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황(卍皇) 1 - 33편 (33/50)
다음부터 얼굴을 마주보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 오." 촤앗! 돌연 자천릉이 몸을 돌리며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 이봐! 어, 어딜 가는 거야? 앞으로는 더위를 좀 먹더라도 예의라는 걸 차려볼테니까 가지마!"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확실하게 꼬시는 건데. 여우같이 꼬리를 흔들든 지 못하면 다리를 걸어서라도" 비청청과 비취홍이 황급히 다급성을 내뱉으며 자천릉의 꽁무니를 따라 교구를 날렸다. 헌데 그들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였다. 돌연 비청청이 기대고 있 던 떡갈나무가 진동을 일으킴과 동시에 떡갈나무가 통째로 터져 나가며 한 사내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 솟아났다. 양팔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자포를 걸친 오순의 사내였다. 한 덩이 얼음 에 차디 찬 고드름을 박아 조각으로 깎아 세운 듯 사내는 말할 수 없이 음랭하고 스산한 한기를 싸늘하게 내뿜고 있었다. "교활한 늙은이다. 자염, 그 늙은 여우가 먼저 선수를 치는군. 저 아이가 말대가리 영감의 수족들인 자오비마(子午飛魔)와 육합마간(六合魔竿)등, 백마 중 여섯 명을 암암리에 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미가 당긴 것이 겠지?" 만년빙굴 속을 울리는 메아리인가. 자포사내의 음성은 알 수 없는 의미 를 담고 폐부를 얼릴 듯 차디차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헌데 사내가 입고 있는 자포의 가슴에는 한 마리 하늘을 박차는 적룡(赤 龍)의 문양이 생생하게 수놓아져 있지 않은가. 십왕의 신분을 상징하는 적룡의 문양이었다. "사람의 눈은 똑같다. 해서 조금의 혜안이라도 갖고 있는 자는 인재를 알아본다. 따라서 주희빈의 명을 받는 저 아이를 빼앗아 가고 싶은 마음 은 팔 인의 십왕들 모두에게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휘이잉! 무더운 밤바람이 그의 얼음덩이 같은 전신을 때리며 지나갔다. 칼끝같이 얇은 사내의 두 눈이 서리처럼 차가운 빛을 뿌렸다. "그러나 나 비왕(匕王) 율리새(律里塞)의 눈은 틀리다. 백마회의가 벌어 지던 시각 이미 저 아이의 그릇을 알아볼 만큼, 해서 본좌는 직접 가서 청할 것이다." 그의 음성이 단호해졌다. "원한다면 직위를 떠나 사내 대 사내로서 만나리라. 시간은 빠를수록 좋 겠지, 흐흐흣!" 슈파팟! 음랭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내의 신형도 자천릉이 사라진 어둠을 향해 빛 살처럼 치솟아 갔다. - 비왕 율리새. 십팔만사천백와마루 통합서열 제 칠 위. 바로 십왕 중 일곱 번째 인물이 며 대곤륜에서 가장 차갑고 비정한 사내로 알려져 있는 가공할 고수. 대곤륜백팔십일방 중 단일의 힘만으로는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흑룡강(黑 龍江)의 주인이며 당대 태대각 곤오풍우를 제외하면 그의 비수를 받아낼 자가 없다는 비비(飛匕)의 달인. 한 가마니의 콩을 허공에 뿌린 후 콩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모두 비수 로 관통시켰다고 하는 초절정의 무인이었다. 그런 극강의 무공을 가지고도 서열 칠 위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다만 그 의 강하고 비정하기만 하며 타협을 모르는 성격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는 무서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비사벌이 자천릉에게 접근해 오는 이때 그가 사내 대 사내의 만 남을 외치며 자천릉의 뒤를 추적해 가고 있다. 십왕들의 전쟁. 그 치열한 피와 죽음 그리고 음모의 와류 속에서 자천릉 은 어느덧 대폭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③ 다시 시작된 난세를 슬퍼함인가? 하염없는 초가을의 밤비가 수수하게 내 리고 있었다. 마치 시커먼 어둠을 훑어 내기라도 할 듯 이 비는 왠지 음 산하고 칙칙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여기는 복우산(伏牛山). 하남성에서 호북(湖北)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그 깊디 깊은 심산(深 山)의 어느 곳이었다. 삐류류류! 한 줄기 새울음처럼 묘한 기음이 울리기 시작하며 빗물로 물러진 흙바닥 을 딛고 초립에 도롱이를 두른 혈의사내가 바람개비를 문 채 걸어 오고 있었다. 자천릉이었다. 칙칙한 어둠 속 어딘가에서 희미한 불빛 한 점이 자천릉의 시야에 들어 왔다. "흠, 저곳이 영매의 언덕이라는 구릉(丘陵)이군. 그렇다면 당연히 저 마 을이 매당파이리라." 불빛이 비치는 곳에는 조금 높아 보이는 구릉 하나가 솟아있고 그 곳에 는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우중충한 기와로 덮힌 고가(古家)들이 밤비를 맞으며 웅크리고 있었다. 헌데 육천마을 중 가장 괴이한 마을 매당파가 바로 이곳이란 말인가? 허 면 자천릉은 그 누구도 모른다는 이 신비하고도 괴이한 마을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바로 오천년무림문헌통고에는 천하무인들의 모든 인명과 이력이 정리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천하 대소문파와 신비기처들의 위치 등에 이 르기까지 무림에 관한 모든 것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소재를 모른다는 부나비도와 매당파 등 육천마을도 오천년무 림문헌통고에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자세히 밝혀져 있었던 것이다. 헌데 자천릉은 무엇 때문에 이곳 매당파에 나타난 것일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이때 자천릉은 막 빗 속에 웅크린 고가들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덩덩! 덩더쿵! "오, 오! 죽은 님의 신이여, 산 자의 영으로 오소서, 오소서." 기이한 박자의 북소리와 더불어 주문(呪文)처럼 음산하고 기분나쁜 노랫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북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리고 있는 고가 앞으로 다가가던 자천릉 이 문득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호! 저 여자는 지금 죽은 자를 부르는 초혼(招魂)의 굿을 하며 칼춤을 추고 있군." 처음에 보였던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는 고가의 창(窓)의 불투명한 창호 지 위에 칼춤을 추는 여인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비치고 있었다. 군관(軍 官) 굿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림자가 비치는 여인의 모습은 흔들리는 사모(沙帽)와 너울대는 군포자락과 함께 어울려 어찌보면 귀기롭기까지 한 영상을 은은히 반사하고 있었다. 자천릉은 무관심한 표정으로 북소리와 노랫소리 그리고 춤추는 여인의 칼그림자를 지나쳐 고가들로 형성된 마을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후후, 이 줄이 부정과 재앙을 방지한다는 신색띠줄(神色茅絲) 이었군. 하지만 냄새나는 매당파의 비밀을 외부와 갈라 놓기에는 너무 갸날퍼." 자천릉이 무릎 높이로 걸려있는 누런 새끼줄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붉고 푸른 옷가지며 하얀 천조각들이 무질서하게 매달려 있는 기이한 줄이었다. "후후, 말하자면 이 신색띠줄이 사람을 부르는 종(鐘)인 셈인가?" 자천릉이 희게 웃으며 발 끝으로 줄을 건드리자 어디선가 맑은 방울소리 가 울리며 빗소리를 뚫고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자천릉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고가의 대문이 비명과 함께 열리며 허 리가 낫처럼 굽은 한 노파가 유등을 들고 나왔다. "흘흘, 어서 오슈. 용케도 찾아 왔구랴, 공자." 까마귀와 부엉이가 합창을 하는 듯 귀기스럽고 거북한 음성을 흘리며 노 파는 천천히 자천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어인 연유로 우리 매당파까지 귀하신 걸음에 흙을 묻히셨수?" "한 사람의 정체를 알고자 왔다." 자천릉이 짤막하게 답하자 노파의 목소리가 더욱 음침해졌다. "흘, 그렇다면 본파의 모든 화복길흉을 점지하시는 사무(邪巫)께 여쭈어 야겠수." "누구에게 물어봐도 좋지. 알 수만 있다면." 노파의 주름투성이 손이 그의 코 앞에 불쑥 들이밀어졌다. "흘흘, 본파는 우리 매당파의 집령사(執令師)를 맡고 있는 매당태태(魅堂 太太)라오. 우선 선금을 주슈." "선금?" 자천릉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러졌다. "선금을 걸어도 될까? 천하 어느 곳을 가 봐도 정확히 짚어주는 박수나 무당이 없었거늘." "쯧! 사이비들에게 많이 당했구먼. 그래서 의심이 많은 모양이구랴. 하지 만 안심해도 좋수. 우리 매당파는 천하에 알려져 있지 않기에 물주가 찾 아오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일단 한 번 찾아 온 물주의 청신(請神=신을 청 함)을 옳게 받지 못하면 선금의 열 배를 돌려드리는 것이 우리 파의 자 랑스런 관례이자 전통이라우." "잘하면 쓸데없는 황금이 또 열 배로 늘겠군." 자천릉이 갸우뚱하며 품 속에서 황금덩어리를 꺼내 건네자 노파의 쭈그 러진 두 눈에 일순 생기가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흘, 공자는 기쁘시겠소." "...?" "이제 공자가 후한 새전을 지불했으니 앓던 이라도 빠지게 될 테니 말이 우. 자고로 무당과 박수라는 자들은 신통해봐야 겨우 귀신과 혼을 통하 는 정도였지 인간의 영을 승화시키는 만신(卍神)의 경지를 알고 있던 자 는 아무도 없었수. 하지만 공자는 우리 파에서 새전값 만큼의 결과를 얻 게될 것이구랴." 노파는 마구 자기 자랑을 늘어 놓으며 몸을 돌려 고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천릉도 그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훗! 아주 단정을 하는군. 그래 어쩌면 이들은 내 신체의 비밀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 또한 만통이 황금만루에서 말한 만신의 아류라 볼 수 있으니까.' 그랬던가. 한 사람의 정체를 알고 싶어 왔다는 자천릉이 말한 사람이란 바로 그 자신이요, 자신의 신체 속에 깃든 알지 못할 비밀의 정체였단 말인가. 허나 자천릉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지닌 신체의 비밀, 곧 만황의 위대한 비밀은 모든 만신들의 능력에 우선하는 최고의 초상감각인 것이다. 그러나 이곳 매당파는 그런 영계의 본령을 다루는 곳이 아니라 다만 사 이한 주술과 이단의 초혼술, 방계의 굿과 심령술 등을 다루어 온 편사궤 이의 땅일 뿐인 것이다. '또한 이곳에서 보고 싶은 사람도 만날 수 있을 테니!' 자천릉은 내심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노파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생전 처음 찾아오는 매당파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니 무슨 뜻일까? 그때였 다. 덩더쿵! "오, 돌아 돌아 내를 돌아 산을 돌아 구름을 돌아 오소서, 오소서." 처음 들었던 기이한 북소리와 노랫소리가 커다랗게 고조되며 들려왔다. 유등을 든 노파는 소리가 흘러 나오는 한 방문을 천천히 열어 젖히며 괴 소를 흘렸다. "흘흘, 복건의 황작림대인께서 물어물어 청해오신 초혼무를 연습 중인 아 가라우. 뭐, 시집 못간 딸이 죽었다나?" "호! 버림받고 쫓겨난 후에도 아직 무당노릇은 버리지 못했나 보군. 하긴 그게 밥줄일 테니." 자천릉은 무당이니 신들린 여자니 하여 중원에서 쫓겨간 자들이 이룬 마 을이 매당파임을 알고 있었다. 자천릉이 쳐다보고 있는 방안에는 붉은 유등이 소리없이 타오르는 가운 데 군복을 입고 울긋불긋한 사모와 동정을 두른 한 여인이 미친 듯 노래 를 부르며 칼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치 무슨 장수의 복장인 듯 시퍼런 천으로 요란하게 온 몸을 감은 한 사내가 북과 장고를 치며 칼춤의 박자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흘흘, 공자께서도 천하 각처를 많이 돌아보셨다니 아시겠지만 저 아이는 이미 무신님과 통교한 큰 따님이라우. 더욱이 아직 열 여섯 밖에 되지 않은." 노파의 괴소에 자천릉이 고개를 끄덕했다. "그런 것 같군. 하지만 이상해. 왜 칼춤에 기가 어려 있을까? 마치 도법 을 연성한 사람처럼." "흘!" "더욱이 저 사내는 음공이라도 익힌 것처럼 손에 힘이 들어가 있군." 자천릉은 내심 차가운 독백을 흘리고 있었다. '이 여인은 아니다. 만통이 남긴 황금만루를 볼 때처럼 가슴이 떨리는 기 분을 느낄 수 없다. 내 신체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그때 노파가 방문을 다시 닫았다. "흘흘, 공자의 안목은 대단히 높수. 천한 것들이 살아 남으려니 어쩔 수 없는 방편으로 익힌 무예 외다. 그렇지 않으면 이리같은 사내들에게 몸 을 팔아야 할 테니." "이해가 가는군. 허나 무예를 익히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 되나 때로는 죽는 것을 앞당길 수도 있지." 자천릉이 무심히 흘리듯 한 마디를 내뱉자 노파의 눈에 기광이 빠르게 스쳐갔다. 그러나 이내 노파는 예의 음침한 괴소로 눈빛을 숨겼다. "흘흘, 이제 제낭당으로 가겠수. 공자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곳 이지." 노파의 느릿한 걸음은 건너편에 있는 어둠에 잠긴 사당을 향하고 있었 다. "흘, 제낭당의 당주님은 우리 파의 두 번째 어른이라오. 아마 공자께서도 들어 보셨을 거외다만 복매자 팔괘사무라고 말이우." "기억나는군. 복술에 관해 제법 조예가 있는 사내라던가?" 담담하게 뇌까리는 자천릉의 눈에는 의미심장한 빛이 스치고 있었다. '후후, 모를 리가 없지. 오천년무림문헌통고 녹찰편에 심령을 통한 복술 의 제 일인자 라고 나와 있으니. 다시 말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녹찰 에 소속된 인물이 아닌가.' - 복매자(卜魅者) 팔괘사무(八卦邪巫) 묘여생(妙如生). 영매의 마을 매당파의 부당주. 타고난 심령능력을 복술에 활용하여 길흉 화복을 점치는 데 최고의 권위자로 기록되고 있는 인물이다. 헌데 놀랍게도 자천릉이 그의 이름을 발견한 곳은 다름 아닌 십팔만사천 백와마루의 오천년무림문헌통고 중에서도 녹찰편의 기록에서 였던 것이 다. <녹찰 산하 무관(巫關)의 관주이며 십팔만사천백와마루 대곤륜일천무성 좌의 일 인.> 육천마을 중 다른 곳의 출신들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들어 있는 것처 럼 가장 신비롭다는 매당파의 인물도 대곤륜의 영역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사당을 향해 다가가던 자천릉의 귓전에 미묘한 방울소리가 파고 들 었다. "이, 이상한 일이다. 왜 나의 영령이 좀처럼 멎으려 하지를 않고 이렇게 흔들리는 거지! 왜?" 사당 속에서 누군가의 경악에 젖은 음성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때 사당 앞에 다다른 노파가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흘흘, 부당주! 오늘은 왜 그렇게 영령을 방정맞게 흔들고 계시우? 손님 도 모처럼 오셨는데." 사당의 실내에는 한 대의 등촉이 희미한 빛을 뿌리는 가운데 전신에 팔 괘의 문형이 그려진 황포를 입고 있는 한 오순의 사내가 세 개의 붉은 방울이 달린 종이칼을 든 채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할, 할멈! 손님을 잠시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갔다 오시오. 오늘은... 왠 지 본당의 지도와 영령에 전혀 기가 통하지 않... 아서." 노파에게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들던 팔괘문양의 사내의 시선이 들어오 던 자천릉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찰나 사내가 갑자기 전신을 벼락 이라도 맞은 듯 격렬하게 떨었다. "하, 할멈! 이 손님께서는?" "흠, 어떤 사람의 정체를 알고 싶다는 공자님이라우." 그러자 사내가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본... 당은... 지금 왠지 신기가 막혀 물주님의 청신을 받을 수 없소! 믿 지 못하신다면... 알고 싶은 사람의 특징만 설명해 주시고 다음에 오시 오." 순간 자천릉의 눈빛에 녹광이 반짝 빛나며 그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알고 싶은 것은 바로 본인의 정체다." 찰나 사내의 눈이 휩뜨여졌다. "헉! 그, 그대의 눈은, 만황!" 사내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그대로 방바닥에 거꾸러졌다. 그리고는 몇 차례 세차게 몸을 떨더니 이내 그나 마의 움직임도 멈추어지고 있었다. 노파는 돌연한 사태에 당황을 금치 못하는 것 같았다. "아, 아, 이게 무슨 빌어먹을 짓이야! 손님이 왔는데 엎어지다니." 그러자 자천릉이 싸늘하게 노파의 말을 받았다. "그는 죽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넘어진 것이다." "주, 죽었다고? 부당주가?" 자천릉이 차가운 시선으로 노파를 보았다. "할멈. 그는 기가 약한 것 같다. 다른 자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 노파의 몸이 돌연 얼음으로 가둔 듯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으음! 저 눈... 거역할 수가 없다! 흡사 본파(本坡)에서 신으로 추대하는 만신들의 제황인 만황의 눈을 직접 보는 것 같다!' 노파의 얼굴에 당혹과 놀람 그리고 공포가 새파랗게 엇갈리는 것을 보며 자천릉은 내심 나직한 뇌까림을 흘리고 있었다. '나도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왜 이자는 갑자기 죽는 것인가? 분명 손 을 대지 않았을 뿐더러 다만 혹시하는 기대에서 같이 쳐다봤을 뿐인데.' 그의 눈에 잔잔한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흡사 전신 혈관 속의 피가 끝없이 흔들리 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언젠가 황금만루를 볼 때와도 같은... 아니 그때 보다 조금은 미약한 느낌이다. 허나 점점 느낌은 강해져 오고 있다!' 그때 노파가 무엇엔가 홀리기라도 한 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한 옆에 있는 붉은 옻칠이 된 문을 밀었다. "공, 공자님, 이곳으로 드시...." "의령낭(醫寧廊)이라, 매당파에서는 병자도 다 치료하는가?" 자천릉이 붉은 옻문 위에 걸린 현판을 보며 담담하게 묻자 노파가 문을 완전히 열며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의령낭의 주인은 저희 파의 총령관(總靈官)으로서 신의 손 을 대신 하는 분입니다. 칼이나 가위를 대지 않고도 활수술(活手術)을 하 는 영험이 그분의 손에 들어 있습니다." "귀령의(鬼靈醫) 무하마수(無瑕魔 ) 가불(可拂)을 말하는 것이군." "어, 어찌 총관의 이름을?" "아는 수가 있지." 자천릉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천년무림문헌통고의 녹찰편 무관장 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던 것이다. <귀령의 무하마수 가불. 타고난 심령의 힘으로 칼을 대지 않고 인간의 살을 가르는 시술을 한다 하여 악마의 의생이라는 별칭을 얻고 중원에서 쫓겨난 인물. 인체 속의 환부를 손으로 끄집어내고도 한 점의 티를 남기 지 않는다는 뜻으로 무하마수라 불리며 후에 육천마을 중 매당파에 들어 가지 않았나 추측됨.> "지, 지금 집령 중인 것 같은데 보시지요." 자천릉은 노파의 손짓을 따라 붉은 옻칠을 한 문의 안쪽을 둘러 보았다. 두 개의 귀면석등(鬼面石燈)이 세워진 사이에 흰 천으로 덮인 석대 하나 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한 전라의 여인이 죽은 듯 누워 있었다. 그리고 여인의 주위에는 부모인 듯한 사십 대 중년부부가 일견키에도 지 극히 화려해 보이는 금포를 입고 선 채 한 곳을 초조히 바라보고 있었으 며 중년부부의 시선을 받는 곳에는 흑포를 걸친 깡마른 육순의 노인이 무어라고 주문을 뇌까리며 양손을 허공에 치켜 올리고 있었다. "오흠, 바흐라, 육계사하라, 오흠마니, 흠." 석등의 불그스레한 불빛 아래 노인이 외는 주문소리가 음산하게 고조되 는 찰나 노인의 손이 허공을 훑으며 그대로 여인의 하얀 복부를 파고들 었다. 다시 들어올려지는 노인의 손에는 시뻘건 살덩어리가 들려 있었는 데 놀랍게도 여인의 배에는 한 올의 상처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 천, 천의시다! 어찌 칼을 쓰지 않고 종양을, 그것도 상처 한 점없이 꺼낼 수 있다는 말인가!" "부, 부군! 이제, 이제 우리 딸이 살았어요!" 지켜보던 중년 부부의 입에서 희열과 격동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헌데 그때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귀를 때렸다. "훗! 눈속임이군." 자천릉이었다. "눈, 속임?" 육순사내, 귀령의 무하마수 가불이 홱 고개를 돌려 자천릉을 노려 보았 다. 그러자 자천릉의 눈이 싸늘하게 가늘어졌다. "그래 본인이 눈속임이라고 그랬다." 순간 가불의 전신에 불구덩이에 던져진 듯한 전율이 피어났다. "그, 그대는 누구? 헉! 만, 만황이... 친히... 강림을." 쾅! 그의 신형도 팔괘사무 묘여생과 똑같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또, 또! 이번에는 총령관까지!" 노파가 입에 개거품을 물며 대경실색하여 외치는 그때였다. 가불이 쓰러진 채 전신을 무섭도록 경련하며 자천릉을 향해 앓는 짐승의 신음같은 뇌까림을 흘렸다. "이... 천한 종... 만황께서 납심을 모르고... 영접하지 못한 죄... 죽... 죽어 마땅... 허나, 허나... 어쩔 수 없... 먹고 살기 위해서는... 헌데... 왜... 이 천 한 종을 죽이시는 것...." 자천릉이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죽는 죄는 하나 뿐이다. 너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백마서열 구 십 이 위에 있는 신무자(神巫者) 제석혈혼(帝釋血魂) 계축(癸丑)의 수하, 따라서 간접적으로나마 본인을 적대시 해 왔기 때문이다." "크으, 그, 그랬었...." 무하마수 가불의 고개가 옆으로 꺾어졌다. 당혹과 격동, 그리고 충격으로 얼룩진 눈을 찢어지도록 부릅뜬 채 죽은 것이다. 이때 유등을 든 노파는 파랗게 질린 채 연신 자천릉을 훑어보며 뭔가 생 각에 잠기고 있었다. '분, 분명 부당주도 총령관도 이분 공자를 만황이라고 불렀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일순 노파의 주름투성이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스쳐갔다. '본파에서 신으로 추앙하는 만황이 인간으로 화하여 세상에 내려 왔단 말인가? 어서, 어서 당주께 알려야 한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그때 자천릉이 노파의 어깨를 툭 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할멈. 이자들은 틀렸다. 직접 신무자 제석혈혼 계축에게로 가자." "헉! 공, 공자님께서 당주님까지 알고 계셨읍니까?" "훗, 그자의 이력서를 읽어 보았을 뿐이지. 뭐 백마서열 구십 이 위라던 가, 그렇지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