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신객 - 12편 (12/36)

2026-09-22 08:27:13 조회 29
종내엔, 그는 자신이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무류흔이 첫날 만쇄오동을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은 꼭 열 시진이었다. 그는 실로 아슬아슬하게 굴이 무너지는 위기를 넘겼던 것이다. 그날, 원래의 굴로 돌아와 지친 몸을 눕힌 무류흔이 막 잠들었을까 싶을 때 자태랑은 사납게 그를 발길로 내질렀다. "두 시진이 지났다! 어서 동굴 속으로 들어가라!" 무류흔은 어쩔 수 없이 졸린 눈을 비비며 또 만쇄동으로 들어서야만 했다. 하루, 또 하루…… 날이 갈수록 무류흔이 굴을 통과하는 속도는 조금씩 빨라졌다. 그에 비례하여, 그가 잠을 자는 시각은 조금씩 많아졌다. 도대체 얼마의 날들이 지난 걸까? 알 수 없다. 이곳에서 시간이란 전혀 무의미한 것이었으니까. 무류흔의 턱에는 수염이 자라고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두세 달쯤이 지났으리라고 짐작했다. 한데, 한 가지 기이한 것은 맨 첫날 보았던 그 기이한 소녀의 환상을 무류흔은 그 후에도 몇 번 더 보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늘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느낌이라고 말한 것은 그것이 한 번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보고 있는 것 같아 황급히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식의 일이었다. 신경과민일까? 어쨌든, 무류흔의 수염이 꽤 자랐을 때, 그는 아예 잠을 자는 시각이 동굴을 통과하는 시각보다 더 많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잘 모습을 비치지 않던 자태랑이 모습을 나타냈다. 무류흔은 자리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모모께서 오셨소?" 자태랑은 말없이 그의 전신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는 한 가지 시험해 볼 것이 있어 왔다." "그게 무엇이오?" 자태랑은 말 대신에 만쇄동과 그 옆의 돌아 나오는 소굴(小窟)을 가리켰다. "이제부터 너는 만쇄동으로 들어가라. 나는 저 소굴로 가겠다. 우리는 서로 맞닿는 끝지점에 누가 먼저 있는가를 시험한다." 말도 안되는 소리, 지옥보다 더한 고통이 도사리고 있는 만쇄동과 아무런 장애도 없는 소굴을 지나는 것이 어찌 시합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무류흔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커다랗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해봅시다." "너는 자신이 있느냐?" "꼭 자신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잖소?" 얼토당토않은 시합은 시작되었다. 자태랑의 신호로 무류흔은 물찬 제비처럼 비스듬한 자세로 만쇄동의 안에 들어섰다. 자태랑은 그 모습을 힐끗 바라보고 난 후, 자신도 소굴의 안으로 몸을 날렸다. 굴의 안은 어둡고도 침침했다. 또한 몹시 낮았다. 그러나, 자태랑에게 어둡고 낮은 것 따위는 하등의 장애도 되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쏘아 낸 화살 같았다. 두 손으로 땅을 번갈아 치며 그녀는 비스듬히 누운 자세대로 바람처럼 굴을 통과해 나갔다. 그런 중에 상념은 그녀의 뇌리에 연신 떠올라 왔다. '공자는 과연 나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까……. 도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극한 체력의 완성이다……. 아아…… 궁주님의 뜻이 헛되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러나, 자태랑은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그녀는 만쇄동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쇄동을 자신보다 더 빨리 통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그녀는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만 마침내, 자태랑은 두 굴이 맞닿는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녀의 가슴은 목적지가 다가옴에 따라 격정으로 마구 끓어올랐다. 이때, 자태랑이 막 쏘아져 나가서 몸을 멈추고 시선을 돌리려 할 때, 한 낭랑한 음성이 그의 귓전에 부딪쳐 왔다. "모모께선 이제 오셨소? 소생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순간, 자태랑의 몸이 한차례 부르르 격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녀는 가슴속으로부터 뭉클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느꼈다. 그녀의 노안에 늠름한 무류흔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얼굴에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쇠침은 내 몸을 뚫지 못했소. 독물은 근처에도 오지 못했으며 불은 미지근했고 얼음은 시원했고 용암은 약간 더운 느낌을 주었을 뿐이외다." 오오 체력! 천 년의 무림사라 하나, 과연 이토록 완벽한 체력을 소유할 수 있었던 자가 있었던가? 수천의 세맥 이 뚫려 피의 순행이 앞뒤로 자유롭고 근육은 부드럽고 강한 수축이완이 마음대로이다. 이것은 백독불침(百毒不侵)이나 금강지체(金剛之體)보다도 한 단계 높은 체력이다. 백독불침은 비록 독이 불침하나 치명적인 약혈을 하나 지니고 있는 단점이 있고, 금강지체는 도검이 뚫지 못하나 화독(火毒)에는 무력하다. 하나 무류흔의 체력, 후세인들이 만류귀종 체(萬流歸宗體)라 이름 붙인 그의 체력은 그런 단점들을 완벽히 보강해 냈다. 순역(順逆)이 자유로운 혈맥은 독을 저절로 순화해 내고, 이완수축이 자유자재인 근육은 어떠한 공력이든 그것이 마공이든 전공이든 무한대로 소화해 낼 수 있는 것이니……. 뿐인가? 그의 가전병(家傳病)은 시한부 생명과 더불어, 상상도 할 수 없는 극한의 총명을 안겨 주었다. -- 만류귀종 체(萬流歸宗體)-- 이것은 무예계의 일대변혁이었다. 그리고 후세의 사가들은 이때를 가리켜 새로운 무예의 장이 열린 것이라고 기록할 지도 모른다. 보는 순간 터득할 수 있고, 터득하는 순간 응용하며,응용하는 순간 새로운 유파의 등장이었다고……. 자태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격정의 가슴을 감추기 위해 황망히 시선을 바꾸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괜찮군……." * * * 상아용봉침대, 자줏빛 휘장에 옥탁(玉卓)과 자단향(紫檀香), 이곳은 여인의 규방이었다. 그것도 침방이었다. 무류흔은 푹신한 교피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한 잔의 술을 음미했다. 그는 이미 열흘 전부터 이곳에 기거하고 있었다. 빙궁주 백유군의 안배였다. 무류흔은 난생처음 같은 나이 또래의 소녀가 지닌 미묘한 심리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는 그 전에도 여러 명의 소녀와 만났다. 보타암(菩陀庵)의 괴이한 오누이 중 셋째인 근지(勤芝), 그녀는 아름답고 총명하지만 너무 신비로웠다. 낙양 (洛陽)의 추상(秋霜), 가장 오랫동안 지낸 소녀지만 그녀는 남성적인 기질이 강했다. 그리고 백유군, 이 소녀는 여인의 도리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감정이 없는 눈빛과 행동은 천하에 있는 자의 속성일 뿐, 한 번 대상을 만나자 그녀의 가슴속 격정은 자신조차 놀랄 정도였다. 그녀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무류흔의 시중을 도맡아 하는 것은 물론, 음식까지도 손수 장만했다. 이렇듯 뿌듯하고 안온한 때가 있었을까? 무류흔은 몸의 건강을 조절하며 낮에는 과거에 알던 무예를 되살리고, 밤에는 백유군과 도란도란 예쁜 얘기를 나누었다. 몸이 편안하면 잡념이 없는 법, 그는 어느샌가 놀랍게도 소림 밀교 의 일까지 잊어버리고 있었다. "타앗!" 눈부신 검기 (劍氣)! 용이 꿈틀거리듯 장엄한 초식! 이것은 천외성전의 첫째 궁주인 천선(天仙) 아랑(娥랑)의 독문절기 천룡대검무(天龍大劍武)다. 무류흔의 몸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이번에는 무기창에서 하나의 봉을 뽑아들었다. 이어, 허공에 현란한 무지개를 그으니, 이는 바로 지선(地仙) 대대(垈垈)의 마라이십구봉법(魔羅二十九棒法)! 연이어, 인선(人仙) 미미(薇薇)의 납풍신화륜(納風新火輪), 뇌선(雷仙) 영영(影影)의 화혼수라수(花魂修羅手)까지 펼치고야 무류흔은 사뿐히 땅에 내려섰다. 천외상전의 무예는 화(華)를 그 원칙으로 했다. 극도의 화려한 초식으로 적의 눈을 흐린 후 그 속에 진초(眞招)가 숨어 있는 것이다. 요즈음 무류흔이 연구하는 것은 소림사 에서 배웠던 주육대사의 천류뇌전 신법 이었다. 그는 이미 이것을 극성까지 연마하였으나 도중에, 이 신법 이 역과 좌우행으로도 바꿀 수 있는 이치를 깨달았다. 그것은 매우 간단한 이치였으나 천류뇌전 역좌우행은 본래의 천류뇌전 보다 열 배는 빠르고 오묘하였으니, 아마도 주육대사가 이것을 보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실신이라도 하였으리라. 형태……, 신법 의 오묘한 도리에 취해 있던 중 무류흔은 문득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느낌! 만쇄동에서도 느꼈던,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느낌…… 이번에는 틀림없었다. '좌삼(左三)의 창(窓)이다…….' 이곳은 궁주의 연공실(練功室)이었다. 무류흔은 짐짓 계속 신법 을 펼치는 시늉을 하다가, 돌연, 퉁기듯 좌측 세 번째 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슈우욱! 와장창! 단언하건대, 그의 신법 은 도저히 더 이상 빠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러나, 허공을 세 바퀴나 맴돌고 땅에 내려선 무류흔으 일종의 허탈감을 느끼고 말았다. 어느 곳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류흔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밖의 바람은 차디찼다. 이곳은 하나의 분지였다. 햇빛조차 떨어지다 온기를 잃고 마는 아득한 계곡, 궁의 얼음바닥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눈, 눈을 보다 무류흔은 문득 동심이 일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모아 눈사람을 굴리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눈사람은 그의 키만한 크기로 굴려졌다. 무류흔은 웃으며 눈사람의 입과 코를 박았다. 눈만 남았다. 근처에서 검은 나뭇조각을 두 덩이 주운 그는 하나를 박고 지그시 물러나서 감상을 한 후 또 하나를 박으려 했다. 바로 그때다. 무류흔은 한쪽의 눈 위에 얼음보다 더 흰 살결의 소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목에 흰 모피를 두른 그녀는 바로 백유군이었다. 제 10 장 오오, 환우오천마(環宇五天魔) ------------------------------------- "유군……." 웃으며 무류흔은 그녀를 불렀다. 백유군은 스르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순간, 무류흔은 가볍게 놀랐다. 그는 백유군이 무예를 사용하는 것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무류흔은 이내 놀란 얼굴을 지우고 웃으며 나뭇조각을 건네주었다. "유군이 박으시오." 백유군은 손을 내밀어 나뭇조각을 받았다. 그녀는 추위를 느꼈던지 모피를 코 위까지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나뭇조각을 눈사람의 눈 위치에다 박았다. 한데, 바로 그때, 무류흔은 백유군의 뒷모습에서 섬뜩한 요기(妖氣)를 느꼈다. '헉!' 무류흔은 소스라치게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 여인은 백유군이 아니다!'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호호호……."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던 섬뜩한 요소(妖笑)를 휘몰고 소녀의 몸이 번쩍 위로 뛰어올랐다. 다음 순간, 그녀가 쓰고 있던 흰 모피가 스르르 풀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무류흔을 향해 쏘아져 왔다. 동시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 오오…… 저것이 도대체 인간의 얼굴인가……, 요귀의 얼굴인가? 긴 머리는 멋대로 풀어 헤쳐져 허공에 날리되 얼굴의 반은 붉고 반은 푸르다. 그 푸른 얼굴은 제멋대로 썩어 들어가 피고름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으니……. 무류흔은 어찌나 놀랐던지 하마터면 날아온 모피에 그대로 얻어맞을 뻔했다. 꽝---! 단 일발의 차이로 그것은 무류흔의 머리 위를 스치고 얼음 속으로 깊숙이 박혀 들었다. 그녀는 빙글 몸을 뒤집더니 재차 공격을 시도해 왔다. 그녀의 우수(右手)로부터 펼쳐지는 공격! 무류흔의 안색이 또다시 홱 돌변했다. 오오…… 그 공격은 바로 그의 넷째 이모인 뇌선 영영의 화혼수라수였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그는 황급히 몸을 날려 간신히 그 일격을 피해 냈다. 빠빠빳! 괴녀는 무류흔이 당황해 하자 허공에 뜬 채 까르르 요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 이어, 또다시 무서운 기세로 쇄도해 오는데, 빌어먹다 환장할! 그 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은 모조리 천외성전의 절기들이 아닌가? 마라이십구봉법을 피하며 무류흔은 탄식을 터뜨렸고, 천룡대검두를 피하며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콰쾅! 일수(一手)를 꼿꼿이 선 채 받아 낸 그, 우뚝 선 입으로부터 벽력 같은 대갈이 터져 나왔다. "요녀! 정체를 밝히지 못할까?" 괴녀는 주춤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자지러지게 웃으며 사나운 기세로 덮쳐 왔다. 그 몸에서 펼쳐지는 것은 여전히 천외성전의 절기들이었다. 무류흔은 검미를 곤두세우고는 번쩍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홀연 흔적 없는 귀영(鬼影)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지럽게 교차하는 발과 발! 바로 천하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천류뇌전의 보법 이 펼쳐진 것이다. 괴녀는 그의 어지러운 신형에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하나 그도 잠시, 두 발을 엇갈려 돌기 시작하는데 그것 또한 무류혼과 똑같은 천류뇌전이었다. 무류흔은 기가 막혔다. 이 괴녀는 그의 마음속 회충이라도 된단 말인가? 정 보법 (正步法)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 창안해 낸 천류뇌전역좌우행을 펼쳐 봐도 마찬가지였다. 괴녀의 발놀림은 오히려 무류흔보다도 더 빨랐다. "오호호……." 그리고 한 순간, 불쑥 솟아 나오는 쌍수! 좌수는 천룡대검무의 비화천룡(飛火天龍)이요, 우수는 파혼수라수의 절혼만화(絶魂萬花)였다. 이토록 절묘한 공격의 배합은 무류흔조차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쌍수는 이미 그의 옷자락에 닿고 있었다. 아련한 통증이 느껴졌다. 실로 필사절명(必死絶命)의 순간, 돌연 무류흔의 뇌리로 한 줄기 영감이 스쳐 지났다. 순간, 그의 우수가 식지와 종지를 합한 채 비스듬히 그어져 내렸다. 마치, 유성(流星)이 떨어지는 듯한 형세! 오오……, 그것은 바로 언젠가 추상을 처음 만났던 북망산 의 천연탑(天緣塔)! 그곳에 새겨져 있던 갑골문 에서 무심히 배웠던 초식이 아닌가? 다음 순간이다. 지금까지 어떤 초식으로도 물리칠 수 없었던 괴녀가 돌연 주르르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얼굴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단숨에 십 장이나 물러났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뚱하더니, 이내, 까르르 요소를 터뜨리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아득한 한 점 흑점으로 변해 사라져 갔다. 무류흔은 그 뒤를 쫓을 생각도 못하고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마치 한차례의 악몽을 꾸고 난 사람 같았다. 휘이익! 이때 돌연, 한 줄기 연기처럼 섬세한 인영 하나가 그의 옆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백유군, 그녀는 장내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과 무류흔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바로 그녀임이 틀림없소. 그 느낌…….. 내가 이곳에 올 때부터 느끼던 괴이한 느낌, 그녀는 바로 그 느낌의 주인공일 것이오……" 방안, 백유군은 다소곳한 태도로 무류흔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의 말이 다 끝나자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보이지 않는 혼(魂)……, 요요(妖妖)를 만나셨군요……." 백유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괴상한 아이지요……. 그것은 십삼 년 전의 일이었어요……." 무저빙궁, 이곳에는 사내가 없다. 후대를 잇는 방법으로 이 여인들은 오십 년에 한 번씩 세상을 나가 어린 여아들을 사거나 데려온다. 이것은 그녀들의 오랜 전통이었다. 한데, 십삼 년 전의 어느 날 궁의 호법 (護法)직을 맡고 있던 설경(雪瓊)이란 미녀 하나가 우연히 한 사내를 알게 되었다. 그 사내는 어디를 어떻게 헤매었던지 상처 투성이의 몸으로 무저빙궁에 들어섰던 것이다. 당시, 순찰을 하고 있던 설경은 은밀히 그를 데려와 자신의 처소에다 숨겨 주었다. 단순히 호기심으로 한 행동이었지만 그 호기심은 이내 사랑이 되고, 설경이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를 깨달았을 땐, 이미 그녀는 아이를 배고 있었다. 배가 부른 여자가 그 사실을 얼마나 숨길 수 있을까? 결국, 이 일은 만인에게 발각되어 숨겨져 있던 사내는 당장 처형이 되고, 설경이 낳은 아이는 아무도 돌아올 수 없는 지옥의 계곡으로 떨어뜨려졌다. "결국 설경은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말았지요……. 한데 그 아이, 지옥의 계곡으로 떨어졌던 그 아이가 십 년 만에 다시 궁으로 돌아온 거예요……. 기적이었지요……. 말도 못하고 인간의 행동이라곤 아무것도 몰랐으나…… 다만 한 가지 그 아이는 기이한 체질로 변해 있었어요." 무저빙궁에선 하늘의 뜻이라 하여 십 세의 어린 소녀를 맞아들였다. 한데, 이 어린 소녀는 그로부터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랄 일을 벌였으니, 말이라곤 전혀 모르던 그녀가 어느 날 느닷없이 말을 시작했다. 크게 놀란 여인들은 그런 그녀를 추궁하다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알아냈다. 요요(妖妖), 그녀는 남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그것을 완벽하게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뿐인가? 행동이며, 예절 같은 것도 먼발치로 보고는 그대로 따라 했으며, 더더욱 놀라운 것은 어떤 무공이든 보는 즉시 익혀 버린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러나, 요요의 무공은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본궁의 일류고수급이 되더니…… 지금은 거의 따라갈 사람이 없어요……." 지옥의 환경, 유황과 뜨거운 모래……, 아수라의 폭열이 들끓는 그 환경이 소녀에게 그토록 신비로운 힘을 선사한 것일까? 그로부터, 빙궁의 여인들은 요요의 앞에선 행동을 꺼리게 되었다. 무공도 함부로 펼치지 못했으며 말도 감추어야 했다. 요요는 아직 선악을 모르고 있었다. 그토록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그녀가 만약 세상에 나가 악을 배우고 그 악에 물들어 버린다면…….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 우리 모두는 그 아이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말을 마친 백유군은 스르르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의 옷장문을 열었다. 옷장, 그 안에는 수백 벌의 옷이 들어 있었다. 한데, 그 옷들은 기이하게도 똑같은 모양의 것으로 두 벌씩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아한 표정의 무류흔을 향해 백유군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요요는 흉내내기를 좋아해요……. 제가 옷을 입으면 꼭 따라 입으려 하지요……. 이 중 반은 바로 요요의 것이에요." * * * 밤, 무류흔은 침상에 홀로 정좌하고 있었다. 이미 야심한 시각인데도…… 그는 정좌한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심사일까? 바로 그때다. 무류흔의 짙은 검미가 꿈틀했다. 거울, 정면의 거울,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던 그 거울이 갑자기 흐려지는가 싶더니 대신,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여귀의 얼굴이 나타났던 것이다. 여귀는 정면으로 무류흔을 바라보며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무류흔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는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요요, 이리 오너라." 여귀는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어,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이더니 사르르 꺼져 버렸다. 무류흔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조용히 그녀를 기다렸다. 그는 호기심 많은 요요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돌연 탁자에 켜 놓은 홍촉 불빛이 스르르 일어나는가 싶더니 또다시 그 속에서 요요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더더욱 흉측스런 모습이었다. 무류흔은 씩 웃으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는 단순히 호의에서 한 행동, 하나 요요는 무류흔이 자신을 공격해 오는 것으로 알고 훌쩍 몸을 날렸다. 화르륵……. 불을 타고 쭈욱 솟구쳐 올랐다가 다시 연기처럼 사라지는 그녀, 그러나 이번에는 무류흔도 가만 있지 않았다. 요요가 한 번 보고 모든 것을 터득해 내는 신비로운 체질이라지만, 그 또한 지상최강의 체력에 신비로운 두뇌를 지니고 있는 몸이 아닌가. 요요의 몸놀림을 이미 여러 차례 본 그는 대강 그녀가 펼치는 신법 을 짐작할 수 있었다. 팍---! 다음 순간, 그의 몸 또한 침상을 박차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무영분광(無影分光)이라고나 할까? 무류흔은 단숨에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릿한 한 줄기 백영(白影)이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즉시 대붕처럼 몸을 틀어 그 뒤를 쫓았다. 하늘엔 별빛, 그 별빛 아래 도저히 인간이라곤 여겨지지 않는 극한의 빠름, 둘. 요요는 성벽을 기고 분지 서쪽의 절벽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지옥의 계곡, 그곳은 바로 빙궁의 여인들이 지옥의 계곡이라 부르는 사지(死地)가 있는 곳이었다. 번쩍! 요요의 몸은 그 속으로 빨리듯 사라졌다. 무류흔은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우뚝 몸을 세웠다. 계곡, 그곳에선 매케한 유황연이 자욱이 피어 올라오고 있었으며, 아무리 시선을 집중시켜 봐도 그 아래는 보이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질식하고도 남을 유황연, 그러나, 만쇄동에서 단련을 한 무류흔은 한 올의 망설임도 없이 밑으로 뛰어내렸다. 슈우욱! 매케한 연기가 그를 덮쳐 왔다. 무류흔은 공력을 일으켜 최대한 몸을 가볍게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래쪽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밑은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사지, 계곡 밑은 온통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다. 다만, 좌측의 한 부분만이 유일하게 공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허공 중에서 몸을 비틀어 사뿐 그 위로 내려섰다. 요요는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