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황(卍皇) 1 - 11편 (11/50)
"흠, 됐군. 이제 내가 지닌 최후의 병장기만 릉아에게 넘겨준다면 릉아는 곤오풍우를 제거하지는 못할 망정 최소한 죽임을 당하지는 않으리라." 무의탁이 예의 사이로운 음성을 흘리며 돌연 품 속에서 새파란 비수 하 나를 꺼내 자신의 팔뚝을 부욱 그었다. 삽시간에 팔뚝에 직사각형의 칼 집이 깊숙하게 그려졌다. "아!" "무, 무슨?"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놀람으로 굳어졌다. 무의탁은 눈썹 한 번 찌푸리 지 않고 직사각형으로 그려진 팔뚝의 살점을 다른 한 손으로 거칠게 뜯 어냈다. 찰나, 패애앵! 하는 날카롭고도 예민한 음향이 귀청을 찢으며 무 엇인가가 꺼내졌다. 새끼손가락 만한 길이의 봉(棒)에 잠자리의 날개처럼 투명한 날개 네 장 이 엇갈리며 접혀 있는 기이한 물체였다. 흡사 한 마리 핏빛 고추잠자리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 물체에서는 섬뜩한 살기가 싸늘하게 베어나오고 있었다. "아, 아니 대형! 그, 그것은 충왕(蟲王)께서 남긴...." "홍익청차(弘益 車)! 우리 계림인의 마지막 자존심인 홍익청차를 꺼내다 니!" 무의척과 무의괄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무의탁이 말했다. "그래. 소국 계림의 혼이 중원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장백의 기적, 그 사랑스런 역사의 유산인 바로 홍익청차다. 곤오풍우는 중원의 하늘... 홍 익청차가 곤오풍우의 머리를 부수는데 쓰여진다면 지하의 충왕께서도 기 뻐하실 것이다." - 충왕과 홍익청차! 지상을 가장 먼저 지배한 것은 곤충의 무리였다. 그 벌레들 중에는 잠자 리가 있었고, 그 잠자리들 중 벌레가 지상을 지배하던 때로부터 현세에 이르기까지 잠자리의 왕으로 군림하여 살아 남은 잠자리가 있었다. - 시왕홍청(始王紅 )! 오늘날 장백산 천지에만 서식한다는 핏빛 고추잠자리가 바로 그것이었 다. 날개에 실핏줄 같은 붉은 선들이 그려져 있고 크기가 무려 다섯 치 에 달하는 잠자리의 왕. 그 시왕홍청의 날개에 천하에서 가장 질기고 날카롭다는 해리적철(海利 赤鐵)로 만든 적살비침을 무려 일만 개나 박아넣은 악마의 장난감이 바 로 홍익청차였다. 헌데 홍익청차가 장백산을 날아 중원에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팔백 년 전이었다. 천 오백 년 전 난세십승의 십주대장정의 전설과 일백 년 전 대원의 구주 정복의 신화와 더불어 이국인들의 삼대역사라 칭해지는 장백의 기적의 날이라고 불리우는 바로 그때였다. - 충왕(蟲王) 천지청군(天地 君) 아사달(阿斯達)! 벌레와 새와 짐승들을 유난히도 사랑했던 장백의 신(神)인 그가 중원인 들의 뿌리깊은 이국인 멸시에 반발하여 그의 친구들인 수천 수만 마리의 고추잠자리떼와 함께 동에서부터 중원을 강타하니, 이가 곧 고추잠자리 떼의 공포라 불리우는 장백의 기적이었고, 그때 충왕 아사달이 사용한 무서운 마병이 홍익청차였던 것이다. 제7장 죽음의 탈출 ① 무의탁이 입을 열었다. "홍익청차, 너의 자랑스런 위력을 다시 한 번 보여다오." 바람개비같은 몸체가 작은 새처럼 기묘한 울부짖음을 발했다. 그러자 파 칵! 하는 예리한 파열음이 터지며 돌연 홍익청차의 날개가 빳빳하게 세 워지는 것이 아닌가. 잇달아 그 얇디 얇은 날개 위에 핏발이 서듯 날카로운 선들이 생겨나더 니 실날같은 비침으로 화하며 허공을 향해 무섭도록 빠르게 쏘아졌다. 파파팍! 비침들이 석굴의 천장에 수 없이 많은 미세한 구멍을 남기며 파고들었 다. 동시에 네 장의 날개가 바람개비로 화하여 맹렬히 회전하며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패애앵! 수십 마리의 고추잠자리가 날 듯 순식간에 허공을 수십 차례 선회하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던 바람개비는 번개같이 다시 무의탁의 손으로 돌 아와 날개를 떨며 내려앉았다. 만약 그 앞에 인간이 서 있었다면 그는 미처 탄성을 다 발하기도 전 바람개비에 의해 수천 수만 조각으로 난자 되고 말았으리라. "흠, 여전하군. 사십 칠 년 전 장백산 정상에서 천지의 물결을 가르던 그 기세는 아직도 생생히 살아 있다." 무의탁은 담담히 뇌까리며 비침들을 회수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홍익청 차를 기보들이 산처럼 쌓인 위에 미련없이 던져 버렸다. 이어 무의탁은 중인들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황혼이 깊어 가고 있소.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눈 바와 같이 내일 새벽 우리 모두가 릉아의 탈출을 위해 약속된 죽음을 맞는 것에 재론의 여지 가 없으리라 믿소." 철유경을 꺼내 놓았던 푸른 눈의 노인이 무의탁을 보았다. "하지만 릉아가 스스로 탈출하겠다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소. 더 욱이 우리가 릉아에게 뜻을 밝혔던 일도 전무하거늘 어찌 탈출을 장담할 수 있단 말이오?" 그의 말에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의탁에게 쏠렸다. "그것은 릉아의 성격상 문제가 되지 않소. 아버지의 뜻도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무시해 버릴만큼 비정하면서도 갚아야 할 은혜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이 치밀한 아이이니까, 릉아는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우리의 뜻을 따를 것이오. 허나 진정한 문제는 그것이 아니오." "......?" "이백여 장 밖에 되지 않는 천어독장은 우리들이 모두 뛰어 넘을 수 있 는 능력을 가지고 있소. 릉아가 문제였지만 이미 수련을 통해 자유자재 로 천어독장을 헤엄칠 수 있는 힘을 가졌으니 그것도 해결된 상태요. 문 제는 천어독장을 벗어난 후부터 관부금마선이 정박하고 있는 곳 사이의 불과 칠, 팔 장밖에 되지 않는 그 거리에 있소." "흑해의 폭풍와류를 말씀하시는 것이오?" "그렇소. 폭풍와류요. 설사 곤오풍우가 직접 온다 해도 단신으로는 헤엄 쳐 건널 수 없을 만큼 폭풍와류의 기세는 가공하오. 우리 십 오 인의 내 공을 모두 합친다면 몰라도 결코 폭풍와류를 뚫을 수 있는 방법은 없 소." "그, 그렇다면 탈출도 불가능하다는 말이오?" 푸른 눈의 노인이 안색을 일그러뜨리며 되묻자 무의탁은 한 손으로 사륵 탄을 가리켰다. "다행히 법왕께서 라마교의 마지막 비전 중 폭풍와류를 일시지간 견딜 수 있는 기예를 말씀해 주셔서 이 문제는 해결 될 수 있었소. 허나 이에 는 여러분들의 공력이 오 할 이상 파괴되어야 하는 희생이 따르오." "라마교의 최후비전? 그 방법이 대체 무엇이길래." "인간사슬, 또는 인간밧줄이라고 불리는 생사단맥체뉴긍(生事丹脈體紐 亘)! 바로 그것이오." "장심과 장심을 통해 내공을 연결하여 가장 완벽한 내공을 이룬다는 바 로 그...?" "그렇소. 허나 한 번 펼치고 나면 사람들의 내공이 반으로 줄어들어 결 국은 죽음을 맞고 마는 그 필사의 무학이오." "우리 십 오 인의 신장을 연결하면 능히 칠, 팔 장의 거리는 도달할 수 있소. 생사단맥체뉴긍은 우리의 몸을 폭풍와류에도 흔들리지 않게 해 줄 것이고 릉아는 우리의 머리를 밟고 관부금마선에 이를 것이오. 허나 생 사단맥체뉴긍을 펼친 까닭에 그 누구도 중원에 닿을 때까지 견딜 수 있 는 내공을 지니지 못할 것이오." "그래서 죽게 된다는 말이군." "그렇소. 릉아를 포함한 우리 십 육 인은 관부금마선의 배 밑에 달라 붙 어 중원까지 사십 오 일의 뱃길을 가야 하오. 물론 우리가 머리를 바다 위에 내밀면 그 즉시 관부금마선에서 칼날이 날아들 것이오. 허나 우리 는 사십 오일 동안 릉아가 숨을 쉴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오." "으음!" "따라서 이미 논의했던대로 여기 우리들의 공력수위를 냉정하게 평가한 후 죽어야 할 서열별 순서를 정했소. 우리는 배 밑에서 릉아를 보호하며 붙어 있다가 호흡이 곤란해질 때마다 내공이 가장 약한 차례대로 릉아를 안고 해면에 떠올라 릉아를 호흡하게 한 후 자신은 관부금마선에서 날아 오는 칼날에 스스로 죽음을 맞아야 하는 것이오." 무의탁은 말을 맺으며 품 속에서 기이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펼쳤다. 놀랍게도 그것은 해란주에서 중원에 이르기까지의 뱃길 일만여 해리를 상세히 기록한 가장 치밀한 해도였다. "목적지는 청도 연안! 다행히 신의 가호가 있어 오할의 내공을 잃었어도 우리들이 모두 죽는 것과 때를 맞추어 중원에 도착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소." 무의탁은 잠시 숨을 죽이며 중인들을 둘러본 후 지도상의 한 지점에 손 가락을 찍었다. "첫 번째 호흡지는 흑해를 넘어선 직후인 남양주의 해상이오. 이때 릉아 를 안고 해면에 오를 분은 서역의 문인선생이오." "으음." "다음 완상도 해상, 대막의 은리설타(銀狸雪駝) 관자격(關子格)장군. 다 음, 항로 제 사천 칠백 해리 지점, 서백리아의 후산왕야." 무의탁의 음성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단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크큭, 마치 염라대왕의 사자명부를 직접 보는 것 같군." 누군가가 비릿한 냉소를 흘렸다. 열 세 군데의 지점을 차례로 낭독한 무 의탁은 돌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죽는 자는 나 무의탁이오. 그것은 우리가 안배한 최후의 속 임수이기에 불만은 없을 것이오. 나의 내공으로는 결코 청도까지 다다를 능력이 없소. 허나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암살자에게 내가 고의로 모습 을 드러내는 순간 진정 마지막으로 죽을 분인 법왕께서 릉아를 안고 전 혀 별개의 지점에 상륙하게 될 것이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루마리가 소리를 내며 말려졌다. 놀랍게도 가장 어리석으면서도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미련하면서도 가 장 냉엄한 탈출 계획이 이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것이었다. 한 사람을 탈출시키기 위한 열 다섯 사람의 죽음! 이들이 아니라면 누가 있어 그런 계획을 세우고 설사 세웠다 한들 그 누 가 또 실천에 옮길 수 있단 말인가. 허나 무의탁의 낭독이 끝나고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는 이들의 눈빛에는 한 올의 회의나 흔들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있다면 더욱 짙고 차디찬 빛으로 타오르는 한의 불꽃 뿐이었다. 그 비장하도록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며 사륵탄의 자애로운 웃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허허허, 불존께서 마련해 주신 승복일세. 죽는 날을 알고 승천할 수 있 음은 바로 해탈이자 열반이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법왕, 우리는 각기 조국이 다르고 땅도, 환경도 언어도 그 모든 것이 틀리지만 어쩌면 친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람들이지요. 비록 시간은 다르지만 우리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함께 죽을 수 있기 때문입 니다." 무의탁이 말을 잇자 중인들의 딱딱하던 얼굴에 천천히 작은 미소가 피어 올랐다. "나무환희불, 오늘같은 날은 라마교의 법왕이라는 신분이 한 없이 거추장 스러워지네 그려. 수도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계(戒)를 깨뜨리고픈 심 마에 자꾸만 휩싸이니." "후후, 법왕께서도 주계(酒戒)를 여실 마음이 있으십니까?" "나무환희불!" "하하, 이럴게 아니라 바다 위에서 함께 마감될 우리들의 운명을 위해 같 이 축배라도 드는 것이 어떻소?" "클클, 내일 새벽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으니 말이오." "자아, 시작해 봅시다. 생의 마지막 건배를!" 비장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차라리 장엄하다고 해야 할까. 조용히 흐 르는 그 웃음들 가운데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숭고한 마지막 생의 의지가 불꽃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예정된 공동의 종말을 위하여 마련된 죽음의 회의, 그리고 마지막 술잔, 떠들썩함 속에 숨겨진 그 비장한 여운을 딛고 시간은 한 발, 한 발 여명 을 향해 조용히 다가서고 있었다. 열 다섯의 죽음이 있고 하나의 거대한 출발이 있는 그 엄숙한 내일을 향 해! ② 꺼져 들어가는 낙조의 잔영이 유난히도 붉고 쓸쓸한 빛을 뿌리는 여기는 망란비역(邙蘭碑域). 제갈교수는 사해칠채난붕 한 마리를 붙든 채 발목에 무엇인가를 매달고 있었다. 헌데 발자국 소리만 나도 날아가 버리는 사해칠채난붕이거늘 기이하게도 이 새는 사람의 손길에 익숙한 듯 얌전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흐흐흐, 자륭극. 그대는 여기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모르겠지. 하지 만 알고 죽는 것도 좋겠지." 제갈교수의 음성은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메아리만 남기며 울려퍼졌 다. "훗, 별 것은 아닐세. 단지 살아 있는 불가사의이자 희세의 신비무인이라 는 그대의 모든 것을 적어두었을 뿐이지. 그대의 생김생김과 그대의 버 릇, 그대의 걸음걸이 등에서 시작하여 그대가 곧 강호에 나갈 것이라는 따위의 시시콜콜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들만 잔뜩 적어 두었다네." 놀랍게도 사해칠채난붕의 발목에 묶여진 것은 전서통으로 보이는 엄지손 가락 만한 검은 함(函)이었다. "어떤가, 재미있지 않은가? 그대가 죽어 망령이 되어 릉아가 강호에서 활약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도 말일세." 제갈교수는 천천히 허리를 펴며 멀리 황혼의 잔그림에 시선을 던졌다. "더욱이 그대가 살아 있다면 자신의 아들 릉아까지도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인물로 보이더군. 그러니 그대는 당연히 죽어야겠지. 또한 선대인 그대가 후대에게 빈 의자를 물려주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는가." 사해칠채난붕이 제갈교수의 손을 벗어나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어 어 느새 자그만 점으로 화하여 망란비역을 에워싼 난초림 너머로 자취를 감 추고 있었다. "흐흐, 어서 날아가거라. 가서 하루빨리 본성에 자륭극의 모든 것을 알려 주거라, 예쁜 새야." 제갈교수는 지금 천하에서 두 번째 단체 초왕사성을 향해 자륭극의 비밀 을 담은 비조전서(飛鳥傳書)를 날려보낸 것이었다. 그때였다. "후우!" 자천릉이 한 번 세차게 몸을 떨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오, 릉아가 깨어났구나." 고개를 돌리는 제갈교수의 시선 속에 또 한 번 변모된 모습의 자천릉이 비쳐졌다. 두 눈은 거의 녹색으로 느껴질 만큼 우수의 음영이 더욱 짙어져 있었고, 벌어진 앞섶 사이로 은은히 드러나 보이는 붉은 독수리의 반흔은 자천릉 의 기질을 더욱 사이롭게 했다. 헌데 이때, 딸그락! 하면서 자천릉의 찢겨진 옷자락 사이로 금낭이 떨어 지며 붉고 푸른 두 개의 피리가 바닥에 굴러 나왔다. "음? 이, 이것이 어찌 너의 품안에!" 그것이 청룡소와 홍황적임을 한 눈에 알아본 제갈교수가 해연히 놀라며 두 개의 피리를 주워들려고 하였다. "놔! 손대지마! 내 어머니의 유품이야. 내 꺼란 말야!" 자천릉이 무섭도록 안색을 굳히며 번개같이 천룡소와 홍황적을 빼앗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의 유품이라? 자륭극이 릉아에게 준 모양이군.' 제갈교수는 놀람의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릉아에게서 저토록 심한 감정의 격동을 볼 수 있다니, 십 년 전 릉아를 만난 이래 처음 보는 일이다. 역시 릉아도 어린아이임에는 확실한 모양 이군.' 제갈교수가 자천릉의 손에 들린 청룡소과 홍황적에 시선을 꽂았다. "난세십승의 이국십보 중 두 가지가 네 손에 있다니 큰 복연이다. 그것 은 아마 천하에서 가장 가볍고 질긴 금속으로 최고급 음률의 명기에만 사용되는 율파선강(律波線綱)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율파선강으로 된 악기를 병장기로 사용한다면 천하의 그 어떤 강병이라도 두려워 할 필요 가 없지." 허나 자천릉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바로 이 시각 지하석굴 속에는 또 다른 일곱 개의 기보가 자천릉을 위해 모아지고 있 지 않은가. 제갈교수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강호에 나가면 장력이니 지공이니 하여 신체를 움직이는 온갖 권장무학 들이 설치고 있지만 뭐니뭐니 해도 싸움에 있어서는 병장기의 강(强)과 리(利)가 가장 우선하는 법이지. 해서 당금 천하에서 제일의 고수가 되려 면 천하최강의 병장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쳇! 병장기든 뭐든 할아범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자천릉은 제갈교수의 음성을 퉁명스럽게 잘라버리며 청룡소와 홍황적을 빠르게 품 안에 갈무리했다. 제갈교수가 문득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중얼거리며 노을을 직시했다. "릉아야. 이 지상을 가장 완벽하게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 "가장 먼저 지상을 지배하는 것은 사내들이지. 허나 그 사내들은 밤과 어둠 속에서 여인의 지배를 받고 그 여인네들을 다시 지배하는 것은 다 름 아닌 보석과 황금이란다. 훗, 내가 보석가공과 금은세공을 유일한 취 미로 삼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천릉은 반응이 없었지만 제갈교수는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해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보석가공술과 금은세공법을 너에게 가 르쳐 왔다. 이제 너는 내일이면 중원에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네가 강호를 행도할 날이 온다면 너는 나에게 배운 모든 비기들을 활용하여 천하와 사내와 여인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가장 완벽한 지배자가 되어 라." 자천릉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쳐다보자 제갈교수는 괴소를 터뜨렸다. "흐흐, 그런 의문의 눈으로 보지마라. 너는 네 품 속에 은붙이는 커녕 녹 슨 고철덩어리 하나 없으면서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거린다고 생각하겠 지. 그러나," 제갈교수는 땅바닥에 깔린 모래 한 알을 집어들었다. "흐흐흣! 이 모래를 보거라." 힐끗 쳐다보던 자천릉이 탄성을 자아냈다. "자금사(紫金砂)!" 대개 모래 속에 섞여 있는 사금은 순도가 낮고 채취가 용이해 황금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거래된다. 허나 그 가운데 사금의 왕이라는 자금사만 은 백 년에 한 알을 얻기도 힘들다는 그 희귀성 때문에 사금업계에서는 제왕의 지보로 받들어지고 있었다. "그렇단다. 해란주의 해변에 널리 있는 이 수 많은 모래알들은 십중 구 할이 자금사 그 자체이지. 그것을 알고 있는 너와 나는 지상최고의 부자 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황금이 바닷가에 모래알로 널려 있으니 말이다." 이때 자천릉은 제갈교수의 말에 관심조차 없다는 듯 동문서답을 하고 있 었다. "돌할아범, 아까부터 다른 할아범들도 하나같이 내가 중원에 나갈 것이라 고 하는데 대체 무슨 일이지?" "릉아는 모르고 있었구나. 여러 할아버지들이 릉아에게 온갖 병장기와 기보들을 주면서 이제껏 무공을 가르친 데에는 기실 하나의 목적이 있단 다." "뭔데?" "흐흐, 그 목적은 그들이 너를 이용해 자신들이 중원땅에서 당한 한을 풀 고자 하는 것이지. 헌데 아까 그들이 나를 불렀던 것으로 보아 바로 내 일이 너를 중원에 내보내야만 하는 날인 듯 하구나." "그래?" 자신을 이용해 한을 갚으려 한다는 말에도 자천릉은 그저 담담해 보이자 제갈교수는 의외인 듯 눈을 크게 떴다. "기분 나쁘지 않느냐? 남이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이?" "별로... 당연한 일 아니야? 그 할아범은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고 병장기를 주었으니 자신들의 어떤 일을 부탁하는 것이." 제갈교수는 기이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하다? 허면 너는 야망이 없느냐?" "야망? 무슨 말이지?" "훗! 해란주에 결집된 천연의 기연들을 모두 얻고 이국수인들의 각종 무 학과 병장기들을 수습했으며 지상최강의 병장기인 혈왕사까지 몸에 품고 있는 너의 능력이라면 최소한 천하최고를 다투는 초절정고수는 능히 될 수 있을텐데, 한 번쯤 천하를 뒤흔들어 볼 웅지를 품을 수 있지 않겠느 냐?" "릉아는 도대체 돌할아범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자천릉이 코웃음을 치며 제갈교수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훗날 릉아가 천하에 이름을 떨 치고 모든 사람을 부린다는 말 같은데... 아직도 몰라. 릉아는 아직 어리 니까, 허나." "허나?" 제갈교수의 눈빛이 반짝 빛나는 순간 자천릉은 천천히 그러나 단호한 어 조로 말을 이었다. "릉아가 훗날 어른이 된다면 천하를 뒤흔들고 어쩌고 하는 초절정 고수 가 되고 싶지는 않아." "그렇다면?" "절대자, 천하를 뒤흔드는 초절정고수들을 수하로 부리는 절대자가 될거 야. 그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도 쳐다보지도 못할 절대자가!" 제갈교수가 움찔하였다. "그래, 훗! 할아범들처럼, 또 아버님처럼 남에게 잡혀와서 이따위 섬에서 신세한탄이나 하고 타인을 이용해 원한이나 갚을 생각을 하는 그런 졸렬 한 사람은 되지 않겠다는 거야." 제갈교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쳇! 바보같은 할아범들. 왜 똑같은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남보다 못해 잡혀오고 갇히고 하는 거지?" 이 비정하고도 광오한 일갈을 누가 십 이 세 소년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믿을 수가 있을 것인가. '역시!' 제갈교수는 내심 찬탄을 터뜨리다 무엇인가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급히 자천릉의 말을 잘랐다. "그, 그렇다면 누군가가 릉아의 야망을 방해하려고 앞길을 막는다면?" "그런 사람은 없을거야." "왜?" "릉아가 야망을 펴려 한다면 그때는 나의 야망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생 각하는 사람은 모두 죽어 있을 테니까." 제갈교수는 다급히 되물었다. "혹, 릉아의 아버지가 막아도 말이냐?" "그럴거야." 자천릉의 분명한 대답에 제갈교수의 얼굴은 움찔 기이하게 흔들렸다. '그래! 내가 지켜본 이 아이의 성품, 그리고 자륭극의 그 냉정함, 이 부 자는 자신들의 목적한 바를 위해서는 분명 아버지고 아들이고 없애버릴 인물들이다. 흐흐흐, 더욱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나와 본성을 위해서 자 륭극은 꼭 죽어줘야 할 인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