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황(卍皇) 1 - 46편 (46/50)
"컥!" 잇달아 흑나비의 붕대를 미처 피하지 못한 자들의 비명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가고 있었다. "청아와 홍아를 봐서 그대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대가 먼저 공격 을 해왔으니 어쩔 수가 없지." 순식간에 비사벌의 머리 위까지 쏘아져 간 자천릉의 손에서 백마도극이 어둠을 가르며 그대로 비사벌의 정수리를 내리찍어 가고 있었다. "노부의 손녀딸들이 귀엽다고 칭찬하던 꼬마아이가 알고 보니 자주방장 이셨군. 요리솜씨가 아까우니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께라도 한 번 진상해 보도록 해라!" 비사벌이 차가운 일갈을 뱉으며 슬쩍 몸을 들어 백마도극의 예봉을 피함 과 동시에 그의 왼손에서 한 자루 거대한 판관필이 쭈욱 솟구쳐 자천릉 의 명치를 찔러가고 있었다. 허나 이때 피했다고 느꼈던 백마도극이 비사벌의 탐스런 자염을 싹둑 끊 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훗! 이번에는 목이다!" 백마도극이 순식간에 비사벌의 목을 자를 듯이 무지개를 그렸다. "목표한 지점을 예고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 군!" 비사벌이 판관필로 백마도극을 밀쳐내며 한 옆으로 신형을 퉁기고 있었 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자천릉의 입에서 홍익청차가 한 대의 적살비침을 뿜었다. "크흑!" 잇달아 수십 수천 개의 새빨간 비침들이 쏟아져 비사벌의 목에 집중적으 로 꽂혀지고 비사벌은 짧은 비명을 토하며 그 자리에 뻣뻣이 굳어지고 있었다. "까마귀할아범의 살수백율에는 이런 구절이 쓰여 있지. 살수는 결코 적 에게 자신이 목표한 지점을 눈치채게 해선 안된다고. 나 또한 그대를 죽 이려는 살수로서 목표한 지점을 공짜로 가르쳐 줄 리는 없음을 알아두라 고 말하고 싶군." 자천릉이 비사벌의 선 채로 굳은 육신을 건드리며 내려서자 비사벌의 동 체가 썩은 고목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때 자천릉의 등 뒤에서 세 줄기 처절한 비명이 울림을 끝으로 황토계 곡은 다시 처음의 적막을 되찾았다. "끝났소." 짤막한 한 마디와 함께 어느새 흑나비가 붕대를 다시 둘러 감은 채 자천 릉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정확히 세 시간, 그 짧은 시간동안 사십 구 인의 백마와 십왕 중의 일 인이 또다시 죽어 간 것이다. "어쩐지 홍아와 청아에게 좀 미안해지는군. 하지만 이해해 주겠지." 자천릉은 가볍게 미소하며 사경을 넘긴 황토계곡의 어둠 속으로 다시 천 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28장 백발의 제황 ① 백마와 장장 세시진에 걸친 대혈전이 끝나고 있는 그 시각, 사황구십구 계를 막 벗어난 지점에서는 훈훈한 모닥불이 피워지고 있었다. 타다닥! 밤이 깊은 탓일까? 모닥불은 유난히 밝은 광채를 뿌리며 사위를 적셔갔 다. 끝없이 펼쳐진 황토는 겨울의 매서운 한기에 꽁꽁 얼어붙어 있다. 살 아 있는 것도 없다. 다만 모닥불만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어둠을 사를 뿐 이었다. 아니 또 하나 살아 있는 생명체가 있었다. 사람이다. 잔뜩 웅크 린 채 불쏘시개를 연신 모닥불 속으로 집어넣고 있는 사내였다. 불꽃을 노려보는 시선은 선이 굵고 강하다는 느낌을 준다. 설사 천지가 개벽을 한다 해도 이 사내만큼은 살아남을 것 같은 기분이 다. 단지 사내가 강하다고 해서 느껴지는 것이 아닌 생의 힘. 그것은 이 제 막 전장에서 돌아온 무사와도 같은 그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지치고 여기저기 상흔이 징그럽게 나 있는 패자가 아니라 당당히 승리한 승자의 여유가 사내의 전신에서 폭죽처럼 터져오르는 것이다. 침묵하는 일도 납덩이를 거꾸로 매달아 놓았을 때처럼 무겁다. 불꽃은 정말 끈질긴 생명력으로 타오르고 사내의 선이 굵은 얼굴에 부딪쳐 무심 한 잔상을 그려낸다. 막 하나의 불쏘시개를 다시 모닥불로 넣으려던 사내의 손이 멈칫했다. 어디선가 음침한 음성이 들려왔던 것이다. "아직도 살아남은 자가 있었군." 모닥불이 세차게 흔들렸다. 허나 사내는 음성이 들린 곳으로 일별도 주 지 않았다. 여전히 불꽃만을 노려본 채 그의 시선은 나무토막처럼 굳어 지기 시작했다. 음성은 하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흠. 그만두게 흑나비. 뜻밖이군. 저 사내까지 이곳에 와 있을 줄은." 두 개의 음성은 바로 자천릉과 흑나비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리고 이 사내, 청왕도 용붕이라면 기억하겠는가? 정확히 사 년 전 곤 륜칠층봉소석탑에 자천릉과 함께 입굴 했던 용등택의 손자, 그가 바로 이 황량한 벌판에 모닥불을 피워 놓은 채 자천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다. 이때 용붕은 모닥불 위에 다시 무엇인가를 올려 놓았다. 다기(茶器)였다. 비록 아무런 광택도 현란한 문양도 없는 볼품없는 다기 였으나 이 추운 밤에는 그것이 문제랴. "어서 오시게. 추울 텐데 우선 차라도 한 잔하며 몸을 좀 녹이시게." 용붕은 먼저 자천릉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시선과 시선이 허공의 어둠 속에서 부딪히고 모닥불은 더욱 기세 좋게 타올랐다. 자천릉은 말없이 용붕이 내미는 찻잔을 받아 한 모금 후루룩 삼켰다. 싸아한 용란작설차의 훈기가 향긋한 냄새와 함께 전신으로 휘몰 아쳤다. 한 동안 모두는 말이 없었다.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용붕이었다. "자형. 본인이 자형을 기다린 이유를 잘 알 것이네." "이해하네." 용란작설차의 맛이 갑자기 텁텁해졌다. 흑나비의 입에서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렇군. 겨우 오목(五目)쯤 두면서 기성이라는 거창한 명호를 갖고 거들 먹거리다가 당한 바로 그 미치광이와 연관이 있는 자로군." 순간 용봉의 눈 가에 새파란 분노의 광망이 이글거렸다. "그대, 망자를 모욕하지 마라!" "크ㅋ, 모욕은 오히려 그대가 나에게 주고 있지. 나는 단지 용등택에게 내기에 이긴 대가를 받았을 뿐이거늘, 헌데 치졸하게 복수를 하겠다고 기다리고 있다니." 용붕의 얼굴에 불꽃이 만들어 낸 음울한 그림자가 뒤엉켰다. "치졸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허나 나는 치졸해 질 수밖에 없군." 용붕의 시선이 어둠 속으로 향했다. "그분은 고아인 나를 자신의 손으로 거두어 이만큼 길러 주셨으니까." 그의 흔들리는 시선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자천릉을 향해 돌려졌다. "자형은 본인의 마음을 잘 알 것이네." 용붕은 애써 웃으려 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얼굴 표정을 기이하게 일그러 뜨리고 있었다. 울음보다 차라리 더 슬픈 표정이었다. 자천릉은 일순 용 붕을 마주보며 잔잔한 미소를 보냈다. "하지만 용형은 너무 흔들리고 있군." 용붕이 흠칫하는 것을 보며 자천릉이 말을 이었다. "지금 차를 끓이는 것을 보면 알지. 차의 향기가 너무 진하고 불꽃은 강 해서 오히려 차의 맛을 감소시키고 있음이니 이는 곧 용형이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순간 용붕의 웃음이 비로소 웃음다워졌다. "허헛, 그건 자형처럼 다도에 조예가 깊지 않은 탓이네. 기실 지금껏 차 를 다려 마시면서 그런 생각을 해봤지." "...?" "자형에게 다도를 다시 배워야겠다고. 허나 이제는 그럴 기회가 없어졌 다는 느낌이 드네." 용붕의 어조는 결연했다. 차를 끓일 때처럼 떨림도 흑나비가 용등택을 비웃을 때 보였던 분노도 어느 샌가 씻은 듯이 없어졌다. 자천릉은 누구 보다도 용붕의 마음을 잘 알았다. '용붕은 이미 삶을 포기했다. 깨끗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그를 욕 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로 용붕을 직시했다. "기회는 있네, 용형!" 용붕이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다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차를 내는 수질과 불꽃의 세기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 물론 보통의 지하수보다 석간수가... 그리고." 자천릉의 음성은 잔잔하게 이어졌다. "일단 물을 펄펄 끓인 다음에는 다른 그릇으로 옮겨 약간 식힌 다음 적 당한 온도가 되었을 때 찻물로 사용하는 것이 좋네." 두 사람의 분위기는 마지막이란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엄숙했다. 잠 시 후면 벌어질 참담한 비극도 이 순간은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허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차를 끓이는 사람의 마음이지. 온 마 음을 살라 끓인 차는 명품이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돼지에게나 주어야 할 것이네." 잔잔한 미소 속에 어둠을 살라내는 모닥불의 생명력 속에 마침내 기나긴 다도 강의도 끝이 났다. 용붕은 두 손을 끌어 모아 깊숙이 포권지례를 취했다. "잘 배웠네. 본인은 이제 갈 길이 바빠서." "그렇군. 벌써 여명이 움터 오는군." 자천릉은 천천히 신형을 일으켜 황야를 등지고 오연히 버텨섰다. 맞은 편에서 용붕이 모닥불을 정면으로 받으며 천왕도를 비스듬히 치켜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멈췄다. 대지를 얼리는 한풍도 두 사람의 곁에는 한 치도 접 근하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자천릉의 손에는 어느새 설상루가 쥐어져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단 일 초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삶과 죽음, 야망과 복수, 증오와 배덕, 이 모든 것이 쥐면 한 줌도 되지 않을 허무로 변하리라는 것을 두 사람 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번쩍! 먼저 용붕의 천왕도가 자천릉 쪽으로 기쾌하게 미끄러져 들며 싸늘한 섬 광을 불벼락처럼 토해 냈다. 차갑게 굳어버린 공간 속에서 자천릉은 설상루를 수직으로 마주쳐 갔다. 패애액! 쾌(快), 너무도 빨랐다. 아니 그렇게 느낀 순간 이미 두 사람은 어느 샌 가 서로 자리를 바꿔 대치하고 있었다. 용붕의 천왕도가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느릿느릿 처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동시에 용붕의 심장어림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자천릉은 굳어진 시선으로 앞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용붕의 천왕도가 가 르고 지나간 흔적은 두 치쯤의 옷섬을 베어내며 거기에 남아 있었다. 그때 느릿느릿 지면을 향해 무릎을 꿇기 시작하는 용붕을 보며 흑나비의 시선이 눅눅해졌다. "ㅋ, 치졸한 자는 아니었군. 오목 두는 기성보다는 훨씬 마음이 넓은 자 야." 숨길 수 없는 아픔이 앙금처럼 배어 있는 어조였다. 용붕도 그 말을 들 었음인가? "그대... 또 망자를 욕하고 있군. 나쁜 버릇일세." "ㅋ,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죄가 되는가?" "쯧쯧, 지옥에 가면 거꾸로 라네, 누구도 자네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은 없 지. 염라대왕을 빼고는 말야." "좋아, 그 말은 맘에 들었네. 그보다도 자네는 왜 나를 택하지 않고 저 사람을 택했나?" "흐흐, 잘 알기 때문이지. 조금은 봐줄 줄 알았거든... 그런데 형편없지 뭔 가, 자네도 오래 살고 싶으면 저런 친구는 안 사귀는 것이 좋네." "ㅋㅋ! 명심하지." 그들은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엇이 용붕과 흑나비 로 하여금 이토록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게 하는가? 그것은 불가사의 다. 그리고 용붕이 자신의 조부 용등택을 죽인 흑나비를 상대하지 않고 굳이 자천릉을 택했던 이유는 결코 조금 봐줄 줄 알아서였기 때문은 아 니었다. 용붕은 마지막까지 무인으로 태어나게 해 준 용등택에게 자신의 슬픈 고 집을 보여주고 싶었음에 틀림없었다. - 흐흐, 할아버지의 소원은 하나밖에 없었지 않습니까? 강해져라, 최강인 들만 상대해서 싸워라! 비록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첩경일지라도. 용붕은 연신 밝은 웃음을 띄며 서서히 수축되어가는 동공을 자천릉에게 던졌다. "자형, 지금 이 순간에 왜 쌍도끼를 등에 메고 자신의 몸보다 더 커다란 보따리마저 짊어진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네." 그것은 불과 사 년 전이었다. 자천릉의 눈가에도 실날같은 파문이 일었 다. "그대가 그 소년을 무척 좋아한 모양이군." "그렇지. 나는 그 친구와 더불어 눈 덮인 곤륜산맥을 마음껏 달리며 수 련을 하고 함께 차를 마시고 싶었다네." 불과 사 년 전인데, 곤륜칠층봉소석탑으로 들어갈 때 그 소년을 자신의 몸보다도 더 보호해 주던 때는 불과 사 년밖에 흐르지 않았는데, 용붕의 눈은 아무리 소년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척 괜찮은 소년이었는데, 조금 아집이 강하고, 괴팍한 성미가 흠이긴 하지만... 그의 강한 개성이 내 마음을 끌었다네." "그 소년 또한 무도의 왕도만을 고집스레 걷는 청년을 무척이나 좋아했 지." 천천히 자천릉의 희고 깨끗한 손이 힘없이 처진 용봉의 손을 감아 쥐었 다. 허나 소년이 좋아하던 청년은 이미 의식의 한 가닥 끈마저 잃어버리 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자신이 가장 자랑하는 요리를 그 청년에게 꼭 대접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흐흐, 그, 그 요리는 지옥에 가도 배가 고프지 않을 만큼 잘... 잘 먹을 것이네." 그리고 용붕의 한 번 닫혀진 입은 영원히 열릴 줄을 몰랐다. 흑나비는 연신 무엇이 불만인지 차가운 냉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ㅋㅋ, 멍청하기는 오목 두는 기성보다 더한 작자로군,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내게 말할 것이지. 술이라면 얼마든지 사줄 수 있었을 텐데." 그는 하나의 구덩이를 거의 완성시켰다. 바로 모닥불이 피어오르던 그 자리였다. 아직은 제법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② 수많은 석양 중에서 대곤륜산의 노을처럼 붉고 아름다운 노을은 없다. 더욱이 눈 덮인 겨울 대곤륜산의 노을이 주는 느낌이란 불가사의하리만 큼 아름답다. 오늘따라 더욱 짙고 붉어서 차라리 대곤륜산 전체가 통째로 활활 타오른 다고 해야 옳겠다. 그런 대곤륜산의 입구로 접어드는 산 중 소롯길은 지금 희디흰 눈으로 뒤덮여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눈인지 분간할 수 없는데, 문득 한 필의 말이 산중의 적요를 깨며 달려왔다. 마상에는 두 사람의 사내가 타고 있다. 그들은 자천릉과 흑나비였다. 전면만을 지그시 노려보던 자천릉의 눈 가에 번뜩 곤혹스런 빛이 떠올랐 다. "그대와는 벌써 한 달간이나 생활해 왔으나 정말 이해가 안가는 점이 한 둘이 아니야. 천하무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승마술을 모르다니. 나의 머리로써는 이제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어." 흑나비의 약간 여윈 듯한 어깨가 풀썩 흔들렸다. "나 역시 그대를 이해할 수 없기에 같이 다니는 거요. 굳이 잘 알고 있 다면 술을 잘 마시고 싸움만을 즐기는 것밖에." "그리고?" "덧붙여서 여인을 전혀 상종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후후, 그렇다면 그대가 나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 도움을 주고자 사내로 서 한 가지만 대답해 주겠다." 자천릉은 짐짓 엄숙하게 표정을 굳혔다. "사내인 내가 여인을 모르는 것은 능력이 없기 때문이지 절대 고자는 아 니야. 차후 그런 오해는 말도록." 흑나비는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목구멍 안으로 꺾어 넣느라 얼굴이 달아 오를 지경이었다. "크ㅋ, 걱정했소. 이제 다행히 그대가 사내라는 것 하나만은 이해하겠소. 나 또한 그대가 나를 이해하는데 참고할 수 있도록 부나비도에 관해 이 야기 해주겠소." 자천릉은 침묵으로 흑나비의 말을 재촉하고 있었다. 흑나비는 생각을 정 리하는 듯 잠시 숨을 돌린 다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부나비도에는 말(馬)이 없소. 있다면 말을 전혀 탈 필요가 없을 전신이 썩어 가는 문둥이 뿐이니까." "이해가 되네. 말 한 필을 키우려면 수십 명의 목숨이 필요할 테니까." "ㅋ, 맞소. 내일 죽어 갈 사람들, 자신의 목숨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시 간을 예측하는 사람들에게 승마란 한 잎의 풀포기보다 못하오." 자천릉이 고개를 끄덕였다. "풀은 배가 고프면 뜯어먹을 수라도 있을 테지만, 말고기는 너무도 질겨 체해서 더욱 빨리 죽기 때문이오." "훗! 참고가 되겠군." 허나 자천릉의 눈가에 어린 의혹의 빛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참고가 될 뿐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도 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야. 그토록 내일의 삶에 기약이 없는 그대가 왜 나를 따라 중원에 나왔는지, 그 자 체가 난제이기 때문에.' 그때 뒤에 앉아 있는 흑나비의 어깨가 다시 풀썩 흔들렸다. "크크ㅋ, 내가 왜 그대를 따라 중원에 나왔는지, 그것부터가 이해가 안된 다는 눈빛이구료." 자천릉은 재빨리 곤혹스런 빛을 지워버렸다. "훗, 차후 내 뒤를 계속 따라다니고 싶으면 그 남의 속을 들여다보는 나 쁜 취미는 버려야 좋을 것일세." "크ㅋ, 그렇게 오래도록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소. 나는 단지 살인을 함으로써 내가 죽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이 편할까를 관찰하기 위해서 온 것이니까." 자천릉은 그 말에 실린 아픔의 무게를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나에게도 도움이 되겠군." 산길은 점점 더 가파르고 있었다. 가끔 저 멀리서 눈사태가 굉음을 토하 며 쓰러질 때마다 대곤륜산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새하얗게 피어오른 눈보라는 한 겹 우막을 친 듯 시야를 뿌옇게 가리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발길을 눈사태가 묶어 놓을 수는 없었다. "장관이로군. 곤륜의 눈사태가 멋지다는 말은 들었지만 말이야." "또 그렇지 않느냐고 묻는 말은 생략하는구료." "빌어먹을, 알아들었으면 됐지. 경고하겠는데 앞으로는 그 되짚어 묻는 따위도 동행조건에 충분한 고려의 대상이 되네." 이때 굉음을 토하는 눈사태 속을 뚫고 한 가닥 우렁찬 음성이 두 사람의 고막을 때렸다. "어서 오너라, 천릉!" 자천릉과 흑나비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맺혀들었다. '이 음성은 천리전음회회전성이다. 적어도 음성의 주인은 십 리 밖에 있 다!' 전음술의 최극단계이며 이제껏 그 누구도 연성하지 못했다는 천리전음회 회전성이 아니고는 이토록 눈사태의 굉음을 뚫고 십 리 밖에서 음성이 정확하게 두 사람의 고막에 닿지 않으리라. 그때 예의 천리전음회회전성 이 다시 들려왔다. "천릉, 오랫동안 기다렸다. 잘 그리지도 못하는 산수화를 무려 이백여 장 이나 그리면서 말이다." 자천릉은 일순 기이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후후, 제법 한 가닥, 하는 척을 하는 자로군. 겨우 십 장밖에 있으면서 천리전음회회전성을 써 우리를 혼란케 하려는 것을 보니." 무슨 말인가? 그 순간 자천릉의 시선은 산중턱의 한 곳에 꽂혀 있었다. '후후, 저곳에 있었군. 헌데 참으로 기이한 노릇이 아닌가? 나를 천릉이 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이미 천하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거늘, 더욱이 천리전음회회전성을 쓸 정도의 고수는 단연코 없는데?' 자천릉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에는 능선이 있었고 그 능선에는한 사람이 고목의 아래에서 화폭을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화폭에는 겨울 깊은 산의 풍경이 익숙한 솜씨로 담겨지고 있었다. 헌데 그 옆에는 진정 자천릉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는지 희끗희끗 여백이 남아 있는 미완성의 겨울산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는 평범한 모습에 황포를 걸친 오순 쯤의 사내였다. 반듯하긴 했으나 특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헌데 그의 머리카락은 놀랍게도 대곤륜산에 쌓인 백설보다 더 흰 새하얀 백발이 아닌가. 자천릉과 흑나비의 시선이 짙은 의혹으로 물들 때 문득 황포인의 입에서 나직하나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너희들은 물러가 있거라. 내가 그토록 만나기를 염원했던 조카를 만났 다." 순간 황포인과 자천릉의 주위에 그림자처럼 달라 붙어있던 괴영들이 빠 르게 사라져갔다. 강호의 초절정 고수라도 쉽게 시전할 수 없는 가공할 신법으로 사라지는 그림자들, 자천릉은 내심 짙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카? 요즈음은 너무 생전 처음 듣는 소리와 처음 보는 일이 많군. 나에 게 친척이 있었다니. 그것도 중원에.' 그러나 황포인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말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이 외숙부가 늘어 놓은 일이 많아 한 번도 너를 찾아보지 못했으니, 알아볼 리가 없겠지." "외삼촌, 그렇다면 어머님의 동생이시오?" "아니, 오라비가 된다." 자천릉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랬겠구료. 하지만 내가 모르는 외삼촌이라면 타인보다 더더욱 먼 사이로군." 황포인은 일순 할 말을 잊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자천릉의 말뜻은 너무 도 신랄하지 않은가? 아마도 범인이라면 솔직히 그의 뺨이라도 올려 붙 였으리라. 허나 황포인은 자천릉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만 흑나 비만이 긍정의 빛을 담아 황포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 사람의 외숙? 그래 닮았다. 저 드넓은 이마하며 콧날 등이, 헌데 묘 한 일이군.' 자천릉과 황포인 사이를 오가는 그의 시선은 바빴다. '이 사람은 아예 외면을 하는 것 같으니, ㅋ! 잊을뻔 했군. 저자의 너무 기쁜 버릇은 저런 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그때 황포인은 자천릉을 직시한 채 다시 말을 잇고 있었다.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외삼촌이 너를 찾은 것은 단 하나의 이 유 때문이다." "...?" "네가 지금 가고 있는 십팔만사천백와마루에는 나의 아들이 있다. 물론 네게는 외사촌이 되는 아이다. 그 아이는... 살려 두거라." 침묵으로 일관하던 자천릉의 무거운 입술이 열렸다. "나에게 외사촌이 된다고, 그 사람의 이름은 뭐요?" "만화예사 사희빈. 본명은 주희빈이라고 한다. 그리고 얼굴은...." 황포인의 말 끝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