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천왕]서장 전설이 도래하다 - 44편 (44/79)
그 석양의 한가운데. 황혼멎 천중(天中) 높이 한 개 점이 까마득히 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한 마리의 갈색 매였다. 궁사는 단언하듯 말했다. "노부가 저 매를 잡아 보겠소." 그러자 장중에는 돌연 벌집 쑤셔놓은 듯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했 다. "저 매를 잡겠다는 말인가?" "어찌 그럴 수가! 저것은 적어도 수백 장 높이에 떠 있는데 어떻게 인칸의 힘으로……." 중인들의 표정은 불신의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닥 호기심 어린 시선을 궁사에게서 떼지 못하 고 있었다. 말을 한 자가 다름아닌 궁사이기 때문이었다. 궁사는 어느새 도법을 준비했다. 차츰 궁사의 전신에 장중하며 엄 숙한 기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인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에 숨죽이며 그를 지켜보았다. 금소천 역시 의혹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될까? 활을 사용한다 해도 거의 불가능한 높이이거늘…….' 모두의 시선이 밀집한 가운데, 서서히 지옥참마도가 허공으로 치켜 들렸다. 일순 도(刀)끝이 천중의 건(乾)결을 짖는 순간이었다. "지옥파천황!" 장중한 대갈성이 지옥혈도 궁사의 입을 떠났다. 동시에 군웅들의 입에서도 경악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앗!" "어, 없어졌어!" 그들의 외침대로였다. 방금까지 눈앞에 있던 궁사가 돌연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정녕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일이었다. 지금 허공에는 궁사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지며 지옥참마도만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번-- 쩍! 급작스럽게 엄청난 혈광(血光)이 빛을 뿌렸다. 그러자 중인들은 눈조차 뜰 수 없는 혈광 속에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지옥아수라상(地獄阿修羅像). 끔찍한 아수라상들이 온통 핏빛 광채 속에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금세라도 중인들을 덮칠 듯 공포스럽기 짝이 없었 다. 그때 대전을 가득 메운 혈광 속에서 가공할 굉음이 터졌다. 고-- 오-- 오-- 오--! 모두가 귀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로 엄청난 굉음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의 변화였다. 팟--! 모든 것은 삽시에 씻은 듯 사라졌다. 끔찍한 아수라상과 핏멎 혈광도, 그리고 엄청난 괴음향도 일시에 사라졌다. 장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저 같은 침묵만이 감돌 았다. "으음……."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증인들은 계속되는 기현상에 모두 어리둥절하니 마주보았다. 이때였다. 신기수사 백리호가 하늘을 가리키며 대경한 음성을 터뜨렸다. "저…… 저곳을 보시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창 밖을 향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한 가닥 핏빛 혈선(血線)이 곧장 천중을 향해 쏘 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어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까마득히 한 개 혈점(血點)으로 화했다. 혈점은 그대로 갈색 매에 부딪쳐 갔다. 그러자 까마득한 허공에는 화려한 핏빛 폭죽이 피어났다. 아련하게 작은 그림이었지만 중인들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피보라! 그것이 틀림없었다. 고-- 오-- 오-- 오! 재차 예의 굉량한 괴음향이 대전을 뒤혼들었다. 그리고는 세찬 파 공음과 함께 사람의 신형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궁사는 어느새 제자리에 돌아와 있다. 실로 이 모든 것은 숨 한 번 크게 내쉴 동안 벌어진 찰나간의 일이 었다. '…….' 고요했다. 모두들 아연실색한 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아니 할말을 잊은 것이었다. 궁사는 술잔을 들며 담담히 웃었다. "이 한잔 술로 궁사는 만금성의 영원한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하겠 소."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중인들은 그제야 간신히 경악을 추슬렀다. "아!" 그들은 분분히 술잔을 높이 치켜들어 궁사의 무공에 탄복을 표시했 다. 금소천 역시 이 순칸 깊은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진정 대단한 도법(刀法)이다……. 누구도 상상치 못한 가공할 위 력이야.' 냉한빙과 아사공주 역시도 놀람과 감탄을 금치 못한 표정들이었다. 이윽고 좌중의 소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 남궁수가 다시 신 형을 일으켰다. "궁대협, 오늘에야 비로소 본인은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음을 알 았습니다. 안목을 넓혀 주시어 정말 고맙습니다." 궁사는 희미한 미소로 답례했다. 문득 남궁수의 깊은 혜지를 담은 두 눈에 미약한 이채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 남궁수…… 염치불구하고 궁대협께 또 한 가지 부탁드 릴 것이 있습니다." 궁사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말해 보시오. 남궁군사." 남궁수의 두 눈이 은은한 신광을 뿜었다. "궁대협께서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장차 만금성은 천하를 지배하 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자면 더 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와 영 웅지재(英雄之才)들이 필요합니다." 남궁수의 음성은 어딘가 모르게 열기를 담고 있었다. "이 남궁수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진정 어린 눈길을 똑바로 지옥혈도 궁사에게 주었다. 궁사의 눈동자에 의혹이 서렸다. "궁대협, 본 만금성에 가입하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순간 금소천은 물론 모든 군웅들은 너무도 뜻밖의 말에 하나같이 대경의 빛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빛은 생긴 것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동시에 좌중의 시선 은 일제히 궁사에게 쏠렸다. 그러나 궁사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기색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그다지 생각할 여지가 없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이었 다. 그때였다. 좌중에 하나의 거대한 철탑이 불쑥 솟구쳐 올랐다. 거력천군 관천패가 엄청난 거구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어 그는 천 둥벼락이 떨어지듯 쩌 렁쩌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궁대협, 이 관천패는 평생에 단 한 번 무공으로 대형에게 굴복했 소. 그런데 이제 두 번째로 궁대협께도 굴복하고 말았소." 그의 함지박만한 호목(虎目)은 그대로 궁사를 향해 엄청난 신광을 뿜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대로 만금성을 나가겠다면, 나 관천패는 대 가리가 깨지는 한이 있어도 당신과 맞붙을 것이오." 관천패는 자신의 가슴을 '꽝' 소리나게 쳤다. 너무도 직접적인 도전의 표시였다. 금소천은 관천패를 웅시했다. "관총관. 너무 무례하구나." 그는 진정으로 분노한 것같이 화를 냈다. 이때 궁사가 손을 내저으며 신형을 일으켰다. "아니오. 금성주, 관총관이나 남긍군사의 뜻…… 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소." 그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으며 장내를 훌어보았다. "나 궁사는 언제나 혼자였소. 무림에 친분 있는 인물이라고는 아무 도 없소." 좌중에는 숨소리 하나 크게 일지 않았다. 궁사의 음성이 은은한 격동을 띤 채 대전을 맴돌았다. "그러나 이 만금성에는 나의 사랑하는 딸 아사가 있고…… 또 여러 친구들이 있소." 그는 웃었다. 한 점의 가식도 보이지 않는 티없는 웃음이었다. "이제 설령 나가라고 쫓아낸다 해도…… 나 궁사는 이 만금성을 떠 나지 않겠소." 만금성을 떠나지 않겠다. 이 한마디의 중인들의 표정은 밝게 펴졌다. "아……."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기쁨을 만끽했다. 궁사는 금소천을 향해 가볍게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금성주. 이 만금성에 나 궁사가 몸담을 자리가 있겠소?" 파르르……. 금소천의 눈꼬리에 격동의 잔떨림이 일었다. "구, 궁…… 대협." 그는 격동을 참지 못하고 덥썩 궁사의 손을 잡아 쥐었다. "물론이오. 만금성은 궁대협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순간 대전은 순식간 또 다시 엄청난 환호성에 휩싸였다. "와-- 아!" "성주님 만세-- 궁대협 만세--!" 지옥혈도 궁사. 그가 만금성의 일원이 되었다. 이는 진정 금소천에게 있어서 천군 만마를 얻음보다 더욱 큰 소득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문득 관천패가 벌떡 일어서며 거종이 깨지는 듯 엄청난 외침을 터 뜨렸다. "만금천세(萬金千歲)-- 대위진천(大威震天)!" 그러자 군웅들도 모두 일어서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만금천세! 대위진천!" 관천패는 다시 한 번 소리켰다. "독(獨), 패(覇), 군(君), 림(臨), 유(唯), 아(我), 독(獨), 존 (尊)!" "독패군림-- 유아독존--!" 만금성을 통째로 뒤흔드는 함성. 이것은 중추절 날 만금성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 * * 밤(夜). 일년 중 가장 큰 보름달이 떴다. 중추절 밤은 만월(滿月)과 함께 더욱 무르익어 갔다. 아사공주는 그녀의 거소에 있었다. 창문 앞에 턱을 고인 채 회고 둥근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그레 상기된 보기 좋은 얼굴이었다. 금소천의 권유에 못 이겨 마신 서너 잔의 술이 그녀를 달아오르게 만든 것이다. 술(酒)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고……. 그녀는 도무지 전신을 가누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 있 었다. "소…… 천……." 금소천. 그녀에게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아……." 아사공주는 격정을 못이긴 듯 자신의 가슴을 꼭 감싸안았다. 보석 같은 벽안에는 눈물마저 글썽인다. "소천, 당신이 소녀 곁에만 있어도 아사는 행복할 거예요." 그때였다. "그렇소, 아사. 나는 반드시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오." 낭랑한 목소리가 그녀의 짓전을 파고들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 는 정랑, 금소천의 목소리였다. 바르르……. 아사공주의 교구에 격동의 떨림이 일었다. 햄여 꿈이라면 깨질까 그녀는 살며시 신형을 돌렸다. 그러나 꿈은 아니다. 금소천은 분명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소…… 천……." 금소천은 빙긋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아사!" 아사공주는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그녀는 금소천의 품안으로 깊이 깊이 녹아들었다. "아…… 소천. 아사는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이런 날이 오 기를……."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불안할 정도였다. 금소천은 가만히 아사공주의 턱을 치켜들었딕. 도화빛 홍조를 머금은 행복한 여인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아사, 오늘따라 그대의 모습이 더욱 아름답구려." "아……." 아사공주는 황홀감에 자신도 모르게 사르르 속눈썹을 내리감았다. 아름다운 눈꼬리에 영롱한 이슬방울이 맺혔다.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사, 울고 있소? 정랑(情郞)이 왔는데 왜 우는 거지?" "모…… 몰라요." 아사공주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도리진했다. 그녀의 옥용은 더욱 빨갛게 익어 있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인…….' 금소천의 두 눈에 서서히 열꽃이 피기 시작했다. "아사……." 그는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아사공주의 얼굴에 가져갔다. 그리고 잘 익은 앵두 입술을 힘껏 쩍어눌렀다. "으음……." 아사공주는 미끈한 팔을 돌려 금소천의 꼭을 휘감았다. 나락으로 아득히 떨어져가는 몽롱한 기운이 그녀를 삼켰다. '소…… 천…… 사랑해요.' '아사, 다시는 너를 놓지 않겠다.' 사르륵…… 사륵……. 꺼풀이 떨어져 나갔다. 육체를 단단히 감싸고 있는 문명의 갑옷이 하나씩 바닥으로 스러졌 다. 그리고 태초 그대로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남(男)과 여(女). 그들은 서로의 감출 것 없는 모습에 한동안 황홀경에 빠졌다. 아름다뒀다. 단단히 뭉친 근육질의 육체도 아름답고 신비의 곡선을 그런 여체도 아름다웠다. 아사의 몸은 하나의 예술품이엇다, 티 한점 없는 매끈한 옥부(玉膚)에 잘 발달된 둔부와 탐스런 젖가 슴, 한줌도 안될 잘록한 허리, 물을 차고 오를 듯 탄력 있는 허벅지, 그리고…… 그리고 사랑의 은밀한 입김을 간직한 숱짙은 비림(秘林). 금소천은 이미 그녀와 최초의 정사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여체는 더욱 성숙되어 있었으며 그의 숨결은 더더욱 뜨거웠다. "아사……." "소…… 천……." 그들은 서로를 깊숙이 안았다. 이미 침상은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아사공주는 또 한 번 파괴의 아픔을 맛보았다. "아앗!" 아랫배에 육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낮선 이물질이 하체를 파고드는 파괴의 아픔이엇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그녀는 한 사내에 의해 고통 뒤에 따르는 뿌듯한 희열을 느끼기 시 작했다. 그뫼가 가장 사랑하는 남성에 의해……. 노를 젓듯 금소천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단단한 자신의 하부 가 끝없는 동굴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달리려는 스스로를 자제했다. "아흑!" 아사공주의 허리가 공중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미끈한 아랫배가 튀어오르며 두 사람의 하체가 한 치의 틈도 없이 단단하게 밀착되었다. 더욱 거센 열기가 두 사람의 은밀한 곳을 불태 우듯 달려들었다. '뜨거워…….' 아사공주는 온몸을 비틀었다. 달뜬 신음성이 붉은 입술을 더욱 붉게 만들었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자신의 하체와 이어진 뜨거운 블기등이 느껴졌다. "으음…… 으……." 금소천의 입에서 본능적인 열락성이 터져 나왔다. 삐걱 삐이걱! 침상이 비명을 질러댔다. 두 사람의 신음성도 점점 커져만 갔다. 숨가쁜 열기는 그렇게 밤이 깊을수록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만금성의 밤이다. 33장 오존이 출현하다 가을(秋)은 겨울 문턱에 이르러 잠시 주춤거리고 있었다. 으레 계절이 한 번씩 갖는 미련인가? 가을은 주춤하는 걸음을 차마 떼어놓지 못하고 있다. 휘이이잉……. 바람은 이제 스산한 한기를 품고 차츰 삭풍(朔風)으로 변했다. 만추. 늦가을이다. 산서성(山西省)에 자리한 여산(呂山). 이미 수목은 조금씩 나목(裸木)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여산의 중턱에 제법 거대한 보(堡)가 한 채 있었다. <낙혼보(落魂堡).> 바로 아수마궁(阿修魔宮)이 산서성에 안때한 산서성 십대분타(十大 分陀) 중 한 곳이다. 보주(堡主)는 혈검귀랑(血劍鬼狼) 목우령(木雨嶺)이라는 자다. 검문(劍門) 문주인 검마제(劍魔帝) 목철심(木鐵心)의 셋째 아우이 며 검문의 서열 육 위(六位)의 고수이다. 그의 혈검오식(血劍五式)은 검마제 목철심까지도 인정할 만큼 절세 적이다. 몹시 냉혹한 성품으로 일단 검을 뽑으면 끝까지 피를 본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밤(夜). 밤이 되며 바람은 더욱 스산한 한기를 뿌린다. 그래서 낙혼보의 밤은 유달리 차갑기만 하다. 보 내에서 제일 깊숙한 곳에 위치한 한 정실. 한 인물이 촛불 아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신에 흑의경장을 하고 있는 이십대 초반의 청년. 뺨에서 턱밑까지 한 줄기 검흔(劍痕)이 있어 잔인한 인상을 풍겼 다. 흑의청년은 침중한 신색으로 한 장 서찰을 읽고 있다. <근자에 이르러 황성고검(荒城孤劍) 엽무검(葉武劍)이란 놈에게 산 서 육대분타주들이 의문의 피살을 당했다. …… 중략 …… 아수마궁의 궁주께서도 신신당부가 있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 이전에 너는 내 아우이기에 한층 더 경계를 소홀히 하 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령(雨嶺), 일년만 더 참고 그곳을 지켜주기 바란다. 형. 목철심 서(書).> 흑의청년. 그는 바로 검문 문주인 검마제 목철심의 셋째 아우인 이곳 낙혼보 주 혈검귀랑 목우령이었다. 콱! 혈검귀랑 목우령은 수증의 서찰을 구겨 버렸다. "황성고검 엽무검이라고……?" 황성고검 엽무검. 이 이름은 바로 천외천부(天外天府)에서 천외성녀(天外聖女) 화예 랑(花蘂 )과 같이 있던 청년의 것이 아닌가? 낙가유조차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스스로 인정하게 한 절대고수 황 성고검 엽무검. 이제 그 이름은 아수마궁에서는 저주의 이름이 되고 있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아수마궁이 산서성에 뿌리내린 십대분타를 차근차근 도 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분타 전체를 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교묘하게도 꼭 분 타주의 수급들만 취하여 분타 자체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버렸다. 혈검귀랑 목우령은 손올 뻗쳐 자신의 애검을 집어들었다. "흐흐흐…… 형님, 걱정 마십시오. 소제 목우령은 다른 육대분타주 들과는 다릅니다." 그의 뺨에 새겨진 검흔이 징글맞게 꿈틀거렸다. "오히려 엽무검…… 놈의 수급을 들고 당당하게 형님께 향할 것입 니다. 흐흐흐……." 그의 목소리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누가 눈앞에 나타난다 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그러한 모습이 었다. 그때였다. 홀연히 어디선가 냉막한 음성이 터졌다. "후후……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혈검귀랑 목우령은 대경하여 외쳤다. "누, 누구냐?" 대답은 없었다, 대신 괴영 하나가 그의 전면에 유령같이 솟았다. 스스스슷--! 일신에 황의를 걸치고 창백한 안색에 두 눈만 무섭게 반짝이고 있 는 약관의 청년이었다. 가슴에 유골 상자로 보이는 상자 하나를 안고 있는 게 특이한 점이었다. '귀신 같은 놈 이토록 근접했는데도 알 수 없었다니…… 놈은 무서 운 고수다.' 혈검귀랑은 한눈에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등골에 진땀이 축축이 배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네놈은 누구냐?" 황의청년의 태도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무심함 그 자체였다. 그는 냉막함을 그대로 안고 대답했다. "황성고검 엽무검." 순간 혈검귀랑 목우령은 대경하여 외쳤다. "뭐…… 뭣이?" 문제의 황성고검 엽무검. 목우령은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았다. "과연…… 찾아왔구나." 그는 절정고수답게 순식간에 냉정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곳 낙혼보에는 들르지 않는 것이 네놈이 오래 살 수 있 는 길이었다." 자못 자신감에 찬 일갈이었다. 동시에 그는 애검을 번갯불같이 뽑 아 들었다, 아니, 뽑으려 했을 뿐이었다. 그는 검병(=검의 손잡이)에 미처 손 을 대지도 못했다. 번-- 쩍! 혈검귀랑 목우령은 한 줄기 눈부신 빛을 보았다. '뜨겁다.' 빛보다 가슴에 더 빨리 화끈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보았다. 심장에 커다믿 구멍이 생기며 시뻘건 피분수가 일었다. "크윽! 미…… 믿을 수 없다. 천하에 이토록 빠른 쾌검이 있었다니 ……." 그의 신형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비, 빌어먹을…… 검조차 뽑지 못하고 죽다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뚱이가 바닥 위로 쓰러졌다. 검의 명인이라 자부하던 목우령이 상대가 언제 검을 뽑았는지조차 감지 못하고 심장에 바람구멍을 낸 것이다. 황성고검 엽무검은 처음과 같은 눈빛으로 혈검귀랑 목우령의 시신 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피가 구겨 버린 검마제 목철심의 서찰에 번지 고 있었다. "이것으로 아수마궁 산서성 십대분타주는 오두 죽은 셈인가?" 그의 눈동자는 방금 저지른 살인과 완벽하게 무관했다, 너무도 무심하고 차가운 눈빛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만금성주 금소천을 만나는 일이다." 그는 한 소리 중얼거림을 남기고 사라졌다. 낙혼보의 밤이 그를 마중하고 나섰다. 혈검귀랑 목우병의 시신은 이튿날 해가 뜬 후에야 수하들에게 발견 되었다. * * * 달린다. 휘몰아친다. 한 덩이 검은 돌풍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검은 돌풍은 바로 지윽전의 고수인 흑풍이다. 흑풍은 미친 듯이 밤을 뚫고 질주를 거듭했다. "가…… 가야 한다. 가서 알려야만 한다. 이 처절한 한(恨)의 비극 을……." 회오리치는 검은 돌풍 속에서 흑풍의 절규가 터졌다. "우…… 그, 그놈들이…… 바로 흉수(兇手)였다니…… 그놈들이 우 리 오두를 속였다니……." 그의 음성은 울분에 가득 차 있었다. 도저히 잔흑했던 그의 평소 포습으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음성이었다. "아! 하늘이여…… 처음으로 당신에게 부탁하오니, 나 흑풍의 생명 을…… 앞으로 한 시진만 더 연장시켜 주시오." 우우우웅……. 흑풍은 무섭게 질주해 밤의 저쪽 한 곳을 향해 사라졌다. 흑풍이 스친 자리에는 무언가가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피. 그것은 눈이 시리도록 선렬한 핏방울이었다. * * * 밤(夜). 달빛 하나 없는 이 밤에 한 채 음산한 토지묘(土地墓)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위는 쥐죽은듯이 음산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휙! 휘익! 밤고양이의 털이 움직이는 듯한 극히 미세한 파공음과 함께 다섯 개의 야영(夜影)들이 토지묘 앞에 내려섰다. 다섯 명의 야행인(夜行人)들이었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토지묘를 향해 오체투지(五體投地)의 깊숙한 부복을 했다. "혈존께 아뢰오." 그러자 토지묘 안에서 구천유부(九天幽府)의 악령이 토하는 숨결 같은 음산한 대답이 홀러 나왔다. "어찌…… 되었느냐?" "놈의 목숨을…… 한 시진 연장되도록 만들었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실수 없이 처리했느냐?" "다행히 실수는 없었습니다." "흐음……." 토지묘 안에서 예의 음산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탄성인지 탄식인 지 구별할 수도 없는 음성이었다. "수고했다. 이제 두 번째 계획을 실행에 옮겨라." "혈존의 영을 받듭니다." 야행인들은 최대의 공경을 표한 다음 소리 없이 어디론가로 사라졌 다.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한 괴영이 토지묘 안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백색장포에 백색의 면사로 두 눈 아래의 진면목을 가리고 있는 백 색면사의 괴인이었다. "흐흐…… 올해가 가기 전에 오존이 모두 등장한다. 바로 그때가 되면……." 면사가 가볍게 씰룩이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조금 전까지 들리 던 음산한 그 음성이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그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