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황(卍皇) 1 - 4편 (4/50)
사마우치가 벌떡 일어나더니 황급히 허리를 굽히며 천일매에게 전음을 던졌다. (어서 예를 취하게. 저분이 바로 우리가 뵙고자 하던 그분...) 그의 전음이 끝나기도 전에 예의 청량한 음성이 재차 어둠을 울렸다. "하하! 그만 두시게. 나는 강호의 일개 무인, 어찌 관부의 대인들에게 예 를 받을 수 있겠나?"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앞쪽 약 삼 장쯤의 어둠 속에 언제부터인가 한 척 의 배가 고요히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것은 나룻배라기 보다 난 초줄기를 엮어 만든 허름한 뗏목이었다. 뗏목 위에는 은빛 우산으로 폭우를 가리고 서서 길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한 청의문사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은은히 보였다. 단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 뿐인데도 청의문사의 모습은 대해 전체를 딛고 서 있는 듯 무상(無上)의 위엄을 흘려내고 있었다. 대략 사십 줄의 나이로 보이는 청의문사의 외관은 마치 몇 줄기 힘찬 선 으로 담백하게 그려진 수묵화 속의 인물을 보듯 탈속하고 유유자적해 보 였다. 헌데 특이하게도 두 눈썹은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날 만큼 희디흰 백 미여서 그의 신태에 한층 중후한 기도를 더해주고 있었다. '저분이 바로 자대인. 흡사 모든 것과 싸워 이긴 후 스스로 다시 그 속에 머물고 있는 해탈의 거인을 보는 듯하다. 아아!' 천일매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경탄의 빛이 피어올랐다. '어쩌면 나는 저 모습만으로도 죽을 때까지 저 분을 존경하게 될 것만 같다.' 이 탈속한 청의문사가 바로 사마우치의 입을 통해 무한의 찬사와 외경을 들었던 자륭극이란 말인가? 어둠 속에서 연왕반정의 거대한 역사를 주재했고 하사받은 왕호를 거절 하면서 스스로 악마의 섬 해란주에 들어간 기인이며 최강의 초마인과 유 일하게 오대 오의 승부를 결할 자격이 있는 천하제일인이라고까지 말하 여졌던 바로 그 사람. 사마우치가 천천히 허리를 펴며 하례를 올렸다. "허허, 자대인께서는 여전하시군요. 십이 년 전에 뵈었던 그 웅풍과 위엄 이 오히려 한층 짙어지신 것 같습니다." "하핫! 그래, 무슨 일인가? 대명 관부의 대인들께서 어찌 이 후미진 바다 의 한 구석까지 왕림하셨나?" 자륭극은 가벼운 웃음으로 예를 대신하며 두 사람을 응시했다. 헌데 사마우치와 천일매는 왠지 선뜻 대답을 않은 채 난처한 표정으로 자륭극의 뒷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뗏목 위에는 자륭극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한 자그마한 흑영이 자륭극 을 등지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색을 눈치 챈 자륭극이 돌연 청량한 대소를 터뜨렸다. "괜찮네. 나의 아들 천릉(天 )이라네. 이 아이는 자신의 일이 아니면 무 관심하고 설사 기억했다 하더라도 금방 잊어버리고 마는 괴벽을 가진 아 이니까." 자륭극이 힐끗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릉아야. 이 두 분께 인사를 드리려무나." 흑영의 고개가 천천히 전면을 향해 돌려졌다. 그 순간 음산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섬ㅉ하게 울리더니, 번쩍! 하면서 얼 굴이 나타나야 할 곳에서 네 개의 불빛이 퍼뜩 빛나는 것이 아닌가. "헛!" 사마우치와 천일매는 동시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허나 그들은 이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돌린 소년은 품에 검은 고양이를 안고 있었다. 두 사람이 본 것은 바로 소년과 고양이의 눈동자였던 것이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괴물을 본 것같은 느낌에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도 등 골에 오한이 드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검은 고양이의 눈빛과 저 아이의 눈빛이 똑같구나. 어찌 사람의 눈빛이 고양이의 그것과 똑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더욱 놀란 것은 소년의 용모였다. '저 얼굴은 계림인(鷄林人)인 같기도 하고 동영인(東瀛人)을 닮았는가 하 면 서역인과 천축인(天竺人)과도 흡사하다. 그렇다고 해서 중원인의 얼굴 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너무도 특이한 모습이구나.' 소년은 지독히도 괴이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인종의 얼굴을 닮 아 있으되, 결코 그 어느 한 가지로 꼬집어 말할 수도 없는 얼굴이었다. 사마우치는 순간적으로 섬뜩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저것은 신의 얼굴이 아니면... 저주받은 악마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이때 안색이 핼쓱하게 질려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 다. "난 천릉이야." 소년은 그 한 마디만을 내뱉고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고개를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리고 있었다. 헌데 소년의 눈과 마주쳤던 사마우치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기, 기이한 일이다. 저 아이의 눈빛을 마주 본 순간 왠지 전신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하지 않은가! 흡사 악마에게 영혼을 빨아 먹히고 있는 것처럼!' 사마우치는 순간적이었지만 소년의 눈을 마주보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 며 온몸이 축 쳐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헌데 이때 더욱 놀라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이 타고 있는 모피선은 소년이 고개를 돌린 방향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나?' 그는 맹렬하게 자신의 고개를 젓고는 다시 한 번 소년과 모피선을 번갈 아 보았다. 역시 모피선은 소년의 눈길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맙소사!' 그는 너무나 놀라 천일매를 돌아보았다. 천일매의 얼굴을 본 사마우치는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천일매의 표정은 사마우치의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 역시 이 기괴한 현상 에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이때 사마우치와 천일매가 탄 모피선은 일 장 앞까지 나아가다 멈추어 있었다. 자륭극이 두 사람의 넋나간 얼굴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하하, 신경 쓸 것 없네. 배가 파도에 휩쓸린 것 뿐이니까." 사마우치와 천일매는 동시에 마음 속으로 격렬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분명 배는 움직였다!' '저 아이의 눈빛은 틀림없이 배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렇다. 분명 배는 움직였다. 그것도 파도 따위에 휩쓸려서가 아니라 분 명 소년의 눈빛에 의한 이동이었다. 그러나 이 불가사의한 기현상을 도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기괴한 상념을 자륭극의 온화한 음성이 부드럽게 깨뜨렸다. "이제 본좌를 찾은 이유를 말해 줄 때가 된 것 같네만?" 사마우치는 그제서야 자신의 임무를 경각한 듯 품 속에서 하나의 금낭을 꺼내들었다. "주군께서 이것을 자대인께 드리고 그자를 제거하라는 천명을 내리셨습 니다." "그자를!" 금낭을 받아드는 자륭극의 얼굴이 미소짓던 표정 그대로 석고처럼 굳어 지고 있었다. "상(上)께서 드디어 용단을 내리셨다니... 그렇다면 이제 때가 왔다는 말 인가?" 헌데 그 순간 금낭의 매듭을 풀던 자륭극의 손길이 돌연 칼로 자르듯 멈 춰섰다. "이, 이것은 청룡소(靑龍簫)와 홍황적(紅凰笛)!" 금낭 속에는 한 자 정도의 길이로 보이는 두 개의 피리가 어둠 속에 황 홀한 빛을 뿌리고 있지 않은가. 비취색을 발하는 용을 새긴 퉁소와 구름에 물든 노을빛처럼 부드러운 홍 광에 감싸인 봉황 문양의 피리였다. 그것을 쳐다보던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눈도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오, 저것은 난세십승(亂世十僧)의 이국십보(異國十寶)!' '난세십승 중 청룡성승(靑龍聖僧)과 홍황요니(紅凰妖尼)의 유물이 금낭 속에 있었다니.' - 난세십승(亂世十僧)의 이국십보(異國十寶). 그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꼭 일천 오백 년 전 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다. 중원에 역사 문명이 탄생한 이후 두 번째 통일황조인 진나라가 건국 되기 직전, 그 미증유의 핏빛 전란기(戰亂期)인 전국시대(戰國時代). 중토(中土)에서 시작된 난세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먼 이역의 열방제국(列邦諸國)으로 거침없이 번져갔다. 그 위기의 시대에 서천축의 기승인 천룡성승이 불타의 힘으로 난세의 불 길을 진화하고자 애불륵사봉(埃佛勒斯峯)을 나와 불교의 요람이며 중원 최초의 사찰이라는 낙양 백마사를 향해 고행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헌데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와 같은 시기에 남황, 서장, 계림, 동영, 영 하, 북국 등 아홉 변방의 이국(異國)에서도 아홉 명의 불제자들이 각각 중토를 향해 대장정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를 일러 세인들은 동서남북 천지사방에서 시작된 십국불자(十國佛者) 의 십주대장정(十洲大長征)이라 칭하고 그 이국승인들을 난세십승이라 불렀다. 불타의 힘을 희구하는 불제자들의 염원 때문일까? 사상 미증유의 혼돈이라 칭해지던 전국시대의 난세는 마침내 종식되고 말았다. 난세십승은 각자 지니고 있던 열 개의 기보에 다시는 이땅에 난세가 도 래해선 안된다는 염원과 함께 그들의 모든 절예를 담아 낙양 백마사에 남겼다. 헌데 공교롭게도 난세십승이 본국으로 돌아간 직후 중원천하는 다시금 걷잡을 수 없는 난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으니. 난세를 막기 위해 남긴 열 개의 기보가 오히려 난세를 만드는 거대한 불 씨로 화하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중 서천축의 청룡성승이 남긴 청룡소와 남황의 홍황요니 가 남긴 홍황적이 뜻밖에도 황제가 내린 금낭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헌데 지금 자륭극의 시선에는 사마우치와 천일매가 이국십보의 출현에 경악하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어떤 복잡한 감정의 격랑이 물결치고 있 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침묵 속에 흘렀을까? 문득 자륭극의 시선이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얼굴에 정면으로 꽂혀졌다. "본좌 또한 대명의 신민, 황상의 천명을 완수할 의무가 있는 몸, 더욱이 상께서 친히 청룡소와 홍황적까지 내리셨거늘 어찌 더 이상 거절할 명분 이 서겠는가." "현안이십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긴장하고 있던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얼굴이 일시에 환하게 피어났다. 자 륭극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밝아오는 밤하늘에 시선을 던 졌다. "본좌는 상의 지기로 새로운 대명황조를 건국하는데 미력하나마 일조를 했던 사람. 국가대사와 관련된 일에 응당 책임이 없을 수 없지." 순간 천일매의 얼굴이 터져오르는 흥분으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드디어, 시작됐다. 오천 년 무림사가 낳은 사상 최강의 초마인과 정체를 알 수 없기에 더욱 무서운 신비의 무인 자륭극대인 간의 그 천세의 용쟁 호투가. 과연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일까? 숨이 막혀올 듯 하구나.' 자륭극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한쪽은 늙을대로 늙은 거목, 다른 한쪽은 새로운 힘을 얻어 뻗어나가는 어린 나무. 어린 나무가 장성하기 위해서 늙은 거목이 베어져야 함은 너 무도 당연한 숲의 섭리!" 사마우치가 빙그레 웃으며 받았다. "허헛, 그렇습니다. 주군께서는 그 늙은 거목을 베어낼 목수를 오랜 세월 동안 찾고 있었지요. 허나 종내 주군께서는 자대인을 지목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셨겠지. 상께서는 만의 하나 그자에게 본좌가 패한다면 가장 절친 한 지기를 잃게 될 것을 우려하셨을 것이네. 그래서 누구보다도 상의 고 충을 잘 이해하고 있는 본좌가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네." "...!" "허나, 대신 본좌 또한 부탁이 있네. 오늘로부터 정확히 달포 후 한 인물 이 해란주를 탈출할 것이네. 그자를 죽이게." "탈출을?" "아니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달포 후 그 있을 수 없는 일은 분명 있게 되네. 그자는 필시 상의 대업 앞에 거대한 마의 장막을 칠 인물, 관부의 전력을 걸고서라도 기필코 그 자를 죽이게." 사마우치와 천일매는 일순 멍하니 굳어져 버렸다. '관부의 운명을 걸고서라도 제거해야 하는 인물!' '대체 그자가 어떤 자이기에 대인께서 저렇게 말씀하신단 말인가?' 실로 엄청난 말이 아닌가. 천연의 함정이 천 년 고목의 나이테 만큼이나 에워싸고 있는 해란주. 수천 년 동안 유폐되었던 기라성같이 쟁쟁한 인 물들조차 단 한번도 탈출에 성공한 예가 없었던 그 해란주를 탈출하는 인물이 있단 말인가. 사마우치와 천일매의 얼굴이 침중하게 변색됐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합(合)!" 목례를 올리는 순간 그들을 태운 모피선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흑해 위로 미끌어지기 시작했다. 촤아아! 빗줄기는 악마의 파멸곡을 연주하며 순식간에 그들의 뒷모습을 삼켜 버 렸다. 그 순간 착각이었을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자륭극의 고요 한 얼굴에 칼날같은 한기가 덮여지는가 싶자 무섭도록 싸늘하게 돌변한 음성이 어둠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중원이 탄생시킨 오천 년 무림사 불세출의 기린아. 하늘 없는 땅, 십팔 만사천백와마루(十八萬四千白瓦魔樓)의 지존이며 명실공히 하늘의 삼분 지 이를 떠받들고 있는 단 한 사람. 그대 만세제일신마(萬歲第一神魔) 곤 오풍우(棍吾風宇)!" 꽈르릉! 어디선가 은은한 개벽성이 폭우를 뚫고 휘몰아쳤다. "그대는 너무도 오랜 세월동안 중원의 하늘을 덮고 있었다. 이제 이 시 대는 더 이상 그대의 일인독주를 원하지 않는다. 영원히 은막의 저편으 로 사라져 줘야 할 때가 왔다!" 번쩍! 두 눈에서 솟구친 안광이 섬전으로 화하기라도 한 것일까? 연이은 벽력성을 가르며 한 줄기 새파란 섬광이 흑해의 혼돈을 양단해 버렸다. 헌데 들었는가? 그 광란하는 대자연의 합주(合奏)속에서 너무도 또렷하 게 울려퍼지고 만 저 항거할 수 없는 공포의 이름을! 제3장 만세제일신마(萬世第一神魔) ① - 십팔만사천백와마루! - 만세제일신마 곤오풍우! 세인들은 말한다. 중원에 두 개의 성역이 있으니 하나는 북경의 자금성이요, 또 하나는 곤 륜의 십팔만사천백와마루라고. 자금성은 대륙을 통치하는 위대한 절대권력의 상징이다. 역사의 강이 굽 이치고 황조의 이름이 수없이 지워졌다 또 생겨나며 변혁의 격류가 몰아 칠 때마다 주인도, 또 위치도 바뀌어야 했던 영광의 거성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성역인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위용만은 수 천년 이래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는 초극강의 절대마인 일백인의 혼이 살아 숨쉬는 곳이기 때문이다. 저 높은 곳 광활한 곤륜의 산역, 장쾌하게 펼쳐진 만년설의 순백빛 그림 자보다도 더욱 장중한 위압으로 뒤덮여 있는 십팔만 사천 개의 백색 기 와가 숨막히는 위엄을 뿌리우는 곳. 그곳은 하늘 없는 땅이었다. 왜냐하 면 그곳이 곧 하늘이었으므로. 허나 분명한 것은 그 옛날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아득한 전설시대에도, 또한 한(漢)이 세워졌다 무너지고 난세가 오며 다시 수나라와 당(唐)이 시대를 바꾸어 역사 위에 섰을 때에도.... 그리고 마침내는 대명황조가 대륙 위에 자리한 오늘날에도, 십팔만사천 백와마루는 대곤륜산맥 가운데 우뚝 선 채 명멸하는 모든 영욕의 세월들 을 바라보며 중원의 하늘로, 또 무인의 하늘로 천하를 지배해 왔다는 사 실이었다. 흡사 언제나 변하지 않는 저 푸른 하늘처럼 저 땅과 저 바다 처럼. - 십팔만사천백와마루의 주인 만세제일신마 곤오풍우! 그는 원명(元明)의 역사가 흐름을 바꾸는 그 변혁과 혁신의 시대가 탄생 시킨 십팔만사천백와마루 사상 가장 위대한 주인이었다. 한 자루 검을 쥐어보고 한 필의 말을 타 본 일이 있는 무인이라면 누구든 이 사람을 안다. 지상 최강의 무인, 세수(歲壽) 아흔 여덟.... 이국민족 원이 중토를 지배하던 그 오욕의 역사 끝에서 태어나 백마(百 魔)를 이끌고 분연히 일어서서 한 자루 검으로 대륙의 끝에서 끝까지를 십자로 횡단하며 원의 무인들을 남김없이 휩쓸어 버린 피의 숙청자(肅淸 者). 그는 천하인들에게 오천 년 무림사가 낳은 최강의 초마인으로 불리우기 도 했지만, 또한 일대 영웅으로서의 경외를 동시에 받았다. 원의 영토를 필두로 수많은 변방이국들까지 전환하며 수 없는 재상과 장 군, 무인들을 죽이고 볼모로 만들었기에 그는 모든 이국인들에게는 적이 요, 중원인들에게는 간접적인 대명창업특등공신으로서 두려움과 흠모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살과 살, 뼈와 뼈가 맞부딪치는 그 처절한 싸움의 현장에서 체득한 실전무예의 일인자이며, 천하의 모든 병장기들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만 병제황이라고까지 불려지는 공전절후의 절대무인 곤오풍우. 그 거대한 이름이 바로 지금 이 황막한 흑해의 어둠 속에서 거론되고 있 는 것이다. 헌데 벽력성과 함께 울려퍼진 자륭극의 한 마디는 실로 가공스럽지 않은 가. - 이 시대는 더 이상 그대의 일인독주를 원하지 않는다! 영원히 은막의 저 편으로 사라져 주어야 한다! 그렇다. 하늘 없는 땅에 살아 이미 하늘이 되어 있는 그 사람 곤오풍우. 그 푸르른 하늘을 향해 마침내 불가사의한 신비고수 자륭극은 칼을 빼어 든 것이다. 그것은 바야흐로 대명에 새로운 황조가 들어선 지금, 대명태조창업공신 과 연왕반정을 막후에서 조정한 대명성조 개국공신과의 싸움을 의미했 다. 다시 말해 그것은 바로 대명의 새로운 제왕 성조 영락제가 무인의 성역, 십팔만사천백와마루를 더 이상 인정치 않고 천하를 대명주씨황조로 일통 하려 함을 뜻하는 것이었으니. 쏴아아아! 빗발은 이제 기세를 잃어가고 먼동이 트려는 듯 아득한 수평선의 언저리 는 점차 희뿌연 하나의 선으로 비쳐져 보이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암천만을 응시하고 있을 듯하던 자륭극이 천천히 쓰고 있던 은빛 우산을 접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놈, 여전하구나." 그러나 소년 자천릉은 무관심하게 낚시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자륭극의 입가에 고소가 맺혀졌다. 그는 아들의 성격을 익히 아는 듯 자 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건넸다. "릉아야. 그래, 고기는 많이 잡히느냐?" "별로." 자천릉은 마치 낚시를 방해 당해 불쾌하기라도 한 듯 퉁명스레 한 마디 를 내뱉었을 뿐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허어, 그놈." 자륭극은 어색한 미소를 띄며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이 부신 듯 눈살을 찌푸렸다. 시야를 아프도록 메우며 아릿하게 번져오는 저 찬연한 흑해의 여명이여. 빗발은 어느덧 그쳐 있었다. 어둠이 달아나며 남긴 밤의 잔해인가? 안개는 바야흐로 밝아오는 광활한 해원을 덮으며 새벽을 노래하는데, 간밤의 음산했던 광란의 기억은 어느 새 잊어버린 듯, 더없이 투명한 흑진주빛 물결로 고요하게 출렁이는 새 벽바다의 평화로움은 또 무어라고 형언해야 옳을까? 침묵의 바다 위로 잔잔하게 번져오는 장엄한 태양의 숨결, 때마침 멀리 해란주로부터 황홀한 해란향이 흘러들자 흑해의 새벽은 말할 수 없이 신 선한 감동으로 물들고 있었다. '좋군! 흑해의 검은 물결이 이토록 맑고 신선해 보일 수 있음을 아는 이 는 이곳의 사람들 외에는 없으리라.' 자륭극은 내심 탄성을 흘리며 아들을 향해 뇌까리듯 음성을 흘렸다. "릉아야, 바다낚시와 민물낚시의 차이점을 아느냐?" 조금은 엉뚱한 물음이었다. "민물낚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자천릉은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하핫, 그럴테지. 릉아는 아직 해란주 밖을 나가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 만 이제 곧 릉아도 민물낚시를 하게 될 날이 온단다." 자륭극은 빙그레 웃으며 아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민물낚시는 부드럽고 바다낚시는 거칠지. 민물낚시가 정적인 면에서 여 인이나 선비들의 도락이라면 바다낚시는 동적인 면에서 무인과 투사들의 도락이란다." 자천릉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싸움을 사랑하는 사내들은 바다를 사랑하고 또 바다낚시를 사랑 하지. 선비들이 민물낚시를 통해 인격을 낚는다면 사내들은 바다낚시에 서 무인의 혼을 낚는 것이란다." 그때서야 비로소 자천륭의 얼굴이 부친을 향해 돌려졌다. "내가 바다낚시를 사랑하다니, 그럼 중원으로 나갈 수 있다는 말이야?" 그때 찬란하게 퍼부어지는 여명의 햇살 속으로 떠오르는 자천릉의 얼굴 이 보였다. 대략 십이 세 쯤이나 되었을까?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피가 터져나올 듯 창백하도록 희디흰 얼굴, 그 아래 면도칼로 자른 듯 날카롭 고 섬세한 눈썹과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한 보석을 박아넣은 듯 맑디맑은 두 눈, 고집스레 뻗어내린 조각같은 콧날과 여인처럼 얇은 자두빛 입술 이 어울린 그 얼굴은 고요하도록 천진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헌데 지난 밤 검은 고양이의 눈빛처럼 빛나던 섬뜩한 광기와 계림인과 도, 동영인과도 또 천축인과도 같아 보이던 그 기이했던 인상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 천진한 천사의 눈빛 속에는 언뜻언뜻 그림자처럼 녹색 우수가 스쳐가 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은 자천릉의 시리도록 흰 피부와 녹색의 우수가 만 들어 낸 눈의 환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가? 그때 자천릉의 반문에 자륭극은 대답 대신 청룡소와 홍황적이 있는 금낭 을 꺼내 자천릉에게 건넸다. "네가 지니고 있거라. 네 어머니의 유품이니까." "...!" "네 어머니와 아비가 사랑의 증표로 삼았던 그 물건들은 천 오백 년 전 난세십승이 남긴 이국십보 중의 두 가지, 어쩌면 너를 더욱 강하게 만들 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자천릉에게는 어머니가 없었던가. 허나 자천릉의 시선은 말없이, 아무 흔들림도 없이 한참동안 금낭 위에 머물러 있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