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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황(卍皇) 1 - 1편 (1/50)

2026-09-21 21:18:45 조회 29
천중행·천중화 공저 차례 제1장 양지와 음지 제2장 바다의 아들! 제3장 만세제일신마(萬世第一神魔) 제4장 만황(卍皇) 제5장 부나비도(不癩卑島) 제6장 이국십보(異國十寶) 제7장 죽음의 탈출 제8장 시작된 죽음의 요리! 제9장 살인경주 제10장 십만철로(十萬鐵路) 서문 <卍>. 범어에서는 일만 만자를 이렇게 쓴다. 허나 그 글자가 본디 부처의 가슴 에 있다고 전해지는 형상을 상형화한 것임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보다 의미를 확대하면 <卍>은 모든 정신적인 것, 혹은 영혼적인 것을 상징하는 <어떤 알지 못할 무한한 힘>을 가리키는 표상이 되는 것이다. <만황>의 주인공 자천릉(紫天 )이 가지고 있는 정체불명의 힘, 그 오묘 한 영혼의 섭리를 담는 그릇으로써 우리는 <卍>을 사용하였다. 만황 자천릉, 그 자신 너무도 뛰어났기에 스스로의 보호본능에 의해 마음의 문을 닫아 야 했던 사내. 그래서 자신의 일 아니면 상관하지도 않고 설사 기억했다 하더라도 이내 잊어버리고 마는 괴벽(怪癖)을 가지게 된 사내. 그는 끝없는 긴장과 반전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길을 운명적으로 걸어 마 침내 위대한 <만황>의 역사를 이루고야 만다. 만황 자천릉의 행로를 함께 걸으며 <卍>의 의미를 탐색해 보기로 하자. 천중행, 천중화 공배. 서막 ① 인간은 이동할 수 있는 점에서 초목과 다르고, 사고할 수 있는 점에서 금수와 다르다. 해서 인간은 초목이나 금수보다도 존귀한 대우를 받아 왔고 만물의 영장으로서 삼라만상을 지배해 왔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분 명 인간이되 인간 이하의 초목이나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아 온 사 람들이 있었다. 이목구비가 온전하고 희로애락을 느낄 줄 알며 사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그 어느 인간들과도 한 치의 틀림이 없는 사람들이었건만 그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고 초목보다 짐승보다 더한 천대를 받아야만 했 다. 여기 그런 인간 이하의 비인간들만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 육천마을(六賤村). 슬픔도 아픔도 그저 사치일 뿐이라고 여기는, 그래서 인간이하의 감정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익숙한 채 살아가는 굴욕과 인종(忍從)의 사람들. 그들이 사는 마을의 수(數)는 여섯(六)이었다. <천재촌(千才村).> 광대(廣大)의 마을이었다. 한 닢 은자를 위해 핏기없는 얼굴을 가면 속에 감추고 몸과 웃음을 파는 사람들이었다. 한 치 굵기의 줄다리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천하를 떠돌아야 하는 사람 들이 있다. 바로 광대였다. 그들 어릿광대들이 모여사는 마을을 천재촌 (千才村)이라고 불렀다. 일천 가지 재주를 지닌 곡예사(曲藝師)들의 마을이기에 천기촌(千技村)이 라고도 불리워지는 그곳은 바로 사천땅 칠악산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 었는데 마을의 또다른 이름으로는 칠재악(七才嶽)이라고도 불리웠다. <술예벌(術藝閥).> 장인의 마을. 한 줌 진흙에서 천년명품을 탄생시키고 녹슨 철덩어리에서 억겁의 신기를 낳아 온 장인들.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에 담겨진 생명의 힘에 경탄하면서도 그 생명의 산 파들에 대해서는 단지 기계로밖에 취급할 줄을 모른다. 그러나 그 소외 와 고독 속의 행로를 숙명의 외길로 삼아 걸어 온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그 슬픈 천공(天工)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술예벌이었다. 신강의 오지인 미사리(美砂里)의 한 모퉁이에 자리한 미공벌(美工閥)을 가르키는 이름이 술예벌이기도 했다. <부나비도(不癩卑島).> 문둥이의 섬, 세상에 시한부의 인생을 사는 이름은 많다. 그러나 썩어 녹아 내리는 자 신의 육신을 바라보는 것으로써 나날의 수명을 헤아려야 하는 처절한 삶 은 오직 하나 뿐, 바로 불치의 천형인 나병이었다. 소위 문둥이라고 불리는 그 절망의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마지막 삶을 살아가는 곳이 바로 부나비도 였다.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곳의 사람들이 버린 희망의 빛처럼 늘 푸른 잔디가 섬 전부를 덮고 있어 녹도(綠島)라고도 불리운다는 사실만 이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시망상천(屍邙喪川).> 시신(屍身)의 내(川), 시망상천의 아이들은 무덤 안에서 태어난다. 맨 처음 입는 옷은 수의, 베 고 자는 베개는 검은 관,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은 시체. 이것이 시망상 천의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대할 수 있는 세계의 모든 것이었 다. 중원 어디서고 사람이 죽어 가고, 또 죽는 곳이라면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터전, 곧 시신의 마을이 위치한 곳은 천남의 시망 산(屍邙山) 언저리임을 아는 이들은 모두 알았다. <해란주(海蘭州).> 수인(囚人)의 마을이다. 역천대죄를 지은 자나 전쟁에 패한 이국(異國)의 황족(皇族), 왕재(王材), 재상(宰相)들이 유폐되는 유형의 땅이다. 다시 돌 아올 수 없는 삶의 정류장이기에 불귀(不歸)의 역(驛)이라고도 부른다. 단지 바다가 끝나는 아득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리라 추측할 뿐 누구도 그 소재를 알지 못하는 곳이 바로 해란주였다. <매당파(魅堂坡).> 영매(靈媒)의 언덕. 유령의 마을이라고도 칭하는 무당의 마을이 바로 그 곳이다. 수많은 괴이망측한 풍습과 주술들이 천 년을 두고 전해져 내려 오는 금단의 이방지대. 신과 인간을 중개한다는 연금술사들이 소리죽여 신비의 체험을 쌓고 있 다는, 하늘아래 가장 괴이한 마을이 매당파였다. - 천재촌. - 술예벌. - 부나비도. - 시망상천. - 해란주. - 매당파. 이들을 가리켜 바로 육천마을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들 중에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주를 갖고 태어난 사람들도 있다. 한 때는 왕후장상의 존귀한 신분으로 천하에 군림했던 사람들도 있고 천 고에 드문 재질을 천형의 질병 속에 감추어야만 했던 사람들도 있다. 허나 이 모든 것은 지나간 꿈이요, 잊혀져야 할 기억에 불과할 뿐 이들 육천마을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비인간의 취급을 받으며 또 그것을 숙 명으로 알고 살아야만 했다. 언제부터? 왜? 무엇 때문에?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는 천대받는 그들 자신조차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벌레처럼, 지렁이처럼, 단지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중 몇인가 자신의 신분에 의심을 품고 조그마한 꿈 을 지니기 시작하니 천하는 곧 거대한 난세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니....... 제1장 양지와 음지 ① 강남의 남경(南京)은 축복받은 땅이다. 대중원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며 건국된 신황조(新皇朝)인 대명제국(大明帝國)의 황도(皇都)가 세워진 영 광의 땅이 바로 이 남경인 것이다. 허나 오늘 건국 이십 사 년을 맞는 이 해 겨울의 남경은 더 이상 축복의 대지가 아니었다. 대륙의 권위와 긍지의 상징이던 자금성(紫禁城)의 성곽은 시커멓게 그을 린 채 무질서하게 허물어져 있고 빛나던 사통팔달(四通八達)의 청석대로 (靑石大路)는 군데군데 파헤쳐진 채 부러진 병장기와 참혹한 시신들로 뒤덮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아직도 검붉은 화염을 뿜어내 고 있는 고루거각들, 그리고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이 모든 광경은 마치 병화(兵禍)가 휩쓸고 간 전장(戰場)의 폐허를 대하 는 듯 황폐하기 이를 데 없지 않은가. 도대체 어떤 대변사가 있었기에 중원의 성역인 자금성이 이토록 처참한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단 말인가? 정녕 무서운 일... 허나 늦겨울의 차가운 저녁노을은 여전히 진홍의 광휘 를 뿌려내고, 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석양은 무심히 침묵한 채 변함 없는 정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저녁 노을, 그 진홍의 긴 꼬리가 끝나는 곳에 반쯤은 허물어져 버린 듯 한 자금성이 석양을 받아 커다란 음영을 드리우며 상처 입은 거인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 내성의 한 모퉁이에 숨은 듯이 자리한 전각(殿閣) 하 나가 있었다. <만화소축(萬花小築).> 아마도 황궁여인의 규방임에 분명하리라. 몹시도 화사하고 미려하게 꾸 며진 방이었다. 천정과 사방의 벽면은 화려한 꽃들이 수없이 그려진 청 화벽지로 치장되어 있다. 바닥에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보 라빛 비단융단이 깔려 있다. 한쪽 벽면에는 커다란 벽동경(壁銅鏡)이 걸려 있고 그 중앙에 놓여진 탁 자 위에는 매화와 난이 흐드러지게 어우러진 꽃꽂이 화병 하나가 주인의 품격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고아한 운치를 흘려낸다. 때마침 노을 빛이 은은히 창문을 통해 비쳐들자 실내는 말할 수 없이 화 사하고 포근한 기운에 감겨들었다. 헌데 이때 커다란 화병 뒤쪽 어디쯤에선가 기이한 음향이 흘러나왔다. 탁자의 한쪽에는 언제부터인가 한 명의 여인이 이를 데 없이 고요한 모 습으로 수예에 열중해 있는 것이 아닌가. 대략 십팔 세에서 이십 세 쯤이나 되었을까? 바깥의 살풍경과는 일체의 상관도 없다는 듯 담담히 옥수(玉手)에 낀 골 무와 바늘을 움직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실로 지독하리만큼 아름다웠 다. 황족만이 입을 수 있는 자색 궁장에 폭포수 같은 흑발이 흘러내린 자태 는 그대로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한 황실여인의 전형이었다. 그린 듯한 새 하얀 피부에 보일 듯 말 듯 파인 볼우물이 보는 이의 영혼마저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 듯 했다. 환상계의 선녀가 내려와 수예를 하고 있는 것인가? 안에 놓인 수틀에는 벌써 한 마리 붉은 용이 또아리를 틀며 완성되어 가 고 있었다. 문득 여인은 바늘을 들어보며 곱게 아미를 찌푸렸다. "이상해. 이 만화세침(萬花細針)은 운남 전금세문가(全金細文家)의 특산 물로서 평생을 쓰고도 대를 물려줄 수 있는 규중보배인데 벌써 날이 무 뎌지다니?" 여인은 실밥을 끊으며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것으로 바꿔 볼까?" 그녀는 침낭(針囊)에서 다른 바늘을 꺼내어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 녀가 움직이자 그녀의 귓볼에 이슬인 듯 맺혀 있던 청포도빛 귀걸이 한 쌍이 가볍게 부딪치며 청아한 음향을 울려냈다. 그러고 보니 이 여인에게는 장신구가 유난히 많았다. 대개의 장신구라는 것은 원래가 자격이 없는 여인의 몸에 쓰여지면 미를 돋보이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추악하게 보이게 하는 기초장식물 (?)이 될 뿐이다. 허나 이 여인은 달랐다. 아니 그저 다른 정도가 아니라 귀걸이며 팔찌며 치렁하게 매달린 온갖의 패옥들은 숫제 그녀에게 여인에게서 볼 수 없는 범상하지 않은 숭고미를 부여하는 특이한 소도구가 되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 화폭에 그려 놓고픈 충동을 일게 하는 매혹의 여인이었다. 단 지 흠이라면 어깨가 조금은 넓어 보인다고나 할까? 이때 뚝! 하면서 돌연 바꾼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세침이 그녀의 손에서 그만 부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여인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굳어진 육신 위로 번져가기 시작하 는 것은 차가운 냉기였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어붙은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분노한 장군의 맹안 (猛眼)을 대하듯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십 오 년 전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이래 밤낮없이 사용해 온 만화세침이 었지만 언제나 새롭게 갈아 놓은 듯 날이 서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 바 늘 끝이 무디어지고 부러지기까지 하다니." 격동에 잠긴 음성이었다. 기묘한 일이 아닌가? 바늘 하나 부러지는 것은 누구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이 없을 만큼 예사로운 일! 헌데 지금 이 여인은 그 정도의 일을 가지고 전신을 딱딱히 굳히며 음성 마저 떨려나올 정도로 경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여인은 놀람을 수습하며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신이 창조한 인간도 허점 투성이의 존재이거늘 항차 그 인간이 만들어 낸 바늘쯤이야." 여인은 다시 침낭에서 새 바늘을 뽑아 들었다. 헌데 뚝! 하면서 이제 막 끄집어내던 바늘이 떨어지며 또다시 두동강으 로 부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또!" 여인은 짧게 경악성을 터뜨리며 전신을 세차게 떨었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여인은 묵묵히 바닥의 반 동강난 바늘을 한참 동안이나 직시하고 있었 다. 말이 없다는 것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증표 가 아닌가. 세 번째 바늘을 꺼내는 여인의 옥수는 눈에 띄게 떨림을 일으키고 있었 다. 다시 바느질은 계속되고 일 각쯤이 흘렀을 때 어느새 수틀 속의 적룡은 거의 완성된 형체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 긴장된 공기는 조금도 누그러들 줄을 모른 채 팽팽히 실내를 감돌고 있 었다. 마침내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순간이 왔다. 긴장을 감춘 여인의 손끝이 마악 마지막 한 땀을 움직여 가려는 찰나, 뚝! 하면서 재차 세 번째 바늘이 허리에서부터 이유없이 두동강으로 부 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흠!' 여인의 손이 일순 그대로 굳어졌다. 마치 움직이던 자세에서 그대로 석 상이 되어 버린 듯하였다. 그녀는 망연한 얼굴로 부러진 바늘을 움켜쥔 채 얼어붙어 있었다. 충격인지 격정인지 모를 침묵이 억겁과도 같은 긴 장을 담고 내리깔리고 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돌연 여인의 고운 볼을 타고 한 방울 이슬이 흘러내렸다. 헌데 새하얀 피부에 대비되는 그 이슬의 빛깔은 놀랍게도 섬뜩하도록 짙 은 검붉은 적색이 아닌가! 눈물대신 여인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동시에 괴이하게도 여인의 입가에 피어오르는 것은 혈루보다도 더욱 섬뜩한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천천히 번지던 미소가 입술을 거쳐 입가로, 그리고 마침내 볼우물까지 퍼져가는 순간이었다. "후후... 후훗." 미소가 웃음으로 변했다. "아하하하!" 웃음은 놀랍게도 삽시간에 앙천광소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전장에 울리는 전승장군의 통쾌한 웃음인 양 쩌렁하게 실내를 뒤흔드는 웃음이 었다. 실로 섬뜩하고 기괴한 일이었다. 어찌 여인의 입에서 저리도 웅혼하고 처절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올 수 있단 말인가? 헌데 마악 앙천광소가 극한까지 고조되는 순간이었다. 꽉! 하는 소리와 함께 돌연 그녀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부러진 바늘 로 자신의 다른 쪽 팔목을 무자비하게 찍어 가는 것이 아닌가! 주르륵! 순식간에 붉은 선혈이 새하얀 팔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동시에 앙천광소 는 칼로 자른 듯이 멈춰졌다. "훗! 아직도 나는 부족하다. 내 스스로의 감정조차 제어하지 못하고 이토 록 크게 웃다니." 여인은 격정을 억누르는 듯 떨리는 음성을 내뱉으며 빠르게 사면을 둘러 보았다. 앙천광소는 어느새 자신을 비웃는 듯한 씁쓸한 고소로 바뀌어 있었다. "더욱이 나의 전생(全生)이 걸린 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런 중대한 실수 를 범하다니. 자칫하면 이십 삼 년, 그 쓰라린 인고의 세월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 뻔하지 않았는가!" 여인의 얼굴에는 극심한 자책과 함께 왠지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한 불안 과 초조가 어둡게 뒤엉키며 떠올랐다 사라지고 있었다. 여인은 묵묵히 고개를 젓더니 수틀을 끌어당겨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사악! 부러진 바늘 끝에서 최후의 한 땀이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고 마침내 태어 난 한 마리 적룡을 여인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시선으로 묵묵히 바라 보다가 이윽고 한쪽으로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전면에 있는 거대한 동경(銅鏡)을 바라보며 섬섬옥수로 치렁치렁한 흑발을 한차례 파도처럼 쓸어 내리더니 입을 열었다. "거울 속의 이 사람. 나이 스물 셋의 서황자(庶皇子), 황위계승서열 십 사 위라는 허울에 묶여 있는 사내, 만화왕자(萬花王子) 주희빈(朱喜斌)." 마치 남에게 책을 읽어주듯, 아니면 자작의 시를 홀로 건조하게 뇌까리 듯 여인의 음성은 지독히도 담담하고 단조로웠다. "나이 삼세에 황궁서고의 모든 서책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고 나이 사세 에 황궁무고(皇宮武庫)의 모든 절예를 해득한 문일지천(聞一知千)의 두뇌 를 가진 자. 자신이 생각해도 두려우리만큼 큰 그릇을 지녔고 스스로 보 아도 질투가 나는 완벽한 얼굴을 소유한 사내." 문득 거울 속에 비쳐지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에 처절한 미소가 떠올랐 다. 심금을 뒤흔드는 마력의 미소였다. "훗! 모든 사람들은 이 사내를 부러워한다. 황족이라는 고귀한 신분, 탁 월한 두뇌, 여인보다 아름다운 용모, 천하에 이보다 더 행복한 사내가 어 디에 있을 것인가 하고." 기이한 독백이 이어지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쳐진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는 한 가닥 섬뜩한 미소가 요 사한 교태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음성은 소름끼치도록 무심하기만 하였 다. 헌데 들었는가?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거울 속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만화왕자 주희빈이라고! 그렇다면 그녀는 황자(皇子), 다시 말해 여인이 아닌 사내였단 말인가? 실로 해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황자가 어찌 여인의 차림을 하고 여인들의 전유물인 수예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모른다! 늘 푸르고 거대한 상록수 밑에도 빛바랜 잡초 는 자라고 양지바른 언덕 밑에도 그늘은 비치고 있음을!" 그녀는 계속 중얼거렸다. "그대들은 아는가? 신분이 높기에, 머리가 좋기에, 그릇이 크기에, 잘 생 겼기에 뭇 여인들이나 애용하는 장신구를 달고 다니며 심지어는 바느질 을 하면서까지 여인의 흉내를 내야만 했던 한 불행한 황족의 번뇌를!" 궁장여인, 아니 만화왕자 주희빈의 입가에 사이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음성이 담고 있는 의미가 처절한 만큼 그 음성의 단조롭고 무심한 고저 는 듣는 이로 하여금 더욱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그날이 언제였던가? 그래 십 사 년 전 아홉 살을 맞던 해의 봄날이었으 리라. 후후, 그때 나는 내가 왜 황자의 신분이면서 왜 황위에 오를 수 없 는 것인지를 생각하느라 밤낮을 보냈다." 그는 다시 한 번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영락없는 절세가인의 교태였다. "그리고 나흘 째 되던 날 나는 마침내 알 수 있었다. 황자라 해도 모두 같은 것은 아니며 적자(嫡子)가 아닌 서황자(庶皇子)가 황위에 등극하기 위해서는 천재지변이나 대변란이 일어나 적황자들이 모조리 죽어야 한다 는 사실을!" 그의 눈에 우울한 빛이 스쳤다. "더욱이 황위 계승 서열이 고작 십 사 위에 지나지 않는 나의 입장에서 는 적황자 다섯, 서황자 여덟, 도합 열 셋이 한꺼번에 죽기 전에는 불가 능하므로 그것은 마치 신기루의 꿈과 같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주희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의 걸음은 창문 쪽을 향해 느리 게 옮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채 일 각이 지나기도 전 주위를 돌아보던 나는 더욱 무서운 사 실을 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살기띈 칼날(刀) 하나가 어둠 속 에서 호시탐탐 나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을! 아무리 계승서열 십 사 위 에 불과한 아홉 살 박이 꼬마인 나였지만 어디서고 빛을 발하는 나의 재 능은 타인에게 경계와 모략의 대상이 되기에 가장 좋은 조건들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살기라고 해야 할까? 주희빈의 전신에 일순 항거할 수 없는 차디찬 예기 (銳氣)가 섬칫하게 피어올랐다. 허나 그 기세는 이내 자조에 가까운 허탈한 웃음으로 바뀌어지며 음성은 더욱 담담한 물처럼 흘러나왔다. "후후, 그 순간 지독히도 영리한 나는 깨달았지."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바다보다 넓은 마음과 하늘보다 높은 지혜를 지니고 있다 해도 비명횡사 한다면 한 마리 하찮은 벌레의 운명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천하의 그 어떤 미녀보다도 고혹적인 미소가 다시 그의 입가를 스쳐갔 다. "해서 나는 결심했다. 아무리 짓밟히고 억눌려도 반항도 않고 움직이지 도 않는 잡초처럼, 차라리 식물인간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악착같이 살 아야 한다고 말이다." 섬뜩하도록 처절한 낱말들이었지만 일체의 감정이나 분노가 느껴지지 않 는 바다처럼 고요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나는 맹세했다. 부러지기는 커녕 무디어지지도 않는 이 만하세 침이 세 개가 부러지는 날, 그날 나는 바늘을 쥐었던 손에 검을 들고 일 어서리라고! 하여 나의 가슴 깊이 처절히도 키워 온 그 꿈을 이룩하리라 고!" 분명히 고요한 음성이었건만 듣는 이에게는 시퍼런 독기를 뿜으며 내뱉 는 절규보다도 더욱 사무치는 무게로 다가들고 있었다. 주희빈은 잠시 숨을 멈추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수틀을 들고 여인처럼 행세하며 타인의 이목 을 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되.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나의 웅 지를 억누르며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나 자신조차 잊을 수 있도록 철저히 자신을 말살시키기란 정녕 힘들었었다." 그의 시선은 아직도 손에 들려 있는 부러진 바늘에 못 박힌 듯 꽂혀졌 다. "내 가슴 속에 야망의 불길이 번져오르고 내 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내가 꿈틀꿈틀 고개를 쳐들 때마다 나는 이 바늘로 스스로 팔목을 찍었 다!"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집념이 아닌가. 야망을 위해 스스로를 여인으로 세뇌시키고, 자신의 내면에서 사내이기 를, 재능있는 황자이기를 강요할 때마다 스스로의 팔목을 바늘로 찌르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사내가 이제 서서히 자기최면의 가면을 벗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