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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사 크리스티]나일강의 죽음 - 11편 (11/21)

2026-09-21 21:42:33 조회 18
"따분한 노인이지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그때 퍼거슨은 갑자기 코넬리아의 팔을 꽉 잡았다. 그들은 신전에서 나와 달빛이 환히 비치는 곳으로 갔다. "당신은 어째서 그 기분 나쁜 영감과 상대를 하고 심술궂은 여자의 잔소리를 견디며 지내죠?" "퍼거슨 씨,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요." "당신에게는 생각도 없단 말이오? 당신도 밴 슈일러와 똑같은 사람이오." 코넬리아는 진심으로 말했다. "저는 그런 사람과 똑같이 않아요." "그 정도로 부자는 아니라는 말이죠, 그 뜻으로 하는 말이죠?" "아니에요,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니에요. 메리 아주머니는 교양있고 친절한 분이에요. 그리고‥‥" "교양이 있다고?" 퍼거슨은 지금까지 잡고 있던 팔을 놓으며 불쾌한 기색으로 반문했다. "그런 말은 듣기 싫어요. 정말 역겨워요." 코넬리아는 그의 과민한 반응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당신이 나하고 말하는 것조차 싫어할 텐데요." 코넬리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 이유가 뭘까요? 내 신분이 자기보다 낮아서지요. 당신은 이런 사실에 화가 나지 않습니까?" 코넬리아는 약간 망설이다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당신이 매사에 덜 흥분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이걸 모릅니까? 당신은 분명히 미국인이고, 인간은 모두 자유롭게 평등하단 말이오." 코넬리아는 침착하고 여유있는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퍼거슨 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 나라, 미국의 헌법에도 명기된 사실이오." "아주머니는 정치가는 신사가 아니라고 하셨어요. 사람은 결코 평등하지 않아요. 평등하다고요? 그건 말도 안되는 억지예요. 저는 제가 못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따금 도일 부인처럼 미인으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 못 생긴 얼굴을 한탄해야 소용없는 일이란 걸 압니다." 퍼거슨은 경멸하는 표정으로 외쳤다. "도일 부인? 그 여자는 총살당해야 마땅한 기생충이오." 코넬리아는 근심스런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퍼거슨 씨, 당신 속이 편치 않으신가 보군요. 메리 아주머니가 쓴 적이 있는 특별한 펩신이 있는데 하나 드릴까요?" "아니, 당신은 어쩔 수 없군 그래!" 퍼거슨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돌아서서 가 버렸다. 코넬리아는 배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막 통로로 들어가려는데 퍼거슨이 돌아서서 그녀의 팔을 꽉 붙잡았다. "코넬리아, 당신은 이 배의 승객 중에서 가장 멋진 여인이오." 코넬리아는 얼굴이 상기되어 급히 전망실로 들어갔다. 밴 슈일러는 베스너 박사와 대화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베스너 박사의 상류층 환자에 대해서 환담하고 있었다. 코넬리아는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아주머니, 제가 너무 오래 나가 있었나요?" 밴 슈일러는 시계를 들여다 본 후, 날카롭게 말했다. "시간 좀 맞춰서 돌아올 수 없는 거니? 참, 내 벨벳 목도리는 아디 있니?" 코넬리아는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다. "선실에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선실에는 없어. 저녁 식사 후에도 여기에 있었어. 나는 여기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단 말이야. 저 의자 위에 놓아 두었었는데‥‥" 코넬리아는 목도리를 찾으려고 구석구석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이상하네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데요." 밴 슈일러는 위압적이고 화난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럴 리 없어. 다시 정신차리고 찾아 봐." 코넬리아는 길들인 개처럼 그녀의 명령에 복종했다. 가까이 앉아있던 팬숍도 일어나서 그녀를 도왔지만 목도리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 이날은 날씨가 유난히 더워서 승객들은 신전에서 돌아와서 바로 각자의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도일 부부는 페닝턴과 레이스 대령과 함께 구석의 탁자에서 브리지 게임을 했다. 포와로는 문 옆의 작은 탁자에서 입이 아플 정도로 연방 하품을 해 댔다. 그때, 양 옆에 바워즈와 코넬리아를 거느린 밴 슈일러가 마치 여왕처럼 침실로 가려다 말고 포와로가 앉은 탁자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방금 당신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어요. 제 절친한 친구 루퍼스 벤 올딘한테서 당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시간 있을 때 당신이 해결한 사건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포와로는 졸음을 쫓으려고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밴 슈일러는 부드럽고 상냥하지만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나섰다. 포와로는 또 한 번 하품을 크게 했다. 그는 잠이 쏟아져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눈이 내리감겨서 뜰 수 없었다. 그는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브리지 게임을 하는 사람과 독서에 열중하고 있는 팬숍을 쳐다보았다. 그들 외에는 모두 자기 방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포와로는 전망실에서 나와 갑판으로 나갔다. 그는 반대편에서 황급히 걸어오는 재클린과 부딪칠 뻔 했다. "이거 미안합니다." 포와로는 그녀에게 억지로 눈을 뜨고 말했다. "네, 졸려서 눈을 뜨지 못하시는 군요. 몸도 가누기 힘들고요. 아, 후덥지근하고 답답한 날씨군요." "네, 그렇군요." 재클린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견디기 어려워요.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도 같고‥‥"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재클린은 멍하니 강가의 모래사장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기의 양 손을 꼭 잡았다. 잠시 후, 희미하게 그녀가 입을 열었다. "포와로 씨, 안녕히 주무세요." "당신도 안녕히 주무십시오." 그 순간 포와로의 눈이 재클린과 마주쳤다. 다음날 포와로는 이 순간을 기억하고 그녀가 무엇을 호소하는 시선을 자기에게 보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포와로는 그 후로도 자꾸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러고 나서 포와로는 자기 방으로, 재클린은 전망실로 각기 향했다. 밴 슈일러의 심부름을 끝낸 코넬리아는 수놓을 감을 챙겨서 전망실로 갔다. 그녀는 조금도 졸립지 않고 더욱 정신이 맑아졌다. 그곳에는 네 명이 여전히 브리지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팬숍도 계속 독서를 하고 있었다. 코넬리아는 탁자 앞에 수놓을 재료를 놓고 수를 놓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재클린이 들어오더니 고개를 젖히고 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코넬리아를 향해 걸어왔다. 먼저 재클린이 코넬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육지에 내렸었나요?" "네, 달빛을 받아 참 신비하게 보이더군요." 재클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밤이군요. 맞아요, 신혼 여행에 적당한 밤이군요." 그녀는 이미 브리지 게임에 열중인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동안 리넷과 시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때 웨이터가 앞에 나타났으므로 재클린은 진을 주문했다. 그 순간 시몬 도일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리넷이 남편에게 게임을 독촉했다. "시몬, 당신 순서예요. 어서 해요." 재클린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웨이터가 진을 갖다주자 잔을 들어올렸다. "범죄를 위해서!" 단숨에 잔을 비운 재클린은 다시 한 잔을 더 시켰다. 시몬이 또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 게임을 하는 게 아니라 재클린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페닝턴이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재클린은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렸는데 그녀의 목소리를 점점 더 커졌다. "그는 그녀의 애인이었어. 어느 날, 그 남자는 배신을 했지요." 시몬이 놀라며 페닝턴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카드를 잘못 내고‥‥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어차피 이렇게 왔으니 마지막 3회전까지 계속해야겠습니다." 그때 리넷이 일어났다. "나는 그만 자러 가겠어요." 레이스 대령도 시계를 쳐다보고 말했다. "아, 잘 시간이 다 됐군." 페닝턴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시몬, 당신은 선실로 가지 않을래요?" "나는 한 잔 하고 잠시 후에 가겠어." 리넷은 먼저 그곳을 떠났다. 그 뒤를 쫓아 레이스 대령이 자리를 떴고, 페닝턴도 한 잔 마시고 나서 자기 방으로 가 버렸다. 코넬리아도 수놓는 재료를 거두며 돌아갈 채비를 하는 듯 했다. 그러자 재클린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지 말아요. 부탁이니 나와 함께 있어 줘요. 나는 밤새도록 술을 마셨으면 좋겠어요. 제발 가지 마세요." 코넬리아는 그녀의 애원을 뿌리치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우리는 같이 있는 게 좋아요." 재클린은 고개를 젖히고 큰소리로 웃었으나, 그 웃음소리는 기쁘거나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라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그때 주문한 술을 가지고 웨이터가 왔다. 재클린이 코넬리아에게 술을 권했다. "자, 한 잔 마셔요." "아뇨, 전 생각이 없는 걸요." 재클린은 다시 의자에 몸을 깊숙히 앉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렷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크게 들렸다. "그는 그녀의 애인이었어. 어느 날 그 남자는 그녀를 배신했지요‥‥" 팬숍은 잡지를 한 장씩 넘겼다. 시몬도 책을 한 권 들고 건성으로 넘기기 시작했다. 코넬리아는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젠 자러 가야겠어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재클린은 우악스런 목소리로 싸울 듯 덤볐다. "당신은 아직 가면 안 돼요. 내 말을 들어야 해요. 자, 어서 당신에 대해 말해 봐요." 코넬리아는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저는 할 말이 없어요. 그저 집에만 있었지요. 그리고 여행을 한 적도 거의 없고, 이게 첫 번째 여행이랍니다. 지금은 참 즐겁고 행복해요." 재클린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은 정말 행복하게 사는군요. 나도 당신처럼 살면 좋겠어요." "그게 정말이에요. 그러나 내가 보기로는‥‥" 코넬리아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재클린은 술을 많이 마시긴 했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녀의 눈은 바로 코넬리아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 방에는 팬숍과 시몬 도일 밖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팬숍은 독서에 몰두해 있었고, 시몬 도일은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재클린이 다시 재촉했다. "어서 당신 이야기를 좀 해 줘요." 코넬리아는 남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미였으므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한 일상적인 일까지 말했다. 코넬리아는 지금까지 남의 말을 듣는 타입이었으므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재클린은 자꾸 코넬리아에게 이야기하기를 보챘다. 코넬리아가 말을 멈추면 그녀는 또다시 재촉했다. "어서, 계속해요. 어서요." 그녀는 싫지만 어쩌지 못하고 계속 말을 했다. "네, 아주머니는 까다로운 점은 있지만‥‥ 때로는 몸이 좋지 않아서 콘프레이크같은 가벼운 음식 밖에 들지 못할 때도 있어요." 코넬리아는 이야기를 하면서 재클린이 굉장히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건성으로 재미있는 듯 꾸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녀가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닐까도 의심했다. 그러나 그 방에는 달리 관심을 둘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미술 강좌도 듣지요. 그리고 지난 겨울에는‥‥" 코넬리아는 이야기하다 말고 다른 생각에 잠겼다. "몇 시일까? 시간이 꽤 흘렀을 거야. 오랫동안 이야기했거든.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어." 코넬리아의 생각대로 금새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재클린은 고개를 돌려 시몬에게 말했다. "시몬, 벨을 울려 줘요. 나는 한 잔 더 마셔야겠어요." 시몬은 잡지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재클린을 쳐다보았다. "재키, 그만 마셔. 너무 많이 마셨단 말야." 재클린은 달려들 듯이 날카롭게 쏘아 부쳤다. "당신이 왜 참견이에요?" 시몬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후 말했다. "그렇지, 내가 참견할 문제는 아니지." 재클린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몬, 두려운가요? 내가 겁나나요?" 시몬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잡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코넬리아가 잊었다는 듯이 급히 말했다. "나는 가겠어요, 너무 늦었어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주섬주섬 수놓던 재료를 챙겼다. 그러다가 코넬리아는 그만 골무 하나를 떨어뜨렸다. 재클린이 다시 애원조로 그녀에게 말했다. "가지 마요, 코넬리아. 누구든 여자가 내 옆에 있어 줘야 해요. 나를 좀 위로해 줘요. 당신은 저기 앉아 있는 시몬이 왜 두려워 하는지 이유를 아나요? 시몬은 내가 당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까봐 지금 두려운 거랍니다." 그녀는 또다시 웃었다. 코넬리아는 짧게 대답했다. "그래요?" "코넬리아, 내 말 잘 들어요. 시몬과 나는 약혼했었죠." "아니, 뭐라고요? 두 분이 약혼했었다고요? 그게 사실인가요?" 순간 코넬리아의 가슴 속에 이상한 감정이 전달되었다. 그녀는 시몬 도일이 지독히 뻔뻔하다고 느꼈다. 재클린은 천천히 말했다. "네, 그게 사실이에요. 슬픈 일이지요." 그녀는 낮은 소리로 쓸쓸히 말했다. "저 사람은 내게 상처를 주었어요. 시몬, 내 말이 틀렸나요?" 시몬 도일은 화가 난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재키, 그만 가서 자. 당신은 너무 취했어." "당신이나 가서 자도록 해요." 시몬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책을 쥔 그의 손이 가볍게 떨렸다. 그는 상관없다는 듯 불쾌하게 한 마디 했다. "내 참견은 마시오. 나는 여기에 있을 테니." 코넬리아는 난처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그녀는 거듭 중얼거렸다. "이제 가야 해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요." 재클린은 당황하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코넬리아, 가지 말아요. 가면 안 돼요. 자, 앉아서 나와 얘기 좀 해요. 제발 가지 마세요." "재키, 이게 무슨 추태요. 어서 가서 잠이나 자도록 해요." 시몬이 말하자 재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부르르 떨면서 한바탕 퍼부었다. "시몬, 당신은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까봐 두렵죠? 그게 쓸데없는 영국인 곤조예요, 곤조. 내가 추태를 부리거나 말거나 당신은 참견하지 말아요. 당신이나 여기서 나가요. 어서 리넷에게 가 봐요. 나는 여기서 더 이야기를 해야겠어요." 팬숍은 책을 덮고 하품을 한 번 한 뒤, 시계를 쳐다보다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영국인다운 태도가 엿보였지만 어쩐지 어색한 몸가집이었다. 재클린은 아예 몸을 돌려 앉아 시몬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당신은 참 한심한 사람이군요. 아니, 나를 배신하고도 내가 마음이 편안할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시몬 도일은 크게 당황하여 그녀의 말이 또렷이 들리지 않았다. 시몬은 입을 벌려 말을 하려다 말고 그냥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재클린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코넬리아는 돌발적인 재클린의 감정 변화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흥분하지 않고 감정을 억제하며 살아왔으므로 재클린의 행동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말했던 것이 기억날 거예요. 당신이 다른 여자와 행복하게 지내는 걸보는 것 보다는 차라리 당신을 내 손으로 죽이는 게 나아요. 당신은 그 말을 믿지 않았겠죠? 그러나 그건 착각이에요. 나는 기회를 보고 있어요.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약혼자예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사실은 어쩔 수 없어요." 시몬은 아무 말없이 앉아 있었다. 재클린은 쉬지 않고 말을 퍼부었다. "당신을 죽이겠다는 건 진정이에요." 다음 순간 앞으로 몸을 숙였던 그녀의 손에서 번쩍이는 것이 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이렇게 쏘아버려야 해. 더러운 개 같이‥‥" 순간 시몬은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지만 재클린이 이미 방아쇠를 당긴 후였다. 시몬은 몸을 굽히며 힘없이 의자에 쓰러졌다. 코넬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침 난간에 짐 팬숍이 기댄 채, 서 있었다. "팬숍 씨, 팬숍 씨!" 팬숍이 급히 달려오자 코넬리아는 그를 붙잡은 채,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그녀가 쏘았어요. 재클린이 그를 쏘았단 말예요. 오, 하느님!" 시몬은 의자에 쓰러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재클린은 마치 돌처럼 굳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시몬의 바지를 붉게 물들이는 피를 쳐다보았다. 재클린이 쏜 총알은 시몬의 무릎 밑을 관통한 것 같았다. 그는 손수건으로 상처를 힘껏 누르고 있었다. 재클린은 겨우 입을 열었다. "오, 하느님! 나는 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재클린은 부르르 떨면서 권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가 발로 권총을 건드려 소파 밑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몬은 모기 소리만 하게 중얼거렸다. "팬숍 씨, 어서‥‥ 누가 오는데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적당히 돌려 보내세요.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아요. 모두가 놀라선 안 돼요." 팬숍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으로 갔다. 문 앞에는 눈을 크게 뜬 누비아인이 서 있었다. "아무 일도 없소. 별일 아니니 걱정 마오." 그 사람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웃는 얼굴로 돌아갔다. 팬숍은 그가 돌아가자 시몬에게 다가왔다. "잘 됐습니다. 누구도 총소리는 듣지 못했을 겁니다. 그냥 콜라 마개를 딴 줄 알테니까. 자, 그럼 무엇부터 해야 할지‥‥" 그때 갑자기 재클린이 발작하듯 울음을 터뜨렸다. "오, 하느님. 이를 어쩌나. 나는 죽어야 해요. 죽어 버려야 해요. 나는 차라리 죽는 게 좋아요.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코넬리아가 급히 그녀의 팔을 잡았다. "조용히 해요, 그만 진정해요." 시몬의 찡그린 얼굴 위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어서 재키를 데리고 나가요. 제발 빨리요! 그녀의 방으로 데려 가요, 팬숍 씨. 롭슨 양은 간호원을 데려와요." 시몬은 서둘러 그들에게 말했다. "재키를 혼자 두면 안 돼요. 간호원에게 재키를 지키라고 해요. 그녀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요. 그리고 베스너 박사 좀 모셔 와요. 아내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말아 줘요." 팬숍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신중한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일을 처리했다. 재키는 팬숍과 코넬리아의 손에 끌려 마구 몸부림치면서 자기 방으로 갔다. 그들은 방에서도 그녀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진땀을 흘렸다. 그녀는 밖으로 나가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그녀의 울음소리는 더 거칠고 커져 가고 있었다. "나는 물에 빠져 죽을 거야.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나아. 나는 살 가치도 없는 인간이야. 시몬, 시몬!" 팬숍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어서 가서 바워즈 양을 데려와요. 나는 여기서 여자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코넬리아는 급히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간 후에도 재클린의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그의 다리에‥‥ 피가 나요. 피가 흐른단 말이에요. 피를 많이 흘리고 죽을지도 몰라요. 시몬! 내가 시몬에게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재클린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점점 커지자 팬숍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 "진정해요. 자, 조용히‥‥" 그녀는 계속 몸부림쳤다. "이 손 놔요. 나는 물에 빠질 거예요. 나는 죽는 게 나아요. 나를 말리지 말아요." 팬숍은 강제로 그녀를 침대에 눕도록 했다. "자, 가만히 누워 있어요. 소란 피우지 말고 진정해요. 이제 괜찮아요. 안심해도 돼요. 아무 걱정도 하지 말아요." 그녀는 다소 흥분을 가라앉히는 듯이 보였다. 그때 코넬리아와 함께 딘정한 옷차림의 바워즈가 들어왔다. 팬숍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바워즈는 놀라지도 않고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일이죠?" 그녀는 침착하게 손을 움직였다. 팬숍은 이제 재클린을 바워즈에게 맡기고 베스너 박사 방으로 급히 갔다. 그는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박사님!" 베스너 박사는 코를 골며 한참 잠을 자다가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팬숍이 그때 불을 켰으므로 베스너 박사는 둥그렇게 뜬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박사님, 도일 씨가 총에 맞았습니다. 재클린이 그랬어요. 지금 전망실에 있으니 급히 좀 가세요." 베스너 박사는 몇 마디 질문을 한 후, 실내복 차림으로 간단한 진찰 가방을 들고 팬숍과 함께 전망실로 갔다. 시몬은 겨우 창문을 열어놓고 머리를 비스듬히 기대고 찬 공기를 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베스너박사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니, 이럴 수가!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바닥에는 피가 잔뜩 묻은 손수건이 한 장 널려있었고, 카페트 위에는 붉은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베스너 박사는 독일어로 중얼거렸다. "상태가 아주 나쁜데. 뼈가 부러졌고 출혈도 많아서. 팬숍 씨, 내 방으로 데려 갑시다. 도일 씨가 걷지 못하니 우리가 부축해서." 두 사람이 시몬을 부축하려 할 때, 코넬리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를 보고 박사가 반가운 듯이 말했다. "당신이 왔군요. 잘 왔어요, 어서 우리를 따라와요. 당신이 좀 도와야 할 것 같으오. 이젊은이보다 더 잘 할 것 같으니. 팬숍 씨는 너무 놀라 흥분상태라서‥‥" 팬숍이 머뭇거리다가 웃으며 물었다. "그럼, 가서 바워즈 양을 데려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