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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황(卍皇) 1 - 34편 (34/50)

2026-09-21 21:18:45 조회 15
노파의 몸이 다시 화석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또 한 번 뜻밖의 곳에서 백마의 이름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 신무자 제석혈혼 계축! 영혼의 언덕이며 영매의 마을 매당파. 누구도 강호와 연관시켜 생각할 수 없었던 천하고 더러운 박수와 무당들의 땅인 매당파의 당주가 바로 백마 중 아흔 두 번째의 인물이었을 줄이야. 그렇다. 자천릉은 아래에서부터 한 명, 한 명 백마를 죽여 나가며 마침내 이곳 매당파에서 그 아흔 두 번째의 인물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만황 제3권 천중행·천중화 공저 차례 제21장 무랑루주(巫廊 宙) 제22장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힘 제23장 흑나비(黑癩卑) 제24장 십왕전쟁(十王戰爭) 제25장 죽음의 바둑 제26장 시신(屍身)의 마을 제27장 황야의 결투 제28장 백발의 제황 제29장 최후(最後) 제30장 아버지와 아들 제21장 무랑루주(巫廊 宙) ① 이 밤의 초가을비가 이리도 음산함은 왜 일까? 복우산 깊은 골짜기에서 영혼의 언덕을 두드리는 밤비는 종말의 날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들의 슬픈 울음처럼 어두웠다. 그 언덕 아래 칙칙한 어둠을 감고 웅크리고 있는 낡은 기와의 고가들 위 에도 비는 내리고 그 빗속 어딘가에서 유난히도 환한 불빛 하나가 대낮 처럼 번져나오고 있었다. <무랑루주.> 무신(巫神)의 집이라는 의미의 현판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버릴 듯 위태 롭게 걸려 있는 가장 큰 고가였다. 기와도, 벽도, 창도, 문도 모두 검은 색으로 옻칠을 한 기이한 고가였다. 그 안은 지독히도 넓은 한 칸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 대낮처럼 환하게 보였던 불빛은 그 방안을 메울 듯 가득히 세워진 수천 개의 촛불 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헌데 놀랍게도 방의 네 벽은 흙이나 돌이 아니라 투명한 거울로 되어 있 지 않은가? 수천 개의 촛불들은 그 거울에 반사되며 수십 만 개의 불꽃으로 화해 실 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비한 촛불의 숲 한 복판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촛불의 중앙에 귀신들의 형상을 요기롭게 수놓은 붉은 비단 방석 위에 앉아있는 자는 팔순 가량의 노인이었다. 말대가리처럼 길쭉한 얼굴에 쭉 찢어진 눈, 그리고 엄청나게 비대한 체 구를 가진 노인. 그는 빛바랜 하늘처럼 퇴색된 회색빛 가사로 전신을 감 고 있었는데 그 아래 기이하게도 또 한 벌 받쳐입은 핏빛 장포자락이 삐 죽이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지옥의 요마가 회포를 걸치고 앉아 있는 것일까? 머리칼이 마구 흘러 무 릎을 뒤덮고 있는 데도 미동도 없이 두 눈을 감은 채 정좌해 있는 회포 노인의 모습에서는 말할 수없이 사이로운 요기가 스멀스멀 배어나오고 있었다. 회포노인의 왼쪽에는 한 흑포사내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는데 사내의 몸에서도 어떤 불행의 그림자와 같은 기분나쁜 공기가 침침하게 흘러나 오고 있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짐작케 해주었다. 이때 회포노인의 눈 이 번쩍 떠졌다. "할멈이 누군가를 본 무랑무주에 데리고 오고 있다." 도저히 인간의 음성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역겨운 괴성이 그의 입에서 흘 러나오기 시작했다. "용모는 준수, 복장은 새빨간 혈포, 나이는 십 육 세에서 십 팔 세, 거기 에 발자국 소리가 없으므로 보아 엄청난 초절정고수다." 흡사 사람이 까마귀의 울음을 입으로 내는 듯한 괴성이었다. "예? 누가 말입니까?" 무릎을 꿇고 있던 흑포사내가 의아한 듯 회포노인을 쳐다보았다. "으음, 갑자기 왜 이렇게 온몸이 가렵기 시작하는 것일까?" 부욱! 회포노인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하며 돌연 피가 나도록 자신의 손등을 긁었다. "참을... 수 없다! 도저히! 온 몸이, 온 몸이, 개미가 물어 뜯고 다니는 듯 근질거린다." 부욱! 부욱! 회포노인은 양손으로 미친 듯이 전신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회 포노인의 전신에 시뻘건 손톱자국이 줄줄이 생겨나며 벗겨진 살갗에서 핏방울이 돋아나고 있었다. '헉! 당, 당주께서 저렇게 평정을 잃으실 때가 다 있다니.' 깡마른 흑포사내의 얼굴에 아연 경악의 빛이 스쳐갔다. 홀연 회포노인의 체구가 부르르 떨렸다. "이, 이것은, 그렇다! 누군가 나를 죽이러 오는 것이다. 내 몸 속에 있는 신기가 그것을 경고해 주고 있다." 그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으, 점점 가까이... 벌써 백 장 밖이다!" 회포노인이 미친 듯이 온몸을 긁으며 흡사 신이 들린 듯한 목소리로 숨 가쁘게 신음을 터뜨렸다. "으, 초혼! 호위는 확실한가?" 초혼이라고 불린 흑포사내가 습기 어린 음성으로 깔리듯 대답했다. "예 당주께서 모시고 온 해당화와 청잠이라는 분이 본파의 제석팔십일귀 무당(帝釋八十一鬼巫堂) 아이들을 이끌고 무랑루주 주위를 철통같이 감 싸고 있읍니다." 전신을 미치광이처럼 북북 긁고 있는 이 회포노인이야말로 매당파의 당 주를 맡고 있는 신무자 제석혈혼 계축이었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백마서열 구십 이 위라는 가공할 이중신분을 가지 고 있는 무당들의 신. 심령감응의 힘을 선천적으로 타고나 그 심령적 효 과를 무학에 응용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마음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는 경 지에 오른 무서운 인물. 또한 박수와 무당 그리고 영매들의 신기를 좌우할 수 있는 엄청난 신기 를 지녀 신들린 무인, 혹은 악마의 주술자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신무자 제석혈혼 계축이 바로 이 괴이한 행동을 벌이고 있는 회포노인이었다. "기이한 일이다. 도, 도대체 할멈이 데리고 오는 자가 누구이길래 내 몸 이 이토록 강한 감응을!" 계축이 미친 듯 전신을 긁어대자 급기야 방울지던 선혈이 뚝뚝 비오듯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무랑루주 밖에서 누군가의 싸늘한 외침이 들려 왔다. "멈춰라! 이곳은 무랑루주! 당주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한 다!" "흘! 이봐, 이 늙은 할멈이야. 매당태태라구!" "헛, 몰라뵈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고함을 질렀던 자와 또 어떤 인물이 주고 받는 대화가 빗소리에 섞여 흘 러들고 있었다. "저, 멍청한 놈! 이보게, 해당화와 청잠! 그 미친 할멈을 좀 막아주게." 계축이 정신없이 온몸을 긁으면서 창 밖으로 일갈을 터뜨림과 동시에 황 급히 초혼에게 시선을 주었다. "초혼! 촛불을 꺼라!" "옛! 당주, 헌데 촛불은 왜?" "빨리 꺼! 저 자, 저 자는 바로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서 나를 찾아온 십 왕 중의 일 인일 것이다!" "헉! 십, 십왕 중의 일 인?" 초혼이 대경실색하자 계축이 여전히 전신을 손톱으로 난자하면서 다급하 게 말을 이었다. "그, 그렇다. 저자는 백마의 혈포를 입고 있으나 내가 알고 있기에는 백 마 중 저자같은 고수가 없다. 내 몸에 이토록 강한 감응을 일으킬 자는 천하에 십왕을 위시한 몇몇의 고수들 뿐이기 때문이다." "하, 하오면?" "저자는 분명 백마로 분장한 십왕 중의 일 인이다. 내가 주군으로 모시 고 있는 분이 아닌 다른 자!" 그때 초혼의 손에 의해 일천 개의 촛불이 일시에 꺼졌다. 헌데 그때 창 밖에서 누군가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훗, 해당화와 청잠이라, 백마 서열 구십 삼 위와 구십 사 위에 있는 자 들이군. 잘됐어, 오늘 또 나는 두 단계의 서열을 올라설 수 있을 테니." "응? 너는?" "크ㅋ! 겨우 서열 일백 육 위에 있던 그 천요만방의 부방주가 아닌가?" 다시 그 음성을 받는 두 사내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랑루주로 이르는 길목. 질척하게 내리는 밤비 속에 시커먼 무자복(巫者服)을 걸친 수십 명의 흑 영들이 징이며 북채, 송모자락, 종이칼 등 매당파 특유의 무기들을 병기 처럼 나누어 든 채 둘러서 있고, 그 선두에는 강렬한 살기를 폭사시키는 두 혈포사내가 누군가를 가로막 고 있었다. 헌데 그들에 의해 제지당하고 있는 인물은 바로 자천릉이 아 닌가? 이때 자천릉의 곁에 서 있는 유등을 든 매당태태의 두 눈은 곤혹과 경악 으로 복잡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흠! 도대체가 오늘 벌어지는 일은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부당 주와 총령관이 이 공자의 눈빛만 보고도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거늘, 헌 데 천요만방의 부방주라니?' 매당태태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그렇다면 주방장이라는 얘긴데 도대체 십팔만사천백와마루가 얼마나 강 하기에 일개 주방장이 이렇듯 무시무시하다는 말인가?' 매당태태의 주름진 눈이 사이롭게 빛났다. '아니다! 뭔가 와전된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 파가 아무리 약하다고 치더 라도 당주께서는 명실공히 백마의 일 인이 아니던가? 헌데 지금 곤륜산 의 주방장이라고 하는 이자가 오는 것을 감응하고는 사시사철 단 하루라 도 꺼질세라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천야제등촉(千夜帝燈燭)조차 꺼 버리 셨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천야제등촉. 무랑루주의 실내에 환하게 밝혀져 있던 일천 개의 촛불을 가리키는 말인 듯했다. 그때였다. 삐류류류! 괴이쩍은 음향이 터졌다. 뒤이어 섬ㅉ한 절삭음이 장내에 울려퍼지는가 싶자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컥! 믿, 믿을 수 없다! 네가 이토록 무서운 고수였...." "으, 그, 그대가 어찌 백마, 아니 십왕에 들지 않았단 말인가... 큭!" 자천릉의 앞을 가로막던 두 혈포사내가 경악성을 토하며 그 자리에 무너 져 내리고 있었다. 홍익청차(紅翼聽車). 장백의 공포로 중원을 강타했던 그 죽음의 바람개비 가 구슬픈 울음을 토하며 자천릉의 입에서 날아올라 두 사내의 전신을 면도날로 그리듯 난자해 버렸던 것이다. 깨달을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촌각을 수백만 분의 일로 나눈 그 짧은 순 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매당태태의 얼굴이 더욱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것 봐라? 당주께서 그토록 높게 평가하시던 이 피꽃이니 푸른 누 에니 하는 작자들도 손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죽어가지 않는가!' 해당화와 청잠이 누구인가.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백마 서열 구십 삼 위 와 구십 사 위로 등록되어 있는 가공할 고수이며 한 송이 해당화와 푸른 누에 형태의 비녀를 각각 들고 중원천하에 무적으로 군림했던 그 피와 죽음의 살인자들이 아닌가? 헌데 그들이 자천릉의 홍익청차에 의해 손 한 번 써 볼 사이도 없이 죽 고 만 것이다. ② '일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매당태태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어갔다. 자천릉이 가볍게 웃으며 그녀 의 어깨를 툭툭 쳤다. "훗! 할멈, 내일 먹을 대추씨라도 생각하시나? 어서 가지." "그, 그렇게 합지요!" 매당태태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면서도 어벙벙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 다. '흠! 점점 더 복잡해진다. 왜 이렇게 뭐가 어렵지? 분명 아까 초혼무와 심령료술(心靈療術)을 볼 때는 일대 종사와도 같은 거인의 기품이 풍겼 다. 헌데 이번에는 또 피를 머금은 한 마리 이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이 할멈이 너무 늙어서인가?' 검은 짐승처럼 밤비를 맞으며 음산하게 웅크린 무랑루주 앞에 매당태태 와 자천릉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매당태태가 조심스럽게 보고를 올렸다. "당주께 아룁니다. 곤륜산에서 한 공자님이 당주를 뵙고자 찾아 오셨습 니다." 허나 촛불마저 꺼져버린 실내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군." 매당태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난색을 띈 채 자천릉을 돌아보았다. "공자님, 다음에 오셔야겠수. 당주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 같은데 선금은 열 배로 돌려 드려야겠구랴. 쯧쯔!" "후후, 돌려 줄 필요야 없지. 나는 그 당주라는 작자를 죽여 진급해야 할 몸이니까." 자천릉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흘흘, 하지만 당주께서는 출타 중이신 것 같은데 보시다시피." 삐이끽! 매당태태의 주름진 손에 의해 산문이 밀리며 실내의 시커먼 어둠이 와락 물결처럼 밀려나왔다. 자천릉이 그 짙은 어둠 속을 싸늘한 눈빛으로 쓸 어보았다. "안심하게. 출타 중인 당주를 찾아내는 방법은 너무 많아 어떤 방법을 택해야 좋을 지 모를 정도니까." 자천릉은 어둠 속으로 발을 들여 놓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흠흠, 촛불의 냄새가 남아 있는 정도로 보아 숨은 지 꼭 일 각이 지났군 " 어둠에 잠긴 실내에는 일천 개의 촛불로 만든 천야제등촉이 꺼지며 남긴 묘한 향내가 은은히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흠, 숨바꼭질을 좋아하시는 모양이지?. 이상하군. 오천년무림문헌통고에 는 취미가 굿을 드리러 온 유부녀를 강간하는 것이라고 쓰여 있던데." 자천릉이 문득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순순히 나오지 않으려 하는군. 어린아이들도 이 정도 시간이 흐르면 술 래가 불쌍해서 나와 주던데. 하는 수 없지. 내가 찾는 수밖에." 자천릉의 손가락 끝에서 반짝 화광이 일어나며 일천 개의 촛불이 다시 밝혀졌다. 자천릉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무섭도록 짙은 녹색 빛줄기가 섬칫하게 폭사되었다. "나... 영원한 영혼의 율법이요, 산 자들의 영 위에 우뚝 선 만유(萬有)의 신(神)... 만황(卍皇)의 뜻으로 네게 명하노니... 나오라, 나의 어린 종이 여!" 그의 입에서 악령의 호곡과도 같이 주문이 흘러 나왔다. 그것은 바로 아 흔 아홉 개의 황금만루 중 아흔 아홉 번째의 고루 위에 떠오르던 마지막 비기, 산 자의 혼을 부르는 만매심령혼통귀기(卍魅心靈魂通鬼氣) 상의 주 술이었다. 이때 그 귀기스런 주문의 여운이 일천 개의 촛불을 흔들며 스산하게 퍼 져 흐르는 순간이었다. 찌이익! 돌연 천정이 찢어지며 전신이 피범벅이 된 계축의 동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혼이라도 빼앗겨 버린 것일까? 두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시뻘겋게 핏발만 곤두 서 있었고 임종 직 전의 노인처럼 가냘프게 경련하는 손으로 여전히 전신을 북북 긁으며 와 들와들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은 처참을 지나쳐 참혹에 가까웠다. "후후후, 인간의 혼을 다스리는 제석께서 아수라마황과 싸움이라도 벌이 고 오셨나? 아니면 가시밭에 숨어 있으셨나... 왜 그렇게 피가 낭자하 지?" 자천릉의 사악한 웃음소리가 계축의 전신을 뱀의 붉은 혓바닥처럼 핥으 며 싸늘한 전율을 일으켰다. 계축이 가슴살을 뼈가 허옇게 보이도록 긁어대며 핏발 뿐인 동공에서 파 름한 독기를 뿜어냈다. "으으, 이 찢어 죽일! 너, 너는 왜 나를... 아직 십왕께서는 전쟁을 시작하 지 않으셨거늘... 동맹을 맺으셨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호, 너는 어릴 때부터 아주 지독한 거짓말쟁이였나 보구나. 너도 며칠 전 저 해당화와 청잠이라는 작자들과 어울려 십왕 서열 오위(五位)인 천 장원주 용등택의 휘하에 있는 서하권련(西河拳聯)을 습격하지 않았던 가?" "으, 그, 그걸 네가 어찌...." 계측은 계속 전신을 긁으며 죽어가는 벌레처럼 파르르 사지를 경련했다. "아는 수가 있지." "이,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너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분명 백마도 아니 고 십왕은 더욱 아니...." 자천릉의 입가에 섬ㅉ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너까지 꼭 아홉 번째 듣게 되는 말이니 지겹 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알려주마. 나는." "으으." "백마도 아니고 십왕도 아닌 단지 그들을 죽이고자 하는 만황일 뿐이다. 내가 너를 찾은 것은 네가 백마 중 끝에서 아홉 번째 인물인 까닭도 있 지만 또한 내 신체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였기도 하지." 만황. 그렇다. 이제 자천릉은 스스로를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체내에 자신도 모르게 깃들어 있던 초자연적인 잠재능력의 정체 곧, 만통법왕의 황금만루에서 처음 들었던 그 만황이라는 칭호의 의미를 자천릉은 이곳 매당파에서 스스로의 시험을 거치며 이제야 명백히 깨닫 고 있는 것이었다. 헌데 자천릉의 입에서 막 만황이라는 한 마디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온몸을 긁던 계축의 손이 자른 듯 뚝 멈춰지며 초점이 없던 그의 눈에서 격렬한 충격의 눈빛이 새파랗게 솟구치고 있었다. "만황! 그렇다. 그 전설적인 만신의 제왕... 만황이었어... 오오... 어찌 그 불가능의 전설이 현실로 화할 수 있단...말인가!" 계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서 나의 염력도 통하지 않았군. 그래서... 내 몸이 그토록 엄청난 감 응을 나타낸 것이었어..." 넋이 나간 듯 정신없이 터져 나오는 계축의 뇌까림을 자천릉은 차가운 얼굴로 흘러듣고 있었다. 헌데 이때 계축이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하지만 나는 행복하군. 곧 내 뒤를 따라올 위대한 전설의 만황 과 함께 저승으로 가게 될 테니...." 자천릉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이자는 지금 무얼 중얼거리는가? 흡사 내가 곧 죽어 자신의 뒤를 따라 가기라도 할 듯이 말하고 있군. 훗! 죽기가 저리도 심심했던가?' 자천릉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신체에 깃들린 비밀이 지금 얼 마나 중대한 위기를 향해 치달려 가고 있는가를 말이다. 회광반조이기라도 한 것일까? 계축은 기분이 유쾌해 온몸을 긁어야 하는 고통도 잊은 듯 음침한 괴소를 흘려내고 있었다. "흐흐흐, 너의 표정을 보니 너는 너 자신의 신체에 대한 비밀을 모르고 있는 듯 하군. 네가 나에게 한 가지를 알려줬듯이 나 또한 한 가지만 알 려주마. 너는 만황의 위대한 신체를 타고났으나 금기를 범하고 말았다." "금기?" "그렇다. 너는 만황의 신체만으로도 천하무적으로 군림할 수 있었거늘, 미련하게도 측량할 수 없는 내공을 함께 익혔다. 이제 그 내공이 점점 상승경지에 오르면서 염력 또한 최고조의 경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흠!" "흐흐흐, 나는 안다. 정확히 육십 육 일이다. 육십 육 일이 지나면 가공할 내공과 최고조에 이른 염력이 너의 체내에서 부딪히며 산산이 폭발해 부 서질 것이다. 물론 너의 육체도 모래알처럼 흩뿌려지게 되고 말겠지." 대천법왕을 비롯한 이방십칠인의 인물들이 예측한 자천릉의 수명은 십 팔 세였다. 허나 자천릉은 만장석굴 내에서 사 년 육 개월을 보냈을 뿐 만 아니라 황금만루를 통해 가공할 염력의 기를 또다시 흡수함으로써 염 력과 내공이 더이상 오를 곳이 없을 만큼 엄청나게 팽창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육십 육 일이라면 그것은 누구보다도 정확히 계산해 낸 자천릉 의 살아 숨쉴 수 있는 날짜였다. "흐흐흐, 정확히 육십 육 일 후... 축하한다." 계축이 말할 수 없이 즐거운 듯 괴소를 흘려내자 자천릉이 묘한 미소를 띄며 고개를 끄덕였다. "육십 육 일 후라... 길지는 않은 시간인 듯 하군. 아무튼 고맙다. 나에게 최초로 나의 신체에 관한 비밀을 알려줬으니." "흐흐흐, 그날... 우리... 다시... 만나자." 괴소를 발하던 계축의 고개가 갑자기 힘없이 꺾어졌다. 마지막으로 촛불 의 끝처럼 되돌아왔던 생명의 기가 끝내 거두어지고 만 것이다. 헌데 이 때였다. "스, 습격이다!" "막아라!" "크헉!" 병장기가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와 고함소리, 비명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어지러이 터져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등 뒤에 있는 창 밖을 쳐다보던 자천릉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호, 제법 많이 몰려오는군. 흡사 피를 본 거머리떼들처럼." 창문 너머로 내다보이는 영매의 언덕 아래에 주절거리듯 스산히 내리는 초가을 밤비를 헤치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숫자의 흑포무사들이 민첩하 게 올라오고 있었다. 흡사 수천만 마리의 밤 고양이떼들처럼 발소리도 없이 밀려든 흑포 사내 들의 대열이었다. 그들을 향해 저지선을 형성하던 매당파의 무인들은 미처 항거해 볼 사이 도 없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거꾸러지고 순식간에 흑포 사내들은 거의 언덕의 정상까지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마침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백마를 때려죽이기 위해 만들었다는 백마 착섬불극도를 시험해 볼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자천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등에서 백마착섬불극도를 끌러들었다. "하나, 둘, 셋, 열... 흠, 고작 일천 마리도 못되는 숫자로군. 분명 누군가 나를 눈의 가시처럼 여기는 십왕 중의 일 인이 보내 온 자들이겠지. 매 당파를 쓸어버리려는 것이라면 저 정도의 마리수도 필요 없었을 테니 까." 도신에 초승달 형상의 칼날이 덧붙은 이 기이한 형상의 마병이 비스듬히 옆으로 뉘어졌다. "후후, 넘어질라. 천천히 순서대로 오너라. 내 생명이 육십 육 일이나 남 았다는데 그 동안 너희들쯤 죽여주지 못하겠느냐?" 백마착섬불극도, 간단히 백마도극이라고 부르는 이 마병의 날에서 소름 끼치도록 예리한 살기가 차갑게 폭사되기 시작했다. "크아악!" "허어억!" 비명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려오며 물밀 듯 다가드는 흑포사내들과 무 랑루주와의 거리가 불과 이십여 장 가량으로 좁혀졌다. 찰라 자천릉의 신형이 화살처럼 창 밖으로 쏘아져 나가면서 싸늘한 일갈 이 터져나왔다. "백마불참십극도술, 제일술! 굶주린 수탉이 부리를 세우고 먹이를 쪼니 백마도극의 날은 비비로 화하여 바람을 가르도다. 아계탁란 비비단풍!" 쌔애애액! 백마도극이 흡사 바람을 가르는 한 줄기 비수인 양 극한의 예기를 뿜으 며 닥쳐오는 흑포사내들의 허리를 휩쓸어 갔다. "크아악!" "헉! 이, 이것은!" 촤아앗! 순식간에 수십 명의 흑포사내들이 짚단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