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만황(卍皇) 1 - 26편 (26/50)

2026-09-21 21:18:45 조회 14
> 그에 대한 기록은 이렇게 단 한 줄이 나와 있을 뿐이었다. <기록시기: 대명 영락 사년. 전마편, 십팔만사천백와마루부 십왕속, 제 이장. 제이왕: 본루 통합서열 이 위, 은하학사 자염수수 비사벌. 소속: 은하태극삼십육가의 총가주, 나이: 백 이십 일 세. 성별: 남. 취미: 투계(鬪鷄). 특히 강맹한 싸움닭을 스스로 키우기를 즐김. 특기: 성복신산(星卜神算). 특히 은하수(銀河水)에서 천기를 읽는 독특한 학문을 습득하고 있음. 출신성분: 천하제일유가(天下第一儒家) 금릉비가(金陵丕家)의 후계자로 한때 한림학사에 제수된 바가 있음.> "후후, 천지금교에서 만난 그 두 꼬마 계집아이가 할아버지라고 자랑스럽 게 떠들던 인물이 바로 이자였군." 자천릉은 언뜻 과거의 일이 떠오르는 듯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살 인경주가 벌어지고 있는 곤산죽령을 향해 천지금교를 넘기 직전 그의 다 리를 걸며 시비를 걸다가 나중에는 그의 안위를 어른스레 걱정해 주던 두 쌍둥이 소녀의 얼굴이 문득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청아와 홍아라고 했던가? 후훗! 큰소리 칠 만한 조부를 두었군.' 이어 십왕의 세 번째 인물의 이력을 읽어가던 자천릉의 눈빛이 흠칫 흔 들렸다. <제삼왕: 본루 통합서열 삼 위, 꽃바람. 소속: 화성(花城)의 제 사십 일 대 성주.> 이렇게만 쓰여 있고 몇 줄의 여백이 깨끗이 비어 있었다. 허나 자천릉의 가슴 속을 스쳐가고 있는 느낌은 기이했다. '중할아버지가 죽어 가면서까지 경계하라고 말했던 자! 할아범들을 모두 해란주에 가둔 장본인이며 백마보다도 곤오풍우보다도 무서울지도 모른 다고 말하던 그자가 바로 십왕 중 세 번째 인물이었다니!' 왠지 들을 때마다 가슴속에 기이한 파문을 일으키는 이름이었다. 계속해 서 시선을 옮기던 자천릉이 탄성을 발했다. "호, 서열 사 위에 있는 이자는 좀 특이하군. 육천마을 중 시망상천에서 온 자라니." <제사왕: 본루 통합서열 사 위, 시제(屍帝) 상관목수(喪棺木 ) 잔기사(殘 棋四). 소속: 빙궐(氷闕)의 궐주. 나이: 팔십 이 세, 성별: 남. 취미: 관짜기. 특히 옷나무관에 조예가 깊음. 특기: 강시대법, 시신을 다루는 데 있어 천하제일인자. 출신성분: 육천마을의 시망상천.> 탁월한 재능도, 개세의 두뇌도, 모두 망각의 강 속에 흘려보낸 채, 천대 와 멸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인간 이하의 비인간들이 모인 여섯 개의 마을. 잊혀진 한과 잊혀진 고통 속에, 더욱 처절한 분노의 절규를 감추고 살아 온 행복의 이방지대 육천마을. 헌데 그 육천마을 중 시망상천의 인물이 여기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그 것도 십왕의 일 인이자 통합서열 사 위의 지위로 들어와 있었단 말인가. 정녕 놀랍고도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마침내 그들이 자신의 신분에 의문을 품고 천하를 향해 통한의 화 살을 당기기 시작했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자천릉은 결코 알지 못했다. 관짜기를 취미로 하고 강시대법을 특기로 할 정도로 철저히 시신만을 상대로 살아왔던 한 사람, 시제(屍帝)라는 이름을 가진 이 사람의 가슴 속 깊이 준비되고 있는 그 처절한 피의 행로를. 그리고 그 시신 속의 피의 행진이 얼마나 많은 산 자들의 가슴 속에 공포를 심어 주었는지를. <제오왕: 본루 통합서열 오 위, 기성(棋聖) 백악도도(百嶽屠刀) 용등택 (龍藤澤). 소속: 대곤륜태조천장원 제 이십 칠 대 원주. 나이: 백 사십 구 세, 성별: 남. 취미: 내기바둑, 수급이 걸린 바둑이 아니면 타인과 대국하지 않음. 특기: 기선삼백육십일도(棋線三百六十一刀). 출신성분: 강남 천왕도문의 제 칠 대 문주.> <제육왕: 본루 통합서열 육 위, 구운몽(九運夢) 해갈선자(骸蝎仙子) 백리 려려(百里麗麗). 소속: 미막의 막주. 나이: 사십 칠 세, 성별: 여. 취미: 눈사람 만들기. 특기: 춤. 출신성분: 북국(北國)의 제 이십 팔 대 여제(女帝). 빠르게 책장을 넘기던 자천릉의 손길이 잠시 주춤했다. "호, 여인으로서 십왕, 그것도 서열 육 위에 올랐다?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 인물이군." 허나 그의 관심은 그것으로 그치고 이내 그는 몇 장의 양피지를 스치듯 훑으며 넘겨갔다. "흠! 만화예사 사희빈이라, 여기 있었군." <제구왕: 본루 통합서열 구 위, 만화예사 사희빈. 소속: 만화무대의 대주. 취미: 수예, 꽃꽂이, 도자기 감상. 특기: 음모(陰謀). 출신성분: 미확인. 일설에는 황궁출신이라는 견해가 있음.(황위계승 서열 십 사 위 만화왕자 주희빈과 동일인이라는 추측도 있음.) 참고사항: 본루 역사상 곤오풍우 현 태대각에 이어 입루 이후 십 년 이 내의 기간에 십왕에 든 두 번째 인물. 주의 필요.> "이 자! 처음부터 이름을 감추는 것이 수상하더니, 결국 신분이 불투명한 자였군. 헌데 당금 황실의 황자일지도 모른다고?" 자천릉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관심없다는 듯 계속 책장을 뒤져갔 다. 백마보다 강한 십팔만사천백와마루 최강의 조직이며 천 오백 년 전 가장 말석의 한 인물만으로 난세십승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혔던 그 가공할 십 인의 초강자들. 바로 통합서열 일 위부터 십 위까지에 해당하는 그 엄청난 무인들의 상 세하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인 이력들이 자천릉의 눈 앞을 스쳐가고 있었 다. 헌데 앞뒤를 뒤적뒤적 넘겨보던 자천릉의 손이 뚝 멎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성명: 자천릉. 성별: 남. 나이: 십 이 세. 성격: 괴팍하고 과격함.> 더도 덜도 없는 지독히도 간결한 단 한 줄의 글귀가 그의 시선을 묘하게 찔러 왔던 것이다. "훗! 필혜슬이란 여자가 서열 백 삼 위에 오르고 냉교채라는 여인은 백 마의 일 인에 들어있는 지금 자천릉이라는 꼬마는 아직 서열에 등재되지 도 못하고 있군." 어이없는 실소가 자천릉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제길! 그래도 내가 천하 각 문파의 부당주급 이상은 되는 모양이군. 한 줄이나마 이름은 실려 있으니." 웃는 것인지 노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자천릉은 오천년무림 문헌통고를 소리나게 젖혔다. "응? 부편이라고." 자천릉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② <오천년무림문헌통고 부편(副篇) 천하칠패쟁비록(天下七覇爭比錄).> 자연스럽게 펼쳐진 오천년무림문헌통고의 맨 끝장에 날아갈 듯 웅휘로운 황금빛 글씨가 새롭게 그의 시야를 메워 왔다. '천하칠패라, 이건 또 뭐지?' 자천릉은 호기심을 느끼며 얄팍하게 남은 몇 장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부편의 편찬에 부침. 오천 년 무림사! 그 장구한 피의 역사가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동안 당 금처럼 기라성같은 초절정의 무인들이 한꺼번에 출현한 시대는 맹세코 없었다. 그들 개개인의 능력은 오천 년 무림사에 명멸해 간 그 어떤 무인들보다 도 강하고 뛰어났다. 시대의 차이를 두고 탄생했더라면 그들은 한 시대 를 질타하며 무림사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시킬 수도 있었으리라. 해서 그들 중 구름 위에 뜬 태양처럼 단연 걸출한 칠 인을 뽑아 천하칠 패라 칭하고 제자들의 귀감을 삼아 여기 부편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아울러 다음에 기록하는 순서는 무학의 고하와 능력의 우열을 따지지 않 고 편자의 임의를 따라 수록한 것임을 첨가하여 명시해 둔다.> "흠, 오천 년 무림사 동안 그 어떤 무인보다 강하다고 평가받은 칠 인이 라." 자천릉이 탄성을 터뜨리다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헌데 기이하군. 만통은 황금만루에서 육 인의 초강자라고 했는데?" 그는 시선을 책으로 가까이 했다. "일곱이든 여섯이든, 어쨌든 초강자라고 했으니 읽어나 보자." 팔랑! 자천릉은 한 장을 넘기다 가볍게 탄성을 흘렸다. "역시 곤오풍우가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군." <천하칠패 제일패(第一覇): 십팔만사천백와마루 제 사십 일 대 태대각 만세제일신마 곤오풍우. ... 후략 ...> 그러나 역시 곤오풍우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자천릉은 다음 장을 넘겼다. <천하칠패 제이패: 대소림사의 수석장로 천세미륵 자장대사.> "천세미륵? 들은 적이 있다. 언젠가 혈왕사가 묻혀 있던 비석을 바라보 며 뇌까리던 돌할아범의 독백 속에서." <나이: 백 사십 사 세. 신분: 현 소림의 최고 배분인 자자배(慈字配)의 유일한 생존자. 현 총정 십대문파의 실질적인 영수. 이력: 대원 말엽 한 명문거족의 첩의 몸에서 태어나 탄생직후부터 불문 소림에 의탁됨. 나이 칠 세에 당시 소림장문 현공의 계를 받고 나이 십 이 세에 달마역근경이 소림의 일반제자들에게 지나치게 난해함을 비판하 며 속(續) 달마역근경을 펴냄. 나이 십 육 세에 이천 년 소림의 불문율을 깨고 제 삼십 칠 대 장문인에 취임. 허나 취임 이 개월 만에 장문인의 지위가 불법과 무예의 도를 가린다하여 사양하고 산문(山門)을 나옴. 그후 일갑자 동안 천하 구만여 개의 사찰들과 총정십대문파, 변황과 새 외의 오대문파 등을 유전(流轉)하며 숱한 비기들을 습득하고 일만여 회 의 구결비무(口訣比武)를 치렀다고 알려져 있음. 기록되는 시각까지 단 한 차례의 살계도 범하지 않음. 무공정도: 추측불가. 다만 내공수위는 현세최고이리라고 짐작됨.> "흠! 어쩐지 꼭 한 번은 부딪치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스님이군." 자천릉은 나직한 탄성을 흘리며 다시 한 장을 넘겨갔다. <천하칠패 제삼패: 초왕사성의 제 삼십 구 대 성주, 뇌도(雷刀) 신농궁 (神農宮). 나이: 구십 칠 세. 신분: 초왕사성을 세운 살인광도(殺人光刀) 신농비륵(神農鄙勒)의 오십 일 대 손. 사파연합체인 연사의 수뇌. 이력: 초왕사성에서 태어나 십 세까지의 소년기를 황야에 버려져 후계자 교육을 거침. 본성 복귀 오 년만에 오 대째 타가문에서 지배해 오던 초 왕사성의 성주에 오름. 백일잔치에서 아홉 자루의 칼을 움켜쥐었다고 하 는 일화를 가진 타고난 칼의 승부사로 항상 스스로 칼에 관한 한 고금제 일로 불리우며 초왕사성의 역대 성주들 중 가장 빠른 쾌도를 구사. 확인 된 바는 없으나 일설에는 허공에서 내리치는 번개를 잘랐다고 전함.> "초왕사성이라, 천하에 이런 문파도 있었던가?" 그가 어찌 알 것인가. 삼천 년 동안 끊임없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아 성에 도전해 온 그 투혼의 단체를. 그리고 바야흐로 세대교체의 격동기 를 맞으며 신세대의 기수로 자천릉을 지목하기도 했던 곳이 바로 초왕사 성이었음을. 네 번째 장을 넘기던 자천릉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천하칠패 제사패: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태대각계 소속, 화성의 제 사 십 일 대 성주, 꽃바람.> "응? 십왕의 서열 삼 위로 끼어 있던 그 꽃바람이라는 자가 천하칠패 중 에 들어있군." 십왕 서열 이위(二位)의 비사벌도 감히 거론되지 못하는 천하칠패의 쟁 비록에 신비의 고수 꽃바람이 네 번째로 실려 있었다. <나이: 불명. 성별: 불명. 신분: 집안 내력은 물론 용모와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음. 이력: 제 사십 일 대 태대각과 더불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입루.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단지 나타날 때 지독히도 짙은 꽃향기가 난다는 것 뿐. 당금 태대각의 친동생, 절친한 친우, 하인 등 수많은 설이 난무하나 확인된 바는 없으며 다만 친구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짐작됨. 무학수위: 단 한 번, 대원말엽 라마교의 제 십 육 대 달라이대라마 대천 법왕 사륵탄과의 관산벌(關山伐) 싸움을 통해 세상에 알려짐. 싸움이 일 백 초쯤 경과했을 때 사륵탄의 우장이 그의 가슴을 강타하여 오장육부가 파열됐으나 수세에 몰리자마자 처음보다 오히려 내공이 급증해 결국 사 륵탄을 생포했음. 그것으로 짐작하건데 그는 내공과는 다른 차원의 잠재능력, 곧 일종의 초상감각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여겨짐.> "꽃바람이 염력의 소유자라고!" 자천릉의 눈빛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형체도 없이 한 줄기 꽃의 회오리바람으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신비인 인 그가 선천적인 염력술사일지도 모른단 말인가? "호, 이제 꼭 만나 볼 사람이 둘로 늘었군." 자천릉은 묘한 미소를 띄며 다음 장을 넘겼다. "달그림자? 훗, 이 천하칠패라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신비한 척 냄새만 피우는 자들이군." <천하칠패 제오패: 유리유사하(琉璃流砂河), 약칭 유리궁(琉璃宮)의 궁주, 달그림자. 나이: 미상, 성별: 미상. 신분: 불투명. 단지 사막 한가운데서 줄타기가 그의 유일한 취미로 알려 져 있음으로 보아 육천마을 중 천재촌 출신이 아닌가 추측될 뿐임. 이력: 대막의 신기루, 사막의 바람, 바람의 아들 등으로 불리우는 살아있 는 대막의 신. 홀연 대막을 움직이는 유사하 속에 유리궁을 짓고 대상과 유랑극단을 이끌며 신기루처럼 대막을 지배해 왔음. 달빛을 반사하면 지옥의 환상을 일으키는 귀면탈을 쓰고 다녀 달그림자 라 불리울 뿐 누구도 그의 진정한 얼굴과 신분을 알지 못함. 무학수위: 미상. 텅빈 사막의 공간 속에 내공의 힘으로 줄을 매고 외줄타 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천세미륵에 비견되는 내공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 로 추측됨. 또한 사막의 거친 대상들과 무질서한 유랑극단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하는 능력으로 짐작할 때 용병과 조직에도 일가의 성취를 이룬 자일 가능성이 높음.> "놀랍군! 달그림자라는 이 자도 육천마을 출신일지도 모른다니." 이제 인간 이하의 비인간들만이 모여 산다는 그 버림받은 천인들의 집단 은 십왕을 거쳐 천하칠패쟁비록의 다섯 번째 장에까지 오르고 있었다. '훗! 조만간에 이 천하칠패쟁비록은 팔패쟁비록으로 바뀌겠지. 육천마을 중 해란주 출신의 만황 자천릉이 기록되어야 할 테니까!' 다소 교만해 보이는 미소를 흘리며 다시 한 장을 넘기던 자천릉의 눈빛 이 은은히 반짝였다. 천하칠패쟁비록의 여섯 번째 장에는 실로 뜻밖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천하칠패 제육패: 부나비도의 천치의성 사공역. 나이: 백 십 칠 세. 성별: 남. 신분: 대원 중엽 문(文)의 명가였던 사공제일가의 장손. 이력: 나이 십 팔 세에 대원삼대예시(大元三大藝試), 곧 문시(文試), 화시 (畵試), 율시(律試)를 모두 급제. 허나 모든 보장된 권세와 영화를 뿌리치 고 나환자의 섬 부나비도에 뛰어들어 의생(醫生)으로 일생을 보내 어둠 의 성자라 칭해짐. 불치의 병을 치료하면서 특수하게 발달한 의학지식으 로 부터 인체와 자연 그리고 우주에 대한 체계화된 무론(武論)을 정립. ... 중략.... 무학수위: 추측불가. 다만 독(毒)도 약도 아닌 특이한 의가용초기예(醫家 用草技藝)로 그 방면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취를 이루었다고 알려 짐.> "이 사람은 중할아버지가 죽어가면서 반드시 만나 보라고 했던 분이 아 닌가? 헌데 나의 신체를 완성시켜 줄 천하제일의라던 사람이 천하칠패에 들 정도로 상당한 무인이었다니." 자천릉은 놀람의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장을 향해 손을 가져갔다. 순간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워오는 한 사람의 위대한 이름이 있었다. <천하칠패 제칠패: 관부제일고수 자륭극.> "아버님이 천하칠패의 일인으로 꼽히고 있으셨단 말인가!" 자천릉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놀람같기도 하고 기쁨같기도 한 기이한 빛 이 빠르게 스쳐가고 있었다. "후후후, 매일처럼 낚시질이나 하고 조그마한 린아의 고집에도 항상 지고 야마는 분이 이토록 대단한 분인 줄은 몰랐군." 회상에 잠기는 듯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언젠가 내가 청도항에 닿았을 때 아버님도 중원으로 떠나셨는데, 지금쯤 어디에 계실까? 그리고 린아는...." 아버지와 아들을 둘러싼 운명의 회오리. 해란주의 깊은 어둠에서 시작되 어 마침내 전 천하를 휘감아 버리려 하고 있는 그 거대한 피의 회오리를 자천릉은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 불명. 약 오십 세를 넘은 것으로 짐작됨. 성별: 남. 신분: 불명. 이력: 대명 제 삼 대 황제 영락제의 지기로 연왕반정을 막후에서 주재하 면서 세인들에게 알려짐. 반정을 주재하는 과정에서 관부십팔반무예를 새롭게 창시하고 일체의 병략과 대계를 일신으로 관장하는 등 일세의 재 사로서 은밀히 알려졌고 개국일등공신으로 왕호를 하사 받았으나 사양하 고 스스로 해란주에 들어간 인물. 그밖에 알려진 것은 전무하며... ... 중략... 무학수의: 측량불가.> 자천릉은 부친에 대한 장황한 기술을 음미하듯 천천히 읽어내려가다 흠 칫 눈을 빛냈다. 천하칠패에 대한 기록은 그것으로 끝나고 그들에 대한 기록자 나름의 평가가 간결한 필치로 정리된 채 덧붙여져 있었던 것이 다. <동시대에 출현한 일곱 줄기의 위대한 별들. 그들은 단 한 번도 서로 충 돌한 적이 없기에 아직 그들에 대한 고하와 우열은 누구도 논하지 못한 다. 허나 본루에 수집된 자료를 토대로 분석하건대 만일 그들을 차례로 싸우 게 한다면 먼저 곤오풍우 태대각과 천세미륵, 그리고 자륭극 등 삼 인이 남게 되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 삼 인 간에 최종적인 평가를 내린다면 천세미륵은 내공과 초식 응용 면에서는 최고라 할 것이나 지모와 실전무예에 있어 다른 이 인에게 조금 떨어진다 하지 않을 수 없고, 곤오풍우 태대각은 내공과 초 식, 지모로 말한다면 중간에 해당하나 실전무예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탁 월한 역량을 지니고 있으며, 자륭극은 내공과 초식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우선 가장 말석에 두나 지모에 있어 최고이고 실전무예로는 중 간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이 분석을 종합하면 곤오풍우 태대각 이 일 위이고, 그 뒤로 천세미륵, 자륭극의 순서로 냉정하게 등위를 매길 수 있으리라.> "제길! 말마따나 냉정하긴 냉정한 분석이군. 이대로라면 승점을 매겨도 곤오풍우가 아홉, 천세미륵이 여덟, 그리고 아버님이 칠점(七點)에 해당 하니까." 헌데 기술자가 내린 최후의 판단은 의외의 결과를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최종적인 판단으로는 자륭극을 머리에 놓고 싶다. 왜냐 하면 자륭극에 대해 알려진 바가 적어 내공과 초식, 그리고 실전무예에 있어 진정한 성취정도를 따질 수가 없음에도 그는 천하칠패에 들 수 밖 에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의 하나 한림사가, 즉 은림사숙의 숨겨진 힘을 이어받은 자가 출현한다면 우리의 모든 분석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함을 주지해 두 는 바이다. 아울러 첨가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자륭극이라는 인물을 일 위로 올려놓 고 싶은 이유에는 추측컨대 그의 정체가 바로....> 기이하게도 거기에서 글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에 의 해 책장의 끝부분이 찢겨져 나가 있는 것이었다. "응? 왜 하필 여기서 책이 찢어졌지?" 자천릉의 눈에 기묘한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그 자는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본좌가 그 장을 찢었다." 천 근 바위가 지면을 후려쳤는가? 태산이 천둥소리로 진동하는 듯 무섭 도록 육중하고 창노한 음성이 돌연 실내에 울렸다. 자천릉의 얼굴이 심장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돌연 하얗게 굳어졌다. '나, 나는 분명히 들었다! 저 우렁찬 음성이... 아버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그렇다면?' 자천릉의 뇌리에 표현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예감이 스쳤다 싶었을 때 자천릉의 몸은 허공을 가르며 이미 육층의 문전에 다다르고 있었다. 자천릉이 서 있는 육층의 입구의 풍경은 오층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여기에는 자단 대신 백색 융단이 깔려 있고 한쪽 벽에 무려 십여 장에 걸쳐 거대한 푸른 독수리가 양각되어 있다는 점 뿐이었 다. 그리고 칠 척 거구에 유난히 넓어 보이는 어깨 위로 백발을 보기좋게 늘 어뜨린 채 푸른 독수리를 직시하며 등을 돌리고 있는 백발노인이 보였 다. 끝이 없는 평원, 드넓은 일망무제의 황야를 바라보는 느낌이 이러할까? 단지 등을 돌리고 서 있을 뿐임에도 텅 빈 육층의 실내가 가득차 버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노인의 등 뒤에서 뿜어지는 무형의 기운은 실로 엄청나서 흡사 일천여 평의 실내가 푸른 독수리와 노인의 거대한 그림자만으로 가득히 메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대는 뭐라고 말했는가? 반복하라!" 자천릉의 입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육중한 음성이 쩌 렁하게 울려 나왔다. "놈! 용이 미꾸라지 새끼를 낳았구나." 자천릉의 검미가 꿈틀거리며 한 손이 서서히 천뢰금부와 벽은월을 잡아 갔다. "두 번째로 말한다. 방금 전 그대의 말을 반복하라." "원한다면 몇 번이든 반복해 줄 수는 있다. 허나 너는 먼저 말투를 고쳐 라!" 백발노인은 천년 거암처럼 우뚝 선 채 자천릉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을 받고 있었다. 자천릉의 얼굴에 싸늘한 살기가 스쳤다. "이제 듣고 싶지 않다. 대신 그대는 죽는다." 번쩍! 자천릉의 양손이 어느새 천뢰금부와 벽은월을 나누어 쥐며 그대로 백발 노인의 산악같은 등을 찍어가고 있었다. "놈!" 노인이 천천히 몸을 돌림과 동시에 마악 노인의 등을 찍으려던 자천릉의 신형은 돌연 무형의 벽에 부딪친 듯 주르르 퉁겨져 밀려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