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신객 - 4편 (4/36)

2026-09-22 08:30:47 조회 30
그곳엔 무슨 상(像)이 있는 것도, 단(壇)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방의 끝쪽엔 하나의 융단이 깔려 있었으며, 그 융단엔 놀랍게도 한 마리의 거대한 흑호(黑虎)가 누워 있었다. 거대한 집에 사람도 없는 대청에 호랑이가 있으니 실로 괴이하기 이를 데 없는일, 무류흔이 들어서자 흑호는 거대한 상반신을 일으키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크흐흐……. 이때다. 돌연, 흑호의 위에 처진 노란 휘장으로부터 느닷없이 부드러운 목소리 하나가 흘러오는 것이 아닌가? " 소호 (小虎), 앉아라. 장난하지 말고……." 순간, 무류흔은 크게 놀라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부드러운 소리는 오히려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을 돋게 했다. 흑호는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마치 고양이가 된 것처럼 조용히 앉았다. 다음 순간, 아름다운 손 하나가 휘장 뒤로부터 불쑥 솟아 나오더니 흑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엇다. "들어오셨으면 좀 앉지 그래요?" 무류흔은 잠시 망설이다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잠자기는 틀린 밤이다. 그의 태도는 마치 예절바른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 같앗다. 노란 휘장 뒤에서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과연 멋있는 공자로군요. 이름을 듣고 싶다면?" "소생은 무류흔이라 하오." "아! 무공자이시군요." "소저의 성함은?" "이름? 후훗…… 야래향(夜來香)이면 될까?"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이름을 가지고 될까라니? 무류흔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창틈으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아!" 순간, 휘장 뒤에서 가벼운 탄성이 새어 나왔다. 몹시 놀란 것이리라. 잠시의 침묵 뒤에야 말은 이어졌다. "공자께서 멀리 오셨는데 제가 대접을 못하니 용서하세요." 이 여인의 말투는 갈수록 달콤했다. 아니, 달콤할 뿐 아니라 그 속엔 끈적한 유혹의 내음까지 서려 있었다. "오히려…… 소저의 모습을 보지 못하니 예의를 못차리고 있소. 무례를 용서하시오." "호호……. 저는 본래 매우 친절하지만 당신은 나보다 더욱 친절하시군요. 겅지차람 점잔으신 분은 처음 봤어요." 그러나 무류흔은 결코 점잔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엄격한 천외성전의 법도 아래 자란 그는 누구에게든 예의바른 언행이 습관으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남이 그에게 친절을 베풀면 남이 그를 죽인다 해도 무류흔은 그 사람에게 친절로 보답하고자 할 것이다. 무류흔이 담담히 웃자, 여인은 돌연 한 줄기 장탄식을 터뜨렸다. "정말…… 미안하군요……. 제가 묶여 있는 몸만 아니라면 공자에게 차라도 한 잔 대접할 텐데……." 순간 무류흔의 어굴에 놀람에 찬 빛이 떠올랐다. "묶여 있다고? 그럼 소저는 이곳의 주인이 아니오?" "누가 그런 말을 하지요? 내가 이곳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을?" "소저가 이곳의 주인이고 그 호랑이도 소저가 길렀다면 왜 묶여 있다는 건지 소생은 이유를 알 수 없구려……." 여인은 탄식을 터뜨리며, "우선 이 천을 좀 제쳐줘요……. 나는 오랜만에 말할 상대를 마났군요……." 무류흔은 휘장을 젖혔다. 그러나 젖히고 난 그는 놀란 나머지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했다. 휘장의 뒤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었다. 온통 풀이 우거져 있고 구석에 하나의 물통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마치 마구간 같은 모습. 무류흔은 꿈속에서도 휘장의 뒤가 이런 모습일 줄은 몰랐다.더욱이 이 지저분한 곳에 옥 같은 살결에 서늘한 두 눈을 지닌 미녀가 앉아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이런 상황은 사람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아름다운 미녀의 목에는 쇠사슬이 감겨 있고 그 쇠사슬은 벽에 박혀 있다는 점이다. 그 벽 한쪽에는 부적, 산을 올라오다 만난 거한이 묶여 있던 바위에 붙어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의 부적이 있엇다. 무류흔은 탄식을 터뜨리며 말했다. "누가 한 일이오?" 미녀 야래향은 씁쓸하게 웃었다. "동생이에요." "동생이라고……?" "그는 나를 보고 색녀(色女)래요……. 내가 백여덟의 청년을 유혹하여 해쳤대요. 그러나 우스운 일이 아닌가요? 그 녀석들이 먼저 날 따라왔어요. 난 누구를 유혹하거나 그러는 성격이 아니예요……." 무류흔은 머리가 혼란해졌다. 같은 부적, 묶여 있는 형상 또한 비슷하니, 아까의 거한이 말한 누이란 바로 이 미녀일 것이다. 한데, 동생은 누이를 헐뜯으며 그가 자신을 묶었다고 하고, 누이는 동생을 헐뜯으며 그가 자신을 묶었다고 하고……. 도대체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이란 말인가? 그때, 정열적인 홍의의 이 여인은 무류흔의 표정을 힐끔 바라보더니, 문득 배시시 웃음을 피워올렸다. "공연히 집안 얘기를 하는군요……. 이리 가까이 좀 와요. 우리 다른 얘기나 해요……." 눈가에 그윽한 추파…… 오금이 저릴 정도다. 설사 돌부처라 해도 이 여인과 장시간 있게 된다면 그 치마폭 아래 몸을 던지지 않곤 배길 수 없게 되리라. 무류흔은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한 사람은 풀어주었다. 다른 사람 역시 결과야 어떻든 묶인 것은 풀어주는 것이 도리다. 그가 야래향의 위로 올라서자 야래향은 고개를 흔들며 웃어보였다. "안돼요. 이 쇠사슬은 동생이 특별히 만든 만년 교룡삭 (萬年蛟龍索)이니 세상의 둘도 없는 보검이라면 몰라도……." 그러나 그녀의 말은 채 다 이어지지 않았다. 탁---! 오오……. 이것은 바로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아닌가? 이어, 남자의 것이라곤 믿기 어려운 옥수(玉手)가 그녀의 목에 감긴 쇠사슬을 풀기 시작했다. 야래향은 한편으로 놀랍고 한편으로 기뻐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무류흔의 손이 목덜미에 닿자 그녀는 파르르 몸을 떨며 교태를 부렸다. "간지러워……." 무류흔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인천하라고 하나 그 어느 여인이 감히 그 주인 앞에서 이런 교태를 부렸으랴. 그는 조심할수록 손이 부딪쳤고, 야래향의 웃음소리는 더욱 요란해지며 심지어는 몸 전체를 떨기도 했다. 무류흔은 탄식을 터뜨렸다. '여인은 왜 이토록 간지럼을 참지 못할까?' 툭---! 도리어, 마지막 사슬이 풀렸을 때 무류흔의 몸은 온통 열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저, 이제 일어나 수 있겠지요?" 야래향은 미묘하게 웃으며, "제가 지금 어찌 일어설 수가 있겠어요." "왜 일어서지를 못하오?" "당신은 모른단 말이에요?" "글쎄……." "바보, 당신은 지금 나의 몸에 조금의 힘도 없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요?" 공자에서 바보로 바뀐 호칭, 무류흔은 일시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서고 말았다. 그와 같은 군자는 자연 미묘한 여인을 상대하기가 힘이 든다. 야래향의 얼굴에 다시 무쇠라도 녹여낼 듯한 뇌살적인 웃음이 피어올랐다. "바보, 당신은 남자인데 이럴 때 여자를 어떻게 다룬다는 것쯤은……." "그러면 소저의 뜻은 날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오?" "흐응! 당신이 나를 부축하지 못한다면 나를 안지도 못한다는 것인가?" 무류흔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탄식을 했다. "소저가 지금 정말 일어서지 못한다면 나는 여기에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소." 야래향은 아래위로 글을 훑어보면서 이 남자가 이상하다고 여겨져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 정말 아무 일도 않고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그렇소." "내가 만약에 한 시간이 지나서도 일어서지를 않는다면?" "내가 또 한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릴 수 있겠어요?" 무류흔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소생은 오랫동안 무슨 일이든 참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었소." 야래향은 풋하고 웃고 말았다. "내가 만약 평생동안 일어나지를 않는다 해도 당신은 기다리겠어요?" "소저는 배가 고플 것이오." 야래향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당신이 이토록 이상한 사람일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바로 그때다. 돌연, 그녀의 안색이 홱 돌변하더니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야……. 야단났어요! 내 동생이 오고 있어요!"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이럼 홍점(紅點)으로 변해 허공으로 솟구치는 그녀. 콰쾅---!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어찌 저리 빠를 수 있을까? 그녀의 몸은 순식간에 도관의 천장을 뚫고 사라졌다. 쏴아……. 바로 다음 순간, 폭푸우가 밀려오듯 한 줄기 음산한 바람과 함께 한 사람이 안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무류흔은 야래향이 왜 저토록 자신의 동생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동생이라면 바로 산 밑의 거한이 아니겠는가? 무류흔은 무심히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순간, 그의 동작은 얼어붙듯 멈춰서고 말았다. 눈, 한 쌍의 눈. 별빛인가? 여름저녁 남빛 하늘에 모습을 드러낸 신성(新星)처럼, 고요하고 잔잔한 한 줄기의 시선. 무류흔은 숱한 여인들 속에서 자라났다. 자연, 그는 여인을 보는 안목이 높았다. 야래향의 유혹이 별로 충동을 주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그조차도 이토록 아름다운 눈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게다가 이 눈에는 싱싱한 젊음의 활력이 풀잎처럼 서려 있었던 것이니……. 이 사람은 결코 거한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소녀였다. 미안(美眼)의 소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풋풋한 체향(體香)이 도관에 피어올랐다. 그녀의 뒤로는 늘씬한 아름다운 한 마리 혈학(血鶴)이 따르고 있었다. 보기 드문 붉은 깃털을 지닌 학의 두 눈은 유리알처럼 빛나고 있었다. 미소녀는 우두커니 선 무류흔쪽은 한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관절을 굽히지도 않은 채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곧장 야래향이 묶여 있던 곳으로 다가갔다. 이어, 그녀는 잘려나간 만년 교룡삭 을 살펴보더니 가볍게 중얼거렸다. " 운남 (雲南)의 곤옥도(崑玉刀)인가?" 그 말에 무류흔은 자신의 가슴팍을 무심결에 내려다보았다. 목걸이, 그리고 어릴 때부턴 걸고 있던 목걸이 끝에 매달린 옥도(玉刀). 미소년의 청아한 목소리가 다시 귓전을 파고 들었다. 그녀는 혈학을 향해 말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멍청이는 없을 거다, 소홍(小紅)." 혈학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소녀는 옥수로 학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멍청이는 자신이 한 일의 잘잘못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얼굴 가죽이 얼마나 두꺼우면 뉘우치는 빛 하나 없을까……." 무류흔은 이 말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았다. 생전 처음보는 남자에게 욕이라니, 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여인 속에서 자란 그는 여인에 대해 본능적인 보호의식을 가지고 있는 터, 지연 흘러나오는 그의 말은 부드러웠다. "소저는 지금 소생에게 말하고 있소?" 미소녀는 그런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붉은 입술을 내밀며, "고리타분한 책벌레 같으니…… 뭐가 소생이고 뭐가 소저란 말인가? 생긴 건 그렇지 않은데 갈수록 더 멍청하구나." "소저……." 순간 미소녀의 시선이 정면으로 무류흔을 향했다. 얼음조각이 살에 박히는 싸늘한 시선이었다. "너는 네가 얼마나 큰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느냐?" "……." "나의 오라비와 나의 언니는 그 성격이 포악하여 이미 세상에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나는 그들을 십 년 간 수도시켜 그들이 가진 악성을 제거시키려 했는데 네가 감히 나타나 훼방을 놓다니……." 무류흔의 맑은 두 눈에 가볍게 놀란 빛이 스쳐 지났다. "오라비라고? 언니란 말이오? 오오…… 그렇다면 당신들은 삼남매……?" 의문! 비로소 머릿속이 환히 개이는 듯, 거한이 말한 누이와 야래향이 말한 동생이란 바로 이 소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무류흔은 망연히 서 있다가 탄식을 터뜨렸다. "그랬던…… 가……?" 그는 시선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미소녀를 향했다. 그의 시선은 타는 듯 날카롭지도 얼음처럼 싸늘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순간, 태양을 마주본 것 같은…… 미소녀는 흠칫하는 기색으로 싸늘한 코웃음과 함께 시선을 돌려버렸다. "묻겠소. 소저가 말한 오빠와 언니의 행실은 과연 틀림없는 것이오?" "틀림없다면 어쩌겠고, 그렇지 않다면 어쩔 텐가?" 사사건건 시비조요, 금속성의 말투다. 그러나 무류흔은 끝내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남아가 자신이 한 일을 어찌 회피할까? 나는 소저의 말을 믿기로 하겠소." "그래서?" "나는…… 그들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겠소." 말과 함께 무류흔은 빙글 돌렸다. 순간, 미소녀는 꽥 비단폭 찢어지는 소리를 내질렀다. "네 능력으로 감히?" 무류흔의 몸이 뚝 멈춰 섰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할 듯 하다가 가볍게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명을 받고 그대로 움직이는 것은 종복(從僕)의 도리…… 나는 당신이 주인의 명을 받고 행동하는 것을 참작하여 허물을 탓하지 않겠소……." 당당한 말투였다. 그러나 순간, 다시 무엇인가 외치려던 미소녀의 입은 그대로 굳어들고 말았다. 대체 무슨 말인가? 설마하니 이 아름다운 미소녀가 누군가에 귀속되어 있는 한낱 종복의 몸에 불과하단 말인가? 바로 그때다. 오오……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지나던 바람조차 숨을 죽여 버리느가? 아무도 상상해볼 수 없었던설움의 농도를 지닌 탄식에 이어, 한 소리 물처럼 고요한 목소리가 도관 안으로 퍼져 들어왔다. * * * 달빛이 쌓이고 있었다. 달빛 아래 한 사람, 사람은 여인. 한 개의 바위 위에 그림처럼 서려 앉은 그녀는 일신에 눈처럼 흰 백의(白衣)를 걸치고 잇었다. 시선과 시선이 얽혔다. 파아앗! 무류흔은 일시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인가를 좀 생각해 보려했으나, 생각은커녕 손가락 끝조차 움직여지지 않고, 뇌리속으로 덧없이 떠오르는 한 느낌……. '아름답다…….' 그렇다. 소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만약 이 아름다움에 무슨 형용사건 갖다 붙이는 놈이 있다면 그 자는 사기꾼이거나 거짓말쟁이이다. 소녀는 손에 유리처럼 맑은 옥룡소를 하나 들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시선으로 조용히 웃었다. "그대는 미향이 시녀이며, 그 주인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마음속까지 시원해지는 듯한 영롱한 목소리. 무류흔은 피식 웃었다. 거한은 자신의 누이가 염왕보다 무섭다고 했다. 그러나 만약 지옥의 염왕이 이토록 아름답고 고운 목소리를 지녔다면 아마도 지상의 인간들은 모조리 자결하여 이 땅 위엔 한 사람도 살아 남지 않게 되었으리라. "군자란 도덕을 배우오. 도덕이 있는 사람은 가까운 친인의 흉허물을……. 입 밖에 내지 않음인데, 그녀는 그것을 말하였소. 또한 부적을 쓴 글씨체로 보아 그 학문의 경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터. 책을 많이 읽는 ㅅ람은 본시 험한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법이오. 그러나 그녀는 서슴없이 그것을 내뱉을 수 있었소." 소녀는 무류흔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세상에 사람이 없다 여겼더니 이런 한처에서 인물을 만났군요." "과찬의 말씀……." "그러나 소녀는 한 가지의 규칙을 이미 세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녀의 형매를 풀어주는 사람은 그들의 노고를 대신 치루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무류흔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보고 그들 대신 묶여 있으란 말이오?" "하지만 소녀가 내는 삼관(三關)을 뚫을 수 있다면 아무 하자가 없게 됩니다. 무류흔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허락없이 한 일이라 못내 가슴이 꺼림칙했소. 기꺼이 소저의 말을 따르리라." 소녀는 황홀하게 웃으며 옥수를 들어 무류흔의 발밑을 가리켰다. "지금 그곳엔 한 개의 진(陣)이 쳐져 있습니다. 그것을 파훼하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에요." 첫발을 내딛을 땐 모르겠더니, 두 발을 내딛자 풍경은 일변했다. 심야의 도관과 소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무서운 광풍이 천하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어, 그 바람 한자락 한자락은 표홀한 귀상(鬼像)으로 변하는 것이니……. 잘려나간 핏줄을 그대로 매단 인두(人頭)가 혀를 빼물고 허공을 난무하는가 하면 조각난 사지(四肢)들이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여기저기서 분수 같은 핏줄기가 난무하고 소름끼치는 귀성들이 공간을 가득 메워대는 것이다. 무류흔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그도 진을 안다. 알 뿐 아니라 아예 달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로 정대(正大)한 진법 을 익혔다. 이렇듯 사기(邪氣)가 넘실대는 요사스런 진법 을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슈욱! 피가 철철흐르는 한 개의 귀수(鬼手)가 그를 향해 쏘아왔다. 무류흔은 무심히 그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물처럼 고요했다. 순간, 귀수는 그의 등을 관통하듯 바람처럼 뚫고 사라졌다. '마음이 일면 상(像)도 더불어 산다. 마음을 죽이고…… 천천히 진의 요결(要訣)을 깨달으라…….' 무류흔의 시선이 진의 구석구석을 꿰뚫기 시작했다. 세상에 같은 모양의 진법 이란 없다. 이십사진(二十四陣)의 기초 진식 이외에는 모두 술법자의 응용에 의한 것이다. 동방(東方), 이십칠변(二十七變)에 여든세 개의 상(像)이 있다. 남방과 서방은 세 개씩의 변화가 더해지되, 북방은 동방과 역으로 진순이 배열되고 있었다. 이는 앞으로 시작하나 뒤로 시작하나 같은 효과를 나타내게 되는 연환진(連環陣)의 묘리(妙理). '거기다가 귀귀 오행 (鬼鬼五行)의 도리를 더하였다……. 단순하다.' 무류흔의 발이 미묘하게 엇갈리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식경 가량이 지난 후, 이 잘생긴 미공자는 한가로이 뒷짐을 지고 하늘의 달을 우러를 수 있게 되었다. 백의소녀는 약간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배시시 웃음을 피워올렸다. "의외로 당신은 진의 묘리에 달통하고 계시는군요……. 좋아요. 두 번째 관문은 차력비무(借力比武)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최초에 그의 앞에 나타났던 시녀 미향이 스르르 장내로 내려섰다. 백의소녀는 담담히 웃으며 그녀를 가리켜 보였다. "저는 본시 몸이 약하여 무예를 익히지 않았어요. 심심풀이로 이 아이에게 몇 수를 가르쳐 놓았으니 무례하다 탓하지 말고 한 수 가르쳐 주시기를……." 무류흔은 난처했다. 무예라면 천외성전 내에서 초일류로 꼽힐 만큼 달통했던 터. 그러나 집안의 유전병으로 시한부 생명이 된 후 자신은 이미 한 올의 공력도 일으킬 수 없는 처지가 아닌가? 이때다. 돌연,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시커먼 흑영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이 흑영의 모양은 몹시 괴이했다. 보통 사람의 세 배는 될 듯한 엄청난 키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꺼먼 천을 온통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놀란 시선을 안고, 흑영은 가래가 끓는 듯한 괴이한 목소리로 무류흔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삼가 속하가 공자의 명을 기다립니다." 속하라니? 맹세코 무류흔은 이런 괴상한 사람을 수하로 둔 적이 없었다. 무류흔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흑영은 시녀 미향과 마주 보고 우뚝 섰다. 백의소녀는 두 눈을 빛내며 흑영을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이어, 그녀의 붉은 입술 새로 나직하나 힘 실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향! 제일초는 개창망월(開窓望月)이다." 순간, 꿋꿋이 서 있던 미향의 몸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일수를 쭉 내뻗었다. 슉---! 펑---! 흑영은 고스란히 그 일장을 맞고 주르르 밀려났다. "공자, 이것은 비무입니다. 빨리 명령을 내려 주시길……." 백의소녀의 외침에 따라 미향의 제이초가 펼쳐졌다. 무류흔은 흑영의 정체가 궁금했으나 이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열석개패(裂石開牌)! 내려치는 힘엔 오푼의 공력을……!" 순간, 흑영의 몸이 바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을 때는 그토록 크고 둔해보이더니 일단 움직이자 그 동작은 놀랍도록 빨랐다. 슈파앗! 미향의 몸이 주춤 물러났다. 백의소녀의 외침이 이어졌다. "추풍소엽(秋風掃葉)!" 질세라 낭랑한 외침을 토하는 무류흔. "장홍획천(長紅劃天)!" 슈팟! 펑---! 초식! 백의소녀와 무류흔의 외침에 따라 한치의어김도 없이 움직이는 미향과 흑영! 내뻗는 초식은 갈수록 기묘해지고, 기묘해질수록 위력 또한 더불어 커졌다. 위잉--- 윙! 콰쾅! 한 순간, 백의소녀가 외쳤다. "천불대라인(天佛大羅印)!" 천불대라인! 이는 바로 신비파인 남해 보타문 (普陀門)의 절기, 겹겹이 이으니 장영(掌影)이요, 장영마다 솟구치는 엄청난 강기 ! 무류흔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마땅한 대응식이 떠오르지 않았다. 있다면 오직 하나! 무류흔의 몸이 맹렬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의 흰손이 허공에 미묘한 반원을 그어내렸다. " 이화접목 (移花接木)!" 슈슉---! 미향은 자신이 내린 힘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것을 깨달았다. 몸 속의 진기 가 사정없이 딸려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장력은 애꿎은 땅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말았다. 쾅---! 백의소녀의 옥용이 크게 흐려졌다. "천외…… 성전……?" 그렇다. 여인들, 천외성전의 여인들이 흰손으로 펼쳐 보이던 신비의 절기, 이화접목 (移花接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