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황(卍皇) 1 - 28편 (28/50)
'허! 이 새로 부임한 부방주는 정말 특이한 사람이야. 비록 방주와 부방 주가 천요만방의 책임자로서 항상 부임해 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무인인 탓에 그저 한 달에 한 번 형식적으로 들러보는 것이 관례가 아니던가? 헌데 이 사람은 부임 첫날부터 지금까지 무려 사흘을 이 주방에서 떠나 지 않고 저렇게 뭔가를 만들기만 하고 있으니, 마치 요리에 미친 사람처 럼 말이야.' 그때 부방주라는 사내는 노인이 보이지도 않는 듯 계속 무엇인가를 저울 에 달며 때로는 썰고 때로는 담고 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잠시 사내의 그런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노인의 눈에 다시 감탄의 빛 과 함께 곤혹스런 표정이 빠르게 스쳐갔다. '내가 이 천요만방에 들어와서 이제 총관을 맞기까지 무려 오십 칠 년 동안 수천 명의 방주와 부방주를 맞았다. 허나 이렇게 직접 요리를 만드 는 사람은 처음이다. 아니 이토록 몰아지경에 빠져 요리에 심취해 있는 사람은 또 처음이다.' 그는 도마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재료들을 보았다. '허허, 처음 보는 것이 많아 이해하기도 힘들군. 음식 만드는 것을 무슨 도를 닦듯하니, 허, 참!' 그는 바로 자천릉이었다. 그의 첫 임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헌데 그는 괴이하게도 앞치마를 두른 채 사흘 밤낮을 미친 듯이 요리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자천릉이 또다시 저울에 무엇인가를 달자 노인이 궁금증을 못 참겠 다는 듯 헛기침을 터뜨렸다. "흠흠, 부방주님. 무엇을 그리 열심히 저울에 달고 계십니까?" 그러자 자천릉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물일세." "예? 물... 이라니요?" "그저 평범한 물이란 말이네. 이번에는 술을 한 번 담궈볼까 해서." "아니 술을 담그면서 웬 물을 저울에 달고 계십니까? 얼마나 대단한 술 을 담그려 하시길래?" "대단한 술은 아닐세. 그저 죽엽청 정도지." "허어, 참! 겨우 죽엽청을 담그시면서 대충 물을 붓지 않으시고 그렇 게...." 노인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허나 그 음성은 미처 끝까지 이어질 수가 없었다. 자천릉이 술을 만들던 손길을 뚝 멈추며 노인의 얼 굴을 차갑게 쏘아보았던 것이다. "그대는 이 천요만방에 몸을 담은지 얼마나 됐나?" "예? 아, 약 오륙 십 년쯤, 헌데 왜...?" 노인은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천릉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배웠군. 하지만 오늘부터 새로 요리와 술 담그는 법을 배우게." "옛?" "그대는 음식에 대한 기초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 그리고 내일부터는 구노파와 자네의 직위를 맞바꾸게." "예? 아, 아니 부방주님! 그 무슨 말씀을... 구노파는 겨우 소면을 만드는 조의 일개 조원에 불과하거늘." 자천릉이 차갑게 노인의 음성을 잘랐다. "자네같이 주먹구구식으로 대충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를 본루의 최고수 뇌들이 먹는 음식만을 취급하는 본 천요만방의 총관에 둔다는 것은 자존 심이 상하는 일이네." 노인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갔다. "하, 하지만, 요리란 오랜 경륜과 경험으로써 이루어지는... " "물론이네. 오랜 경험도 필요하지. 하지만 진지한 연구자세가 없다면 오 랫동안 곪고 있는 종기를 그냥 두고 보는 결과만 초래될 뿐이네." 자천릉은 저울을 내려놓고 밀가루를 물에 이겨 반죽을 만들기 시작하며 계속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만두 속이나 물국수 정도는 자네처럼 만들면 되지. 자네는 구노파 의 지위를 맡지 말고 사소이(司少二)와 함께 만두 속을 만들게." "윽." "그리고 그 수염을 깎지 않으면 내일부터 아마 돼지 밥을 주게 될 걸세." "이, 이 수염은 왜 또?" "처음부터 그대는 우리 천요만방에 있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네. 음식을 만드는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청결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 니." 노인의 얼굴에 경련이 일고 있었다. "안되겠어. 그대에게 돼지밥을 맡긴다면 돼지들이 모두 체할 테니 그대 는 천요만방 주위의 풀이나 뽑는 것이 좋겠군." 노인의 얼굴에서 핏기가 깨끗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그렇구나! 부방주는 흡사 결벽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전신을 완전히 백의로 가리고 있거늘 나는 멋도 없는 수염만 달고 있었 으니!' 그때 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녹찰 부속 태사호령단(太使號令團)의 제 일백 칠십 칠 사령(使令) 악해 소(岳海小)가 천요만방의 부방주님을 뵙습니다!" 황포를 걸친 사십 대 사내가 급히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태사호령단. 태대각계 감찰조직인 녹찰에 부속된 의사전달기관이며 유사시에는 천하 를 종횡하는 첨단의 밀정조직으로 화하는 곳이다. 악해소라는 사내는 무슨 일인지 구레나룻을 기른 강인해 보이는 얼굴에 하나가득 다급한 기색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천릉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뵙는 것은 좋다. 허나 너는 앞으로 이 천요만방에 들어올 때 목욕을 해 서 그 땀 냄새와 썩은 악취를 제거하고 전신을 흰 장의로 싼 연후에 들 어오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본방의 정문 십 장 밖에서 보고하고 그것 도 싫다면 너의 그 땀과 때가 덕지덕지한 손과 발을 잘라 주겠다." 악해소가 깜짝 놀라며 입을 딱 벌렸다. 자천릉의 음성이 또 한 번 그의 귓전을 때렸다. "양치질도 최소한 여섯 번은 해야겠고." 악해소는 난색을 떠올리며 자천릉을 쳐다보았다. "저, 저...." "뭐냐? 빨리 말해라. 너의 입에서 나는 구린내가 내가 만들 귀한 요리에 닿기 전에!" "예옛! 한 시진 후 지엄하신 백마께서 모이는 회합이 백마성에서 있을 예정이오니, 부방주께서는 입성하시어 회의를 경청하시라는 천장원주님 의 천명이 있었습니다." "백마회의?" "그렇습니다." 대청에 있던 수백 명의 요리사들에게서 경악에 찬 탄성들이 터져 나왔 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왜 갑자기 지엄하신 백마께서 회합을?" "백, 백마회의가 열린다니!" "지난 팔십 년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거늘,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때 자천릉의 뇌리를 한 가지 생각이 섬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군. 곤오풍우가 말한 사흘 후가 바로 오늘이었지. 백마회의가 열린 다니, 그 회합에서 뭔가 발표될 모양이군. 백마가 상잔(相殘)할 만한 엄 청난 사실이!' 자천릉이 잠시 악해소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본좌는 겨우 본루 통합사열 일백 육 위에 불과한 인물, 왜 내 가 거기에 가야 하는가?" 악해소가 가볍게 미소를 떠올렸다. "예. 부방주님께서는 입루하신 지 얼마되지 않아 본루에 대해 자세히 모 르시겠지만...." "요점만 말해라. 악취가 심하다." "예? 옛!" 악해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백마회의는 위대하신 본루의 태대각의 천명이 있을 때, 혹은 백마 중 삼 분지 이의 동의가 있을 때, 본루에 관한 중대사를 논의하고자 지엄하신 백 분께서 회합하시는 것으로써 서열 일천 위 내, 즉 곤륜일천무성좌에 소속된 모든 분들이 참석하는 공개회의 입니다. 다만 일백 분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께서는 발언권이 없습니다. 그저 경청하시는 권한 밖에는." 자천릉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다음부터는 내 명을 지켜라." "천명!" 악해소는 도망이라도 가듯 황급히 걸음을 돌려 사라져 갔다. - 백마회의. 천하인들이 이른 바 악마들의 모임이라고 별칭을 붙인 그것은 십팔만사 천백와마루 내의 일백 명의 수뇌진들, 곧 백마가 모이는 거대한 회합이 었다. 이 백마회의에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서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인 대곤륜일천무성좌의 인물들이 모두 소집된다. 허나 서열 일 위부터 일백 위까지 일백 마인을 제외한 나머지 구백 인은 발언권이 없고 단지 경청하고 지켜보게 되어있는 것이 관례였다. 최근 팔십 년 이내에는 한 번도 소집된 적이 없고 구십 칠 회에 걸친 역 대의 회의에서 결정되고 수립되는 의안들은 항상 엄청나도록 중대한 비 중을 지녀왔기에 천하의 수많은 무인단체들과 만천하의 눈과 귀가 혈안 을 하고 진행 과정과 결과 등 모든 사항들을 캐내려 하는 가공할 집회가 바로 이 백마회의였다. 더욱이 백마회의가 공포스러운 점은 이곳에서 일단 결정된 사항은 천하 의 그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었다. 헌데 오늘 그 백마회의가 일 각 뒤에 열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자천릉은 묘한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 정성스럽게 밀가루를 반죽하 기 시작했다. 허나 그의 가슴 속에는 한 줄기 차디찬 상념이 스쳐가고 있었다. '길고 긴 사흘이었다. 내가 팔일오 할아범에게 요리를 배우지 않았다면 곤오풍우는 나머지 오른팔이 날아갔겠지만 나는 이미 죽어 있었을 것이 다. 허나 나는 밤낮없이 요리를 하면서 참았다. 나에게 있어서 단 한 분 뿐인 아버님의 목숨은 결코 곤오풍우, 그 한 개의 목숨과 맞바꿔질 수 없는 것이기에!' 그랬던가. 출관이후 사흘 동안 미친 듯이 요리에만 몰두하고 있던 자천 릉의 기행은 자칫 곤오풍우에게 달려들지도 모르는 자신을 처절히도 죽 이기 위한 인내와 극기의 몸부림이었단 말인가. '후후, 그 피의 대가는 십왕과 백마, 그리고 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모 든 것으로 대신 받아 낼 것이다.' 자천릉의 내심에 가라앉고 있는 이 무서운 결심으로 인하여 천하는 또 한 번 피의 혼란을 맞게 되고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둘러싼 난세의 이상 기류는 걷잡을 수 없는 죽음의 통로 속으로 그 흐름을 바꾸게 되는 것이 었으니. 이때 자천릉의 손에서 밀가루 반죽이 밧줄처럼 한 차례 빙글 돌려지며 자천릉의 표정이 더욱 무심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자, 이제부터는 이 천요만방의 부방주인 나 자천릉이 그 지엄하신 백분 어른께 신고식을 겸한 접대식을 베풀어드릴 차례다."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천하에서 가장 맛있고 훌륭한 요리가 놓인 연회를 베풀리라. 일백 어른 이 동시에 먹고 한꺼번에 돌아가셔도 모를 만큼 먹음직스런 연회를!" 자천릉은 식도로 도마를 두들기며 미친 듯이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세 인들이 어찌 알겠는가? 살인을 하기 전 요리를 해본다는 것이 자천릉의 버릇이라는 것을 말이다. ③ 곤마대고원(崑麻大高原). 대곤륜의 최고봉 곤마대산(崑麻大山)의 정상은 도끼로 허리를 끊어버린 듯 광활한 평지를 이루고 있어 곤마대고원이라 불린다. 구름 위에 광야가 펼쳐진 듯 장엄하기까지 한 그 곤마대고원의 경관 위 에 휘영청 팔월의 대보름 달이 파랗게 빛의 폭우를 쏟아붓고 있었다. 곤마대고원의 중앙에는 거대한 산정호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호수의 중앙에는 하나의 웅장한 저택(邸宅)이 웅크리고 있었 다. 높이 일백 장 넓이가 무려 오천 평, 둥근 지붕을 덮고 있는 것은 박꽃처 럼 하얗게 핀 수십만 장의 백색기와(白瓦). 그 시리도록 아름다운 백색기와의 정면에는 세로 오 장 가로 십 장에 달 하는 보라빛 자수정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현판에는 <백마성> 이라는 황금빛 글씨가 웅휘로운 위엄을 발산하며 오연하게 달빛을 받고 있다. - 백마성. 보름달빛에 파랗게 빛나는 이 환상같은 백색의 원형 저택이야말로 십팔 만사천백와마루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 백마성, 그 위대한 성채였던 것이 다. 헌데 기이하지 않은가? 지금 이 아름다운 백마성의 주위에는 푸른 달빛 보다도 더욱 차디찬 살기가 숨이 턱턱 막혀 올 듯 위압적인 공기 속에 가득차 있었다. 고원의 밤을 불타게 하는 팔월의 무더위 때문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것 은 바로 수천 종의 병장기로 완전히 무장한 채 겹겹으로 백마성을 포위 하듯 경계하고 있는 흑포무인들의 인의 장막에서 뿜어지는 위압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만월이 가장 그 빛을 떨쳐내는 팔월 십오야의 자시 정각. 웅장한 백마성 의 내성에는 수천 개의 횃불들이 햇살처럼 불붙고 있었다. 외벽과는 대 조적으로 검은 빛 대리석이 장중한 위엄을 바라며 외장(外裝)되어 있는 오천여 평의 공간. 횃불에 비쳐 보이는 흑단의 바닥 한 가운데에는 거대한 한 마리 푸른 독 수리의 문형이 수백 평에 걸쳐 부조되어 있고 그 푸른 독수리 위에는 전 자체 글귀가 전평을 가로지르며 붉은 빛으로 음각되어 있었다. <천하제일 십팔만백와마루.> <천하제일성 백마성.> 그리고 푸른 독수리의 문장이 새겨진 바닥에서 정확히 동쪽의 상단에는 작은 동산만큼이나 거대한 두 개의 황금빛 태사의가 상하로 세워져 있었 다. 아래쪽 태사의 좌우로는 엄청나게 큰 의전용 원형 탁자와 일백 석을 헤 아리는 의석들이 타원형으로 놓여져 있었으며 위쪽의 조금 작아 보이는 태사의의 좌우 또한 중형의 의석 수천 석이 원형 탁자와 일백 의석을 포 위하듯 둥글게 설치되어 있었다. 헌데 횃불만이 고요히 타는 이 웅장한 백마성의 내성은 인적이 끊어지기 라도 한 것일까? 죽음같은 침묵과 무덤 속같은 적막만이 삭막하게 가라 앉아 있지 않은가. 분명 그 일천을 헤아리는 의석 위에는 적황녹청자(赤黃綠靑紫)등 다섯 빛깔의 장포를 걸친 무인들이 언제부턴가 빠짐없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사 일천 개의 영전을 모신 납골당을 연상케 하는 칙칙한 침묵이 중인들의 얼굴 위에 내려앉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그렇게 흘렀을까? 둥둥둥! 웅장한 북소리가 침묵의 벽을 산산이 깨뜨리며 울려퍼졌다. 그리고 누군 가의 우렁찬 음성이 벼락치듯 중인들의 귓전을 때렸다. "태대각께서 드십니다!" 그그긍! 착석해 있던 중인들의 신형이 반사적으로 기립되었다. 두 개의 태사의가 놓여 있던 후면의 검은 대리석벽이 천천히 굉음과 함 께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석벽 속에서 한 명의 자포를 걸친 은발노인을 대동한 채 천천 히 걸어나오고 있는 인물은 바로 만세제일신마 곤오풍우가 아닌가. 그의 모습이 장내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천상의 하늘! 태대각(太大閣)을 뵙습니다!" 일천 명의 무인들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음성인 듯 우렁찬 대갈이 터져 나 왔다. 곤오풍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환호에 답하며 천천히 태사의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헌데 지금 가슴에 푸른 독수리 문장이 수놓아진 희디흰 전포(戰袍)를 걸 치고 붉은 곤룡의 수실을 단 설백의 패검을 비껴 찬 곤오풍우의 모습은 사흘 전 곤륜칠층봉소석탑의 오층 석전에서와는 완연히 다른 기도를 서 리서리 내뿜고 있었다. 칼날을 베어 문 듯 곧게 다문 입술에서 풍기는 냉기는 하늘이라도 두 쪽 낼 듯 결연한 의지의 빛이었다. 마주 보기만 해도 심장이 터져 버릴 듯 송곳처럼 솟구치는 눈빛과 패검 을 움켜쥔 두터운 손에서 폭사되는 살벌하도록 패도적인 기세는 흡사 십 만 기의 적군을 단신으로 참한 채 적장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가고 있는 불패전의 대원수를 연상케 했다. 육중한 위압을 뿌리며 태사의에 깊숙히 앉은 곤오풍우를 향해 집중된 중 인들의 시선에는 한결같은 의혹의 빛이 긴장 속에 은은히 떠오르고 있었 다. 그때 곤오풍우를 수행하던 은발의 자포노인이 곤오풍우가 착석한 태사의 위의 탁자에 올라섰다. 오 척 단신의 깡마른 체구였지만 누구에게도 결코 그가 왜소하다는 느낌 을 갖지 않게 하는 강렬한 인상을 지닌 노인이었다. 적어도 칠순은 넘어 보이는 나이임에도 한 점의 주름도 없이 불그레한 홍조를 띠고 있는, 전형적인 전제군주의 체취를 은발노인은 가지고 있었 다. 숙연한 자세로 탁자에 올라선 은발노인은 천천히 은빛 흑추를 들어 탁자 위를 무겁게 두드렸다. "본루의 위대한 율법이 정한 바에 따라 본로 대곤륜태조천장주 기성 백 악도도 용등택은 지엄하신 태대각의 천명을 받들어 백마를 위시한 여러 분들의 위대한 무혼을 모시고 제 구십 팔 차 백마회를 개정하는 바입니 다." 삼천 년간 단 아흔 일곱 차례 개정됐고 개정될 때마다 무수한 신화와 사 연들을 피와 주검 위에 뿌려놓았던 백마회의가 또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럼 먼저." 오늘의 의장인 용등택은 서두를 꺼내다 문득 한 곳에 시선이 굳어지며 곤오풍우를 슬쩍 바라보았다. "태대각." 곤오풍우가 알고 있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용등택의 시선은 다 시 정면의 한 사람에게 꽂혀졌다. "사대주! 만화무대의 산하단체인 천요만방의 부방주의 자리는 왜 비어 있소이까?" 용등택의 시선이 향한 원형탁자의 한 복판에는 만화왕자 주희빈이 금성 의 시립을 받으며 좌우에 신주팔흉을 거느린 채 앉아 있었다. 사 년의 연륜이 그에게 더욱 매력적인 아름다움과 노련한 중량감을 더해 준 듯 지금 주희빈의 모습은 확실히 그때보다 강하고 아름다우며 또 거 대해 보였다. 주희빈은 용등택의 물음을 받자 등 뒤의 금성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돌 렸다. "천요만방의 부방주?" "예. 그, 자천릉이 아니... 자부방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하, 그 친구가 오지 않았던가?" "예. 관례대로 전달을 했습니다만." 금성이 만면에 곤혹스런 표정을 떠올렸다. 곤오풍우가 등대하고 백마회 의가 개정되고 있는 이 마당에 서열 백 육 위에 불과한 자천릉은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백마회의의 삼천 년 의사록에 단 한 번도 기록되지 않았던 실로 불의의 사태였다. 주희빈의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더욱 화사해졌다. "흠, 그래. 그 친구는 오지 않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천요만방의 주방에 있다는 보고를 전해 들었습 니다만." "주방? 하하, 재미있군. 나보다 더 재미있는 친구야! 곤륜칠층봉소석탑에 서 출관한 자에게 천요만방의 부방주같은 하급직책을 준 태대각이나, 그 것을 서슴없이 받아들이는 친구나, 그렇지 않은가, 금성?" 놀랍게도 주희빈은 백마회의의 의장이자 천장원주이기도 한 용등택의 물 음 따위는 아예 잊어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태연히 미소하며 금성을 돌아 보고 있었다. "하하, 그래. 주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지?" "예. 자부방주는 직접 요리를 만들고 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사흘 주야 를 촌각도 쉬지않고." "하하하, 맞아, 맞아! 그 괴팍한 친구는 요리가 취미라고 했었지." 주희빈이 짐짓 유쾌한 듯 대소를 터뜨렸다. 은은한 노기가 서린 용등택 의 음성이 주희빈의 웃음소리를 끊었다. "사대주! 잊으시면 안되오 대곤륜일천무성좌에 소속해 있는 일천 인 중 그 누구도 본 백마의회에 불참할 권한은 없소!" 허나 주희빈은 더욱 고혹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상단을 향해 가볍게 목 례를 취하였다. "하하하, 원주님! 송구스러운 일이오. 하지만 그는 지금 아마도 백마성에 들어오고 있을 것이오. 천요만방의 부방주라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자 여러분께 대접할 훌륭한 요리를 준비해 들고서 말이요." 그 순간이었다. 돌연 곤오풍우와 용등택이 입장했던 석벽이 다시 열리며 백건에 흰 장의를 걸친 수십 명의 요리사들이 두 손에 황홀하리만큼 먹 음직스런 향내를 풍기는 거대한 쟁반을 받쳐 든 채 주춤주춤 걸어나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제18장 최후의 만찬(晩餐) ① 용등택이 아연 분노하여 노성을 터뜨리려다 말고 이 느닷없는 괴경에 그 만 멍청하게 굳어졌다. "저, 저희들은, 천요만방의 주방에 있는 제자들입니다...." "부, 부방주님께서 이곳으로 북해빙면을...." 주춤거리던 요리사들은 용등택의 시선에서 폭사되는 무서운 살기에 벌벌 떨며 미처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때 역 시 백건을 쓰고 백포를 걸친 자천릉이 요리사들 사이에서 느긋하게 걸어 나오며 곤오풍우를 향해 포권했다. "태대각! 제자 천요만방의 부방주 자천릉, 위대하신 백마께 더위를 식혀 드리고자 북해빙면을 만드느라 늦었습니다." "수고했다." 진노해야 할 곤오풍우의 입가에 오히려 기묘한 미소가 걸쳐지며 얼어붙 어 있는 요리사들을 향해 뜻밖의 명이 떨어지고 있었다 "빙면이 더워진다. 어서 지엄하신 백마께 북해빙면을 전해 드리도록." "태, 태대각!" 용등택이 당혹과 분노가 엇갈리는 시선으로 곤오풍우를 쳐다보았다. "본... 루가 생긴 이래 이런 대변괴는 한 번도 없었소! 감히 백마회의 석 상에 한갖 천요만방의 주방에 있는 하급제자들이 다 출입하다니!" "괜찮네. 원주도 좀 들어 두시게. 어쩌면 이 대곤륜의 품 안에서 먹어보 는 마지막 식사가 될는지도 모르니까." "마지... 막 식사?" 무언가 심상치 않은 예감을 느낀 것일까? 용등택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 어들고 있었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삼천 년만에 처음 일어난 이 어이 없는 괴사는 어쩌면 상상하는 이상으로 심각한 의미를 담고 있을지도 모 른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빠르게 그의 뇌리를 스치고 있었던 것이다. 곤오풍우가 최후의 만찬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북해빙면. 어쨌든 괴사는 벌어지고 북해빙면은 돌려지고 있었다. 파랗게 질린 요리 사들에 의해 하늘의 별처럼 쟁쟁한 일천 무인들의 앞에 차곡차곡 말이 다. 그때 양손 가득 북해빙면을 담은 소반을 든 채 차례로 원탁 앞을 돌 던 자천릉이 백마가 자리한 의석의 한 곳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 곳에는 마치 얼음으로 깎은 조각인 듯 차가운 한기를 흩뿌리며 아름 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