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객 - 17편 (17/36)
뱃전에는 한 사람, 일신에는 눈처럼 흰 백의무복(白衣武服)을 걸치고 한 개의 자색각반을 찬 방랑수업자 차림의 미소년. 뱃전에 우뚝 선 채 묵묵히 다가서는 섬을 바라보는 그는 바로 무류흔이 아닌가? 이윽고, 배가 섬과 십 장 정도의 거리를 남겨 두자 무류흔은 뱃전을 박차고 훌쩍 몸을 날렸다. 슈슉----! 해변의 모래에는 먼지 한점 일지 않았다. 무류흔은 정광(精光)이 일렁이는 시선으로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그의 눈에 미미한 의혹의 빛이 서렸다. 너무 조용하다. 들리는 것은 파도소리이며, 이따금씩 청명한 하늘을 가르는 들새소리뿐……. 무류흔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태고의 정적과 무심한 발자국 소리가 그를 뒤따랐다. 바로 그때, 그의 시선이 번뜩 한 줄기 이채를 발했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평범한 모래사장이로되 수없이 찍힌 발자국과 그리고 수북한 하나의 잿더미……. 무류흔은 서서히 그곳으로 다가가선 잿더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의 입술 새로 가벼운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이것은……?" 뼈, 종류는 다양했다. 작은 들짐승의 것인 듯 길이가 한 자도 안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속에선 놀랍게도 시커멓게 그을린 사람의 해골도 나왔다. 무류흔은 칼날 같은 검미를 깊숙이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 일어난 것일까? 이것은 화장(火葬)의 흔적이 아니었다. 광란하듯 무엇을 태우고 제멋대로 내팽겨쳐진 흔적이었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그는 돌연, 자리를 박차는가 싶더니 슈욱 마주 보이는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전혀 생소한 것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의식을 잃은 채 이곳에 왔고 의식을 잃은 채 이곳을 나갔었으니까? 도중에 풍랑을 만나지 않았다면 열흘쯤 빨리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숲, 이 숲은 깊고도 깊었다. 무류흔은 바람처럼 이곳을 달려나가다 우뚝 몸을 세웠다. 그의 눈에 띈 것은 한 구의 시체였다. 이 시체는 가슴에 이십사(二十四)의 숫자를 새긴 소년이었으며, 그는 지금 땅으로부터 느닷없이 솟아오른 죽창에 온몸이 말린 오징어처럼 꿰뚫린 채 죽어 있었다. 소년의 앞에는 하나의 목옥(木屋), 소년의 자세로 보아 그는 나가는 저 목옥으로 뛰어들어가려다 불의의 매복에 당한 것 같았다. 무류흔은 목옥으로 다가섰다. 문은 열려 있었다. 안으로 한 걸음 내딛던 그는 순간 주춤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부패……, 무엇인가가 썩고 있는 지독한 냄새였다. 그리고 세 구의 시체가 보였다. 가슴에 팔(八)을 새긴 소년 하나는 창틀에 기댄 채 비스듬히 죽어 있었고, 번호를 확인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소년은 다른 한 구의 시체 위에 포개진 채 죽어 있었다. 아래 깔린 시체는 여자였다. 자세로 보아 여자는 이 소년에게 강간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무류흔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창틈으로 미미하게 흘러 들어온 햇살……. 그리고, 그 아래 드러난 여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무류흔은 부르르 몸을 떨고 말았다. "성니(聖尼)!" 오오! 성니라니? 그 여인이 바로 독초를 먹고 자결한 환상성니란 말인가? 사태는 명약관화했다. 그날 밤, 광란한 소년들 중 세 명이 이곳을 덮쳤던 것이다. 그들 중 하나는 집앞의 매복으로, 또 하나는 집 앞의 독으로…… 그리고, 쪼개진 채 죽은 소년은 가증스럽게도 시간(屍姦)을 하다가 성니의 몸 속에 있는 독기의 침입을 당하여 죽은 것이리라. 무류흔은 망연히 그 자리에 두 무릎을 꿇었다. "왜…… 이런 일이……?" 그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고련도, 그는 이곳을 승려들의 불심과 소년들의 활기찬 수련이 겹쳐진 아름다운 장소로 상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눈앞의 결과는 더더욱 현실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무류흔은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체는 섬의 가운데에 있는 산정을 향해 갈수록 더더욱 많아졌다. 그 죽은 모양 또한 더욱더 참혹했다. 그 대부분은 소년들의 시체였다. 무류흔의 마음은 무거웠다. 불문칠신, 이들은 모조리 다 죽은 것일까? 해변가에 있는 해골은 모두 다섯 구였다. 이 섬에 생긴 이변을 소년들이 일으킨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다섯 구의 해골은 바로 불문칠신의 것일 게다. 그렇다면 환상성니까지 합하여 죽은 사람은 모두 여섯. 그 하나는 어디에 살아 있는 것일까? 기필코 살아 있어야 했다. 아니라면 이 의문은 풀 길이 없어지고 만다. 무류흔의 몸이 갑자기 빨라졌다. 지형은 완만했다. 산정은 바로 눈앞에 둔 한 곳이었다. 무류흔은 한 개의 동혈(洞穴)을 발견했다. 동혈의 위에는 세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옥관이라……." 무류흔은 오면서 많은 지형지세를 보았다. 그것들은 오를수록 더욱더 힘들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곳은 매우 주요한 곳임에 틀림없으리라. 무류흔은 망설임없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둡다. 고도의 내공 을 지닌 무류흔의 시력으로써도 안은 전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주춤 몇 걸음 다가서던 그는, 문득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하나의 물건을 발견했다. 무엇일까? 희끄무레한 그것은 석비 같기도 했다. 무류흔은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 좀더 앞으로 다가서선 화섭자를 꺼내 불을 밝혔다. 순간, 동혈 안은 일시에 대낮처럼 환해졌다. 석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그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무류흔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들고 말았다. 석비에 새겨진 내용이란……. 누가…… 왜……? 바로 그때다. 치지직……. 기음(奇音), 황급히 위를 올려다보는 무류흔의 시선 속으로 마구 타들어가고 있는 한 개의 선과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쿠쿠쿠……. 동혈, 그것은 순식간에 무너져 앉고 있었다. 무류흔은 선을 보는 순간 이미 몸을 날리고 있었다. 거대한 돌덩이들이 그의 주위로 마구 떨어져 내렸고, 그 사이를 기적처럼 뚫으며 솟아 나가는 그의 신형, 찰나지간에 보인 출로는 오직 한 곳 뿐이었다. 무류흔은 사력을 다해 그곳으로 몸을 내던진 후 바싹 몸을 땅에 묻었다. 쿠쿠쿠! 와르르르……. 자국한 먼지와 풍사(風砂)! 동혈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렸다. 밖에서 보기에 그것은 한 산이 송두리째 주저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르르……. 수백 개의 거석들이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 후, 이윽고 산은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 * * 무류흔은 눈을 떴다. 떴을 뿐이지, 그는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그는 엎드린 자세를 바꿀 수조차 없었다. 그의 바로 위에는 거대한 바위 하나가 바싹 내려앉아 있었고, 바위와 바위들은 서로 맞물린 채 기적적으로 무류흔의 몸이 누운 공간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돌연, 무류흔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하나의 석판을 발견했다. 그는 의아해 하며 즉시 입김을 불어 그 위에 쌓인 먼지를 날려보냈다. 석판 위에 나타난 글자……. 도대체가…… 무류흔은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누군가? 누구기에 이토록 완벽한가? 그는 무류흔이 석비의 앞에서 화섭자를 킬 것을 환히 예상하고 있었다. 심지어, 무류흔이 어느 손에 화섭자를 들 것인지까지 예측하고 있었다. 화섭자의 바로 위에 그 화력을 빌어 타들어가기 시작한 도화선은 바로 불에 가장 민감한 사람의 머리카락이었던 것이다. 화약이 터지고 그 와중에서 무류흔이 하나의 출로를 발견한 것도 그의 예측 속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아니, 일부러 그가 만들어 놓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석판까지……. 무류흔은 툴툴 웃으며 석판을 다시 읽어 나갔다. <나는 화옥이오. 모든 일 또한 소생이 꾸민 것이로되, 내 마음속에 가장 걸린 사람은 바로 무형이었소. 나는 반드시 무형이 돌아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소. 무형, 무형의 처지를 이렇게 만든 것에 대해 나는 몹시 죄송스러움을 느끼오. 무형은 내가 본 뭇 인간들 중에 가장 뛰어난 인재였기 때문이오. 잘못이라면 나를 태어나게 하고 또 무형을 탄생시킨 하늘의 뜻이오. 산은 두 마리의 호랑이를 결코 용납치 않기 때문이오. 이 글은 무형을 존경하는 나의 마음이오. 또한, 나는 무형을 대신하여 두 가지의 일을 해드리겠소. 그 하나는 천하제패, 두 번째는 추상…… 나는 그녀가 여자의 몸임을 알고 있소. 그녀가 무형을 사랑하고 있음도 알고 있소. 무형이 못다한 만큼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오. 무형, 많은 글로 마음을 대신하오. 바위는 그리 오랫동안 지탱하지 못할 것이오. 무형이 편한 죽음을 원할 때를 대비하여 소생이 한 자루 검을 남기오. 검은 석판의 아래에 있소. 그럼 안녕히……. 화옥 배상(拜上).> 석판의 아래에는 과연 한 자루의 단검 이 놓여 있었다. 화옥, 그는 완벽했다. 너무 완벽하여 소름이 끼칠 정도다. 기관 의 진식 에 매복과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지혜……, 그는 또 무류흔이 혹시나 기적적으로 살아날까를 근심했다. 그리하여, 석판에 글을 남기되 일견 정통하듯 하면서도 상대의 가장 아픈 곳만 예리하게 찔러대는 내용을 남긴 것이니, 배알이 있는 사내라면 당장 검을 집어 자신의 배를 홧김에라도 쑤셔댈 판인데……. 과연, 검의 손잡이를 잡은 무류흔은 돌연 격렬한 기침을 터뜨렸다. "콜록…… 콜록……." 감정의 고조로 선천병이 도진 것이다. 기침은 일시지간에 멈추어지지 않았다. 또한 여느 때와는 달리 가슴까지 찢어질 듯 아팠다. 돼지간처럼 붉어진 얼굴로 무류흔은 품속을 더듬어 한 개의 약병을 꺼냈다. 이어, 황색 단환 하나를 입 속으로 미친 듯이 집어넣었다. 무저빙궁주 백유군이 정성으로 만들어 준 신약……. 다정환(多情丸)이라고 이름붙인 그것을 삼키고 나자 기침과 가슴의 통증은 거짓말처럼 멎었다. 무류흔은 약병을 힘주어 쥐며 볼을 땅에 댔다. 서늘한 흙의 감촉이 볼을 타고 올라왔다. 가슴속을 휘도는 이것은 분노냐……, 뭐냐? 화옥, 이 가증스런 일의 주범이 바로 너란 말인가? 무류흔은 난생 처음 가슴을 터뜨릴 듯한 분노를 경험했다. 누군가에 대한 증오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끓는다. 용암처럼 끓는다. 작은 풀뿌리 하나도 사랑해 오던 내 삶을 화옥……, 네가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구나……. 네 몸 하나가 잘되기 위해 너는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자인가……? "용서…… 할…… 수 없다……." 분노는 미칠 듯한 삶의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무류흔은 흙에서 얼굴을 들었다. 선량한 그의 동공 깊숙이 활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 시선은 삶의 한오라기 희망을 잡기 위해 구석구석으로 쏘아져 가기 시작했다. * * * 대저, 인간이 극도의 절망을 만났을 땐 두 개의 반응을 보이게 된다. 그것의 첫째는 절망이 주는 절망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삶과 존재의 회의…… 그리고, 죽을 용기조차 상실하는 무서운 좌절이다. 둘째는 절망이 주는 희망이다. 그것이 절망이기에 한올의 희망은 더 고통스러워지고, 그것을 바탕으로 무섭게 솟구쳐 일어나는 사람. 대다수의 사람들은 첫째 유형에 속한다. 화옥 또한 그런 사람이다. 지혜가 높고 자부심이 강할수록 그 지혜가 꺾이는 순간은 그래서 더욱 무력한 것이므로,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화옥은 무류흔을 자신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화옥은 화옥이고 무류흔은 무류흔이다. 이것은 완벽한 화옥의 최대실책이었다. 제 14 장 사부(師父)여…… ------------------------- 타락의 방법은 여러 가지다. 하나의 흙탕물이 있다고 치자. 그것을 꼭 건너가야 할 필요가 있었을 때 어떤 이는 신발 뒤축도 적시지 않기 위해 발끝으로 걸어갈 것이고, 어떤 이는 아예 첨벙첨벙 그 속으로 걸을 것이다. 전자는 마음이 불안하고 후자는 아예 편하다. 타락도 마찬가지다. 떨어질 때는 밑바닥까지 떨어져야 한다. 우물의 밑바닥에선 위를 올려다볼 수 있지만 우물에 떨어지고 있을 때는 밑이 아직도 더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한 사람, 그는 분명히 떨어질 곳이 없었다. 그는 갇힌 채 자유를 잃었으며 심지어는 몸조차 마음대로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우선 몸이라도 일으키고 싶다고. 그러나 그 단순한 생각은 그에게 결국 자유까지 주었다. 휙---! 쿠당탕! 무류흔은 사납게 바닥을 구른 후 툴툴 웃으며 위를 바라보았다. 하나의 구멍, 그는 그 구멍으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무류흔은 최초 몸을 움직일 공간을 좀 만들려고 했다. 위는 막힌 바위이니 그는 자연 밑의 흙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옥이 남긴 것으로 그 흙을 엎드린 채 파기 시작했다. 파낸 흙은 바위 틈새로 밀어 넣고 또 파기 며칠일까……. 흙은 갈수록 파내기가 쉬워졌으며 어느 정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되었을 때 무류흔은 그 밑에 하나의 딱딱한 돌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일견해 보기에도 그것은 인공 석실이었다. 크게 기뻐한 그는 검과 손으로 돌에 십자의 균열을 만든 후, 사력을 다해 그곳을 내리쳤다. 돌의 두께를 알 수 없는 그로선 상당한 모험이었다. 공력을 소모한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과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칠장째를 때렸을 때 드디어 돌은 밑으로 무너져 내렸다. 무류흔은 싱긋 웃으며 우수에 쥔 단검 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나를 살렸다……. 그건 그렇고 이곳은 어디일까?" 석실은 몹시 비좁았다. 또한, 그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무류흔은 석실의 문을 밀고 나섰다. 밖은 하나의 통로였다. 그는 기분이 내키는 대로 우측을 향해 걸었다. 이곳의 구조는 몹시 단조로웠다. 아마도 단순히 비밀 회담 정도를 하기 위해 만든 곳인 듯, 통로는 비스듬히 위를 향해 뻗어 있었다. 이윽고, 무류흔은 통로의 위를 덮고 있는 하나의 석판을 발견했다. 석판을 밀자 쉽게 열렸다. 위는 또 하나의 석실이었다. 하나, 이곳은 먼저의 석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도록 엄청나게 넓었다. 무류흔은 성큼 올라선 후 주위를 둘러보다가 돌연 어느 한 곳에 시선이 이르자 두 눈에 해연히 놀란 빛을 스쳐 보냈다. 대석실의 중앙, 벽면으로 거대한 불(佛)자가 새겨진 휘장의 아래 자줏빛 포단에는 한 사람이 석상처럼 정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몰골은 심히 해괴했다. 온몸, 심지어는 발바닥까지 남김없이 중요한 혈도 란 혈도 에는 모조리 한 자 크기의 소검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 검이 박혀 있지 않은 곳은 오직 한 곳, 심장뿐이었다. 게다가, 피는 흘러 온 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두 눈은 간데 없이 휑하니 뚫려 있으니 이 얼마나 기이한 모습인가? 이때 돌연, 굳게 닫혀 있던 괴인의 입이 열리더니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누구인가? 이곳까지 쫓아오다니 실로 대단하구나!" 한과 저주에 찬 목소리, 무류흔은 침중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렇게 묻는 귀공은 뉘시오?" 괴인의 얼굴에 의혹의 표정이 스쳐 지났다. "너는 수업자가 아닌가?" 무류흔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무류흔이오." --나는 무류흔이오. 짤막한 말, 그러나 눈길, 괴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꽂혀 있는 검까지 한꺼번에 떨렸다. "무…… 류…… 흔……?" "그렇소." 무류흔은 한 사람의 얼굴이 저토록 많은 표정을 한꺼번에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것은 바로 놀람, 기쁨, 탄식, 회의가 한꺼번에 뒤범벅된 표정이었다. 괴인의 휑하니 뚫린 눈으로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중얼거림……. "아미…… 타불…… 부처님……." 무류흔은 문득 한 줄기 기이한 예감을 느꼈다. "당신은 혹시……?" 괴인은 흐르는 눈물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신성천…… 불이다……." 오오---- 신성천불! 저 해괴한 몰골의 괴인이 바로 그토록 성스럽던 신성천불이란 말인가? 무류흔의 몸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뇌리를 스쳐 가는 말 한마디! --신성천불은 소림 밀교 의 삼십이대 장문인 (三十二代掌門人)이시니…… 그분은 또한 너의 사부……. 무류흔은 온몸의 맥이 쭉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다음 순간, 그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엎드리며 외쳤다. "삼가, 제자 무류흔이 사부를 뵈옵니다!" 괴인은 목이 메여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로구나……. 환상과 주육의 말에 의하면 너는 무척 잘 생겼다고……." 비운의 상봉이었다.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며,가슴속에 숱한 상처만을 끌어안고 만난 두 사제. 좌중엔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바로 그때다. 쿵! 쿵! 돌연 둔음과 함께 주위의 석벽에 수십 개의 문이 스르르 생기는 것이 아닌가? 끼이익……. 끼긱……. 사람의 형상을 한 괴이한 물체들이 느릿하게 걸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물체, 그것은 놀랍게도 동(銅)으로 만들어진 동인들이었다. 그 숫자는 모두 열여섯. 순간, 신성천불의 입으로부터 나직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조심하랏!"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십육동인의 걸어나오는 속도가 급속도로 빨라졌다. 스스슥! 스칠 듯 말 듯 얽히며 각자 우수에 들린 무기들을 휘젓기 시작하는데…… 순식간에, 온 공간은 그들이 휘두르는 각기 다른 무기의 광채로 가득 차는 것이다. 퓨퓨풋! 륜과 봉인가 하면……. 파아앗! 검과 도! 무류흔은 그 중 한 동인의 도(刀)가 급습해 오자 정신없이 몸을 놀렸다. 그러나, 어느새 그의 옷자락은 길게 찢겨 나가고 있었다. 찌이익! 무류흔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 얼마나 빠른 도법인가? 그는 맹세코 이토록 가공할 도법은 본 적이 없었다. 이때, 다시 신성천불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 있으면 죽는다! 빨리 내 뒤로 오라!" 무류흔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날렸다. 그것은 마치 별 사이를 누비는 유성 같은 형상, 하나, 신성천불의 몸 뒤로 내려앉는 그 순간까지 그는 정확히 일검일봉을 맞았다. "욱!" 만약, 신성천불이 검을 내밀어 마지막 일초를 막아 주지 않았다면 그의 몸은 그대로 두 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다쳤느냐?" 무류흔은 허벅지의 상처를 지혈시키며 씩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실로 무서운 수법들이군요. 도저히 피할 길이 없었어요……." 십육동인의 무기는 두 사람이 앉은 곳까진 미치지 않고 있었다. 그것들의 동작은 일견 몹시 난이하게 얽힌 것 같았으나, 자세히 보니 하나 하나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신성천불은 무거운 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저 수법들은 진정 무서운 것이다……. 저것은 바로 본존이 만들어 낸 천 년의 역사……, 하나 지옥관의 삼십육 인은 이미 저것을 배웠다……." 그는 석실 천장을 덧없이 우러르는가 싶더니, 이내 엄숙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류흔, 시간이 없다. 나는 네가 오길 기다리며 스스로 검을 찔러 수명을 늘릴고 있었으니……, 이제 한 자루의 검……, 오직 한 시진이 남았을 뿐이다." "……." "이 시간부터 신성은 무류흔을 소림 밀교 의 삼십삼대 대법사로 명하나니 대법사로 하여금 본존의 비극을 수습하는 무거운 책임을 맡기노라……." 무류흔은 무슨 말인가를 할 듯하다가 나직한 탄식을 터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 시간 이후로 무대법사가 해야 할 일은 이곳에서 저 십육동인을 연구하여 파해식(破解式)을 만드는 것……, 세상으로 나간 삼십육 인은 제각기 하나씩의 기예에 달통했으니 그 중 십육 인의 기예가 저곳에 있다……." "……." "다만 나머지 이십 인의 무예는 어쩔 수가 없구나……. 그것은 나머지 불존육신의 소관이었으나 그들이 죽음으로 하여 이십 인의 무예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이 또한 운명인가……." 이십 인, 이곳에 있는 십육동인의 무예로 보아 이십 인의 무예는 또 어떠하랴! "내가 줄 것은…… 저 십육동인의 무예뿐이다……. 아아…… 무대법사의 짐이 너무 무겁구나……." 무류흔은 짐짓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헛허……." 신성천불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포단 아래에는 천불사당 주위의 진(陳)에 대한 파해도가 있다……. 이곳을 나간 뒤 그곳으로 가서 연화부(蓮花符)와 자청신검(紫靑神劍)을 대법사의 신물(神物)로 삼도록 하라." 이때쯤 십육동인의 동작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일정한 시간 동안 움직이도록 되어 있는 듯, 마침내 동작이 끝나자 십육동인들은 나왔던 문으로 다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그긍……. 키킥---! 이어, 완전히 석벽의 문이 닫히고 나자 이내 주위는 괴괴한 정적에 휩싸였다. 이때다. 돌연, 신성천불의 얼굴에 극도로 괴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으윽!" 무류흔은 크게 놀라 그를 다급히 부축했다. "사부님!" 신성천불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는 바로 죽기 직전에 나타나는 회광반조 (廻光返照)의 현상이 아닌가? "류흔……, 내 부탁을 하나 들어…… 주겠느냐……?" "말씀하십시오." "나중에……." 말은 차츰 잦아들고 있었다. "나중에 화옥을 죽일 때……." "죽일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