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만황(卍皇) 1 - 37편 (37/50)

2026-09-21 21:18:45 조회 20
그대가 쌀쌀맞고 차가운 것은 이미 오래 전부 터 알고 있었는데." 냉교채의 아미가 왠지 걱정스러운 듯 찌푸러졌다. "내가 그렇게 차가와 보였어?" "훗, 향기나는 얼음조각 같소." 냉교채의 안색이 홱 변했다. 자천릉은 찔끔했다. '이런 제길, 또 얼굴이 굳었다. 내가 또 비위를 긁었구나.' 자천릉이 언뜻 당황하여 내심 말을 더듬고 있는 그때 냉교채와 자천릉을 지켜보던 미막십일홍은 하나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호호호, 정말 놀라운 일이야. 우리 부막주를 저렇게 면전에서 욕하고도 살아 남아 있는 인물이 있을 줄이야.' '벌써 오십 사 일 동안 지켜봤지만 부막주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줄을 모르고 있어. 더구나 분명한 것은 저 자부방주가 나타나면서부터 미소가 시작됐다는 거야. 허면 설마 부막주께서 저 사람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냉부막주는 사내 보기를 알에서 막 깨어난 애 벌레처럼 취급하시는데, 더욱이 어울리지도 않아. 자부방주는 한낱 본루 의 주방장이고 냉부막주는 서역 파사국의 왕녀이거늘.' 이때 앞서서 들꽃 사이를 걸어가고 있는 냉교채는 뭔가 깊은 생각에 잠 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자천릉은 왠지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제길, 벌써 일 각이나 저 얼음같은 얼굴을 하고 있잖아. 도대체 왜 저러 는 거지? 내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닌데.' 그 순간 한 줄기 소슬한 가을 바람이 들꽃을 스치며 냉교채의 아름다운 머리칼에도 물결같은 출렁임을 일으켰다. 문득 냉교채의 촉촉한 봉목이 자천릉의 얼굴을 향했다. 왠지 쓸쓸하고 조금은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었 다. "릉. 부나비도에는 왜 가려 하는 거지?" "내가 잘 알고 있는 한 사람의 부탁이야." "부탁? 거절할 수는 없어?" "안되오." "내가 가지 말라고 한다면? "그래도 가야 하오. 사 년 전에 맺은 서약이니까." 이제야 자천릉은 자신의 체내에 잠들어 있는 화약고와 같은 두 가지 기 운을 하나로 합일시킬 수 있는 부나비도에 들어가려 하는 것이다. 허나 조금 전 미막십일홍 중 누군가의 뇌까림에 의하면 자천릉이 냉교채와 함 께 있은 시간은 이미 오십 사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허면 이제 그의 생명은 단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 아닌가? 이때 냉교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신경질적으로 말을 받았다. "그래, 갔다 오는 것도 좋겠지. 그런 후면 릉이 보기 싫어하는 나의 냉막 한 얼굴도 많이 풀어져 있을 테니까." "후훗, 풀지 않는 게 좋소. 그것이 또 그대의 매력이니까 말이요." 자천릉의 기묘한 미소에 냉교채가 아미를 다시 한 번 찌푸렸다. "릉. 도대체 어떤 모습을 좋아하는 거야? 무슨 사내가 그렇게 변덕이 팥 죽 끓듯 하지!" "내가 언제 어떤 모습을 싫어한다고 했소?" "휴!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내야. 뭘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 기도 하고." 냉교채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자 자천릉이 의문을 느낀 듯 눈을 치 켜 떴다. "뭘 말이오?" "이 바보야! 나도 몰라!" 자천릉은 그만 어리둥절한 채로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도, 도대체 누가 종잡을 수 없는 건지 모르겠군. 이건 항주에서부터 매 일처럼 웃다가 얼음처럼 굳어졌다 하더니 이젠 또 소리까지 다 지르고.' 그는 문득 자신이 바보스러워졌다. '헌데 왜 나는 지긋지긋하게 바라보고 욕을 해대는 이 여자와 동행하는 거지?' 이때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막십일홍의 가슴 속에도 충격이 일어나고 있 었다. '이제는 확실해! 이건 정말 충격적인 사건인데? 부막주께서 자부방주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계셨어. 항주에서 이곳 동정호에 이르기까지 배웅을 빙자해 쫓아 올 만큼.' '헌데 저 자부방주는 정말 알 수가 없군. 어떤 때는 너무도 정확하고 예 리하건만 어떤 때는 또 아예 백치고. 더욱이 아가씨와의 문제는 전혀 모 르고 있는 듯 하니.' 냉교채는 자천릉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동안 말없이 서 있 던 냉교채가 홱 자천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 가야겠어." "풋, 가시오. 누가 가지 말라고 붙잡았나?" 자천릉의 태연한 대답에 냉교채는 그만 부르르 치를 떨었다. "그래! 붙잡지 않으니까 갈께. 하지만." "하지만 뭔데?" "잊지 마. 중원에 한 여인이 릉을 기다린다는 것을." 순간 자천릉의 눈에 우매하도록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이상하군, 누가 왜 나를 기다린다는 거지?" 그러자 냉교채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망설이는 것 같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야." "?" "잘 다녀와. 그곳에서 문둥병이나 옮지 마. 나는 문둥병 걸린 사내는 별 루니까." 하나 자천릉은 끝내 무심했다. "훗, 알겠소. 문둥병은 걸리지 않을 테니... 다음에 만날 때부터는 서리나 좀 끼지 마시오." "그래... 요." 그 말을 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음일까? 냉교채는 한없이 말꼬리를 끌다 가 그러나 분명하게 마지막 <요> 자를 내뱉고는 그대로 달려가듯 들꽃 의 바다 저편으로 몸을 묻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존대를 하지 않았었기에 더욱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 기는 한마디였다. "부방주님. 다시 뵙기 바래요!" "안녕히 계셔요, 둔하신 자부방주님!" "다음에 본루에서 만나면 가장 훌륭한 요리로 한 접시 부탁해요!" 미막십일홍도 냉교채가 사라진 방향을 따라 저마다 한 마디씩을 남겨 놓 으며 바람처럼 교구를 날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그녀들을 바라보는 자천릉의 가슴 속은 어쩐지 자 신도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잠기고 있었다. 제23장 흑나비(黑癩卑) ① 자천릉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으며 이마를 찌푸렸다. "복잡한 문제다. 왜 이렇게 마음이 뒤죽박죽일까?" 그때 자천릉의 일 장 앞쯤에 있던 한 송이 들꽃이 바람도 없는데 춤추듯 떨림을 일으켰다. "안심해라. 죽으면 마음 또한 안정될 테니." 놀랍게도 그 들꽃의 한복판에서 카랑카랑한 인간의 음성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언뜻 자천릉의 입가에 차디찬 미소가 피어올랐다. "훗, 무려 한 시진 동안 꽃밭에 숨어 있더니 아예 꽃이 됐군. 간덩이가 부은 늙은 호박꽃이." 경련하던 들꽃의 꽃잎 하나가 천천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어린 아이 놈이나 늙은 놈들이나 죽을 때가 되면 말이 많은 것은 똑 같 구나!" 한 소리 싸늘한 음성이 재차 그 속에서 흘러나옴과 동시에 잇달아 꽃잎 들이 무수히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일진의 회오리를 만들어 그 자리에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자천릉이 뭔가 깨달은 듯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후훗, 그대가 그 유명한 꽃바람이셨군."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하는 그 들꽃의 회오리 속에서 예의 음성이 말을 받듯 흘러 나왔다. "남들이 그렇게 불러주지.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꽃의 바람, 꽃바람이라 고!" 마침내 꽃바람이 자천릉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 통합 서열 삼 위이며 십왕 중의 인물. 그리고 천하칠패쟁비록까지 올라 있던 가공할 신비의 무인. 자천릉이 처음 십만철로에 오르던 그날의 곤산죽령 위에서, 또한 곤륜칠 층봉소석탑의 육층에서 곤오풍우의 명을 받으며 그렇게 우리의 눈 앞에 나타났던 형체도 이름도 없는 그 꽃바람. 마침내 그가 오랜 추적과 탐색 끝에 자천릉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 낸 것이다. "고맙다. 한 번 꼭 만나 보고 싶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자천릉은 꽃이 회오리치듯 스스로 돌고 있을 뿐인 그 텅빈 허공을 직시 하며 미소를 띄웠다. 꽃바람 속에서 다시 음성이 흘러나왔다. "미안하군. 늦게 나타나서, 허나 고마와하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 동안이 나마 오래 살아 왔으니까." 휘류륭! 꽃바람의 회전 속도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라지며 그 속에서 태풍 처럼 드센 바람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흙이며 돌이며 나무들이 마구 뽑혀져 날아가기 시작했다. '꽃바람! 듣던 대로 제법 한 가락 하는 자다. 특히 저 바람은 바로....' 헌데 바로 그때였다. 자천릉은 흡사 천령개에 불침을 맞은 듯한 통증과 함께 온몸에 기이한 느낌이 혈관 속으로 번져감을 느꼈다. '이상하군. 왜 갑자기 흥분이 되지? 가슴이 마구 뛰고 뭔가 터질 듯 가득 몸 속을 메워 오는 느낌이다!' 자천릉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야말로 매당파에서 신무자 제석혈 흔 계축이 예언했던 육십 육일의 시한에서 꼭 이틀이 떨어져 있을 뿐인 위기의 날이었음을 말이다. 휘류류륭! 꽃잎의 소용돌이가 서서히 주위로 맹렬하게 확산되며 자천릉을 휘감아 오기 시작했다. 자천릉은 칼 끝처럼 살갗에 부딪치기 시작하는 꽃잎을 바라보며 흠칫 눈빛을 빛냈다. '이것은 무공이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선천적인 기를 무예로 이용하는 일종의 염력술사임에 틀림없다!' 기를 무예화시킨 선천적인 염력술사. 그렇다. 오천무림문헌통고의 부편인 천하칠패쟁비록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꽃바람은 내공과는 다른 차원의 잠재능력, 곧 일종의 초상감각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이 시대에 존재하는 두 사람의 염력술사. 염력을 무학과 조화시킨 지상최강의 영적인 감응력을 지닌 사람들이 바 로 이곳에서 서로 부딪치려는 그 가공할 순간이었다. 파파파팟! 무수한 꽃잎들이 마치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거대한 칼날의 부스러기인 듯 소용돌이와 함께 자천릉을 무섭게 휘몰아쳐 왔다. '속전속결! 저 꽃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홍익청차, 그 렇다. 시왕홍청(始王紅 )을, 붉은 잠자리떼를 부르자!' 삐류류류! 자천릉의 입에 물려있던 홍익청차에서 구슬픈 음률이 길게 허공으로 퍼 져나가고 있었다. 그 순간 들꽃의 벌판 위를 어디선가 날아온 유난히 크고 붉은 잠자리떼 가 빨갛게 뒤덮었다. 그러자 무섭도록 휘몰아쳐 오던 꽃바람이 잠시 주 춤했다. "바람에는 바람이다!" 자천릉의 입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지며 무수한 고추잠자리떼가 그의 온 몸을 감싸는가 싶자, 쉬아아앙! 고추잠자리떼의 날개짓이 격렬한 기류변화를 일으키며 그것은 가공할 죽 음의 폭풍으로 화해 소용돌이치는 꽃잎들을 날려 버리기라도 할 듯 휩쓸 어갔다. 이어 무수한 잠자리떼들이 하나하나 낱낱이 핏빛 칼날이 된 듯 그대로 꽃잎들 위에 부딪쳐 가는 것이 아닌가. 꽝! 노란 들꽃과 붉은 고추잠자리의 격돌이 일어났다. 그것은 인간의 몸이 창출해 내는 꽃바람의 신비와 이미 팔백 년 전 중원을 격동시켰던 고추 잠자리떼의 거대한 충돌이었다. 파아아앗! 삽시간에 세상은 피와 꽃잎만으로 가득차 버린 듯 그런 태초의 혼돈으로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순간 쾅! 하면서 또 한 번의 폭음이 지축을 깨질 듯 우렁차게 울렸다. 허나 그것은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자천릉의 뇌리에서 터져나오 는 대파멸의 폭음이었다. 염력과 내공. 자천릉에게 단 이틀의 시한만을 남겨 주었던 서로 걷잡을 수 없는 두 가지 힘의 극점들이 극한에 달하는 힘의 소모전 속에서 삽시 간에 종말로 줄달음쳐 마침내 서로 부딪치고 만 것이다. 비틀거리며 신형을 무너뜨리던 자천릉은 그 순간 보았다. 고추잠자리와 들꽃이 충돌하는 한복판에 흡사 사람의 형상과도 같은 꽃 잎의 무더기가 부르르 균열을 일으키더니 이내 얼음이 부서지듯 와르르 허물어져 내리고 있는 것을 말이다. "죽... 였다!" 자천릉은 힘없이 뇌까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헌데 그는 공교롭게도 물가에 매어져 있던 한 척의 나룻배 위에 힘없이 걸쳐졌다. 그리고 그가 나룻배 위에 넘어지며 정신을 잃은 순간 나룻배 는 매듭이 풀리며 천천히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자천릉을 실은 나룻배는 망망대해와도 같은 동정호의 푸른 물 결 위를 미끄러져 사라져 버렸다. 휘이잉! 짧은 가을바람이 그 격전의 참혹한 순간을 증언하듯 빠르게 자천릉이 섰 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헌데 돌연 바람에 쓸리기라도 하듯 부서졌던 꽃잎 하나가 잘게 흔들림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휘리리링! 잇달아 하나 둘 꽃잎들이 허공에 떠올라 일정한 원을 따라 회전하며 거 대한 꽃잎의 회오리를 다시 형성하는 것이었다. "흐흐흐, 자천릉... 너를 죽이기 전에는... 결코... 바람은... 잠들지 않는다." 이럴 수도 있단 말인가. 실체는 없었지만 분명 사람의 형상이 완전히 숨 을 거두었다고 믿었거늘 바람이 불자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이어 또다 시 불어드는 가을바람에 실려 명백히 다시 깨어난 꽃바람은 어디론가로 끝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휘류류류! ② 푹! 유난히도 차가운 빛을 발하는 금침이 죽은 듯 미동도 없는 사내의 거궐 혈에 깊숙히 박혀들고 있었다. 또 하나의 금침이 세월의 잔상이 그어진 주름진 손길에 의해 인체의 사혈을 일정한 간격 속에서 파고들고 있었 다. 금침은 계속해서 사내의 주요 혈도에 박혀들고 있었다. 한약 냄새가 매캐하게 풍겨 오는 것으로 보아 환자를 치료하는 진료실이 분명한데, 그 진료실 중앙에 놓여 있는 하얀 침상 위에는 지금 한 사람 이 길게 누워 있었다. 전신을 알몸 그대로 내놓은 채 숨결조차 이미 박동을 멈춰버린 듯한 고 요 속에 왠지 모르게 죽음의 기운까지 느껴졌다. 전신의 어느 한 구석도 성한 곳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처참하게 찢겨있는 인영은 바로 자천릉이었다. 신비의 고수 꽃바람과의 결투에서 회생불능의 중상을 입은 그가 이곳에 시신처럼 누워있는 것이다. 푹! 또 하나의 금침은 서슴없이 자천릉의 사혈에 박혀들고 그때를 기다렸다 는 듯 창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자륭극. 이 친구야! 그대가 이리도 우매한 사람이였던가? 노부가 이 아 이를 맨 처음 보았을 때 그토록 당부를 했건만." 한 방울의 땀방울이 노인의 손등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 아이에게 내공을 쌓게하여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도대체 어떤 일에 이 아이의 힘이 그토록 절실하게 필요했단 말인가?" 말을 이으면서도 쉴새없이 자천릉의 몸에 금침을 꽂고 있는 노인의 음성 에는 고뇌에 가득차 있었다. 헤질 대로 헤져 색깔을 구분할 수 없으리만큼 허름한 장삼을 걸치고 있 었다. 그러나 용모만은 선비처럼 청수하고 깨끗한 팔순노인이었다. 헌데 이 노인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천년관부의 제일고수라는 휘호를 가 슴에 안았던 자륭극을 친구라 부르는가? 거대한 금합에 들어있던 금침들이 계속해서 자천릉의 전신에 옮겨지며 그의 삼백육십대혈에 박혀들고 있었다. 헌데 그때 노인의 손에서 자천릉의 몸에 꽂히던 금침하나가 벼락처럼 퉁 겨나오는가 싶더니 연달아 지금까지 꽂아놓은 금침들이 모조리 튀어나오 는 것이 아닌가? 노인의 전신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허헛! 이 아이의 몸 안에 얼마나 많은 내공과 염력이 잠재되어 있기에 천치금침(天治金針)들이 모조리 튀어나오는 것일까?' 잠시 자천릉의 전신을 면밀하게 살펴보던 노인의 눈에 순간적으로 결연 한 그 무엇이 스쳐가며 천천히 쌍장을 모았다. "하는 수 없구나. 내 스스로 정한 금기(禁忌)를 깨뜨리는 수밖에. 그 길 만이 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길이다." 노인의 가지런히 모아져 있던 쌍수가 천천히 자천릉을 향해 쭈욱 뻗어졌 다. 파파팟! 그의 손 안에서 수많은 금침들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여섯 자 공간 사이를 완전히 메우고 비수처럼 날던 금침들은 일제히 자 천릉의 전신대혈에 박혀들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 한 가닥 미소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이제야 천치금침이 들어가는군. 그럼 그렇지. 헛, 이럴 수가?" 노인의 청수한 얼굴에 드리워졌던 미소는 급격히 사라지고 자천릉을 응 시하고 있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자천릉의 전신대혈에 박혀있던 금침들이 또다시 무형의 기운에 의해 서 서히 밀려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다. 이 아이의 내력과 염력이 육갑자에 달하는 나의 십이 성 의 공력을 밀어 내버리다니!" 그는 처음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오랜 시간을 두고 자천릉의 전신을 다 시 살피기 시작했다. 문득 자천릉의 전신대혈을 살핀 노인의 얼굴에 한 가닥의 확신이 굳어졌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이 아이의 몸에 잠재되어 있는 더 이상 증진될 수 없으리 만큼 강한 염력과 무궁무진한 내공이 한 순간의 충격에 의해 폭 발은 했으나 지금 외부의 물질의 힘이 들어오자 내공과 염력이 합해지며 외부로 튕겨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눈에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이 천치금침을 팔만사천모공에 박아넣어 천치초정금침대법(天治超靜金針大法)을 펼친다면 두 가지 기운을 하나로 합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노인이 자천릉의 석 자 앞에서 천천히 가부좌를 틀었다. 뒤이어 나직한 음성을 흘러냈다. "비아야. 너는 지금부터 최대의 공력을 돋우어 이 사부의 명문혈로 주입 시켜라." 그 순간 노인의 등 뒤로부터 아주 거북하고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 "훗, 사부님. 오늘은 이 흑나비가 몰랐던 일들을 많이 알게 되는군요. 사 부님께서 흥분을 다하시고... 남을 탓하시는가 하면... 더욱이 사부님의 금 기까지 스스로 깨뜨리며 그 사내를 구하시려 하다니." 노인의 뒤에는 언제부터인가 창가에서 한 명의 흑포철립인이 조심스럽게 자그만한 화병에 꽃을 꽂고 있었다. 약간 헐렁하게 느껴지는 흑포에 턱 밑까지 내려 온 철립을 무겁게 눌러 쓰고 있으며 드러난 손과 목에는 흰 천이 감겨져 있어 왠지 모를 섬뜩한 사기가 드리워진 인물. 그의 전신에서는 늪지에서 먹이를 노려 보고 있는 한 마리 굶주린 독사 같은 비정한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거기에 한 여름에 정열적으로 피어나는 한 송이의 붉디 붉은 장미화가 그의 가슴에 반듯하게 꽂혀있어 지독히도 특이한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그의 가슴에 꽂혀 있는 그 화사하고 아름다운 장미화가 붉은 피를 연상케 하는 것은.... 그는 하나의 옥병에 꽃꽂이를 하며 양철 긁는 소리를 무심하게 토해냈 다. "대체 사부님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시는 그 자의 정체가 몹시도 궁금 하군요." 노인의 고매한 얼굴 위로 한 가닥의 노기가 떠올랐다. "비아야. 시간이 없다! 어서 내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이 사부에게 주입 토록 해라. 이 아이는 이 드넓은 천하에 단 하나뿐인 나의 생사지기의 아들. 이 아이가 노부를 찾은 이상, 더욱이 상처를 지닌 채 나를 찾아온 이상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 아이 만큼은 살려내야 한다. 설사 나 의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대체 이 노인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자천릉에게 친구의 아들이라 칭하며 염력과 내공이 체내에서 부닥쳐 결코 회생할 수 없는 자천릉을 살리겠다 고 하는가? 노인이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비아야. 너는 모른다. 이 사부와 자륭극 그 친구와의 관계를. 그는 노부 사공역을 한 번 죽음 직전에서 구해 준 적이 있다." - 천치의성 사공역. 천하에 그가 못 고치는 병은 있을 수 없고 죽어서 입관하는 송장이라도 그의 앞에 내려놓으면 다음날 아침에 버젓이 밥상 앞에서 볼 수 있다는 천하제일의 의성. 모든 보장된 권세와 영화의 호사스러움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 치고 나 환자들의 섬인 부나비도로 뛰어들어 나병환자들을 치료하는 어둠 속의 성자로 또한 의원으로서 천하칠패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 아득한 옛날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자륭극이 핏덩이의 자천릉을 그의 앞에 데려 왔을 때 무공을 익혀서는 안된다고 극구 당부를 했던 장 본인이기도 했다. 허면 자천릉이 누워있는 이곳은 부나비도란 말인가? 흑나비라는 철립인은 지극히 사이한 기운을 풍기며 천천히 사공역의 뒤 로 다가왔다. "이제는 도저히 믿을 수 없습니다. 천하에 누가 있어 사부님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으며, 또 사부님보다 무학이 고강한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 까?" "......." "제가 아는 사부님은 최소한 곤오풍우나 자륭극에 비해 결코 하수가 아 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제자를 기른 것은 바로 사부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흑나비의 말이었다. 사공역은 앉은 자세 그대로 무 엇인가를 감추려는 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제 그만 됐다. 지금 중요한 것은 네가 이 사부의 몸에 내력을 주입시 키는 것이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지독히도 비정한 한이 스물거리는 음성과 함께 흑나비는 사공역의 명문 혈에 붕대로 칭칭 감겨진 손을 올려 놓았다. "이 제자는 오늘 정말 굉장한 부자(父子)의 이야기를 듣게 된 셈입니다. 아버지는 사부님을 구했고 그의 아들은 내공이 너무 강해 사부님과 이 제자가 합공을 해야만이 겨우 천치초정금침대법을 펼칠 수가 있으니 말 입니다." 흑나비의 의문 어린 음성에도 불구하고 사공역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는 이미 전신의 내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린 채 평생 자신의 금기로 삼 아왔던 천치초정금침대법을 펼치기 위해 한 곳으로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하늘이라도 고칠 수 있다는 사공역의 비기가 드디어 자천릉을 향해 펼쳐 지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