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신객 - 35편 (35/36)

2026-09-22 08:27:13 조회 30
무수히 사살해 버린 시간의 중량이 이토록 무겁듯…… 추악한 육신 속에 숨은 채색독기가 이토록 서럽듯…… 헛허…… 나 이제 하나의 석상이 될까 보오…… 말 못하는 돌이 되어 세상과 쌓은 악연을 모두 잊을까 보오…… 왜 살아 왔는지…… 또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못내 서럽던 청춘이었소…… 때로는…… 하나의 가지 큰 청목(靑木)이 되는 꿈속에 몸부림쳐온 가련한 청춘이오…… 이 세상의 도덕을 믿소…… 당신이 세운 질서와…… 당신이 세운 삶의 법칙을 믿소…… 억겁 으로 이어지는 원죄의 업보 속에 당신 하나의 이름을 부르며 스러져 가야할까 보오…… 그렇소…… 이 몸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선도 하나의 악도 될 수 없었소. 농부의 쟁기도 쥐어본 적이 없으며…… 땀 흘려 수확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사람이오…… 다만 하나, 검을 쥐었기에 그 뜻대로 살고…… 이제…… 그 뜻대로 가려하오…… 신이여…… 나만의 신이여…… 이제 마지막 검을 드오…… 당신의 이름으로…… 이 설익은 손을 들어 검을 쥐어보오…… 이 모두는 당신의 뜻…… 그 동안의 삶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사를 드리오…… 눈물은 별빛 같고, 별빛은 눈물 같았다. 그리고 한 줄기 기적처럼…… 먼동이 새록새록 터오고 있을 때……, 이 신의 아들은 불에 타 일그러진 손으로 검을 잡았다. 제 29 장 비연투림(飛燕投林) --------------------------- 여자는 알몸이었다. 비릿한 날콩내음이 풍길 듯 팽팽하고 탄력있는 몸매 위로는 구슬 같은 땀발울이 자국이 매달려 있었고, 그 땀방울들이 격렬하게 흔들릴 정도로 맹렬한 율동에 여체는 파묻혀 잇었다. 들어갈 곳, 나올 곳, 휠 곳, 빠질 곳의 조화가 완벽한 몸매였고, 그 몸매 위로 검은 남자의 동체가 실려 있었다. 남자의 동체가 꿈틀거릴 때마다 여자의 붉은 입술은 끝없이 벌려졌다 다시 다물어지며 고혹적인 신음을 방안 가득 뿌려냈다. 질펀한 정사의 열기로 두 치 남짓한 대나무창이 있었고, 그 창으로는 이제 막 새벽의 여명이 물기둥처럼 방안으로 번지고 있었다. 한 순간, 사내의 검은 동체가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큰 율동 대신 가는 경련이 전신으로 물결처럼 번져가고 있었고, 여체는 그에 맞추어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터뜨려 냈다. 신이 허락한 최초의 행위가 종족번식이라면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은 또한 최초로 신의 율법을 어긴 종족일 것이다. 왜냐하면 종족번식은 엄연히 한정된 개체를 생산하게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거의 틈만나면 끝없이 번식행위를 계속해 왔으므로……. 그것이 낮이든 밤이든, 들판이든 방안이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거의 모든 순간에 기회만 주어지면 번식행위란 것을 해왔으므로……. 그 번식의 최종동작인 분출이 사내의 몸에서 일어났을 때 여자는 사내의 등에 사정없이 깊은 손톱자국을 내며 자신이 허용할 수 있는 한도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내려가." 사내의 말은 간단했다. 그는 자신의 내ㅁ물을 받아들인 여체를 발로 차듯 침상 밖으로 밀어냈다. 와당탕! 의외의 발길질에 구르고 난 여체는 그러나, 다급히 알몸을 추스려 정중한 시립의 자세를 취한다. 사내는 침상 옆의 다탁에 놓아두었던 긴 곰방대를 입에 물며 표정없는 어투로 말했다. "차는 늘 마시던 걸로." 허리에서 둔부로 이어지는 곡선을 유려하게 움직여 깊숙이 허리를 굽히고 난 여자는 공손히 뒷걸음질로 밖으로 걸어나갔다. 향(香), 오룡(五龍)의 향이 빚어내는 차내음은 달콤했다. 화옥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 오룡으로 달인 차였다. 오룡차 보다 더욱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새벽의 정사일 것이다. 새벽잠을 설치며 무심히 뒤척이다 손안에 잡혀오는 벌거벗은 알몸을 그는 좋아했다. 돈 몇 푼에 권력 몇 조각이면 얼마든지 날씬하고 아름다운 미녀들을 옆에 득실거리게 할 수 있었고, 새벽마다 그는 그러한 여체들을 정복하듯 유린한 후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겨왔다. 화옥이 여자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은 그의 측근 중의 측근들만이 아는 비사(秘事)였다. 때때로 그의 측근들은 화옥이 선호하는 여자를 구해다 대령하기에 거의 하루의 전부를 소모할 지경이었다. 화옥의 여자취향은 매우 까다로웠다. 첫째, 반드시 남자를 모르는 처녀여야 했으며, 둘째 처녀라 해도 화옥의 잠자리에 들 때까지는 남자를 즐겁게 하는 모든 기술을 다 익혀야만 했다. 거기다 화옥의 셋째조건은 명문대가의 처녀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앞의 두 조건까지는 어찌어찌 맞춘다 해도 마지막 조건은 화옥의 측근들이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명문대가의 처녀라는 것도 어려운 일이거니와 그런 처녀가 미쳤다고 강호무림의 수괴에게 몸을 바치겠다고 나서겠는가. 결국, 그의 수하들이 택한 방법은 납치와 유괴였다. 방금 화옥의 방에서 나간 여자도 사천 성 어딘가에서 유괴하여 열흘을 마차로 나른 귀족명문댁의 처자였던 것이다. 곰방대와 담배를 뻐끔이며 천천히 한 잔의 차를 마시고 난 화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방 좌측의 댓살로 된 팔각형의 창문을 그는 힘껏 밀어젖혔다. 잘 정돈된 소나무와 절의 수려한 처마. 그 위로 떠오르고 있는 새벽 여명이 한꺼번에 시선 속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찻잔을 손에 들고 천천히 한 모금을 들이키는 화옥의 얼굴에 싱긋 웃음이 번졌다. 오늘, 이제 많은 사람들은 오늘을 무림의 한 전기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천년무림사에 유래없던 천하통일의 대무객을 보게 될 것이며 중원, 관외 , 천축 을 잇는 천하제일고수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다. 혹자는 자신을 비난할지도 모른다. 상처를 입은 무류흔을 상대로 한 싸움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란 어차피 망각의 역사인 것이다. 사람들은 무류흔이 상처를 입었는지 어땠는지, 그런 몸으로 싸웠는지 어땠는지 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 기억하게 될 것은 영웅 화옥이 십만의 혈교 문인을 거느리고 천하에 군림하는 거대한 권력과 명예뿐이다. 거역하는 자에겐 공포를 주면 된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에겐 달콤한 사탕을 준다. 그렇다. 무류흔은 이내 잊혀지고 화옥만이 기억된다. 이것이 약육강식의 법칙이다. 인간세상을 지배해 온 가장 위대한 원칙인 것이다. 화옥의 얼굴에 번들거리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는 자기자신이 매우 대견하게 생각되었으므로 소리내어 툴툴 웃기 시작했다. 얼굴에 와닿는 햇살처럼 환하게 번져가던 그의 웃음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다. 와장창! 손에서 떨어지는 것은 잔이다. 화옥은 너무 놀랐으므로 자신이 홀딱 벗고 있는 알몸이라는 것과, 자신의 위치가 놀라서 잔 따위를 떨어뜨릴 위치가 아니라는 것까지 모조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 * * 한 그루 노송 아래. 도대체 언제부터 앉아 있었던 것일까. 한 자루 검을 가슴에 품고 고요히 자신의 발 아래,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 얼굴은 밀납처럼 창백하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는 한 갈래로 묶어 드리웠으며 긴 속눈썹이 마치 여인 같은, 그리하여 굳게 다문 붉은 입술까지 한 조각 관옥을 깎아만든 것 같은 아름다운 사내. 무류흔의 시선이 문득 화옥을 향했다. 그 얼굴에 한 줄기 흰 선이 그어졌다. 담담한 웃음이었다. "잘잤나, 화옥." 화옥의 다급한 시선이 무류흔을 훑었다. 그는 무류흔의 몸에서 허점을 찾아내기 위해 모든 시력을 총동원했다. 무류흔의 얼굴에서 목, 가슴, 그 가슴에 품은 한 자루 검, 전신에서 풍기는 고수자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여유로룬 한가로움까지 단숨에 읽고 난 화옥은, 그러나 무류흔의 우수에 손이 닿자 비로소 가볍게 웃었다. 무류흔의우수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검을 잡아야 할 손이요, 그 손에 붕대가 감겼다는 것은 검객의 가장 큰 무기인 감(感)을 잃어야 한다는 얘기였으므로……. 화옥은 이내 방긋 웃으며 가볍게 손을 들어보였다. "어떻게 된 것인가. 자네, 내가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먼저 내려왔군, 그래." "잠든 사람들을 깨우기 싫어서." "잠깐만 기다려 주게. 곧 나가겠네." 창문이 닫히는 것을 보며 무류흔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이곳은 절이었다. 지금 시각엔 불종이 울려퍼지고 암송이 울려야 할 터이지만 절은 고요하고 괴괴했다. 비단 괴괴할 뿐 아니라 여기저기 전각의 사방엔 스님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도대체 무슨 취향일까. 화옥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기 위해 절의 스님들을 모조리 도륙한 것이다. 그 스님들의 시체가 득시글거리는 이곳에서 그는 잠을 잤을 뿐 아니라 여자까지 껴안고 희희덕댄 것이다. '화옥…….' 화옥이 화려한 금색수실로 뒤덮인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은 반각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화옥은 웃고 있었지만 그는 내심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그는 반각의 짧은 시간 동안에 수하들을 총동원하여 주변을 훑었으며 그리하여 무휴흔이 누구와도 동행하지 않고 혼자 나타났다는 것을 파악하고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화옥은 금방이라도 안을 듯한 표정이 되어 무류흔을 향해 손을 벌렸다. "벗이여, 어제는 매우 걱정을 했었네. 혹시 망아 늙은 땡주이 자네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진 않았을까 하고 말이야." 무류흔의 입가로 담담한 웃음이 스친다. "그 반대가 아닌가. 망아 늙은이의 손에 죽어주었으면 하고 말이야." 말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듯한 현기가 번뜩이는 시선이 화옥의 얼굴로 꽂혔다. "그래야 날 때려눕힌 망아를 다시 때려눕혀 자네의 위신을 셍ㄹ 수 있었겠고." 화옥은 짐짓 크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무슨 말인가. 나는 어디까지나 자네와 정당한 승부를 원하이. 섬에서 수련할 때부터의 꿈이었지." 주위를 둘러보며 호들갑스럽게 화옥은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할까. 설마 여기서 당장 싸우자고 온 것을 아닐 테지?" 무류흔은 천천히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좀 일찍 눈을 떴길래……, 싸우기 전에 자네와 말이나 좀 나눌까하고 온 참이네. 산을 내려가서 식사나 할까?" "핫하하! 그거 좋은 생각이군!" 유쾌하게 웃으면서도 화옥의 시선은 연신 무류흔을 훑는다. 평생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으며 심기를 조종해 왔던 화옥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저히 무류흔의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놈이 무슨 심산으로 대결을 앞둔 내게 와서 저렇게 담담한 표정을 하고 밥을 같이 먹자는 거야……?' 머리를 굴릴수록 생각은 더욱 혼란하게 얽혔으므로 화옥은 무류흔과 나란히 걸어가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의 뇌리로 휘돌던 복잡한 생각들이 즉시 사라졌다. 이것은 화옥이 지닌 많은 장점 중 최대의 장점이라 할만했다. 피강자보(彼强自保) 달위순탈(達危順奪)의 도리! 저쪽이 강하면 스스로 보충하고 위태롭게 되면 과감히 버린다는 뜻! 마음을 비우고 있노라면 상대를 알게 된다. 그때가서 대응을 하면 되는 것이다. 화옥을 껄껄 웃으며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마을에 좋은 밥집을 봐둔 데가 있었지!" 산을 내려가는 오솔길 좌우로는 화전민들이 일구는 밭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밭을 갈던 화전민들은 문득 갈던 쟁기를 멈추고 오솔길을 향해 놀란 시선을 던졌다. 하나는 희고 하나는 금빛이다. 흰옷을 입은 자는 옥을 깎아만든 듯 준수하고 그 옆의 금빛 옷을 입은 자는 천상의 미공자인 양 헌앙하고 훤칠하다. 인세에 드문 두 미장부가 나란히 이런 새벽에 산길을 내려오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로부터 삼십여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핏빛 붉은 옷을 입은 무사들이 수백, 아니 수천 명이나 줄지어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들어가라, 어서." 손가락을 빨며 이 모습을 구경하는 어린아이들을 집안으로 다급히 들여보내며 화전민들은 겁에 질린 시선으로 이 놀라운 행렬을 구경했다. 화옥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침경치란 건 역시 좋군. 여기 황산 은 과연 천하십경의 하나라 일컬을 만하지 않은가." 무류흔이 앞을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사부께서도 말씀하셨지." 화옥의 얼굴에 멈칫 놀란 빛이 스쳤다. "자네의 사부라면 내게도 사부이신……, 혹시 신성천불(神聖天佛)을 말하는 건가? 그분이 뭘 말씀하셨다는 건가?" "내가 그분을 뵈었을 땐 얼굴이 피떡이 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고 몸 전체에서 끊임없이 핏물이 샘처럼 솟고 계셨네. 그 모습 그대로 내게 당부하셨지. 자넬 죽일 때는 반드시 불문칠신의 무예를 써달라고 말이야." 도무지 감정의 억양이라곤 깃들어있지 않은 고요한 말. 그러나 화옥은 무류흔의 붉은 입술이 나풀거리며 토해낸 말에 거의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그는 거의 필사적으로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 이봐……. 물론 그때 그 일이 피치못할 상황이었다는 것은……." "상황이 어쨌든 그것은 상관없어. 한끼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잘 생각해 보도록, 화옥." "무, 무엇을 생각해 보라는 건가?" 무류흔의 시선이 황산 의 산봉을 감도는 희뿌연 안개를 향한다. 안개를 한눈에 털어넣을 듯 텅 빈 동공으로 말이 이어졌다. "이제라도 도살자의 칼을 버리고 부처의 길로 돌아설 수 있을지를……." 멈칫 화옥의 발이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무류흔도 따라 서서 고요한 시선을 화옥을 향해 던졌다. "밤새 고민했네. 사부의 명을 따라 자네를 처단할 것인지, 아니면 좋은 길을 권유할 것인지. 새벽녘에야 결심했지. 자네에게 도살의 칼을 버리라고 권유해 보자고. 그것이 아마도 저 세상에 계실 일곱 사부님들도 바라고 계시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 화옥은 멍청히 무류흔을 바라본다. 그는 도저히 눈앞에 서 있는 이 계집애처럼 아름다운 녀석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시선 그대로 오랫동안 무류흔을 바라보던 그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밥부터 먹자고, 생각은 천천히 해도 될 테니까." 우두두둑! 일진의 마필이 거리로 맹렬히 뛰어들고 있었다. 양쪽으로 낮은 일층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는 작은 성읍이었고 성읍은 약간의 사람들이 오가고, 약간의 소란이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다만, 일신에 붉은 옷을 걸친 혈교의 문인들만이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서서 살기를 번뜩이고 있을 뿐. 미친 듯이 거리로 뛰어든 백유군 일행은 잠시 멈칫 말고삐를 늦추었다. 거리 한쪽, 위로 차일을 치고 나무걸상을 몇 개 듬성듬성 둔 시장거리의 작은 밥집 안에 화옥와 무류흔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비단 앉아 있을 뿐 아니라, 시장잡배나 노동자들이나 먹는 소창자를 우려낸 국밥을 사이좋게 먹고 있었다. 백유군등은 일시 머리가 혼란해졌다. '저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할 상대와 한가로이 밥을 먹고 있다니. 저럴 시간이 있으면 일각이라도 더 보충하여 내공 을 다듬어야 할 게 아닌가.' 앞으로 나서려는 백유군을 금적해가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지켜봅시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일일 것이오." 생각, 과연 화옥은 생각을 하다못해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손은 기계적으로 국밥을 입에 떠넣고 있었지만 그는 눈앞의 무류흔의 상태를 점검해 보기에 밥을 입으로 먹고 있는지, 코로 먹고 있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이놈……, 어제 이놈은 분명히 두 명의 대적과 겨루었다. 악의 황제 철제와의 싸움에서 아무리 못잡아도 이 할 이상의 공력을 소진했을 것. 거기다 망아대활불과는 내공 으로 겨루었다. 마지막 남은 내공 까지 끄집어 냈으니 아무리 못잡아도 삼할 이상의 내공 소진……, 도합 오할 이상의 내공 이 소진된 처지일 텐데…….' 무류흔은 화옥이 무슨 생각을 하든말든 시종 조용히 밥을 입 속으로 떠넣고 있었다. 화옥은 그의 온몸을 새우눈, 곁눈질로 훑으며 생각을 계속 점검해 갔다. '하룻밤 새에 소진된 오할 공력을 다 회복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거기다 몸에 실려 있는 지병까지 감안한다면 오늘 아침 같은 이런 모습이라는 것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에게 보이기 위한 허장성세이거나 아니면 진짜로 공력을 다 회복한 것. 어느쪽일까. 절반의 확률이라는 것이 화옥을 종내 망설이게 한다. 사실상의 그의 실력으로 본다면 무류흔이 십성 전 공력을 싱싱하게 갖고 있는 상태라 해도 맞 상대할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화옥을 지탱해온 것은 그의 치밀함이었다. 백 개 중의 아흔아홉 개가 확실하다 해도 하나가 불확실하다면 검토에 검토를 거듭한 후에야 그는 행동에 옮기곤 했다. '방법은 하나다…….' 화옥의 동공이 문득 섬뜩한 빛을 발했다. '시험해 본다, 친구!' 화옥이 수저를 놓고 일어나는 바람에 무류흔의 의아한 시선이 힐끗 그를 향했다. 화옥은 싸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왕 할 싸움이라면 망설일 게 없지 않은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몸이 번쩍하고 밥집의 차일을 날아나갔다. 막 근처를 지나고 있던 사십대의 여자와 아이로 보이는 예닐곱 살의 사내아이 앞으로 후르르 날아내리는 화옥. 다짜고짜 사내아이를 끌더니 그의 등판을 손으로 팡! 쳐내어 무류흔에게 날려 보낸다. "아악!" 자지러질 듯한 비명과 함께 아이는 칠공으로 피를 토하며 무류흔을 향해 날아왔다. 무류흔의 무심하던 동공에 큰 파장이 일었다. "악독한 자!" 휘이잉! 칠공에서 피를 흘린 채 이미 죽어 있는 아이는, 그러나 화옥의 내공 이 실린 일장의 힘으로 마치 바윗덩이처럼 무류흔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대로 받으면 실린 화옥의 내공 이 무류흔을 강타할 것. 그러나, 받지 않으면 아이의 시체는 산산조각이 되어 버린다. 진퇴양난! 화옥은 눈빛을 번쩍이며 무류흔의 움직임을 먹이를 쫓는 맹수처럼 노려본다. 우뚝 선 채 무류흔은 가볍게 한 손을 들었다. 일순, 날아오던 아이의 몸이 그 자리에서 뚝 멈추는가 싶더니 무류흔의 손이 가리키는 대로 그 자리에 조용히 내려눕혀지기 시작했다. 화옥의 동공이 가볍게 흔들렸다. '뭐야, 내 십성 전 공력이 실린 물체를 가볍게 받아낸다는 것은……!' 한쪽에 서서 조심스레 이 모습을 지켜보던 근지가 미간을 찌푸리며 백유군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군요, 어째서 저이의 내공 이 저렇게 강할까요?" 백유군의 아미가 살풋 찌푸러든다. "나도 도무지 그게…… 어제 저 사람의 상태로는 부채 하나 제대로 들 힘도 없었는데 하룻밤 새에 저런 경지를 보인다는 것은……." 여전히 태연한 무류흔의 얼굴. 그러나 겉은 멀쩡해도 무류흔의 내부는 산산조각나고 있었다. 멀쩡한 살갗 속의 피는 미친 듯한 격랑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태연해 보이는 피부 속의 근육은 놀라 아우성치고 있었다. 무류흔은 아이를 격공전력(隔功傳力)으로 받아내는 순간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화옥의 내공 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 힘줄기 하나하나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망치로 두들기며 송곳으로 찔러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버틴다.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다. 절대로 놈에게 허점을 보여선 안 된다. 무류흔이 밤새 속을 태우며 내린 결론은 화옥에겐 절대로 허실을 보여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소 무리가 된다 해도, 아니 틀림없이 무리가 될 테지만 허장성세로 놈을 질리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택한 첫 번째 방법은 화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로 하여금 되도록 많은 생각을 하게 하여 전투에 몰입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의 치밀한 성격은 대부분의 경우엔 도움이 되겠지만 막상 싸움에 임할 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집중하지 않으면 일을 이룰 수 없는 것처럼 고수 간의 싸움이란 찰나간의 허점이 곧장 결과로 직행하는 것이다. 의도한 대로 화옥은 무류흔의 행동과 말에 완전히 위말려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열이 있는 것을 백처럼 보이게 하는 허장성세였다. '말려들어라. 화옥, 그것이 너의 파멸이다!' 무류흔은 고요히 선 채 조용히 손에 묶고 있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그의 동작을 바라보던 주위 사람들의 얼굴이 일시에 변했다. 검다. 아니, 아예 시커멓게 탔다고 해야 옳으리라. 무류흔은 우수는 완전히 타서 무슨 숯덩이를 보는 것 같았다. 화옥의 미간이 또 찌푸러 들었다. '뭐야, 손을 태운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싸움을 앞둔 놈이 미쳤다고 손을 태우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슨 다른 무공을……?' 우수에 자청신검이 째앵, 쥐인다 싶은 순간 무류흔의 몸이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번쩍 허공을 갈랐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옷자락이 번뜩인다 싶자, 이미 인영은 화옥의 바로 앞에 서서 칼을 찔러오고 있었으니까. 금적해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빠르다!" 근지가 따라 외쳤다. "아무래도 저이는 공력을 다시 회복한 것 같아요!" 백유군은 고개를 저으며 입술을 깨문다. '불길해……. 저게 아냐. 뭔가 능력 이상의 힘이 나옥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