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내가 만드는 이야기

만황(卍皇) 1 - 5편 (5/50)

2026-09-21 21:18:45 조회 24
자륭극은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문득 음성을 잔 잔하게 내리깔았다. "릉아야. 이제 이 아버지는 중원으로 가게 된다." "뭐... 중원으로... 아버지가?" 묘하게도 자천릉의 음성은 비꼬는 듯이 튀어나왔다. 자륭극은 여전히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포 후면 죄인을 압송하는 관부금마선이 해란주에 온다. 이 아비는 그 것을 타고 중원으로 나간다." "...!" "내가 가는 길은 어쩌면 영원히 다시 오지 못할 길일는지도 모른다." "돌아올 수 없는 길... 그럼 죽으러 간다는 말이야?" 자천릉이 싸움이라도 하듯 팩 쏘아붙이자 자륭극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허헛. 릉아야, 이 아비가 네가 보기엔 조금 볼품이 없을지 몰라도 천하 의 그 누구도 이 아비를 죽일 수는 없다. 설사 지금 내가 찾아가는 그자 가 이 아비보다 몇 배 이상 강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 이다." 실로 광오하지 않은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라 해도 자신을 죽일 수 없다니 말이다. 초절정 고수들간의 싸움에서는 머리칼 한 올 만큼의 차이가 생사를 가르는 경우도 허다하거늘, 도대체가 있을 수도 없는 호 언장담이 아닌가. 자천릉의 눈빛에 의혹이 떠오르자 자륭극은 미소하며 말을 이었다. "왜냐하면 이 아비가 너와 린아(鱗兒)를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이 해란주 에 들어왔던 목적을 이미 달성했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아버지는 죄인이 아니었어?" "하핫, 해란주가 비록 수인의 땅이기는 하지만 꼭 죄인들만 들어오라는 법은 없단다." 그때 그들이 탄 난초 뗏목은 어느덧 검은 바다 흑해를 지나 지독히도 시 퍼런 물이 무섭게 출렁이는 기이한 해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에 따라 약 수백여 장밖에 그림처럼 떠 있는 하나의 섬이 시야에 들어 왔다. 둘레의 길이가 삼만 장은 족히 될 듯한 거대한 흰빛의 섬. 해란의 하얀 꽃술이 함박눈처럼 섬 전체를 덮으며 끝없이 펼쳐져 있는 환상의 미도, 바로 해란주가 아닌가. 뗏목이 점차 섬에 접근하자 산뜻한 해란향이 아득하도록 짙게 코를 찔러 왔다. 그 사이로 간간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악취가 풍겨 나오고 있었지 만, 그 눈부신 해란화의 물결 위로 이리저리 철새떼들이 날아가고 또 날 아오는 섬의 전경이란 실로 매혹적인 아름다움, 바로 그것이었다. 자륭극은 해란주가 떠 있는 녹색에 가까운 진청빛 바다를 내려다보며 말 을 이었다. "릉아야, 이 푸른 바다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느냐?" "천어독장(千魚毒場)이잖아?" "그래. 해란주의 수인들의 발길을 묶어놓는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독해 (毒海), 천어독장이란다." - 천어독장! 코끼리가 죽으면 제 무덤을 찾아 묻히듯, 물고기들이 죽어서 무덤을 이 루는 해역이 있다. 수천, 수만 년 동안 한 곳에 모여 죽어 간 물고기들의 시체가 썩어서 천하에서 가장 극강한 독수로 변해버린 죽음의 해역. 해란주를 제일 먼저 띠처럼 두르고 있는 이 짙푸른 녹빛 바다가 바로 그 물고기떼들의 무덤, 천어독장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천어독장을 뚫고 흑해에서 매일같이 낚시를 할 수 있지?" "땅에 길이 있고 하늘에도 길은 있듯이, 바다에도 어디든 길은 있단다." "......?" "두 눈에 보이지 않아도 바다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지. 그 보이지 않 는 해수의 흐름을 바다의 길, 곧 해류라고 한단다. 천어독장에도 물론 활 수(活水)가 흐르는 해류는 존재하지." 자륭극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해류가 있는 곳에선 천어독장의 악취와 해란의 향기가 미미하게 변화를 일으킨단다. 이 아비는 그 냄새의 변화를 쫓아 해류를 찾아내고 있는 것 이지." "으응." 그러고 보니 해란주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뗏목의 궤도는 일정치 않았 다. 마치 끊임없이 변하는 어떤 흐름을 따라 움직이기라도 하듯 기이한 곡선을 연속해서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돌연 자륭극이 접었던 은빛 우산을 펼쳐들며 나직하게 소리쳤다. "자, 보거라. 이 여왕산(女王傘)이 바로 아비가 그 누구와 싸워도 죽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자, 여기 해란주에 들어온 진정한 목적이다." 핑그르르! 은빛 우산이 활짝 펼쳐짐과 동시에 천어독장 위를 스치듯 회전했다. 찰 나 우산살의 한쪽 끝이 핏방울이 돋아난 듯 붉게 변하며 순식간에 은빛 우산이 모래가 피를 빨아들이듯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붉 은 기운은 우산을 쥔 자륭극의 손을 타고 넘어 팔뚝으로, 어깨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것이 아닌가. 삽시간에 자륭극의 두 팔과 가슴은 피묻은 독검처럼 시뻘겋게 물들고 그 의 희디흰 백미마저 악마의 눈썹인 양 핏빛으로 물드는 순간이었다. "여왕산, 제일산(第一傘)! 적살비산(赤殺飛傘)!" 자륭극의 입에서 여명을 무너뜨리는 사자후가 터져나왔다. 패액! 핏빛으로 물든 우산 끝에서 우산살 한 대가 빨간 불꽃처럼 흑해를 향해 쏘아졌다. 쐐애애액! 연이어 무수한 핏빛 우산살들이 꼬리를 물고 쏟아져 나왔다. 우산살들은 한 줄기 혈선으로 화하여 매서운 포말을 일으키며 자로 잰 듯 흑해를 갈라들어 갔다. 순간 새빨간 실뱀떼가 한 줄로 바다 위에 원을 그리듯 수백, 수천의 우 산살들이 방원 일백여 장의 타원형을 형성함과 동시에 쏘아져 나갔던 우 산살들이 원래 꽂혀 있던 자리에 차례로 빨려 들었다. 헌데 보라. 빨간 원의 흔적이 환상처럼 꺼져버린 검은 물결 위에 거의 찰나의 간격으로 이번에는 새하얀 원이 떠오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허옇게 배를 까뒤집고 떠오르는 끝없는 흑해능치떼들의 주검이었으 니. 어찌 이것을 한 인간의 병장기에서 펼쳐진 무학의 힘이라 할 것인가? 아 니 그것은 무학이 아니었다. 억년을 썩어 온 천어독장, 그 미증유의 독기 가 인세의 한 마병을 빌어 헌신하고 있는 것이었을 뿐이었다. "보았느냐? 이 여왕산은 잊혀진 전설의 땅, 서역의 파라문제국에서 흘러 들어온 여왕의 우산이다. 나는 스스로 여왕은산이라 이름붙인 이 한 개 의 우산으로 억겁보다 더 깊은 천어독장의 독력(毒力)을 낚아올린 것이 다." 자륭극은 어느새 은빛으로 돌아와 있는 우산을 다시 접으며 낮고도 웅후 한 음성을 흘려냈다. "아비는 이 여왕은산에 다시 세 개의 이름을 붙였다.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파라문제국을 기념하는 태양왕산(太陽王傘), 날카롭고도 파괴적인 공격능력에 착안한 살인광산, 천어독장의 독기에서 얻어졌음을 기리는 천어독산등이 그것들이다." "태양왕산... 살인광산... 천어독산." 자륭극의 말을 되받아 뇌까리는 자천릉의 음성이 왠지 격한 떨림을 일으 키고 있었다. 그 순간 자천릉의 천진한 눈빛 속에 어려 있던 녹색 우수 의 그늘은 돌연 가공할 녹광의 줄기로 화한 악마의 별떨기인 양, 혹은 검은고양이의 눈빛인 양 새파랗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녹 색악마의 눈이었다. 무심코 아들을 바라보다 그 눈빛과 마주친 자륭극은 흠칫 눈빛이 흔들렸 다. '저 눈은 흡사 피를 부르는 병장기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듯 하구나!' 그때 난초 뗏목은 어느 사이엔가 천어독장의 물결을 헤쳐나와 해란주 어 귀에 닿고 있었다. 자천릉의 섬뜩한 눈빛은 어느새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치이, 내일 낚시 때 잡을 흑해능치만 모조리 없애고 말았잖아!" 자천릉은 퉁명스럽게 투덜거리며 백사장에 내려 화사한 해란의 숲길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허리춤에는 흑해능치 두 마리를 담은 망태기를 끼고 멀어지는 아들의 모 습을 바라보던 자륭극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뇌까림이 흘러나온 것은 바 로 이때였다. "나는 저런 걸음걸이를 가르친 적이 없다. 아마도 장백의 살인자, 그들이 가르친 것임에 분명하리라." 자륭극의 시선은 자천릉의 발걸음을 싸늘하게 뒤쫓고 있었다. 헌데 자천릉이 걸어간 백사장에는 실로 괴이한 족인(族印)이 남겨져 있 었다. 발바닥은 하나도 찍히지 않고 오로지 다섯 개의 둥근 점, 곧 다섯 발가락의 형태만이 기다랗게 찍혀져 있는 것이아닌가. 그것은 야수의 발자국이었다.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하는 야수의 생존법칙대로, 걸음걸이조차 뒤꿈치를 들고 발가락만으로 움직여 나가는 본능의 발자국. "운명치고는 너무도 공교로운 운명이다. 십 이년 전, 내가 릉과 린아를 데리고 해란주에 들어 왔던 목적 중의 하나는 수인들의 중원탈출을 감시 하기 위함이었거늘." 자륭극의 음성은 점차 쓰디쓴 고소를 닮아가고 있었다. "헛허, 그럴 테지. 내가 그들이었다 해도 릉아의 몸에 잠재된 초상감각, 그 무서운 힘을 발견했다면 당연히 릉아를 택했을 것이다." 자천릉의 몸에 잠재된 무서운 힘이라면 그것은 혹시 어둠 속에서 사마우 치와 천일매가 탄 배를 끌어당기던 그 기이한 힘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 까? "허나 그들 이국수인(異國囚人)들이 릉아를 조련시켜 중원에 내보내려는 목적은 그들이 중원에 품은 한을 갚으려 함인 것!" 자륭극은 아들의 뒷모습을 아프게 직시하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너는 나에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지만 대명은 또한 둘이 있을 수 없는 영원한 나의 모국, 이국의 수인들이 너를 통해 대명에 도전하려 하는 이상 나는 대명의 명예와 백성들의 평안을 위해 릉아... 너를 죽여야 한다!"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해란주의 수인들이 자천릉을 가르쳐 탈출시키려 하고 있고, 그래서 그는 아들인 자천릉을 죽여야 한다니. 자천릉의 모습이 사라진 해란의 숲 위를 바라보고 있는 자륭극의 눈가에 어두운 빛이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타인에게 살해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아비의 손에 죽는 것이 나으리라. 릉아, 너는 이 아비의 자랑스런 아들이자 대명의 이름에 티끌 만큼의 부끄러움도 없는 자랑스런 중원의 아들이니까." 진정 그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하고 있단 말인가? 거대한 대폭풍의 핵을 잉태한 채 밝아오는 여명의 햇살을 받고 있는 여 기는 저주받은 수인의 마을 해란주였다. ② 여명이 비추는 해란주. 그 넓고 완만한 경사를 타고 눈발처럼 뿌려진 야 생의 해란들은 숨이 멈춰버릴 듯 강렬한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이따금 후두둑 떼지어 날아오는 철새들만이 정적을 깨칠 뿐, 사람의 자 취라고는 그림자 하나 어른거리지 않는 광활한 섬. 허나 누가 알 것인가? 이 평화로운 섬이야말로 창살없는 감옥,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수인들의 지옥도임을. 저 눈부신 해란꽃 한 송이가 바로 하얗게 미소하는 악마의 창살이런가, 아니면 저 평온한 정적이야말로 수인들의 숨통을 조르는 악마의 사슬이 런가. 그러나 그 모든 공포의 흔적들은 보이지 않는 장막 저편에 숨겨 둔 채 이 아침의 해란주는 그저 신선한 아름다움에 잠긴 평화의 땅이 되어 있 었다. 자천릉은 백사장을 벗어나 화사한 해란의 숲길을 헤쳐 들어가고 있었다. 해란의 줄기들은 자천릉의 키보다 두 배는 높다랗게 자라있어 흡사 작은 짐승이 갈대숲을 헤치고 있는 광경을 연상케 했다. 후두둑! 해란에 손이 닿을 때마다 어딘선가 숨어있던 철새들이 소스라쳐 창공으 로 날아올랐다. 해란의 줄기와 줄기 사이에는 무수한 철새떼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던 것이었다. 거의 반각 쯤을 걸었을까? 자천릉의 눈길이 눈 앞에 놓여있는 철새 둥지 에 멈춰졌다. 헌데 놀랍게도 커다란 새둥지 속에는 새가 아니라 팔, 구 세 가량의 어 린 계집아이 하나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지 않은가. 인형같은 소녀였다. 보드랍게 솟은 콧날, 한없이 선하게 다물린 주홍빛 입술, 그 위에 얼굴의 반을 차지할 듯 커다란 눈망울을 내리감은 채 새 처럼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소녀의 모습은 지독히도 앙증맞고 귀여웠다. 작은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해란꽃 보다도 희고 눈부신 백의였다. 흰옷 의 어린 천사가 거기서 잠들어 있는 듯, 소녀의 얼굴에는 도저히 이 저 주받은 지옥과는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자천릉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소녀의 머리를 건드렸다. "으응?" 소녀가 깨어나는 기척을 보이자 자천릉은 냉랭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뭐하러 나와 있어? 몸도 약해 빠진 녀석이!" "흐우, 오빠? 오빠구나!" 소녀는 가볍게 눈을 부비다 말고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왜 이제 왔어? 린아는 여기서 밤새도록 기다렸는데." 이때 야옹! 하는 소리와 함께 자천릉의 품 속에서 검은 고양이가 발딱 튀어나와 소녀에게 안겨들었다. "어마, 청아! 너도 오빠를 따라갔었구나!" 응석을 부리는 검은고양이를 어르는 소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또 한마디 의 귀여운 새끼 고양이였다. "아버지가 왔어. 집으로 가봐." 자천릉은 건조하게 한 마디를 내뱉고는 그대로 소녀의 앞을 스쳐 걸어가 기 시작했다. "싫, 싫어! 같이 가!" 소녀는 금세 울상이 되어 자천릉의 뒤를 쫓아갔다. 이들은 오누이 간이었나? 그렇다. 이들은 바로 자륭극의 아들과 딸이었 다. 지옥의 섬 해란주에서 유일한 한떨기 천사의 꽃으로 빛나는 소녀의 이름 은 자예린이었다. 이때 자천릉의 뒤를 허겁지겁 따르는 자예린은 도저히 자천릉의 걸음을 따라 잡을 수 없어 숨이 턱끝에 닿고 있었다. 점점 빨라지며 멀어져 가는 자천릉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예린의 귀여운 얼굴은 그만 울상이 되고 말았다. 헌데 해란의 뿌리에 걸리기라도 한 것일까? "어맛!" 자예린은 뜀박질을 하다가 털썩 땅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해란꽃보다도 하얗던 자예린의 옷은 금새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허나 멀어져 가는 자천릉의 발걸음은 조금도 멈춰질 줄을 몰랐다. "오빠, 같이 가! 린아가 할 얘기가 있단 말야!" 자예린은 절룩거리며 다시 뜀박질을 시작했지만 이내 또다시 굵은 나무 등걸에 걸려 쓰러졌다. "아휴! 오빠야... 린아가 넘어졌는데도 그냥 가기만 할거야?" 애처로운 절규(?)에도 대답이 없자 자예린은 분에 복받친 듯 그만 빽 고 함을 질러버렸다. "릉아야!" 릉아야? 자천릉의 얼굴이 그제야 자예린을 향해 돌려졌다. 헌데 기이하게도 자예린을 바라보는 자천릉의 시선 속에는 어떤 아릿한 슬픔의 빛이 빠르게 스쳐가고 있지 않은가? '바보같은 녀석. 네가 아무리 착하고 예뻐도 귀여워해 줄 우리의 어머니 는 이미 세상에 없단 말야.' 그의 내심에도 이렇듯 어머니에 대한 가슴아픈 갈증이 숨겨져 있었던가? 이때 자천릉은 아무말 없이 자예린에게로 걸어와 털썩 등을 돌리며 주저 앉았다. "업혀." 순간 찌푸려졌던 소녀의 흙투성이 얼굴에 햇살보다 더 고운 웃음이 함초 롬히 피어났다. "후우! 고마와, 오빠." 자예린이 쪼르르 업히자 자천릉은 말없이 흑해능치를 건네주고는 걸음을 떼었다. "오빠야. 지금 팔이오(八二五) 할아범한테 가는 거야?" "그래." "아이, 린아가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 화난 거야?" "화나지 않았어." 자천릉의 대답은 언제나 짧고 간결했다. 마치 어미고양이가 두 마리 새 끼고양이를 하나는 업고 또 하나는 품고 숲길을 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 는 그들의 멀어져 가는 등그림자 위로 찬란한 여명의 햇살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한동안 말없이 걷던 자천릉이 무뚝뚝하게 말을 던졌다. "아버지가 중원에 나간대." "아버지가?" "너는 어떻게 할거야?" "오빠는 어떻게 할 건데?" "나는 가지 않아." "그럼 린아도 가지 않을 테야!" "안돼. 너는 아버지를 따라가야 해." 단호한 말에 자예린의 선하디 선한 얼굴에 하나가득 우울한 그림자가 피 어났다. "싫어! 린아는 오빠랑 같이 있을 거야!" 금방이라도 눈물을 와르르 쏟을 듯한 눈으로 도리질을 하는 자예린. "제기, 마음대로 해! 가뜩이나 몸도 약한 게 고집만 세어 가지고." 이때 유난히 무성하게 뒤엉킨 해란의 덤불이 자천릉의 발길을 가로막았 다. 덤불 너머로는 지옥으로 향하는 통로처럼 어둡고 음습한 동굴의 입구가 은은히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그 동굴은 해란주 전역에 벌집처럼 뚫려있는 헤아릴 수 없는 암굴들 중 의 하나였다. 자천릉이 덤불을 젖히는 순간 말로 형언 못할 써늘한 기운이 왈칵 온몸 에 끼쳐왔다. 동시에 코끝을 자극하는 것은 바다내음에 섞인 토굴 특유 의 퀴퀴한 흙냄새였다. 그와 함께 은은한 붉은 불빛에 싸인 동굴의 전경이 한눈에 쏘아져 들어 왔다. 대략 육, 칠 평쯤 되어 보이는 넓이의 공간이었는데 놀랍게도 처음 대했 던 그 사이로운 한기와는 달리 동굴 안은 흡사 평범한 주택의 부엌을 옮 겨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삼분지 일 가량은 도마와 칼, 그리고 요리도구들이 갖추어진 작은 주방 이었고, 그 앞에 원형의 돌로 된 식탁이 놓여 있었으며 식탁의 발치에는 어른의 팔뚝이 거의 잠길 만한 깊이의 물웅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타닥! 입구 정면의 석벽에는 만주지방 고유의 풍물인 벽난로가 벌겋게 타며 실 내에 섬뜩하고 음산한 느낌의 붉은 조명을 드리우고 있었다. 자천릉이 막 동굴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으려 할 때였다. "불은 언제나 똑같다. 중원에서도, 내 고향 해가 뜨는 나라 동영에서도... 그리고 이 지옥같은 섬 해란주에서도." 벽난로가 있는 쪽에서 돌연 깨진 질그릇을 가는 듯 듣기 거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곳에는 언제부터인가 걸레같은 회의를 걸치고 불길을 응시하며 앉아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어린아이의 키에 어른 두 명을 합쳐놓은 듯 비대하고 땅딸한 체구의 노 인이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일까? 자천릉과 자예린이 뒤에 다가서고 있음에 도 회의노인은 불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불 속에 던져 넣 으며 혼잣말을 뇌까리고 있었다. "헌데 지금 이 불을 바라보는 나는 왜 이렇게 늙었는가? 또한 나의 친구 는 왜 죽어가야 하고 나는 그 친구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으 며... 또 이렇게 뼈를 뿌려야만 하는가." 불길 속에 던져지고 있는 물체는 놀랍게도 곱게 갈아 횟가루처럼 보이는 사자(死者)의 뼈였다. 헌데 불길에 반사되어 보이는 노인의 이마에는 한 마리 푸른 독수리가 창공으로 비산하는 형상의 문신이 불로 지진 흉터처럼 흉측하게 찍혀져 있지 않은가. 아니 그것은 문신이 아니었다. 종신토록 지워지지 않는 형벌의 멍에, 바로 처절한 유형의 낙인이었던 것이다. 그 아래 지렁이처럼 불거져나온 <팔일오> 라는 세 개의 숫자는 이 노인 이 수번(囚番) 팔백 십 오 호(號)인 해란주의 수인임을 참혹한 흔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었다. 회의노인은 한 옆에 쌓인 뼛가루를 또 한줌 집어 불 속에 던져 넣었다. 타닥! 불길은 더욱 거세게 일렁이며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 타올라라! 저 불길로 타는 그대의 고운 뼛가루처럼 이 지옥 속에 갇혀 날개를 접고 스러져야 했던 그대의 혼도, 야망도 한 떨기 불꽃으로 찬란하게 피어나 불타올라라!" 빨아들일 듯 불길을 직시하는 노인의 두 눈은 실로 괴이했다. 분명 장작 불을 보고 있으면서도 또한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는 듯 퀭한 눈이었 다. 장님이었던가? 흰자위만 허옇게 드러나 있는 그 눈에 훨훨 타오르는 불 그림자가 비치자 마치 원래부터 핏빛 동공이었기라도 하듯 요기서린 공 포를 불러 일으켰다. 타다닥! 마지막 한 줌의 뼛가루를 던져넣은 회의노인은 천천히 자신의 이마를 매 만졌다. "이 시퍼런 낙인, 클클! 곤오풍우 그놈이 자랑하고 중원인들이 그토록 위 대하게 숭앙하는 푸른 독수리의 문장이다. 곤오풍우 그놈이 손수 찍은 거룩한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상징이지." 그의 이마에 참혹하게 찍혀진 저 푸른 독수리의 낙인이 바로 십팔만사천 백와마루를 상징하는 문장이었단 말인가? "클클! 그놈은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찍었겠지만... 어쨌든 고 맙다. 이 낙인으로 인해 나는 단 한번도 네놈 곤오풍우의 낯짝을 잊어버 리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이빨이 부러지고 악물린 입술 사이로 선혈이 튀었다. "걱정하지는 않아도 좋다. 네놈에게 낙인을 찍히고서도 최후까지 해란주 에 살아남은 이방십칠인(異邦十七人)의 생존자들, 바로 우리들 모두의 한 을 대신하여 네놈의 이마에 낙인을 돌려줄 릉아가 있으니 말이다! 클 클...." 그때 자예린이 자천릉의 등에서 뛰어내려 노인의 비대한 살집을 콕콕 찌 르며 물었다. "팔일오할아범. 뭘하고 있는 거야?" 팔일오(八一五) 할아범, 회의노인은 이름 대신 이렇듯 수인번호로써 불리 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듯 회의노인이 대답했다. "클! 린아가 왔구나. 이 할아범은 지금 불의 기운을 헤아려 보고 있단다." "불의 기운?" 자예린의 크고 검은 눈동자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불은 삶과 죽음의 기운을 동시에 갖고 있는 지상에서 가장 오래된 병장 기란다." "......?" "불은 노하면 모든 것을 태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처음 태어나 게 하는 것도 또한 불이지. 그래서 불은 인간이 잡아가두면 인간을 태워 죽이기도 하고 사람이 먹고 살 음식을 만들기도 하는 아주 기특한 재주 를 피운단다." 자예린이 고개를 갸웃하였다. 회의노인이 빙긋이 웃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요리에 있어서 불의 크고 작음과 높고 낮음 만큼 긴요한 요소는 없다는 사실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