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천왕]서장 전설이 도래하다 - 70편 (70/79)
혈의환사는 긴장을 하며 전신에 공력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아예 한꺼번에 머리통을 날려줄 테 니.' 그의 염원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두 사람의 인기척은 점점 더 가까 워졌다. 혈의환사의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건방진 놈…… 제아무리 천왕이라 할지라도 단신으로 이곳엘 들어 오다니!" "글쎄 말이오. 반드시 놈을 잡아 이 기회에 천왕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야겠소." 어느덧 두 사람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왔다. 혈의환사는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이 악마 놈들! 본보기는 바로 너희가 될 것이다!" * * * 지옥혈도 궁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놈은 혈의환사가 아니오?) 곁에 있던 구유명이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정말 그렇군.) 두 사람은 한 전각의 천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그 전각 앞에는 혈의환사가 두 명의 오존과 드잡이질을 벌이고 있 었다. 처음에는 기습을 한 혈의환사가 약간 우세한 듯하였으나, 역시 수 적으로 역부족이었다. 기습에서 한 명도 처치하지 못한 그는 금방 수 세에 몰리고 있었다. (멍청한 놈! 혼자 잘난 척하더니 결국은 저 꼴이로구만.) 궁사가 혀를 끌끌 찼다. 그의 어투에는 고소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구유명의 생각은 달랐다. (안되겠는 걸…… 저러다가는 당하고 말겠어. 우리가 가서 좀 도와 주자고.) 그러자 궁사가 기겁을 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시오? 우리가 여기서 정체를 드러냈다가는 말 짱 헛일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저 친구도 오존을 꺾기 위해 싸우지 않는가? 게다가 어차 피 우리와 같은 천왕이고…….) 구유명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궁사는 철저하게 계산적이었다. (저놈이 오존과 싸우러 왔는지, 뭘 흄치러 왔는지 알 게 뭡니까? 게다가 저기를 좀 보십시오.) 궁사는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구유명이 쳐다보니 새까맣게 몰려드는 일단의 인물들이 보였다. 바 로 싸움 소리를 듣고 달려오는 오존문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저마 다 함성을 지르며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입니다. 혈의환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이때가 절호의 기회라 이 말입니다.) 성미 급한 궁사는 벌써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자, 어서 갑시다.) 그는 구유명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구유명은 쉽사리 몸올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안타까운 시선 으로 격전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궁사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정히 그렇게 안쓰러우시면 일이나 끝내고 다시 와서 도웁시다. 됐 습니까? 그때까지 죽고 안 죽고는 저놈의 운세이니 할 수 없는 노룻 이구요.) 최후의 해결책이었다. 이번에는 구유명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네. 가세!) * * * "흐흐흐…… 식사를 하지 않는다더니 정말이었군." 만겁마존은 그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음침한 괴소를 터뜨리 고 있었다. 그의 면전에는 피폐한 모습의 한 여인이 있었다. 양손과 발이 꽁꽁 묶인 채, 힘없이 늘어져 있는 여인. 그녀는 바로 천외천부주 화예랑이었다. 그녀 앞에는 몇 개의 음식 그릇들이 늘어서 있었다. 하나같이 손을 대지 않아 벌레가 우글거리고 있는 상태였다. "흐으으…… 이대로 굶어죽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응? 정말 그런 거야?" 만겁마존이 비릿한 조소와 함께 천천히 다가왔다. 화예랑은 본능적으로 물러섰다. "다가오지 마라 더러운 놈……." 물론 만겁마존은 그녀의 말을 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 의 입가에 걸린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직은 힘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식사는 해야지. 그래야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나?" 화예랑이 혐오스럽다는 듯 소리켰다. "흥! 네놈들의 인질이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 다." "흐흐흐…… 그래?" 만겁마존은 그녀의 코앞에 우뚝 섰다. 커다란 덩치가 유난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화예랑은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녀는 이미 혈도까지 집힌 상태이기에 꼼짝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래도 먹지 않겠나?" 만겁마존이 갑자기 우악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흐늘거리는 상의를 잡아했다. 찌이익! 듣기 싫은 괴음과 함께 상의 옷자락이 길게 찢어져 나갔다. "아앗!" 뾰족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야위었지만 아직은 생기를 잃지 않은 젖가슴이 드러났다. "나, 나쁜 놈! 이게 무슨 짓……." 화예랑은 다급하게 손을 끌어 가리려 했다. 그러나 만겁마존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화예랑의 젓가슴을 움켜쥐었다. 뭉클! 손안 가득히 젖가슴의 감각이 스며들었다. "호오? 역시 처녀라 그런가? 그떻게 굶어도 가슴만은 탱탱하군 그 래." 그는 느물거리며 화예랑의 젖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워낙 강한 완력 이라 화예랑은 반항할 수도 없었다. "이…… 추잡한……." 그녀의 두 눈에서 급기야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만겁마존이 더욱 비릿한 조소를 띠었다. "눈물이라…… 흐흐흐, 그떻다면 아직 아랫도리에도 물기가 남아 있겠군. 흐흐흐흐……." 스윽! 괴소와 합께 그의 우수가 화예랑의 복부로 이동을 시작했다. 화예랑은 대경하여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소, 손을 치워라!" 그러나 만겁마존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흐으으…… 가만히 있거라. 이 어르신께서 극락으로 보내줄 테니 ……." 그는 화예랑의 치마 속으로 손올 집어넣었다. 화예랑의 눈동자를 뒤집으며 기겁했다. 그 순간이었다. "마, 마존님! 큰일이 났습니다." 누군가 철창 밖에서 다급한 보고를 올렸다. 만겁마존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보고자는 잠시 머뭇거리며 대답을 미루었다. 그러자 만겁마존이 더욱 분노한 일갈을 터뜨렸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느냐!" 보고자는 그제야 기겁을 하며 대답했다. "바, 밖에 침입자가 나타났습니다. 혈의환사라고……." 순간 만겁마존이 벌떡 신형을 일으켰다. "뭣이? 혈의환사?" 그의 눈동자가 불길로 이글거렸다. "십대천왕 중의 하나라는 그놈이 이곳에를……?"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재빨리 몸을 돌려 철창 밖으로 나섰다. 나가면서 그는 힐끗 화예랑을 쳐다보았다. 아쉬움이 역력한 눈빛이 었다. "흐흐흐…… 운이 좋은 계집이로구나. 하지만 다음 번에 올때도 음 식 그릇이 비워져 있지 않다면…… 그때는 음식 대신 본좌의 하물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는 음탕한 소리를 지껄이며 사라져 버렸다. 화예랑은 원독의 눈멎으로 만겁마존을 쏘아보았다. 그란 그뿐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치 무기력했다. "흐흑……." 급기야 그녀의 입에서는 오열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가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흐흐흑…… 소천……." 그러한 순간에 왜 금소천의 얼굴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얼굴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화소저. 우는 건 그만하고 어서 나가도록 합시다." 화예랑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철창 밖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조금 전 만겁마존에게 보고를 올 렸던 오존문인이었다. "다, 당신은 누구……?" 화예랑은 말을 하다 말고 다시금 놀라야 했다. 스스스슷--! 그녀의 바로 곁에서 유령처럼 한 사람의 신형이 내려섰다. 그는 바로 일지겁천 구유명이었다. "안심하시오, 소저. 우리는 금소천, 금성주가 보내서 온 사람들이 오." "소천이?" 화예랑의 얼굴에 일순 회열의 빚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사이에 구유명은 화예랑의 손발에 묶인 철삭을 끊어냈다, 철커덩! 화예랑은 철삭이 끊기자마자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으음……. 이거라도 우선 걸치시오." 구유명은 자신의 상의를 벗어 주었다. 화예랑이 어색하게 옷을 입는 동안, 그는 원독에 차서 씹어뱉듯 중 얼거렸다. "만겁마존! 네놈을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여주마," 그러자 철창 밖에서 상황을 살피던 궁사가 소리쳤다. "아니? 그 재수 없는 놈은 왜 또 부르는 거요? 연기까지 하며 간신 히 내쫓아 버렸는데…… 구노사, 괜한 생각일랑 하지마시오. 아무리 우리라도 오존문 전체를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구유명은 침음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궁사의 말이 맞기 때문 이었다. 지금은 냉정을 되찾아 물러서야 할 때였던 것이다. "자! 이제 나갑시다." 궁사의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되찾게 했다. 화예랑도 어느새 철창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음……." 구유명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형을 날렸다. * * * "치잇! 정말 괴물들이로군." 혈의환사는 신음성으로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오존은 오존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천불사존과 사망마존. 두 사람의 무위는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천왕의 적수는 오직 천왕뿐이라고 생각해왔던 혈의환사에게는 그야 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쐐애액!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사망마존의 수리검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검은 혈의환사의 혈무를 지나쳐 반대편으로 통과하고 말았 다.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혈의환사는 그나마 가공할 사술로 상대의 눈을 현혹시켜 결정적인 위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야 없질 않은가?' 그는 생각했다.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는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게다가 사방에서는 어느새 몰려들었는지 오존문의 수하들이 빽빽하 게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살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혈의환사 자신을 노려보 고 있었다. '빌어먹을…… 할 수 없다.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이 두 놈을 처리 하고 이 자리들 벗어나야겠다.' 그는 혈사환마문 최고의 절기를 떠올렸다. 수비가 없이 일체의 공격만을 위주로 하는 잔혈비(殘血匕)라는 이 름의 절기 였다. 물론 위력이야 말 할 필요가 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점이 있었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던 환술을 포기햄아 한다는 것이었다. 즉, 공격 을 하는 동안 혈의환사는 일반인파 똑같은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었 다. '하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혈의환사는 무겁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결정을 내리자 재빠르게 행동으로 옮겼다. "차아앗! 잔-- 혈-- 비!" 순간 그의 온몸에 서려 있던 혈무가 급속도로 엷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전신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저놈이 무슨 짓을……?" 가뜩이나 그의 환술에 혼나고 있던 천불사존이 당황하여 소리쳤다. "놈! 무슨 발악을 해도 소용없다!" 다소 성미가 급한 사망마존이 벼락같이 몸을 날렸다. 천불사존이 큰 소리로 그를 제지시키려 했다. "앗! 사형! 조심하시오." 그러나 사망마존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신형이 날아간 것과 혈의환사의 전신에서 시뻘컨 소검(小劍) 들이 쏟아져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마치 붉은 비가 쏟아지듯 수백, 수천 개의 소검이 사방으로 쏟아지 고 있었다. 파파파팍! 사망마존은 대경하여 소검을 이리저리 퉁겨냈다. 그러나 소검들의 개수가 너무도 많았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형!" 천불사존이 소리를 지르며 날아들었다. 혈의환사가 순간적으로 득의의 외침을 토해냈다. '그래…… 오너라. 너까지만 걸려들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성급했다. 천불사존은 사망마존을 구하기 위해 날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정확하게 잔혈비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수비가 없이 무방비 상태인 혈의환사를 노린 것이었다 '허억!' 혈의환사는 대경의 외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도박은 실패했다. 천불사존의 우중충한 휘색 가사가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혈의환사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 * * 공포의 마역 마흔곡에 자리한 오존문의 한 밀전. 밀전 가득 무형의 막대한 마기가 먼지처럼 깔려 있었다. 가운데는 태사의가 있고, 백의장포에 면사를 쓴 괴인 한 명이 자리 하고 있었다. 면사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는 두 눈은 흡사 유리알을 박아 놓은 듯 무섭도록 투명했다. 그는 바로 오존 중 제일 첫째인 마안혈존이었다. 그의 전면에는 흡사 천하의 코든 번뇌를 한 곳에 담은 듯, 쳐다보 기만 해도 골치가 욱신욱신 쑤셔드는 만겁마존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안혈존은 몹시 분기탱천해 있었다. 투명한 두 눈에서 가공할 마광이 지글지글 타올랐다. "다섯째! 아직도 혈의환사 담사우…… 그 찢어 죽일 놈을 찾지 못 했단 말이냐?" 만겁마존은 번뇌 가득한 두 눈에 짙은 곤혹의 및을 띠었다. "놈의 사술이 너무 괴이해서 도저히 잡을 수가 없소." 이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만일 셋째 심령마존이 있다면 모르지만…… 셋째형은 지금 밖에 나가 있기 때문에 놈의 종적조차 찾을 수가 없소." 순간 마안혈존은 태사의를 치며 벌컥 노갈을 터뜨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 혈의환사, 그놈이 제아무리 천왕이라해도 겨우 한놈에 불과하다. 그 한놈이 오존문에 들어와 분탕질을 치는데도 잡 을 수가 없다니……." 쾅--! 그는 분기탱천해 하며 발을 굴렀다. "이것은 우리 오존문의 수치다." 만겁마존은 분기탱천한 마안혈존의 거듭되는 호통에 황급히 말했 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혈의환사 놈은 둘째형과 넷째형에 의해 극 히 엄중한 내상을 입었소. 설사 놈이 도망친다 해도 오래 살지는 못 할 것이오." 혈의환사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 그러자 마안혈존은 조금 노기를 가라알히며 투명한 안광을 번쩍였 다. "그러나 다섯째. 속단은 금물이다. 놈은 우리의 영원한 숙적인 천 왕지맥! 결코 속단할 수 없다." 이어 그는 가슴 섬뜩한 냉갈을 터뜨렸다. "당장 나가서 놈의 목을 가져오도록 해라. 특히 놈의 죽음은…… 수급을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다." "알겠소이다. 대형." 만겁마존은 으스스한 음성으로 대답하며 물러갔다. 혼자 남은 마안혈존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불편한 기색을 나타냈 다. 그러나 그를 불편하게 만들 요소는 연이어 터지고 있었다. 스슷……. 한 인영이 마안혈존 앞에 유령같이 치솟았다. "대형! 큰일이 터졌소!" 황급한 외침부터 터뜨린 인물은 바로 오존 중 넷째인 천불사존이었 다. "뭐가 또 큰일이냐?" 마안혈존이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천불사존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 화예랑을 구출해 갔소. 무공의 흔적으로 보아 일지겁천 구 유명과 지옥혈도 궁사라는 놈인 것 같소." "뭣이라고?" 마안혈존은 너무도 대경하여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놈들이 화예랑을……?" 그의 전신은 지극한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이것은 완벽하게 농 락을 당한 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곧 무심함의 극치로 뒤바귀었다. 극도의 분노 가 오히려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놈들을…… 놓쳤겠군." 천불사존은 찔끔했다. 마안혈존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소. 혈의환사 놈에게 신경을 분산하느라…… 놓칠 수 밖에 없 었소." "크흐흐흐…… 과연 천왕들이야." 마안혈존은 문득 음산한 괴소를 흘렸다. 유리알같이 투명한 두 눈이 괴이로운 사기를 발했다. "크흐흐흐…… 아무리 신비하게 숨어 있어도 결국은 드러나고 마는 군." 그렇다. 오존문이 아무리 신비 속에 있다 해도 이미 혈의환사와 금소천 둥 은 너무도 오존문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둘째!" 천불사존의 눈동자에 의혹이 떠올랐다. "현재 본 오존문의 직하 고수들은 모두 몇 명이냐?" 천불사존은 즉시 대답을 했다. "전 중원을 통틀어 삼백팔십 개 분타 고수까지 합쳐 모두 사만 명 이오이다," 놀라운 숫자였다. 무려 사만의 고수들이 강호에서 암약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존의 능력이 단적으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번쩍! 마안혈존은 가공할 안광을 폭사시켰다. "크흐흐…… 좋다! 그렇다면 저 십대천왕과 우리 오존의 대결은 시 작된다.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이……." 그의 무시무시한 신광은 천불사존에게 돌아갔다. 천불사존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둘쌔! 지금 당장 모든 분타에 전서구를 띄워라." '드디어…….' 천불사존은 내심 침을 꿀꺽 삼켰다. 마안혈존의 음성이 천둥처럼 귓전을 내리쳤다. "전 중원을 친다! 만금성이고, 천마교고, 혈궁이고 모조리 쓸어버 리는 것이다!" 흥분을 하자 마안혈존의 이마 한가운데 예의 혈안이 열리기 시작했 다. 그곳에서는 세상 모두를 녹여 버릴 듯한 살광이 쏟아져 나왔다. "기한은 반년이다! 반년 이내로 전 중원을 우리 오존문의 휘하에 둘 것이다." 이마 위의 또 하나의 눈이 공포스러운 빛을 뿌렸다. "죽여라! 십대천왕을 모조리 죽여라!" 엄청난 마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주위 모든 공기들이 치를 떨 정도였다. "삼산오악을 시체로 덮고 사해오호를 피로 물들여라! 어둠 속에 있 던 모든 제자들을 동원하여 전 중원을 초토화시켜라!" 삼산오악을 시체로 덮어라! 사해오호를 피로 물들여라! 전 중원을 초토화시켜라! 전설의 오존이 드디어 공포의 이빨을 전 중원에 박으려 하는 순간 이었다. 마안혈존의 혈안은 벌써부터 비릿한 짙은 혈향을 퐁기고 있 었다. "둘째! 선무강(宣武强)을 비롯한 구 인의 천하제일성 장로들을 갈 기갈기 찢어 죽여라." 오존문이 화예랑에 대해 인질로 잡고 있던 선무강 등 천하제일성 구대장로. 말 한마디에 그들의 죽음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놈들의 피와 육편으로…… 첫 제물을 삼으리라."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잔인한 말이었다. 마안혈존의 혈안은 갈수록 그 소름끼치는 혈광을 무섭게 내뿜고 있 었다. "크하하하핫!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이제 우리 오존은 천하를 혈수 속에 영원히 잠재울 것이다. 크하하핫……!" 마안혈존은 허리를 젖히며 웃었다. 마치 미친 귀신이 절규하는 듯 한 광소였다. 문득 마안혈존의 혈안에서 가공할 혈광이 폭사되었다. 파츠츠츠촛……. 그러자 태사의 곁에 있던 수십만 근 무게의 거대한 청동향로가 한 줌 먼지로 화해 버렸다. 보기만 해도 가슴 섬뜩한 위력이 아닐 수 없 었다. "크하핫…… 십대천왕! 너회들은 결국 이렇게 한줌 먼지로 화해 사 라질 것이다. 크하하핫….!" 그의 광소는 오존문 전체를 들썩이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밖은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봄의 문턱에서 오존은 그 피의 역사, 공포의 역사를 시작했다. 봄, 봄은 오고 있는데……. * * * 비.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다, 아직은 싸늘한 향기를 풍기는 초춘의 봄비가 녹기 시작한 동토에 내리고 있었다. 여기는 이름 없는 한 야산. 이곳에도 봄비는 예외 없이 내리고 있다. 봄비 내리는 그 야산의 산기슭에 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일신에 핏빛 장포를 입은 청수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전신이 온통 선혈로 뒤범벅이 된 혈인의 모습으로, 그는 봄비 속에 누워 있었다. 톡……! 톡……! 봄비는 떨어져 노인의 전신을 적시고 있는 선혈을 씻어냈다. 문득 노인은 공허한 눈으로 비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잿빚이었다. 노인의 입술 꼬리에 잘게 쪼개진 경련이 일어났다. "흐흐…… 비참하군. 나 담사우가 이렇게 당하다니……." 스스로를 담사우라고 밝힌 노인. 그는 바로 혈의환사 담사우였던 것이다. "흐흐흐……." 촉촉한 봄비 속에서 그는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오존이 그토록 강할 줄이야…… 크흐흐흐……." 모든 생을 포기한 듯한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보려 했다. 그러나 마음의 의지는 몸뚱이를 지배하지 못했다. 그는 나직한 신음성과 함께 자리에 눕고 말았다. 허탈한 음성이 갈라진 입술을 뚫고 나왔다. "천왕지존의 꿈…… 이제 영원한 꿈으로만 끝나는가?" 자신의 생명력과도 같은 천왕지존의 꿈. 봄비는 그에게서 그것마저 씻어내고 있었다. '자고 싶군…….' 그는 졸음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잔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이토록 무기력한 인생은 그 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는 사납게 이빨을 갈아붙였다. "천불사존! 사망사존! 크흐흐흐…… 다시 한 번 만나면…… 내 이 렇게까지는 결코 당하지 않올 것이다." 그는 복수심에 불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다. 죽음이 바로 곁에까지 와서 그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툴툴…… 이제는 몸뚱이 하나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군.' 혈의환사 담사우는 모든 것이 허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하늘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잿빛 하늘 속에 한 영상이 안개처럼 서렸다. 그 영상은 청초하고 애련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여인……. 아내요, 누이요. 어 머 니이기도 했던 그 여인……. 그러나 여인의 영상은 너무도 희미했다. 담사우는 갑자기 그 여인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다. 주름진 노안에 핑그르르 눈물이 고였다. "허허…… 이제 나 담사우도 늙었는가." 그는 허허롭게 웃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극히 무심한 어조가 흘렀다. "아니오. 대사형께선 아직 늙지 않았소," 혈의환사 담사우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