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신객 - 6편 (6/36)

2026-09-22 08:30:47 조회 29
황제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이곳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온요로운 봄날……. 햇살은 어깨를 따사롭게 어루만져 오건만 마음은 한 점 쇠뭉치로 눌려 있는 것 같았다. 기이한 일이 아닌가? 전쟁터에서도 외눈 하나 깜짝않던 자신이 그까짓 전설을 가지고……. 이때다. 그는 여러 개의 시선들이 자신을 집요하게 쫓는 것을 느꼈다. 힐끔 시선을 돌린 그의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온 광경. 저마다 열린 창문 새로, 만개한 꽃이 일렁이듯 웃고 있는 여인들……. "추상님!" "추상님이시다!" 황제의 후궁들이었다. 추상은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마음이 죽고 있는 여인들, 평생 한 번도 오지 않을 수도 있는 황제의 시선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청춘을 떨구고 있는 여인들이 아닌가? '이곳은 어둡다……. 어두운 곳이다. 나를 키운 항궁은 어디나 이런 어둠이 있다.' 추상은 갑자기 자신의 부하들이 보고 싶어졌다. 웃고 떠들며, 귀족이면서도 검에 삶을 건 그들의 활달한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 그리고 다 털어버리는 거다! 어차피 전설이며, 어차피 얘기에 불과한 것이니까…….' 멀리 흰 화강석이 깔린 황궁의 연무장에서 무예 연마를 하고 있는 금위대의 모습이 쏘아져 들어왔다. 추상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의 걸음이 더 빨라졌다. 이때다. 돌연 후원을 막 벗어났을 때, 건장한 그림자 하나가 추상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림자. 번드르한 화복(華腹)에 이마에는 용문건(龍文巾)을 두른 뚱뚱한 중년인. 능글맞게 웃고 있는 그를 힐끔 바라본 추상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이왕(二王)의 개…….' 이왕, 이 나라 황제의 동생인 이왕 주충(朱忠). 인간 중에 밥벌레가 있다면 바로 이런 인간일 게다. 황족이면서도…… 마땅한 직위 하나 없이 주육에 빠져 있는 위인.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는 미소년을 성욕의 도구로 삼는 남색의 못된 취미가 있다고 했다. 눈앞의 중년인은 이왕 주충의 심복인 사헌(司憲) 방위(方偉)였다. 사헌 방위는 능글맞게 웃으며 추상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혀 보였다. "주왕께서 잠시 장군을 청하십니다." 추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왕제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는 일. 그는 연무장쪽을 힐끔 바라보고 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하시오." 구중궁궐 깊숙한……. 한 채의 전각(殿閣), 주왕은 자신의 처소에 있다가 추상이 들어서자 읽던 책을 덮고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핫하…… 어서 오시오. 장군!' 추상은 가볍게 허리를 굽혀 보인 후 용각의(龍刻椅)에 몸을 실었다. 주왕은 위엄스런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턱밑으로 늘어진 흑염(黑髥)을 쓰다듬으며 시녀가 가지고 온 차를 권했다. "그래, 대장군께서도 무고하시오?" 추상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는 이렇듯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위인을 가장 증오했다. 그는 쓰레기 더미에 파묻힌 느낌으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오……? 핫하……. 그 성격도 꼭 부친을 닮았구려. 다름이 아니라 나는 이번에 신기한 물건 하나를 사들였소. 그것을 장군에게 구경시킬까 하고……." 주왕은 추상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신비롭게 웃으며 자신이 앉은 의자의 모서리를 가볍게 잡았다. 순간이었다. 철컥! 착--! 돌연, 추상이 앉은 용각의로부터 족쇄가 솟아나오더니 그의 양팔과 허리를 날카롭게 채워버리는 것이 아닌가? 추상의 안색이 대볍했다. "이게 무슨 짓……?" 그는 말과 함께 한 모금의 진기 를 끌러올리며 의자에 박차고 오르려 했다. 한데 웬 일인가? 진기 를 끌어올리기 무섭게 그는 몸이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꼈으며 대신 기이한 욕념이 가슴을 치받는 것을 느꼈다. "주왕……!" "핫하…… 그 물건들이 어떻소? 장군이 마신 차는 기분을 좋게 하는 용설향 (龍舌香)이며, 그 족쇄는 만년한철 로 만든 것이라오." 추상의 두 눈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주충!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아는가? 나는 황제폐하의 무관이다!" 주왕의 신비롭게 웃는 얼굴이 추상의 시선 속으로 바싹 다가들었다. "흐흐……. 아름다운 소년이여. 그런 것은 나중에 얘기하세나……. 나는 지금 너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을 지경이니까." 징그러운 인간의 콧잔등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추상은 고함을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아혈 이 봉쇄되고 주충의 손이 가슴께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탄식을 터뜨리며 두 눈을 스르르 내리감고 말았다. 청춘이여……, 나의 삶이여……. 더운 입김이 목덜미에 부어졌다. 바로 그때다. 돌연, 가슴의 옷자락을 헤집고 스며들던 주왕의 손길이 멈칫하는 것이 아닌가? "너…… 너는……?" 그는 다급히 추상의 은빛 투구를 벗겨냈다. 순간, 그는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터뜨려냈으나……. "여…… 자……?" 오오 맙소사! 대금위대의 수석영반이며, 미래의 대장군감으로 온 나라 청년의 우상인 추상……. 그가 다름아닌 여자란 말인가? 투구 속에서 드러난 먹물처럼 검고 구름결처럼 부드러운 긴 수발……. 주왕은 너무 놀라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욱!" "악!" 바로 그때, 둔중한 신음에 이어, 문을 뚫고 두 거한이 쓰레기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이어, 금빛 광채를 휘몰고 금위대의 부장인 이기와 육천이 빛살처럼 안으로 짓쳐들었다. 그들은 방안의 상황을 일견하더니 냉소를 터뜨리며 하나는 주왕의 멱살을 잡아 채고 남은 이기는 추상의 옆으로 황망히 달려왔다. "멀리서 보기에 대장 같다고 여겼더니……." "짐승만도 못한 이 왕놈이……." 이기는 다급히 상전의 족쇄와 혈도 를 풀었다. 이어, 그의 몸을 부축하려는 순간, 그 자리에 얼어붙듯 굳어 버리고 말았다. "대장……?" 그것은 육천도 마찬가지. 그는 얼마나 놀랐는지 주왕이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금위대 놈들이 난동을 부린다!" "후훗……." 추상은 자리에 앉은 채 툴툴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니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혀끝을 물며 치미는 정욕을 사르러뜨렸다. 이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러다 말고 돌연, 붉은 입술을 꿰뚫고 터져 나 오는 교갈! "이기, 육천! 그 서 있는 태도가 뭐냐?" 순간, 이기와 육천은 이 낯익은 목소리에 본능처럼 문밖으로 몸을 날리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다음 명령은 뭔가? 버릇이요, 습관이었다. 하나, 다음 순간 그들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고 말았다. "대장……!" 당신은…… 당신은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그 머리의 빛나는 흑발이란 도대체……. 추상은 씩 웃으며 느릿하게 방문을 걸어나섰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대지는 저토록 푸근하건만……. "그래……. 나는 여자다……. 나는 팔십만금군교두의…… 딸이다……." 그녀는 가슴에서 금위대의 수석영반을 표시하는 금빛 독수리문양을 떼어냈다. 툭--!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무릎을 꿇은 이기와 육천의 등을 어루만지고 지났다. "그 동안…… 고마웠다……. 오늘 일은 더욱……." "대장……!" 많은 사람들. 금위대의 위사 들과 근처를 지나던 귀족, 그리고 신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추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하나같이 극도의 놀람과 회의가 서려 있었다. 그 중엔 여자의 몸으로 변한 추상을 노골적으로 비방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저럴 수가……. 십오 년 동안 추가(秋家)들은 우리를 감쪽같이……." "오오……. 가증스럽게도……." 비난과 탄식과 한숨……. 추상은 웃었다. 그녀는 웃으며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본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황궁의 용마루와 잘 다듬어진 거목의 끝……. 황제의 얼굴과 후궁들의 그늘진 표정……, 그리고 똑같은 무리들이 어제 보내던 찬사와 오늘 보내는 비방. "후훗……." 문득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해맑은 눈빛을 지니고 있던 한 소년이 떠올랐다. --남을 함부로 괴롭히는 것이 권력이라면……. 그것은 그리 좋지 않소……. 당신은 권력의 힘을 지나치게 믿고 있는 것 같구려……. '권력…….' 물거품이었다. 믿었던 것만큼이나 허망한 것이었다. "그 소년은……. 이것을 진정으로 알고 있었던 것인가…….?" 추상, 이 일대기녀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향해 문득, 금위대의 위사 들이 하나, 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순간부터 새 대장이 부임할 때까지 흰 상장을 매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 영웅이 이끌던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 * * 무류흔은 부시시 눈을 떴다. 순간, 그는 두 눈에 가볍게 놀란 빛을 떠올렸다. 그가 있는 곳은 감옥도 석실도 아니었다. 이곳은 놀랍게도 그가 하루를 머물려다 봉변을 당한 북망산 의 천연탑이 아닌가? 그는 가볍게 몸을 일으켜보았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으깨어졌던 상흔들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럴…… 수가……? 나는 진정…… 한바탕 악몽을 꾼 것이란…… 말인가?' 무류흔은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하늘엔 여전히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호수, 호숫가에 한 사람. 은빛 투구에 은빛 갑옷,그리고 용수보검. 이 사람은 힐끔 창가의 무류흔을 바라보더니 붉은 입술 새로 시린 웃음을 피워 올렸다. 이어 말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걸치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르르…… 스르르……. 한 순간 주위가 환해지는가 싶더니, 그곳에는 화려한 갑옷의 무장이 아닌, 눈부시도록 흰 백의의 미녀가 환상처럼 나타났다. 천녀(天女)의 현신인가?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모습……. 무류흔은 호흡을 멈추고, 미소녀는 달빛 아래 선 요정처럼 시선을 호수로 던지며 조용히 말했다. "이 천둥벌거숭이 몸으로…… 가서 부딪치고…… 인간답게 살아볼 곳이 있나요? 당신은 그런 곳을 알고 있나요……?" 무류흔은 오랫동안 미소녀를 바라보다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소." "그럼 당신은 어디를 가고 있었지요?" "어디든지 가고 싶었고 가고 있었소." "나를……." 배시시 웃으며 미소녀가 말했다. "함께 데려가 줘요……." "내가 가는 곳은 미래가 없는 곳이오……." "어디든지……." 무류흔은 웃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글쎄……. 소림사 에서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소." 서슴지 않고 사랑이 어디서 어떻게 날아왔나. 봄바람 꿈꾸듯 살랑이고, 채색 나비 날개깃으로 달빛 숨어들 때, 나는 운명처럼 그대의 두 눈을 보았노라. 삶을 살 듯, 자유롭게 그대의 품속으로 날아들었노라……. 제 5 장 연적연화인주(軟赤蓮花印主) ---------------------------------- 소년, 한 소년 그는 백정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괴팍했다. 퍽--! 둔탁한 소리가 나자, 피를 내쏟으며 소는 거대한 몸을 쓰러뜨리고 만다. 소년, 그는 피묻은 박달나무 몽둥이를 내려놓고 면도를 잡았다. 백정의 아들이라고 해서 괴팍한 성격을 지니는 것은 아닐 테지만…… 소년은 괴팍했다. 그리고 잔인했다. 스윽…… 슥……. 칼이 소의 몸을 자르자 정확히 가죽과 살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폭포처럼 고이는 피에도 소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이어, 칼은 익숙한 솜씨로 살과 뼈를 발라 나갔다.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이 태어날 때에도 소를 잡았다.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을 낳고 난산으로 죽었다. 소년은 태어나자마자 그 배 위에 엎드려 어머니의 뜨거운 체온이 식어 가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그래서인가? 소년은 소를 죽이고 나서 살을 발라내며 그 온기가 식어 가는 순간을 특별히 좋아했다. 소년은 늘 소를 죽인다. 다른 사람들은 쇠몽둥이나 철퇴 로 죽이지만 소년은 박달나무 몽둥이로 소를 때려죽였다. 왜일까? 소년은 몽둥이가 소의 머리를 후려칠 때 손에 느껴지는 쾌감마저 느꼈다. 그의 아버지가 백정이 아니었어도…… 소년은 스스로 백정이 되고 싶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한 가지…… 소년은 혈의를 좋아했다. 혈의는 피가 묻어도 빨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소년, 그의 이름은 검우(劍雨)였다. 유홍(柳紅), 검우는 베어 낸 소의 살을 모아 포대에 담다가 이 이름을 생각해 내자 씨익 웃었다. 유홍, 이 이름은 그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누구나 다 검우를 싫어했다. 그의 몸에서는 늘 피비린내가 풍겼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못생겼다. 어디 한 군데 꼬집어 말할 것 없이 그는 지독한 추물(醜物)이었다. 어느 날 밤길에서 마주친 사람 하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귀신이라며 도망을 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유홍만은 그런 검우를 늘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밥을 먹다가도 그것을 싸들고 왔으며…… 조금 헐긴 했지만 입을 옷가지를 갖다 주기도 했다. 뿐인가? 남들은 마주서기도 싫어하는 검우의 옆에 다정히 앉아 해맑게 웃으며 얘기를 하기도 하는 것이니……. 검우에게 있어서 그녀는 신이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여신을 검우는 자신의 삶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검우는 소의 뼈와 고기를 담은 세 개의 포대를 짊어지고 몸을 일으켰다. '세 개의 포대, 그 중 하나는 팔아서 아버지의 술값으로 드리자. 하나로는 쌀과 식량을 사고, 또 하나는…….' 검우의 얼굴에 푸시시 웃음이 떠올랐다. 얼마 전에 마을 전노야(全老爺)의 가게에서 예쁜 옥가락지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의 하얗고 긴 손가락에 푸른 옥가락지가 끼이고, 눈처럼 흰 치아 새로 웃음이 흘러나와 준다면……. 검우는 몸에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검우의 집은 산속에 있었다. 그가 마을을 가자면 두 개의 산을 넘어야만 했다. 두 번째의 구릉을 막 넘어서 소나무 숲으로 들어서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검우의 귓전으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검우는 무심히 지나치려다 이상한 신음 소리가 뒤를 잇자 몰래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초여름의 무성한 풀은 그의 발자국 소리를 훌륭하게 숨겨주었다. 하나의 바위밑, 제멋대로 흩어진 옷가지들이 바위 위에 올려져 있었고, 그것이 여자의 속옷임을 발견한 검우는 냉소를 머금었다. '어느 년놈들이 이런 곳에서…….' 위에 올라 헐떡거리고 있는 사내의 땀배인 등이 보였다. 여체는 뱀처럼 사내의 목과 허리를 껴안은 채 쉴새없이 신음을 흘려 내고 있었다. 검우는 몸을 돌리려고 했다. 이때다. "끄응……." 사내의 긴 한숨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유홍, 너는 갈수록……." 유홍! 검우의 몸이 얼어붙듯 멈춰 섰다. 오오…… 하늘이여……. '유…… 홍이라고……?' 이번에는 말할 수 없이 낯익은 교성이 뒤를 이었다. "아아…… 당신은 정말 짓궂어……. 너무 세게 눌러서 등이 아프잖아요." 툭--! 검우의 손에 들려 있던 포대가 떨어져 내렸다. 그는 망연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사내가 유홍의 돌출된 가슴을 꼬집으며 말했다. "그런데…… 요즘 좋지 않은 소문이 도는 것 같아……." "뭐가요?" "그 백정의 아들놈 말야, 그놈이 너하고 가깝다며……?" 유홍은 사내의 가슴을 붉은 입술로 애무하다가 뚝 그 동작을 멈췄다. "검우?" "그래, 그놈 말야. 그게 사실이야?" "후훗…… 질투하는 거야?" "아니땐 굴뚝에서 연기날 리 없잖아?" 돌연 유홍은 격렬하게 웃었다. "호호……." 유방까지 흔들며 웃고 난 그녀는 비웃음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과연 지나던 개가 웃을 일이로군. 호호…… 찬밥 덩이 몇 개에다 걸레로 쓰던 천을 몇 개 줬더니……." "찬밥이라……." "개밥으로 줄 거였단 말이에요. 내가 먹던 거라고 말하긴 했지만……." "왜 그런 짓을 했지?" "호호…… 그 벌레 같은 놈의 표정이 우스웠어요. 날보고 신이라나? 내 발이라도 핥을 듯 무릎을 꿇으며 감격에 찬 표정을 짓는 꼴이라니……." 이때다. 무엇을 보았는지, 사내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그의 두 눈은 놀람과 공포로 홉떠져 있었다. 유홍은 그런 눈치도 모르고 신나게 말을 이었다. "천한 놈이라 할 수 없어요. 똥이라도 먹으라면 먹을 놈이야." 사내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유…… 홍……." 주춤 물러나다 바위에 등이 닿자 얼굴이 사색이 되고 만다. "저…… 저것……." 그의 말은 다 이어지지 않았다. 얼기설기 흉측한 흉터에다 얼굴의 반은 붉고 푸른 추면인.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들고 있던 바위를 놓았다. 퍽--! "카악--!" 비명은 어둠 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유혼은 온몸으로 피를 뒤집어쓴 채 부르르 떨며 뒤로 물러났다. 그 형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떡반죽이 되어 버린 사내와……, 그리고……. "검…… 우……." 검우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유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말고 돌연, 그는 묵묵히 자신의 바지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우람한 상징이 우뚝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유홍은 파들파들 떨면서도 아름다운 눈 깊숙이 안도의 표정을 스쳐보냈다. 남자란 다 그렇다. 여자의 향기로운 살을 짐승처럼 맛보고 싶어하고 그것을 맛보기 위해 기꺼이 노예를 자청하는 것이다. 유홍은 생각했다. '몇 번…… 거절하다가…… 슬쩍…… 제까짓 놈이 별 수 있겠어……?" 그러나 검우는 그녀의 생각처럼 그녀를 향해 덮쳐들거나 욕망을 위한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다. "먹어." 유홍은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벌레라고 생각했던 사내가 이런 요구를 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망연한 눈길로 아직도 김이 무럭무럭 오르고 있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가슴속에서 구역질이 치받쳐올랐다. "욱!" 검우는 말없이 유홍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묵묵히…… 무서울 정도로 입을 다물고 유홍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아악!" 유홍은 몸부림쳤다. 몸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에야 검우는 잡고 있던 머리채를 놓았다. "먹어." 유홍은 엎어지듯 그것을 향해 덮쳐 들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그것을 입안으로 꾸겨 넣기 시작했다. 검우는 근처의 박달나무 하나를 꺾었다. 이어, 품에서 예리한 소도를 꺼내어 천천히 가지와 잎을 쳐냈다. 나무의 감촉은 좋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소를 잡을 때, 어린 손은 얼마나 떨리고 있었던가? 계속 치라고 강요하는 아버지를 겁먹은 눈으로 올려다본 후 사력을 다해 우려쳤었다. 소의 피가 왈칵 얼굴로 끼쳐 오고, 죽기는커녕 아픔으로 날뛰는 소의 요동을 보고는 눈물을 터뜨리지 않았던가! "그것이 무엇인가에 보낼 수 있었던 내 마지막 동정심……." 검우는 허탈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두 눈 깊숙한 곳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다시는…… 그 누구도…… 내 마음을 가질 수 없다……. 세상이 가질 수 있는 것은 내 증오뿐이다." 유홍은 울었다. 뒤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은 온통 퉁퉁 부어 올라 입언저리엔 배설물의 찌꺼기가 묻어 있었다. 검우는 박달나무를 쳐들었다. 이미, 유홍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개밥을 갖다 주었듯 그녀는 도살을 기다리는 한 마리 암소에 불과했다. 그리고 소리. 퍽--! 검우와 유홍, 그리고 사내. 세 사람이 사라진 것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들 셋은 마치 땅으로 꺼지듯 철저하게 증발해 버렸다. 검우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푸줏간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놈은 다섯 개의 포대를 가져왔지요……. 소를 한 마리 더 잡았다고 했어요. 그러나 괴이하게도…… 그 놈은 굳이 한 마리의 소값만 받아 가더군요……." * * * 이 하늘아래에서 가장 큰 부자는 누구인가? 어떤 이는 황제라고 말할 것이다. 어떤 이는 남방대귀족인 광무공(廣武公)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 항주 (杭州) 금대야(金大爺)이오." --금대야(金大爺)! 그는 그저 그렇게 불렸다, 그러나 그는 땅 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황제였다. 중원인의 반이 그의 땅에서 난 식량으로 음식을 먹는다. 중원인의 반이 그의 술집에서 술을 먹으며, 중원인의 반이 그와 관계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혹자는 삼비라고도 한다. 제일비는 그가 벌려놓은 사업체가 도대체 몇 개인지 모르는 것이요, 제이비는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제삼비는 그의 자식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지 모르는 것이다. 항주 의 모든 여인들은 한번씩은 그의 정액을 받아야만 했으니까. 한 사람, 뚱뚱한 몸에 화복을 걸친 이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동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몹시 귀풍스런 사람인데도 휘하에는 한 명의 시종도 거느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이 사람의 신분을 안다면 입을 쩍 벌리고 말 것이다. 그는 바로 이 나라의 제정을 총괄하는 재상이었던 것이다. 항주 성에서 동쪽으로 달려가면 어딘가? 바로 바다다. 재상은 곧장 바다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미쳤을까? 배, 한 척의 배. 무척 큰 크기였으나 그리 호화롭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