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객 - 2편 (2/36)
열다섯 살에 六月 五日의 생일을 가진 소년들, 그 중에는 무림세가 의 자제도 있고, 빈농(貧農)의 촌소년도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한 통, 남쪽으로 길을 떠난 유운화상은 자신이 이미 대륙의 남단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했다. 운남 (雲南). 밀림과 독충, 그리고 열양(熱陽)과 오지(奧地)……. 유운화상은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십여 처의 험하디험한 대밀림을 헤매었다. 독충에 물려가며, 맹수에 쫓겨가며…… 그러나 더 이상 그의 앞으로 십오 세의 소년은 나타나주지 않고 있었다. "으헉!" 거미,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으되 흉측한 녹색 털이 수도 없이 돋아난 거미, 그것은 분명히 스치기만 해도 몸이 녹는 맹독의 인면지주 (人面蜘蛛)가 틀림없다. 유운화상은 자신의 머리 위로 급속히 떨어져 내리고 있는 그것을 피해 재빨리 발에 힘을 주었다. 확! 순식간에 허리까지 땅속으로 파묻힌 그, 촌각의 틈 새로 뻗어나가는 것은 소림 비전(小林秘傳) 탄지신통 (彈指神通)! 슈파악! 지풍(指風)은 정확히 거미의 몸을 관통했다. 유운화상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 속으로, 열한 번째 밀림의 무성한 잎 새로 조그만 마을이 나타났다. 운남 으로 들어온 지 서른두 번째 만나는 마음이었다. 토담, 먼지가 이는 황토흙, 새로 지어진,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흙집. 좁은 골목 양쪽으로는 앙상한 몸매의 반나체 운남 인들이 제멋대로 벽에 기대거나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대로 피부를 태워 내는 태양과 쉴새없이 불어대는 황사(黃砂)에 무기력해진 것이리라. 그들은 마을로 들어선 이방인에 대해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운화상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문질러 닦으며 탄식을 터뜨렸다.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언어가 통하질 않았다. 그는 쉴새없이 손짓, 발짓을 해보았으나, 운남 인들은 그런 그를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볼 뿐이었다. 느닷없는 중원의 한어(漢語)가 울려 퍼진 것은, 쉴새없이 불어오는 황사 속이었는지라 유운화상은 자신이 처음에는 착각을 했다고 느꼈다. 그러나 목소리는 분명히 들려 오고 있었다. "당신이 말하는 것과 비슷한 소년을 나는 알고 있소." 토담벽, 그곳에 마치 걸레쪽처럼 기대앉아 있는 노인 하나, 가뭄에 메말라 터진 논처럼 쭈글쭈글한 얼굴이다. 그는 곰방대를 피워 물고 있었다. 유운화상은 다급히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노인장은 한인이시오?" 노인은 그 한마디 후 묵묵부답. 유운화상은 다급히 품속에서 은전 꾸러미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주위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운남 인들의 시선에 번쩍 광채가 일었다. 노인은 은전 꾸러미를 힐끔 바라본 후 앙상한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곳이오……. 십만대산(十萬大山)이오……." 손가락의 끝이 가리키는 도대체 몇 개인지 헤아릴 수도 없는 거봉(巨峯)의 산맥. * * * --아침 햇살 아래 그는 가장 높은 산봉에 우뚝 서 있곤 하오……. 거리가 멀긴 하나, 그는 분명히 소년이오. 소년이면서도 그의 몸에서는 엄청난 의엄이 일고 있소……. 아스라한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 시선 속엔…… 대지를 온통 삼켜 낼 듯 장엄한 기품이 서리오……. 그는 아마도 산속에 사는 선녀(仙女)들이 키우고 있을 것이오……. 그 선녀들은 계곡과 계곡을 둥둥 떠다니기도 하며, 손끝에서 붉고 푸른 섬광을 피워 올리기도 하오……. 나의 짐작이 틀림없다면…… 그렇소……. 그 언제던가…….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닥친 듯 엄청난 광풍폭우가 몰아친 날, 최후의 노을 속에서 그 소년은 태어났을 것이오……. 그 날…… 십만대산 위의 하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기로 뒤덮였던 것이오……. 깊다, 깊다 해도 이렇듯 깊고 험할 수 있을까? 경신술(輕身術)도 보법 (步法)도 통할 수 없는 극천(極天)의 오지(奧地)……. "헉헉……." 유운화상은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다. 절벽과 가시덤불과 무성한 수림 탓으로 그의 법의는 온통 피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일까?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장엄한 수목의 행렬뿐, 유운화상은 이마의 땀을 소맷자락으로 훔치며 주위를 바라보다가, 문득 두 눈에 기광(奇光)을 스쳐 보냈다. 비(碑), 거대한 유자수 아래 세워진 한 개의 비. <壇入本山者死 함부로 본 산에 들어오는 자는 죽는다.> 비, 석비의 맨 밑 면엔 다섯 가지의 청, 홍, 황, 녹, 백 색깔을 지닌 학(鶴)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유운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무림인들의 표식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표식은 마을 노인의 말을 증명해 주는 것이리라. 유운화상은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고 급히 석비를 지나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다. 아득한 단애(斷崖)의 한곳에서 흰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그것은 순식간에 허공을 수백 장이나 가로질러 유운화상의 머리 위까지 이르렀는데……. 오오…… 놀랍게도 그것은 바로 두 마리의 거대한 백학(白鶴)이 아닌가?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 학의 등에는 각 한 명씩의 여인이 올라 타 있다는 사실이었다. 구름결 같은 수발(秀髮)이며, 오색의 아름다운 채의(彩衣)를 걸친 미녀들, 싸늘한 시선이다. 그 싸늘한 시선과 접하는 순간, 유운화상은 부르르 몸을 떨고 말았다. '무서운 고수들이다!' "당신은 누구죠? 석비의 경고를 보지 못했나요?" 유운화상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 보았소만……." 순간, 한쪽 학 위의 미녀가 교갈(嬌喝)을 터뜨렸다. "경고를 보고도 들어오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말끝은 아직도 허공을 감도는데…… 학의 등을 맹렬히 박차고 솟아오른 그녀, 바람개비처럼 서너 번 몸을 뒤집는가 싶더니, 어느새 유운화상의 코앞에 이르러 환상처럼 일장(一掌)을 내밀어 온다 슈우욱! "여…… 여시주! 빈승은……." 유운화상은 다급히 급류용퇴(急流湧退)의 일식으로 주르르 뒤로 물러났다. "흥! 재간이 좀 있긴 있구나!" 그러나, 미녀는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재차 옥수를 맹렬히 쳐냈다. 빠빠빳! 이게 무슨 소리인가? 유운화상은 미녀의 손이 구슬처럼 투명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확실히 소림 비전인 반약현공(盤若玄功)을 쳐냈다. 하나, 세상이 일시에 투명한 백옥 광채로 뒤덮이는 듯한 순간이 그의 몸을 덮치고……, 몽롱한 백기(白氣)가 현공을 파고들며……. 피핑--! 피, 피와 더불어 유운화상의 몸이 뒤로 날았다. '이것은 천외성전(天外聖殿)의 화혼수라수(花魂修羅手)? 오오…… 이럴 수가…….' 천외성전? 거기다 화혼수라수라니! 아아…… 그 언제던가? 신화(神話)! 무림 속의 신화! 그렇다……. 그들은 바로 여인들…… 한 번 웃으매 하늘과 땅이 취하고, 한 번의 옷자락에 천하가 함께 너울댔던 극세(極世)의 미녀들……. 천외성전! -- 우리는 천외성전의 사람들……. 그것이 그녀들이 세상에 남긴 첫마디요, 마지막 말이었다. 그녀들은 삼 년을 주기로 하여 차례대로 무림에 나타났다. 밤하늘의 우성인가? 흰 옷자락 속에서 검광(劍光)이 솟으며 세상의 광채가 그로써 사라지는 환상의 검! 신비의 천룡대검식(天龍大劍拭)! 천선(天仙) 아랑(娥娘)……. 한 자루 금빛의 봉(棒) ,짧을수록 무섭고 작을수록 강하다! 봉의 광채는 수억의 태양처럼 작열할지니……. 금봉(金棒)! 저주의 마라이십구봉초(魔羅二十九棒招)! 지선(地仙) 대대(垈垈)……. 륜(輪) ! 태양과 달이 한꺼번에 뜨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쌍륜(雙輪)이 흐르매 세상의 악은 그로써 종말을 고하는……. 쌍륜! 전율의 납풍신화륜(納風神火輪)! 인선(人仙) 미미(微微)……. 옥장(玉掌)……. 서럽도록 투명해서 그것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슬프도록 아름다워서 그것은 환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아름답고 투명한 손으로 펼쳐지는 악마의 장법 , 전설의 화혼수라수! 뇌선(雷仙) 영영(影影)……. 마지막 한 사람, 지혜…… 학문…… 백 명의 거유(巨儒)와 천명의 대학(大學)이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흰 옷자락을 날리며, 붉은 꽃잎 같은 입술이 나풀거릴 때마다 새어 나오곤 하는 엄청난 예지……. 화선(花仙) 소소(蘇蘇)……. 천하는 이 경국가녀(傾國佳女)의 지혜에 두 눈을 부릅떴다. 도대체 그녀가 모르는 것이 무엇이냐? 사람들은 말했다. 그녀가 모르는 것은 아마도 세 가지일 것이라고……. 그 하나는 그녀의 배에서 태어날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 둘째는 그녀 자신이 언제 죽을지, 그 셋째는 그녀가 모르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화선 소소, 그녀는 지혜의 여신이었다. 도합 다섯의 미녀들, 수없이 많은 무림의 명숙(名宿)들이 그녀들의 손에 앞을 다투어 쓰러져 갔다. 어떤 고수도 감히 그녀들의 손 아래서 십초(十招)를 넘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들을 비방하기는커녕 오히려 칭찬하느라고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천외오선(天外五仙), 이들은 어디까지나 정중한 예의로써 비무(比武)를 청했으며, 이긴다 해도 교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추운 한풍이 휘몰아치던 겨울의 어느 날, 중원의 자랑이요, 희망이던 그들은 일제해 자위를 감추었다. 구슬처럼 영롱한 목소리를 천하에 남긴 채. --중원은 쇠락하고 있다……. 그 무예와 지혜는 멸망의 길을 치닫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중원에서 태어나고 배운 중원의 딸들……. 중원을 위해 돌려주리라……. 이십 년 후, 우리의 후계자가 그 힘을 중원에 돌려주리라……. 무림 속의 신화, 신비의 집단! 그 천외성전을 이런 오지에서 보게 될 줄이야……. 쿠당탕!! 유운화상은 사납게 땅을 구르고 나서 사력을 다해 손을 쳐들었다. 떨리는 손, 그리고 말……. "혹시…… 이곳에…… 십오 세 소년……. 그에게…… 이 편지를……." 채 말을 다 잇기도 전에 그의 고개가 쿡 땅으로 처박혔다. 열혈의 인간……. 스무 통, 스무 통째의 편지였다. 제 2 장 학(鶴)과 소년(小年) --------------------------- 산(山), 산 아래는 초봄, 그러나 고산의 위는 겨울. 온통 흰빛 일색인 설산의 한곳에 우뚝 솟은 한 채의 궁. 천상의 궁이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보라! 궁벽은 운남 의 대리석이요, 궁의 지붕들은 신강 (新彊)의 오석(烏石), 궁에 햇살이 비치면 오색 영롱한 채광이 아롱지고 황혼녘엔 마치 불타듯 신비로운 색깔을 뿜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월계(月界)의 항아 궁(姮娥宮)이라 한들 이보다 더 신비로울까? 궁, 환상의 궁. 이곳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태양(太陽)! 이 소년의 머리 위론 뜨지 말게. 네 광채는 사라지고 말 테니까…… 꽃도 피지 말게. 그의 앞에선, 그것이 꽃인지 뭔지 알 수 없게 되고 마니까. 하늘도 놀랐다네. 자신이 만들어 놓고도 놀랐다네. 혹시 그 눈을 보았나? 그것은 눈이 아니야. 온갖 빛의 결정체였지. 그렇게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이란 이제껏 아무데도 없었지. 여인처럼 붉은 입술…… 그것은 전율이야. 한 쌍의 눈처럼 흰 송이, 하늘을 우러르면, 천하는 그로써 향기에 뒤덮이고 말 테지. 땅은 말한다. 그의 몸을 받치고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가장 큰 영광임을…… 소년, 그는 아름답다네. 그리고 이후론 이 아름답다는 말을 아무데도 쓰지 않겠네. 진심일세…… 손(手), 이 손은 눈부시게 희었다. 손을 덮고 있는 것은 깨끗한 백의. 아득한 산정에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데, 그 한쪽에 조용히 선 소년. 햇빛에 반사되는 눈의 탓인가? 약간 창백한 안색이며, 그래서 그 입술은 더욱 더 붉어 보이는 한 명의 미소년, 그러나 아름답다. 창백한 그 얼굴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미소년은 눈부시도록 흰 깃털을 가진 학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날갯짓을 푸드덕거리며 소년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십여 마리의 학……. 그 학들이 주둥이로 모이를 받아먹을 때마다 소년의 얼굴엔 잔잔한 웃음이 퍼진다. 햇살처럼 영롱하고, 유리알처럼 맑고 천진한 웃음……. 오동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진 방원 이십여 장의 조그마한 공간, 통나무로 만든 아담한 목옥(木屋)이며 눈 쌓인 땅 위로 학과 어울린 소년의 모습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아닌가? 이때다. 문득 소년이 허리를 구부리며 자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웁!" 그런데, 오오…… 흰 손가락 새로 스며 나는 섬뜩한 선혈. 그것은 눈 쌓인 땅 위로 떨어지며 극렬한 아름다움의 혈화(血花)를 만들어 냈다. 눈과 소년과 피……. 소년은 한참 후에야 허리를 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베면 피라도 밸 듯 맑은 하늘을 우러렀다. "만 가지의 학문을 배우고…… 천 가지의 지혜를 익혔다……. 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건만…… 어찌 신은 나에게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삼 년만 더 볼 수 있도록 하는가?" 문득 소년의 몸 주위로 죽음처럼 어두운 고독이 피어올랐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고독은 춤추듯 허공에 허무의 잔상을 그려내고 있었다. 소년, 십오륙 세나 되어 보인다. 한창 몸과 이상을 키울 나이에 저토록 짙은 허무와 고독이란 웬 말인가? 한 쌍의 눈, 신비롭도록 맑은 이 눈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찰랑찰랑 눈물이 고여 있었다. 뿌옇게 흐려진 동공 탓으로 소년의 모습은 안개에 덮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탄식……. "가련한 것……." 눈의 임자는 소맷자락으로 가볍게 눈물을 찍어누르며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역시 눈물로 얼굴을 흥건히 적신 시비(恃婢) 하나가 정신없이 울먹이고 있었다. "소주님이 너무 불쌍하셔요……." "내색하지 마라……. 우리가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린 것을 안다면 저 아이는 더 상심하게 될 것이다." 비단 청의(靑衣) 미부(美婦)와 시비가 산정으로 올라서자 소년은 가볍게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발 밑의 혈화를 지워 없앤다. "넷째 이모님……." 청의 미부는 짐짓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류흔, 오늘은 신색이 밝아 보이는구나……." "핫하……. 좋은 날씨니까요." 청의미부는 소년이 가리키는 등받이 의자에 몸을 실으며 시비를 돌아보았다. "그것을 소주께 드려라." 시비는 수중에 들고 있던 물건을 소년의 앞으로 내려놓았다. 순간, 소년의 창백한 얼굴에 기쁨의 표정이 보석처럼 피어올랐다. "남국(楠菊)이로군요. 이 귀한 것을?" 화분, 그리고 꽃, 국화는 국화로되 노란 꽃잎 끝이 연한 남빛을 띄고 있다. 이는 바로 천하에 두세 그루밖에 없다는 희귀한 남국이 아닌가? "우연히 구하게 되었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청의 미부는 소년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했다. "그런데…… 류흔, 이곳은 너무 춥지 않으냐? 네 이모들과 엄마는 네가 홀로 이곳에 있는 것을 늘 걱정하고 있단다." "……." "대대(垈垈) 이모는 이번에 남천(南天)에서 귀한 연옥불상(軟玉佛橡)을 구해 왔단다. 네게 줄 거라고 손질에 여념이 없더라만……." 남국을 이리저리 살피던 소년은 싱긋 웃어 보였다. "이곳은 매우 좋습니다. 하늘이 바로 머리 위에 있고 천하가 또한 발 아래 있으니 류흔은 아무 불편이 없지요……." "그래도……." "저는 하루 세끼를 다 먹고 있습니다. 단경(端瓊)은 요즈음 제 식욕에 놀라고 있지요." 청의 미부는 따라 웃었다. 그러나 어찌 모르랴. 각혈과 기침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이며, 그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홀로 이곳에 기거하고 있는 소년의 깊은 마음을……. 마음속으로 진한 슬픔이 스며 올랐다. 청의미부는 탄식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이어 품에서 한 장의 두루마리를 꺼내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산을 들어오던 중 하나가 가지고 있던 게다. 그는 이것을 십오 세 소년에게 주라고 했는데…… 네가 이곳에 있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몹시 기이하여……. 그러나 두루마리의 내용은 통 알 수가 없더구나……. 별것이겠는가만 네가 가지고 있도록 해라……." 미부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언제…… 궁으로 놀러 오려느냐? 네가 궁문을 나서 이곳으로 온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으니……." "그러지 않아도 내일쯤…… 읽을 책이 없어서요……." 두루마리, 한 승인이 남겼다는 이 두루마리는 몹시 기이했다. 분명히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편지는 편지로되, 그것은 글이 아니라 모조리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깊은 산과 절……. 금홍빛 편액이 특이한 이 절의 문은 열려 있었고, 한 소 사미 하나가 절문 앞의 길을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두루마리의 내용은 그것이 전부였다. 소년은 가벼운 신음을 흘리며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홍촉 촛불빛이 일렁이고 목옥의 안은 아늑햇다. 이따금씩 창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 뿐, 화로 안의 장작이 타는 소리와 심지가 그슬리는 소리가 공간을 감도는 소리의 전부였다. 이때다. 소년의 두 눈이 돌연 밤하늘의 별처럼 맑은 혜광을 뿜어냈다. 그는 황급히 두루마리를 다시 집어들었다. "틀림없어……. 이것은 소림사 (少林寺)다……!" 소년은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절의 편액은 금홍빛을 쓰지 않는다. 금홍빛 편액이란 바로 황제가 하사한 것을 말하니, 천하에 이런 절은 소림 대사밖에 없고…… 절문이 열린 것은 사람을 맞아들인다는 뜻이요, 십오 세 소년이 대상이니 이것은 입문제자(入門弟子)를 말한다. 소 사미 가 갈을 쓸고 있는 것은 단순히 기명제자(記名弟子)가 아니라 적전제자(適傳弟子)를 뜻하는 것……. 결국, 이 파화편지는 소림사 가 그 제자를 맞아들인다는 뜻일 진데……. 여기까지 풀이하고 난 소년은 시선을 창밖의 야공(夜空)으로 던졌다. 소림사 , 천년의 무업을 쌓아 온 성지. 무림의 태산 북두로 일컬어지는 이곳이 무엇이 아쉬워서 이런 파화편지로 제자를 맞아들인단 말인가? "기이한 일……." 이때다. "쿨럭!" 느닷없이 입술을 꿰뚫고 터져 나오는 격렬한 기침. "쿨럭…… 쿨럭……." 가슴이 찢어지고 심장이 타는 것 같다. "쿨럭…… 쿨럭……." 소년은 문을 박차다시피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어, 달빛이 서리처럼 내려앉은 설지(雪地)로 미친 듯이 몸을 던졌다. 뜨거운 몸, 쓸모 없는 몸이여……. "쿨럭…… 쿨럭……." 흰 눈발 위로 핏물이 번진다. 이 기침은 오랫동안 소년의 가슴을 찢었다. 근육을 뒤틀고 핏물을 뒤흔들었다. 소년의 손가락이 얼어붙은 땅을 긁어내리며 혈선을 그었다. 소년, 그는 울고 있었다. 육신이 아닌 마음의 고통으로 울고 있었다. 헛허…… 나이 사 세에 사서오경 (四書五經)을 깨치고, 나이 육세에 학문의 도리를 깨달았다. 나이 십 세에 인생의 의미를 아니…… 사람들은 나를 신동이라 하였다. 달빛 아래에서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는 오열…… 중얼거림…… 그러나, 이 습기찬 대지여, 흙이여……. 인생의 깊은 의미를 찾아 살아 온 청춘이여……. 삶이 아니었던가……. 이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도 하늘은 나에게 한 편의 행복도 주려고 하지 않는가……? 대지를 뚫는 꿈을 지녔으련만, 청춘의 야망으로 밤조차 아쉽던 세월이련만, 이제는 삼 년의 시한부 생명에 곰팡이가 슬고 있다. 달빛은 서러웠다. 바람은 숨을 죽이고…… 대지는 흐느꼈다. 소년, 금년 나이 십오 세. 운명이 지은 그의 이름은 무류흔(舞流痕)…… 얼마나 찬란한 젊음이었던가? 학문과 무예와 폭죽처럼 터져 오르는 야망을! 그는 신동이었으며, 그는 무예를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무인이었다. 그는 십만 권의 경서를 읽었으며, 그는 신비집단 천외성전의 무예를 극한까지 익혔었다. 나이 십삼 세의 어느 날, 그의 진기 는 흩어져 갔고 그의 몸은 무기력해져 갔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리고, 그는 시한부 생명이 되었다. 툴툴……. 낙엽처럼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무류흔은 차디찬 대지에 뺨을 묻었다. 서늘한 감촉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좋다. 때로는 커다란 나무가 되는 기분이 들던 젊음이 아니었던가? 바람이 불면, 가지와 이파리들이 자지러지게 울고 서 있는 나무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피하지는 않는다……. 숨지도 않으리라……. 그것이 나에게 남겨진 마지막 자존심, 그리고…… 오기(傲氣)……. 뚱! 땅! 거문고, 산야를 휘도는 슬픈 거문고 소리……. 아름다운 궁, 궁 안의 모든 여인들은 잠자리를 뒤척였다. 산정의 이 거문고 소리는 그들의 혼을 사정없이 뒤흔들고 있었으므로……. 아름다우신 분, 바로 그 분이다……. 숲과 같이 깊고 대지처럼 강한 이 소리…….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여인의 아들이시며, 우리 모두의 빛과 희망이었던 당신……. 창백한 달빛 아래……. 오오--. 당신은 홀로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자신의 운명을 노래하시는가……? 잠결에서 막 깨어난 어린 시비 하나가 눈을 비비며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요?" 나이 많은 시비가 황급히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쉿! 너는 갓 들어와 모르겠지만 바로 이 궁의 작은 주인님이시다……." "그런데 왜 홀로 산속에서? 이 소리는 왜 이렇게 슬프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