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천왕]서장 전설이 도래하다 - 68편 (68/79)
장내에는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자 성질 급한 궁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오존 놈들이 건방지게도 벌써 실체를 드러낸 것은 틀림없는 불찰 이오. 우리 천왕들이 이렇듯 모여 있다는 사실을 새카맣게 모르고 있 을 테니 말이오!" 남궁수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말에 동조해 주었다. "그렇습니다. 때문에 그들의 허점을 잡아 빠르게 선공을 한다면, 숭산은 우리 쪽에 있습니다." 침묵은 캐어졌다. 중인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서로의 의견을 교환 했다. 잠시 후 묵묵히 있던 금소천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남궁군사. 오존문의 위치는 무릉산 마혼곡이 확실하오?" "확실합니다. 예전에는 장담하기 힘들었으나, 최근 그들의 활동이 공공연해지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남궁수는 확신에 찬 대답을 하였다. 중인들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금소천과 남궁수의 대화는 그들이 얼마나 오존을 연구했는지에 대한 단적인 증명이기 때 문이었다. '우리가 서로 반목과 질시를 거듭하는 동안, 저 두 사람은 오존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었구나.' 중인들은 절로 이는 감동에 숙연함을 느껴야 했다. 더불어 자신들 의 무책임한 과거가 후회되기도 했다. 그때였다. 불현듯 천짜황 단금성이 금소천을 향해 말했다. "금성주. 나는 한 가지 무척 궁금한 것이 있소이다." "궁금한 것……?" 금소천의 눈동자에 의흑이 떠올랐다. 단금성은 신광을 번쩍이며 물었다, "금성주께선 어떻게 오존의 정체를 파악하실 수 있었소이까?" 순간 중인들은 동감이라는 듯 모두들 궁금한 얼굴로 금소천을 바라 보았다. 금소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본인은 개방 장문인 독보천개를 통해……." 그는 독보천개 온화성을 통해 당금 강호의 모든 문파 장문인들에 대해 상세한 조사를 부탁한 것부터 설명했다. "그 결과 본인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소이다." 중인들의 의흑 어린 시선이 집중되었다. "지금부터 팔십 년 전……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소림, 무 당, 녹림칠십 이채, 죽음의 혈살수(血殺手) 단체인 사망각(死亡閣), 그리고 하오밀문(下午密門) 등 다섯 개 문파에…… 다섯 명 제자가 동시에 입문했음을 알 수 있었소이다." "으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인들은 탄성을 토해냈다. 금소천은 계속해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또한…… 그들은 모두 각기 문파에서 최고 지존의 자리까지 올랐 음을 알 수 있었소이다." 금소천은 신광을 번뜩이며 중인들을 향해 되물었다. "어찌 그것들이 공교롭지 않을 수 있겠소이까?" "으음……." "아……." 중인들은 그제야 오존의 정체와 그들의 내력에 대해서 확연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금소천의 치밀한 심기에 감복하고 말았 다. 금소천은 이어 남궁수를 향해 가벼운 고갯짓을 했다. "남궁군사. 준비한 것을 돌리시오." 남궁수는 단상 밑에서 몇 장의 첩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한 장씩 앉아 있던 모두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첩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실려져 있었다. 소림의 무허상인 -- 천불사존 무당의 자하진인 -- 마안혈존 녹림칠십이채의 감사립 -- 심령마존 사망각의 사망지검(死亡之劍) -- 사망지존 하오밀문의 환마제성(幻魔帝星) -- 만겁마존 바로 오존들의 뿌리 깊은 음모의 내력들이 담겨져 있었다. 중인들은 하나같이 놀라운 눈빛으로 그것들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성주님!" 정실 안으로 한 인물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황망하게 서두는 그는 바로 와룡선생 하후 주였다. 그는 급히 금소천의 귀에 대고 무엇인가를 속삭였다. 이야기를 듣는 금소천의 안색이 미미한 변화를 보였다. 이윽고 금소천은 중인들을 돌아보며 신형을 일으켰다. "여러분. 본인을 찾아온 손님들이 있어 잠시 자리를 떠나야 겠소이 다." 그의 안색이 워낙 심각하여 중인들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수 없 었다. "셋째……." 금소천의 눈짓을 하여 남궁수를 불렀다. 이어 그는 다시 한번 인사 를 한 후 정실을 떠났다. 그의 뒤를 천기서생 남궁수가 따랐다. 천왕전 내의 한 정실. 모두 칠 인의 인물들 모습을 보였다. 육남일녀였다. 개중에는 몇 명 승인도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눈에 뜨이는 존재는 한 명의 여인이었다. 두 눈이 절로 번쩍 뜨이게 하는 경천지써의 천하미녀였다. 약간 수척해 보이는 신색이 더욱 매력을 풍기는 미녀. 그녀는 바로 천외성션 화예랑의 동생인 화예미가 아닌가? 그 옛날 항주성의 명기 취접향이기도 했던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화예미 곁에는 가슴에 하얀 유골함을 안고 있는 청년이 있 었다 바로 천하제일 쾌검 엽무검이었다. 화예미와 엽무검의 맞은편에는 네 명의 노숭인과 한 명 약관의 청 년이 있었다. 네 명의 신 태비범한 노승인. 놀랍게도 그들은 바로 포달랍궁의 사대존자들이엇다. 또한 천하절륜한 약관의 신비 미청년. 나이는 대략 십 팔구 세 가량 되었을까?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관옥 얼굴에 칼날 같은 숱 짙은 검미에, 약간 짙은 갈색진 두 눈과 우뚝한 콧날이 이국적이다. 지금 이 천하미청년은 치 렁치렁한 머리를 질끈 동여 허리까지 길 게 드리우고 있다. 부리부리한 두 눈동자는 담담한 서기까지 뿜고 있어 가히 일대종사 다운 풍도를 엿보이게 했다. 스르륵……. 문득 조용히 방문이 열렸다. 이어 금소천과 천기서생 남궁수가 방안에 들어섰다. 순간 화예미의 전신이 불에 덴 듯한 충격을 보였다. '소…… 소천.' 그녀는 그 이름을 목안에서만 안타깝게 불렀다. 금소천은 담담한 눈멎으로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오랜만이오, 예미." 일순 화예미는 자신의 전신이 그대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 예미. 소천은 다정하게 이렇게 불렀어…… 예미…… 예미 라고…….' 사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 무척 걱정했었다. 그녀와 금소천 사이에는 운명적으로 건너지 못할 깊은 강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금소천은 그녀를 향해 담담한 미소까지 보였으 니…….' 금소천. 그는 화예미를 전일과는 다른 모습으로 대했다. 지금 그의 모습은 마치 인간사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하기조차 했다. 문득 엽무검이 금소천을 향해 정중한 예를 취했다. "성주님, 엽무검이 인사 드럽니다." 금소천은 역시 부드럽게 인사를 받았다. "자네의 기도를 보니 그 동안 더욱 높은 상승검도(上乘劍道)를 익 힌 것 같군. 경하하네." 일순 엽무검은 은흔한 흥조를 띠며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습니다." 한편 천기서생 남궁수는 방에 든 순간부터 엽무검을 뚫어져라 응시 하고 있었다. 엽무검을 지켜보는 그의 눈빛은 수시로 괴이한 변화를 보였다. 문득 엽무검은 남궁수의 눈길을 의식하고 시선을 마주 주었다. 엽무검과 남궁수의 시선이 한데 부딪쳤다. 순간 그들은 동시에 내심 한소리 외침을 발했다. '닮았다.' 그렇다. 남궁수와 엽무검의 얼굴은 너무도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행색이나 분위기가 너무도 달라 따로 본다면 구별하기 어려우나, 이렇듯 한곳에서 쳐다보니 마치 형제처럼 닮아 있었다. 특히 그들의 눈빛은 판에 박은 듯이 흡사했다. "으음……." 그들은 서로의 얼굴과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행동이었다. 다른 이들은 분분히 인사를 건네 느라 두 사람의 기이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금소천과 포달랍궁의 사존자들은 수인사를 주고받았다. 금소천과 포달랍궁의 사존자. 그들은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사이이다. 사존자 중 광목존자가 옆의 신비미청년을 향해 말했다. "아극(阿極), 이분이 바로 천하제일 영웅이신 금소천…… 금성주이 시다. 인사 드려라." 아극이라는 이름이 낮설지 않다. 포달랍궁 최후의 후계자인 어린 소동. 바로 그 소동의 이름이 아극 이 아니던가. 이제 훤칠한 미청년으로 성장한 아극은 극히 경건한 모습으로 금소 천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아극이 성주께 인사 드립니다." 다음 순간 금소천은 대경 당황하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그는 급히 아극의 큰절을 제지시켰다. 그의 놀람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극은 대포달랍궁의 지존이 될 지엄한 신분이 아닌가? 적어도 명 분상으로 금소천의 아래 신분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저 없이 금소천을 향해 큰절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 광목존자가 대경 당황하는 금소천에게 말했다. "금성주께서는 당연히 아극의 인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금소천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과거 복우산에서 금성주께서 주신 그 천단비급(天丹秘 )을 익히면 서 아극은 그 비급 속의 비밀을 풀어, 일천 년 전 포달랍궁 개파조사 이신 내모위존자(內毛爲尊子)께서 남기신 밀종최강(密宗最强)의 기공 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기연(奇緣). 진정 하늘이 안배한 기연이 아널 수 없었다. 금소천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극은 이미 그 기공을 십이성 터득하였으니…… 그 모든 것이 금 성주님 덕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광목존자는 정색을 하여 말을 맺었다. "어떻게 보면 금성주께선 아극의 사부나 마찬가지일지도 모르는 일 입니다." 그제야 금소천은 아극의 태도를 수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짐짓 손을 내저으며 정색을 했다. "하지만 본인으로서는 그런 예우를 받아드릴 수가 없소이다. 그때 는 그때이고, 지금의 아극은 누가 뭐래도 포달랍궁의 지존이 아닙니 까?" 금소천은 진심으로 거절했다. 아극과 사대존자는 깆은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람은 진정…… 대인(大人)이다.' 아극은 진증한 신색으로 거듭 큰절을 올렸다. "금성주님, 이것은 아극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부디 거절치 마십시오." 간절함이 가득한 행동이었다. 금소천은 할 수 없이 아극의 큰절을 받았다. "아극…… 포달랍궁은 반드시 그 옛날의 성세를 되찾을 수 있을 것 일세." 그는 진중한 목소리로 아극의 미래를 축복해 주었다. "금성주님. 분명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극의 전신에서는 은은한 천위의 서광이 뿜어졌다. 그 서광은 항차 포달답궁을 새롭게 빛낼 희망의 빛이었다. 한편 엽무검은 남궁수를 향해 희미한 격동을 보이고 있었다. "혹, 귀공께서 만금성 군사이신 남궁수…… 남궁대협이시오?" 남궁수도 여전히 자신과 너무나 흡사한 엽무검의 모습에서 눈을 떼 지 않았다. "그렇소이다만……." 순간 엽무검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 남궁군사께서는…… 과거 남궁세가와 무슨 관계가 있으신지 요?" 이번에는 남궁수의 전신에서 부르르 경걸이 일었다. "남궁세가?" 그는 격동이 이는 시선으로 엽무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자, 자네는 혹시……?" 엽무검의 격동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것 같았다. 그는 당황스럽게도 품속의 유골함을 꽉 안으며 두 눈에 가득 눈물 을 담았다. "먼저…… 남궁세가와 무슨 관계인지…… 대답을……." 그의 물음은 집요했다. 남궁수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을 했다. "나의 아버님은 과거…… 남궁세가(南宮世家)의 가주(家主)…… 일 검진천공(一劍震天公) 남궁표학(南宮飇鶴)이시네." 쾅! 순간 엽무검의 머리 속에서 한 줄기 거센 벼락이 터졌다. 다음 순간 엽무검은 부들부들 전신을 떨며 남궁수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혀…… 형님." 형님. 엽무검은 분명 남궁수를 향해 그렇게 불렀다. "이…… 못난 놈이…… 이렇게 부르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 까?" 남궁수는 층격 속에서 간신히 물었다. "그렇다면 자, 자네는 역시……?" 그렇게 묻는 남궁수의 모습에는 그 어떤 표현 못할 간절한 기대감 이 담겨 있었다. 엽무검은 유골함을 힘주어 안으며 대답했다. "소제의 어머님은…… 청란(靑蘭)이라고 하옵니다." 순간 남궁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표현치 못할 거센 충격이 폭발하는 화산처럼 그의 전신을 휘감았 다. "네, 네가…… 바로……." 남궁수는 끓어앉은 엽무검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엽무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외쳤다. "헝님…… 그렇습니다. 바로…… 청란…… 그분이 소제의 어머님 입니다." 남궁수의 전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 일찍이 아버님께서 네 어머님의 이야기를 누누이 하셨 다." 엽무검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버님께선 그 이후 한번도 어머님을 찾으시지…… 않 으셨습니다." 그의 어조에는 원망과 애증이 교차하고 있었다. 남궁수는 엽무검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해는 하지 말거라. 아버님은 그때. … 이미 고인이 되셨기 때문 이다." "에…… 예?" 엽무검이 발작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왜' 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남궁수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성을 내뿜었다. "바로…… 오존문에 의해서였다." 순간 엽무검은 눈물로 얼룩진 눈동자에 가공할 살기를 피워 올렸 다. 그는 무섭게 이를 갈아붙였다. "오존문…… 이 찢어죽일 놈들……." 부친을 향한 그의 원망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무림의 명숙 남궁세가주 일검진천공 남궁표학을 사랑한 기녀 청란 그 청란과 남궁표학의 사랑의 결실인 엽무검. 어머니 청란의 유골함을 안고 뿌리를 찾아 천하를 헤매던 엽무검은 이제 뿌리를 찾은 것이다. "하하핫……." 금소천은 흔쾌한 대소를 터뜨리며 남궁수를 향해 말했다. "남궁셋째! 축하하네." 남궁수는 엄청난 격동 속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 모두가 대형…… 덕분입니다." "하하하,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금소천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엽무검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하하하…… 그리고 엽무검…… 이제는 자네를 남궁무검이라 불러 야겠구만." "성주님……." 엽무검은 홍안의 미소년처럼 눈물 젖은 얼굴에 홍조를 만들어 보였 다. 장내에는 한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저마다 반가운 사 연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기분은 더욱 좋았다. 이윽고 금소천을 중심으로 중인들은 자리를 갖추어 앉았다. 금소천이 먼저 진중한 신색으로 화예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예미, 당신이 나를 찾아온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이제 그 이유를 들어봅시다." "소천……." 화예미는 눈빛을 야릇하게 변화시켰다, 그러나 그녀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정작 그 이유는 엽무검이 밝혔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무거운 탄식과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며칠 전에 소림의 장문인이 천외천부로 찾아왔습니다." 순간 금소천의 얼굴에 경악의 기색이 실렸다. "무허선사가?" 그의 음성은 의외일 정도로 경악을 하고 있었다. "그, 그떻습니다." 엽무검은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천하의 금소천이 저처럼 격동할 줄은 상상도 못한 탓이었다. "으음…… 미안하네. 계속 이야기를 하게." 금소천은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며 기분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엽무검이 안색을 바꾸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헌데 무언가 대화를 나누던 중 시끄러운 소란성이 일기에 들어가 보았더니……." 엽무검의 안색은 점점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지 화가 나서 생기는 열기는 아닌 것 같았다. "검왕 사부께서는 이미 숨져 계셨고, 무허선사와 누님께서는 사라 진 상태였습니다." "으음……." 금소천이 다시 한 번 나직한 침음성을 터뜨렸다. 그의 안색은 더없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엽무검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소림사에 가서 자초지정을 알아보려 했으나, 무허선사가 천 불사존이었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입니다." 금소천이 순간적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연하겠지." "에, 예?" 엽무검이 대경하여 되물었다. 그러자 금소천은 황망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네. 그냥 혼잣말일 뿐이야." 물론 단순한 혼잣말은 아니었다. 장내 인물들은 누구나 그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금소천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의 기운이 방안 전체를 지배했다. 잠시 후 금소천은 신형을 일으켰다. 모두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를 향했다. "잘 알겠네. 화누님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자네는 천외 천부로 돌아가도록 하게 추후 화누님이 돌아와서, 조직을 잘못 이끌 었다고 원망을 듣지 않도록 말일세." 엽무검은 금소천이 무언가 알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그 무언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또한 금소천이 믿을 수 있는 사람임 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무겁지만, 확고한 신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55장 사랑을 구하다 밤이 찾아왔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천공을 그득 채울 것 같은 커다란 만월 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밤은 깊어가고 만월은 무르익는다. <만금각(萬金閣).> 금소천은 흘로 처소에 있었다. 창으로 흘러드는 교교한 월광에 묻혀 그는 혼자 자음자작하고 있엇 다. 냉한빙은 해산날이 가까워 은하당(銀河堂)에 머무르고 아사공주가 곁에서 간호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요즘 들어 처소에 흘로 있는 날이 많았다. "후우…… 달은 저토록 밝은데……." 금소천은 천천히 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달빛이 그득 채워진 그 술잔은 그 빛깔만큼이나 향기로웠다. 그러나 그는 술맛을 알지 못했다. 무수한 상념 속에서 그는 술맛도 의식치 못한 채, 일배 또 일배를 하고 있었다. 짙디짙은 고독감이 절로 묻어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때였다. 문득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본능적으로 방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금소천은 흠칫 안색을 미미하게 굳혔다. '예미…….' 그렇다.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다가오고 있는 여인은 바로 화예미였다. 그녀는 지금 산뜻한 백의궁장에 엷은 밤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 모 습은 진정 월궁의 항아가 방금 하강한 듯 아름다웠다. 어느덧 화예미는 금소천 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빙그레 화사한 웃음을 머금었다. 금소천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웬일이오?" 화예미는 사뿐 섬세한 교구를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잠이 오질 않아서요. 소천…… 당신이 잠못 이루고 자음자작하는 것과 똑같은 이유가 되겠지요?" 금소천은 빙긋 웃었다. "하하…… 마침 잘 왔소. 그렇지 않아도 혼자 마시기에 싫증이 나 있던 참인데…… 한잔 들겠소?" 그는 자신의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화예미의 고개가 살랑살랑 저어졌다. "별로 술을 마시지 못해요. 그냥 당신이 술 드시는 모습을 보고 있 겠어요." "허어…… 그렇다면 별로 반갑지 않은 술친구인데?" 금소천은 짐짓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화예미는 마음 편하게 옷을 수가 없었다. 야심한 시각에 이 곳까지 온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금소천은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그윽하게 주시했다. 은근하게 취기가 오른 눈빚이 유흑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아…….' 화예미는 절로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때 금소천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이미…… 만금성 회의에서 결정을 내렸소." 돌연한 말이었다. 도저히 이러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던 것이다. 화예미의 눈동자에 의혹이 떠올랐다. 금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음성을 이어갔다. "아직 오존문과 부딪칠 시기는 아니지만…… 선누님을 구출하기 위 해 정예고수들을 파견하기로 했소." 순간 화예미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아…… 그는 이미 결정을 보았단 말인가?' 희열의 벅찬 감동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도 잠시뿐이었 다. 화예미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퍼뜩 정신을 수습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은은히 고뇌와 괴로움의 멎이 떠올랐다. "소녀가 찾아온 것은…… 꼭 언니의 일 때문만은 아니에요." 이번에는 금소천의 눈빛에 의혹이 떠올랐다. 그는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화예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물론 언니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소천, 저는 한 가지만 묻고 싶어요." 화예미의 복잡한 시선이 금소천을 똑바로 주시했다. 금소천은 그녀의 도발적인 눈빛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아직도 소녀를 미워하시나요?" 금소천은 뜻밖의 질문에 놀라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표정을 풀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나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소. 아니,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해야겠지."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담담해져 있었다. 그는 병을 들어 잔에 술을 채웠다. 쪼르르르……. 눈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공허하게 느껴졌다. "전에는…… 미친 듯이 분노도 해봤고 절규도 한 적이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모든 것이 담담하게 느껴질 뿐이오."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다. 화예미의 표정에 일말의 안도가 스쳤다.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그 말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어 하기 힘든 말을 하듯 어렵게 입 을 열었다. "소천, 여 인에 겐…… 여인에겐 누구나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어 요. 소녀 역시 마찬가지예요." 잠시 말을 끊고 화예미는 깊숙이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당신에게만은…… 그 자존심마저도 팽개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