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천왕]서장 전설이 도래하다 - 63편 (63/79)
백발에 횐 수염을 하고 있는 청수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도저히 괴 기로움과 핏멎의 상징인 본래 모습을 연상할 수가 없었다. 혈의환사는 공허한 시선을 귀문장도 막여사에계 돌렸다. 문득 그의 전신에 부르르 격동의 전율이 일었다. 그는 볼 수 있었다. '막여사…….' 그토록 무심하던 막여사의 두 눈에 뿌연 안개가 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뜨거운 물기를 보일 것 같은 뿌연 안개는 명백한 눈물 이었다. "나 막여사는 언제나 질투심이 많았었소. 그러하기에…… 너무나도 강한 대사형을 볼 때마다 존경을 하면서도, 꼭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소.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오," 그의 음성은 미미하게 격동의 떨컴을 일으키고 있었다. 혈의환사는 치밀어오르는 격동올 참을 수가 없었다. "둘째……." "대사형……." 막여사의 두 눈이 더욱 뿌옇게 흐려졌다. 그는 혈의환사를 향해 손 을 내뻗었다. 그러나 혈의환사는 문득 눈을 감으며 그를 외면하고 말았다. 이어 그는 처절한 외침을 터뜨렸다. "너희들은 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크흐흐…… 너희들이 무엇 을 알겠느냐?" 휴르르르릉……. 그의 허연 백발이 폭풍처럼 휘날렸다. "막여사…… 내 이야기를 들어보아라 평생 동안 숨기고 싶었던 이 야기를……." 그의 옴성은 극심한 격동에 휩싸이고 있었다. 아까부터 눈은 펑펑 쏟아져 내렸다. "한 인간이 있었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더러운…… 짐승 같은 인 간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그 자에게는 딸아이가 있었다. 크흐흐…… 아주 천사같이 아름답 고…… 귀여운 십사 세의 소녀였어." 무엇 때문일까? 혈의환사는 절규와 함께 피 토하는 오열을 터뜨리고 있었다. "크흐흐…… 그런데 그 짐승 같은 인간은…… 어느 천둥벼락치는 날 밤…… 자신의 딸을 범했다. 겨우 열네 살…… 그 열네살 난 딸을 범한 것이란 말이다." 딸을 범한 짐승 같은 부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막여사 등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삼켜야 했다. "크흐흐…… 그래서 저주받은 운명의 한 아기가 태어났다. 그 짐승 같은 놈은 자신의 추행을 숨기기 위해 딸을 내쫓았고…… 아기는 자 랐다." 문득 혈의환사의 눈꼬리가 길게 갈라졌다. 그의 얼굴을 따라 선명 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아이는…… 그 짐숭 같은 놈의 아들인가. 손자인가? 크하하하 …… 세상에 이토록 터무니없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고개를 젖히며 광소를 터뜨렸다. 떨어지던 횐눈이 그의 얼굴 위로 가라앉았다. 눈송이는 덧없이 쏟하지고 있었다. "이십 년 후…… 그 아이는 혈궁의 비밀 제자로 입문했다. 그리고 막강한 무공을 익혔다. 크흐흐…… 그 아이가 누군지 알겠느냐? 크흐 흐흐흐…… 그 아이…… 그 아이가 바로…… 이 담사우란 말이다." 천광소를 터뜨렸다. 혈의환사의 생(生). 천하에 이보다 더 저주받을 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떠올리기조차 싫은 과거를 되살렸기 때문인지 서서히 혈의환사의 전신이 다시 시뻘건 핏멎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통곡 없는 오열 속에 혈의환사의 모습은 완전히 시뻘건 혈 인으로 변해 버렸다. "막여사! 너는 왜…… 왜? 나의 잊었던 과거를…… 정(情)을 되살 리느냐 말이다…… 크카카캇!" 귀문장도 막여사 등은 결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얼어붙은 입술과 경련하는 눈길을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혈의환사는 다시금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카카캇…… 막여사! 너는 다시는 나를 찾지 마라. 다시는…… 이미 나는 과거의 담사우가 아니다. 아수라의 화신일 뿐이다. 크카캇 ……!" 휘리리리릭 ……. 그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회오리 폭풍이 일었다. 핏빛의 거대한 폭풍이었다. "크카캇…… 나는 천왕지존이 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운명이 살아 가는 방법은 오직 그 하나의 신념뿐…… 그 신념마저 없다면 나는 더 이상 살아갈 수도 없는 것이다. 크카카캇!" 서서히 그의 전신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막여사…… 결코 나를 찾지 마라. 다시 나를 찾으면…… 나는 진 정…… 너를 죽일지도 모른다." 만과 함께 완전히 그의 전신이 녹아 버렸다. 혈의환사의 마지막 외침이 여운을 끌며 사라졌다. "하나…… 이것만은 진심이다. 막여사…… 진정으로 너를…… 좋아 한다." 휘이이잉……. 폭설은 회오리 눈보라로 변했다. 귀문장도 막여사 등은 넋을 놓았다. "대사형……."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 이상은 어떠한 사고도 떠올릴 수 없었다. 휘이이잉……. 눈보라는 미친 듯 요동을 일으켰다. 혈의환사가 가진 저주의 운명을 대신한 오열인 것 같았다. "대-- 사-- 형--!" 눈(雪). 올해는 유독 많은 눈이 내렸다. 48장 모종의 결심을 하다 두두두둑……. 굉량한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이어 일단의 기마대가 만금성이 있는 무석산을 향하고 있었다. 천마웅풍(天魔雄風). 높이 치켜든 깃발에는 화려한 금색 필체가 용사등비(龍蛇騰飛)하고 있었다. 바로 천마교 고수들의 행렬인 것이다. 선두에는 짙은 핏빛의 적토마(赤土馬)에 올라앉은 천마황 단금성의 모습이 보였다. 천마황 단금성. 그는 전일 백리호와의 약속대로 금소천을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금소천. 그대는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성장을 했다. 이제는 나 단금성이 감히 쉽사리 여길 수 없을 정도로……." 중얼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천마교인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인원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천하의 만금성을 상대하러 가는 행렬이 아니었다 "허나 나는 바보가 아니다. 또한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그 러니 금소천, 일단은 그대를 놔 주도록 하지." 그의 목소리는 수찮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두두두두둑……. 천마교 행렬은 보무도 당당히 전진을 계속했다. * * * 단아한 정실. 금소천은 단금성과 마주하고 있었다. 단금성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금성주, 무척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소." 금소천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렇소이다. 게다가 그 동안 단교주의 신위는 무척 증진하셨소. 가히 일대종사답구려." 단금성도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습니까? 핫핫핫…… 본인은 도저히 금성주의 언변을 따를 수 가 없구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런 식으로 격의 없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겉으 로 보아서는 천하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효웅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가슴속 깊이 숨겨져 있는 야망은 누구도 짐작하 기 힘든 크기였다. 문득 단금성이 웃음기를 거두며 말문을 돌렸다. "그나저나 금성주. 이제는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 소?" 그의 말은 너무도 급작스러웠다. 그러나 금소천은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지난번의 격돌도 아직 끝이 난 게 아니니까." 잠시 두 사람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엇다. 태풍의 눈이 연상될 정도 로 강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러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말문을 열었다. 다시 한 번 그들의 시선은 불꽃을 튀겼다. 이윽고 그들의 얼굴에 슬며시 잊었던 미소가 떠올랐다. "먼저 말씀하시지요, 단교주." "아니오. 금성주께서 말씀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소." 대립 아닌 대럽이 묘하게 이어졌다. "아무래도 우리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갈구려." 금소천이 미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단금성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다시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들었닥. 무겁기 이를 데 없는 침묵이었다. 그러나 살기 어린 긴장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중단 된 대화에 대한 묘한 분위기일 뿐이었다. 그것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금소천이었다, "일단…… 우리의 싸움은 뒤로 미루도록 합시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집어냈다. 이제 칼자루는 단금성에게로 넘어갔다. 그 역시 재빠르게 칼을 휘 둘렀다. "역시 그게 좋겠소. 싸우고 있는 우리의 뒤통수를 치려는 놈들이 너무도 많으니까." "후후후, 맞았소. 멍청하게 서 있다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처럼 기 분 나쁜 일도 없지." "물론이오, 하하하!" 두 사람은 의미 있는 말을 주고 받으며 대소를 터뜨렸다. 손꼽히는 효웅들답게 그들은 결단력도. 계산도 빨랐다. 자신의 득 과 실을 철저하게 판단해냈다. 은밀하게 숨어 있는 오존! 그리고 중원을 벗어나 되돌아간 야율노격! 적어도 그들이 존재하는 한, 완전한 안전지대가 있을 수 없음을 그 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중원 내부의 자중지란이 나 마찬가지인 대격돌을 미루기로 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판단은 당금 무림의 거대한 혈전 하나를 조기 종식시 킨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단금성이 웃음기를 감추지 않은 채,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어쨌든 지난번에는 금성주에게 두손 두발 다 들엇소. 도저히 이 단금성이 당할 수 없음을 절실히 통감한 것이오." 금소천은 말없이 미소를 지엇다. 문득 단금성이 기이한 미소를 머금으며 의미심장히 금소천을 응시 했다. 맞은쪽에 자리했다. "정말…… 오빠는 너무 많이 변하셨어요." 냉소옥의 희뽀얀 볼에 앙증맞은 보조개가 패였다. 그녀는 귀엽게 옷으며 금소천을 빤히 마주보았다. "소녀를 몰라보시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했는데…… 다행이에 요." 금소천은 고개를 저으며 대소했다. "하하…… 내 어찌 소옥을 몰라보겠느냐?" 그때 단금성이 슬쩍 끼먹들었다, "하하…… 금성주, 저 아이는 항상 금성주의 동태에 대해 묻고 걱 정을 하곤 했다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은근히 음성을 낮추었다. "아무래도 금성주에 대해 생각이 보통이 아닌 것 같소." 순간 냉소옥의 옥용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머. 사형! 소녀를 그렇게 놀리시기예요?" 단금성이 짐짓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능청을 떨었다. "하핫…… 왜? 내가 거짓말을 했단 말이냐? 이곳에 오기 전만해도 굳이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쓰더니, 막상 금성주 앞에서는 시침을 딱 떼는군." 이어 그는 짐짓 긴 탄식성을 불어냈다. "아아…… 여인. 여인이란 진정 애매모호한 존재란 말인가?" "사형!" 냉소옥의 날카로운 외침이 길게 텨졌다. 쌕쌕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 모습은 진정 가시 돋힌 장미를 연상시 켰다. "아이구, 이거 자칫 잘못하다간 어디 한 군데 다치겠는걸?" 단금성은 엄살기 섞인 얼굴로 금소천을 쳐다보았다. "금성주, 좀 말려주시오. 아무래도 저 녀석을 막을 사람은 천하에 금성주밖에 없을 것 같소," "하하핫핫……." 금소천은 그저 호쾌히 웃기만 했다. "아이 참…… 정말……." 냉소옥은 붉디붉은 장미의 모습이 되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 을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두 효웅의 만남은 점차 또 다른 색채를 띠었다. * * * "대형 그것은 분명 미인계입니다." 남궁수는 창백한 얼굴에 진중함을 담고 말했다 그와 마주앉은 금소천은 천천히 차를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 었다. "나도 짐작하고 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남궁수를 똑바로 응시했다. "남궁셋째. 그래, 어찌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냐?" 남궁수는 의자에 깊숙이 신형을 묻었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의미심장한 시선이 금소천을 향했다. "미인계에 대처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한 가지 방법이라니?" 남궁수는 고게를 덕였다. "미남계." 순간 금소천은 멍한 얼굴을 했다. "미남…… 계?" 바로 그때였다. 남궁수의 추가 설명이 있기도 전에 밖에서 시비의 음성이 조심스럽 게 들려왔다. "성주님. 천마성의 냉소옥 소저께서 오셨습니다." 금소천은 흠칫 안색을 미미하게 굳혔다. 그러나 남궁수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신형을 일 으켰다. 絿첼 환하게 펴졌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럼…… 정말이지 않고?" 냉소옥은 기쁨 어린 얼굴로 턱을 고였다. 그리고는 초롱초롱한 눈매로 금소천을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보는 이를 단번에 빨아들일 듯 깊고 서늘한 눈빛이었다. 금소천은 의아해 했다. "왜 그렇게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느냐?" "신기해서요." "뭐가?" "그때…… 사기꾼 같은 사람이 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큰 인물이 됐올까 해서요." "ㅋ!" 금소천은 일순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나 냉소옥은 정색을 했다. "오빠, 한번 솔직하게 말해봐요. 이것도 사기를 쳐서 얻은 것들인 가요?" "사기?" 문득 금소천의 뇌리를 스치는 정경이 있었다. 낙양성 어느 한 객점 앞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내린 귀여운 소녀와 조금은 어른티가 나는 잘생긴 소년. 그들은 그때도 지금처럼 마주 앉 아 치기 어린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그림처럼 아름답기만한 추억의 한 토막이었다. 얼핏 금소천은 지금의 상황이 그때와 너무도 홉사하다는 생각을 했 다. '후후후…… 옛일이란…….' 그는 잠시 추억에 빠져들었다. 그때 냉소옥이 기이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오빠는 부인이 둘이라면서요?" 금소천은 흠칫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예쁘신가요?" "음. 소옥만큼이나……." 그 말에 냉소옥은 코끝을 껑긋 모으며 웃었다. 양볼의 보조개가 따라 웅는다. "흐흥, 거짓말……." "응? 뭐가?" "소옥은 예쁘지 않아요. 사형이 항상 그랬어요. 나는 천하에서 둘 째 가라면 서러워할 말괄량이라구." 금소천은 짐짓 정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소옥은 예쁘다. 정말로……." "풋!" "왜 웃지?" "꼭 진짜 사기꾼 같아." "뭣이?" 다음 순간 금소천은 고개를 젓히며 크게 웃었다. "핫핫핫…… 그래. 사기꾼…… 그러나 사기꾼이라도 천하를 상대로 사기를 칠 수 있다면 그 역시 대단한 것이 아니겠느냐?" 냉소옥은 고개를 덕이며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맞아요, 오빠는 진정 큰 사기꾼이야." 그녀는 금소천의 얼굴에서 계속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맑은 수정을 들여다보듯 순진무구한 눈빛이었다. 냉소옥. 그녀는 장미 같은 용모에 백합의 청순고결한 영혼을 지닌 매혹적인 소녀였다. 금소천은 그녀로 인하여 자신의 영혼이 밝고 맑게 표백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황당한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또르르……. 냉소옥의 커다란 눈에서 이슬같은 맑은 옥루(玉淚)가 굴러 떨어졌 다. 금소천은 내심 흠칫했다. "소옥, 왜 우느냐?" 냉소옥은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몰라…… 그냥 눈물이 나와요." 금소천은 점점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슬픈 일이라도 있느냐?" "아…… 아니……." 그녀는 애써 볼우물을 파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마…… 너무 기뻐서 그런가 봐. 소옥은 지금 너무너무 행복하거 든요." 너무 기뻐서 눈물이 솟는 아름다운 소녀. 금소천은 뭉클한 감동 속에 내심 가만히 중얼거렸다. '남궁셋째, 우리 생각이 틀린 것 같다. 소옥이는…… 결코 미인계 가 아니야.' 남궁수는 금소천의 거처를 벗어나 정원으로 나갔다. 눈. 소담스런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쥐죽은 듯 고요한 천지를 하얀 눈송이를 덮고 있었다. 성스러운 신비마저 느끼게 하는 정적이었다. 남궁수는 옷속을 파고드는 한기에 한차례 몸을 떨었다. 그러나 다시 실내로 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늘따라 웬지 눈속을 걷고 싶어졌다. "후우……." 그는 장원 가운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수많은 눈송이들……. 얼굴에 와 닿는 감촉이 차갑고 서늘했다. 淡 생긋 웃음을 지었다. "어인 일로 눈 오는 정원을 홀로 거닐고 계신가요?" 남궁수는 퍼뜩 정신을 수습하며 입을 열었다. "그…… 글쎄오이다. 그저 걷고 싶었기 때문이라면 대답이 될는지 ……?" 그의 당혹스런 태도에 단회진은 짤랑짤랑한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천하의 남궁군사께서 하시는 말치고는 무척 싱거운 대 답이군요." 남궁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만금성의 군사로 천하를 질타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단희진은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한동안 거북한 침묵이 지나갔다. 그러자 침착을 되찾은 모습으로 이번에는 남궁수가 물었다. "단소저는 눈을 좋아하십니까?" 단희진은 밝게 미소하며 고걔를 끄덕였다. "네, 무척 좋아해요." 그러자 남궁수는 말없이 허리를 굽혀 눈을 뭉쳤다. 이어 전면을 향 해 힘껏 던졌다. 그러나 눈은 일 장도 못나가고 그대로 맥없이 떨어져 버렸다. 남궁수의 창백한 얼굴이 단희진을 향했다. "소생은 눈을 별로 좋아하지 않소." 그의 음성은 너무도 침울했다. 단희진도 더 이상 마주 웃기가 힘들었다. "눈은 아름답지만 봄이 되면 녹아 버리기 때문이오." 얼핏 단희진은 그의 혜지로운 눈동자를 스치는 한 가닥 고독을 보 았다. 그것은 그대로 그녀의 가슴에 쩡한 아픔의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녀는 황급히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내년 겨울이면 눈은 또 다시 내려요." 남궁수는 흠칫 눈빛을 굳혔다. '그래…… 내년이면 눈은 또 내리지.' 그는 시선을 돌려 단회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윽한 눈길이 마주치며 알 수 없는 전율이 잔잔히 오갔다. 문득 단희진은 은은히 홍조 띤 얼굴을 가만히 떨구었다. 왜 얼굴이 달아오르는지 그녀는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가슴 이 콩콩 소리내어 뛰고 있는 것이었다. '으음…….' 남궁수는 넋을 놓았다. 그의 동공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은 바로 단회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뿐이었다. 그 역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철이 자석에 이끌리듯 그는 본능적 으로 단희진을 향한 마음을 느꼈다. '이런 기분은…… 난생 처음이군.'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어 눈 내리는 하늘로 시선을 옮기며 한 손으로 눈을 받았다. "푸훗!" 남궁수의 입술 사이로 억눌러 참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단희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왜 웃죠?" 남궁수는 웃음을 거두지 못한 채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오. 갑자기 어떤 일이 생각나서 그러오." 단희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남궁수의 속마음까지 짐작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 다. '미인계…… 후후후, 대형이 미인계에 걸리기 전에 내가 먼저 걸릴 것 같군.' 그가 웃은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남궁수는 어쨌든 기분이 매우 좋았다. 자의이건 타의이건, 계략이 건 진실이건 남올 그릴 수 잇다는 것은 참으로 커다란 매력이었다. 그는 무어가 그리 좋은지 연신 미소를 그치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니……." 단희진의 어리둥절한 눈동자가 그의 얼굴을 쫓았다. 저 남자는 보 기와는 다르게 엉뚱한 면이 있는 것 같았다. 남궁수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창백하지만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대답했다. 단희진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요. 적어도 저는 오늘을 수천 번이나 머리 속에서 그 렸답니다." 남궁수는 다시금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는 단희진의 얼굴을 응시했다.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은 하늘의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제가 수랑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녀의 음성은 잔잔한 떨림을 보이고 잇었다. 동시에 간절한 열망 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수랑……. 남궁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후우…… 할 수 없구려." 순간 단희진의 눈동자에 희열의 빛이 서렸다. 이어 그녀는 작은 동체를 나비처럼 날려 남궁수의 품안에 안겨 들 었다. "수랑!" 남궁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두 사람의 포옹은 부드러우면서도 끝없이 뜨거웠다. "사실을 말하면……." 남궁수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단희진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남궁수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나 역시 이 순간을 수천 번은 그리고 있었다오." 단희진은 넘치는 회열에 몸을 떨었다. 그녀는 남궁수의 품속으로 더욱 세차게 파고들었다. "수랑……." "희진……."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 근처데서는 한 줄기의 비가 되고 있었다. "어쩌면 눈이 좋아질 수도 있을 것 같소." * * * 남궁수. 그는 자신의 거처에서 사흘간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사흘 동안 그는 침식도 잊은 채 무엇인가 계속하여 글만 쓰고 있었 다. 휙! 휘익! 허약한 육체와는 달리 힘차기 이를 데 없는 필력이 붓을 통해 뿜어 져 나왔다. 그때였다. 소리 없이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명 절색의 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의 정체는 바로 천봉 단희진이었다. 그녀는 요즘들어 더욱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아마도 사랑을 느끼는 탓이 아닌가 싶었다. 천봉 단희진은 소리 없이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천기서생 남궁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서탁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단희진은 남궁수의 등뒤에서 옥수를 들어 그의 눈을 부드럽게 가렸 다. "제가 누구 같아요? 남궁군사님?" 그녀는 짐짓 변성(變聲)을 하여 음성을 굵게 만들었다. 남궁수는 붓을 놓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후후…… 희진, 당신도 장난을 칠 수 있다는 것이 놀랍군." "피잇!" 단희진은 입술을 죽이 내밀며 손을 풀었다. 남궁수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신형을 돌렸다, 단희진은 짐짓 새침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