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신객 - 11편 (11/36)

2026-09-22 08:27:13 조회 30
빙궁주 백유군은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두 손을 허공을 향해 쳐들었다. 그렇게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돌연 그녀의 머리 위로 하나의 영환이 스르르 피어올랐다. "석조대법(石操大法)" 다음 순간, 한소리 청아한 교갈에 이어, 그녀의 옥수가 두 번째 제단의 사십일 호 석상을 가리켰다. 찌잉! 뒤편을 향하고 있던 석상이 미친 듯 회전하더니 무류흔을 향했다. 동시에, 느닷없이 석상 머리 위의 뿔로부터 두 개의 금침이 쏘아져 나왔다. 슈욱! 팍! 팍! 금침들은 정확히 무류흔의 소개(蘇蓋), 인정(仁頂)의 두 혈도 를 파고들었다. "윽!" 무류흔의 검미가 가볍게 찌푸려졌다. 빙궁주 백유군은 재차 소맷자락을 너울거리며 이번에는 사십 번째 계단의 백구 호 석상을 가리켰다. 찌잉! 똑같은 과정, 두 개의 금침은 또다시 무류흔의 중정 (中庭), 미해(微海)의 혈을 파고들고…… 기이한 수술이었다. 빙궁주의 손짓에 따라 수천 개의 석상들은 빙글빙글 회전하며 마구 금침을 쏘아내고……. 삽시간에 고슴도치가 된 무류흔은 치미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 입술을 악다무니……. 아아…… 그것은 실로 무서운 고통이었다. 퍽! 팍! 하나의 금침이 꽂힐 때마다 몸의 모든 세포들은 발악하듯 고통을 호소하며 날뛰었다. 뿐인가? 그것들이 꽂히며 형성된 기이한 한 줄기 기운은 짐승의 발톱처럼 몸 내부를 사정없이 할퀴고 드니, 창자가 부서지고…… 뼈가 소리내며 으스러진다. 어찌나 극심한 고통이었던지,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무류흔은 이것이 고통인지 아닌지, 괴로운 것인지 아닌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퍽! 팍! 파팍! 백유군의 우윳빛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있었다. 한차례의 시술이 있을 때마다 그녀의 머리 위에 뜬 환은 조금씩 그 부피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것은 극심한 내력(內力)의 소모 현상, 그러나 그녀는 잠시도 손을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진기 의 역류로 두 사람은 다 죽고 말 것이다. '두렵다…….' 그녀는 지금까지 시술을 하며 이런 공포를 느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손이 저려 왔다. 하나 다음 순간, 그녀는 세차게 머리를 내저으며 또다시 힘차게 쌍수를 흩뿌려 냈다. 찌잉!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대전 안에 있던 수천 개의 석상은 거의 다 무류흔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다. 무류흔의 몸은 그대로 금침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도 더 이상 금침을 꽂을 곳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백유군은 쓰러지려는 몸을 옥좌에 기대어 간신히 지탱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그러나 눈앞이 뿌옇게 흐려 오고 있었다. 무류흔의 몸이 두 개, 세 개로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사력을 다해 마지막 일수를 쳐냈다. 찌잉! 석상의 몸이 빙글 회전했다. 솟아 나오는 힘! 하늘이여…… 팍! 팍! 금침이 꽂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백유군의 귓전에 울려왔다. 하나 그 순간, 백유군의 창백한 얼굴에는 배시시 웃음이 피어올랐다. '성공이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아득한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쿠당탕! 킁! * * * 무류흔은 부시시 눈을 떴다. 먼저, 물방울이 맺힌 습기 축축한 동굴의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몹시 의아해졌다. '나는 어찌하여 이런 곳에 있을까? 나는 분명히…….' 불현듯, 그의 뇌리로 수천 개의 석상이 놓인 대전과 자신을 향해 쏘아 오던 금침, 그리고 백유군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이때 돌연, 억양이라고는 담겨 있지 않은 냉담한 음성이 무류흔의 귓가에 부딪쳐 왔다. "너는 이제 일어났느냐? 정신이 들었으면서도 그렇게 누워 있기만 하다니 참으로 게으른 아이로구나." 무류흔은 느닷없는 음성에 놀라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정신을 잃는 순간에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지만…… 지금은 어디 한 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라고는 없었다. 무류흔은 사지를 가볍게 움직여 본 후,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노파, 어둑한 동굴의 한쪽에는 냉막한 표정의 노파가 한 명 앉아 있었다. 돌로 만든 살과 쇠로 빚은 심장이라도 지니고 있는 것일까? 무심하기 일를 데 없는 표정, 그녀는 바로 문관을 지키던 수궁빙모 자태랑이었다. 그녀는 무류흔이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냉랭한 코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궁주님의 석조대법으로 하여 너는 지금 일천의 세백이 모두 뚫린 상태다. 남은 것은 그 세맥 들을 물리적으로 단련시키는 일 뿐…… 너는 이 치료들이 힘겹다는 말을 들었겠지?" "들었소." "너는 죽을지도 모른다." "각오하고 있소." 자태랑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음식이 잔뜩 놓여 있었다. "너는 우선 저것을 먹고 시장기를 채우도록 하라. 저것은 이제 네가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이 될 것이다." 무류흔은 그 말을 듣고 나자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그는 노파를 향해 가벼운 포권지례를 취한 후 음식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조금씩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말고 문득, 그의 시전이 자태랑을 향했다. "궁주는 어찌되셨소?" 자태랑은 싸늘한 냉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알려 할 것 없다. 다만 너는 그분의 성정을 새각하여 이 일을 틀림없이 성사시키도록 노력하면 된다." 성정(性情), 자태랑의 이 말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그러나 무류흔은 무심히 넘기고 말았다. 하루의 시각이 지난 후, 동굴 바닥에 희미한 여명의 잔광이 스며들 무렵 자태랑은 무류흔에게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던 무류흔은 가볍게 놀랐다. 버섯! 그것은 분명히 버섯이었다. 하나, 어찌나 큰지 사람의 키만 했으며 그 머리 부분에서는 우윳빛깔의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너는 저것을 먹도록 해라. 그 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 알겠느냐?" "저 액체는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오, 모모?" 무류흔의 말에 자태랑은 양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한 가지 말해 두겠거니와 너는 이곳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듣지 말고 아무것에도 의문을 갖지 마라. 이유는 없다." 이어, 자태랑은 힐끔 무류흔을 바라보고 난 후 입을 열었다. "저 굴의 이름은 만쇄동이라 한다. 저 안은 다섯 개의 소굴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 자세한 내용은 이곳에서 설명하지 않겠다. 다만 너는 앞으로 하루에 한 번씩 저 속을 들어갔다 나와야 한다." "……." "만쇄동은 너에게 욱체적인 고통을 줄 것이다. 그것은 때론 너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기도 하리라. 그러나 각 굴의 끝에는 그 굴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약이 있으니 너는 그것을 바른 후에 다음 굴로 들어가도록 해라." "겨우 두 시진……." "나는 네가 굴을 통과하는 시각이 갈수록 짧아져서 많은 짐을 질 수 있게 되길 빌겠다. 단, 네가 만약 각 굴에서 두 시진 이상을 머물게 된다면 만쇄동을 저절로 무너져 너를 매장시키게 된다. 이 점을 명심해 두도록." 무류흔은 입술을 한일 자로 굳게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쇄동, 이 신비하고도 기이한 굴은 공포스럽게도 그 아가리를 딱 벌리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언뜻 피비린내가 풍겨 나는 것도 같았다. 바로 그때다. 슈파앗! 한 인영 하나가 만쇄동의 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은, 언뜻 스쳐 지나서 마치 환상 같은 모습이었으나…… 그것은 몹시 아름답고 귀여운 소녀의 모습 같았다. 그러나 무류흔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간이라면 그렇게 빠를 수가 없다. 나는 헛것을 본 것이리라……. 제 9 장 만쇄동부(萬碎洞府) -------------------------- 무류흔은 허리를 바짝 굽혀 땅에 바짝 엎드리다시피 한 자세로 만쇄동의 안으로 들어섰다. 팔굽과 무릎만으로 기기 반 각 가량, 문득 그의 시야에 혈사동(血梭洞)이란 글자가 쏘아져 들어왔다. 동굴 안은 어두웠다. 눈앞에 내민 다섯 손가락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으나 글자의 위엔 조그마한 야명주(夜明珠)가 하나 박혀 있었던지라 무류흔은 그것을 능히 알아볼 수 있었다. 동굴은 거기서 막혀 있었다. 무류흔은 두 눈에서 이채를 번뜩이며 시선을 집중하여 막힌 벽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과연, 혈사동이라 쓰인 글자의 옆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돌출부 하나가 있었다. 무류흔은 망설임없이 그것을 눌렀다. 그그궁……. 순간, 마찰음과 함께 벽면이 스르르 좌측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어, 만쇄동의 제일굴인 혈사동의 모습이 시야에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무류흔은 순간 극도의 경악으로 하여 두 눈을 부릅떴다. 보라! 혈사동. 이름 그대로 이 혈사동은 온통 뾰족한 철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닥도, 천장도, 벽면까지……. 모조리 한 치 정도 크기의 침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저 위로 기어간다면 그 사람의 몸은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지리라. 아니, 채 반도 기어가기 전에 철침이 몸을 찔러 드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기절이라도 하게 되리라……. 혈사동의 끝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무류흔은 이 어이없는 상황에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가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잠시 망설이던 무류흔은 이윽고 입술을 질끈 깨물고 느릿하게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푹--- 팍---. 순간, 바닥에 꽂혀 있던 철침들이 사정없이 그의 팔과 다리를 쑤시고 들어왔다. "으윽!" 그 고통은 지독했다. 연약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이 어찌 한두 개도 아닌 수십 개의 철침이 찔러 대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으랴! 무류흔은 섬뜩한 고통이 전신을 휘몰아쳤으나 이를 악물고 손발을 움직였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꽂혀 드는 철침과 철침들……. 차라리 그 고통은 죽는 것이 나을 듯한 느낌까지 불러일으켰다. 하나, 무류흔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망설이거나 고통에 못 이겨 비명을 내지르거나 하지도 않았다. 충혈된 눈, 산발된 머리, 치아는 고통을 견디느라고 입술을 꿰뚫고 파고들었다. 그는 그런 처참한 모습으로 묵묵히 손발을 움직일 뿐이었다. 피…… 피가 흐른다. 쇠침이 꽂히고 또 뽑힐 때마다 뿜어나는 피는 빽빽한 쇠침의 사이에 찰랑찰랑 고여 들었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그가 기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 것이 아닌가! 퍽! 퍽! 어쩌다 잘못 찔린 쇠침이 그의 무릎뼈를 헤집어 쑤셨다. 또한 어떤 철침은 피투성이의 그의 살갗을 너덜거리도록 찢어발겼다. 하나 무류흔은 목속인간 같았다. 고통, 아픔……, 그런 일체의 감각을 전혀 느낄 줄 모르는 듯, 아니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그의 얼굴은 무심하고 더욱더 냉막해져 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류흔은 자신이 혈사동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한 시진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또는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느끼기에 꽤 오랜 시각이 지난 것도 같았다. "아무것도 분명한 것이라곤 없군……. 그러나 꼭 한 가지가 있지. 아직 두 시진은 지나지 않았다는 것, 그렇지 않다면 이 굴은 박살이 났을 테니까." 동굴 안은 몹시 어두웠다. 그러나 어디에서 스며들어 오는지 아주 희미한 잔광이 있었다. 때문에 무류흔은 간신히나마 자신의 주변쯤은 살펴볼 수 있었다. "……." 사투, 혈사동을 기어가는 고행은 그야말로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사투였다. 지독스런 어둠과 끔찍스런 고통과 그리고…… 아직까진 없었으며 절대 앞으로도 없을 자기자신과의 거대한 투쟁인 것이다. 이때 돌연, 나직이 중얼거리던 그의 두 눈에 쇠침이 없는 밋밋한 동굴통로가 쏘아져 들어왔다. "하하하하하----!" 순간, 무류흔은 더할 수 없이 통쾌하여 크게 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기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으며 그는 잠깐 사이에 지옥과도 같았던 쇠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철침으로부터 무릎을 뽑아 내는 순간, 그는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그의 바로 코앞, 아마도 상처를 치료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 병의 약병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쿠르르릉……. 굴의 문이 열리자마자 먼저 지독한 악취가 자욱이 번져 나왔다. 무류흔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조심스럽게 굴 안을 둘러보았다. 있었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 무언가 잔뜩 꿈틀거리고 있었다. 무류흔은 처음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의 모습이 확인되는 순간, 부르르 그의 몸은 짧은 경련을 일으켰다. 독물(毒物), 놀랍게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은 하나같이 극독을 지닌 독물이었다. 핏빛 몸체에 등에 가느다란 금선이 그어진 금선사 (金線蛇)를 위시해서 운남 (雲南)이나 남황 (南荒)에서나 볼 수 있는 어른 주먹만한 인면지주 (人面蜘蛛), 길이가 일 장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지네와 그 외에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희귀하고도 독랄한 독물들이 바닥 위에 즐비하게 널려 있지 아니한가? "맙소사……. 일생에 한 번 보기도 힘든 저 독물들이 이곳에는 아예 바닷가의 모래처럼 널려 있군……. 내가 만일 저곳을 지난다면 반도 가기 전에 몸이 녹아 없어질 거다." 하나! 무류흔은 독백과 달리 몸은 이미 안으로 성큼 들어서고 있었다. 이 굴 역시, 천장은 몹시 얕고 양쪽 벽면 또한 좁기 이를 데 없었다. 독물들은 그가 들어서자 괴이한 괴성을 지르며 벌떼처럼 그에게 덤벼들었다. 순간, 왁 하고 코끝으로 끼쳐 드는 비릿한 내음, 무류흔은 구토라도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느릿하게 기어가기 시작했다. 먼저, 시뻘건 눈을 가진 금선사 가 그의 땅을 짚은 팔굽을 사납게 물어뜯었다. 찌르르한 아픔과 함께 어찔어찔한 현기증이 무류흔의 뇌리를 메이리쳐 왔다. 동시에, 인면지주 를 비롯하여 지네, 독거미, 불개미 등이 사정없이 그의 몸위로 기어올라 물어뜯기 시작했다. "으윽……." 무류흔! 신음을 내지 않고자 이를 악다물었건만 그의 이빨새로 신음은 끔찍스럽게 새어 나왔다. 그의 느릿하게 기던 몸이 일순간 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전신을 회오리쳐 오는 삼엄한 고통과 퍼지기 시작한 독이 그의 기력을 모조리 뺏아갔던 것이다. 독물들은 그가 쓰러지자 더욱 기승스럽게 물어뜯어 왔다. 끼이끼……. 물리고 찢겨진다. 금방 피고름이 맺히고 역겨운 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실로 가공스런 맹독에 무류흔의 살은 즉시 썩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 돌연, 무류흔의 혼미한 뇌리에 모친, 화선 소소의 모습이 떠올라 왔다. 십만대사의 정상에서 겪던 그 처절한 고독의 날들……, 그리고 삶과…… 사랑과…… 고뇌의 청춘들……. 그 많은 생각들은 한가지로 귀결되었다. 투(鬪)! 싸워야 한다! '안돼. 쓰러질 수 없다. 무류흔아, 무류흔. 네가 그 처절한 고독을 잊지 않았다면 일어나라! 일어나라, 무류흔!' 마음속의 격렬한 부르짖음이 끝나는 순간, 무류흔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벌떡 자리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이어, 미친 듯이 굴의 끝쪽을 향해 기어갔다. 놀랍게도 그의 기는 속도는 평상시에 그가 뛰던 속도보다도 더 빨랐다. 반 식경이나 지났을까? 돌연, 미친 듯이 기어가는 무류흔의 몸에 달라붙어 피와 살을 쏘아 내던 독물들이 괴성과 함께 다투어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왔던 길을 줄행랑쳤다. 무류흔은 의아한 마음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다보았다. 그로부터 일 장 밖. 그곳엔 색깔도 선명한 한 자 가량의 홍색 풀이 요염하게 돋아 있었다. 무류흔은 일견하는 순간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만해영지(萬海靈芝), 그것은 바로 전설지초(傳說之草),만해영지였다. 이 천세만고의 영초의 잎 한 조각만으로도 만 마리의 금선사 독(金線蛇毒)을 능히 해독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가 이 화마동부의 바닥에서 펄펄 끓어오르고 있는 거센 불길은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무류흔, 그는 한동안 살펴보아도 영문을 알 수 없자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진정 이 화마동부란 곳은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구나. 저 화기만 해도 기름이라거나 나무 같은 연소체도 없이 그냥 타오르고 있지 않은가……. 돌에서 불길이 솟아난다는 얘기는 비단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듣지도 못했던 것이로다.' 불길의 세기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그것은 도저히 일반 불길과는 그 류(類)가 틀렸다. 무류흔의 몸에 난 털이란 털은 화마동부의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몽땅 재가되어 사라졌다. 또한 그 불에서부터 피부를 통해 스며드는 열기는 마치 수만 마리의 개미가 일제히 물어뜯 듯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무류흔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뒤로 물러서고픈 충동을 느꼈다. 보아하니 이 만쇄동이란 곳은 들어가면 들어갈 수록 그 고통 또한 배가되는 곳 같았다. '아아……, 이제 겨우 삼굴을 들어섰을 뿐이련만……. 아직도 이보다 지독한 고통이 도사리고 있을 굴은 두 개나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간다. 가자! 여기서 주저앉는다면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말리라!' 살을 녹이고 피를 말리는 화염, 그 불길 속을 무류흔은 신들린 듯 기어 지났다. 그의 온몸은 화기로 인하여 온통 물집이 생기고 또 터지고 하였지만 무류흔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굴의 끝에는 보나마나 상처를 치료할 영약이 있으리라. 상처는 그것으로 하여 또다시 깨끗하게 치료가 될 것이다. 문제는 이 고통을 인내할 수 있는 그의 의지에 달려 있을 뿐이었다. 갈수록 태산 이라더니 살을 태울 듯한 화염지옥을 통과하자 이번엔 또 한기가 골수까지 파고드는 얼음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굴을 들어선 지 반 각도 되지 않았는데 그의 손발은 벌서 차갑게 얼어 오고 있었다. 감각을 상실한 것은 이미 오래, 무류흔은 몇 번씩이나 그 자리에 쭉 드러누워 버리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의 마음 한구석에선 그의 의지를 비웃는 외침이 마구 솟아올라 왔다. 바보 같은 놈! 그 자리에 그냥 누워 버려라. 그것으로 이 모든 고통은 끝나는 것이다. 너는 괜한 고통을 겪고 있는 거야. 자, 어서 누워 버려라. 너는 잠을 푹 자고 싶지 않으냐? 무류흔……, 무류흔……. 몸은 마치 물먹은 솜처럼 흐물흐물해지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뇌리에 떠오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영원히 휴식하고 싶은 욕망과 그 반대의 생각, 이 두 가지의 사념만이 그의 뇌리를 번갈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득히 먼 시간이 지나갔다. 두 시진이면 굴은 무너져 버리고 만다고 했지만 무류흔이 느끼기엔 마치 한 시진이 아니라 억겁 의 시간이 지난 것만 같았다. 돌연, 거의 무의식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이고 있던 무류흔의 새파랗게 질린 입술 새로 처절한 신음성이 흘렀다. "버틸 수 없어…….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 신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 그는 머리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그 자리에 털석 쓰러졌다. 몽롱해져 가던 의식과 몸의 모든 세포는 그 순간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굴은 이미 끝나 있었다. 무류흔은 굴의 막다른 벽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다. 만쇄동을 만든 사람은 그 머리가 지극히 총명한 자이거나 미친 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무류흔은 문득 했다. 용암! 유황굴은 둥근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용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뜨거운 기운은 그가 이미 거쳐온 화마동부보다 열 배 백 배나 더하며, 또한 용암은 어떤 물체라도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린다는 것을 무류흔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녹아 버린 몸은 어떠한 영약으로도 회복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곳을 지난다는 것은 불가능해……. 이 굴을 건축한 사람은 이것도 계산해 놓지 않은 걸까?" 그때 돌연, 나직이 중얼거리던 그의 시야에 조그만 쪽지가 쏘아져 들어왔다. 쪽지의 한 옆엔 붉은 환약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세상엔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일도 많지만 이 금강환도 그 중의 하나였다. 돌을 녹이고 쇠를 녹이는 용암도 금강환을 입에 문 무류흔의 몸만은 녹일 수 없었던 것이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용암의 열기는 무류흔이 지금까지 겪어온 어떠한 고통보다도 더 처절하며 독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예 고통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만약, 지금의 무류흔이 겪고 있는 상황을 고통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행복하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몸은 녹지 않으나 무류흔은 육신이 조각조각 녹아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살과 뼈와, 내장과 심장과, 그리고 마음과 영혼까지도 불에 얼음녹 듯 사그라지고 있었다. 무류흔은 비명을 토했다. 그러나 그 비명은 소리가 되어 나와 주지 않았다. 그는 기고 있었지만 지금 자신이 기고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다가 엎어지기도 했다. 엎어질 때마다 그의 머리까지 이글거리는 용암 속에 처박혀 들었다. 그때마다 그는 용암의 감촉이 차가운 것인지 뜨거운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