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객 - 3편 (3/36)
나이 많은 시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늘이 그의 재능을 시기하고 있다고나 할까……? 언제던가…… 나는 그 분이 달빛 아래에서 시를 스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흐음?" "그것은 단순히 붓을 놀리고 시를 짓는 것이 아니라…… 마치 혼이 춤추는 것 같았지……. 온 하늘과 땅이 그의 시를 쫓아 춤추고 있었으니까……." "그럼 굉장한 학자가 아니신가요?" "아니, 세상에 그분이 남긴 글이라고는 한 줄도 없다. 다 쓰고 나면 즉시 태워 버리니까……. 썼다는 사실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거지……. 무예도…… 삶도……." 슬픈 달빛을 타고 거문고와 노래는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웃는다. 인생이란 이름의 슬픈 무대 위에서……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날 바에는…… 초록의 바람을 누르고 위풍당당히 살아가 보자…… 기도하고 싸우며 서로 사랑하자…… 아직도 세상에는 할 일이 남아 있으려니…… 그리고 언젠가 혼자 길바닥에 넘어지는 날이 오면…… 마른 하늘 우러러 통쾌하게 웃어 주는 거다. 태어났으며…… 그 운명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 * * 땅--! 하고는 반짝 쇠와 돌이 마찰되는 불꽃이 섬광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소년 무류흔은 이마에 맺힌 땀을 가볍게 문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몸은 과도한 피곤으로 비틀거리고 있었으나, 그의 두 눈만은 새벽별 같은 신선한 정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석벽, 높이는 십 장 가량. 고산의 한기로 하여 엷은 얼음층이 깔린 석벽인데, 앙상한 괴목 사이로 스며들어 온 아침 여명이 그 석벽을 무심결에 비추자…… 오오--, 금빛 비늘을 퍼덕이며 소스라쳐 놀라 물러나고 만다. 보라! 벽, 그리고 그 공간에 가득 메워진 조각들! 산과 강과 바다 그리고 땅, 또한 그 속에 혹은 눕거나, 서고, 앉아 있는 백팔 인의 사람들. 그 표정은 제각기 다르다. 울고 웃는가 하면 성내고 기쁨에 차 있으며 무엇인가를 갈망하기도 한다. 무릇, 이목구비신지(耳目口鼻身志)의 육관(六官)에 각기 불고불락(不苦不樂)이 있어 그것이 열여덟 가지가 되고, 거기에 탐(貪), 무탐(無貪)이 있어 서른여섯 가지가 되며, 이것을 과거, 현재, 미래에 대입하여 백여덟 가지가 되는 것을 인간의 백팔번뇌(百八煩惱)라 하거니와……. 이 한 순간, 사방 십 장의 작은 공간 속에 새겨진 백팔 인은 바로 그 백팔번뇌의 한 표상식을 나눠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완벽이라곤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각 속엔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육신을 몰아치는 극한의 고통을 정신으로 이겨내려는 의지와 닥쳐온 불행을 새로운 운명으로 승화시키려는 집념, 그리고 삶을 떳떳하게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겠다는 용기가 조각 안에 서려 있었다. 홀린 듯 선 채 자신이 만든 백팔번뇌도 앞에 서 있는 무류흔, 아침 햇살이 그의 콧등 위에 보석처럼 떨어져 내렸다. 문득, 그의 붉은 입가로 선명한 웃음이 새겨졌다. 그리고 그는 손에 든 징과 망치를 내려놓고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오늘도 하늘은 푸르다. 그 어느 것도 어제와 다른 것이 없으련만……. "나 무류흔은 길을 떠나려 하고 있다. 넒은 세상…… 그곳에는…… 남은 삼 년의 생명을 바쳐 무엇인가 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침햇살은 밝고도 영롱햇다. 천외성전(天外聖殿), 무림제일의 신비대파(神秘大波)로 알려진 이곳의 여인들은 제각기 맡은 일로 분주한 아침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천외성전에서는 상하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도 놀지 않는다. 궁주부터 하급시녀까지 제각기 맡은 일을 하는 것이 이곳의 관습이었다. 시녀 단홍(丹紅), 그녀의 일과는 정원의 꽃을 돌보는 것이었다. 천외성전에는 사시사철 사계의 꽃이 만발하는 백열 개의 화원이 있으며, 그 중 다섯 명의 궁주와 태상모모가 거처하는 후전의 화원들을 그녀는 돌보고 있었다. 국화(菊花), 가장 손이 가지 않는 꽃이다. 서리가 내려도 시들지 않고 돌보지 않아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 보인다. 단홍은 그래서 뭇꽃 중에서도 국화를 제일 사랑했다. 화원에 국화는 소담스럽게 피었다. 단홍은 필요없는 곁가지를 쳐 나가고 있었다. 똑…… 똑! 바로 그때, 돌연 흰 손 하나가 그녀의 눈앞으로 뻗어 왔다. 단홍은 소스라쳐 놀라 위를 올려다보다가 비명 같은 외침을 터뜨렸다. "소주님……?" 역광 탓으로, 그래서 더 창백해 보이는 얼굴, 얼굴은 웃고 있었다.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가위를 이리 다오……. 국화는 몹시 분위기를 타는 꽃이야." 단홍은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몸을 일으켰다. "언제 하산을……?" "삼강행실도를 가져다주겠니? 오늘은 너에게 꽃을 키우는 얘기를 좀 해야겠구나……." "국화에는 삼륜(三倫)이 있다……." 삼강행실도의 종이를 더운 물에 풀어 녹인 물, 무류흔은 그 물을 국화의 뿌리에다 적셔 주며 말을 이었다. "그 삼륜이란…… 일찍 심어 늦게 피는 군자지덕(君子之德)과 서리를 이겨내는 선비의 지(志), 물 없이도 피는 한사(寒士)의 기를 말함이다……." 단홍은 그저 눈부실 뿐, 무류흔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으나 그것은 아득한 공간을 떠돌 뿐이요, 그저 그의 붉은 입술과 고귀한 기품만이 방심(芳心) 깊은 곳을 사정없이 흔들고 있는 것이었다.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삼강행실도를 녹인 물을 뿌리에 부어 줌으로서 유사(儒士)의 기를 꽃에 전한다……. 꽃을 키우는 것은 세상을 다루는 이치와 같다. 앞으로는 이 점을 명심해라, 단홍" 이윽고 무류흔이 몸을 일으키자 단홍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얼굴을 노을처럼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천비가 속히 소주께서 오셨음을 알리겠어요." 무류흔은 담담하게 웃으며, "오랜만에 온 집이니 천천히 돌아보도록 하겠다……. 너는 아무에게도 내가 왔음을 알리지 마라……." * * * " 소림 의 파화편지를……?" "내색치 않고 그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황, 청, 녹, 혈, 사색(四色)의 옷. 네 명의 여인, 그들은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하고 부복하고 있었다. 만약 어떤 무림인이든 이 네 여인의 정체를 안다면 거품을 물고 실신이라도 했으리라. 천외오선(天外五仙), 이들은 바로 이십 년 전 무림에 돌풍을 일으켰던 천외오선의 네 사람. 천선, 아랑, 지선, 대대, 인선, 미미, 뇌선, 영영…… 그들이었던 것이다. 이 하늘아래 누가 감히 이들의 부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노파, 일신에는 검은 현의(玄衣)를 걸쳤다. 자줏빛 포단 위에 앉아 냉엄한 얼굴로 한 개의 수석을 다듬고 있는 노파. 질식할 듯한 침묵 속에서 노파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러들 가거라……." 사선(四仙)은 숨 한번 크게 내쉬지 못하고 물러 나갔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는 물론 문 닫는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물러 나갔다. 문이 닫히자 어둠이 싸였다. 모든 문과 창엔 검은 막이 처져 있었고 그것은 한 올의 햇살도 허용치 않고 있었다. 어둠……. 천외성전에서도 가장 깊은 곳, 대숲에 둘러싸여 대잎을 울리고 지나는 바람소리와 새의 지저귐을 벗삼아 고독하게 살아가는 노파…… 태상모모 화군(花君)이라고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이 육칠십의 은발노파에 불과하나, 이미 나이 백마흔 살, 또한 천외성전의 오선녀를 키워 낸 절대기인이기도 한 것이니…… 어둠도 깊고 침묵도 깊다. 이때 돌연, 사박…… 사박……. 지면을 스치는 발자국 소리. 순간 노파의 굳은 얼굴이 처음으로 가벼운 격동을 일으켰다. "류흔……?" 왈칵! 다음 순간, 한 무리의 햇살이 안으로 해일처럼 밀려 들어왔다. 그 빛무리 속으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큰 소리로 외쳤다. "왜 이렇게 어둡죠? 이런 취미는 정말 할머니에게 안 좋아요!" 노파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것은 처음의 냉엄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 같았다. "이 녀석! 오자마자 이 할미에게 시비로구나." "핫하……." 무류흔은 냉랭하게 웃으며 사방의 검은 막을 모조리 걷어치웠다. 이어, 어깨에 메고 있던 포대를 내려놓았는데 그 속에서 나온 것은 찻잔이며, 접시 등의 집기류…… 하나같이 밝은 색깔들이다. "도대체가 할머니 방은 검은 찻잔에 검은 차일…… 이것도 검고 저것도 검으니……." 콰당탕! 출렁! 놓여 있던 검은 색의 집기들은 모조리 포대 속으로 처박히고 대신 밝은 색의 집기들이 그 자리에 놓인다. 한바탕 난리를 친 후 마지막으로 화병에 한아름의 국화를 꽂고 난 무류흔. "어때요? 밝고 좋죠?" "이 할미는 눈이 부시구나." "습관이 되면 나아지실 거예요." 무류흔은 싱글벙글 웃으며 다락문도 열어 보고 벽장문도 열어 본다. "할머니 방에는 늘 먹을 것이 있었는데……." "……!" "옷도 부탁해 놨어요. 흰색으로요. 할머니가 입으면 몹시 어울릴 거예요." "……!" 무류흔이 이곳저곳을 기웃대는 동안 노파의 시선은 조용히 그를 따르기만 했다. '녀석…… 유난히 말이 많구나…….' 노파는 웃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너는 집을 떠나기로 했느냐! 류흔." 순간, 호들갑을 떨던 무류흔의 몸이 멈칫했다. "……?" 노파의 눈에 인자한 안광이 피어올랐다. "어젯밤……, 너의 노래는 유난히 슬펐다……. 그 속에는 장부의 의기가 서려 있었을 지니……. 류흔, 가서 꽃을 하나 꺾어 오너라. 할미가 네 앞길의 길흉을 점쳐 주리라……." 무류흔은 불같이 고요한 시선으로 노파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그녀가 자신의 뜻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류흔은 잠시 생각하다 화병 속의 국화 한 개를 뽑아 노파에게 주었다. 노파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올랐다. "국화 한 송이……, 좋구나……." 무류흔은 그녀의 손에서 꽃을 다시 받아 들더니 아까 뽑아 냈던 그 화병에 조용히 꽂아 놓았다. 순간, 노파의 입에서 대소가 터져 나왔다. "핫하……."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좋은 일! 국화는 늦게까지 피는 꽃, 다른 꽃이 다 지고 난 뒤에도 살아 남는 꽃……. 더욱이 그것을 다시 화병에 꽂았으니 이는 모든 사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너의 착한 성품을 말하는 구나……. 큰 근심은 작은 근심이 되고 흉함은 길(吉)로 바뀔 터, 이것은 대개(大開)의 징조이다……." 노파는 웃음을 멈추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는 네 어미와 이모들은 만나 보지 않을 생각이냐?" 무류흔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려를 끼칠 뿐이지요……." 두 조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노파가 웃으며 두 손을 벌리고 무류흔이 그 속으로 안겨 든 것은 동시의 일. 노파는 웃으며 무류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 웃는 노안에 고인 것은 눈물……. 손자의 맥(脈)이 온몸으로 전달되어 온다. 그것은 삼 년의 시한부 생명……. 아아--- 나의 아이야…… 본래부터 어둠을 사랑한 것은 아니다. 한때는 이 늙은 몸에도 야망이 있고 꽃이 있었나니…… 그러나……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하늘을 덮는 무예도…… 거대한 집단도…… 사라져가는 네 생명을 붙잡을 순 없었나니…… 그때부터 이 할미는 어둠을 사랑하게 되었다. 너를 사랑하듯…… 그렇게 어둠을 사랑하였다. 노파는 자신의 앞섶이 축축이 젖어 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울고 있는 것이다. 손자 무류흔도 울고 있는 것이다. 참고 참던 눈물 한 방울이 손자의 목덜미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래……, 가거라……. 태어난 것이 죄가 아니듯…… 세상에 마음껏…… 네가 태어났음을 알리는 거다……. 아이야. 나는 네가…… 진정으로 자랑…… 스럽다……." * * * 무류흔이 떠나가던 그 순간에……. 한 사람, 한풍이 몰아치는 산봉의 한 동혈 앞에 앉은 한 사람. 백의(白衣)이며…… 그 옷처럼 희고 맑은 피부의 미부(美婦). 그녀는 동굴을 뒤로 하고 앉은 채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시선은 아득한 산 아래를 향하고 있으되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는다. "류흔이…… 가고 있다." 고귀한 얼굴에 눈물처럼 웃음이 피어올랐다. "내 몸으로 낳았던 아이가 저렇게 믿음직한 모습으로……." 바로 그때다. 바람결인가? 동혈 속으로부터 한 사람의 침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가야 할 것이니……." 오오……. 이것은 사내, 사내의 목소리! 미부는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신을 닮았어요. 저 고집은…… 부모를 만나 보지도 않고……." "운명이오……. 아아…… 나처럼 저 아이도 집안의 유전병을 앓을 줄이야……. 나의 아버지가 그러했고…… 할아버지가 그러했듯…… 저놈까지 이 아비의 운명을 닮을 줄이야……." "……." 나는 저 아이가 나이 삼 세에 학문을 달통했을 때……,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빌고 또 빌엇소……. 대대로 이어온 이 유전병은 시한부 생명과 더불어 총명까지 주는 것이니…… 내가 구 세에 익힌 학문을 삼 세에 익힘은 나보다 세 배나 총명하다는 뜻…… 도한 그 총명만큼 세 배나 빨리 죽는다는 뜻…… 내 나이 쉰이니, 저 아이는 십팔 세를 넘기지 못한다는 뜻……." 문득 창백한 손 하나가 미부의 어깨 위로 놓였다. 홍면 수사, 일견해 보기에도 그 고귀함이 천하를 뒤덮는 그는 잔잔하게 웃으며 미부의 어깨를 토닥였다. "슬퍼하지 마시오. 소소(蘇蘇)……, 저 아이는 자신의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려 한 것이오……. 우리 또한 저 아이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하지 않겠소?" 제 3 장 괴이(怪異)한 오누이 ---------------------------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무엇도 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은자 한 푼, 수저 하나도 들고 오지 않았다. 무류흔은 천천히 산을 올려다보았다. 십만대산(十萬大山), 그가 태어났고, 꿈을 키우고 살아온 곳, 오늘따라 산은 또 왜 저리 아름다운가? 산봉이 머리에 인 하늘이 눈부시다. 무류흔은 풀잎을 하나 입에 물었다. "가자……." "쿨럭…… 쿨럭……." 가슴속으로부터 불현듯, 고통스런 기침이 터져 나왔다. 은자 한 푼 지니지 않았더니, 이 기침만이 나를 벗하는구나. 산이여……, 그러면 안녕……. 나는 빈털터리 방랑객……. 길은 외길, 관도(官道)는 아스라이 동쪽으로 뻗어 있었고, 무류흔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첫걸음을 떼어놓았다. 헛허…… 마지막이다. 살아서 다시 이 산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어휘처럼 두번 다시 흙을 만져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시작도 끝도 없는 막막함의 여행. 그래도 내 인생 하나의 의미로 남아, 사는 그 순간까지 눈물도 흘리고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살 수 있을까? 그때까지…….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떤 일과 부딪쳐도 좋다. 세상을 보라. 그 세상 속에서 궁극적으로 내가 할일을 찾아본다. 첫 번째 목표는 소림사 다. * * * 길을 가다 잘 곳을 찾지 못하고 어둠을 맞게 되는 것처럼 곤란한 것은 또 없다. 거기다가 무류흔은 길까지 잃었다. 십만대산을 떠난 지 팔 일째 날. "노을이 너무 아름다웠어……." 본래는, 분하(分河) 하류에서 만난 한 떼의 상인들과 같이 길을 가고 있었으나, 무류흔은 노을의 아름다움에 넋이 팔려 있다가 그만 그들의 뒤로 처지고 말았던 것이다. 깊은 산속이었다. 아무리 원래의 길을 찾아보려 해도 길은 점점 더 가팔라져만 갔다. 무류흔은 생각을 바꾸었다. 우선, 맹수의 습격을 피할 만한 노숙처를 찾기로 한 것이다. 그때 돌연 빽빽하던 눈앞이 확 트였다. 분지, 밀림의 끝은 하나의 분지였다. 사방 오백여 장쯤 될까? 분지에는 콩알만한 크기의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무진장으로 피어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것들은 달빛을 털며 파도가 춤추듯 이리저리 일렁이고 있었다. 뿐인가, 공간을 감도는 신비로운 야기(夜氣), 실로 요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인데……, 더더욱 기이한 것은 분지의 중앙, 그곳에 놓여 있는 한 개의 거대한 바위와 그 앞에 정좌한 종탑 같은 거한이었다. 바위도 크고 사람도 크다. 바위의 두께는 족히 십만 근은 되어 보였으며, 거한은 앉아 있는 키가 보통 사람의 키만했다. 무류흔은 이런 심산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여 앞으로 나섰다. 가까이 다가서니 거한은 멀리서 볼 때보다 더욱 위맹스러웠다. 일신에는 우스꽝스럽게도 오색(五色)의 채의(彩衣)를 걸쳤는데, 얼굴은 검고 고슴도치 같은 수염을 길렀으며 두 눈에서 솟구치는 안광은 마주보지 못할 정도였다. 거한의 발에는 하나의 끈이 매여져 있었다. 그 끈은 분지의 한쪽을 가득 메울 만큼 쌓였으며, 끈의 끝부분은 바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위를 산지사방으로 칭칭 돌려 메어 열겹, 스무겹의 매듭이 져 있는 것이니……. 매듭의 옆엔 부적(符籍), 노란 바탕에 붉은 주사(朱砂) 글씨의 부적이었다. 부적의 뜻은 알 수가 없었다. 상황으로 보아 이것은 누군가가 거한의 행동을 속박하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끈의 길이를 저토록 길게 하였을까? 끈의 길이로 보아 거한이 마음만 먹는다면 다리를 묶고서도 족히 일 리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류흔이 물었다. "왜 그러고 있소?" 거한은 무류흔을 힐끔 바라보더니 어울리지 않게도 땅이 꺼질 듯한 탄식을 터뜨렸다. "묶여 있는 것이오." "그 끈을 풀면 되질 않소?" "저 매듭은 내 누이가 직접 매 놓은 것이오. 누이는 저 매듭을 풀 때까지는 날보고 일 리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였소." 무류흔은 더더욱 어리둥절하여 말했다. "당신의 누이는 어찌하여 당신을 이렇게 묶어 놓았단 말이오?" 거한은 처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이는 내가 포악한 성격을 지니어 필시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라고 하였소." "포악?" "나는 사실 그리 포악하지 않소. 내가 한 일이라고는 백서른 그루의 나무와 이백두 개의 바위를 부순 것뿐이오." "고작 그런 일로……?" 거한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필이면 나무와 바위 밑에 사람이 있었단 말이오. 그러나 내가 언제 그들보고 그 밑에 있으라고 하였소? 아아…… 나는 너무 억울하오……." 맙소사! 부술 때마다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최소한 삼백여 명의 사람을 나무나 바위처럼 만들었을 것이 아닌가? 무류흔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당신의 누이는 어디에 있소?" 거한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소. 누이는 바람 같으며, 또한 아름다우면서도 무섭소. 어린 사람도 내 누이를 만나기 전에 얼른 사라지는 것이 좋을 거요. 그녀는 염라대왕보다도 더 무서운 여자요……." 무류흔은 이 거한이 말처럼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나쁜 사람이라면 누이의 말을 이렇게 잘 지키고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 끈이 풀리지 않는다면 당신은 끝내 이곳을 떠날 수 없겠구려?" "그렇소. 나는 하루의 스물세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오. 만약 저 매듭을 풀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평생 그를 위해 세 가지 일을 해 줄 것이오." 무류흔은 바위의 매듭을 살펴보았다. 그 매듭은 과연 복잡했다.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도 어디가 끝이고 어디가 시작인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린 사람은 헛수고하지 마시오. 나는 그 매듭을 삼 년 동안 연구해 봤을 뿐 아니라 천하의 지혜로운 사람은 다 불러 보았소. 그러나 아무도 매듭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없었소." 무류흔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밝은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렇군." 그는 거한의 어리둥절한 시선을 안고 거한의 옆에 놓인 칼을 집어들었다. 팔십 근 대도(大刀), 들기조차 어려운 그것을 머리 위로 치켜든 무류흔은 이어, 낭랑한 기합을 토하며 힘껏 바위를 내리쳤다. 쨍---! 투투둑……. 순간, 바위를 두르고 있던 끈들이 한 번에 잘라져 나갔다. 무류흔은 얼떨떨한 표정의 거한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끊으나 푸나 어쨌든 매듭을 잘랐소. 당신은 이제 누이의 금제(禁制)를 풀었으니 자유의 몸이오." 거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 갔다. 그렇다. 과정이야 어쨌든 매듭은 풀린 것이다. "와아---." 순간, 거한은 함성을 지르며 허공으로 거구를 띄웠다. 그는 허공에 뜬 자세로 쭈욱 바위를 향해 쌍장을 내뻗었다. 콰콰콰……. 쾅! 단숨에 먼지 조각처럼 부서져 나가는 십만 근의 거석(巨石)! "왓하하하……." 고막이 터질 정도의 웃음소리에 이어, 거한의 몸은 대붕(大鵬)처럼 아득한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바위, 부서져 나간 돌조각에선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뭉클뭉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무류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서운 열양장력(熱陽掌力)이로군……. 내가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닐까?" 무류흔은 거한이 사라져 간 허공을 한차례 올려다본 후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관(道館),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것은 분명히 도관이었다. 그리고 폐허인 것일까? 무류흔이 곧장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그곳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찾아볼 수 없었다. 늦봄인데도 도관의 안은 썰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