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천왕]서장 전설이 도래하다 - 43편 (43/79)
"미련한 놈! 내 네놈에게 진정한 지옥참마도법의 뜨거운 맛을 보여 주마." 그는 천천히 관천패 쪽으로 다가들었다. "으핫핫핫……." 그러나 관천패는 뉘집 개가 짖느냐는 듯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이 어르신네의 전신은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된 신검으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다. 네놈이 들고 있는 고철 덩어리로는 어림 반푼 어치 도 없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양주먹을 끌어올렸다. "본 어르신네의 혼천일원강기(混天一元 氣)로 네놈과 그 고철 덩어 리를 한꺼번에 우그려 주마." 관천패는 자신의 공력을 있는 대로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우우우-- 웅! 그의 전신에서 하늘을 떠받치고도 남을 엄청난 힘의 태풍이 소용돌 이쳤다. 그것은 무엇이라도 박살을 낼 듯 가공할 기세였다. 그러자 궁사의 두 눈에서 으스스한 살광이 피어올랐다. "정녕…… 겁이라고는 모르는 놈이군." 그는 서서히 악마의 도(刀), 지옥참마도를 치켜들었다. 그들은 천천히 상대를 향해 다가들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때였다. 문득 낭랑한 대갈성이 팽팽한 긴장을 뒤흔들며 터졌다. "둘째, 누가 네 마음대로 손발을 놀리라고 했느냐?" 순간 관천패는 대경하여 황급히 전신의 내력을 풀었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한 인영이 멋들어진 신법으로 장내에 날아들었다. 만금성 주인 마군자 금소천이었다. "혜헤……." 관천패는 멋쩍은 웃음을 날리며 뒷머리를 긁었다. "대형(大兄), 아니 성주님…… 속하는 단지……." 그러나 금소천은 짐짓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징그러운 웃음 집어치우고 비켜라." 천하에 무서울 게 없는 관천패이지만, 단 한 사람 금소천 앞에서만 은 고양이 앞의 쥐와 같았다. 그는 연신 뒤통수를 긁적이며 한켠으로 물러났다. 이를 지켜보던 신기수사 백리호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풋!" 관천패는 호랑이 눈을 하며 백리호를 노려보았다. "이 계집년같이 생긴 자식이……?" 그는 대갈과 함께 바위만한 주먹을 치켜들었다. 백리호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관천패!" 금소천이 재차 싸늘한 호통성을 발했다. "아, 아닙니다. 다급하게 공력을 풀었더니 어깨가 뻐근해서요……. 어이, 어이!" 그는 짐짓 이리저리 팔을 휘둘렀다. 물론 그러한 변명이 금소천에 게 통할 리가 없었다. 재차 금소천의 싸늘한 시선을 받은 관천패는 자라목을 하며 비 맞 은 곰같이 한켠으로 물러났다. 금소천은 지옥혈도 궁사를 향해 돌아섰다. 그는 회미한 미소와 함께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궁사, 오랜만이오." 궁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금…… 성주." 두 사람은 한동안 기이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반가워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금소천의 시선이 궁사를 떠나 한곳으로 향했다. "아사……." 그곳에 한 떨기 꽃과 같은 아사공주의 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눈물 글썽한 시선으로 금소천을 마주 보았다, "아…… 소천. 결국 이렇게 당신을 만났군요." 기쁨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서는 불안함도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몇 년간 한번도 자신을 찾지 않았던 금소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 하나만 믿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이제 금소천이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녀는 갈 곳이 없는 것이 다. "소…… 천……." 그녀의 입술이 불안한 떨림을 발했을 때였다. 휙--! 섬세한 인영 하나가 금소천 곁에 사뿐히 내려섰다. 설산성녀 냉한빙이었다. 그녀는 금소천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살짝 기대며 아사공주에게 눈길을 주었다. 순간 아사공주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소리 없는 충격이 그녀의 전신을 후려겼다. '그, 그랬었구나…….' 상황은 너무도 명백했다. 수백 마디의 말보다 지금의 모습 하나가 분명한 의미를 부척했다. 그녀는 전신이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듦을 느꼈다. 후회가 물밀듯 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몹시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설산성녀 냉한빙의 절염한 용 모에 비하면 자신은 몹시 추하다고 느껴졌다. 금소천은 결코 입을 떼지 않았다. 그것이 여인의 마음을 더욱 슬프 게 했다. '내가 왜 이곳에 왔던가…….' 아사공주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신형을 억지로 세워 놓고 있었 다. 그때였다. 두 사람을 번갈아 주시하고 있던 지옥혈도 궁사의 독사 눈이 한 줄 기 섬전을 뻗었다. 그의 전신에서 음산한 기운이 무섭게 회오리쳤다. "금성주,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금소천의 눈동자가 의혹을 담았다. 궁사는 처연하게 서 있는 아사공주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어 다시 금 시선을 금소천에게 돌렸다, "아사를 그대의 아내로 받아들여라." 그는 한 자 한 자를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순간 금소천의 안색이 무겁게 굳어졌다. 설산성녀 냉한빙의 얼굴에도 미묘한 표정의 흔들림이 보였다. 그녀는 금빛 투명한 눈길을 아사공주에게 주었다. 두 여인의 눈길이 마주쳤다. "추워……." 아사공주는 자신이 빙옥(氷獄)에 갇힌 것 같다고 느꼈다. 금소천의 딱딱한 안색과 냉한빙의 눈길은 그녀로 하여금 추위에 떨 게 만들었다. 그녀는 가엾게 버림받은 것이다. "아저씨……." 그녀는 지옥혈도 궁사에게 말했다. 비애가 절절하게 녹아 있는 음 성이었다. "우리…… 돌아가요." 돌아갈 데라도 있는 그녀이던가? 그녀는 궁사의 팔을 잡아끌려 했다. "안돼!" 지옥혈도 궁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어 그는 으스스한 살기를 피어올리며 금소천을 쳐다보았다. "금소천. 나는 그대가 만금성의 성주이기를 따지기 전에…… 너 금 소천이라는 인간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아사는 너 때문에 혈육인 야율노격을 버리고, 이 중원에 혈혈단신 으로 들어왔다. 이 모두가 오직 너 금소천을 만나기 위한 아사의 마 음이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남을 위해서 뜨거운 마음을 대신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저씨……." 아사공주는 거의 울먹이는 음성으로 궁사를 만류했다. 그러나 궁사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땄다. "너는 가만히 있거라!" 그는 아사가 야율노격을 떠난 이야기와 소리탑, 목철심 등과 얽힌 모든 사연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아사…….' 금소천은 내심 격동의 외침만 터뜨렸다, 그러나 그는 얼어붙은 듯 계속 무감각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궁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금소천, 네게 여인이 따로 있고 없고는 내가 따질 문제가 아니 다." 말을 하며 그는 냉한빙을 슬쩍 쳐다보았다. 나직한 신음성이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는 네가 숭낙해야 한다." 궁사는 금소천과 아사공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어 한마디 한마 디를 힘주어 말했다. "아사, 아사를 받아들여라." 일순 아사공주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금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금소천은 그저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아……." 아사공주는 이제 절망적인 기분으로 휘청거렸다. 눈물이 쏟아지며 그녀는 전신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가련한 모습에 오히려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설산성녀 냉한 빙이었다. 그녀는 왠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가엾은 여인……."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는 금소천이 그토록 매정해 보일 수가 없 었다. 그녀는 전음을 금소천에게 보냈다. (세상에…… 당신이 이토록 무정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요.) 순간 금소천의 얼굴 근육이 씰룩거리며 움직였다. 마치 남들이 보 면 대단한 갈등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떻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회심의 외침을 터 뜨리고 있었다. '됐다. 한빙이 먼저 마음을 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나선다 해도 냉한빙이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때문에 냉한빙이 먼저 아 사공주에 대해 마음을 열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한펀 아사공주의 실망하는 모습에 궁사는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말 았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뿌드득 이빨을 갈아 붙였다. 그는 수중의 지옥혈도를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당장에라도 도 (刀)를 뽑을 기세였다. 그러나 그는 차마 도를 뽑을 수가 없었다. "안돼요!" 아사공주는 궁사의 팔을 부여잡았다. 그는 끝없이 요동치는 마음의 격동을 추슬렀다. '두 분이 격돌하면 양패구상이고, 두 분 모두가 내게 소중한 사람 들…… 차라리 내가 포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야."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궁사의 안타까운 시선과 냉한빙의 처연한 눈멎이 허공에서 얽혀 들 었다. 그때 금소천은 냉한빙의 전음으로 된 재촉을 받고 천천히 아사공주 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사공주는 불안한 시선으로 즘소천을 주시했다. '공연히 왔어. 괜히 저분의 마음만 상하게 한 것 같아.' 대개의 순종적인 여인이 그렇듯이 그녀 또한 사내를 원망하지 않았 다. 모든 것을 오직 자신의 탓으로만 돌렸다. 우뚝! 금소천은 아사공주의 전면에 이르러 발길을 멈추었다. "놈……." 곁에 있던 궁사의 입에서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 는 지옥혈도를 더욱 세차게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도(刀)를 뽑을 기 세였다. 병기에 손을 대는 사람은 궁사뿐만이 아니었다. 관천패 등도 소리 없이 궁사 곁으로 다가서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 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열쇠는 금소천이 쥐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아사공주의 떨리고 있는 어 깨를 잡았다. "아사……." 아사공주의 가슴이 손톱만 하게 줄어들었다. 누군가가 머리속을 내 려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아사…… 그 동안 당신을 잊고 있었소. 그 무엇으로도 그것을 보 상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소." 금소천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사공주의 전신에 거센 격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오. 나에게 보상할 기회를 주지 않겠소?" 순간 아사공주의 줄어들었던 가슴이 회열의 폭죽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선명한 멎을 뿌리기 시작했다. "아……. 소, 소천," 금소천은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 나 금소천은 당신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소." 아사공주는 그의 말 한마디에 몽롱한 충격의 바다로 빠져들고 말았 다. 비록 간단한 말이었지만 더 이상 다른 어떤 표현도 필요가 없는 순 간이었다. "소…… 소천……." 그녀는 맥이 탁 풀리며 휘청 쓰러지고 말았다. 휘익--! 냉한빙의 신형이 기쾌하게 쓰러지는 아사공주를 부축했다. "소천, 이분은 천첩이 모시겠어요." 그녀의 표정은 진심으로 가득했다. 금소천은 그녀에게 감격의 시선을 던졌다, "고맙소…… 한빙……." 그때였다. "으하핫핫!" 대소성이 터뜨리며 지옥혈도 궁사가 도(刀)에서 손을 떼었다 "으하핫핫! 과연, 과연 마군자 금소천답도다…… 으하핫핫핫!" 그는 평생을 통해 가장 통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이제 금소천의 모든 의중을 혜아린 것이었다. 금소천은 빙긋 웃으며 궁사의 두 손을 잡았다. "궁사, 그 동안 보고 싶었소." 궁사는 금소천의 손올 마주 잡으며 연신 대소를 터뜨렸다. "하핫핫! 자넨…… 진정 내 마음에 드는 친구야." 그는 과거 금소천이 말했던 것을 흉내 내었다, "금성주, 만금성에 나 궁사가 마음껏 마실 술이 있는가?" "하핫핫…… 당신을 위해서라면 오늘 당장 만금성을 만주성(萬酒 城)으로 바꾸겠소." "만주성이라…… 역시 자넨 진정 마음에 드는 친구야." 친구가 친구를 만나고, 사랑이 사랑을 만난 날이었다. 만금성의 진실로 좋은 날이었다. 지옥혈도 궁사는 술잔을 기울이며 아사공주와 얽힌 여러 가지 이야 기를 풀어놓았다, 우선 그가 아사공주를 만난 것은 진정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었 다. 아사공주는 야율노격에게서 도망쳐 중원으로 오던 길이었다. 그러나 검문(劍門)의 문주 검마제 목철심의 수하들에게 끈질긴 추 격을 받고 끝내는 붙잡히기에 이르렀다. 그때 근처를 지나던 지옥렬도 궁사가 검문의 고수들을 제거하고 그 녀를 구했다. 그는 흉적들에게 한 여인이 당하고 있는 상황으로 받아 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만금성까지 오는 동안 아사공주와 궁사는 자 연스레 친해질 수 있었다. 궁사는 외로운 인물이었다. 아내를 잃은 후 그의 일생은 피와 복수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결국 드넓은 천지간에 혼자라는 뼈저린 고독감을 맛보아야 했 다, 그것은 그 무엇으로 채울 수도 보상할 수도 없는 무서운 공허였 다. 그러나 아사공주와의 만남은 그에게 커다란 전환이 되었다. 그는 아사공주에게 딸과 같은 애정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아사공주도 그를 친부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가야할 곳 은 한 군데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친구요, 연인인 금소천을 찾았 던 것이다. 궁사와 아사공주가 만금성에 온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그 동안 수척했던 아사공주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놀라운 일은 궁사와 아사공주가 의부녀(義父女)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금소천의 배려가 컸음은 물론이었다. 또한 궁사는 외로움을 느낀 터였으며 아사공주도 이젠 혼자가 되었 기 때문이었다. 중추절(仲秋節)이 되었다. 이 날은 전 중원의 최대 명절이니만큼 만금성 역시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만금성의 일만여 명 제자들은 모두 통쾌하게 마시고 먹으며 하루를 즐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빈틈없는 경계를 늦추지 않아 만금성다 운 면모를 보였다. 만금전(萬金殿). "으하하하……," "하하하……." 만금전 넓은 대전은 연신 터져 나오는 유쾌한 대소에 시끌벅적했 다. 은은한 음률이 흐르고 대전 중앙에는 수십 명 무회가 춤을 추고 있 었다. 그 주위로는 태사의에 자리한 금소천을 비롯하여 백여 명의 인 물들이 자리했다. 식탁에는 온갖 산해진미로 이루어진 미주가효가 풍성했으며 좌중에 는 유쾌한 담소가 넘쳐흘렀다. 잔치. 오랜만에 세사(世事)를 잊고 중원명절인 중추절의 잔치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지옥혈도 궁사는 금소천의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순간 궁사에게서는 그 특유의 음산한 기운을 눈 씻고 찾아볼래 야 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그의 노안에 감돌고 있는 것은 느긋하며 부드러운 표정이 었다. 정말 많이 변한 모습이었다. 한편 아사공주는 행복한 표정으로 냉한빙과 다정히 담소하고 있었 다. 냉한빙은 이미 아사공주를 동생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홍소하며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금소천은 그 광경에 내심 흡족치 않올 수 없었다. 그는 빙그레 미소 띤 얼굴로 아사공주를 블렀다, "아사, 당신도 술 한잔 드시오." 순간 아사공주는 도화빛 홍조를 떠올리며 도리질했다. "저…… 저는 술을 못해요." 금소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하하…… 그렇더라도 내 술 한잔은 받아야지. 이 금소천의 부인이 술 한잔 못하면 되나?" 금소천의 말에 아사공주는 더욱 당혹하여 어쩔 줄 몰랐다. "그, 그렇지만……." 궁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친딸을 바 라보듯 정(情)이 담뿍 담긴 눈멎이었다. 이때 냉한빙이 금소천을 거들었다. "호호호…… 동생, 소천은 몹시 짓궂기 때문에 만일 동생이 술을 안 들면 분명 화를 낼 거야." 그녀는 말과 함께 찡긋 금소천에게 의미 있는 눈짓을 보냈다. 아사공주는 그제야 어쩔 수 없는 듯 입술을 꼭 깨물며 말했다. "그럼…… 조금만 마시겠어요." "하하하…… 좋소, 좋아." 금소천은 대소하며 자신의 잔에 술을 따라 아사공주에게 건네주었 다. 아사공주는 조심스레 술잔을 받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벽록색 아름다운 빚깔의 술에서는 몹시 향기로운 내음이 풍겨나오 고 있었다. 아사공주는 갑자기 자신이 생겼다. '이 정도쯤이야…….' 그녀는 단숨에 쭉 술을 들이켜 버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사공주는 새빨개진 얼굴로 괴로운 신음을 터뜨 리고 말았다. "우욱--! 콜록, 콜록, 콜록!" 당연한 결과였다. 벽록색 고운 멎깔의 그옥한 술은 의외로 지독한 독주였던 것이다. "와하하하!" "하하하……." 아사공주의 쩔쩔매는 모습이 장내는 순식간 폭소의 도가니로 화했 다. 아사공주는 귀밑까지 빨개진 모습으로 냉한빙의 가슴에 얼굴을 묻 었다. 그때 궁사의 음성이 나직이 일었다. "쯧쯧…… 금성주에게 귀여움 받기는 틀렸다. 녀석…… 앞으로 이 아비가 술을 제대로 가르쳐 주마." "모…… 몰라요." 아사공주는 더욱 흥당무가 되어 자꾸만 냉한빙의 품속으로 파고들 었다. 그것은 마치 꿩이 얼굴만 숨기고 몸을 드러낸 것 갈아 다시금 장내에는 화기애애한 홍소가 떠올랐다. "자, 장인어른! 한잔 받으십시오." 금소천은 궁사에게 잔을 권했다. 그의 말투는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궁사는 그의 아내가 된 아사공주의 의부가 아닌가? "좋지, 좋아. 어디 사위의 술 한 번 받아 볼까?" 궁사 역시 호쾌히 술잔을 받으며 미소지었다. 일순 그의 눈길이 금소천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소천……." 그들은 뜨거운 가슴으로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사나이와 사나이의 진정한 우정이 오가는 눈길. 그들은 사위와 장인이기 이전에 진심으로 뜻이 맞는 지기(知己)이 기도 했다. "하하하! 내 평생 오늘같이 기쁜 날은 처음일세." "하하하! 동감입니다. 우리 맘껏 취해 보지요." 궁사와 금소천은 호탕하게 웃으며 술을 들었다, 여홍은 이렇게 차츰 무르익어갔다. 한참을 웃고 떠들던 와중에 문득 궁사 곁에 앉아 있던 남궁수가 조 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주님, 속하가 한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의 정중한 물음에 금소천은 손을 혼들어 좌중의 소란을 가라앉혔 다. 흥겨운 가무(歌舞)도 잠시 중단되었다. 모두의 시선에 의혹 아닌 의혹이 떠올랐다. "남궁군사, 말해 보시오." 금소천이 허락하자 남궁수는 한차례 목청을 가다듬은 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속하는 지난 몇 년간 지옥혈도 궁대협의 명성을 귀가 아플정도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궁사를 향해 가볍게 포권해 보였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진정 영광입니다." "과찬의 말씀…… 고맙소." 궁사는 황급히 마주 포권했다. "그런데…… 오늘 궁대협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궁사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엇을 말이오?" 그뿐 아니라 좌중의 모든 인물들도 일제히 의흑 어린 시선을 남궁 수에게 주었다. '천하의 지옥혈도 궁사에게 부탁이라니…… 대체 뭘까?' 한결같은 심중이었다. 그때 남궁수의 창백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다름이 아니라 궁대협의 무공 중에 지옥참마도법은 무림사상 최강 이라고 들었는데…… 본인은 소문만 들었지 정작 견식할 기회가 없었 습니다." 궁사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남궁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오늘 안목을 넓힐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의 음성은 정중했으며 진솔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의 청은 좌중 인물들의 바람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것이 기도 했다. 이때 철삭묵도 탁무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궁대협, 본인 역시 도를 쓰는 사람으로서 궁대협의 고절한 도법을 견식하고 싶소이다." 그만이 아니었다. 천도왕 여풍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궁노제, 얼마 전 노부는 창졸란에 당한 일이라 궁노제의 도법을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었소. 이번 기회에 이 노부의 좁은 눈을 넓혀 주지 않겠소?" 그러자 장중 여기저기에서 분분히 찬성의 외침이 터겼다. "동감이오." "우리의 견식을 넓혀 주시오." 보다 고절한 무공에 대한 열망은 무림인에게 있어서 필연이나 마찬 가지이다. 그것은 비단 자신이 익힐 때뿐만 아니라, 견식을 하는 것 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금소천조차 의미심장한 눈길로 궁사를 돌아보았다. "허어…… 이거 참." 궁사는 그를 한차례 마주 응시하더니 담담히 미소지었다. 이어 자 리에서 일어서며 한 손을 가슴에 대고 좌중을 향해 읍을 했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그러한데 본인이 어찌 거부를 하겠소?" 그는 이내 허리춤에서 아수라상이 조각된 지옥참마도를 빼 들었다. 기이한 혈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는 감회 짙은 눈벚으로 도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이 지옥참마도법은 모두 구초식(九招式)으로 이루어져 있소. 그러 나 본인은 무림에 나온 칠년 동안 육초식 이상을 사용해 보지 못했 소." 그러자 중인들은 한결같이 경악과 찬탄을 금치 못했다. "아……." "그…… 그럴 수가! 지옥참마도법. 지금까지 궁사는 겨우 육초식만으로 천하에 위명을 떨쳤다. 그렇다면 마지막 구초식의 위력은 과연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진정 상상조차 하기 힘든 노릇이었다. 지옥혈도 궁사의 옴성이 이어졌다. "지옥참마도법의 구초식에 해당하는 이름은 지옥파천황(地獄破天 荒)이오. 그 한 수로 부끄러운 솜씨나마 여러분께 선 보이도록 하겠 소이다." 궁사는 이어 한 손을 들어 창문 밖을 가리켰다. "자, 하늘을 보시오." 모두의 시선이 창 밖을 향했다. 하늘에는 지금 은은한 석양이 내리깔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