을 쓰다듬었다. "내 손자가 깰지도 모르겠으니……, 당신은 그 문을 닫고 조용히 나가구려……." * * * 손, 언뜻 보아 마디가 몹시 고운 이 손은 하나의 현판에 묻은 먼지를 닦아 내고 있었다. 먼지와 이끼가 닦여 나가자 현판에 쓰인 글자가 보였다. 죽립인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앞에 놓인 하나의 거대한 궁, 본래는 매우 아름다웠으리라. 하나, 대리석 궁벽은 이리저리 깨어지거나 허물어졌고, 오석(烏石)의 담지붕엔 푸른 이끼와 잡초가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무심히 허공을 나는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이 폐허의 정경을 더욱 스산하게 하는데…… 돌멩이처럼 굳어 있던 죽립인은 느릿하게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궁 안, 이곳 역시 황폐하기는 마찬가지……. 보라! 아름답던 호수는 시커멓게 썩어 여기저기 물고기들이 허연 배를 뒤집은 채 부패하고 있었고, 우아한 정원의 나무들이 모조리 말라죽어 앙상한 가지를 덧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뿐인가? 궁의 이곳 저곳에는 허연 백골들이 아무데나 뒹굴고 있는 것이다. 죽립인의 걸음은 조금 더 빨라졌다. 그는 이곳의 지리에 매우 익숙한 듯 몇 개의 전각을 단숨에 가로지르더니, 이윽고 하나의 가장 큰 대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이곳에서 조금 망설이는 듯싶었다. 하나, 이내 마음을 굳힌 듯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가는데 놀랍게도 그의 발자국은 계단의 수북한 먼지에 조금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있었다. 대전, 문은 밀자마자 떨어져 나갔다. 쿵---! 이어,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광경, 먼지가 쌓였다곤 하나 과거의 풍요를 대변하는 듯한 고급가구와 장식들……. 죽립인의 몸이 휘청했다. 그는 쓰러질 듯 벽을 붙잡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최초의 백골, 어깨가 좁고 골반이 큰 것으로 보아 분명히 여자의 것이다. 백골의 옆에는 부러진 검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검의 손잡이에는 천선(天仙)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제, 죽립인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내딛는 발자국은 그대로 청석 바닥을 움푹움푹 파고들어 갔으며 그가 무심결에 내뱉는 경기로 하여 곧 대전이 미미하게 흔들리기조차 했다. 원탁을 둘러싼 백골은 모두 다섯 구, 그 중 가장 상석에 있는 백골은 아직도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 옷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흰색, 죽립인의 떨리는 손이 그 옷을 어루만졌다. 그는 이 옷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천잠(天蠶)의 실로 만든 이것은 그가 직접 이 백골의 임자에게 주었던 것이므로……. 마지막으로 대전의 가장 깊숙한 곳, 이곳에는 두 개의 백골이 나란히 손을 맞잡은 채 죽어 있었다. 좌측은 남자, 우측은 여자다. 여자 백골의 손가락에는 선명한 삼색환이 끼워져 있었다. 이 삼색환에 시선이 닿는 순간, 드디어 죽립인의 입에선 한 사발이나 되는 선혈이 터져 나왔다. 그는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하늘이여……. * * * 일 년 전, 이 땅에는 일찍이 아무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미증유의 혈풍이 불었다. 악마의 향연! 피의 바다! 그 혈풍의 발단은 최초 대륙의 남단 끝, 위가장(魏家莊)이란 한 무림세가 로부터 비롯되었다. 어느 날 문득, 심야의 장원문을 두드린 삼십삼 인의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들, 그들은 다짜고짜 서른세 필의 말과 삼만 냥 의 은자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위가당주 천은신검(天恩神劍)은 이들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화가 치밀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하나, 누가 상상인들 해보았을까? "없"의 말이 나왔을 때 천은신검은 자신의 백여 식솔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아야만 했고 "다"의 말이 끝났을 때 그의 위가장은 한줌의 잿더미로 변할 줄이야!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피에 굶주린 악귀인 양 삼삼오오 짝을 지어 천하로 흩어진 이 악마의 소년들은 그부터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랄 대살겁을 자행하였으니……. 광동 땅에서는 길을 가다 무심코 발을 밟힌 소년 하나가 그것을 빙자로 일 성(城)을 개미새끼 하나 남기지 않았고, 복건 땅에서는 무심히 시비를 건 건달 하나로 하여 그 지방의 녹림 도(祿林道)가 씨가 말라 버렸다. 먹던 밥에서 돌이 나왔다고 주루의 주인을 비롯하여 그 안의 손님 오십 명의 목을 쳐서 문 밖에 걸어놓은 사건은 오십두반(五十頭飯)이란 유행어를 만들어 냈고, 중이 고기를 먹다 들킨 산동 땅의 백여 사찰이 일시에 잿더미로 변한 사건은 온천하의 승려들을 공포에 떨도록 만들었다. 무법천지! 아아…… 이 땅엔 법도 계율도 없단 말인가? 호남(湖南)의 오백 호걸들이 그곳으로 들어왔던 세 소년을 제지하려다 몰살당한 사건을 기폭제로 하여 대륙의 영웅들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소림 대사를 필두로 한 구파일방 (九派一幇)이 선봉을 서고, 작게는 심산유곡이 은거기인부터 크게는 대소 오백여 방파가 모여 이룬 무림진악군(武林鎭惡軍). 흩어져 날뛰던 소년들이 한데 모이고, 삼십삼 인의 소년 살수 와 이천의 무림진악군은 화북 평야에서 칠주야에 걸친 대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시체가 산을 쌓고 피가 바다를 이루었으나 그 결과는 너무 엉뚱했다. 무림진악군의 이천 정예가 단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 삼십삼 인의 살수 는 손가락 하나 다친 이가 없었으니……. 그제서야, 천하는 이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온몸으로 느꼈다. 각 문파는 앞을 다투어 봉문 (封門)하고 기인고수들은 산야로 정신없이 숨어들었다. 봉문 하야한 문파나 고수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무림의 금칙이었다. 하지만 삼십삼겁(三十三劫)은 도대체가 법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봉문 한 문파를 찾아다니며 부수고 불질렀으며…… 산야에 숨은 고수들을 골라 그 목을 베어 길거리에 내평개쳤던 것이다. 하늘이 숨을 죽이고 땅이 호흡을 멈췄다. 피! 그 엄청난 피의 옷자락……. 이 사풍을 틈타 사마외도(邪魔外道) 또한 제세상을 만난 듯 설쳐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다. 죽고 또 죽이는 무서운 악마의 향연이 반 년을 이어가는 동안 폭력은 곧 도덕이 되고, 사악은 우상이 되었으며,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가 살기 위해 무릎을 꿇고, 무릎을 꿇다가 뒤에서 적을 찌르는 것을 다반사로 보며 자랐다. 오오……, 천하는 통곡을 하였으되…….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하루, 그 피의 인연을 이어받은 사나이 하나는 외로이 심산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그는 순결한 사내였다. 그는 도덕적이며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래서, 그 통곡은 더욱더 슬프고 처절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운명은 이 고귀한 사내에게 무류흔이란 이름을 붙여 놓았다. * * * 눈(眼), 귀화(鬼火)라고나 할까? 어둠 속에서도 새파랗게 빛나는 두 눈. 무류흔은 이미 열흘 동안 정좌한 자세 그대로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의 몸은 모든 기능을 정지하고 있었다. 오직, 두 눈만이 쉴새없이 활활 타오르고 있을 뿐……. 이 눈은 곧장 내전 안의 백골들을 향하고 있었다. 이미, 수천 수만 번도 더 본 것이건만 그의 시선은 열화처럼 백골들을 더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허리 부분이 움푹 패여들어 간 하나의 백골에서 멈춰졌다. '허리의 상흔……, 저것은…… 혈전추(血戰鎚)다……. 혈전추 노량……, 허리가 부서져 죽게 된다…….' 또 하나의 백골은 두 다리가 싹둑 잘려 나가 있었으며……. '기이한 각도의 도법…… 잠륜도(潛輪刀)…… 흐흐…… 잠륜도 목풍…… 너는 두 다리가 잘려야 했다…….' 어떤 백골은 목이 반이나 부러져 나가 있었다. '소수신공(素手神功)…… 목에 아홉 개의 구멍을 냈다. 소수랑(素手郞)……, 너는 목에 구십 개의 구멍이 나게 된다…….' 문득, 무류흔의 두 눈 끝이 두두둑 뜯어지더니 그곳으로부터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입술 새로도 가는 선혈이 실낱처럼 맺혔다. 무류흔은 그것들을 닦을 생각도 않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대전에 이리저리 흩어진 무기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검과 금봉, 그리고 쌍륜…… 그의 발이 대전의 문을 향했다. 그는 그 동안 한 번도 백골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화르륵……. 한 번 솟구쳐 오른 불길의 기세는 엄청났다. 무류흔은 얼굴을 화광으로 붉게 물들인 채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꽃이 피듯 그의 마음 또한 탔다. 이미 타고 또 타고 타서 다시는 탈 것이 없을 줄 여겼더니 이 마음은 그래도 타는구나……. 불아……, 불아……. 너는 아는가? 내 전생에 무슨 업보가 있어 부모의 백골을 보아야 했던가? 내 삶의 무엇이 그리 더러웠기에 세상은 이토록 나의 가슴을 찢는가……. 맹세코, 헛허…… 용서할 수 없다. 용서 못한다. 화르륵……. 불길이 서서히 날아들기 시작하자 무류흔은 그 자리에서 잿더미로 화한 대전을 향해 엄숙하게 삼배를 올렸다. 이어, 그는 입고 있던 백의를 벗고 대신 먹물 같은 흑의를 걸치더니, 그 자리에 단정히 앉아 하나의 책자를 펴들었다. 제일 첫 장, 그곳엔 붉은 주사체(朱砂體)로 하나의 성명이 쓰여 있었다. --잠륜신도(潛輪神刀) 목풍(木風). 십팔수잠륜도법(十八手潛輪刀法), 성격 호탕,호색호주(好色好酒) "마(麻)로 짠 흑의를 입음은 너희들의 피가 이 옷에 튀어도 빨려 하지 않음이다. 마의 거친 감촉은 나의 복수심을 돋우고 이 복수가 끝날 때까지 이 옷을 벗지 않으리니…… 목풍, 너는 첫 번째 제물이 되었다." 무류흔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득, 아침햇살이 그가 등에 맨 하나의 검과 금봉, 쌍륜을 영롱히 비춰 냈다. 그것은 죽은 이모들의 병기였다. 뚜벅뚜벅……. 한맺힌 한 사내가 걸어 나간다. 뒤도 한 번 돌아봄 없이 그의 건장한 몸은 아스라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궁문을 막 나설 때, 무류흔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한 개의 화원,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는데 그곳에는 늦서리에도 지지 않는 국화 한 송이가 의연히 피어 있었다. 국화……. 얼마나 좋아하던 꽃이던가? 무류흔은 꽃 하나를 떼어 입에 물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그가 자라온 천외성전을 향했다. 환상이었던가? 할머니가 활짝 웃고 있다고 느낀 것은……. --류흔…… 너는 우리의 자랑. 번뜻, 눈꼬리에 이슬이 맺혀 올랐다. 그것을 털어 버리기라도 하듯 무류흔은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슈우욱! 형제는 있으나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집안 식구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물을 곳조차 없다. 편지를 부쳐도 오랫동안 전달되지 못하고, 더군다나 이 전쟁은 그칠 줄을 모르는구나……. 제 15 장 인간(人間) 사냥 ------------------------ 사냥은 시작되었다. 세상 어느 구석, 지옥 끝에 처박혀 있어도 나는 너희들을 찾아내고 만다. 알겠느냐! 내가 무림을 안 것은 나의 불행이었고…… 너희들이 나를 잊은 것은 네 놈들의 불행이었다. 나는 인간 사냥꾼이다. * * * 잠륜신도 목풍! 그는 환상적인 도(刀)의 달인이었다. 그가 손을 뻗치면 그것은 하늘의 번개가 내려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비단 빠를 뿐 아니라, 상대를 아예 재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잠륜신도 목풍, 그가 처음 조주 성(趙州城)에 나타난 것은 반 년 전 여름이었다. 눈처럼 흰 백의에 하얀 신발 흰 피부, 이 잘생긴 미소년은 사람들이 두 눈을 부릅뜰 때까지 신화를 창조해 냈다. 그 신화는 조주 성 밖 운태산에서 이루어졌다. 십팔천봉방(十八天鳳幇), 운태산에는 조주 일대에서 가장 큰 명성을 떨치고 있던 십팔천봉방이 있었다. 방주는 이십일식 무극 패천검(二十一式無極覇天劍)으로 검신(劍神)의 칭호를 받고 있는 금검패왕(金劍覇王) 후륜(候輪), 삼천의 수하를 거느리고 십팔천봉방은 운태산 기슭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무더운 여름날, 무심히 그 앞을 지나던 잠륜신도 목풍은 십팔천봉방이 이고 있는 아름다운 산세에 경탄을 터뜨리게 되었다. "이 산길은 내가 찾던 곳……." 그는 즉시 하나의 서신을 십팔천봉방으로 던졌다. 금검패왕 후륜은 껄껄 웃어 버렸다. "별미친 놈 다 봤군." 그것은 누가 생각해도 미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한데, 예고한 모레 새벽이 되어 여명이 비칠 즈음, 이날따라 유난히 일찍 일어난 후륜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았다. 불러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자, 그는 한 잔의 차를 따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새벽 안개, 찬물을 꿀꺽꿀꺽 마시고 난 후륜은 그러나 이내 묘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른 시간이긴 해도 이맘때면 북적거릴 방내가 쥐죽은듯 고요했기 때문이다. 후륜은 큰소리로 수하를 불러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바로 그때, 후륜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넓은 연무장의 뜰,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무심히 도를 닦고 있는 하나의 어슴푸레한 인영을 발견했던 것이다. "너는 누구냐?" 인영은 흰 치아를 드러내 보이며 조용히 웃었다. "약속을 지키느라고…… 삼천구백이십오 명을 베고 나니 나의 칼이 더러워졌소……." 말을 하는 그의 뒤에는 삼천 개의 목이 놓여 잇었다. 후륜은 그만 똥오줌을 싸고 실신해 버렸으며, 사람들은 그날부터 수려한 산세의 십팔천봉방 내를 거니는 미소년을 보게 되었다. 잠륜신도 목풍, 그는 신이었다. 조주 성 사람들은 누구나가 그를 그렇게 불렀다. * * * 한 어린 소년이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관도의 한쪽, 나무에 끈으로 토막을 매달아 놓고 열심히 휘두르는 그의 솜씨는 제법 숙련되어 보였다. "얍!" "엿!" 바로 그때다. 한참 신나게 목검을 휘둘러대던 소년은 문득 몸을 으스스 떨게 하는 암기 가 자신을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땀이 뻘뻘 날 이 시각에 이 한기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 사람, 어느샌가 소년의 앞을 우뚝 가로막고 선 그. 무심히 그를 향해 시선을 던지던 소년은 으스스 몸을 떨었다. "누구세요……?" 마포흑의(麻布黑衣), 깊숙이 눌러쓴 삿갓에 우수에는 철도 아닌 한 송이 국화를 든 사내. 한기는 바로 그로부터 뻗어오고 있었다. 한데, 그 추위 속에서도 소년은 문득 이 사람이 몹시 멋있다고 느꼈다. 특히, 가늘고 긴 손가락에 낀 취국이 그랬다. "너는 이곳에 사느냐?" "네, 멋쟁이 아저씨." "지금 그 도법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순간, 소년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도신(刀神)님에게요." "신(神)…… 이라고?" "네, 다들 그렇게 불러요. 그분은 정말 신이에요. 저는 그분 휘하의 한 무사님에게 이 도법을 배웠어요." 죽립흑의인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웃음은 참으로 괴이한 것이 듣는 이의 심금을 갈아내고 내장을 송두리째 뽑을 듯한 상념이 웃음 속에 스며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이 아니다." 순간, 소년은 발칵 화를 내며 소리쳤다. "왜 그런 말을 하죠? 도신님을 모욕하는 말은 제가 용서할 수 없어요!" "그는 신도 뭣도 아니다. 다만 짐승일 뿐이다." 소년의 손에 들린 목검이 홱 허공을 갈랐다. 그는 마음속의 우상을 희롱하는 이 사람이 몹시 미웠다. 그러나 그 목검이 제위치를 찔렀을 땐 이미 흑의인의 모습은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꺼지고 난 후였다. 대신, 그곳에는 한 개의 취국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불사취국(不死翠菊)……? 이런 호를 들어본 적이 있나?" 잠륜신도 목풍의 말에 수하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없습니다. 대신 도신님을 만나뵙겠다며 이런 것을 보내왔지요." 수하가 내민 것은 하나의 훌륭한 도(刀)였다. 목풍은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다가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오! 정말 훌륭한 도다!" 그는 도를 뽑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접견하겠다. 데려오라." 목풍은 웃으며 문 안으로 들어선 흑의인을 마주했다." "어서 그곳으로……." 그는 오연히 의자에 앉은 채 자신의 앞자리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