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황(卍皇) 1 - 30편 (30/50)
"자형, 그대의 죽음은 명사의 한 편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오." 황제의 손에 펼쳐진 두루마리의 위에서 <천세미륵>이라는 네글씨가 천 천히 지워지고 있었다. "소림의 천세미륵, 이자는 너무 나이가 많아 대업을 맡기에는 부적합하 다. 부나비도의 천치의성은 부나비도에서 움직이려 하지 않는 자이고." 황제는 자륭극의 이름까지 지운 후 그 아래 적혀진 인물들의 이름을 하 나하나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헌데 흘러나오는 인물들의 명호가 정녕 가공스럽지 않은가. 바로 천하칠패쟁비록에 적혀 있던 칠 인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 다. "초왕사성의 뇌도 신농궁에게 대업을 맡긴다면 이리에게 호랑이를 죽이 라고 말하는 격. 흠, 대막의 신기루 달그림자라, 이자는 정체가 전혀 밝 혀져 있지 않아 위험하다. 그리고, 흠! 벌써 마지막 인물인가." 황제가 나직하게 뇌까리며 두루마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헌데 황제가 한 명 한 명 분석하며 낙점을 찍어 놓은 두루마리의 최하단 을 보라. 유일하게 아직 낙점이 찍혀 있지 않은 한 사람의 이름이 있었 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자천릉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가? 황제는 천천히 붓을 들어 자천릉의 이름 위에 동그라미를 쳤다. 순간 천 일매의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폐, 폐하! 그 아이는 비록 자대인의 아들이나 현재 십팔만사천백와마루 의 서열 일백 육 위에 올라 있는 위험한...." "짐은 자대인을 믿는다." 황제의 담담한 음성이 천일매의 말을 잘랐다. "자륭극은 결코 무책임하게 곤오풍우에게 쓰러질 사람이 아니다. 그가 세상을 떴다면 틀림없이 이 세상에 치밀한 안배를 깔아 두고 갔을 것이 다." 천일매의 음성이 끊어졌다. "그의 안배는 유일한 아들인 천릉의 앞길에 당연히 마련되어 있을 터, 짐 이 자륭극을 믿는 한 그의 아들 또한 믿는다. 설사 지금은 십팔만사천백 와마루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 "천일매. 향후 제 이의 성역을 무너뜨려야 할 사명을 천릉의 어깨 위에 내리겠다." "천명!" 황제의 손에 들려 있던 두루마리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황제는 천일매가 자신의 명을 받고 떠나가고 있음을 느끼며 천천히 어둠 속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때 커다란 떡갈나무잎 위에 영롱하게 매달린 자그만 이슬 한 방울이 황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헌데 그 작은 이슬방울 속에 십오야의 하늘 위에 있어야 할 만월이 또렷하게 떠 있지 않은가. 황제의 입에서 언뜻 희미한 미소가 스치는가 싶었다. 다음 순간 황제의 손에서 종이부채의 살 하나가 화살처럼 쏘아지며 이슬 속의 달 한 가운 데에 그대로 꽂히고 있었다. 찰나 달이 몸을 떨고 있었다. 부채살에 꽂힌 떡갈나무잎 속의 이슬 속의 달이 단발마의 전율을 일으키며 죽어가고 있었다. ④ 대곤륜의 품 속, 백마성의 태사의 위에서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위대 한 주인 곤오풍우가 일천 무인들을 향해 싸늘한 음성을 토하고 있었다. "먼저 본좌의 좌수 장포가 비어 있는 이유부터 설명하겠다." 곤오풍우의 화살같은 눈빛은 천천히 좌중의 인물들에게 차례로 꽂히고 있었다. "사 년 전, 천년관부제일고수라는 자륭극이 본좌에게 도전해 왔다. 물론 그는 이십 사 시진 후 본좌의 만세검(萬世劍)에 의해 죽었다. 그의 여왕 은산이 본좌의 좌수를 베어가는 것으로 지옥의 동반자를 대신한 채." "오! 자륭극, 천세의 불가사의라는 그가 태대각께 도전했다 죽었단 말인 가?" "뜻밖이군. 누구도 알지 못했거늘, 언제 그런...." 장내에 일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곤오풍우는 좌중이 다시 조용해지기 를 기다려 천천히 우수를 치켜들었다. "강자가 강자를 찾아 도전하는 것은 무인의 당연한 본능이기에 본좌는 그의 도전을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허나 본좌는 한 가지 사실에 깊은 의혹을 느꼈다." 장내는 조용해졌다. "자륭극은 관부의 무인. 그런 그가 승산이 서지 않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곧이 본좌에게 도전해 올 이유가 과연 있는가?" 장내에 긴장이 돌았다. "없다. 그는 스스로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의 배후에서 그에 게 나를 죽일 것을 명했을 것이다. 허면 누가 자륭극이라는 거인의 배후 가 될 자격이 있는가?" 곤오풍우의 물음이 떨어지는 순간 장내에는 거센 술렁임이 일어났다. "자륭극. 그자는 대명성조개국공신이자 영락제의 지기다. 그렇다면?" "영락제, 영락제다!" "크ㅋ, 황실에서 본루에 싸움을 걸다니." 곤오풍우의 음성이 얼음조각처럼 부서지며 중인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박 혀들었다. "그렇다. 세살박이 꼬마라도 간단히 짐작할 수 있는 당금 황조의 주인 영락제다. 허면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지 않은가? 자금성과 본 루간에 삼천 년 동안 이어져 오던 불가침의 불문율을 영락제가 깨뜨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삼천 년 동안 역사를 떠받드는 두 개의 축으로 이어내려온 두 개의 성 역. 아니 중원천하 위로 부침해 온 본사(本史)의 전통과 야사(野史)의 신 화가 마침내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었다. "허나 본좌는 스스로의 손으로 직접 세우다시피한 대명의 신민으로 결코 대명황조의 정통성에 반역하려는 뜻을 품고 있지는 않다. 다만 경고할 뿐!" 장내는 숨을 죽이고 곤오풍우의 일장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영락제가 제 이의 성역을 눈의 가시처럼 여겨 왔듯 무림에도 연사와 총 정 대관과 집상등과 같이 본루를 향해 끊임없이 칼을 갈아 온 세력들이 있다. 그들을 응징함으로써 본좌는 영락제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본 루를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가를!" - 무림을 응징함으로써 천하를 향해 경고하리라. "오오, 이 말의 의미는!" "드디어 백마의 제 삼차 천하출병의 때가 도래했단 말인가!" 중인들의 입에서 폭풍 직전 바다의 웅얼거림처럼 숨막히는 술렁임이 흘 러나오는 그때 곤오풍우의 마지막 한 마디가 천둥소리처럼 중인들의 귓 전을 때렸다. "해서 본좌는 천하에 경고하는 우리의 역사적 결정을 최종적으로 심의하 기 위해 이 자리에서 십왕벌을 개정할 것을 선포한다!" 제19장 십왕전쟁(十王戰爭) ① 귀주성 귀주대평원. 대륙의 남쪽, 어둠에 잠긴 신록이 을씨년스런 곡성으로 바람에 휩쓸리고 있는 이 광활한 녹원의 밤하늘 위에도 보름달은 파랗게 떠 있었다. 그리고 팔월 십오야의 그 푸른 달빛은 대평원 한 가운데 웅장하게 자리 하고 있는 한 거대한 토성의 모습을 싸늘하게 비추고 있었다. 초패왕 항우가 백만의 한군을 십만필마로 무찔렀다는 역사의 성채 초왕 벽(楚王壁)이었다. 서럽도록 푸른 달빛 탓일까? 영웅의 슬픈 역사를 간직 한 초왕벽의 성채는 왠지 말할 수 없이 고즈녁한 쓸쓸함을 자아내고 있 었다. "본녀가 이렇게 다시 본성의 여섯 수뇌들이 모이는 육사합회(六邪合會) 를 소집한 것은 지난 번에 본녀가 제출했던 의제 때문입니다." 느닷없이 스산한 밤공기를 깨며 냉기어린 교성이 울려퍼졌다. 헌데 육사 합회라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백마회의와 더불어 중원에 가장 잘 알려 진 회의로 천하에서 두 번째의 단체인 초왕사성의 성주를 비롯한 다섯 수뇌가 모이는 최고연석회의를 말함이 아닌가? 그렇다. 초패왕의 슬픈 역사가 숨쉬고 있는 초왕벽이야말로 연사의 총두 (總頭)인 초왕사성의 총단이었던 것이다. 이때 예의 싸늘한 교성이 다시 어둠을 흔들어 놓았다. "그 의제와 표결은 삼대삼(三對三)으로 끝났었습니다. 헌데 오늘 제가 본 성의 성칙이 기록된 사성법전(四聖法典)을 열람한 결과 유사동회에서 가 부동수가 됐을 때는 성주의 마지막 재가로써 의제의 가부가 결정되게 되 어 있었습니다." 교성이 들리는 곳은 바로 초왕벽의 성루 위였다. 그곳에는 지금 보름달 아래 오남일녀가 하나씩 술잔을 앞에 놓은 채 둥글게 정좌하고 있었다. 가슴에 모두 <楚>자가 수놓아져 있는 그들 육 인의 표정은 왠지 심각하 게 느껴졌다. 교성을 터뜨린 여인이 천천히 자신의 맞은편에 시커먼 도 를 차고 앉은 무섭도록 강인한 기질의 오십 대 흑포사내를 직시하며 입 을 열었다. "이제, 성주께서 결정하시지요." 흑포사내는 묵묵부답이었다. 바위처럼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헌데 지 금 자르듯 단호히 교성을 내뱉은 여인은 언젠가 자천릉이 처음 중원에 닿아 요미옥에서 죽음의 요리를 선보였을 때 의미심장한 뇌까림을 남기 며 자천릉을 직시하던 바로 여왕접 칠지요시 희설기가 아닌가? 헌데 이때 월광이 비치는 밤하늘로 수십 줄기 불덩이가 폭죽처럼 솟구쳐 올랐다. "천통사탄(天通射彈)이?" 희설기의 요사한 눈매에 이채가 스치고 중인들의 시선도 일제히 허공에 꽂히는 순간 불꽃들이 다시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키며 암천에 글자를 형 성에 가기 시작했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서 백마회의 개최. 황실에의 경고를 구실로 전 무 림을 쓸어버리기로 결의.> "헛!" "으음!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마인들이 다시 강호에 나오려 한단 말인 가?" <백마회의 폐함과 동시에 십왕벌을 개정. 목하 진행 중.> "호호호! 곤오풍우, 그자가 너무 오래 하늘의 삼분지 이를 이고 있더니 드디어 미쳐 버렸군요. 십왕벌을 연다는 것은 곧 피의 선택을 통해 후계 자를 결정하겠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무슨 말인가. 십왕벌이 열리면 피의 선택으로 후계자를 결정한다니? 희 설기가 알 수 없는 말을 뇌까리자 음침한 모사의 눈빛을 가진 사십 대의 노인이 고개를 무겁게 저었다. "도대체 곤오풍우가 미친 것인지 아니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지 모 를 일이군. 백마를 강호에 내보내 천하를 쓸고 그 와중을 이용해 후계자 를 선정한다는 것이 말이오." 그 순간 희설기가 시커먼 도를 찬 노인을 향해 재차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성주. 이제 결정하시지요. 무려 이천 오백 년 동안 매일처럼 천 하의 두 번째 단체이기만 했던 본성을 신께서 긍휼히 여기사 기회를 주 신 듯 하지 않나요?" 흑포사내의 바위같은 침묵이 처음으로 깨어지며 육중한 음성이 흘러나왔 다. "흠, 결정이고 뭐고 가 어디 있겠소? 이천 오백 년만에 단 한 번 찾아온 기회인데 당연히 잡아야겠지." 희설기의 양편에 앉아 있던 비교적 젊은 두 사내가 격동을 일으키며 부 복하였다. "천명!" "현안이십니다." 꽃뱀의 웃음처럼 요기가 뚝뚝 떨어지는 교소가 희설기의 입술사이에서 터져나왔다. "호호호, 성주님의 명철하신 판단으로 오늘 이후 본성은 대곤륜산맥의 한 가운데에 총단을 두게 될 것입니다!" 헌데 이때 한 옆에서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웅크리고 있던 지독히도 왜 소한 한 사내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후후, 나 망월적과 나의 아우 망우가 천광무급을 익히고 이 초왕사성에 들어온 지도 꼭 십 육 년째 인가." 사내는 분명 망월적이라 말하고 있었다. 기억하지 않는가. 언젠가 북경에 서 새 자금성을 축조하는 대역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새벽안개 속에서 천의문자가 새겨진 바위를 읽으며 통한과 격동의 절규를 토해내던 한 난 장이를. 헌데 거구 아우의 등에 업혀 터벅터벅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던 그 망윌 적이라는 사내가 바로 이곳 초왕사성에 나타나 있었을 줄이야. 망월적의 음성은 그 언젠가의 절규처럼 무섭도록 고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술예벌을 떠난 지 십 육 년, 필사의 노력으로 초왕사성의 오대번주 (五大藩主)중 두 번째 번주인 초왕제이번주(楚王第二藩主)의 지위를 얻고 초성제일뇌 흡혈고군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 초성제일뇌(楚城第一腦) 흡혈고군(吸血蠱君) 망월적! 지독히도 명석한 두뇌와 잔인한 손속 그리고 인간의 뼈 속까지 빨아먹는 고(蠱)의 대가. 초왕사성의 사람들은 이 사내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헌데 그가 바로 육천마을 중 장인의 마을인 술예벌 출신의 인물이었던 가. "이제 바로 내일부터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와 본성을 통합한 삼인자의 의자에 앉아 있으리라." 씹어 뱉듯 뇌까리는 그의 시선 속에 문득 자신의 한 가운데 소담스럽게 떠 있는 달이 비쳐졌다. "ㅋ! 지난 삼천 년 동안 십팔만사천백와마루는 중원천하에서 이 보름달 처럼 빛났었지. 허나." 툭! 뭔가 술잔 속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팔십 개의 발이 달린 한 마리 고(蠱) 였다. 벌레는 찰랑이는 호박빛 술 위를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었다. 흡 사 잔 속에 뜬 보름달을 파먹고 있는 듯이. ② 사막의 밤은 지독히도 추웠다. 미친 듯한 모래바람까지 밤하늘을 휘감듯 하고 있는 사막 위에도 팔월 대보름의 달빛은 어김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폭풍처럼 사나운 그 모래바람 속에서 섬ㅉ하도록 구슬픈 한 줄기 노래가 또렷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어디로 갈꺼나 어디로 갈꺼나, 고향을 찾아서 어디로 갈꺼나....> 노래가 울리고 있는 곳은 모래바람에 휩싸인 허공이었다. 헌데 대곤륜의 십만철로가 이곳까지 뻗어 와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 텅빈 허공을 가로 지르며 굵은 동아줄 하나가 끝도 없이 아득하게 걸쳐져 있지 않은가. 아 니 십만철로는 결코 아니었다. 시작도 끝도 줄을 잇는 푯대도 지탱해 주 는 기둥 하나도 없이 줄은 그저 허공에 걸쳐져 있을 뿐이었다. <흰 구름 따라... 내일은 어디로... 달빛을 쫓아... 고향에 찾아간다.> 줄 위에는 한 사내가 귀면탈을 쓴 얼굴에 달빛을 반사하며 재주를 넘고 있었다. 헌데 귀면탈을 쓰고 사막의 허공에서 줄을 타고 있다면 혹시 이 사내가 천하칠패쟁비록에 기록된 달그림자가 아닐까? <이 줄을 건너도 내 쉴 곳은 아니요... 저 산을 넘어도 머물 곳은 없어 라. 내 고향 천재촌에 희게 필 박꽃 찾아 달빛을 쫓아 고향 찾아간다.> 폐부를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구슬픈 사내의 노래는 분명 육천마을 중 광대의 마을 천재촌을 가리켜 부르고 있었다. 헌데 줄이 걸쳐져 있는 아 래의 사막 위에는 수백 마리의 낙타떼와 그 낙타떼를 에워싼 수만 명의 인물들이 경배하듯 부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의 노래가 모래바람을 뚫을 듯 한없이 고조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뜨거운 음 성을 터뜨렸다. "합하! 때가 왔나이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가 정식으로 천하를 향해 선전 포고를 하기 위해 십왕벌을 개최하고 있나이다!" 순간 노래소리가 뚝 끊어지고 돌연 모래바람보다도 삭막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그럼 가서 부셔줘야지." 돌연 사내의 몸이 재주 넘던 자세 그대로 위로 퉁겨졌다. "가자! 벗들이여!" 슈파앗! 사내는 순식간에 만월의 원 안으로 아득하게 사라졌다. 두두두두! 동시에 수많은 인파를 실은 낙타떼가 사막을 박차고 달려가고 있었다. ② 곤마대고원의 하늘 아래 백마성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놀라게 혹 은 격동하게 했던 십왕벌이 개최되고 있었다. 벌떡! 원탁에 정좌해 있던 백마 중 구십을 헤아리는 인물들이 숙연한 안색으로 일어서며 썰물 빠지듯 후미로 물러서고 있었다. 드넓은 원탁에 드문드문 앉아 있는 것은 자색 적룡포를 걸친 십왕들 뿐 이었다. 백마회의에서 십왕벌의 개정으로 이어진 장내의 분위기는 더없이 엄숙하 게 침전되고 있었다. 이때 곤오풍우가 천천히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대들은 알고 있으리라. 십왕벌의 개정이 가지는 의미를." 십왕들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본루가 세워진 지 삼천 년,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십왕벌이 열린 것은 단 두 번 뿐이었다. 첫 번째는 전국시대 제 이십 육 대 태대각에 의해 두 번째는 대원말엽 바로 본좌에 의해. 헌데 겨우 삼십 년이 지난 오늘 본 좌가 다시 십왕벌을 개정함은 전국시대 제 이십 육 대 태대각께서 십왕 벌을 열어야 했던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허, 허면, 후계자를?" "오! 차기 태대각을 선출하려 하시는 것이오이까?" 중인들의 입에서 충격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나왔다. 곤오풍우의 음성은 더욱 싸늘한 무심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바로 그렇다. 본루의 기강과 율법을 기록한 대곤륜구백율례통편(大崑崙 九百律例統編)에 규정되어 있는 바대로 본좌는 이번 제삼차 십왕벌에서 강호진출과 함께 차기 태대각의 선출에 관한 건(件)을 선포하고자 한다." 중인들의 얼굴에 또 한 번 아연 경악의 물결이 스쳐갔다. 이 때 아홉 번 째의 자리에 앉아 있는 주희빈의 눈에는 뜨거운 격정의 파랑이 굽이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다! 남아로 태어나 여인을 가장하는 수치를 감내 하면서 까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던 나의 그 처절했던 한의 세월을 갚음할 기 회가!' 주희빈의 얼굴이 붉게 상기 되었다. '내가 본루에 입루한 이래 십왕 서열 구 위라는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고 인내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본루 의 율법이 규정하는 태대각의 자격은 바로 십왕이었던 것이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기강과 율법을 집대성한 대곤륜구백율례통편에는 십왕에 대해 이렇게 기록된다. <십왕이라 함은 백마 중 서열 일 위부터 십 위까지의 자(者)를 가리키며 당대 태대각을 제외한 십왕 중의 구 인은 태대각이 직접 정하는 태대각 의 계승권자가 없을 때 차기 태대각이 결정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다. ... 중략.... 또한 당대 태대각이 차기 태대각의 계승권자를 결정할 어떤 방법을 제정 하고자 십왕을 소집해 그를 발표하는 회의를 십왕벌이라 칭한다.> "그대들도 익히 알고 있듯이 후계자 선출 방법을 제정하는 것은 본루의 최고수뇌인 태대각의 전권(全權)이다. 그대들 중 본루의 모든 제자들을 강호에 나가게 명하는 이 자리에서 또 후계자 결정이라는 중대사를 선포 하는데 대해 의문을 품는 자도 있을 것이다." 곤오풍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나 또 한 번 강조한다. 차기 태대각이 될 자를 결정하는 방법의 제정 은, 즉 제 사십 이 대 본루의 최고수뇌를 정하는 일은 본좌 곤오풍우의 전권이다." 곤오풍우의 불길같은 음성이 중인들의 가슴에 화염을 작렬시키고 있었 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주희빈은 곤오풍우가 스스로 말해 버린 의문을 냉정하게 분석해 보고 있 었다. '분명 태대각이 십왕벌을 여는 것은 갑자기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오래 도록 생각한 후 내린 결정일 터, 헌데 특히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저 냉 정한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뭔가 거대한 흑막이 있는 듯한 불길한 예감 이 자꾸만 든다. 뭔가 거대한 흑막이!' 허나 주희빈은 곧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내심의 의혹들을 떨어 버렸다. '하지만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우선 십왕 중 팔 인을 죽이고 차기 태 대각이 되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때 곤오풍우가 천천히 일어섰다. "내일 본루의 전 제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강호에 출도한다. 소위 세 인들이 말하는 십왕들의 전쟁은 바로 그때부터이다." 그그그긍! 태사의 뒤의 석벽이 다시 굉음과 함께 열려졌다. "끝으로 여러분 십왕들의 전도(前途)에 모두 행운이 깃들기를 빈다. 허나 명심하라! 태대각이 거하는 집무전에는 단 한 사람의 엉덩이에 꼭 맞게 만들어진 의자 하나만이 놓여져있을 뿐임을." 곤오풍우의 패도적인 뒷모습은 천천히 석벽 너머로 사라지고 다시 석벽 이 닫혔다. 그와 함께 십왕과 백마 그리고 대곤륜일천무성좌의 나머지 인물들도 하 나 둘 백마성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헌데 정녕 무서운 일이 아닌가.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칠십 이만 정예가 송두리째 강호에 쏟아져 나오는 것도 가공스러운 일 일진데 그 와중에서 하나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십왕이 쟁투를 벌이기 시작한다면 실로 전율 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율법에 기록된 공인된 후계자싸움이자 천하인들의 입에서 전쟁이라고까지 칭해지는 죽음의 소용돌이가 이제 바야흐로 천하 를 향해 휘몰아쳐 가고 있는 것이었다. 모두가 자리를 뜨고 폐허처럼 비어있는 백마성에서 자천릉은 홀로 남아 빈 그릇을 치우며 이 격정의 흔적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자천릉 은 곤오풍우가 불길을 토하던 거대한 태사의 앞에 멈추어 섰다. "후후후, 백마를 죽이기 싫어도 죽일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곤오풍우 의 말은 바로 이 결과를 가리키는 것이었군." 그때 곤오풍우가 북해빙면을 먹고 난 빈 그릇이 자천릉의 시야에 들어왔 다. 묘하게도 국물만이 찰랑이는 그 그릇 위에 대보름의 휘황한 만월이 함초롬히 떠 있었다. 열어젖힌 창과 출구를 통해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 고 있는 것이었다. "후후, 국물을 남겼군. 너는 아버님의 주검을 내려다 보며 이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겠지. 이제 그 웃는 얼굴은 이렇게 될 것이다." 와삭! 자천릉의 손이 북해빙면의 빈 그릇을 그대로 손아귀에 우그러뜨려 버렸 다. ③ 가을이 바로 곁에서 기다리고 있는 오늘 중원의 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또 푸르렀다. 그러나 대곤륜산맥의 짙푸른 하늘에서 시작된 한 줄기 뇌 전(雷電)에 무림은 참혹한 공포와 전율로 송두리째 뒤집히고 있었다. -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성문이 열리다! 십왕과 백마를 비롯한 일천 개 의 찬란한 별들이 천하의 땅에 쏟아져 내리다! 여름이 끝나가는 이 가을의 문턱에 내리 꽂히고 만 그 무서운 뇌전의 원 인은 무엇 때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