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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황(卍皇) 1 - 16편 (16/50)

2026-09-21 21:18:45 조회 20
"훗! 인간벌집이 생기겠군." 자천릉의 입에서 싸늘한 비웃음이 터져나왔다 싶은 순간 돌연 일성 구슬 픈 음률과 함께 수십 수천 개의 핏빛 비침들이 홍익청차에서 뿜어졌다.. "헉! 이, 이것은 고추잠자리가 아니라... 바로 홍익청차, 크아악!" 하나의 빨간 비침이 흑의사내의 목젖에 박히는 것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수천 개의 비침들이 그의 전신에 박혀들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빨간 밤 송이를 보는 것 같았다. "악마의 장난감이라 그랬지. 역시 마음에 드는 녀석이야." 흑의사내의 전신에 박혔던 붉은 비침들이 자천릉의 입에 물려 있던 홍익 청차에 바람처럼 빨려 들어가는 순간 흑의사내의 전신에서 붉은 피가 흘 러 내렸다. 자천릉은 죽어 가는 흑의사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홍익청차 를 불며 지면을 박찼다. 고추잠자리 떼의 공포(恐怖). 팔백 년 전 중원의 자존심을 무참히도 짓밟으며 내륙 전역을 강타했던 장백산(長白山)의 기적(奇蹟). 바로 충왕 천지청군 아사달이 이룩했던 그 위대한 이방(異邦)의 역사가 오늘 자천릉에 의해 눈 내리는 대곤륜산맥 의 동쪽 하늘 죽림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현재까지 살아 있는 놈은?" "일백 사십 사 명(一百四十四名) 입니다." "의외로 빠른 시간에 끝나겠군." "예, 겨우 반 시진이 지났으니." "허면 지금 선두에 오르고 있는 놈은?" "모, 모르겠습니다." "모르다니?" "분 분명 저놈은 살인경주에 참가한 일천 명의 명단 중에 없었던 자입니 다." "흠! 상관없는 일이다. 검은 매(鷹)든 흰 매든 꿩(雉)만 잘 잡으면 되니 까." "송구스럽습니다." 도처에서 들려 오던 병장기 소리와 꼬리를 물던 비명도 이제는 거의 끊 어진 죽림, 자천릉이 고양이처럼 헤쳐 올라가고 있는 이 대나무숲은 정 상(頂上)에 가까운 듯 가파르기 짝이 없었다. "쳇, 별 것도 아닌 것들이 바쁜 남의 앞길을 막는 거야." 바람개비를 불며 무감각하고도 고집스러운 음성을 내뱉는 자천릉의 얼굴 에서 격전을 치른 흔적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길이 없었다. 헌데 대나무숲을 해치던 자천릉의 고개가 삐딱하게 들려지며 차가운 눈 빛을 뿌렸다. "이번엔 여인이었군." 어느 사이엔가 대나무숲은 눈 덮인 핏빛 매화(梅花)의 숲으로 바뀌어 있 었고 그 한가운데 한 채의 정자(亭子)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정자의 약 이십여 장 앞에는 한 자의인이 눈을 맞으며 우뚝 서 있지 않은가. 헌데 기괴하게도 그는 여인이 아니었다. 단지 칠흑 같은 머리칼과 사슴의 눈처럼 슬프도록 맑은 눈동자에 가느다 란 얼굴의 선이 여인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지독히도 미려(美 麗)한 삼십대(三十代)의 사내였다. 뭇 뱀들을 다스리는 만사(萬蛇)의 제왕에게서 풍기는 체취가 저리도 사 이로울까? 여인 같은 용모에 꼭 어울리는 보라빛 의상, 거기에 대곤륜의 한기만큼 이나 차디찬 냉기(冷氣)가 더하여져 더없이 사악한 위엄을 풍기는 사내 였다. 한 순간 자의사내가 붉은 입술 위로 기묘한 미소를 떠올리며 한 발 앞으 로 나섰다. "본좌, 만화무대(萬花武臺)의 대주 사희빈(査熹斌)은 살인경주에 승리한 그대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음성조차 여인처럼 옥구슬이 구르듯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 만화무대(萬化武臺)의 대주 요랑(妖郞) 만화예사(萬花藝邪) 사희빈.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백마(百魔) 중 서열 구 위(九位). 중원인들은 백마 의 공포를 알기에 이 이름의 무서움을 안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웅크리고 있는 일백 인의 초강자 백마가 대곤륜산 맥을 넘어 중원에 나온 것은 꼭 두 번 있었다. 천 오백 년 전 난세지난세라 일컫는 춘추전국시대의 장을 처음으로 연 것이 그 첫번째요, 삼십 년 전 곤오풍우가 대원의 무인들에 대해 행한 피의 숙청, 그 선두에 서서 대륙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 그 두 번 째로,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대혈사(大血事)를 일러 백마의 혈겁(血劫)이 라 불렀다. 헌데 만화예사 사희빈은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입루(入樓)한 지 십 년 (十年)만에 그 백마의 서열 구 위(九位)에 오르는 신화를 창조했던 것이 다. 수예, 꽃꽂이, 바느질 등 여인들만이 하는 일을 취미로 삼아 더욱 특이하 고도 신비로운 인물. 그가 바로 이 곤산죽령의 정상에 서 있는 만화예사 사희빈이었던 것이 다. 이때 자천릉은 사희빈을 힐끔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치! 여인이 아니었군. 무슨 사내가 재수 없게 여인처럼 보이는 거지?" 투덜거리던 자천릉이 뭔가 생각이 난 듯 말을 끝맺다 말고 다시 사희빈 을 쳐다보았다. "살인경주라고?" "그렇다. 본대에서 매 오 년(五年)마다 실시하는 일종의 무인대회(武人大 會)지." 사희빈이 묘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자천릉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치사하군. 고작 죽림을 뚫고 고개를 오르게 해 놓고는 살인경주라는 어 마어마한 이름을 붙이다니." - 살인경주(殺人競走). 중원 천하에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관한 일들 중 이보다 더 자세히 알려 져 있는 것은 없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와 중원을 잇는 유일한 끈이요, 중원의 무인들이 십 팔만사천백와마루에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기회가 바로 살인경주였 기 때문이다. 피(血)의 선택, 악마의 투쟁(鬪爭), 생사유희(生死遊戱), 죽음(死)의 행진, 지옥연수(地獄練修) 등과 더불어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서 영재(英才)를 뽑기 위해 실시하는 무서운 시험 살인경주. 그것은 시험임과 동시에 가장 잔인한 피의 조련(調練)이었다. 인간의 투쟁본능(鬪爭本能)과 살인(殺人), 파괴(破壞), 침투(浸透), 생존 (生存) 등을 죽음을 통해 익히며, 그 최후의 생존자만을 중용(重用)할 뿐, 나머지 구백 구십 구 인(九百九十九人)의 참가자들은 모두 참혹하게 죽 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숭앙(崇仰)하는 중원인들에게 있어 살인경주는 꿈이요, 동경이요, 영원한 이상이다. 헌데 그 살인경주가 오늘 눈 덮인 곤산죽령의 대나무숲 속에서 펼쳐지고 우연처럼 자천릉은 거기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偶然)이 아니었다. 이방십칠인의 한을 안고 중원에 상륙한 자천릉, 그리고 그의 앞길에 숙 명의 장벽으로 우뚝 서 있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 언젠가는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운명, 그 필연적(必然的)인 만남 의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② 이때 자천릉의 앞으로 다가오던 사희빈이 사악하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으며 품 속에서 접혀진 황포(黃袍) 한 벌을 꺼냈다. "살인경주에 승리한 자는 본루(本樓)의 서열 일천 위(一千位) 내에 든다. 당연히 본루의 율법 제구백팔십이조(第九百八十二條)에 의해 너에게 서 열 일천 위 내의 무인들이 입는 대곤륜황무포(大崑崙黃武袍)를 위대하신 태대각(太大閣)의 이름을 대신하여 내린다." 서열 일천 위(序列一千位)의 무복(武服). 대곤륜황무포(大崑崙黃武袍). 그 렇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는 자그마한 규칙이 있었다. 서열 일 위인 곤오풍우가 입는 옷의 빛깔이 백색(白色)이었고, 그 아래 서열 십 위까지가 자색(紫色), 서열 백 위까지가 적색(赤色), 서열 일천 위까지가 황색(黃色)을 입었으며, 그 아래 모든 일반 무인들은 흑색(黑 色) 장포를 입는 것이 관례였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아니오! 아직 살인경주는 끝나지 않았고 승리자는 결정되지 않았소!" 돌연 묵직한 음성과 함께 십 장 밖의 지면(地面)이 파헤쳐짐과 동시에 흙먼지와 눈가루를 뒤집어 한 흑의사내가 죽창(竹槍)을 든 채 솟아나는 것이 아닌가. 전신을 가린 흑포와 검은 두건이 흙기운에 바래 튀튀한 잿빛을 띠고 있 었고, 수세미처럼 헝클어진 장발에 대나무를 날카롭게 깎은 죽창을 들고 있는 모습은 흡사 겨울잠에서 깨어난 굶주린 곰(熊)을 연상케 했다. "껄껄! 본인은 이 살인경주를 위해 일 년 전부터 이 정상의 땅 밑에 잠 복해 있었소. 최후의 승자는 저 아이가 아니라, 바로 본인이외다!" 흑의사내가 양손의 죽창을 천천히 세웠다. 사희빈이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훗! 좋다. 어떤 술수를 썼든 정상을 정복하는 자가 살인경주에서 이기는 자가 된다는 율법에는 변함이 없다. 허나 지금 정상에 서 있는 사람은 두 명이니, 당연히 서로 겨루어야 겠지. 허락한다." 순간 자천릉이 두 눈에서 새파란 녹광을 뿜어냈다. "쳇! 이번에는 겨울잠 자던 곰까지 일어나 나의 앞길을 막는군. 사람의 앞길을 막는 짐승은 죽어야지." 막 자천릉의 음성이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잘 가거라! 십자쌍절풍(十字雙絶風)!" 쐐액! 흑의사내의 두 자루 죽창이 십자로 교차되며 가공할 창풍(槍風)을 동반 한 채 자천릉에게 번개처럼 쏘아져 왔다. 허나 그것보다 빠르게 자천릉 의 품에서 금빛과 은빛이 번뜩임과 동시에 어느새 꺼내진 천뢰금부와 벽 은월이 쏘아오는 죽창을 두 쪽으로 가르며 그대로 흑의사내의 가슴에 박 혔다. "크아악!" 쿵! "확실하게 죽여주는군. 좋은 습관이다." 사희빈이 씨익 웃으며 도끼를 뽑아 드는 자천릉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대 홀로 남았으니, 그대는 확실한 승리자다. 이 대곤륜황무포를 받는 순간 그대는 중원의 하늘이요 천하의 수호신인 본 십팔만사천백와 마루의 영광스런 일원이 되는 것이다." '십팔만사천백와마루!' 자천릉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분명 이 자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라고 말했지. 해란주에서 할아범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름, 할아범들의 이마에 문장을 찍고 해란 주에 가두었던, 그래서 할아범들이 죽으면서까지 잊지 못하던 바로 그 이름을!' "훗! 재미있군. 내가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 들어가게 되다니." 기이하게도 자천릉의 입가에는 싸늘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사희빈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 살인경주에 승리한 그 대는 이 순간부터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공동 서열 일천 위(一千位), 만 화예사 서열 이십 칠 위(二十七位)에 자동적으로 올라가게 되니 말이다." "쳇! 비참하군. 고작 일천 위라니." "후훗! 본루를 모르는 사람들은 서열 일천 위를 너처럼 가볍게 여긴다. 본루에 얼마나 많은 기라성 같은 무인들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물 론 본루의 제자의 수(數)는 본루에 있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 면 이 살인경주와 같은 비무를 통해 수많은 자들이 죽어 가고 또 들어오 는 까닭이지." "괴이한 단체군. 자신이 소속한 단체의 대가리 수도 정확히 모른다니." "알 수는 있다. 본루의 무인들의 숫자와 신상 명세를 기록하는십팔만사 천성좌록(十八萬四千星座錄)에는 오늘 아침까지 칠십이만사천오백구십팔 명이라고 적혀 있지." "흥, 쓸데없이 대가리 수만 많은 모양이군." "허나 그 기록은 숫자를 쓰는 순간에만 정확하다." "후훗, 말이 되는군. 지금 이 순간에 들어가는 나를, 그 기록하는 자는 모 를 테니까"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가공할 힘은 그 숫자만으로도 생생히 설명되고 있 었다. "흠, 몹시 머리가 복잡한 모양이군. 허나 너는 대곤륜일천무성좌(大崑崙 一千武星座)만 기억하면 된다. 그들은 바로 서열 일천위 내의 무인들, 곤 륜의 하늘에 찬연히 빛나는 일천개의 별자리와도 같은 인물들이다." "대곤륜일천무성좌라... 무슨 이름들이 그렇게 거창한 것만 나오지?" "너는 지금 이 시각 곤륜의 하늘, 아니 천하의 하늘 위에 떠 있는 그 일 천 개의 별자리 중 마지막 자리의 이름이 된 것이다." "제길, 곤륜의 하늘엔 별도 많군. 내 이름이 들어갈 자리가 다 있으니." 이때 자천릉의 가슴 속에는 한가지 운명적인 결심이 스쳐가고 있었다. '그래, 그것도 좋겠지. 들어가서 할아범들의 가슴에 그토록 깊은 한(限)을 새겨 준 곤오풍우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훗날 할아범들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할아범들의 부탁이라면 바로 곤오풍우를 죽여 달라는 것이 아닌가. '훗! 그리고 칠십 몇만인지 하는 이 모래성의 모래알들을 하나하나 뜯어 내 부셔 주는 것도 재미있겠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차곡차곡 말야!' 그때 사희빈이 희미하게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는 많은 의문이 있을 것이다. 허나 궁금해하지 마라. 나의 말이 끝난 직후, 너는 곧 알게 된다." 자천릉이 기묘한 조소를 떠올리며 사희빈의 얼굴을 직시했다. "그대의 말이 끝났어?" "......?" "그렇다면 이제 진짜 보고 나오라고 그래. 숨어서 떨지 말고." "무, 무엇!" 자천릉의 말은 너무도 엉뚱하지 않은가? 헌데 사희빈이 흠칫 놀람의 탄 성을 터뜨리는 그 순간이었다. "하하하. 금성(琴腥), 그만 물러서라." 돌연 등 뒤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며 사희빈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며 반사적으로 허리를 접고 있었다. "주, 주군!" 그들의 뒤에는 흡사 뱀의 붉은 혓바닥을 온 몸에 감은 듯 선렬한 혈포 (血袍)를 걸친 팔 인(八人)이 우뚝 서 있었다. 가슴에는 하나같이 살아 포효하는 듯한 맹호(猛虎)의 문양이 새겨져 있 고, 밀납에 얼음을 입힌 듯 냉랭하고 무표정한 얼굴, 어지러이 흘러내린 장발, 거기에 구 척(九尺)은 족히 될 듯 거대한 키의 거인(巨人)들. 헌데 기이하게도 그들은 애꾸, 외팔이, 외손, 독각수(獨脚 ) 등등 하나같 이 범인들에게 있어야 할 신체 중 하나씩이 없는 불구자들이었다. 거기에 검(劍), 도(刀), 창(槍), 부(斧) 등 각기 다른 육중한 병장기들을 메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금방 지옥에서 뛰쳐나오기라도 한 듯 가공할 살기를 폭사하고 있었다. 사희빈이 계속 지면에 오체투지한 채 떨리는 음성을 발했다. "주, 주군 어찌 이곳까지 친히...." "하하하, 너의 연극이 서투른 탓에 본좌의 정체가 이미 저 아이에게 탄로 나고 말았으니 어찌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 있겠나." 혈포팔인의 뒤로부터 매화숲이 있는 정자 앞까지 어느 사이엔지 붉은 융 단이 깔려 있고, 지금 정자에서 자포를 걸친 한 사내가 미소를 머금은 채 붉은 융단을 밟으며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헌데 놀랍게도 자의사내의 모습은 사희빈과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다 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사희빈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짙은 사이로운 위 엄이 잔잔하게 번져 나오고 자색장포의 가슴에 한 마리 적룡(赤龍)이 수 놓여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사희빈이 극도의 당황에 휩싸인 채 자천릉의 얼굴을 쳐다보자 자천릉이 차갑게 웃었다. "역시 다른 자였군. 까마귀 할아범은 말했지. 손바닥의 굳은살을 보면 무 인의 연무정도(練武程度)를 알 수 있다고. 그대의 손은 살인경주를 개최 할 만한 고수로 보기에는 너무 허약하고 여렸어." 자천릉의 앞에 걸음을 멈춘 자의사내가 가볍게 웃었다. "하하, 그렇지. 칼을 많이 잡아 본 무인일수록 당연히 손바닥에는 두터운 굳은살이 박혀 있을 것이니. 자네의 이름은?" 자천릉의 입가에 기묘한 미소가 스쳐갔다. "그대의 이름은?" "하하, 자네가 이미 알고 있듯이 본좌의 이름은 만화예사 사희빈이라네. 자네의 이름은?" "자군릉(紫君 )." "자군릉? 본좌가 방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자네의 이름은 자천릉인 것으 로 알고 있는데? 본대에 들어가서 밀정사(密情史)를 문책해야 겠군." "그럴 필요는 없어. 문책을 하려면 가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가짜의 이 름을 댔을 것으로 짐작되는 그대 자신을 문책해야지." "하하하, 이해하게. 본좌가 의심이 좀 많고 본좌를 노리는 자들도 많은 지라, 하지만 이름만은 진짜라네." "그럴까? 그렇다면 내 이름도 틀림없는 자군릉이지." 그 순간 한 줄기 삭풍이 산정을 스치며 사희빈의 장포가 바람에 휘날렸 다. 헌데 이때 휘날리는 장포 자락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사희빈의 왼쪽 팔 목 위에 수없이 찍혀진 기이한 점(點)같은 흉터 자국들이 빽빽하게 시야 에 꽂혀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바로 바늘자국이었다. 천하에서 이같은 바늘자국을 자신의 팔목에 남기고 있는 인물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만화왕자(萬花王子) 주희빈(朱熹斌)이었다. 여인의 옷을 입고 여인이 하는 수예를 뜨며 스스로 여인이기를 강요하던 사내. 또한 언젠가 중원의 성역 자금성이 불타고 세 개의 바늘이 부러지 던 날 바늘 대신 검을 쥐고 천하를 향해 포효했던 사내. 그 사내가 제 이의 성역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제 구인자(第九人者) 만 화예사 사희빈으로 변신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운명처럼 자천릉과 만났다. "하하, 그렇다면 본좌만은 자네를 자천릉이라 부르기로 하지." 사희빈, 아니 주희빈은 웃음을 지우지 않으며 자천릉의 어깨를 툭툭 쳤 다. "자, 이제 본루에 관한 자세한 것들은 가면서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세." "간다고? 어떻게 가지? 보이는 것은 폭설과 산줄기뿐인데." 자천릉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산정에서 내려다보이는 폭설 속의 경관(景 觀)을 보라. 엄동의 혹한에도 얼어붙지 않고 흐르는 사나운 산곡의 물살 이 발 아래 보이고, 그 위로 시야를 자를 듯 막아서 있는 것은 흰눈 덮 인 하나의 거산(巨山). 다시 그 너머로 크고 작은 산들이 아득히 이어져 펼쳐지고, 지평선까지 닿은 그 산(山)들의 행렬 위로 폭설이 미친 듯 나부끼는 대곤륜의 전경 은 실로 장쾌하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허나 거기에 길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다만 보이는 것은 자천릉이 서 있는 정상으로부터 회색 동천(冬天)을 가 르며 끝이 보이지 않도록 뻗쳐 있는 하나의 거무튀튀한 철삭(鐵索)뿐이 었다. 이때 주희빈이 싱긋 웃으며 바로 그 철삭을 손가락질했다. "그렇지. 길은 바로 하늘에 있다네." "하늘에?" 그 순간 붉은 장벽처럼 도열해 있던 혈포인들이 번개처럼 몸을 솟구쳐 이십 장 뒤의 정자의 주위를 엄호하듯 팔괘(八卦)의 자세로 막아섰다. 그 들이 펼쳐 보인 이 한 수의 신법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빨랐고 또 가공 할 살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헌데 그때 정자가 돌연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기음을 발하며 지붕 위의 눈과 얼음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어 정자가 붉은 융단 위로 천천히 미끄러져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응? 정자가 움직이잖아!" "하하, 그것은 정자가 아니라 대곤륜의 발(足)인 십만전륜(十萬轉輪)이라 네." 거대한 짐승처럼 천천히 다가오는 정자의 모습을 보라. 시커먼 철골(鐵骨)로 둔중하게 건조된 이 정자는 마치 생명을 가진 하나 의 괴물을 연상케 했다. 정자의 지붕이 있던 자리에는 튀튀한 철광(鐵光)을 발하는 일척(一尺) 반 경의 쇠바퀴 하나가 달려 있고, 예의 거무튀튀한 철삭은 그 철륜(鐵輪) 위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정자는 그 철삭을 타고 천천히 굴러오고 있는 것이었다. "하하,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는 이 줄이 바로 곤륜의 동맥(動脈), 십만 철로(十萬鐵路)지. 우리는 저 십만전륜을 타고 대곤륜 구석구석을 통과하 게 된다네." 지금으로부터 꼭 삼천 년 전 대곤륜의 아버지(父)로 불리우며 세월이 바 뀌고 무수한 황조가 변혁되며 또 세워졌어도 후세인들의 입에서 끊이지 않고 회자되는 한 인물이 있었다. - 십만세세(十萬歲歲) 곤륜천자(崑崙天子) 공공황(空空黃). 십팔만사천백와마루가 세워진 삼천 년 전부터, 삼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 지 적수가 없다는 그가 바로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개파조사(開派祖師) 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곤륜천자 공공황의 지우(知友)요, 오른팔이었던 위대한 기인(奇人)이 있었다. 하늘과 땅도 자를 수만 있다면 건축자재로 쓰고, 모래 위에도 성(城)을 쌓아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는 금언을 무색케 했다는 인물. 불가능(不可 能)을 쌓는 건축사. - 사성장(沙城匠) 숙야청리(叔耶淸里). 그가 바로 곤륜천자 공공황과 함께 오늘날 대곤륜산맥 속에 웅크리고 있 는 미증유의 수수께끼 단체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실제로 존재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헌데 그 두 사람이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건축하기 전 두 가지를 만들었 으니, 일 년 사시장철 만년설(萬年雪)이 층층이 쌓이고 만 년의 빙암(氷岩)으로 뒤덮여 있는 대곤륜산맥, 그 아흔 아홉 줄기의 전역을 거미줄처럼 연결 하고 있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동맥이요, 젖줄이며 유일한 교통수단 십만철로(十萬鐵路)가 바로 그것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열에 잘 견딘다는 대곤륜 특산의 금속인 곤산현철(崑山玄 鐵)을 녹여 뽑은 한 치 굵기의 곤산현철금강삭(崑山玄鐵金剛索)을 무려 십만 가닥이나 꼬아서 만들었으며, 그 길이가 무려 십만 마장(馬丈)을 가 기에 십만마로(十萬馬路)라고도 불리는 십만철로. 그들은 똑같은 곤산현철을 사용 십만철로 위를 운행할 수 있는 철륜거 (鐵輪車)를 만들었다. 사방 길이 십 척(尺), 높이 칠 척, 무게가 무려 삼천 근(斤)에 공기의 저 항과 마찰까지를 고려하여 만들었다는 십만전륜(十萬轉輪)이 바로 그것 이었다. 허나 십만전륜(十萬轉輪)이라고도 불리는 그 거대한 천륜거가 어떻게 곤 륜의 하늘 십만마장(十萬馬丈)을 삼천 년 동안 단 한 차례의 사고도 없 이 운행하고 있는 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