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천왕]서장 전설이 도래하다 - 47편 (47/79)
"뭐, 뭐라고 했소?" 혈의환사는 짜증스럽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알았으니 어서 꺼지란 말이다." 사혼의 눈동자에 경악이 떠올랐다. 혈의환사가 이처럼 쉽게 승낙하 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탓이었다. "저, 정말이오? 나와의 약속을 잊겠다는 것이오?" 그는 재차 확인을 했다. 혈의환사의 짜증스러운 음성이 다시 한 번 터져 나왔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나?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한다면 그놈의 지옥전주라는 작자와 사생결단을 내겠다!" 사혼은 혈의환사가 진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황망하게 허리를 숙였다. "고맙소이다." 그는 진정으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혈의환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냉기만 이 플풀 휘날릴 뿐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소." 사혼은 주춤거리면서도 빠른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혈의환사 의 마음이 변할까 다급한 걸옴이었다. 그러나 혈의환사는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딸깍! 관제묘의 문이 나직한 소음을 내며 닫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혈의환사는 그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35장 잊혀진 비사를 듣다 소호(巢湖). 중원오대호(中原五大湖) 중의 하나인 천하명호(天下名湖). 휘-- 이-- 잉--! 겨울이 되며 바람은 더욱 매섭게 불었다. 겨울바람이 스치는 소호는 차라리 눈이 시릴 만큼 푸르다. 사위는 너무나 고요하다. 바람이 불어 더욱 고요한 소호. 호수 중앙으로 한 척 작은 배(小船)가 그림갈이 미끄러지고 있었 다. 소선(小船)의 선실. 역시 배만큼이나 작은 선실 안에는 두 인물이 마주보며 침묵속에 안아 있었다. 그들은 대별산을 떠나온 금소천과 엽무검이었다. 대별산에서 소호에 이르기까지 오백 리(五百里). 그 먼길을 오는 동안. 그들은 서로가 먼저 말을 붙이기가 무서운 듯 그저 침묵만 지켰다. 엽무검은 창백한 안색으로 멍하니 하늘만 옹시하고 있었다. 하늘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에는 깊은 우수가 앙금처럼 침잠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골상자만큼은 언제나 품속에 꼭 끼고 있었다. 금소천의 시선이 그 유골상자와 엽무검을 번갈아 응시했다. '왠지 낯설지가 않다.' 그는 엽무검을 처음 만났으나 꿴지 낯설지 않은 친근감을 느꼈다.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휘이잉……. 바람이 엽무검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문득 처옴으로 금소천의 입슬이 열렸다. "당신의 그 유골상자에는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소만……." 엽무검은 하늘에서 시선을 떼 금소천에게 던졌다. 조금씩 그의 입 가에서 작은 경련이 일었다. "이것은 내 어머니의 유골이오." "어머니의……?" 엽무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미간에 쓸쓸한 그늘이 내려앉았다. "내 어머니는 악양(岳陽) 제일의 명기(名妓)였소. 정말…… 대단한 미인이셨지요." 금소천의 검미가 꿈틀하며 움직였다. 그는 기광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엽무검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분의 생애는 오직 불행으로 점철된 생애일 뿐이었소 이다."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어 갔다. 더불어 유골상자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마치 어머니의 손올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 어도 이 순간 금소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엽무검은 유골상자를 꽉 잡고 회미한 웃음을 보였다. "그런 어머니에게도…… 단 한 번 행복했던 시기가 있었지요." 휘이잉……. 바람은 불고 호수는 더욱 고요하다. 엽무검의 목소리는 애잔한 떨림을 보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림(武林)에서 유명한 한 영응과 사랑에 빠지신 것입니 다. 어머니는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엽무검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아수마궁의 인물들에게 있어서는 지옥사자 같은 그가 어머니의 유 골 앞에 눈물을 홀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단 반년으로 끝나고 말았지요. 기나긴 불행의 시간에 비해 행복은 겨우 반년……." 엽무검은 연민 가득한 손길로 유골상자를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은 유골상자에 갇힌 어머니의 불행을 남김없이 주워내듯 잘디잔 경련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그 후 내가 여덟 살 때 돌아가시고…… 후후후, 단 한 번의 행복이 남긴 나 엽무검은…… 태어난 이래 그분의 웃음을 한 번 도 대한 적이 없었소." "음……." 금소천은 나직하게 침음하며 안색을 경직시켰다. 문득 본능적인 궁금함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영웅이란 분은 누구셨소이까?" 엽무검은 통곡보다 더 진한 서글픈 미소를 보였다, "그분 역시 이미 돌아가신 분…… 이제 와서 말해 본들 무슨 소용 이 있겠소?" 그의 눈빛은 아득한 추억의 저 먼 언덕을 향해 있었다. 그 날은 몹시도 눈이 많이 내린 날이었어요. 나는 추위와 굶주림에 거의 죽음 상태에 이르러 있었소. 졸지에 부모를 잃은 애가 할 수 잇 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소이다," 너무 담담해서 가슴이 아픈 음성이었다, 휘이잉……. 자꾸만 바람은 불어왔다. 그럴수록 엽무검은 더 깊은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그런 나에게 따스한 정(情)의 손길이 있었소. 그분은 나 에게 음식과 옷과 집을 주었소. 그것이 그러니까…… 내가 열두 살 나던 해였소." "흐음…… 누구인지는 꼴라도 정말 고마운 분이셨구려." 엽무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그의 눈동자에는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서렸다. 어머니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를 향한 것인지는 알 수 언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울 수밖에 없었소. 어머니 외에…… 두 번째로 나를 사 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말이오." 서서히 엽무검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의 입가에는 밝은 웃음이 피어 올랐다. 금소천은 엽무검의 옆모습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음…… 아무래도 저 친구의 얼굴은 누군가를 닮았다. 분명 누군가 를 봅시도…….' 그는 애써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너무도 어려웠다. 무어라 꼬집어 그 어떤 얼굴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낯이 익어. 도대체 누구를……?' 엽무검은 시선을 들어 속절없이 차갑게 푸른 동천(冬天)을 올려다 보았다. "나를 죽음에서 구해주신 그분의 이름은 바로 화예랑……." '화예랑?' 금소천은 내심 흠칫 놀라고 말았다. 천외천부라는 신비의 세력을 이끌고 나타났던 화예랑의 이름을 엽 무검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그때 그분은 나이는 십구 세였고…… 나에게는 흡사 하늘의 선녀 와도 같았소." 말을 하는 엽무검의 두 눈 깊숙한 곳에서는 화려한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그분…… 화누님은 나의 정신적인 지주요, 마음의 신(神)이었소. 물론 지금까지도……." 순간 금소천은 내심 한 소리 기이한 외침을 터뜨렸다. '으음…… 그랬었구나.' 그의 안색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일순 그는 지극히 담담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당신은…… 그녀를 사랑하는 모양이로군." 금소천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엽무검의 태도에서 익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급소천의 물음에 엽무검은 홈칫 눈빛을 급변시켰다. 두 눈에서 터지던 화려한 블꽃이 흘연 사라졌다. 이어 그의 눈빛은 처음과 같이 깊고 진한 우수의 빛을 보였다. 그는 메마른 입술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소이다." 그는 한숨을 토하듯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소 그 벽은 너무나 두 텁소. 감히 나 같은 녀석은 끼여들 수조차 었소. 아시겠소? 그분에게 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그 벽은 너무도 두텁단 말이오!" 그의 마음은 격앙되어 있었다. 그가 쏟아내는 말들은 피를 토하는 절규의 홍수였다. 두 사람되 시선이 맹렬하게 부딪쳤다. 그들은 서로 말이 없었다. 누구도 입을 열어서는 안될 것 같은 묘 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우……." 엽무검은 문득 고개를 숙였다. 순간 금소천은 볼 수 있었다. 엽무검의 두 눈에 반짝 눈물이 맺히 고 있음을…… '선누님…….' 금소천은 시선을 들어 차가운 겨울 하늘을 바라보았다, 화예랑의 눈부신 꼬습이 그곳에 있었다. '선누님…… 당신은 대체 얼마나 많은 가슴들을 아프게 할 작정이 오?' 물론 대답은 없었다. 화예랑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은 미소 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포르릉……. 문득 겨울 철새 한 마리가 동천을 가로지르며 날았다. 한 마리의 짝 잃은 새인가? 어울리지 않게도 겨울 철새는 한 마리였다. "어쨌든 서두릅시다." 금소천이 불쑥 입을 열었다. 엽무검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마치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것 같았다. 금소천은 이미 신형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엽무검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 * * 소호의 중앙에 섬(島) 하나가 연꽃처럼 떠 있었다. 엽무검은 소선을 그 섬에 갖다 댔다. 이어 그는 금소천을 안내하여 섬으로 올랐다. 섬의 한쪽.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한 채의 방대한 장원이 모습을 보였다. 세운 지 오래되지는 않은 듯 목향(木香)이 채 가시지도 않은 장원 이었다. 엽무검은 장원을 경비하는 무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장월을 들어섰 다. 태양혈이 툭 불거져 나온 만만치 않은 기세의 무사들이었다. 엽무검과 금소천은 층층 누각들을 지나 잠시 후 아름다운 누각 앞 에 이르렀다. 그때였다. "잠깐 멈추세요." 그들 전면에 섬세한 인영 하나가 연기같이 솟았다. 순간 금소천은 안색을 미미하게 대변시켰다. "화…… 예미(花蘂美)……" 금소천을 막아선 날렵한 인영. 해와 달이 수줍어 할 절색의 눈부신 미녀였다. 바로 항주성의 천하명기 취접향, 아니 화예미였다. 천외성녀 화예랑의 친자매인 화예미. 그녀는 가슴에 옥비파(玉琵琶)를 안고 있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전보다도 그녀는 더 아름답게 성숙해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녀의 전신에는 겨울 하늘보다 더 냉막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소천……." 화예미의 아름다운 눈가가 꽈르르 떨렸다. 그녀는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금소천을 바라보았다. 한편 금소천을 안내하던 엽무검은 공손하게 그녀가 나타나자 예를 취했다. "이공주(二公主)께 인사드럽니다," 그러나 화예미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갑지만 떨리는 말문을 열었다. "엽무검." 엽무검은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먼저 들어가도록 하라. 나는 저분과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다." 순간 엽무검은 홈칫하억 눈빛을 급변시켰다. "이공주님……." 명백히 만류를 하는 음성이었다. 그러자 화예미의 옥음이 더욱 차갑게 서릿발을 보였다. "먼저 들어가라고 이르지 않았더냐?" 엽무검은 안색을 엄중하게 굳혔다. "하지만 부주님의 명은 절대 어길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십시 오." 그는 결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화예미의 시선이 엽무검을 향해 반짝 살기를 뿜었다. "엽무검! 비키지 않으면…… 널 죽일지도 모른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그녀의 전신을 휘감아 돌았다. 엽무검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비킬 수는 없습니다." 파르르……. 화예미의 전신에 분노의 경걸이 일었다. "감히 그대가……?"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그녀는 가슴에 안고 있던 옥비파를 무섭게 휘둘렀다. 은은한 살기가 내포된 막대한 경력이 엽무검의 가슴을 노렸다. 슈슈슈숯! 그때 금소천의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안되오!" 그의 외침에 화예미의 옥비파가 흠칫 그 기세를 늦추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공세는 엽무검에게 밀어닥쳐 잇었다. 엽무검은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채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펑--! 엽무검은 답답한 신음성을 발하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으윽!" 입에서 한 사발 가량의 핏줄기가 뿜어졌다. "앗!" 놀란 사람은 오히려 화예미였다. 그녀는 설마 엽무검이 피하지 않고 자신의 공세를 고스란히 받아들 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엽무검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자신의 공세를 받아냈고 힘겹게 처음의 상태로 우뚝 자리했다. 입가로 가늘게 피를 흘리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차라리 공포스럽 기까지 했다. "아아……." 화예미의 옥용이 창백하게 질리며 눈물이 맺혔다. "모두…… 모두 미쳤어…… 미쳐 버린 거야." 그녀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금소천을 향했다. 서릿발 같은 냉랭함이 간절 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소천…… 제발 저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애원조였다. "제발…… 언니를 만나지 말아요. 제발……." "으음……." 금소천은 나직한 신음성을 흘렸다. 화예미를 바라보는 금소천의 두 눈에 깊은 고뇌의 및이 깔려있었 다. "소천…… 제발…… 제가 이렇게 빌겠어요." 그녀는 급기야 무릎을 끓었다. 금소천은 흠칫하고 놀라야 했다. 그녀가 설마 이떻게까지 간절하게 나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소천…… 제발……." 그녀의 얼굴은 비오듯 쏟아지는 눈물로 인해 애처롭게 보였다. 금소천은 무거운 침음성을 흘렸다. "화예미…… 당신은 옛날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군." 화예미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에 젖은 서러운 모습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옛날에도…… 당신은 유난히 눈물이 많았지." 금소천의 시선은 막 떨어지는 그녀의 눈물올 따라 흘렀다. "언제나 큰 눈에 눈물을 담뿍 담은 채 이렇게 말했지…… 나는 천 아와 결혼할 거야…… 라고 말이오." 지나간 추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슴 아프게 존재하는 추억이었다. "소…… 천," 화예미는 안타깝게 금소천을 불렀다. 금소천은 탄식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진작에 알았어야 했던 것을…… 당신 화예미가 선예미라는 사실을…… 선예미였다는 사실올……." 그의 마지막 음성은 어딘가 모르게 냉정함을 띠고 있었다. 그 냉정함이 화예미의 가슴을 비수처럼 파고뜰었다. "소천……." 화예미는 안타깝게 금소천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금소천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한켠에 있던 엽무검이 시선 속으로 들어왔다. "엽무검, 가세." 금소천은 엽무검과 함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예미. 아니 선예미 를 떠났다. "흑……." 화예미는 그대로 무릎을 끓은 채 애끓는 오열을 터뜨렸다. "모두…… 모두가 미친 거야…… 미쳐 버렸어. 흑흑흑!"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 무엇이 이토록 그녀를 가슴 아픈 오열 의 바다로 밀어 넣는가? "흘러간 과거를…… 지난 비극의 추억을 되돌려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뼈아픈 과거. 금소천과 이들 자매들 사이에는 그 어떤 비극의 과거들이 있는 것 일까? "소천…… 당신은 진정 모르시나요? 제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 하고 있는지를……." 그녀는 오열에 오열을 거듭했다. "그래요. 당신 말대로 예미는 변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금소천이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소천…… 예미는 변하지 않았단 말이에요. 옛날의 그 마음은…… 잘코 변하지 않았어요." 휘이잉……. 차가운 겨울바람은 이곳에도 있었다. 그녀는 차가운 바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소천…… 당신과 평생을 함께 하고픈 마음은 이후에도 결코 변할 수 없어요." 그녀는 끓었던 신형을 일으켰다. 그녀는 눈물 젖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 이제 방법은 그것뿐이야." 문득 그녀의 눈빛이 기이한 빚을 뿌렸다. "소천…… 당신을 영월히 내 곁에 붙들어 두겠어요." 확고한 결심을 굳힌 여인.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으려는 여인, 그녀의 이름은 선예미였다. * * * 눈이 내린다. 창을 통해 내리는 눈은 함박눈이다. 눈이 내리는 밖을 향해 창을 열어 놓은 한 정실. 십전완미(十全完美)의 화려한 미색을 가진 여인 하나가 보인다. 완 벽한 미색 못지않게 일신에 천상지기(天上之氣) 내뿜고 있는 여인. 그녀는 바로 무림이대성녀 중 한 명인 천외성녀 화예랑이었다. 화예랑. 지금 그녀는 눈 내리는 창가에 앉아 칠현금(七 琴)을 탄주하고 있 었다. 擊据末結幇 紋眉出前窓 羅裳葛飄飄 小開罵春風 치맛자락 부여잡고 띠도 못맨 채 그대 오시나 창 열고 바라보노라면 표표한 바람에 치마폭 나부끼고 속절없이 바람만 흘러가누나. 실로 듣는 이의 심금을 저미는 천상지음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는 창가에서…… 그녀의 노랫소리는 애절한 여운을 남기고 여운 속에 사라졌다. "호오……." 그녀는 아름다운 미지(美指)를 금현(琴絃)에서 떼었다. 일순 어디선가 담담한 음성이 일었다, "훌륭한 노래요." 화예랑의 전신이 흠칫하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음성이 인 곳으로 천천히 시선을 던졌타. 순간적으로 그먼의 아름다운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소천……." 미움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다. 무어라 정확한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 그러한 목소리였다. 금소천은 천천히 그녀가 있는 창가로 다가왔다.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상대를 응시했다. 침묵을 깨뜨리고 먼저 말문을 연 사람은 금소천이었다. "매우 수척해지셨소. 선누님……." 화예랑의 아름다운 눈망울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소천…… 당신도 많이 변했어요." "그렇소. 복우산에서 만난 지 벌써 사년…… 한 인간이 성숙되기에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오." 화예랑은 미묘한 미소를 보였다. 어찌 보면 한없는 슬픔을 간직한 듯한 기이한 미소였다. "소천, 결혼을 했다고 들엇는데?" 금소천은 담담하게 고개를 덕였다, "올 가을에…… 아름다운 아내 두 명을 한꺼번에 얻었소. 내년이면 아버지도 될 것이오." 순간 화예랑의 가녀린 어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버지가…… 된다고?' 그녀는 시선을 창 밖으로 주었다. 눈송이 하나가 그녀의 눈망울 속에서 떨리며 녹아들었다. 그리고 또 한 송이가 기다리지 못한 채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오늘은 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리고 있었다. 화예랑은 천천히 시선을 금소천에게 던졌다. "정말 축하해요…… 소…… 아니, 금대협……." 그녀는 이제 그를 더 이상 소천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금…… 대협이라고?' 급소천은 내심 흠칫하고 말았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그녀가 아득히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마음 한구석이 통째로 텅 비어 버렸 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경고까지 했던 자신이 아니던가? 도대체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건지 스스로도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금소천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고맙소…… 화소저." 금소천. 그 역시 그녀를 더 이상 선누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을 뱉어내는 순간 후회가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화예랑의 아름다운 옥용에 일순 한 줄기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았 다. 그들은 잠시 어색한 침묵을 지켰다. "호오……." 침묵의 무거움을 견디지 못한 듯 화예랑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성을 발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담담한 본래의 신색을 회복시켰다. "엽무검을 시켜 금대협을 이곳으로 모신 것은 한 가지 때문이에 요." 놀라울 정도로 사무적인 어투였다. 금소천이 다소 놀갈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기운이 그녁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무척 참기 어려운 무거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잘끈 입술을 문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바로 이십삼 년 전 천하제일성 붕괴에 대한 전모를 밝혀 드리기 위해서예요." 순간 금소천의 안색이 급속하게 변했다. 천하제일성의 붕괴! 이것은 아직도 강호무림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금소천 자신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자신이 태어난 날 암습을 받고 돌아가신 부친. 하룻밤새 기적처럼 무너져 내린 천하제일성. 금소천은 격앙된 어조로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화예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사년 전 복우산에서 금대협에게 이야기해 드리려 했어요. 하지만 그때 금대협께서 너무나 빨리 산을 내려가시는 바람에 미처 말을 맺지 못한 거예요." 화예랑의 눈빛이 다소 침울해줬다. 마치 지나치게 냉담했던 지난날 의 금소천을 원망하는 것 같았다. "금숙부께서는 무당 전대장문인 능허자의 막내 제자로, 그 뛰어남 이 뇌천우사(雷天羽士)에 버금갈 정도였어요." 금소천의 검미가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아버님이 무당의 제자이셨다고?" 화예랑은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잇고 있었다. "어느 날 그분께서는 기연을 얻으셔서 천고의 무학기서인 천외천경 (天外天經)과 혈궁의 비급이 소장된 구천석부(九天石府)로 드실 수 있는 구천혈시(九天血 )를 얻으실 수 있었어요." 금소천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 내용은 그도 익히 아는 사실이 기 때문이었다. 문득 화예랑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무언가 생각하기 싫은 기억 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비극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녀는 차분한 시선으로 금소천을 응시했다. 고요하지만 수많은 사연들을 함축한 눈빛이었다. "당시 금숙부께서는 무당 뇌천우사의 금제를 풀기 위해…… 세 가 지 문제 중 두 가지를 해결하셨어요." 그녀는 이미 모든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는 숨은 비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용천제군 금화성의 부인, 즉 금소천의 모친은 당시 천하에 미명을 날리던 선유향(宣有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