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객 - 8편 (8/36)
당시, 달마 에 이어 제이대 소림 방장 을 맡고 있던 광원대선사는 그 모습을 보고 탄식을 터뜨렸다. "액겁의 시작이로다……." 하나, 그 후로 어디에서도 광운상인이나 그를 추종하던 소림 밀교 를 보았던 사람은 없었다. 무슨 연유인지, 그들은 씻은 듯 무림에서 그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아아…… 소림 밀교 ! 이것이 천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다시 모습을 나타낼 줄이야……. * * * 어둡다. 그리고, 그 어두운 곳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한 곳이라는 것을 아는 시각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류흔은 눈을 떴다. 그리고, 격렬한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음……." 어ㄷ게 살아났는지는 모르나 떨어질 때 충격이 그의 고질을 건드린 것이리라. "콜록…… 콜록……." 틀어막은 손가락 새로 사르르 번져 나오는 핏물, 그 옆에는 추상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도 무류흔이 계속 기침을 하는 것을 보긴 보았다. 그러나, 피까지 토하다니……. 오랜 후에야, 무류흔의 심한 각혈은 그쳤다. 그는 핏기라곤 없는 창백한 얼굴을 추상의 가슴에 기대며 툴툴 웃었다. "놀랐는가……?" 추상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별것 아니지……. 몸이 약한 탓이오.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디요?"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 추상은 씁쓸히 웃으며 묻기를 단념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은 주위를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자신이 앞을 내다볼 수 있을 정도의 어둠과…… 수목, 그밖의 살아 있는 생물체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는 곳, 바닥엔 허연 모래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약간을 찍어 맛을 본 추상이 고개를 저었다. "왕소금이에요. 온 바닥이 다 소금으로 덮여 있어요." 기이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의 어둠에 눈을 익혀 주위를 살펴보자니, 이 황량한 계곡엔 그들말고도 무수한 소년들이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다. 그 수는 거의 일천에 다다라 보였다. 그들은 제각기 앉거나 눕고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무기력해 보였다. " 소림사 에선 도대체 무슨 짓을 하라는지 알 수 없군요. 새도 날아오르기 힘든 이 계곡 안에서 모조리 굶어 죽으란 말인가?" 이때다. 돌연, 소년 중 하나가 근처의 높은 바위 위로 올라서더니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제현들은 잠깐 소생의 말을 들어 보시오!" 주위의 시선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쏠렸다. "소생은 이번 일이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하오. 소생은 본래 양강현(陽剛縣)의 본 초(本草)라는 사람으로서 한 장의 파화편지를 받고 이곳 소림사 로 온 바, 하는 일없이 공양을 받다가 오늘 아침 느닷없이 이곳으로 떨어지게 되었소." 소년들은 일제히 외쳤다. "우리들도 그렇소이다!" "소생은 본시 소림 에서 전인을 맞아들이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소. 한데 이곳은 보아하니 굶어 죽기 딱 좋은 곳이며 안내인조차 없으니 제현들은 이 일을 어찌 생각하시오?" 바로 그때, 이번에는 화복(華服)을 걸친 미소년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기이하도록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투명한 얼굴이며, 미간에 붉은 홍점 하나가 뚜렷한 그는 뭇 소녀들이 한번만 보아도 오줌싸기 알맞는 절세의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본초형의 말씀이 심히 옳소. 소생은 화옥(華玉)이라 하며 이 일은 소생이 보기에 제자를 맞아들이기 위해 소림사 에서 준비한 일종의 시험이라고 보오." "시험……?" "그렇소. 생각건대 이번 소림 의 집제(集弟)는 천 년래로 없던 일로써 극비리에 행해졌으며 또한, 중원의 특수한 인재들을 망라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오. 그 좋은 예로 소림 은 여자는 받아 들이지 않는 천년금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상당수의 여자들이 있소." 과연, 천여 명의 소년들 중에는 상당수의 소녀들이 끼어 있었다. " 소림 에선 아마도 이번 시험을 통해 이 중에서 소정의 인원들을 선발해 낼 생각일 거요." 듣고 있던 추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화옥이란 자는 머리가 꽤 좋은 친구인 것 같아요. 그의 어투에는 또 듣는 이의 마음을 잡아끄는 기이한 힘이 깃들여 있군요……." 이때 돌연, 어둠 속에서 솟아 나오듯 온통 흰 빛 일색인 소녀 하나가 바위 위로 올라섰다. 그녀는 희었다. 옷도 희고, 살결도 희었으며 눈자위 또한 백설처럼 희었다. 그래서, 더 검고 영롱한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저는 유혜(劉惠)라 해요. 화옥형의 말은 틀림없다고 봐요. 혹시 여러분들은 몸의 진기 를 끌어 올려 봤나요? 우리는 이곳으로 떨어진 후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모종의 안배에 의해 모두 진기 를 잃었어요." 순간, 많은 소년소녀들이 대경실색하여 황망히 진기 를 끌어올려 보았다. 돌변하는 표정들, 그렇다. 그들의 몸에는 한 올의 진기 도 남아 있질 않았다. 그것은 추상 또한 마찬가지,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돌중들을 그냥……!" 백의소녀 유혜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결국 이것은 소림사 가 만든 관문임에 틀림없어요. 우리는 그들로부터 한 마디 언질도 듣지 못한 채 시험을 당하고 있어요." 순간, 천여 명의 소년소녀들은 분노하여 외쳤다. " 소림사 는 사람을 기만하고 있다!" "우리를 밖으로 내어 보내 달라!" 험악한 기운이 공간을 맴돌았다. 그것은 눈 깜짝할 새에 전체의 마음을 휘어잡았으며, 마치, 금방 터져 오를 화약처럼 모두의 가슴은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다. 한 소리, 물처럼 고요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발작적으로 시선이 돌려지는 곳에 한 소년이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형용할 수 없이 단아한 기풍, 그는 바로 무류흔이었다. "시험이든 관문이든…… 우리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한 것……, 한 세계가 창조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아픔이 따르오." 웃으며 말하고 있었으나, 그러나, 그 속에서 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것은 사내의 장대한 기품. "전체의 단면을 보기도 전에 일을 그르칠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굶든 굶지 않든 소림 은 나름대로의 방도를 취해 올 것이오. 이미 온 이상……, 우리는 이 세계의 법도를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오." 주위가 일시에 고요해졌다. 한 치의 어김도 없는 말. 화옥과 은혜는 서로를 마주본 후 말없이 바위를 내려섰으며, 본초는 해벌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소년소녀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주위는 이내 본래의 정적을 되찾았다. * * * "최초의 평점 결과는?" "구장로의 협의 결과 무류흔이 구 점 만점으로 단연 선두이고 본초와 화옥, 유혜가 오 점씩, 나머지는 기본점수인 일 점씩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흐흠…… 평점 방법은?" "적응력, 지도력, 인내력, 사고력, 창의력, 웅변력, 용력, 골격의 아홉 단계로 나누어지며……." "……." "각 단계당 구 점을 만점으로 하여 구구는 팔십일, 총 팔십일 점 만점으로 평점을 합니다." "이 다음 단계는?" "골격과 인내력입니다……." * * * 입곡(入谷) 열흘 째, 열흘, 굶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소년들에게는 닷새째 되던 날부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살려줘…… 아아…… 살려줘!" 허기를 못참아 바닥에 깔린 소금을 집어 먹었다가 입 안이 온통 헐어버린 소년 하나가 부르짖는 것을 필두로, 수십 명의 소년들이 거의 광적으로 발작을 했다. 그들 중에는, 바위에 머리를 부딪고 의식을 잃은 자부터 시작해서, 허기의 고통을 자신의 몸을 쥐어뜯음으로서 상쇄시키려는 자, 울부짖다 울부짖다 혀를 깨물은 자 등, 그야말로 천태만상의 몰골들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모두가 허여멀건한 얼굴을 지닌 부유해 보이는 소년들이라는 것이다. 굶어본 적이 있을 턱이 없으며, 아마도, 입에 맞지 않은 반찬이 나오면 아예 밥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그런 소년들, 소림 입문을 나들이 정도로나 생각했을 그들의 고통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누구든 그렇게 울부짖거나 발작을 하고 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은 남아 있는 소년들에게 자욱한 공포심을 일으켰다. 입곡 열닷새째. 또다시 발작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이유없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움츠리고 있던 소년들의 차례였다. 그들은 광적으로 날뛰었다. 그 중 어떤 자는 정신착란을 일으켜 바위를 송두리째 깨무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다수가 또 사라졌다. * * * "평점은?" "믿을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 "무류흔입니다." 무류흔은 제 오단계 합산 사십오 점! "오단계까지…… 만점……?" "그렇습니다." "오오…… 기적 같은 자질이 아닌가…… 그밖에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 오단계 합산, 화옥(華玉) 이 사십일 점, 유혜(劉惠)가 삼십팔 점, 추상(秋霜)이 삼실팔 점, 검우(劍雨)가 삼십칠 점, 금적해(金積海)가 삼십칠 점, 무비(無臂)가 삼십오 점, 공족(空足)이 삼십오 점, 천맹(天盲)이 삼십삼 점, 본초(本草)가 삼십이 점. "이상이 삼십점 이상의 고점자들이며, 이 중 화옥은 최초의 적응력 외에는 모조리 만점입니다. 또한 검우란 소년은 인내력에서, 금적해는 웅변력에서 각기 만점입니다." "아미타불…… 굉장한 자질들이로다……. 우리는 최초에 총 팔십일 점에서 평하기로 했잖은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들 열 명의 소년들은 상상을 훨씬 초월하고 있습니다. 한데……." "한데?" "무류흔과 추상을 제외한 나머지 팔 인은 모두 굉장히 사악한 기운을 지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옥, 유혜, 무비, 공족, 천맹은 어디선가 이러한 초월수련을 이미 받은 듯한 냄새가 납니다." "……." "그 예로 무비, 공족, 천맹은 각각 팔, 다리, 눈이 없는 불구의 몸인데도 놀라운 적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잠시의 침묵이 있었다. "우리의 임무는 선발에 있다. 그 외의 일은 연적연화인주가 하게 될 것이다……. 아미타불……." * * * 입곡 스무 날째. 애초에 천여 명을 헤아리던 아이들은 이미 이백여 명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지금도 이 숫자는 급격히 줄고 있었다. 이십 일 동안 굶는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인간이란 한계상황에 처하게 되면 어떤 일이든 하게 되는 법이다. 협곡의 한 곳, 몹시 으슥하고 외진 곳이며, 그곳엔 지금 한 소년이 쭈그리고 앉아 무슨 일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얼기설기 제멋대로 날립한 오관(五官)을 지닌 추면소년(醜面少年), 운명이 검우(劍雨)라 이름지은 이 소년은 지금 시체를 자르고 있었다. 돌을 갈아 만든 연장인데도 본시 솜씨좋은 백정이었던 그는 조금의 어김도 없다. 뼈와 살, 그리고 연한 근육질을 익숙하게 분리시키고 난 그는 그 중 한 부분을 집어 꾸역꾸역 먹기 시작했다. 도대체 인간인가, 짐승인가? 어느 정도 배를 채운 것인지……시체의 옷자락으로 쓰윽 피묻은 입가를 지우고 난 그는 재빠르게 시체를 땅에 파묻었다. 이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사라진 지 잠시 후, 장내에는 또다시 두 줄기 인영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정신이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한 쌍의 남녀, 바로 화옥과 유혜일 진대……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급히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흙과 피로 범벅이 된 그 자체로는 시체인지 고깃덩어리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는 하나의 물체. 화옥이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좋은 솜씨다." "먹기 좋은 부분은 따로 추려져 있어." 그들의 희고 고운 손에 인육이 집혀 들고 붉은 입술과 가지런한 치아는 그것을 씹어 삼킨다. 씹을 때마다 입 밖으로 솟구치는 핏물과 함께 화옥이 말했다. "검우란 자는 솜씨는 좋은데 가릴 줄을 몰라. 이 시체는 재질이 좋은 자였는데……." "네가 골라 주면 되잖아." "그럴까? 내가 보기엔 이돌중들이 삼십 일을 채울 것 같으니 세 놈 정도만 골라놓고 검우와 협상을 해야겠군." 핏물이 배인 치아를 드러내놓고 웃는 웃음이 섬뜩할 정도로 사악하다. 같은 시각, 이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엔 최초의 소년들에게 열띤 웅변을 했던 본초가 하나의 바위 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곳에선 계곡 안의 모든 소년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으며, 반면에 다른 곳에선 지형의 특성으로 그를 볼 수 없었다. 묵묵히 안개가 넘실대는 허공을 바라보던 본초, 문득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화옥과 유혜는 좋은 재질이나…… 너무 사악하다……, 검우는 한으로 똘똘 뭉쳐진 놈. 이들 셋은 제 부모라도 능히 찌를 수 있는 자들……." 그는 몸을 가볍게 일으키더니 계곡을 쭉 둘러보았다. 한쪽의 말라붙은 괴목 아래 비스듬히 누운 소년 하나, 어찌나 뚱뚱한지 마치 하나의 공이 누워 있는 것 같은 그는 지금 자기 앞의 소년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왜 움직이지 않냐고? 이것 봐, 움직인다는 것은 그리하여 힘을 소비한다는 것은 먹은 음식에 대한 능멸이야. 함부로 힘을 버린다는 것이 아깝지도 않아? 그래서 나는 쓸데없는 하품 따위를 가장 경멸하지……." 말을 끝내기 무섭게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을 떠서 무엇인가를 보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 "금적해……, 사악하진 않으나 이기적인 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아내와 자식까지도 능히 팔아 치우고도 남을 놈……." 시선이 조금씩 이동하여, 기이한 모양의 세 소년이 쏘아져 들어왔다. 하나의 자갈밭, 그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 세 소년. 하나는 두 팔이 없고 또 하나는 두 다리가 없으며, 마지막 하나는 두 눈이 없다. 아무렇게라곤 했으나 그들이 앉은 방위는 실로 미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만약, 그 누가 있어 이 셋 중 하나를 베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는 어디부터 찔러야 할지 몰라 백발이 되도록 고민해야만 했을 것이다. "상승의 자세들…… 무비와 공족, 그리고 천맹……, 저 세 놈은 짐승처럼 사육 받은 자들이다……. 고도의 사수련을 쌓은 맹수들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초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했다. 순간, 그의 날카롭던 두 눈이 미혹스럽게 변했다. "그런데 저자……." 계곡의 광장, 한 소년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은 소년들의 무리, 중앙에 있는 소년의 웃음은 유리알처럼 맑고 투명했다. 옥처럼 단아한 태도이며 그가 무엇인가를 얘기할 때마다 무리들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최악의 환경, 죽은 나무뿌리에다 소금을 쳐서 씹어 대야 하는 이 지랄 같은 환경 속에서 내일이라곤 없는 죽음 같은 사지 속에서……. 빌어먹을! 웃음이라니? 그것도 자신 혼자가 아닌 남에게까지 주는 웃음이라니! 본초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저런 사람을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무류흔……, 저자만은 도저히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자……. 성인이 아니라면 그는 바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아름다운 소년. 무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무뿌리를 캐기에 여념이 없는 그 추상. 그리고, 추상이 저토록 열심히 나무뿌리를 캐고 있는 것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무류흔을 위한 것임을 본초는 잘 알고 있다. 본초는 툴툴 웃으며 자리에 털썩 몸을 눕혔다. "괴상한 놈들! 희한한 놈들! 세상의 괴물들이 이곳에 다 모였다……. 제기랄! 무엇이냐? 소림 땡중들은 혹시 천하라도 가지려는 것이 아닌가?" 입곡 삼십 일째.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썩은 나무뿌리도 없어졌고…… 설사, 그것이 더 있다 해도 이제는 그것을 먹기 위해 일어날 기력도 없다. 멍하니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남은 아이들은 겨우 육십 명, 아무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본초가 하루 전에 발악적으로 외친 한 마디가 마지막 말이었다. --죽음이 눈앞에 있어도 그것을 조금은 연장하려는 시도를 하는 게 좋아. 기적은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니까!-- 추상은 무류흔의 품에 안겨 있었다. 대내금군을 호령하던 그녀도 정인(情人)의 품에선 다만 하나의 여자일 뿐인가. 죽은 듯 무류흔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그녀의 눈가엔 엷은 이슬이 맺혀 있었다. 문득, 무류흔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추상도 배시시 힘없이 웃었다. 십오 년 간 철저히 양자로 키워져 왔건만 역시 자신은 여자였다. '이젠…… 이 사람을 죽도록…… 사랑해……. 당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추상의 가장 큰 자랑…….' 그리고, 의식이 흐려져 왔다. 아버지, 대장군의 모습이 몽롱한 의식 속에 피어올랐다. 수천 개의 꽃잎이 빙글빙글 맴돌며 회오리치고 있었다. 바로 그때다. 빛! 시선이 흐려지는 탓으로 그것은 마치 환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빛은 분명히 계곡 안으로 뻗어 오고 있었다. 황홀하도록 눈부신 서기(瑞氣). 뎅…… 뎅…… 뎅……. 이어,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우렁찬 하나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이로써…… 시험은 끝났다……." 추상은 웃었다. 웃으며……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 * * "좌우지간 도깨비 놀음이군……." 그렇다. 오십 인의 소년들, 굶주림이란 극한 상황을 시험받고 선택된 이들은 그로부터 한 달 뒤, 앞뒤가 검은 휘장으로 막힌 다섯 대의 마차에 나누어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다. 소림 의 제자라곤 하나, 어디 소림사 의 절기를 한 초식이라도 전수 받았던가? 이제는 또 어디론가 정처 없이 끌려가야 하다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누군가의 말에 본초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잃어버린 염불을 찾아서." 방향은 분명히 남쪽이었다. 먹는 일 외엔 마차에서 내릴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차츰 따듯해지는 기후와 갈수록 많아지는 남쪽 특유의 수목군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한 달이 지나 후, 다섯 대의 마차는 마침내 오십 명의 소년들을 밖으로 토해냈다. 쏴아---- 철썩---- 파도. 끼룩…… 끼룩……. 갈매기 떼. 바다는 아름다웠다. 일망무제의 비취빛 물결과 그 위를 떠도는 흰 구름, 일광이 잔뜩 내려쌓인 백사장의 모래조차 한가로워 보이는데 모래언덕 아래에는 오십 척의 쪽배가 덧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오십 명의 소년들이 제각기 의아한 시선을 마주칠 때, 마차를 몰고 온 승려들 중 수좌승(首座僧)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제 사형들께선 각기 하나의 배에 올라 그곳에 쓰여 있는 방향대로 노를 저어 가시면 됩니다." 한 소년이 외쳤다. "도대체가 소림사 에선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요? 공력을 폐지하고 잔뜩 굶주려 놓더니 다시 공력을 회복시키고는 배불리 먹이다가 이런 해변가라니 바닷속의 물고기한테 소림 칠십이예라도 배우라는 거요?" 그 말에 소년들은 왈칵하고 웃었다. 수좌승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명을 받고 하는 일이라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아미타불…… 그럼……." 두두두……. 다섯 대의 마차는 왔던 길로 다시 사라져갔다. 인적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해변가에 내동댕이쳐진 오십 명의 소년들은 쓴웃음을 흘렸다. "이곳까지 왔으니……." 추상은 배에 올라 타며 무류흔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류흔은 짐짓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한 문파에 입문했으니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오. 몸조심하시오." "당신도……." 무류흔은 눈에 뜨이는 대로 아무 배나 올라탔다. 그 옆에 하나의 쪽지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쪽지는 말하고 있었다. "동동북으로." 무류흔은 추상을 향해 한 번 더 웃어 보인 후 힘차게 노를 바다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을 필두로 오십 명의 소년들을 태운 배는 일제히 바다 위로 미끄러져 나갔다. 따가운 남국의 태양 아래 그들의 모습은 이내 아득한 점으로 변해 사라져들 갔다. 바로 그때, 소리없는 바람처럼 해변가로 일곱 개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하나같이 승려의 모습을 하였으되 제각기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일곱 명의 사람. 문득, 그 중 가장 하측에 서 있던 백염백미(白髥白眉)의 성스러운 노승이 조용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우리 대에서 광운사존님의 천념염원이 이루어지는가……? 참으로 …… 길고 오랜…… 세월이었도다……. 아미타불……." 무슨 말일까?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로 그 시각, 사천 천불사당의 불문칠신 조각상이 일제히 사라진 탓으로 사천 무림계는 또 한차례의 난리가 벌어졌다는 것 뿐. 팻말이 팔백이십 일 후를 가리키고 있는 그 시각에 바람은 무심히 승려의 옷자락을 날리고 있었다……. 제 7 장 그는 중원제일(中原第一)의 기재(奇才) -------------------------------------------- 처음 출발하기 시작할 때에는 몇 명 보이던 소년들이 배가 나아감에 따라 하나씩 멀어지더니 이윽고, 무류흔은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