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신객 - 5편 (5/36)

2026-09-22 08:30:47 조회 28
그것은 그때까지의 무공상식을 벗어난 신비로운 무예였다. 치거나 때리거나 피하는 것이 아닌…… 내공 이 없어도 상대의 공력을 다른 곳으로 유도할 수 있는 괴이한 절기! 백의소녀는 총명했으나 이대만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 절기가 어떻게 남자의 손에서 펼쳐진단 말인가? 바로 그때다. "콜록…… 콜록……." 기침 소리! 과도한 힘을 쓴 탓이리라……. 돌연 무류흔이 가슴을 움켜쥐며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입을 틀어 막은 손가락 새로 붉은 핏물이 섬뜩한 모습을 보였다. 백의소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지금까지 저토록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백의소녀는 급히 달려나가 그의 몸을 부축했다. 그러다 말고 문득, 그녀는 싸늘한 시선을 흑영에게 던졌다. "그 시커먼 천을 언제까지 뒤집어쓰고 있을 거지요?" 순간, 흑영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헤헤 싱겁게 웃으며 천을 벗었다. 괴이한 모습, 일남일녀이며 남자는 아래에 여자는 그 남자의 어깨에 올라앉아 있었다. 한데, 이들은 바로 도망갔던 야래향과 거한이 아닌가? 그들은 백의소녀가 몹시 두려운 듯 힐끔힐끔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리와서 어서 이 분에게 진기 를 주입시켜 봐요." 이때다. 무류흔이 돌연 백의소녀의 몸을 뿌리치며 비틀 몸을 일으켰다. "아직…… 제삼관이 남았소……." 순간, 백의소녀의 두 눈에 미묘한 빛이 스쳐 지났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그 체력으론……." "그러나 해야 하오." "저는 오늘 그것을 다 하고자 말하진 않았어요." 한쪽에 서 있던 미향과 거한 등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들은 저 아름다운 소녀가 저토록 말을 맣이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저토록 다정한 모습이며 교태로운 태도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백의소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잇고 있었다. "나중에…… 해도 돼요. 그때 제삼관을 뚫지 못한다면…… 저는 당신을 평생토록 묶어 놓겠어요." 미묘한 여심의 말, 그러나 무류흔은 그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그는 그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그는 백의소녀를 힐끔 쳐다본 후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거한이 황급히 다가와 부축했다. 무류흔은 잔잔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내가 당신을 풀어주면 세 가지 일을 해주겠다고 말했지요?" "그렇소. 그래, 나는 이제 겨우 한 가지를 했소." "나는 이 자리에서 당신이 나를 위해 해 줄 일을 말하겠소." "그것이 무엇이오?" "나중에 내가 당신의 셋째 누이와 삼관을 겨룰 때까지 언행을 단정히하여 남에게 불편을 끼치지 마시오. 이것은 야래향도 마찬가지이오." 이어 무류흔은 그들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않고 백의소녀를 향해 단아한 태도로 포권지례를 취했다. "나중에 소저를 어떻게 칭하면 되오?" 거한이 불쑥 나섰다. "내 자랑스런 셋째누이는 근지(勤芝)라 하오. 나는 탑우(塔牛)요, 우리 삼남매는 남해 보타암에 살고 있으니 공자는 그쪽으로 오면 될 것이오." 단숨에 여기까지 말하고 난 거한은, "그건 그렇고 공자는 정말 그것으로 조건을 삼을 생각이오?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소?" 제 4 장 춘몽(春夢) ------------------ 무류흔은 삼관을 약속한 후 떠나갔다. 그러나 그 삼관은 사실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탑우와 야래향이 조용히 있게 된다면 그들을 묶어 놓을 필요도 없는 것이므로……. 백의 소녀는 쓸쓸한 시선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한 가지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까 무류흔을 부축하며 짚어 보았던 그의 맥(脈), 자신이 배웠던 의학은 그 맥을 이렇게 진단 내리고 있었다. 불치의 병이며…… 시한부 생명임을……. 아는 것은 차라리 모르느니만 못했다. 그녀의 시선이 땅을 향했다. 아까 기침을 하며 토해 냈던 무류흔의 각혈 자국……. 백의 소녀는 가슴이 아팠다. 그 통증으로 영혼을 떨며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지만…… 그 동안 자신을 위한 일이나 행동을 한 번이라도 했는가……?" 미향, 탑우, 야래향은 이 느닷없는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아픔을 내색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 그런 몸으로 남을 생각해 주기란 어려운 일……." 말을 이어가던 백의 소녀의 눈꼬리에 문득 별빛 같은 한 방울의 슬픈 이슬이 맺혔다. "하늘이…… 그의 재주를 시기하나…… 나는 오늘 참으로 위대한 사람을 만났다……." 동녘엔 먼 동이 뿌옇게 떠오고 있었다. 인세(人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그것이 미래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과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의 첫만남이었다. 정실(靜室), 단향(檀香)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가운데, 정좌하고 앉은 두 사람의 노승. 대 소림 …… 이곳에서도 가장 지체가 높은 두 사람일진대, 장문 방장 (掌門方丈)이며, 소림 제오십칠대장령(少林第五十七代掌令)인 각오선사(覺悟禪師)가 말했다. "아미타불……. 지금까지의 진행상황은 어떠하오?" 무행원(武行院)의 주지(主持), 신규제자들을 모집하고 가르치는 책임을 맡은 무행원의 수석노승 각원(覺圓)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파화편지는 도합 이천구십 명의 십오세 소년에게 전달되었지요……. 그 중 일천삼십 명 가량이 편지의 비밀을 풀어냈으며 오백이십의 소년들이 이미 입사했습니다." "흐흠……. 앞으로의 예정은……?" "무제한 기한을 둘 수는 없는지라……. 오늘이 사월 초닷새이니 사월 열흘까지 기한을 두고 그 전에 들어오는 소년들까지로 입문완료할 예정입니다. "그들의 숙소는 마련되었소?" "준극봉(俊極峯)에 임시로 천 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처소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중 특출난 제질의 아이들이 보이오?" "대륙의 이름난 무가의 후손들도 적지 않습니다. 황족부터 천민의 아들까지 각양각색이지요……." 각원선사가 물러 나간 후 각오선사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연적연화인, 그의 앞에는 연적연화인이 찍힌 두 번째 편지가 놓여 있었다. <십오 세의 소년들이 모집되거든 가혹한 생사훈련을 시켜라. 생사훈련에는 다음과 같은 원 칙이 부여된다. 一.모든 소년들은 똑같은 능력으로 만들어 놓을 것. 즉, 무공이 있는 소년은 잠정적으로 무공을 폐지시킬 것 一. 초인적인 인내가 아니면 살아나올 수 없는 극한 상황을 부여할 것 一. 훈련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의지가 약한 자는 즉시 귀가시킬 것 一. 위의 원칙에 의거하여 가장 재질이 뛰어난 자 오십 인을 선발할 것> 가오선사는 편지를 힐끔 바라본 후 장중한 불호를 흘려 냈다. "아미타불…… 오십 인이라……." 오십 인, 도대체 이 연적연화인의 주인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겐가? 아니,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각오선사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알 수 없다. 내일은 직접 낙양 성(洛陽城)을 내려가 보기라도 해야 할까 보다……. * * * 탑,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낡은 하나의 탑이었다. 북망산 (北邙山), 수천수만의 고혼(孤魂)들의 안식처인 이곳에 서서 외로이 흐르는 낙하 (落河)를 마주한 채 놓인 한 개의 탑. 낙하 탑, 혹자는 위령탑(慰靈塔)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언제 세워졌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아는 이가 없으며 수백 년의 이끼가 끼도록 사람의 손길조차 본 적이 없는 탑일진대……. 밤바람이 불자 무덤 위의 풀들은 유귀(幽鬼)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짐승처럼 웅크린 탑의 형상은 그래서 더 을씨년스럽다. 바로 그때, 탑을 오르는 낡은 계단에 무엇인가가 언뜻 움직였다. 그림자, 그것은 그런 걸음으로 탑의 계단을 밟아오르고 있었다. 쏴아아……. 바람이 한차례 묘지를 휩쓸고 지나자, 우거진 나뭇잎 새로 달빛이 스산하게 내려앉았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림자의 얼굴은……. 오오! 바로 무류흔이 아닌가? 탑은 곳곳에 이끼가 끼고 돌계단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삐걱대고 있었다. 무류흔은 간신히 탑까지 올라섰다. "오늘밤은…… 이곳에서 지내기로 하자……." 낡은 구식의 원형문, 탑의 안으로 들어서자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방 이 장여의 둥근 공간이었다. 한쪽으로 나나의 창문이 난 외에 사위는 꽉 막혔다. 무류흔은 창틈으로 흘러들어온 달빛이 물결처럼 팔랑이고 있는 곳을 천천히 걸어 지났다. 그때 돌연, 그의 시선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벽의 한곳, 언뜻 보아선 도저히 알 수 없었으나…… 푸르스름한 이끼가 융단처럼 돋아난 그곳엔 기이한 문양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흥미를 느낀 1무류흔은 바짝 다가서서 보다가 가벼운 탄성을 토해 냈다. 문양, 그것은 바로 몹시 희귀한 고대의 갑골문 (甲骨文)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탑은 적어도 은(殷), 주(周)시대의 것……?" 손톱으로 이끼를 긁어내자 문자의 형태가 나타났다. 그러나 문자는 몹시 부식이 되어 있었으므로 무류흔은 그것을 손끝으로 짚어 나가야만 했다. "천(天)…… 연(緣)…… 탑(塔)……? 이것은 슬…… 픈…… 전…… 설……." 그 내용은 이러했다. 낙하 (洛河)를 사이에 두고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있었으되 그 이름은 각각 용(用)이오, 봉(鳳)이라 하였다. 둘은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있었으나, 예로부터 원수의 집안인 용봉 양가는 이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용은 늘 이 탑에 올라 강 건너의 봉을 바라보았다. 그는 밤하늘의 유성이 되고 싶었다. 그토록 신비로운 광채를 흩뿌리며 봉의 곁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리움에 지친 봉은 강을 맨몸으로 건너고 말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이 송두리째 물 속으로 잠겼을 때, 용은 울부짖으며 그들의 운명을 원망했다. 그리고 그 또한 탑 아래의 물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슬픈 전설은 말하나니……. 이 탑의 창문에 서서 지상을 내려다보았을 때, 제일 처음에 보게 된 여인과 숙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리라……. 그러나 그 사랑은……. 용과 봉의 비련의 전례에 따라 반드시 비극으로 끝나게 되리라……. 비련을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의지의 인간이 아니라면 결단코 창가에 서지 말라……. 글귀의 아래로는 하나의 도형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의 유성이 지상으로 빨리듯 떨어져내리는 형상이었는데, 무류흔은 그것을 보자 홀리듯 우수를 내뻗었다. 곧추세워진 채 일직선으로 내려뻗는 기이한 동작. 무엇이 시키는지……. 그 동작을 세 번 되풀이하였을 때, 그만 그의 손끝이 문양이 새겨진 돌을 툭 건드리고 말았다. 그러자, 보라! 돌은 마치 한줌의 모래처럼 우수수 부서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그제서야 무류흔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의 얼굴에는 곤혹스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맨 마지막 도형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무슨 초식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초식이라고 보기엔 너무 단순했다. 무류흔의 뇌리로 문득 전설의 내용이 스쳐 지났다. "숙명적인 사랑……?" 그는 담담히 웃었다. 전설은 전설에 불과하다. 한적한 이곳에 느닷없이 여인이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바로 그 시각 일진의 기마대가 강 건너를 질주하고 있었다. 기마대의 선두에는 두 개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하나는 금빛 수실에 용(龍)이 새겨진 황궁금위대(皇宮錦衛隊)의 깃발, 또 다른 하나는 붉은 바탕에 검이 수놓이고 추상(秋霜)의 두 글자가 박힌 화기(華旗). 한데…… 오오, 추상이라니? 낙양 성에 사는 사람치고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추상(秋霜) 하남 땅의 누구든 붙잡고 물어보라.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군인이 누구인가?" 누구든 말할 것이다. "추상!" 추상, 이 나라 병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팔십만금군교두 추광대장군의 독자이자, 귀족의 자제들로만 구성된 황궁금위대(皇宮錦衛隊)의 수석영반(首席令班)인 명나라 최고의 기재였다. 그는 완벼간 남성상이었고, 만 천하 청년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정지!" 최선두에 선 한 명의 무장이 손을 들어 대열을 정지시켰다. 달빛 아래서도 빛나는 독수리 문양의 은빛 갑옷, 머리에는 학의 깃털이 꽂힌 투구를 썼으며 허리에는 한 자루 용수보검(龍繡寶劍), 말안장 아래로 은빛 피풍(被風)을 길게 늘어뜨린 그 모습을 도대체 무엇으로 형용하랴! 단아한 기품 속에 서릿발 같은 위엄, 그리고 아름다움……. "오늘은 이곳에서 야숙한다. 천위조(天衛粗)는 막사를 치고 지위조(地衛粗)는 경비를 서도록 하라." "존명!" 우렁찬 대답과 함께 오십여 명의 금위군들은 신속히 명령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내 최고의 부대라고도 했다. 황제의 명령보다도 대장 추상의 명을 더 중히 여기는 청년귀족무인들. 대장 추상은 자신의 은린마(銀燐馬)에서 내려서며 부장(副將) 이기(李琪)를 불렀다. " 낙양 으로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적혈대(赤血隊)의 근황은?" "핫하……. 한낱 도적떼입니다. 첩자나 보냈다가 꽁무니를 빼겠지요. 금군(禁軍)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금위대는 아무에게도 공(功)을 놓치지 않는다. 반 시진의 휴식 후 순찰을 돌라." "어디 가시렵니까?" "지형을 익히고 오겠다." 불과 나이 십오 세, 그러나 뒤돌아 걷는 그의 등뒤에 서린 것은 횃불 같은 사내의 집념이다. 이기는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대장 추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었다. "그 이름처럼 서릿발 같은 성품……. 저 가슴속엔 불꽃 같은 야망이 있으리니……. 그 누가 저 분의 십오 세 나이를 비웃으랴……." 강 저쪽의 갈대를 넘어서니 뜻밖에도 아담한 소연(小淵) 하나가 나타났다. 달빛 속인데도 밑바닥이 보일 만큼 맑고 투명하다. 추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적혈대인지 뭔지 때문에 이틀째 집을 못 들어갔더니……. 평소에도 은빛 갑옷에 먼지 하나 묻히지 않을 만큼 결벽한 그였는데……. 추상은 시선을 들어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았다. 단지 무덤과 갈대…… 그리고 을씨년스러운 탑 하나, 탑이 좀 마음에 걸렸지만 저 이끼낀 곳에 누가 있으랴? 추상은 날렵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세월, 수천 년을 이끼 속에 덮여 있던 갑골문 의 한 시한부 생명의 소년에 의해 해독된 것이 하늘의 운명이라면……. 바로 그 시각, 탑 아래에 있던 한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무류흔이 무심코 창밖의 달빛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사람은 맑은 연못 속에 몸을 담구고 있었다. 사랑이 어디서 어떻게 날아왔나. 봄바람 꿈꾸듯 살랑이고……. 채색 나비 날개깃으로 달빛 숨어들 때, 나는 운명처럼 그대의 두 눈을 보았노라. 삶을 살 듯, 자유롭게 그대의 품속으로 날아 들었노라……. 무류흔은 얼어붙듯 창가에 멈춰 섰다. 무심코 내다본 밖이다. 전설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하늘이여……, 너는 나의…… 운명을 …… 희롱하는가……? 달빛이 저토록 슬프듯, 긴 머리 구름결처럼 드리우고…… 뽀얀 어깨 위론 보석 같은 물방울이 맺혔는데, 고요히 하늘을 우러르는 저 영롱한 눈빛이란…….?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이었다. 그것은 마치 꿈결처럼 위대한 충격으로 무류흔의 뇌리를 두들겨 왔다. '여자……?' -- 최초로 시선을 마주친 여자와 숙명적인 사랑을……. 그 사랑은 슬픈 사랑……. 탑 위의 남자, 물 속의 여자. 물 속의 여자는 얼어붙은 듯 마주친 남자의 시선을 피할 줄 몰랐다. 슈슉! 하나 그것은 잠시, 환상처럼 그녀의 몸은 물 속으로 사라졌다. 무류흔은 구르듯 탑을 내려왔다. 그는 신비로운 이 여인이 물 속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못에는 이미 아무 흔적도 없었다. 잔잔한 파문만이 수면에 번지고 있을 뿐……. 바로 그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무류흔의 귓전으로 한 소리 싸늘한 음성이 파고 들어왔다. "당신은 누구인가?" 이어 하늘의 기사처럼 은빛투구의 부장이 갈대 속에서 스르르 나타났다. 무류흔은 가볍게 놀란 눈빛으로 말했다. "여자 하나가……." 투구 속에서 부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여자가 어쨌단 말인가?" 무류흔은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 이것은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을씨년스러운 곳에 어찌 그런 미녀가 목욕을 하고 있었을 손가? 설사, 꿈이 아니었다손 치더라도 그런 말을 믿어줄 바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스르르르……. 바로 그때, 갈대를 헤치고 장창 을 든 두 명의 위사 가 또 나타났다. 그들은 그들의 대장이 서릿발처럼 서 있자 깊숙이 허리를 굽혀 보였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무장 추상의 싸늘한 시선이 무류흔을 향했다. 그리고 냉막한 외침. "수상한 자다. 체포하라!" * * * 추상은 말고삐를 달려나가다 우뚝 멈췄다. 그의 시선이 바로 뒤따라오던 부장(副將) 이기(李琪)를 향했다. "그 탑의 이름이 뭔가?" 이기는 어리둥절한 빛을 떠올렸다가 이내 씩 웃으며 말했다. "탑의 이름은 모릅니다. 아무도 모르지요. 그저 낙하 탑이라고도 합니다만……." 또 다른 부장 육천(陸天)이 말을 받았다. "우연히 기루(妓樓)에서 들은 얘기입니다만 그 이름없는 탑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더군요." "전설……?" "저 탑의 창가에 서는 남자는 맨 처음 마주친 여자와 숙명적인 사랑을 한다던가……? 핫하……. 기녀들이 지어낸 얘기겠지요." 순간, 추상의 말고삐를 움켜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 움직임은 아무도 눈치 못 챌 만큼 미세했다. 추상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배를 박찼다. 두두두……. 전설 따위……, 믿지 않아……. * * * 어둠침침한 석실(石室)이었다. 짧은 하의를 걸친 대한들은 묵묵히 피묻은 형구(形具)가 사방에 걸린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무척이나 냉혹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으며, 시간을 낭비하는 일 따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 류의 인간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익숙하게 나무 의자에 걸레쪽처럼 늘어진 무류흔의 주위에 둘러섰다. 모두 셋, 그 중 오른쪽의 사내가 우람한 팔뚝으로 무류흔의 몸을 뒤에서 움켜 안았다, 왼쪽의 사내는 가위처럼 생긴 뭉툭한 쇠붙이를 꺼내 그것으로 무류흔의 왼쪽손을 잡고 세개의 관절을 차례차례 찍었다. "으윽!" 무류흔의 윗니가 아랫입술을 파고들었다. 이럴 때 더욱더 두려운 것은 관절이 끊어지는 고통보다도 이들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닐까? 고문자들은 그의 오른손 세 개의 관절마저 끊어 놓고서야 천천히 손을 떼었다. 무류흔의 정면에 선 자가 말했다. "길게 묻지 않겠다. 너는 어떻게 그곳에 올라갔나?" "하룻밤…… 지낼 생각……." "거짓말! 너는 적혈대란 도둑떼의 첩자지?" "아니…… 오……." 사내가 가볍게 눈짓을 하자, 순간 우측 사내의 주먹이 무류흔의 얼굴을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그의 손에는 철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퍽--! "윽!" 순식간에 무류흔의 입 안은 피와 솜처럼 짓이겨진 잇몸의 살점이 한데 엉켜 끈적끈적한 점액으로 가득 찼다. "그 야심한 시각에 하필이면 무덤가냐?" "길을…… 잃었을…… 뿐……." " 낙양 의 불빛도 보이지 않았단 말인가?" "보았으나…… 내키지…… 않…… 았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순간 이번에는 왼쪽 사내의 무쇠 같은 주먹이 무류흔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우드득! 갈비뼈가 부러져 나간 것이리라. 무류흔의 몸이 새우처럼 꺾였다. 터져 나오는 것은 피! 그리고 격렬한 기침, "쿨룩…… 욱…… 쿨룩……." 돌바닥에 점점이 떨어지는 피와 내장 부스러기를 힐끔 바라본 사내가 중얼거리듯 말햇다. "이건 내버려둬도 죽을 병에 걸린 놈이 아닌가?" 이때다. 쾅--! 석실의 철문이 열렸다. 이어, 두 위사 의 호위를 받으며 추상이 안으로 들어섰다. 세 고문자는 황망히 한곳으로 시립해 섰다. "쿨룩…… 쿨룩……." 미친 듯이 기침을 하고 있는 무류흔을 힐끔 바라보고 난 추상이 대한들을 향해 물었다. "성과가 있는가?" "그는 아무 말도 않습니다." "되었다. 나가 보아라." 형리와 위사 들이 박으로 나가고 나자, 추상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더니 무류흔의 얼굴을 거칠게 쳐들었다. "한 가지만 묻겠다. 너는 그 탑에서 나를 처음으로 보았는가?" "쿨룩…… 쿨룩……." 격렬한 기침과 함께 무류흔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오오, 그 고통의 와중에서도 무류흔의 시선은 놀랍도록 맑았다. 그 시선 그대로 무류흔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추상의 얼굴이 가볍게 변했다. '처음이라고……? 처음…….' 무류흔은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이 아니라 얼굴 근육을 일그러뜨리는 것에 불과했다. "남을…… 함부로…… 괴롭히는 것이…… 권력이라면…… 그것은…… 그리…… 좋지 않소. 당신은…… 권력의 힘을 지나치게…… 믿고 있구려……." 추상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한참 동안 무류흔을 노려보더니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걸어나갔다. "하루의 시간을 준다." 황궁(皇宮), 구중심처…… 부와 사치……. 그 호화의 극만큼 음모와 피비린내가 소용돌이치며…… 조그만 수목 하나, 용마루 한 귀퉁이에도 최고의 권력이 도사린 곳……. 추상은 대리석이 깔린 황궁의 후원을 거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