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만황(卍皇) 1 - 38편 (38/50)

2026-09-21 21:18:45 조회 17
선천적으로 초상감각을 타고난 염력의 힘과 무궁무진한 후천적인 힘이라 는 내공을 하나로 합일하려는 대역사의 시작은 바로 부나비도의 어느 의 축(醫築)의 실내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자천릉은 여전히 의축내의 침상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한약내음이 물컹하게 풍기는 방 안에 지금 두 사람만이 침 상 위의 자천릉을 긴장감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자천릉의 파리하던 안색에는 이 순간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오랜 가사상태에서 깨어나고 있는 듯 화색이 몸 전체로 번지며 오랜 산 고를 겪은 산모처럼 내재된 힘이 하나로 융합되는 고통을 겪고 있는 듯 했다. 그때 사공역은 더없이 인자한 모습으로 자천릉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 으며 자애스러운 음성을 흘러냈다. "허허헛, 그놈. 지아비를 닮아 용모가 수려하구나." 미소를 드리운 얼굴로 사랑스러운 손자를 대하듯이 사공역은 자천릉의 몸을 툭툭 매만졌다. "자, 이제 어서 눈을 떠라. 네가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다시는 네 몸에 흠 집 따위가 생겨 이 사공역을 찾는 날은 없을 것이다." 사공역의 얼굴에는 미소가 드리워진 채 꺼져들 줄을 몰랐다. "허헛, 왜냐하면 너는 이 사공역이 평생의 의술을 다해 이제껏 그 누구도 이룩할 수 없었던 초상감각, 그 신비의 힘이라는 염력과 후천적으로 길 러진 너의 무궁무진한 내력을 일치시켜 너의 내공이 어느 정도이며, 그 힘이 얼마만한 위력을 함유하고 있는지는 노부조차도 상상할 수 없기 때 문이다. 허나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사공역의 따뜻한 손길은 자천릉의 몸에 흐르는 땀방울을 씻어내고 있었 다. "이제 하늘이라도 너의 죽음을 넘보지 못할 정도로 강해져 있다는 것이 다. 이로써 과연 전설로만 존재해 온 만황의 신화가 신화가 아닌 현실이 될지는 노부도 모른다. 허허헛!" 자천릉은 드디어 무한한 시공을 초월하여 완성된 것인가? 중원무림사상 무수한 영웅과 호걸들이 이 만황이라는 칭호를 놓고 뼈를 깎아내리는 고련을 거쳤으되 그 누구도 완성할 수 없었던 만황의 경지를 바로 자천릉이 해냈단 말인가? "허허헛. 릉아야, 너는 모르겠지만 천릉이라는 이름은 기실 노부가 지은 것이란다." 사공역은 쉬지 않고 자천릉의 전신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말이다. 얼마 전에 이 노부가 의문스럽게 여겼던 단점들은 이제 와 생각하니 틀린 것이었다. 분명 그는 나를 알고 있기에 자식의 생명을 걸고 이런 어려운 도박을 한 것이다."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사공역의 독백에는 기실 놀라운 의미가 깃들어 있 었다. 분명 오 년 전 해란주에서 자륭극은 자천릉의 몸에 염력이 내재되 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천릉이 내공을 익히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 터, 헌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천릉이 이방십칠인에게 내공을 배우는 것을 알 면서도 방관만 하고 있었다. 그는 왜 자천릉의 목숨이 걸린 중대사조차도 외면을 했으며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죽었으되 많은 의문을 남겨 놓았을까? 그때 자천릉의 눈꺼풀이 천년거암이 밀려가듯 무겁게 뜨여지며 현요로운 광채를 발산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자천릉을 응시하며 사공역은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릉아야. 노부를 알아 보겠느냐?" 자천릉은 의아스러운 듯 검미를 모으며 사공역을 응시했다. "그대는?" "허허헛, 너는 노부가 누구인가를 밝혀도 모를 것이다. 네가 꼭 세 살 되 던 해에 나를 만났단다. 노부는 그때 만난 너의 부친의 친구인 천치라고 한단다." "천치? 그렇다면... 이곳은 부나비도!" 자천릉의 눈에 순간적으로 경악의 빛이 스쳐갔다. "허허헛, 그렇단다. 너는 하늘의 운을 타고난 아이다. 너는 누군가와 무서 운 사투를 벌여 전신에 성한 곳이라고는 단 한군데도 없이 나룻배에 실 려 이곳에 도착했더구나. 정신을 잃은 채." 자천릉의 뇌리로 얼마 전에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갔다. '그래, 꽃바람! 그자의 실체가 보이지 않아 환영술을 깨고 그자의 목을 치는 순간에 뭔가 알 수 없는 엄청난 충격에 의해서 나는 혼절하고 말았 었지.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내가 조각배를 잡았다는 것 뿐이었 다!' 자천릉이 그렇게 지나간 기억을 새삼스럽게 더듬거리고 있을 때 사공역 은 미소를 지은 채 자천릉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헛, 이제는 모두가 지나간 부질없는 일들이다. 너 또한 병장기를 지 닌 것으로 보아 너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무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 무 인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란다." 자천릉은 문득 기억 속에서 아련한 옛날 그 어느 때의 한 사람이 떠오르 고 있었다. '그래... 이 음성은 어디선가, 아주 먼 오랜 옛날의 기억 속에 살아있는 자애롭던 그 음성이다. 나를 꼭 안아주며 너털웃음을 짓던... 그 웃음! 헌 데 아버님의 친구?' 자천릉은 자륭극의 친구라는 얘기에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허리를 숙였 다. "아버님을 대신해 자천릉이 사공숙부님께 인사 올립니다." 늙어 가는 사공역의 주름진 얼굴 언저리로 구름을 헤치고 떠오르는 햇살 처럼 따뜻한 미소가 드러났다. "허허헛, 그 놈. 그래, 그래 좋구나. 이 사공역이 십 사 년 전에 헤어졌던 친구의 아들에게 예를 받는다는 것도 기분이 괜찮구나." 문득 깊숙히 예를 취하고 있던 자천릉이 더욱 허리를 꺾으며 슬픔이 스 며든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사공숙부. 아버님은... 이미 타계하셨습니다." 사공역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자애로운 미소가 한 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의 휩뜨여진 눈에는 경악이 가득하였다. "무, 무슨 말이냐? 릉아야, 너의 아버지가 타계하셨다니!" 사공역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였기에 그가 받은 충격 또한 컸으리라. 자천릉은 허리를 숙이고 있는 자세 그대로 또박또박 말 을 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태대각인 곤오풍우에게 그만." 일순 사공역의 얼굴 가득 의문의 빛이 떠올랐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태대각 곤오풍우를 말하는 것이냐?" "예!" 순간 놀랍게도 사공역의 입술 사이로는 의미심장한 너털웃음이 자연스럽 게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허허허! 됐다. 좋아! 그만한 일이라면 안심을 해도 무방하다. 그자 정도 라면 절대로 너의 부친을 죽일 수 없다. 절대로!" 자천릉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사공역의 태도에 의문 어린 시선으로 사공역을 바라보았다. "허허허, 노부가 아는 너의 부친은 천하에 그 어떠한 고수의 손에 패하여 죽을 사람이 아니다. 그 친구의 무예 정도는 이 천하에서 노부처럼 정확 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노부가 지금 너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는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 살아 계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천하에 너의 아버지를 죽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있다면 단 한 사람 바로 자기 자신 뿐이다." 자천릉은 고개를 가볍게 가로 저으며 부정의 빛을 내보였다. "아버님께서도 사공숙부와 똑같은 말씀을 소자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허나 저는 곤오풍우 그자의 입에서 직접 들은 말입니다." 백마성에서 있었던 백마회의에서 곤오풍우는 자륭극의 독문병기인 여왕 은산을 내보이며 말하지 않았던가? 그때 자천릉은 곤오풍우의 손에 들려있는 여왕은산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릉아야. 너는 너의 아버지의 말보다도 곤오풍우의 말을 더 믿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됐다. 너의 아버지 말은 사실이다." 단정하듯이 그런 한 마디의 의미있는 말을 남기고 사공역은 자천릉의 말 문을 막았다. "그리고 너는 일 각 전에 겨우 회복된 환자다. 이 부나비도의 서낭당은 공기가 맑고 경치가 볼만하니 바람이나 쏘이고 오너라." 자천릉은 무엇인가를 감춘 채 미소를 짓고 있는 그에게서 더이상의 말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서서히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문득 저만큼 사라져 가는 자천릉을 바라보는 사공역은 신비한 미소를 머 금었다. '허허헛, 그 친구가 또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 모양이군. 그래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아들에게 모험을 무릅쓰고 도박을 한 것이다.' 무슨 뜻일까? 그는 자륭극의 죽음과 연관된 또 하나의 천하가 모르는 비 밀을 알고 있는 것일까? 의문과 만황이 새롭게 탄생된 곳, 여기는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들이 모여있는 문둥이의 섬. 육천마을 중 하나인 부나비도였다. ③ 동정호의 넘실대는 푸른 물결이 휘장을 두르고 있는 문둥이들의 고향이 라고 불리우는 부나비도. 섬 전체는 푸른 잔디가 끝을 모르고 깔려 있어 언뜻 보기에는 지극히 평 화로운 정경이나 실상 이곳은 사람으로 태어난 인간들과는 완전히 격리 된 고독과 허무, 그리고 천하인을 향한 한(限)이 송곳처럼 드러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간이되 인간으로부터 외면 당해 버린 나병환자들의 비통한 숨결이 흐 르고 있는 섬. 불꽃같은 삶의 의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일생을 파리한 한(限)으로 만 채워야 하는 나병환자들의 마지막 종착지. 부나비도는 바로 그런 넘실대는 푸른 물결과 푸른 초지, 그리고 물러 터 진 인간의 피부 속으로 감춰진 한의 격랑이 숨겨진 곳이다. 서낭당(城郞堂). 부나비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야산 마루에 자리한 한 그루의 고목에 이 서낭당은 나환자들의 아픔과 더불어 언제부터인지 존 재하고 있었다. 수많은 새끼줄이 얼키설키 얽혀 있어 신령을 숭배하는 인간들의 나약함 을 말해 주고 있었으며 고목의 주위로는 수십만 개의 돌이 마치 하나의 탑모양으로 쌓아올려 있어 말을 않더라도 얼마나 많은 나병 환자들이 쾌 유를 빌며 돌을 던졌는가를 단면적으로 입증해 주었다. 자천릉은 서낭당의 고목 아래에서 동정호의 푸른 물결을 이미 오래 전부 터 주시하고 있었다. 몸은 그 전에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졌고 그에 따라 기분마저 상쾌 해져 있는 절정의 상태였다. "흡사 오랫동안 시달렸던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마음은 그렇듯 상쾌했으나 그의 머릿 속으로 파고드는 갖가지의 상념들 은 복잡 난해해 거대한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대체 아버님의 죽음은 어떻게 된 것인가?' 자륭극의 수많은 의문이 깔려 있는 죽음. 그 의문은 사공역의 알 수 없는 단언으로 인해 더욱 깊게 그의 뇌리 속 을 파고드는 것이었다. '곤오풍우는 아버님의 죽음에 대해 두 번 언급을 한 적이 있다. 한 번은 백마회의에서 였고 또 한 번은 곤륜칠층봉소석탑에서 만나 여왕은산을 보이며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아버님을 죽였다고, 헌데!'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쉽게 납득을 할 수 없는 의문이 구름처럼 일어 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자신의 부친인 자륭 극은 살아 있든지 아니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곤오풍우는 분명 자륭 극을 죽였다고 했으되 사공역은 절대 자륭극이 죽었을 리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자천릉의 뇌리는 한없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문득 어지러운 의문 뒤에 자천릉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나직한 실소였다. "어쨌든 곤오풍우는 아버님을 죽였다고 했으니 나는 복수를 하면 그만이 다. 나머지 백마와 십왕을 죽인 후 곤오풍우를 죽이면 되는 것이다." 광오하다고 할 텐가? 감히 하늘 아래 더이상 강해질래야 질 수 없는 십 팔만사천백와마루의 주인인 태대각 곤오풍우를 죽이겠다는 자천릉의 말 을. '이제 나 자천릉이 갈 수 있는 길이라고는 오직 그 한 길뿐이다.' 자천릉이 앞으로 해야 할 목적이 확연하게 정해져 버린 순간이었다. 헌 데 이때 어디선가 나지막한 음향이 자천릉의 귓전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녹슨 쇳덩이를 긁어내리는 듯 사이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는 무척 행복한 사람이군. 죽어 가던 생명이 살아났고 또 무척이나 많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 삶에 대한 열망이 가슴 뭉클하게 서려 있는 음성이었다. 자천릉의 시선 이 음성이 들려 온 곳으로 향했다. 고목의 뒤로 숲이 우거진 곳에서 한 사람이 서낭당의 돌탑에 자그마한 돌멩이들을 톡톡 내던지고 있었다. 전신에는 먹물 같은 흑의를 걸치고 있었으며 턱밑까지 길게 내려온 철립에 가슴에는 기묘한 느낌을 발하는 한 송이의 장미꽃을 꽂고 있는 사내. 바로 사공역의 제자인 흑나비라는 철립인이 아닌가. '나환자! 문둥이 사내로군.' 어느 누가 보아도 흰 붕대로 손을 감싼 것하며 얼굴을 감싼 채 철립을 눌러쓴 이 부나비도의 인물이 문둥병 환자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 아 닌가. 흑나비는 여전히 무심하게 돌탑에 작은 돌멩이들을 던지며 예의 그 탁한 음성을 흘려 냈다. "내 이름은 흑나비. 나병환자인 부모를 둔 덕으로 이 죽음보다 싫은 부 나비도에서 평생을 살아 가야 할 사람이기도 하다." 흑나비의 음성 속에는 자신의 삶을 극도로 저주하는 한이 으스스하게 서 려 있었다. 자천릉은 나직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대는 문둥이로 태어난 자신의 삶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 같군. 나병 에 걸린 사람이라고 해서 사람이 아니고 짐승인가?" 자천릉의 너무도 태연한 대답에 이번에는 흑나비가 나직한 괴소를 터뜨 렸다. "그렇게 생각할 테지." 그의 음성에는 진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나처럼 몸의 한 구석이 서서히 썩어 들어오고 아무 리 살고 싶어 발광을 해도 죽어야만 될 운명이라면 자신을 비하하지 않 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의 철립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 냉소가 스치고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얼굴 한 번 아니 손 하나 남 앞에 드러내 놓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는 많다. 그래서 나는 내 영 혼을 통한(痛恨)에 팔아 세상을 저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세상의 잘나 빠진 놈들을 모두 이 손으로 죽여 세상을 나환자들의 세상으로 만든다면 결코 지금처럼 이렇게 무거운 철립을 쓰거나 얼굴을 흰 천으로 가릴 필 요는 없을 테니까." 자천릉은 볼 수 있었다. 담담하고도 거북스럽게 이어지는 흑나비의 음성 속에서 왠지 가슴 저 깊은 심부를 찡하게 울려오는 통렬한 비감을 말이 다. "후훗! 이해할 만하군. 천하를 전부 죽이겠다는 그대의 말을. 그것은 그 만큼 그대의 가슴에 나병환자로 받아야 했던 세상의 질시가 가혹했다는 것, 괜찮군. 한(限)은 깊고 서글플수록 때로는 그 한을 지닌 사람을 강하 고 무서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요소니까." 자천릉의 시선이 흑나비에게 향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대는 차디찬 멸시와 천대 속에서 무엇인가 정상인보다 강한 것을 얻은 것 같군. 예를 들어 초절정의 무예 같은 것을." 흑나비는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의 돌멩이를 서낭당에 내던진 채 자천릉 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자천릉은 마치 죽음의 사신이 다가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지. 하나쯤은 있지. 제법 괜찮은 싸움 기술이,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정상인과는 다르게 살갗이 찢어져도 한 점의 고통도 느낄 수 없는 문둥 이의 특수성을 이용하여 불사나비부무(不死癩卑腐武)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지." 흑나비는 자천릉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확신하고 있지. 천하에 불사나비부무의 적수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한 두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물론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십왕 (十王)도 결코 내 적수가 될 수는 없겠지." 실로 무서운 말들이 스스럼없이 흑나비의 철립 속에서 흘러 나왔다. '고수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 정도의 무학이면 모르긴 몰라도 주희빈보다 는 최소한 한 단계는 위 겠군.' 자천릉의 눈가에 은은히 경외의 빛이 스쳐가고 있었다. "ㅋ! 술을 한 잔하겠나. 나는 왠지 세상이 싫어질 때마다 버릇처럼 술을 찾는다오. 술을 마시고 있는 순간만은 본인이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 기 때문이지. 취했을 때는 죽음이 무엇인가하는 그런 잡다한 생각은 최 소한 잊을 수도 있고." 술(酒)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질 이유가 하나도 없는 자천릉이다. "좋군. 본인은 술을 나 자신 다음으로 사랑하니까." 한잔의 술은 고뇌처럼 옥배에 채워지고 그 고뇌를 두 사람은 마시고 있 었다. 그렇게 몇 순배의 술이 돌아갔을까? 문득 흑나비는 자신이 지금까지 마 셔 왔던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 자천릉의 앞에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자신은 자천릉의 술잔을 받아 쥐고 있었다. 쉽게 말을 한다면 술잔을 바 꾸어 술을 마시자는 말인데, 어디 술잔을 바꿔 마실 사람이 없어 살이 문드러져 가는 나병환자와 술잔을 바꿔 마시고 싶겠는가. "후후훗!" 자천릉은 그런 흑나비를 의미 있게 응시하며 단숨에 술잔을 비워 버렸 다. 그 짧은 순간 흑나비의 몸이 가볍게 떨며 기묘한 반응을 보였다. 그 러나 곧 흑나비는 예의 그 삭막한 음성을 흘려 냈다. "사부님의 말씀에 따르면 무슨 원대한 일을 하려는 듯 큰 뜻을 품고 있 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흑나비에게도 한 자리 줄 생각은 없는가? 사 람을 죽이는 데에는 아마도 이 흑나비보다 희열을 만끽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듣고 있기에도 섬칫섬칫한 흑나비의 말들이었다. 너무도 의외의 제의에 자천릉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일리 있는 말이군. 내가 상대하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는 너무 머리수가 많으니까, 그대의 힘이 어쩌면 필요하겠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한 것이라면 달성을 하고야 마는 자천릉 이다. 문득 가벼운 웃음이 그의 입술 밖으로 터졌다. "후훗! 좋다. 비록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한이 있는 것 같으니 그 맺힌 한을 풀어 주도록 하지." 의외의 장소에서 또 한 사람의 동조자를 자천릉은 얻은 것이었다. 흑나 비의 철립사이로 다시 거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럼 이제 위 아래를 가리는 순서만이 남은 셈이군." "고하를?" 자천릉이 돌아보자 흑나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어차피 무림이란 강자만이 살아날 수 있는 세상이라 하더군. 강자만이 약자를 부릴 수 있듯이 우리 사이에도 그 선은 확실하게 그어 두는 것이 좋지. 서로 불만이 없게 될 것이고." "후훗, 확실한 것이 마음에 든다. 허락하지."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마주섰다. 자 천릉의 손에는 어느새 설상루(雪霜鏤)라고 이름 지어진 한 자루의 검이 파리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자천릉은 그런 설상루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본인에게는 곤륜천자라는 사람이 남긴 하나의 검법이 있다. 본인은 지 금까지 그 검법의 위력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어 왔었고 이제 그 십만세 세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너를 상대로 시험하기로 방금 마음을 굳혔 다." "ㅋ! 좋아. 아무래도 일 초면 끝나겠군." "원래 고수들의 싸움일수록 승부는 느리지만 초식은 짧은 법이니까."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응시한 채 눈빛만을 빛내고 있었다. 언제 밀려왔는지 불타는 석양만이 두 사람을 섬ㅉ한 피의 색채로 감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검이 움직이는가? 자천릉의 우수에 들려 있는 기병 설상루가 마치 형체 잃은 그림자처럼 미끄러졌다. 동시에 번쩍! 하면서 불타는 석양 속으로 한 무리의 검광이 치뻗었다. 순간 시퍼런 검기(劍氣)가 석양을 두쪽으로 쫙 갈라버리며 흑 나비에게 벼락처럼 떨어졌다. 그러나 흑나비는 자천릉의 검이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데에도 마치 죽 음을 외면한 것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푹! 너무도 간단하게 끝나버린 싱거운 승부였다. 자천릉의 검은 정확히 흑나 비의 왼쪽 가슴을 찔러 버린 것이었다. 헌데 이럴 수가 있는가? 정작 자천릉의 검이 흑나비의 가슴을 찔렀건만 흑나비는 비명은 커녕 처음의 자세 그대로 무심함만을 발하고 있었다. "좋은 검이군." 자천릉의 안색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흔들림을 보였다. 그는 일찍이 사람이 가슴에 검을 맞고도 이렇듯 태연하게 서서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흑나비는 그의 검을 맞고도 태연히 서 있는 것 이다. 그의 철립 사이로 듣는 이의 온 뇌리를 박박 긁어내리는 탁한 음 성이 흘려 나왔다. "아까도 말을 했지만 나에게도 하나의 특수한 기공이 있지. 원래가 문둥 이란 살갗이 갈라져 나간다 해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법이지. 불사나비부무, 나는 이 무학으로 최소한 십왕의 숨통 몇 개쯤은 책임을 질 수 있지." 자천릉의 눈가에 미미한 파동이 일었다. "그리고 우리의 승부는 그대의 승리요. 확실히 나는 그대의 일검을 피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대가 마지막 순간에 전신 공력을 삼푼으로 줄이지 않았다면 아무리 불사나비부무를 익힌 나라고 해도 이렇게 서 있을 지는 의문이 드는군." 사나이가 패배를 시인한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마는 이 흑나비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런 말들을 해 버린 것이었다. 자천릉은 서서히 흑나비의 가슴에서 검을 거두었다. "좋아. 그대의 불사나비부무라는 것은 확실히 뛰어난 무공이었다. 아마 내일쯤이면 장강(長江)에서 그대의 진정한 솜씨를 마음대로 볼 수 있겠 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