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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천왕]서장 전설이 도래하다 - 69편 (69/79)

2026-09-22 08:16:38 조회 18
마… … 말하겠어요." 모종의 결심이 그녀의 눈멎을 뜨겁게 채우고 있었다. 불타오르는 뜨거운 그 빛은 그대로 금소천에게 퍼부어졌다. 금소천은 내심 가슴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다. 그는 황급히 화예미의 다음 말을 막았다. "예미, 밤이 너무 깊었소. 내일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순간 화예미는 발악하듯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안돼요! 오늘 꼭 해야만 해요." 화예미는 당돌하리만큼 똑바로 금소천을 응시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어요. 이 예미에 대한 당신의 마음은 어떤 것 인가요?" "으음……." 급기야 올 것이 오고 말았다. 금소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말이 없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옳은 것이었다. 파르르……. 화예미의 전신에 세찬 경련이 일었다. "겨…… 결국은…… 아무것도……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인 가요?" 그래도 금소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술잔을 웅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랬군요." 화예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참담한 기분이 그녀의 혼백을 통째로 지배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힘주어 물었다.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문득 그녀의 두 눈이 탁자 위 술병에 머물렀다. 그는 애써 금소천을 향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소천, 마지막으로…… 소녀의 술 한잔 받아 주시겠어요?" 차마 그것마저 거부할 수는 없었다. 금소천은 말없이 잔을 내밀었다. 쪼르르륵……. 화예미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길로 술을 따랐다. 향기로운 술은 그녀의 마음이 되어 넘칠 듯 채워졌다. 금소천은 천천히 술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순간 화예미의 눈빛이 짧은 찰나 야릇하게 변했다. 그때였다. 탁! 금소천이 갑자기 술잔을 도로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화예미의 옥용이 흠칫 굳어졌다. 금소천은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예미, 술잔에 무엇을 넣었소?" 화예미는 아예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그…… 그것이 무슨 말씀……." "춘약을 넣었군." 금소천은 나직이 내뱉듯 일성했다. 일시적으로 성욕을 돋구기 위해 사용하는 춘약. 강호의 색마나 창기들이 사용하는 그 춘약을 화예미가 술속에 넣었 다는 말인가? 잠시 전신을 바들바들 떨고 있던 화예미가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 다. 이윽고 그녀의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요. 넣었어요!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것이지요? 내…… 내 몸 이 그렇게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요? 당신은 저를 길거리의 창녀쯤으 로밖에 여기시지 않는 것인가요? 예? 진정 그러한 것인가요?" 여인의 절절한 고백이여! 금소천은 그녀의 지극한 마음이 자신의 가슴속 깊숙이 와닿음을 느 꼈다. 그는 손을 뻗어 화예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더없이 부드러운 손 길의 감각이 느껴졌다. 그는 한층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예미, 그렇게도…… 절실하오?" 주르르……. 눈물이 화예미의 볼을 타고 흘렀다. 짙은 체념과 함께 흐르는 눈물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벌떡 신형을 일으켰다. "아니요. 절대로 그떻지 않아요. 이제는…… 모두 끝났어요. 모든 게…… 끝장이란 말이에요." 그녀는 손길을 뿌리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금소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예미에게 다가갔다, 화예미의 발길이 자신도 모르게 우뚝 멈추어졌다. 금소천의 말 한마디에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신이 저주스럽다는 생 각이 들었다. 금소천이 그녀의 동그란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미세한 잔떨림이 손끝을 타고 그대로 화예미의 가슴에 파묻혀 들었 다. "오늘…… 달이 너무 밝다고 생각되지 않소?" 그의 시선이 문득 아련한 빛을 띤 채 창 밖 만월을 향했다. 일순 금소천은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후후…… 그 전부터 나는…… 달만 보면 공연히 수줍어지고 마음 이 약해진다오." 화예미. 그녀는 눈물 젖은 얼굴로 가늘게 경련하고 있을 뿐이었다. 금소천의 감상적인 듯 달콤한 음성이 계속되었다. "이런 날엔…… 아름다운 여인만 보면…… 무조건 사랑을 구하고 싶어진다오." 사랑을 구한다! 화예미의 전신에 극렬한 떨림이 일기 시작했다. 금소천은 화예미를 바라보며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예미, 우습지 않소? 이 천하의 금소천이 이토록 마음 이 약하다니 말이오." 화예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오늘 나는 무척 유쾌하오." 그는 손에 다소 힘을 주었다. 화예미의 신 형이 힘없이 빙그르 돌았다.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유난히 고혹적으로 보였다. 그는 은근한 얼굴로 화예미의 배꽃 같은 옥용을 들여다보았다. "당신 같은 미녀의 구혼을 받았으니…… 아무래도 오늘밤은 잠들기 틀린 것 같소." 드디어 금소천의 마음이 열린 것이었다. 화예미는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소…… 천." 주르륵……. 기쁨의 눈물인가? 투명하고 맑은, 그리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소…… 소천!" 와락! 화예미는 금소천의 가슴에 깊숙이 안겨들었다. 그 바람에 술잔이 엎어지고 말았다. 향기로운 술이 탁자를 타고 흘렀다. "허어…… 예미. 좀 살살 하시오. 나는 이제 무공도 없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란 말이오." 금소천이 짐짓 엄살을 부리자, 화예미는 홍조를 띠며 앙탈을 부렸 다. "아이…… 소천은 짓궂어요." 찌륵…… 찌르륵…….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어느새 만월은 중천에 오르는가 싶더니 이제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 했다. 밤은 무척 산어 이미 자시가 넘어 있었다. 금소천. 그는 진정 오늘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간신히 달래 보낸 화예미를 그리다 그는 잠자리를 딛고 일어섰다. 화원. 벌써 봄의 풋풋한 내음이 감돌고 있었다. 월광의 은싸라기를 맞으며 금소천은 천천히 화원을 거닐었다. 달빛이 흐르고 봄 내음이 흐르는 낭만적인 밤이었다. 그러나 금소천의 준미한 얼굴은 은은한 어둠을 풍기고 있었다. '금소천…… 이제 너의 앞길은 어찌 되는가?' 미래. 앞을 내다볼 길 없는 암담한 미래가 그를 막막하게 했다. '무공을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나의 야망을 끝까 지 실현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야망은 천하제패이며 천왕지존이 되는 것이지 않던가. 그는 답답한 듯 내심 말을 계속했다. '금소천, 말해 보아라. 너는 그래도 자신이 있단 말이냐?' 그러나 그의 가슴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무책임할 정도로 냉담 한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얼핏 번뇌의 광망이 그의 두 눈을 스쳤다. 물론 그러한 번뇌가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는 이내 예의 담담한 눈빛을 되찾았다. 금소천. 이 굴강의 의지를 지닌 영응은 그 무엇에도 좌절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금소천이기 때문이었다. 휘잉…….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싱그러운 봄 향기를 싣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금소천은 마치 바람이 보이기라도 하듯 눈으로 쫓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거기에는 막 새순이 움트고 있는 버드나무 가지가 있었다. '봄…… 그래 누구에게나 희망과 용기를 주는 봄이 오는군.' 아직은 매서운 공기이지만, 분명 봄의 기운은 서서히 찾아오고 있 었다. 그는 전신에서 알 수 없는 힘이 꿈틀거림을 느꼈다. 빙긋 소리 없는 웃음이 입가에 머물었다. '오늘은…… 유쾌한 날이었지.' 그의 뇌리를 스치는 한 영상이 있었다. 물기 어린 시선으로 함초롬히 웃고 있는 여인. 그것은 다름아닌 화예미의 영상이었다. '한 남자가 여인에게…… 그것도 절세미녀에게 그토록 사랑 받음을 확인하고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화예미는 여인, 그것도 절세미녀가 아닌가? 그리고 금소천은 일대 영웅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였다. 그가 이렇듯 미소 지으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상념이 무척 깊으시군요." 돌연 맑은 계곡에 물이 흐르는 듯한 청명한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금소천은 흠칫 고개를 돌렸다. 미녀. 천하에 미녀가 그리 흔하지 않을진대, 그는 오늘 또 다른 절세미녀 를 만났다. 달멎이 숨죽인 채 이 새로운 미녀를 지켜보았다. 모란의 고귀한 기품과 이지적인 미를 동 에 갖춘 고아한 여인이었 다. 특히 월하의 화원을 배경으로 선 그 모습은 성스럽기조차 했다. '오늘은…… 왜이리 잠못 이루는 미녀가 많을까?' 금소천은 감탄과 함께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하다는 의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 서는 처음 보는 여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낯이 익기는 했다, '어디선가…… 본 듯도 하다.' 금소천은 검미를 가볍게 모으며 여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절세의 미녀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이지적인 반듯한 이마에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칼조차 황흘했다. 깊은 지혜를 담은 흑진주의 눈망울은 금소천의 모습을 그득 담고 있 었다. "소저는……?" 금소천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자 미녀는 대답 대신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달빛이 무색해질 찬란한 미소였다. 미녀는 이마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금성주님은 이미…… 소녀와 두 번 동침하신 적이 있어요. 그래도 기억나지 않나요?" 금소천은 흠칫 입을 다물었다. '동침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괜히 얼굴이 뜨끔해졌다. 난생 처음 보는 미녀가 처음 보는 남자에게 함부로 그런 말을 하다 니 얼핏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이 여인은 수치심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미녀의 반응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의 어색한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성주님은 소녀의 이름을 아시나요?"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여인의 이름 을 어찌 안단 말인가? 급기야 금소천의 이마에 가벼운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무언가 입을 열어 따지듯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여의치 않았다. 여인이 먼저 선수를 쳐버렸기 때 문이다. "호호호…… 영호운령이라면 기억하시겠어요?" 순간 금소천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변했다. "아…… 운령소저." 금소천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긴 탄성을 발했다. 영호운령. 바로 자신의 피로 인해 목숨을 구원받았던 만독노조 영호독의 무남 독녀 외동딸이 아닌가? '그녀가…… 저런 미녀였던가?' 금소천은 새삼 영호운령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과거의 그녀는 창백한 안색에 야윈 몸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져도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알맞게 통통한 몸매에 혈색 좋은 얼굴. 게다가 두 눈은 초롱초롱 생기를 발하고 있었다. 전혀 그 옛날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금소천이 그녀를 몰라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영호운령은 흑진주 같은 눈을 깜빡이며 촉촉이 윤기 머금은 입술을 열었다. "벙주님은 소녀 평생에…… 아버님 외에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남 성분이고…… 또 제 곁에 처음으로 누우신 분이에요." 언뜻 발그레한 흥조가 그녀의 볼 위에 떠올랐다. 금소천은 그녀를 응시한 채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훗! 강제로 그렇게 된 것이었지.' 그러나 영호운령은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로인해 금 소천이 어떤 지경에 빠졌는지를 꽈악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다소 들뜬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님이 말하셨어요. 평생 성주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된다구 요." 그녀는 밝게 웃다가 문득 수줍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지금 소녀는 생각이 막 달라졌어요." 금소천은 팬지 궁금해졌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여자다. 그러나 금소천은 밝게 웃는 그녀에게 도저히 분노를 일으킬 수가 없었다.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이오?" 영호운령은 당돌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은혜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금소천이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영호운령은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주님과 소녀 사이에 은혜라는 말이 개입되는 것이 갑자기 싫어 졌어요. 대신……." 그녀의 시선이 일순 하늘을 응시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 가득 두 개의 보름달이 채워졌다. 이어 그녀 는 보름달만큼이나 맑은 웃음을 떠올렸다. 다음 순간 영호운령은 금소천을 향해 강렬한 시선을 쏘듯이 주었 다. "그 대신 성주님을 좋아하기로 했어요." 금소천은 무언가 둔탁한 흉기로 얻어맞은 듯 어리둥절해 했다. "소, 소저……." 홱! 그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영호운령은 몸을 돌렸다. 그녀는 이어 한 마리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 사라졌다. 그녀의 청아한 음성이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성주님이 거절해도 할 수 없어요. 제 마음이니까요." 약간 떨리는 듯한 음성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그녀의 모습은 이미 금소천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허어…… 이거야 원……." 금소천은 한동안 영호운령이 사라진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는 이윽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만월이 웃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부러운 시선인 듯도 했다. 갑자기 금소천은 한번 크게 웃고 싶어졌다. 가장 통쾌한 웃음을 한 번 웃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는 웃었다. "으하하하……!" 만월이 화들짝 놀랄 대소가 금소천의 입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화원을 벗어났다. 여전히 통쾌한 웃음은 그의 입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뉘라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을까? 화월은 텅 비고…… 이제 만월의 잔재만이 남아 있다. 그때였다. 휙! 돌연 한 인영이 금소천이 섰던 자리에 내려섰다. 오늘은 미녀들의 경연이 벌어진 날인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미녀가 나타났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냉소옥이었다. 금소천이 사라져 간 곳을 응시하는 그녀의 두 눈에는 왠지 짙은 음 영이 깔려 있었다. "오빤…… 정말 사기꾼이야." 그녀는 투덜거리듯 나직하게 말했다. "모든 여인들의 마음을…… 사기치듯 훔쳐내고 있어." 문득 그녀의 두 눈에 물기가 서렸다. 의미를 알 듯 모를 듯 애매한 눈물이었다. "그러나…… 오빠. 이 소옥이도 오빠에게…… 마음을 사기당하고 싶단 말이야. 오빠……." 그녀의 목소리에는 월망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이 그리 오래 갈 수는 없었다. 금소천을 생각하 고 있자 괜스레 슬픔이 북받쳐 올랐기 때문이다. 또르르……. 투명한 이슬방울이 그녀의 도화멎 뺨을 굴러내렸다. "흐흑! 오빠…… 결코 운명에 굴복하지 말아요. 오빠…… 오빠는 천하제일 영웅이잖아." 순간적인 질투심에 빠져 있던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금소천에 대한 걱정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금소천……. 그는 이 미녀의 오열을 듣고 있을까? 오늘. 잠못 이루는 미녀가 유난히 많은 날. 세 여심이 뒤얽힌 그러한 날이기도 했다. 두둥실……. 만월은 부러운 듯 자꾸만 황흘한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56장 오존문에 잠입하다 꿈틀…… 꿈틀……. 악마의 숨결 같은 귀무가 꿈틀거린다. 이곳은 무룽산 마혼곡. 바로 공포의 오존문이 자리한 곳이다. 휘익! 문득 검은 물체 하나가 마흔곡의 입구에 나타났다. 그것은 눈이 커다란 한 마리의 사슴이었다. 사슴은 이곳이 죽음의 계곡으로 변한 것도 모르는지 정신없이 이곳 저곳을 뛰어다녔다. 그때였다. "웬놈이냐!" 냉랭한 음성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날아들었다, 험악한 인상에 덩치가 커다란 흑의인들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는 시커먼 털보요, 다른 하나는 여우처럼 교 활한 입매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오존' 이라는 글씨가 붉은 핏빛으로 새겨져 있었 다. "으잉? 저게 꿔야?" 여우입을 한 자가 사슴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으음…… 겨우 사슴 한 마리였구만." 털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넋이 나간 듯 사슴을 쳐다보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였다. "제기랄…… 가뜩이나 정신없는 와중에 별 게 다 설치누만." 털보가 신경질적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러나 사슴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근처의 풀을 뜯고 있을 뿐 이었다. "저놈을 그냥……." 털보는 금방이라도 검을 빼들 기세였다. 그러나 여우입이 만류했다. "이봐, 어서 돌아가자고. 자칫하다 사슴 한 마리 때문에 경계 근무 지를 이탈했다고 불호령이 떨어질라." 전적으로 옳은 말이었다. 털보는 입맛을 다시며 마지못해 신형을 돌렸다. 그래도 투덜거림만은 여전했다. "빌어먹을! 온통 독충과 독버섯뿐인 이곳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사 람을 피곤하게 해?"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평소에 사슴은커녕 토끼 한 마리 볼 수 없던 곳인지라, 인기척을 느끼고 얼마나 놀랬던가? "멍청한 놈의 사슴 같으니…… 가, 가만……." 털보의 뇌리에 돌연 기이한 생각이 스쳤다. '이곳에 있는 식물은 온통 독으로 뭉쳐 있잖아. 때문에 풀을 먹는 동물들은 아예 씨가 말라 버린 곳인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돌연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다급하게 신형을 돌려 세웠다. 눈알이 뒤집혀질 만큼 놀라운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세상 모르고 풀만 뜯고 있던 사슴. 그 사슴의 전신이 녹아들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마치 독초를 잘 못 먹고 그렇게 된 것처럼 보였다. 털보는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아니었다, 녹아 버린 사슴이 다시 뭉쳐들기 시작했다, 스물스물……. 공포스럽게도 사슴은 사람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도 온통 시뻘건 혈인의 모습이었다. "크크크……." 혈인의 입에서는 기괴한 소리까지 새어 나왔다. 털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서가던 동료를 불렀다. 아니, 부르려 했다. "이, 이보게…… 으윽!" 혈인이 귀신처럼 다가와 그의 목줄기를 움켜쥐었다. 제대로 된 비 명도 지르지 못한 채, 털보는 목이 꺾어지고 말았다. 마침 뒤를 돌아보던 여우입도 마찬가지 운명이었다. "이봐! 무슨 일…… 크윽!" 혈인이 귀신처럼 그의 목줄기까지 따버렸다. 쿵! 그제야 던져 버린 털보의 몸뚱이가 쓰러지고 있을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흐흐…… 아버님……." 혈인의 입에서 기괴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신의 저주받은 자식이 왔소이다. 바로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 말 이오. 크흐으으……." * * * 스스슷……. 두 사람의 인영이 귀신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나쳐도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가공할 경공신법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일지겁천 구유명과 지옥혈도 궁사였다. 이제는 떨어질 수 없는 단짝이 된 그들이 야심한 시각을 몰래 타고 있는 것이었다. 문득 궁사가 전음성을 날렸다. (구노사,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소? 천하의 오존문이 있는 곳인데, 이처럼 경비가 허술하다니 말이오.) 다소 앞서가던 구유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나도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네. 마치 누군가가 우리의 앞길을 터놓은 것 같단 말이야.) 그의 전음을 재빨리 궁사가 받았다. (아니면 이곳에 오존문이 없을 수도…….) 구유명이 흘껏 뒤를 쳐다보았다. (에끼, 이 사람아! 그 무슨 재수 없는 소리인가?) 그러자 궁사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 농담이요, 농담. 하도 경계가 허술해서 심심할 지경이기 에…… 쩝.) 미소 끝에 그는 미안한 기색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구유명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마 혼곡의 경비는 너무도 느슨했던 것이다. (어쨌든…… 주의를 해야 하네. 이곳은 지옥 구덩이보다 무시무시 한 곳이니 말일세.) 궁사도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이윽고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갔다. 혈의환사의 능력은 확실히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며 오존문을 혜집었다. 오존문은 속수무책이었다. 오히려 공격을 하는 혈의환사가 놀랄 지 경이었다. '흐흐흐, 어리석은 놈들! 겨우 이 정도로 중월 정복을 꿈꾸고 있었 다니…….' 그는 방금도 세 명의 오존문인을 죽여 버리며 생각했다. '헌데…… 그 잘난 아버님. 당신은 왜 안나타나는 거요? 이 정도면 내가 왔다는 것을 눈치쳤을 텐데…….' 기이한 일이었다. 그것은 비단 혈의환사의 부친이라는 존재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었 다. 오존 전체의 움직임이 너무도 조용했다. 혈의환사의 뇌리에 다소 불길하다는 생각이 스칠 때였다. "대체 이 놈이 어디 숨어 있는 거야?" "글쎄 말이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혈의환사가 은닌해 있는 곳으로 다가왔 다. 아무런 의식도 못하고 걸어오는 것인데도 막강한 기세가 느껴지 는 자들이었다. '오존…… 놈들이다!' 혈의환사는 경악하며 더욱 숨을 죽였다. "아무래도…… 십대천왕 중의 하나인 혈의환사라는 놈인 것 같소. 놈이 아니고는 결코 이 정도의 일을 벌일 자가 당금 무림에는 없소이 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으스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또 다른 하나가 말을 이어 받았다. "그렇다, 넷째. 내가 생각하기에도 분명 그놈밖에 없어." 두 사람의 흔적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